군림천하 20권 소림기변(少林奇變)편 : 3화

랜덤 이미지

군림천하 20권 소림기변(少林奇變)편 : 3화


제 201장 고궤고사

소조림은 순간적으로 멈칫거리더니 이내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어요. 듣던 대로 진 장문인의 심기는 보통이 아니군요. 정말 감탄했어요.”

“나야말로 당신들의 빠르고 치밀한 솜씨에 감탄을 금치 못하겠소. 내가 석단을 찾고 있다는 걸 알고 이런 함정을 마련해놓았으니 나로서는 그저 어안이 벙벙할 뿐이오.”

“진 장문인은 운이 조금 나빴을 뿐이에요. 하필이면 진 장문인이 찾는 석단이 우리와 손이 닿아 있고, 또 하필이면 때맞추어 진 장문인을 제어할 절독이 마련되었으며, 무엇보다도 진 장문인에게 하독할 만한 적당한 인물이 있었으니 말이에요. 그중 한 가지라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면 우리는 진 장문인 앞에 나타나지 않았을 거예요.”

“확실히 그런 것 같군. 그런데 단순히 석단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런 수고를 한 것 같지는 않구려.”

“석단은 본 당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물이에요. 물론 그 외에도 한 가지 용무가 더 있긴 하지요.”

“그게 무엇이오?”

“진 장문인이 어제 공망춘에게서 건네받은 물건.”

진산월은 양손을 들어 보였다.

“천룡궤인가 하는 것 말이오? 아쉽게도 지금 나는 가지고 있지 않구려.”

그녀는 살짝 웃었다.

“그 때문에 우리가 아직 손을 쓰고 있지 않은 거예요. 천룡궤를 어디에 두었지요?”

“내가 말하리라고 생각하오?”

“사실 말하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진 장문인이 가지고 있지 않다면 종남파의 누군가에게 맡겼겠죠. 진 장문인이 천룡궤의 행방을 알려주지 않는다면 애꿎은 종남파의 고수들이 당하게 될 거예요.”

“그것 참 무서운 협박이로군.”

“협박이 아니라 현실을 말한 거예요.”

“천룡궤의 행방을 알려준다면 나를 순순히 돌려보내 줄 거요?”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건 어렵겠네요. 이번같이 진 장문인을 제거할 기회는 쉽게 오지 않을 테니 말이에요. 대신에 종남파의 다른 인물들에게는 손을 쓰지 않을 거라고 약속드리죠.”

진산월은 문득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오늘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곳을 살아나가지 못하겠구려.”

“안타깝지만 그게 사실이에요. 이제 천룡궤가 어디 있는지 말해 주세요.”

진산월은 그녀의 뒤를 턱으로 가리켰다.

“저자가 가지고 있소.”

소조림이 황급히 고개를 돌려보니 정자의 입구에 어느 사이엔가 한 사람이 우뚝 서 있었다. 그를 보자 소조림은 물론이고 석단과 다른 세 사람의 안색이 모두 굳어졌다.

한쪽 눈에 검은 안대를 하고 있는 그 사람은 다름 아닌 동중산이었다. 동중산은 중인들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쏠리자 얼굴 가득 야릇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거 다 늙고 볼품없는 나를 이토록 환대해줄 줄을 몰랐소. 낙 사숙에게 괜히 미안해지는군요.”

그때 다른 누군가가 낭랑한 웃음을 흘렸다.

“하하… 나는 이런 자들의 환심을 받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으니 동 사질은 안심하세요.”

한 사람이 정자의 난간에 비스듬히 기댄 채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수려한 그 미남자를 보자 누군가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옥면신권…”

낙일방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들이 나를 그렇게 부르기도 하더군.”

단지 두 사람만이 나타났을 뿐인데도 장내의 분위기는 완연히 달라져 버렸다. 소조림은 여전히 침착한 모습인데 비해 석단과 다른 세 사람은 낭패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소조림은 동중산과 낙일방을 한차례 훑어보더니 다시 진산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진산월과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는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보니 진 장문인은 우리가 올 것을 미리 짐작하고 있었군요.”

“강호는 워낙 귀계가 막측하는 곳이라 대비하지 않을 수 없었소.”

그녀는 잠시 고개를 숙인 채 무언가 상념에 잠긴 듯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쳐들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뜻밖에도 희미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진 장문인의 대비는 비록 훌륭했지만 아쉽게도 오늘의 일진을 되돌리지는 못하겠군요. 옥면신권과 비천호리가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우리 여섯 명을 모두 막을 수는 없어요. 그런데 진 장문인을 쓰러뜨리는 데는 우리 중 아무나 한 사람만 있으면 되거든요.”

“장인몽이 그렇게 무서운 독이오?”

그녀는 이미 여유를 되찾은 듯 예의 독특한 눈웃음을 쳤다.

“믿어도 좋아요. 진 장문인이 내공을 끌어올리는 순간 가슴에 격렬한 통증이 일어나며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게 될 거예요. 그 상태로 향 한 자루 탈 시간이 지나면…”

“내장이 모두 녹아 없어진다는 말이로군.”

“그래요.”

진산월의 얼굴은 여전히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그녀는 그저 자신의 말을 믿지 못한다고 생각했는지 고운 이마를 슬쩍 찌푸렸다.

“의삼나면 모험을 해봐도 좋아요. 어차피 결과는 마찬가지겠지만…”

“약의 효과를 의심하는 건 아니오. 다만 당신들에게 그럴 기회가 없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지.”

바로 그 순간, 느긋한 표정으로 난간에 몸을 기대고 있던 낙일방의 신형이 어느 사이에 허공을 훌쩍 날아 노중련과 형일손의 사이로 뛰어들고 있었다. 그는 사전에 어떤 움직임도 없었을 뿐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도 표정이 너무나 태연해서 강호 경험이 풍부한 노중련과 형일손조차도 낙일방의 주먹이 코앞으로 날아들 때까지 어떠한 낌새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런, 제길…”

형일손이 욕설을 내뱉으며 황급히 뒤로 물러난 반면에 노중련은 두 눈을 부릅뜬 채 쌍장을 질풍처럼 휘두르며 정면으로 맞서갔다. 황천비룡이라는 외호에 걸맞은 신속하고 과감한 동작이었다.

하나 그가 자신의 성명절기인 신뢰십이장을 채 절반도 펼치기 전에 낙일방의 주먹이 질풍 같은 기세로 다가왔다.

파파팡!

장영과 권풍이 어지럽게 뒤섞이는 가운데 두 사람은 순식간에 십여 초를 주고받았다. 그러다가 한 사람이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는 다름 아닌 노중련이었다. 노중련은 비 오듯 땀을 흘리며 옆구리를 움켜쥔 채 연신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전력을 기울였으나 낙일방의 번개 같은 주먹에 어느새 갈비뼈 두 개가 부러져버린 것이다.

하나 그 사이에 정신을 차린 형일손이 시뻘겋게 변한 양손을 휘두르며 낙일방의 두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의 형수공은 내가기공을 전문적으로 파괴하는 것으로, 그 살인적인 위력만큼이나 익히기가 어려워서 적어도 오 년 이상의 고련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정통으로 가격당하면 제아무리 단단한 몸뚱어리를 지녔다 하더라도 치명상을 면키 어려우며 단순히 스치기만 해도 살이 갈라지고 뼈가 으스러지는 가공할 위력의 무공이었다.

그와 동시에 공영춘도 언제 뽑아들었는지 철선을 휘두르며 동중산에게로 몸을 날렸고, 석단과 손검당은 진산월의 좌우측을 막아섰다. 그들의 동작은 사전에 치밀하게 구상한 듯 한 치의 빈틈도 보이지 않았다.

소조림은 하얀 이를 살짝 드러내며 웃었다.

“진 장문인의 사제는 소문보다 더욱 무섭군요. 하지만 진 장문인을 구하지는 못할 거예요.”

그녀는 천천히 양손을 들어올렸다. 소맷자락이 밑으로 흘러내리면서 드러난 그녀의 손은 그야말로 백옥을 깎아 만든 듯했다. 유달리 새하얀 옥수는 아름답다기보다는 무언지 모를 섬뜩함이 느껴졌다.

진산월은 그 옥수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다가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일전에 그와 같은 손에 대해 들은 기억이 나는군.”

소조림은 막 진산월을 향해 옥수를 휘두르려다 그의 말에 호기심이 이는지 손을 멈추고 물었다.

“무슨 말을 들었죠?”

“아주 오래된 이야기요. 옛날에 실연을 당한 여고수가 자신을 배반한 남자를 죽이기 위해 한 가지 무공을 만들었는데, 그 무공은 능히 맨손으로 신병이기를 상대할 수 있고 어떤 종류의 호신강기라도 종잇장처럼 뚫을 수 있다고 했소.”

소조림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녀를 배반한 남자는 한때 강호에서 가장 강력한 호신강기를 지녔다고 알려진 산서철혈문의 고수였는데, 그녀는 자신이 만든 무공으로 그 남자를 비롯한 산서철혈문의 수뇌급 고수 스물네 명을 모두 격살했다고 하오. 그 무공의 이름은 원래 소수마공이었으나, 그 위력이 너무 무시무시해서 사람들은 모두 소수겁이라고 불렀다고 했소.”

진산월이 말한 것은 소수마후의 전설이었다.

그녀가 활동한 것은 너무나 오래전 일이었고, 그 기간 또한 워낙 짧았기 때문에 그녀의 전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나 아직도 강호에서 평생을 몸담은 노강호들 사이에서는 간혹 그녀의 이야기가 거론되고는 했다.

그녀는 자신을 배반한 산서철혈문에 단신으로 쳐들어가서 불과 한 시진 만에 산서철혈문의 고수들을 추풍낙엽처럼 쓰러뜨려버렸다. 당시 강호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성세를 자랑하던 산서철혈문은 문주와 최고 고수들이 전멸하는 바람에 결국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고, 그녀의 명성은 전 강호를 뒤흔들었다.

하나 산서철혈문이 멸문한 이후 그녀의 모습 또한 사라져 그 뒤로 두 번 다시 강호에 나타나지 않았고, 그녀에 대한 전설 같은 이야기만이 강호인들의 입에 가끔씩 오르내릴 뿐이었다.

진산월은 지금 소조림이 끌어올린 공력이 바로 그 소수마공이 아닌가 하고 물은 것이다.

하나 소조림은 그 말에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냉랭한 웃음을 흘렸다.

“재미있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지금은 그런 말을 나눌 만큼 한가하지 않은 것 같군요.”

그녀가 쳐들었던 손을 슬쩍 흔들자 그녀의 눈부신 옥수가 미끄러지듯 진산월의 앞가슴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 손이 움직이는 궤적이 어찌나 영활하고 자연스러운지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연인의 앞가슴을 어루만지는 부드러운 손짓으로 오해했을 것이다.

막 그녀의 손이 가슴에 닿으려는 순간 진산월의 양쪽 어깨가 미약하게 흔들렸다. 그와 함께 그의 신형은 옆으로 한 걸음 이동해 있었다. 신묘한 몸놀림이라고 할 만했으나, 소조림은 조금도 표정이 변하지 않은 채 다시 옥수를 앞으로 쭉 내밀었다. 그녀의 무공이 전설적인 소수마공인지는 확실치 않았으나 적어도 강호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절세의 무공임은 분명해 보였다.

진산월이 이어룡을 펼쳐 몇 번이나 그녀의 공세를 피하려 했으나 어느 쪽으로 움직여도 그녀의 손 그림자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불과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진산월은 더 이상 몸을 피할 곳을 찾지 못했다. 애초부터 공력을 끌어올리지 않고 단순히 피하기만 하는 것으로 그녀와 같은 절정고수의 공격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몸을 피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공력을 사용하여 맞대응 할 수도 없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막 소조림의 옥수가 진산월의 앞가슴을 가격하려는 순간, 진산월의 상반신이 휘청거리더니 시퍼런 검광이 피어올랐다. 소조림의 손 그림자로 뒤덮였던 장내가 온통 삼엄한 검기에 휩싸여 버렸다.

옆에서 초조한 표정으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석단이 쾌재 어린 외침을 토해냈다.

“이제 끝났다!”

진산월이 마침내 참지 못하고 공력을 끌어올려 검기를 발출한 이상 장인몽의 맹독에 곧 피를 토하며 쓰러지리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소조림 또한 그런 생각인지 반격하지 않고 유연한 동작으로 일단 뒤로 물러서려 했다. 하나 진산월이 발출한 검광은 그들의 예상을 뒤엎고 더욱 맹렬한 기세로 그녀의 전신을 압박해 들어왔다.

“아앗!”

그녀의 입에서 짤막한 경호성이 터져 나왔다. 석단이 놀라 보니 어느 사이에 그녀의 새하얀 목에 진산월의 검이 닿아 있었다. 그녀는 진산월이 공력을 끌어올릴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있다가 자신의 실력을 제대로 발휘도 하지 못하고 어처구니 없게도 단 이초 만에 맥없이 제압당해버린 것이다.

“이….이럴 수가…..”

석단은 그녀가 누구의 제자인지, 그녀의 무공 실력이 어느 정도 인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녀가 진산월의 검을 제대로 받아내지도 못하고 제압당해버린 현재의 상황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소조림의 안색 또한 창백하게 변했다. 하나 그녀는 이내 냉정을 되찾은 듯 차가운 눈으로 진산월을 쏘아보았다.

“당신은 중독되지 않았군요.”

진산월은 여전히 용영검으로 그녀의 목을 겨눈 채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소.”

“그렇다면 당신이 마신 술에 장인몽이 들어 있지 않았다는 말이군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요?”

“장인몽에 중독되었다면 지금쯤 당신은 피를 토한 채 바닥에 다 뒹굴고 있을 거예요.”

“장인몽을 너무 믿는군.”

“장인몽은 내공으로 억누를 수 있는 성질의 독이 아니에요.”

진산월은 잠시 그녀를 응시하고 있다가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예전에 나는 천하삼대극독 중 하나인 양천지독에 중독된 적이 있었소. 그때 나를 치료한 사람이 말하기를 앞으로 나는 어지간한 독에는 결코 당하지 않을 거라고 했는데, 그래서인지 그 후로 독 때문에 어려움을 당한 적은 없었소.”

소조림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눈을 반짝 빛냈다.

“그렇군요. 그 일이었지요? 삼 년 전 사천에서 단목초를 암습할 때……”

진산월은 가만히 그녀를 응시하다가 조용히 말했다.

“그 일은 몇몇 사람 외에는 아는 자가 없는 줄 알았는데….”

소조림은 움찔하다가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응수했다.

“단목초의 죽음을 본 당에서도 무척 중요하게 생각한 사건이라 전후 내막에 대해 자세한 조사가 있었어요.”

진산월은 당시의 일은 별로 거론하고 싶지 않은 듯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장인몽이 대단한 독인 건 알겠는데 나에게는 별 효과가 없는 것 같소. 그러니 이제 우리 일을 마무리 지어 봅시다.”

소조림은 여전히 자신의 목을 겨누고 있는 진산월의 검을 내려보더니 냉랭한 웃음을 날렸다.

“진 장문인의 손속이 매섭다는 건 익히 들었어요. 그냥 손만 조금 움직이면 간단한 일인데 어떻게 마무리 짓겠다는 거죠?”

“당신이 한 가지 대답만 해주면 오늘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해주겠다는 뜻이오.”

“그게 뭐죠?”

“쾌의당에서 이번에 천룡궤를 노리고 낙양에 파견한 고수들의 책임자는 누구요?”

좀처럼 침착함을 잃지 않았던 소조림의 얼굴이 몇 차례 변했다.
그녀는 이런 질문을 한 진산월의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했으나 어떠한 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그걸 꼭 알아야겠어요?”

“말하기 싫다면 말하지 않아도 좋소, 다만….”

“다만 뭔가요?”

“오늘 이곳에 온 자들 중 누구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할 거요.”

그녀의 얼굴에 한 줄기 노기가 떠올랐다.

“당신이 감히…..”

그 순간, 옆에서 폭음과 비명이 거의 동시에 터져 나왔다.

펑!

“크악!”

그녀가 힐끔 고개를 돌려보니 낙일방과 싸우고 있던 형일손이 가슴팍이 움푹 꺼진 채로 피분수를 뿌리며 정자 밖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쿵!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처박힌 형일손은 한차례 몸을 세차게 떨더니 그대로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가공할 혈수공으로 왕옥산 일대를 뒤흔들었던 살성의 최후치고는 너무도 허무한 것이었다.

진산월은 그들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의 대답이 늦을수록 살아서 돌아갈 사람의 수는 적어지게 될 거요.”

아닌 게 아니라 형일손과 함께 낙일방을 상대했던 노중련은 이미 허리를 부여잡고 한쪽 구석에 주저앉은 채 신음을 흘리고 있었고, 동중산과 싸우고 있는 공영춘 또한 거듭되는 격변에 당황했는지 수세에 몰린 채 연신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장내에 아직 멀쩡한 사람은 석단과 손검당뿐이었는데, 그들만으로는 도저히 지금의 사태를 반전시킬 수가 없었다.

소조림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사부님이에요.”

진산월은 그러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에 조금도 놀라지 않고 다시 물었다.

“그녀의 쾌의당 내에서의 신분은?”

“칠대용왕 중의 화중용왕이세요.”

“그녀가 바로 소수마후요?”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진산월을 노려보더니 냉랭한 음성을 발했다.

“한 가지만 묻겠다고 하더니 자신의 입으로 내뱉은 말을 어길 생각인가요? 대종남파의 장문인답지 않군요.”

진산월은 피식 웃으며 그녀의 목을 겨누고 있던 용영검을 거두어 들였다.

“내가 실수했군. 소저는 이제 그만 가보시오.”

소조림은 말없이 진산월을 응시하더니 몸을 돌렸다.

석단이 쭈뼛거리며 그녀의 뒤를 따르려 하자 진산월이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석 공자가 초가보를 후원했다는 건 알고 있소.”

석단은 흠칫 놀라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진산월은 담담한 시선으로 그를 응시했다.

“오늘 일은 석곤 장주의 얼굴을 보아 그냥 넘어가겠소. 아마 앞으로 본 파에서 먼저 석 공자를 찾는 일은 없을 거요. 하지만 석 공자가 계속 본 파를 적대시한다면 다음에는 오늘 같은 호의를 기대하기 힘들 거요.”

“명심하겠소.”

석단은 포권을 하고는 소조림의 뒤를 따라 정자를 벗어났다.
바닥에 쓰러졌던 노중련이 비틀거리며 일어나 한쪽에 있는 형일손의 시신을 들고 그들의 뒤를 따랐다.

동중산과 싸우고 있던 공영춘이 손을 멈추고 황급히 뒤로 물러나 그들을 따라 정자 밖으로 나가려 했으나, 그때 돌연 진산월이 그를 향해 용영검을 휘둘렀다.

“큭!”

막 정자를 벗어나려던 공영춘은 왼쪽 발목이 잘라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진산월은 고통으로 일그러진 공영춘의 얼굴을 냉정한 시선으로 쏘아보았다.

“당신 때문에 내 사제는 절름발이가 되었소. 이 정도로 목숨을 부지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시오.”

공영춘은 왼쪽 발목의 힘줄이 잘라져 자신이 평생 다리를 저는 불구의 몸이 되었음을 깨닫고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그는 이를 악물고 바닥에서 일어나더니 한쪽 다리를 절룩거리며 정자를 벗어났다.
지금까지 한쪽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마료군과 그 일행들이 주뼛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정자의 입구를 향해 몸을 움직이더니 점차 빠르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평생 동안 시문을 벗 삼아 살아온 그들로서는 자신들의 눈앞에서 벌어진 유혈사태에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그 사건에 자신들의 일행이었던 석단이 연루되어 있으며, 그의 행적이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것임을 알게 되었으니 놀랍고 당황한 마음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커다란 것이었다.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은 의외로 손검당이었다. 술에 독을 타서 진산월에게 마시게 한 주범인 그는 종남파의 고수를 제외한 모든 인물들이 정자를 빠져나갈 때까지도 그 자리에 가만히 선 채 평온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더욱 이상한 것은 진산월의 반응이었다. 의당 그의 행동에 대해 배신감을 느끼고 있어야 하건만 어찌된 일인지 태연한 모습으로 한족에 있는 탁자로 가서 앉더니 손검당을 자신의 앞자리로 앉게 했다.
손검당 또한 스스럼없는 모습으로 냉큼 다가와 진산월의 앞에 앉았다.

“어떻게 알았나?”

손검당의 물음에 진산월은 의아한 듯 되물었다.

“무얼 말인가?”

“내가 자네와 마신 술에 장인몽을 타지 않았다는 것을 말일세. 그걸 알았으니 주저하지 않고 공력을 끌어올려 검을 펼친 것이 아닌가?”

진산월은 자신의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손검당은 그의 오른손 중지에 끼워져 있는 은색 반지를 발견했다.

“그건 뭔가?”

“사응환이라는 것일세. 어떤 종류의 독이라도 닿으면 색이 변하지.”

손검당의 눈이 번쩍 빛났다.

“강호를 행도할 때 무척이나 유용하겠군.”

“술에 독이 들었다는 말을 듣고 술병 바닥에 조금 남아 있던 술을 묻혀 보았지만 지금 자네가 보는 대로 색이 전혀 변하지 않았네.”

손검당은 히죽 웃었다.

“양천지독 이야기를 꺼낸 건 정말 기발한 핑계였네. 덕분에 그녀는 내가 술에 독을 타지 않았다는 걸 짐작조차 하지 못했지.”

“내가 양천지독에 당했던 건 사실일세.”

손검당은 눈을 크게 치켜떴다.

“그럼 정말 만독불침이라도 된 건가?”

그 일 이후 독에 어느 정도 내성이 생긴 건 사실일세. 하지만 장인몽같이 쾌의당에서 자신 있게 만든 절독까지 감당할 수 있을지는 나도 모르겠네.”
손검당은 자신의 이마를 탁 치며 낭랑한 웃음을 흘렸다.

“하하….. 진실 사이에 거짓을 교묘하게 숨겨놓았으니 그녀같이 눈치가 비상한 여자도 속을 수밖에 없었겠지. 아무튼 덕분에 쓸데없는 의심을 받지 않게 되어서 앞으로 내가 편하게 됐네.”

“자네야 말로 왜 그런 위험을 무릅쓰면서 술에 독을 타지 않은 건가?”

“모처럼 사귄 친구를 배신하기에는 내 낯짝이 그리 두껍지 않은 모양이지.”

진산월은 한차례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자 안은 그들 외에는 아무도 없었고, 고요한 정적 속에 잠겨 있었다. 낙일방과 동중산은 두 사람이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정자의 밖으로 나갔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한적한 오후였고, 평화로운 풍광이었다. 한쪽 구석에 나 있는 핏자국만 아니었다면 누구도 방금 전까지 이곳에서 죽음이 오가는 싸움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진산월은 정자 밖으로 보이는 눈이 부실 듯한 파란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가 다시 손검당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쾌의당에는 언제부터 가입했나?”

“몇 년 되었네. 사부에게 쫓겨난 후 갈 데가 없는 나를 받아준 유일한 곳이었지.”

“이번 일에는 단순히 나와 안면이 있기 때문에 끼어든 것인가?”

“그렇지는 않네. 자네가 아니었어도 어차피 이번 일에는 내가 개입할 수밖에 없었네.”

“이유를 알 수 있겠나?”

손검당은 잠시 허공을 응시하더니 문득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흥겹거나 우습다기보다는 왠지 모르게 쓸쓸함이 느껴지는 미소였다.

“쾌의당의 조직을 알고 있나?”

“잘 모르네. 그들의 조직 구성이 어떻게 되어 있나?”

“쾌의당은 한 명의 당주와 두 명의 영주, 그리고 일곱 명의 용왕들이 수뇌부를 형성하고 있네. 그들은 엄밀히 말하면 상화 관계라기보다는 동료 관계이지. 당주라고 해서 무조건 영주나 용왕들을 부릴 수 없다는 뜻일세. 영주와 용왕들은 각각 독자적인 조직을 가지고 있고, 사안에 따라 협력하기도 하고 때로는 반목하기도 한다네.”

“그럼 당주가 있는 의미가 없지 않나?”

“당주는 그들 사이를 조율하고 당의 전체적인 운영을 책임진다네. 똑같은 일을 두고 용왕들 사이에 대립이 일어났을 때는 당주의 결정이 중요한 역할을 하지.”

“자네는 그중 어디에 속해 있나?”

“화중용왕에게는 다섯 명의 제자가 있네. 모두 여자들인데, 하나같이 재색을 겸비한 미녀들이지. 그중 막내 여제자는 특히 미색이 뛰어나고 재기가 넘쳤지.”

손검당의 두 눈은 마치 꿈이라도 꾸는 것처럼 몽롱하게 변해 있었다.

“내가 처음 그녀를 본 것은 삼년 전의 어느 겨울날이었네. 마침 아버님의 기일이라 무덤에 술이라도 한잔 따라드리려고 성밖을 나섰다가 그녀를 보았지. 하얀 담비 목도리를 두르고 털조끼를 입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그야말로 월궁항아가 따로 없었네. 그때 나는 생각했지. ‘지금 나는 운명을 만나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이지”

“그 기분이 어떤 것인지 알 것도 같군.”

손검당의 시선이 진산월에게로 향했다. 그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그렇다면 내 심정을 이해하겠군. 나는 며칠간 그녀의 뒤를 따라다녔네. 그리고는 곧장 사부에게로 가서 파문 시켜달라고 요구했지.”

진산월은 손검당이 사부인 동방표응에게 파문당했다고 알고 있었으나, 손검당의 말은 그것이 반대 상황이었음을 가리키고 있었다.

“사부는 내게 기대하는 바가 컸기 때문에 내 말에 몹시 실망을 했지. 하지만 결국 그분은 나를 파문시켰고, 나는 자유로운 상태로 그녀를 따라 쾌의당에 들어왔네.”

“정말 대단한 여자인 모양이군. 자네가 스스로 파문을 당하면서까지 따라갔다니 말일세.”

손검당의 눈가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자네도 만나보지 않았나? 자네도 무척 마음에 들어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진산월은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럼 난향원의 정난향이…..”

“그녀가 바로 화중용왕의 다섯 번째 제자일세. 또한 화중용왕이 가장 아끼는 제자이기도 하지.”

진산월의 뇌리에 며칠 전에 보았던 낙양제일화의 절세적인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의 아리따운 자태와 차분한 음성, 그리고 인상적이었던 그녀와의 대화를 반추해보면 진산월이 무언가를 느낀 듯 각별한 시선으로 손검당을 응시했다.

“자네가 이번에 낙양의 연쇄살인을 일으킨 흉수인가?”

손검당은 부인하지 않았다.

“이제 알았나? 생각보다 자네의 눈치도 그렇게 빠른 편은 아니군.”

“그렇다면 자네가 그날 그녀에게 냉대를 받았던 것은 풍림서각에서의 일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이었겠군.”

“맞았네. 원래 계획대로라면 그날 아침에 나는 풍림서각의 각주를 암살했어야 했지. 그런데 공망춘이 미리 술수를 부려 본 당에서 포섭한 수석 지배인을 먼저 제거하는 바람에 일을 성사시키지 못했네. 덕분에 그날 그녀에게 매서운 질책을 들었지.”

“별로 매서운 것 같지는 않던데….”

“일을 마치면 그녀는 늘 나에게 술을 한 잔 대접해주었지. 그녀가 따라주는 술을 마시는 게 요즘의 나의 유일한 기쁨이었네. 그런데 그날은 술을 얻어 마시지 못했네. 내게는 그것이 다른 어떤 질책보다도 혹독한 것일세.”

“술 한 잔에 사람 목숨 하나라….. 너무 허망하군.”

“어차피 강호의 일이란 게 알고 보면 모두 허망한 것일세. 천룡궤만 해도 그 안에 얽혀 있는 사연을 알게 된다면 누구라도 허망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걸세.”

“그 사연이라는 게 뭔가?”

“남녀 간의 치정이 얽힌 재미없는 이야기지. 알고 싶은가?”

“말해주게.”

“오래전 이야기일세. 혹자는 한 갑자 쯤 전이라고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백년도 넘었다고 하지. 한 남자가 있었네. 그 사람에 대한 평도 엇갈리지. 누구는 자신의 것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희대의 바보라고 하기도 하고, 또 누구는 강호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무학의 천재라고도 했네. 아무튼 그 사람에게는 부인이 한 명 있었는데, 부인과의 사이는 썩 좋은 편이 아니었네. 그 이유도 제작기였네. 그가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라서 부인이 정이 떨어져 그렇다고도 하고, 그가 무학에만 미쳐 가정에 소홀했기 때문이라고도 했네.”

“무척 알쏭달쏭한 사람이군.”

“그런 셈이지. 그러던 어느 날 부인은 그 사람이 다른 여인과 사귀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네. 부인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속상하고 분통 터지는 일이었겠지.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오른 부인은 그 사람이 애지중지하는 물건을 몰래 훔쳐 은밀한 곳에 숨기고 말았네.”

“그 부인은 그 남자를 사랑했던 모양이로군.”

“그런 것 같네. 그녀는 그 남자가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는 걸 알고 그 남자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무진 애를 썼지만 결국 실패였네. 그래도 그 물건을 내놓지는 않았네. 오히려 더욱 꽁꽁 숨겨놓았지. 그 물건을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한 그 남자가 언젠가는 반드시 자신에게로 돌아오리라고 믿었던 걸세.”

“그 남자는 돌아오지 않았겠군.”

“자네 말대로일세. 남자는 떠나고 부인 혼자 남아서 오랜 세월 동안 피눈물을 쏟았겠지.”

“그 물건이 천룡궤란 말인가?”

“그렇네. 그 남자는 천룡처럼 뛰어난 인물이라 청룡객이라고 불렀고, 그 부인은 한번 결심한 일은 반드시 이룬다고 하여 단심자라고 한다더군.”

진산월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명호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자네 말처럼 천룡객이 엄청난 무학의 천재라면 어느 정도는 강호에 명성이 알려졌을 게 아닌가?”

“그래서 오래전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나?”

“천룡객이 부인 몰래 사귀었다는 여자는?”

“봉황인이라고 한다네. 봉황처럼 아름다운 여인이었던 모양이네.”

진산월의 눈이 번쩍 빛났다.

어디선가 봉황인이란 이름을 들었던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나 정확히 언제 어디서 들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럼 천룡객은 새로 사귄 그 봉황인이란 여인과 어디론가로 떠나서 행복하게 잘 살았겠군?”

“그렇지는 않았네. 천룡객은 비록 부인을 떠나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와 살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와도 헤어지고 말았지.”

“그 이유는?”

“자세한 이유는 누구도 모른다네. 아무튼 그렇게 서로 사랑하던 세 사람은 뿔뿔이 헤어지고 말았지. 참 재미없고 허망한 이야기가 아닌가?”

“듣고 보니 그렇군. 그런데 그 청룡궤를 쾌의당에서 왜 그렇게 찾고 있단 말인가?”

“천룡객이 희대의 무공 천재라고 했지?”

“그렇네.”

“천룡객은 평소에 자신이 가장 아끼는 무공비급을 천룡궤에 넣어두었다고 하더군. 그 때문에 그의 부인이 청룡궤를 숨겨두었던 것일세.”

“그 무공비급이 무엇이길래 쾌의당에서 이토록 어려운 수를 쓰면서까지 찾으려 한단 말인가?”

“정확한 건 나도 모르겠네. 다만 쾌의당주는 물론이고 칠대용왕 중 대부분이 천룡궤의 행방에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고 하니 자네는 앞으로 각별히 조심해야 할 걸세.”

“자네는 더 이상 천룡궤를 노리지 않을 셈인가?”

손검당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무리 쾌의당과의 일이 중요하다고 해도 그 때문에 모처럼 사귄 친구를 배신할 수는 없지.”

“그래도 괜찮겠나?”

“그녀는 이해해줄 걸세.”

“내가 본 그녀라면 그럴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그녀의 사부가 자네를 눈감아주겠나?”

손검당은 그 말에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한참 후에야 비로소 그는 빙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녀가 알아서 처리해주겠지. 그녀의 사부는 그녀를 끔찍이 아끼니 말일세.”

진산월은 손검당의 말과는 달리 일이 그리 수월하게 진행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으나 그 점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무어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자꾸 그 문제를 들먹이는 것은 자칫 손검당을 모욕하는 일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진산월은 화제를 돌렸다.

“자네는 석가장으로는 돌아가지 않을 셈인가?”

손검당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내가 석가장 출신이란 것도 알고 있었군.”

“주변에 마침 운이 좋게도 자네와 자네의 선친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있었네.”

“아마 좋은 이야기는 듣지 못했을 텐데…”

“반대일세. 자네의 선친에 대한 인상적인 말을 들었네. 소문과는 전혀 다른 분이었다고 하더군.”

손검당은 진산월의 말에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하나 항상 미소가 떠올라 있던 그의 얼굴답지 않게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말없이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그의 두 눈을 유달리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진산월은 그의 상념을 깨고 싶지 않았는지 묵묵히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손검당은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아버님은 마음이 여린 분이셨지. 어려서부터 자신보다는 주위를 더 생각하셨다고 하더군. 그래서 석가장의 그 질식할 듯한 분위기에 제대로 적응하실 수 없었던 걸세.”

진산월은 손검당의 부친인 석교가 석가장의 도선출재를 통과하지 못하고 오히려 형인 석곤을 질투하여 그를 암습하려다 실패하여 석가장에서 쫓겨났다고 들었다. 하나 손검당이 말하는 속사정은 그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선친께선 애초부터 석가장의 가풍이 자신과 맞지 않음을 아시고 스스로 석가장을 나오려고 하셨네. 하지만 그녀는 그걸 용납하지 않았지. 석가장의 후손이 자신의 명을 거역하고 제 발로 석가장을 떠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던 거야.”

진산월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라니 누굴 말하는 건가?”

“석가장의 마녀, 철혈홍안 말일세.”

철혈홍안은 석가장주인 석곤의 할머니이니, 손검당에게는 증조할머니가 된다. 하나 그녀를 칭하는 손검당의 음성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냉랭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 안에는 짐작하기 어려운 억눌린 원한과 분노가 담겨 있었다.

“그녀에게 세상 사람은 오직 두 부류만이 존재할 뿐이네. 이용가치가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이용가치가 있는 자는 최대한 이용하고, 그렇지 못한 자는 설사 친혈육이라 할지라도 가차없이 내 버리는 게 그녀의 습성일세.”

“……!”

“그래서 그녀는 선친께 자신의 친형을 죽이려 했다는 누명을 씌우고 씻을 수 없는 모욕을 주어 내쫓았지. 뿐만 아니라 선친이 어떤 일도 할 수 없도록 철저하게 방해했네. 심지어는 낙양 일대를 떠나지도 못하게 감시했지. 그러니 선친으로서는 그저 낙양의 후미진 뒷골목을 전전하며 날품팔
이를 하는 수밖에 없었던 걸세.”

“일이 그렇게 된 것이로군.”

“선친께서는 돌아가실 때까지도 석가장과 거래하는 모든 상점을 이용하지 못하셨네. 몸에 병이 들어도 의원에게 보이지 못해 결국 한겨울에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 감기 몸살을 앓다가 돌아가셨지.”

진산월은 무어라 위로의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표정이 무거워졌다.

“석가장주는 그 정도로 모진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는데 그런 일이 있었었다니 의외일세.”

손검당은 피식 웃었다.

“석 장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걸세. 그는 그녀의 말이라면 꼼짝하지 못하니 말일세.”

“석 장주를 원만하지 않나?”

“내가 그 불쌍한 사람을 왜?”

뜻밖의 말에 진산월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손검당은 고소를 머금으며 입을 열었다.

“석가장의 실권은 오직 한 사람만이 가지고 있네. 그 외의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녀에게는 부속물이며 소모품일 뿐일세. 설사 석가장의 장주라고 해도 말일세.”

“석 장주는 그녀의 친손자가 아닌가?”

“그녀는 친아들조차도 자신의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버릴 수 있는 사람일세. 손자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지.”

“그게 정말인가?”

전대의 석가장주는 석담이란 분이셨네. 그분께는 석호라는 형님이 한 분 계셨지. 정상적이라면 석호라는 분이 장주가 돼야 했으나, 장주의 지위는 동생인 석담에게 돌아갔네. 그녀의 지시에 의해서 말이지. 그 이유가 무언지 아나?
손검당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라 있으나 그것은 그 어떤 쓴웃음보다도 착잡한 것이었다.

“석호는 무공에 재질이 있었네. 반면에 석담은 그런 재질이 없었지. 단지 그 차이일 뿐일세.”

“무공에 재질이 있는 것과 석가장의 장주가 되지 못하는 것이 무슨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군.”

손검당의 눈이 번쩍 빛났다.

“관련이 있지. 그녀로서는 아주 큰 관련이 있네. 그녀의 남편인 석동이 바로 무공에 미쳐 집을 나갔거든. 그 후로 그녀는 조금이라도 무공에 소질이 있거나 관심을 보이는 자는 결코 장주의 자리에 앉히지 않네. 현재의 석가장주도 무공은 전혀 알지 못할걸.”

진산월은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자신이 만났던 석곤은 무공과는 담을 쌓은 평범한 노인일 뿐이었다. 진산월은 철혈홍안 같은 여자를 아내로 두었다가 석가장을 등진 석동의 심정은 어떠한 것일지 생각에 잠겼다가 문득 표정이 약간 변했다.
철혈홍안의 남편인 석동은 백모란이란 미녀에게 빠져 부인과 가정을 팽개치는 바람에 한때 석가장을 존폐의 위기에 몰아넣었던 사람이었다. 결국 철혈홍안이 그를 대신해 석가장의 전면에 나서서 석가장을 화려하게 부활시킨 후 석동과 백모란의 모습은 더 이상 강호에서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의 사연이 조금 전에 손검당에게서 들은 천룡객과 단심자의 사연과 너무도 흡사하지 않은가?

“혹시 자네가 말했던 천룡객과 단심자가 바로 석동과 철혈홍안 부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손검당은 이제 알았느냐는 듯 히죽 웃었다.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았다면 천룡궤가 왜 석가장에 있겠는가?”

“내가 듣기로는 석동은 백모란이라는 당시의 천하제일미녀에게 빠져 그녀를 버렸다고 했는데….”

“석동이 백모란과 연인 사이였던 건 사실일세. 하지만 백모란과 사귀기 전에 이미 석동은 철혈홍안과 사이가 벌어져 있었네. 그 이유는 그가 바로 희대의 무공광이었기 때문이지.”

“무공에 빠져 아내를 버렸단 말인가?”

“아내 뿐 아니라 가업마저 등지는 바람에 석가장이 무너질 뻔했지. 석동은 석가장이 아닌 무가에서 태어났어야 옳았을 인물이었네.”

“그분은 자네의 증조부가 아닌가?”

“얼굴도 본 적이 없는 백 년 전 사람이어서인지 증조부라는 게 실감이 나지 않을 뿐 아니라 그에 대해서는 별로 좋은 감정도 없네.”

석가장에서 쫓겨났을 뿐 아니라 그 때문에 부친이 비참하게 돌아가신 걸 생각하면 손검당의 심정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석가장이 친혈육에게조차 가혹한 가풍을 가지게 된 것도 근본 원인을 찾아 올라가면 석동에게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석동이 철혈홍안을 버리지만 않았다면 철혈홍안이 그토록 혹독하게 가문을 운영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면, 그것과는 상관없이 일은 원래 이렇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을까? 철혈홍안의 성정으로 보아 석동이 그녀에게 소홀하지 않았더라도 별 상관이 없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진산월은 잠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철혈홍안이 그렇게 오랫동안 천룡궤를 보관하고 있었다는 건 그만큼 남편에 대한 애증이 깊었다는 뜻이겠지. 그런데 왜 갑자기 마음이 변해 그토록 꽁꽁 숨겨놓았던 천룡궤를 밖으로 내놓았는지 모르겠군.”

“그녀의 속마음을 누가 알 수 있겠나? 다만 그 안에 그녀로서도 어쩔 수 없는 곡절이 있다고만 짐작할 뿐이지.”

“그렇게 귀중한 비급이 담긴 물건을 그녀가 하필이면 나에게 맡겼다는 것이 갑자기 부담스러워지는군. 그녀는 내가 천룡궤를 열고 그 비급을 읽어볼 것이 걱정되지도 않았을까?”

손검당의 얼굴에 한 줄기 야릇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건 아무리 자네라고 해도 힘들 걸세.”

“천룡궤가 쉽게 열리지 않는 물건이라는 건 나도 알고 있네.”

“그 정도가 아닐세. 천룡궤는 오직 한 가지 물건으로만 열 수 있네. 그렇지 않고 강제로 힘을 주어 열려고 한다면 안에 있는 물건이 파괴되어 버리는 장치가 되어 있지.”

“어쩐지 범상치 않아 보인다 했지. 그랬기에 그녀는 별걱정 없이 그것을 나에게 맡긴 것이로군.”

“천룡객은 천룡궤를 열 수 있는 그 열쇠를 자신의 연인에게 선물했는데, 그녀는 그것을 비녀처럼 머리에 꽂고 다녔다고 하네. 그래서 나중에는 봉황인의 신물처럼 되어버렸지.”

“그것이 무엇인가?”

손검당은 잠시 침묵하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봉황금시.”

진산월은 좀처럼 쉽게 놀라거나 흥분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나 지금은 내심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봉황금시? 그건 청봉궁의 신물이라고 알고있는데?”

“바로 그렇네. 봉황인 백모란이 바로 천봉궁을 세운 창립자일세.”

진산월은 일시지간 머릿속으로 너무나 많은 생각이 떠올라 차라리 어리둥절해졌다.
봉황금시는 삼 년 전에 진산월을 비롯한 종남파 고수들을 곤경에 빠뜨린 물건이었다. 그것으로 인해 진산월은 동중산을 알게 되었고, 많은 고수들의 습격을 받아야만 했다. 결국 진산월은 동중산에게서 봉황금시를 회수하여 원래의 주인인 천봉궁의 소궁주인 단봉공주에게 돌려주었고, 그녀는 그것을 다시 모용봉에게 전해주었다.
그런데 그 봉황금시가 사실은 봉황인 백모란의 것이며, 천룡궤를 열 수 있는 유일한 열쇠라고 하니 참으로 공교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 년 전에 자신은 어디에 쓰는지도 모르고 열쇠를 가지고 있었고, 지금은 그 열쇠로 열 수 있는 물건을 가지고 있다. 두 번 모두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반강제적으로 떠안게 된 것이며, 그 때문에 불의의 암습에 시달리게 되었다.
단순히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기이한 일이라 진산월은 무언지 모를 운명의 그림자 같은 것이 느껴졌다.

석동의 연인이며 한때 강호제일의 미녀로 알려진 백모란이 천봉궁을 세웠다는 것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대체 백모란은 석동과 헤어져 어떤 삶을 살았던 것일까? 그녀와 철혈홍안과의 사이에 얽힌 치정의 진실은 무엇일까? 그리고 철혈홍안과 백모란 같은 당대제일의 미녀들이 사랑했다는 석동은 과연 어떠한 인물일까?

여러 가지 숱한 의문과 복잡한 감정들이 진산월의 머릿속을 이리저리 흔들다가 사라져갔다. 진산월은 삼 년 전의 그때처럼 이번에도 천룡궤를 무사히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줄 수 있게 되기를 기원했지만 그의 소망대로 일이 진행될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손검당은 한참 동안을 진산월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갈 무렵에야 훌쩍 자리에서 일어나 간다는 말도 없이 떠나가버렸다. 진산월은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말없이 지켜보고만 있었다.
서로간에 작별인사도 한마디 없었고 언제 다시 만날지 기약도 없는 이별이었으나 두 사람은 아무도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는 듯 담담하게 헤어졌다.
노을 속으로 사라지는 손검당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사람은 진산월 외에도 두 명이 더 있었다. 그들은 정자 밖을 지키고 있던 동중산과 낙일방이었다.

낙일방은 한동안 손검당의 뒷등을 쳐다보다가 중얼거렸다.

“나는 장문사형이 왜 그를 친구로 삼게 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군요.”

동중산은 의아한 듯 물었다.

“왜 그렇지요?”

“동 사질은 그가 누군가를 닮았다고 생각지 않아요?”

동중산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는 이존휘와 많이 닮았군요.”

“그래요. 언뜻 보면 전혀 달라 보이지만 눈과 콧등이 아주 흡사해요. 장문사형은 그래서 그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에요.”

“그런 것 같군요. 저는 오래전부터 궁금했는데, 장문인께서 왜 이존휘 같은 인물을 친구로 생각했을까요? 두 사람은 살아온 환경부터 성격까지 비슷한 점이 별로 없었는데 말입니다.”

낙일방은 세상을 붉게 물들여가는 석양을 바라보고 있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건 말이죠. 가끔은 아무 이유도 없이 친근감을 느끼게 되는 사람도 있는 법이니까요.”

그 말을 할 때의 석양에 붉게 물든 그의 얼굴은 세상의 모든 여인들을 취하게 할 만큼 수려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때 낙일방의 뇌리에는 문득 얼마 전에 보았던 사인기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