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0권 소림기변(少林奇變)편 : 4화
제 202장 삼파비무
낙양을 떠나 소림사로 가는 길은 의외로 평탄했다. 쾌의당의 습격도 없었고, 다른 사소한 시비도 벌어지지 않았다. 종남산을 나온 후 크고 작은 여러 가지 사건에 시달려왔던 진산월 일행으로서는 모처럼 맞는 한가로운 여행길이었다. 모두들 이런 평온이 가급적 오래 지속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어디에나 예외는 있는 법이다.
“이거 너무 심심한데요. 왜 이쪽 지방은 그 흔한 산적 떼 하나 안 보이는 건지….”
제법 깊은 산자락을 지나고 있을 때 주위를 둘러보던 손풍이 하품을 하며 투덜거리자 전흠의 얼굴에 험악한 빛이 떠올랐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냐?”
손풍은 전흠의 사나운 기세에 찔끔거리면서도 하고 싶은 말은 모두 내뱉었다.
“원래 여행이란 이런저런 일로 시달리면서 고생을 해야 제맛을 느낄 수 있는 법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동 사형?”
전흠이 금시라도 주먹을 날릴 듯하자 손풍은 재빨리 동중산에게 말을 건넸다. 동중산은 어이가 없는지 피식 웃으면서도 그의 말을 받아주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것도 적당해야 하는 법일세. 사실 종남산을 나온 후 우리는 너무 많은 사건들을 만났네.”
손풍은 손가락으로 헤아려보았다.
“위남에서 흑갈방인지 뭔지 하는 놈들에게 습격당한 거 한 번…. 향화촌에서 밤중에 쳐들어온 이상한 놈들이 두 번째…. 그 외에는 뭐 특별한 일이 없었지 않았습니까? 낙양에서는 며칠 대접 잘 받고 푹 쉬었을 뿐이고….”
그 두 번 모두 죽을 뻔한 고비를 넘겼으면서도 손풍은 기억도 나지 않는지 넉살 좋게 주워 넘겼다. 동중산은 그동안의 흉험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지만 철딱서니 없는 손풍의 말에 그저 빙긋 웃을 뿐이었다.
오히려 낙일방이 평소의 그답지 않게 엄격한 눈으로 손풍을 쏘아보았다.
“손 사질, 모든 화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법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내뱉지 마라.”
손풍은 무심코 그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무어라고 대꾸하려다 준수한 낙일방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것을 보고는 찔끔하여 입을 다물어 버렸다. 평소에는 온순한 귀공자 같았던 낙일방이 노기를 띠니 오히려 사나운 전흠보다도 더 무서워 보였던 것이다.
그 바람에 자내의 분위기가 갑작스레 가라앉았으나 아무도 그 때문에 낙일방에게 불만을 느끼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뇌일봉은 어깨를 들썩이며 흥겨운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말 한 번 잘했다. 예전에는 정말 풋내가 풀풀 나는 애송이였는데 이제는 제법 강호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구나. 저 손가 녀석은 너무 경망스러워서 그렇지 않아도 노부가 한마디 하려 했다.”
손풍은 입이 앞으로 나왔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기서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정말 호된 꼴을 당할지 모른다는 강력한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낙일방은 뇌일봉을 향해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뇌 숙부께서 계신데 제가 너무 경솔하게 나섰군요. 아무래도 이번 소림사행 때문에 제가 조금 예민해진 것 같습니다.”
“소림사라면 무림의 태산북두로 누구나가 선망하는 곳이 아니더냐? 설마 그곳에 간다고 무슨 험악한 일이라도 생기겠느냐?”
낙일방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삼 년 전에도 그런 희망에 부풀어 소림사를 찾아갔었지만 좋은 꼴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때와 지금은 여러 면에서 사정이 다르지 않느냐? 더구나 소림사의 장문인이 정식으로 초청한 것인데 별다른 일이야 있겠느냐?”
“물론 당시와 같은 푸대접을 받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왠지 이번 여정도 그리 쉽지만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 마음이 썩 편지 않습니다.”
뇌일봉이 옆에서 걷고 있는 진산월을 돌아보았다.
“네 생각은 어떻느냐?”
진산월은 시선을 앞으로 고정한 채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제 예상도 일방과 같습니다. 소림사 장문인이 친분도 없는 저를 초대했다는 것 자체가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소림사를 지나 구궁보까지 가는 여정은 지금까지보다 몇 배나 더 흉험할지 모릅니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지 않으면 정말 험한 고초를 겪게 될 것입니다.”
진산월의 말은 뇌일봉에게 했지만 그 대상은 손풍을 비롯한 종남파의 일행들임을 모두들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뇌일봉은 생각이 깊고 침착한 진산월마저 앞으로의 여정이 힘들 것임을 예상하자 절로 마음이 무거웠다. 종남산에서 낙양까지 오는 동안에 이들이 겪은 일을 들어서 알고 있는 뇌일봉으로서는 그보다 몇 배나 더 험할지 모른다는 진산월의 말이 결코 빈말이 아님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아….. 소림사의 대방 장문인은 공정하고 현명하기로 이름난 인물이니 그가 산월을 보자고 한 것이 종남파에 해를 끼치기 위한 일일 리는 없겠지.’
뇌일봉은 억지로 희망 섞인 기대를 하며 침울해지려는 마음을 바로잡았다.
삼 년 육개월 만에 다시 본 소림사의 산문은 예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하나 산문 앞의 풍광은 당시와 판이했다. 그때는 문 앞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늘어서 있었으며 산문이 활짝 열려 손님들을 맞이했는데, 지금은 절반쯤 닫힌 산문 앞에 네 명의 승인들이 서서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진산월 일행이 다가가자 그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삼십대 중반의 승인이 반장을 하며 불호를 외쳤다.
“아미타불. 본사에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동중산이 앞으로 나와서 미리 꺼내 들고 있던 배첩을 내밀었다.
“종남파의 장문인께서 소림사 주지스님의 초대를 받고 오셨습니다. 안내를 부탁드립니다.”
종남파의 장문인이란 말에 승인의 시선이 일행을 재빨리 훑다가 진산월을 발견하고는 이내 조금 전보다 한결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아미타불. 소승은 정원이라 하옵니다. 진 장문인의 고명은 익히 들었습니다. 본사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정자배라면 소림사의 이대제자 신분으로, 산문을 지키고 있기에는 지나치게 높은 지위였다. 진산월은 가볍게 포권을 했다.
“만나게 되어 반갑소. 귀사의 방장께서는 안녕하신지요.”
“예. 장문인께서 오시기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며칠 안으로 오시리라 생각하여 저를 비롯한 이대제자 몇 사람이 돌아가며 산문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환대에 감사드리오.”
정원은 배첩을 받아들고는 산문 앞에 있던 세 명의 승려 중 한 명을 불러 배첩을 안으로 통보하게 했다. 이어 간단하게 진산월 일행과 소개를 마친 후 그는 자신이 직접 진산월을 안내했다.
“소승을 따라오십시오.”
진산월 일행은 정원을 따라 소림사 경내로 들어섰다. 소림사 안은 고요한 정적 속에 잠겨 있었다. 가끔씩 지나가는 승려들의 모습만 눈에 뜨일 뿐 산사 특유의 적막감만이 감돌고 있을 뿐이었다.
뇌일봉이 주위를 둘러보다 굵직한 음성을 내뱉었다.
“평소보다 향화객들의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는데, 사내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정원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특별한 일이 있는 것은 아니고, 본사에 귀빈이 오셔서 장문인께서 당분간 향화객들을 경내로 들이지 말라고 지시하신 것입니다.”
“귀빈이라….. 어느 고인이신지 알 수 있겠나?”
정원은 조용하게 웃었다.
“잠시 후면 직접 만나실 수 있을 테니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뇌일봉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림사에 온 귀빈이라면서 우리를 만나려고 기다리고 있단 말인가?”
“엄밀히 말씀드리면 그분들은 본사에 용무가 있어서 온 것이 아니라 귀파 때문에 오신 것입니다.”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진산월이 불쑥 물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우리가 이곳으로 올 줄 알고 우리를 만나기 위해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씀이오?”
정원은 부인하지 않았다.
“진 장문인의 말씀이 맞습니다.”
진산월은 그들이 누구인지 궁금했으나 굳이 묻지 않았다. 정원의 말대로 잠시 후에 직접 만나보면 자연스레 알게 될 일이었다. 정원은 우선 그들을 지객당으로 안내했다. 그곳에서 다른 일행은 여장을 풀었고, 진산월만이 따로 정원을 따라 소림사의 방장실로 이동했다. 동중산과 낙일방을 비롯한 종남파의 일행들은 모두 아쉬움을 느꼈으나, 지객당에서 진산월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대방선사가 만나고자 하는 사람은 진산월 한 사람뿐이었기에 그들로서는 함부로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는 강호에서의 명성이 상당한 뇌일봉도 낙일방 등과 함께 지객당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소림사의 방장은 외인들로서는 쉽게 만나기 어려운 자리의 인물이었다.
소림사의 방장실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아니, 무림에서의 명성을 생각해본다면 지나치게 단출하고 허술했다. 오히려 방장실을 에워싸고 있는 팔대호원의 여덟 개 전각들이 더 크고 웅장해 보였다. 하나 진산월은 그 점을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거처란 외관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머무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결정되는 것이다. 게다가 방장이란 말 자체도 원래 사방으로 한 장 크기의 방을 뜻하는 것으로, 고승들은 이 정도의 공간이면 자신의 거처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세월이 흐르면서 나중에는 방이 아니라 그 방에 거주하는 고승이나 주지를 지칭하는 말로 바뀌게 된 것이다.
소림사의 주지들은 대대로 이런 허름한 방장실을 기꺼이 자신의 거처로 삼았고, 이곳에서 불심을 닦으며 소림사를 이끌어왔다. 나중에 주지의 경호를 위해서 팔대호원이 주위에 들어서기는 했으나, 지금도 방장실은 소림사의 산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어 외부에서의 접근이 용이한 편이었다.
진산월은 팔대호원을 지나는 동안 어떠한 제재도 받지 않았다. 하나 진산월은 팔대호원의 구석구석에 적지 않은 고수들이 숨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겉으로 보이는 평온함과는 달리 팔대호원은 허락받지 않은 자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험악하고 살벌한 곳이었다.
“종남파의 진 장문인께서 오셨습니다.”
정원이 방장실 앞에서 보고를 올리자 안에서 나직하면서도 중후한 음성이 들려왔다.
“안으로 뫼시어라.”
진산월이 소림사의 방장실로 들어서자 넓지 않은 공간에 작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한 명의 승려와 한 명의 중년인이 앉아 있었다. 승려는 사십대 후반으로 보였는데, 앉아 있음에도 상당히 커다란 체구에 부리부리한 호목을 지니고 있어 당당함을 느끼게 했다. 전체적인 이목구비가 시원시원해 보였는데, 의외로 눈빛은 맑고 깨끗해서 좀처럼 경동하지 않는 침착한 성격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었다.
다른 한 명의 중년인은 하늘색 유삼을 걸친 삼십대 중반의 수려한 용모를 지닌 미남자였다. 체구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넓은 어깨에 유달리 긴 팔을 지니고 있었고 앉아 있는 태도가 바르고 곧아서 헌앙한 기상을 느낄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진산월을 맞이했다.
“아미타불. 어서 오십시오, 진 장문인. 빈승이 대방이외다.”
중년 승려가 당당한 체구만큼이나 굵직하고 힘 있는 음성으로 자신을 소개하자 진산월 또한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종남의 진산월입니다.”
대방선사의 첫 인상은 당당함이었다. 아무리 험악한 일이 닥쳐도 꿈쩍도 하지 않을 강철 같은 강인함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거부감이 크게 일지 않는 것은 아마도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는 눈빛 때문일 것이다.
대방선사 또한 호기심과 흥미가 어린 눈으로 진산월을 찬찬히 살펴보고 있었다. 그러다 이내 맞은편에 서 있는 하늘색 유삼의 중년인을 소개해주었다.
“진 장문인께 강호의 명숙 한 분을 소개해드리겠소. 이분은 점창파의 장로이신 신응검협 조빙심 대협이시오.”
진산월의 시선이 하늘색 유삼의 중년인에게로 향했다. 진산월과 시선이 마주치자 중년인은 빙긋 웃으며 인사를 했다.
“반갑소. 강호를 진동하는 진 장문인의 소문을 듣고 언제고 만나게 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소.”
맑은 물이 흐르는 듯한 차갑고 깨끗한 음성이었다. 허리를 쭉 편 채 고고한 학처럼 꼿꼿하게 서 있는 모습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음성이었다.
진산월은 자신을 찾아온 소림사의 귀빈이 점창파의 젊은 장로이며 당금 천하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신법의 대가인 조빙심임을 알게 되자 오히려 마음이 가벼워졌다. 낙양에서 비무를 벌인 일로 조만간에 점창파의 고수들과 부딪치게 될 것이라고 각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다른 곳도 아니고 소림사 내에서 그들을 만난 것은 사태를 악화시키지 않고 일을 깨끗하게 마무리 지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세 사람이 의자에 앉자 곧 밖에서 사미승 한 명이 차를 가지고 들어왔다. 사미승이 차를 따르고 물러날 때까지 그들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주위가 조용해지자 대방선사가 얼굴에 미소를 띠며 두툼한 입술을 열었다.
“먼저 진 장문인께서 빈승의 초대에 기꺼이 응해서 먼 길을 와주신 것에 감사를 드리오.”
“별말씀을. 어차피 낙양에서 안휘성 쪽으로 가야 하는지라 이쪽 방향으로 지나가는 길이었습니다.”
“허허…. 그렇구려. 때마침 조 대협이 진 장문인을 뵙기 위해 일부러 본사를 방문하셨소. 덕분에 강호에 명성이 자자한 두 분을 한자리에서 보게 되었으니 오늘 빈승은 크게 안계를 넓히게 되었구려.”
조빙심이 대방선사의 말을 받아 진산월을 향해 말문을 열었다.
“강호에서 검을 차고 있는 검객이라면 일검에 구름을 일으킨다는 일검운해의 전설을 듣고 가슴이 설레지 않은 자가 없었을 것이오. 나도 또한 진 장문인과 매장원의 결전을 소문으로 듣고 그날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소.”
“나야말로 오래전부터 조 대협의 신화적인 행보에 갈채를 보내고 있었소. 오늘 이렇고 조 대협을 직접 보게 되니 종남산을 내려온 보람이 느껴지는군요.”
조빙심은 풍기는 인상만큼이나 날카로우면서도 꼬장꼬장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또한 자신의 문파에 대한 자긍심이 다른 누구보다도 강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진산월과의 가벼운 인사가 끝나자 바로 자신의 용건을 이야기했다.
“일전에 본 파의 제자들이 진 장문인을 만난 자리에서 자신들의 지위를 망각하고 먼저 친선비무를 제의했다고 들었소. 제자들이 젊은 혈기에 일파의 존주에게 지나친 무례를 저지른 것 같아 내심 놀라고 당황했었소.”
“낙양에서 만난 귀파의 제자들은 정말 앞날이 기대되는 뛰어난 인재들이었소. 조 대협께서는 그들이 혹시 본 파에 무례라도 저지르지 않았나 걱정하시는 모양인데, 그런 일은 없었소.”
조빙심의 칼날같이 예리한 눈빛이 진산월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진산월의 의중을 탐색하려는 의도였으나 진산월의 표정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본 파의 제자들이 실례를 범하지 않았다니 다행이오. 그 녀석들에게 듣자니 진 장문인의 사제 두 사람의 실력이 정말 대단했던 모양이오. 그들은 강호의 유구한 명문정파였던 종남파의 저력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하오.”
“나야말로 점창파 무공의 다채로움과 심오함에 새삼 감탄을 금치 못했소.”
조빙심의 음성이 한층 더 진지해졌다.
“사실 강호에서 명문정파의 제자들이 서로 실력을 견주어볼 수 있는 기회란 그리 많지 않소. 게다가 본 파의 제자들은 강호에서 행도하는 경우가 드물어서 그런 기회를 거의 갖지 못했는데, 이번에 명문정파의 힘이 어떤 것인지를 직접 경험하고 자신들의 모자람을 잘 알게 되었으니 정말 운이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소.”
조빙심이 자꾸 낙양에서의 비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려는 데 비해 진산월은 그 일을 대수롭지 않은 일로 보이도록 노력했다.
“그냥 단순히 자신이 익힌 무공을 선보이는 자리였을 뿐이오. 승패를 가르거나 누가 우위에 섰는지를 판단하는 일은 없었소.”
“나도 단순히 두 번의 비무로 그런 일이 발생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소. 그런데 강호의 인심이란 것이 워낙 이상해서 남들은 그렇게 보지 않는 것 같소.”
“남들이 무어라고 하든 진신을 그렇지 않다는 걸 조 대협도 알고 있지 않소?”
“물론 나는 진 장문인의 말씀을 전적으로 믿고 있소. 하지만 그래서 더욱 이번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오. 본 파의 제자들이 몇 년 만에 처음으로 타파의 제자를 만나 사심 없이 서로의 실력을 견주어볼 기회였으니 말이오.”
진산월의 조빙심의 날카로운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보았다.
“조 대협께선 내가 어떻게 해주기를 바라시오?”
조빙심의 탈속한 듯한 고고한 얼굴에 한 줄기의 난감한 빛이 떠올랐다. 진산월이 대놓고 정면으로 물어보자 막상 대답하기가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하나 이내 그는 결심을 굳힌 듯 입을 열었다.
“나는 진 장문인께서 본 파의 다른 제자들에게도 그 기회를 주셨으면 하오.”
일을 자꾸 확대시키려는 듯한 조빙심의 말에 진산월은 내심 탐탁치가 않았다. 그가 듣기로는 조빙심은 성격이 날카롭고 예민하기는 했으나 사리가 분명하고 일의 진퇴가 명확해서 무척이나 깔끔한 사람이라고 했다. 젊은 나이에 거대 문파의 장로가 되었으면서도 명성이나 지위로 남을 억누르려고 하지도 않았고 무리하게 일을 진행하여 소란을 일으킨 적도 없다고 했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리만치 집요하게 낙양에서의 비무를 걸고 넘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진산월이 말없이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 조빙심도 더 이상은 무어라고 입을 열지 않았다. 강호에 알려진 그에 대한 소문이 사실이라면 지금 조빙심은 사태가 이렇게 진행되는 것에 대해 스스로 불만을 가지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자 문득 진산월은 조빙심이 자신을 찾아온 것이 혼자만의 판단이나 결정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이 말없이 각기 다른 상념에 잠겨 있자 대방선사가 빙긋 웃으며 굵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두 분의 이야기를 들으니 빈승도 절로 흥미가 동하는군요. 본사의 제자들도 그런 좋은 경험을 공유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만, 두 분 의향은 어떠신지?”
뜻밖의 말에 진산월은 물론이고 조빙심의 얼굴에도 당혹스런 표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방장의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허허…. 조 대협이 말씀한 대로요. 아무런 후유증을 걱정하지 않고 다른 문파의 제자들과 정당히 실력을 겨룰 수 있는 기회란 결코 흔하지 않소. 본사의 제자들도 그런 기회가 있다면 기꺼이 동참하려 할 거요.”
조빙심은 대방선사의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 한동안 눈을 반짝인 채 그를 응시하더니 이내 씁쓸하게 웃었다.
“그건 제가 결정할 일이 아닌 듯하군요.”
두 사람의 시선이 자연스레 진산월에게로 향했다.
‘어제 일이 점점 더 커지는 것 같구나.’
진산월은 고소를 금치 못하면서도 대방선사의 제의가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가 조빙심의 비무 제안을 내켜하지 않았던 것은 비무 결과에 상관없이 자칫하면 점창파와 대립 관계가 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겨우 강호에 새롭게 모습을 드러내려는 종남파 입장에서 구대문파에 속한 점창파와 뚜렷한 이유도 없이 척을 지게 된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 이미 쾌의당과 흑갈방 등의 적이 만들어진 상황에서 자칫 명문정파들과도 적대시하는 사이가 된다면 문파의 명성을 드높이고 구대문파의 지위를 되찾으려는 종남파로서는 일도 시작해보기 전에 고립무원의 신세가 될지도 몰랐다.
그런데 양자비무가 아닌 소림사가 개입된 비무라면 상황이 달랐다. 삼자간의 비무라면 어느 특정문파와 대립 관계에 빠질 가능성도 희박했고, 쓸데없는 경쟁심으로 비무가 격렬해지는 것을 제어하기도 수월했다. 무엇보다 강호의 최고 문파 중 하나인 소림사의 실력을 알아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니겠는가? 더구나 대방선사가 자신의 입으로 후유증 없는 공평한 비무를 거론했으니 이런 상황이라면 오히려 자신이 나서서 부탁을 해도 시원치 않을 것이다.
진산월은 잠시 생각해보다가 이내 마음을 결정하고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방장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해주시니 용기가 나는군요. 삼파가 어울릴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허허…. 고맙소. 사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본사에서도 진 장문인과 종남파의 고수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제자들이 많이 있소. 이번 기회에 서로의 실력을 비교하면서 친분을 쌓는다면 앞으로 세 문파 사이의 관계 진전에도 큰 도움이 될 거요.”
조빙심도 대방선사의 제안이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정말 좋은 일입니다. 저도 종남파의 무공을 눈앞에서 직접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군요. 방장께서는 어떤 식으로 비무를 진행할지 염두에 두신 게 있습니까?”
“거창하게 할 필요 있겠소? 어차피 젊은 제자들의 솜씨를 보는 자리이니 각 파에서 두 명씩 나와서 번갈아가며 겨루면 되지 않겠소?”
조빙심은 잠시 생각하다가 신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두 명으로는 제대로 실력을 발휘하기가 어렵지 않겠습니까? 마침 이번에 저를 따라 소림사로 온 제자가 모두 다섯 명이니 본 파에서는 다섯 명이 나서도록 하겠습니다.”
대방선사가 진산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진 장문인의 생각은 어떻소?”
“저와 동행한 본 파의 제자들이 다섯 명이긴 한데 그중 두 명은 아직 무공에 입문한 지 한두 달밖에 되지 않아서 이번 비무에 참여시키기는 힘듭니다. 세 명 정도가 적당할 듯하군요.”
“그러면 세 명씩 나오는 것으로 하는 게 어떻겠소?”
대방선사가 조빙심을 돌아보자 조빙심은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각 파에서 세 명씩이라면 모두 아홉 명인데, 어떤 식으로 비무를 하는 게 좋겠습니까?”
“한 명이 나서서 질 때까지 싸우는 방식이 어떻소? 다만 어느 한 명이 너무 부각되는 것은 이번 비무의 취지에도 맞지 않고 자칫 분위기가 과열될 수 있으니 두 번을 이기면 다음 사람하고 교체하는 게 좋을 것 같소. 그리고 승패의 판단은 각 파에서 한 명씩 공증인을 내보내 그들이 결정하게 하면 무난할 것 같은데 두 분의 생각은 어떠시오?”
“좋은 생각 같군요. 그런 식으로 해서 각 파의 출전자가 거둔 승수를 합산한다면 비무의 결과를 알기에도 일목요연할 듯싶습니다.”
“허허…. 조 대협의 호승심이 강해서 남에게 지기를 싫어한다더니 과연 그렇구려. 개개인의 비무로 승패를 가리면 되었지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 문파의 우열을 가름할 필요가 있겠소?”
대방선사가 점잖게 웃자 조빙심의 얼굴에도 약간의 미소가 떠올랐다.
“제 호승심이 남다르다는 건 저 자신도 알고 있습니다. 고치려고 해도 잘되지 않더군요. 하지만 삼파가 비무를 시작하게 된 이상 강호에서 어떤 식으로든 그 결과가 알려지게 될 겁니다.”
“그거야 우리만 입을 다물면 누가 알겠소?”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강호에는 소문이 퍼지게 될 것입니다. 굳이 그걸 막는다는 것도 부자연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대방선사도 강호의 생리에 대해 잘 알고 있는지라 삼파가 비무를 벌이게 되면 아무리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 수많은 말들이 오갈 거라는 것도 능히 짐작이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두려워서 일을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강호의 소문이 두려워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한다면 강호인으로서 살아갈 자격이 없는 것이다.
게다가 대방선사로서는 이번 비무를 꼭 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비무를 통해 확인해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조빙심이 진산월을 찾아 소림사로 온 것은 참으로 공교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만일 조빙심이 와서 진산월에게 비무를 청하는 일이 없었다면 대방선사는 무슨 이유를 들어서든 종남파와 비무를 하려 했을 것이고, 그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대방선사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일이 되었을 것이다.
진산월이 숙소인 지객당의 후원으로 돌아온 것은 낙일방 등이 짐 정리를 마치고 객청에 모여 차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오셨군요. 대방선사를 만났습니까?”
낙일방이 황급히 일어나 자리를 권하며 묻자 진산월은 짤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로 장문사형을 만나자고 한 겁니까?”
“그 이야기는 아직 하지 않았다.”
낙일방이 짙은 검미를 꿈틀거리며 다소 불만족스런 음성을 내뱉었다.
“사람을 불러놓고는 그 이유도 알려주지 않다니 아무리 소림사의 방장이라고 해도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
삼 년 전에 소림사에서 받았던 냉대를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는 낙일방으로서는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자신들이 무시당하는 것 같아 불쾌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 대상이 자신이 하늘처럼 생각하고 있는 진산월이라면 불쾌함을 넘어 분노가 치밀어오를 수밖에 없었다.
진산월은 준수한 얼굴이 붉게 상기된 낙일방을 쳐다보며 빙긋 웃었다.
“그동안 급한 성격이 고쳐진 줄 알았더니 여전하구나. 어차피 때가 되면 말해줄 텐데 무얼 그리 조급하게 생각하고 있는 게냐?”
낙일방은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괜한 자격지심 같지만 소림사 방장이 우리를 아무 때나 부를 수 있는 존재로 생각하는 것 같아 갑자기 화가 났습니다.”
“그럴 리 있느냐? 대방선사가 나를 초대한 이유를 말하지 않은 것은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어 진산월은 방장실에서 조빙심을 만난 이야기와 그 후에 벌어진 상황을 차분하게 설명해 주었다. 낙일방을 비롯한 동중산과 종남파의 고수들은 모두 눈을 반짝인 채 진산월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들은 소림사와 점창파 고수들과 비무를 벌이게 되었다는 말에 두려움을 느끼기보다는 오히려 흥분과 기대감으로 설레는 표정들이었다.
뇌일봉 또한 흥미와 호기심이 절로 일어 불쑥 입을 열었다.
“조빙심이 점창파에 대한 자긍심이 남달라서 다시 도전해올 줄은 알았지만 대방선사까지 나설 줄은 몰랐군. 대방선사에게 혹시 다른 의중이 있는 것은 아니냐?”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대방선사가 이번 일을 몹시 기꺼워한다는 느낌은 들더군요.”
“기꺼워한다니?”
“일이 이렇게 진행되는 것에 흥겨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자신이 바라는 대로 이루어져 흐뭇해하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뇌일봉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조금 전보다는 한결 신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대방선사는 호탕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일을 진행하는 데에 무척이나 치밀하고 섬세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얼핏 그가 아무 생각 없이 지시한 일이라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무언가 필연적 이유가 있거나 손뼉을 칠 정도로 절묘한 행보인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러니 이번 비무를 너무 단순한 삼파간의 친선으로만 생각해선 안 될 것 같구나.”
진산월은 그 말에는 아무 대답도 없이 지금까지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는 동중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네 생각은 어떠냐?”
뇌일봉은 진산월이 다른 사람도 아닌 동중산의 의견을 묻는 것을 보고는 동중산의 종남파에서의 비중이 생각보다 훨씬 높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천호리가 종남파의 지낭이라는 강호의 소문이 잘못된 것이 아닌 모양이군.’
확실히 지난 며칠간 동행하면서 지켜본 동중산의 모습은 과거의 약삭빠르고 이기적인 행태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더구나 낙일방을 비롯한 종남파의 어린 제자들이 은연중에 그에게 의지하는 모습도 곧잘 보여서 뇌일봉으로서는 의아함과 당혹감을 느끼고 있었다.
‘대체 이들에게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기에 불과 몇 년 동안에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단 말인가?’
뇌일봉은 앞으로 더욱 관심을 가지고 동중산을 지켜보리라고 결심했다.
동중산은 침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제자는 조빙심이 우리를 만나기 위해 소림사에 왔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상황이 조금 이상하게 흘러간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낙양에서 소림사로 오기로 한 것은 소림사 방장의 초청을 받은 후입니다. 그런데 조빙심이 우리보다 먼저 소림사에 와 있다는 것은 사전에 그가 미리 우리의 이동 경로를 알고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진산월은 묵묵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동중산은 외눈을 반짝이며 신중하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다.
“물론 조빙심이 때마침 소림사 근처를 지나가다 우리의 소식을 듣고 소림사로 달려왔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진산월이 조용히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니면 소림사에 볼일이 있어서 오던 중일 수도 있겠지.”
“그럴 수도 있겠지요. 어쨌든 조빙심은 지나치게 빨리 소림사에 왔습니다. 그리고 장문인께 비무를 청했고, 대방선사는 기다렸다는 듯 그 비무에 소림사도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장문인께서 대방선사의 제의를 받아들인 것은 자연스럽고 현명한 선택이었습니다만, 그 과정을 되짚어보면 확실히 의문스러운 점이 군데군데 눈에 뜨입니다.”
진산월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다시 물었다.
“만약 대방선사가 삼파비무를 의도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좋게 생각하면 본 파와 점창파의 비무로 양파 사이의 감정의 골이 깊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겠고, 나쁘게 생각하면 이번 기회에 강호에 본격적으로 출도한 본 파의 기세를 한풀 꺾어놓을 심산일 수도 있겠지요. 그 외의 다른 이유는 저로서는 감히 짐작할 수 없습니다.”
그 말에 중인들의 표정이 모두 무겁게 변했다. 만일 후자의 경우라면 이번 비무는 당초 예상보다 훨씬 더 흉험할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에 따라 종남파는 강호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낭패스런 상황에 처하게 될 수도 있음을 직감한 것이다.
“비무의 결과에 따른 상황은 어떻게 될 것 같으냐?”
“세 문파가 서로 비슷하게 승패를 나누어 가진다면 본 파로서는 오히려 강호에 명성이 높아지게 될 것입니다. 소림사 내에서 구대문파 중의 두 문파와 정면으로 겨루어 뒤지지 않은 셈이니 말입니다. 우리로서는 가장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듣고 있던 전흠이 다소 어리둥절한 듯 물었다.
“이왕 하는 비무라면 압도적으로 이기는 게 더 좋지 않겠나?”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두 문파를 상대로 일방적인 우세를 점한다면 비무는 점차로 격해지게 되고, 다른 문파가 비무의 결과에 승복하지 못할 시에는 또다시 비무를 벌여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상황이 따라서는 그들을 적으로 만드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뇌일봉이 동의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구대문파의 자존자대한 자긍심이라면 능히 그러고도 남지.”
전흠의 표정이 구겨졌다.
“그렇다고 질 수도 없지 않은가?”
“물론 그렇습니다. 만약 두 문파에 일방적으로 패하게 된다면 아무리 그들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간다 할지라도 강호에서 본 파의 명성은 곤두박질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가장 피해야 할 일입니다.”
“제길. 크게 이겨도 안 되고 크게 패해도 안 된다니…. 승패란 것이 마음먹은 대로 될 리도 없는데 우리보고 어쩌란 말인가?”
전흠이 투덜거리자 진산월이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무얼 그리 걱정하는 거냐? 너희는 그저 비무에 최선을 다하면 되는 일이다.”
“동 사질이 말했지 않소? 너무 일방적으로 이겨도 문제고 패해도 문제라고……”
“그건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전흠은 진산월이 자신을 무시하는 줄 알고 울컥하여 절로 인상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하나 진산월의 다음 말을 듣자 자신이 너무 성급하게 판단했음을 깨달았다.
“우리가 일방적으로 앞서 나간다면 소림사에서 알아서 그에 맞는 상대자를 출전시킬 것이다.”
“만약 우리가 계속적으로 패한다면…..?”
“너와 일방이 있는데 그럴 리가 있느냐? 너는 설마 그들을 상대로 일승을 올릴 자신도 없는 거냐?”
“누가 자신이 없다고 했소?”
전흠은 냉랭하게 쏘아붙였으나 얼굴 표정은 어느새 평상시로 돌아와 있었다. 자신은 몰라도 낙일방이 있는 한 종남파가 전패할 리는 없었다. 그리고 전승을 하면 또 어떤가? 언제 종남파가 다른 문파와의 충돌을 두려워해서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한 적이 있는가?
만에 하나 그런 사태가 벌어진다 해도 장문인이 버티고 있는 이상 어떠한 어려움도 능히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자 전흠은 갑자기 마음이 밝아지며 어서 빨리 비무 일이 오기를 고대하는 심정이 되었다.
진산월은 전흠의 표정이 변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 결과에만 신경을 써서 과정을 소홀히 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비무의 결과로 어떤 일이 벌어지건 우리는 매순간에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이다.”
전흠은 물론이고 낙일방을 비롯한 종남파의 제자들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진산월은 담담한 눈으로 그들을 둘러보다가 나직하면서도 힘 있는 음성으로 말을 맺었다.
“중요한 것은 물러서지 않는 것이다. 신념이야말로 우리의 가장 큰 무기라는 것을 잊지 마라.”
모든 제자들은 마음속으로 소리 높여 외쳤다.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장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