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0권 소림기변(少林奇變)편 : 6화
제 204장 검풍권풍
조금 전의 비무에서 승리한 정화에게는 일각 정도의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숨 가쁜 승부의 흥분을 가라앉힌 정화가 다시 연무장 중앙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점창파에서 한 명의 젊은 고수가 미리 나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체구가 건장하고 얼굴이 네모난 이십대 후반의 청의인이었다.
“점창파의 일대제자인 양인모라 하오. 나도 검으로 솜씨를 겨루어보겠소.”
양인모는 점창파의 일대제자들 중에서 강호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하나 수중의 검을 천천히 들어올려 중단을 겨냥한 그의 자세는 강호에서 평생을 굴러온 일대검호에 못지 않은 완벽한 것이었다.
대방선사는 양인모가 앞으로 나올 때부터 호기심어린 눈으로 그를 주시하고 있다가 대현을 향해 물었다.
“저 시주는 처음 부는데, 혹시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있나?”
대현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도 별로 아는 게 없습니다. 다만 점창파의 제이장로인 도군홍의 셋째 제자라고만 알고 있습니다.”
“도군홍이라면 점창파의 최고어른인 백리궁 대협의 대제자가 아닌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십방랑자 사효심의 사형이기도 하지요.”
대방선사는 더욱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호오…. 예전에 내가 듣기로는 원래 도군홍은 점창파의 장문인직에 내정되어 있다가 사효심이 실종되자 장문인직을 포기하고 제이장로에 머물렀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인가?”
“그렇다고 알고 있습니다. 도군홍은 사효심과 유달리 친분이 각별해서 사효심의 실종으로 정신적인 타격을 받고 한동안 칩거해 있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무공 실력만 놓고 보면 현재의 장문인인 장거릉 대협보다 더 강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장 대협은 무공이 뛰어나기보다는 인망이 두텁고 사람을 다스릴 줄 아는 인물이지. 당시에 사효심의 실종으로 다소 뒤숭숭했던 점창파의 분위기를 일신하고 체제를 정비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인선이었네.”
“저도 장 대협의 인품이 뛰어나고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기용해서 많은 점창파의 제자들이 그분을 추종한다는 말은 익히 들었습니다.”
“아무튼 저 시주가 도군홍의 제자라면 결코 만만한 실력이 아니겠군. 오늘은 정말 여러모로 즐거운 일이 많군그래.”
대현이 대방선사의 미소에 찬 얼굴을 보며 다소 무거운 음성을 내뱉었다.
“장문인께서는 이번의 삼파비무를 너무 즐기시는 것 같습니다. 너무 자주 웃으시니 다른 문파에서 어떻게 생각할지 조금 걱정이 됩니다.”
“허허…. 솔직히 본사에서만 기거하느라 조금 답답했던 건 사실이네. 그런데 오늘 이렇게 다른 문파의 전도양양한 젊은 인재들의 무공을 보게 되니 눈이 즐겁고 마음이 행복해서 입가에 절로 미소가 그치지 않는군그래.”
자신의 말에도 대방선사가 더욱 크게 웃자 대현은 고개를 내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 양인모와 정화의 비무가 시작되었다. 두 사람의 격전은 그 전에 있었던 전흠과의 대결과는 여러모로 달랐다. 양인모가 신중을 기하려고 그랬는지 아니면 정화가 피곤함을 느꼈는지는 모르지만 두 사람 모두 상대를 단숨에 패배시키기보다는 조심스런 탐색전을 펼쳤다. 그래서 먼저 있던 비무보다는 한결 심심해 보였다.
하나 그 덕분에 소림사와 점창파 무공의 특징이 두 사람의 몸에서 여실히 드러나서 오히려 보는 맛은 더욱 각별했다. 장중하면서도 예리함이 번뜩이는 정화의 검법과 빠르고 날카로운 양인모의 검법은 서로 잘 어울려 보였다.
하나 시간이 경과하면서 두 사람의 대결도 조금씩 치열하게 변하고 있었다.
양인모는 점창파의 유명한 회풍무류검이나 분광십팔수검이 아닌 전혀 다른 검법을 사용했는데, 그 경쾌함과 검로의 자유분방함은 사람들을 찬탄케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대방선사는 자신의 지위도 잊은 채 몇 번이고 탄성을 토해냈다.
“호! 저런 식의 변화는 처음 보는군. 어이쿠….. 저 검초는 나도 뜻밖인데? 아니 저렇게 움직이는 수도 있었군.”
옆에서 대현이 몇 번이나 눈짓을 주었으나 대방선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연신 감탄성을 발하며 비무를 관전하고 있었다.
“사제는 저 시주가 펼치는 검법이 무엇인지 알고 있나? 회풍무류검보다 검로가 자유롭게, 분광십팔수검보다 더 날카롭군. 그러는 와중에도 명문정파다운 정당함을 잃지 않고 있으니 절세의 검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군. 그렇다고 사일검법은 아닌 것 같고….”
대방선사는 사일검법을 본 적이 있기 때문에 양인모의 검법이 사일검법과는 전혀 다른 검로를 가지고 있음을 알아보았다.
“아마도 기봉검법이 아닐까 합니다. 석년에 도군홍 대협은 기봉검법으로 한때 점창파 제일고수로 손꼽히기도 했으니 말입니다.”
대방선사는 무릎을 탁 쳤다.
“그래. 기봉검법이 있었군. 과연 한 마리 봉황이 움직이는 것처럼 빠르고 화려하면서도 위풍당당함이 서려 있으니 정말 기봉이라는 이름에 너무도 잘 어울리는구나.”
대현은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는 대방선사를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속으로 웃고 말았다.
‘장문사형은 예전부터 남들의 무공을 구경하는 걸 무척이나 좋아했었지. 장문인의 자리에 올랐으면서도 그 모습은 여전하구나.’
대방선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그가 좀처럼 보기 드문 무공광임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실제로 장문인에 오르기 전까지 그는 하루에 대부분을 무공을 익히는 데 보내고 있었다. 아마도 그가 소림사의 장문인이 되지 않았다면 보다 높은 무공을 익히기 위해 수십 년의 폐관수련에 들어갔을지도 몰랐다.
그런 점에서 대현은 가끔은 대방선사가 장문인이 된 것에 아쉬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쩌면 본사는 본사를 번성시킬 좋은 장문인을 얻은 대신에 천하제일고수를 배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쳐버린 건지도 모르지.’
세상일이란 원래 이렇든 얻는 게 있으면 반대로 잃어버리는 것도 있는 법이다. 얻는 것과 잃어버린 것 중 어느 것이 더 소중한 것이었는지는 먼 훗날 세월이 흐른 뒤에야 알게 될 것이다.
정화와 양인모의 대결은 결국 오십여 초 만에 정화의 검이 양인모의 옆구리를 베고 지나가면서 끝이 났다. 정화가 마지막으로 사용한 검초는 칠십이종절예 중 하나인 관음청강수의 휘진청담을 검으로 변화시킨 것으로, 그 검초의 기발함이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정도였다.
“잘 배웠소. 다음에 또 기회가 닿는다면 달마십삼검의 진정한 정수를 맛보고 싶구려.”
양인모는 자신의 패배에도 담담한 모습으로 정중하게 포권을 한 후 주저 없이 몸을 돌렸다. 그는 정화가 전흠을 상대할 때와는 달리 달마십삼검의 후반 삼초식을 펼치지 않은 것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 자신 또한 오늘 선보이지 않은 절학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친선비무에서 자신의 숨겨진 절학들을 모두 내보이는 바보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전흠과 양인모는 패배에도 불구하고 떳떳한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대방선사의 기대대로 소림사의 정화는 두 번의 비무를 모두 승리하여 소신승이라는 자신의 외호가 과장이 아님을 모두에게 증명해 보였다.
정화가 자리로 돌아가자 대방선사가 다시 걸걸한 음성을 내뱉었다.
“아미타불. 두 문파에서 주인 대접을 해준 것 같아 송구스럽소. 이번에는 어느 파에서 나오시겠소?”
조빙심이 진산월을 한번 쳐다보고는 이내 입을 열었다.
“진 장문인이 반대하지 않는다면 이번에는 본 파에서 먼저 나설까 하오.”
“그렇게 하시지요.”
진산월이 선뜻 승낙을 하자 조빙심은 자신의 뒤에 있는 인물들 중 한 명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그 인물은 조빙심에게 인사를 하고는 성큼 연무장의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작고 왜소한 체구에 머리가 까치집처럼 헝클어진 청년이었다. 워낙 덩치가 작아서인지 나이도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았으나 얼굴 표정은 거의 무심에 가까워서 쉽게 상대할 인물이 아님을 느끼게 했다.
“점창파의 가일소요.”
그 청년은 짤막하게 자신의 이름만을 말한 후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 바람에 뜨겁게 달아올랐던 장내의 분위기가 급격하게 식어버렸다.
대방선사가 조용히 웃으며 한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정현, 나가서 점창파의 무공을 견학하고 오거라.”
대방선사의 뒤에 서 있던 다섯 명의 젊은 승인들 중 평범한 체구의 승려가 공손하게 반장을 하고는 연무장으로 들어왔다.
“정현이라 합니다. 소승은 한 쌍의 육장으로 가 시주에 맞서볼까 합니다.”
정현이라는 승은 덩치도 그리 크지 않았고 얼굴도 평범해서 남의 눈에 잘 띄지 않는 모습이었다. 하나 가끔씩 눈을 돌릴 때마다 보석처럼 영롱한 빛이 번뜩거리곤 했다.
정현이 천천히 자신의 양손을 들어올릴 때까지도 가일소는 못박힌 듯 그 자리에 우뚝 선 채로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어찌 보면 싸울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처럼 보였고, 또 어찌 보면 정현 정도는 언제라도 쓰러뜨릴 수 있다는 광오한 인물로도 보였다.
정현은 가일소의 태도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고 들어올린 양손을 느릿하게 움직여 앞으로 쭈욱 내뻗었다. 일단 움직이기 시작하자 정현의 손은 눈부시도록 빨랐다. 손을 내뻗은 동작이 채 눈에 어른거리기도 전에 정현의 오른손은 가일소의 가슴에 거의 도달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정현의 왼손은 가일소가 움직일 것에 대비해 좌측의 빈 공간을 선점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단 일수에 상대의 상반신을 제압함은 물론이고 이후의 공격까지 완벽하게 대비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소금강신수 중의 이마분종이었다.
막 정현의 오른손이 가일소의 가슴을 강타하려는 순간, 가일소의 몸이 처음으로 움직였다. 몸 전체가 아니라 오른팔과 어깨뿐이었지만 그 결과는 실로 놀라웠다.
팟!
무얼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는 사이에 눈부신 검광 한 줄기가 정현의 목덜미를 향해 쏘아져 갔다. 그 속도는 가히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할 정도였다.
“앗?”
장내의 누군가가 다급한 경호성을 터뜨렸다 워낙 검광의 속도가 빨랐는지라 정현의 목이 그대로 그 검광에 꿰뚫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던 것이다.
정현의 몸이 빠르게 선회했다. 그것은 거의 본능적인 동작이었다. 아슬아슬하게 검광이 자신의 목덜미 옆을 스치고 지나가자 정현은 절로 소름이 쭈욱 끼쳤다. 하나 회전하던 기세를 살려 추호도 망설이지 않고 가일소의 가슴팍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맨손으로 병장기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가까이 접근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었다. 특히 접근을 하면서 상대의 병기에 두려움을 갖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두려움을 갖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몸이 위축되고 시야가 좁아져서 자신이 의도한대로 움직이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정현의 동작은 접근전의 교본과도 같았다. 가일소의 무시무시한 쾌검을 코앞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그의 몸은 빠르고 표홀했으며, 움직이는 데 한 치의 주저함도 없었다. 게다가 그렇게 정신없이 움직이면서도 시선은 줄곧 가일소의 두 눈에 고정되어 있었다.
가일소는 살인적인 일검을 발출한 후 자신을 향해 빠르게 접근하는 정현을 향해 다시 삼검을 날렸다. 그의 검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런데도 다른 어떤 검법보다 무서워 보였다. 곧장 직선으로만 날아드는 그의 검은 어떠한 허식이나 속임수도 용납지 않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대방선사의 고리눈에서 이글이글거리는 듯한 강렬한 눈빛이 흘러나왔다.
“정말 대단한 쾌검이구나. 점창파에 저런 쾌검법이 있었던가?”
점창파는 물론 빠르고 강맹한 검법으로 이름이 높았다. 하나 그들의 분광십팔수검이 아무리 빠르다 해도 지금 가일소가 보이는 만큼의 속도는 낼 수 없었다. 더구나 변화가 다양한 분광십팔수검에 비해 가일소의 검법은 일직선으로만 이루어진 단순무비한 것이었다. 하나 그 단순함이 가공할 빠름과 결합하자 그야말로 보는 이의 가슴을 섬칫하게 하는 무시무시한 검법으로 변모한 것이다.
대현 또한 눈도 깜빡이지 않고 장내의 격전을 주시하고 있었다.
“정말 무서운 쾌검이로군요. 저도 점창파에 저런 쾌검이 있는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눈에 익단 말이야. 가만…..”
고개를 갸웃거리던 대방선사의 두 눈에 한 줄기 신광이 번뜩였다.
“그렇군. 저건 분광십팔수검에서 모든 변식을 제거하고 오직 빠르기만을 강조한 것이로군. 지금의 일직선으로 세 번 찔러대는 공격도 분광십팔수검 중의 분광추영의 변형이 아닌가?”
대현은 안광을 돋우어 장내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장문사형의 말씀을 듣고 보니 그렇게도 보이는군요. 그런데 단순히 변식을 제거했다고 저런 위력이 나올까요? 분광십팔수검보다 한층 더 무서운 검법이 아닙니까?”
“변초를 제거한 대신 빠르기를 늘리려고 특이한 행공을 했을거야. 어쩌면 대응경의 공력을 일부 가미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검로가 너무 단순해서 절정의 검객들을 상대하는 데는 무리가 있을 것 같습니다.”
대방선사가 그를 힐끔 쳐다보더니 희미하게 웃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지금도 정현이 잘 대응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거야 저 가 시주가 비슷한 속도로만 펼치고 있으니까 그렇지.”
대현은 그 말에 무언가를 깨달은 듯 짤막한 경호성을 터뜨렸다.
“아! 그렇군요. 속도에 변화를 준다면 아무리 검로가 단순하다해도 막아내기 힘들겠군요.”
“그렇지. 아무리 빨라도 속도가 일정하면 상대하기 그리 힘들지않네. 하지만 무서운 쾌검이 불규칙한 속도로 날아온다면 막아내기 쉽지 않을 걸세. 그리고 저게 저 검법의 가장 빠른 속도라는 보장도 없지 않나?”
“그렇지요. 이런 친선비무에서 전력을 기울여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줄 리는 없으니 말입니다.”
“그거야 이쪽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아무튼 덕분에 이런 좋은 눈요깃거리가 생겼으니 나로서는 그저 즐거울 뿐이네.”
이들이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에 비무는 종료가 되었다.
가일소의 쾌검을 뚫고 계속적으로 그에게 접근하려던 정현이 몸을 뒤로 눕혔다가 옆으로 일어서며 내지른 가일소의 일검에 가슴을 제압당해버린 것이다. 마지막 순간에 가일소가 검을 멈추었기에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정현은 그대로 가슴이 꿰뚫리고 말았을 것이다.
이것을 본 대방선사가 나직하게 혀를 찼다.
“쯧. 너무 접근하는 데만 몰두하느라 막상 상대도 변칙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걸 생각지 못한 게로군. 가 시주의 마지막 동작은 응조칠식경공 중의 비응번신 같은데 아주 절묘한 시기에 펼쳤군그래. 확실히 재주가 뛰어난 시주인 게야.”
대방선사의 시선이 종남파에게로 쏠렸다.
“자, 이제 누굴 보내 생각이신가. 진 장문인? 가급적이면 그 주먹을 잘 쓴다는 미남 시주가 나왔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중인들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진산월은 동중산을 돌아보았다.
“이번에는 네가 나서야 되겠구나.”
동중산은 공손하게 인사를 한 후 연무장으로 걸어 나갔다.
“다녀오겠습니다.”
낙일방은 자신이 나설 생각을 하고 있다가 진산월이 동중산을 지목하자 다소 당혹스런 표정이 되었다. 진산월은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방긋 웃었다.
“왜 몸이 근질거리느냐?”
낙일방은 계면쩍은 웃음을 흘렸다.
“두 문파가 모두 승리를 거두었는데 본 파만 아직 승리가 없으니 제가 조금 초조했던 것 같습니다.”
“어차피 나는 너를 제일 마지막으로 내보낼 생각이었다.”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아마 이번에 중산이 이기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면 소림사와 점창파가 승리를 나누어 가지게 되는데, 그럴 경우 대방선사는 본 파의 체면을 생각해서 실력이 조금 뒤쳐지는 고수를 내보내려 할 것이다. 쉽게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않겠느냐?”
낙일방은 다소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가 다시 물었다.
“점창파에서는 어떻게 나올 것 같습니까?”
“그들이 낙양에서의 비무를 자신들이 패했다고 생각한다면 아마 설욕하기 위해서라도 가장 강한 수를 쓸 것이다.”
“그럼 아무런 의미도 없지 않습니까?”
“왜 의미가 없느냐? 어차피 너는 두 번의 비무를 해서 모두 승리를 해야 한다. 한 번은 쉽게 이길 수 있으니 나머지 한 번의 비무에 집중한다면 네 실력으로 충분히 가능한 일일 것이다. 반면에 네가 지금 나선다면 점창파뿐 아니라 소림사의 고수에게도 신경을 써야한다.”
낙일방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으나 크게 수긍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진산월은 마음속의 생각이 훤히 드러나는 낙일방의 얼굴을 살피고 있다가 다시 웃었다.
“내 생각이 마땅치 않은 모양이구나.”
“그건 아닙니다. 단지 저는 소림사든 점창파든 신경 쓰지 않고 저의 온전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고수와 겨루고 싶을 뿐입니다.”
“이제 정말 강호인이 되었구나. 솔직히 너를 나중에 내보내려는 것에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
“무엇입니까?”
“네가 이번에 나가서 두 번의 승리를 하게 된다면 소림사는 몰라도 점창파는 세 번째 비무에서 사력을 다할 것이다. 그럴 경우 중산이 위험에 처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아!”
낙일방은 그 점은 미처 생각지 못하고 있었기에 자신의 머리를 탁 쳤다.
“제가 너무 저 혼자만 생각했지 동 사질의 상황을 염두에 두지 않았군요.”
동중산은 사실 이번의 삼파비무에 나서기에는 그 실력이 충분치 않았다. 하나 그 외에는 다른 사람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나서게 된 것이다. 만에 하나 그보다 뛰어난 실력을 지닌 자와 만나 상대가 전력을 기울이게 된다면 동중산은 단순히 승패를 떠나 커다란 부상을 당하게 될지도 몰랐다. 진산월은 이런 점을 배려하여 점창파가 아직 여유가 있을 때 미리 동중산을 내보낸 것이다.
낙일방은 동중산과 무척 가까운 사이이면서도 비무에 너무 정신이 팔려 그의 상황을 전혀 고려치 못했다. 이것이 문파를 이끌고 있는 우두머리와 그렇지 않은 사람과의 차이였다. 한 문파를 이끄는 우두머리라면 문파의 여러 사람의 사정을 고루 감안하여 일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진산월의 예상대로 동중산은 불과 오초 만에 가일소에게 패하고 말았다. 강호에서 비천호리라는 이름으로 나름대로 명성을 쌓은 동중산이었으나 가일소의 눈부시도록 빠른 쾌검 앞에서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동중산은 부끄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자가 본 파의 명성에 먹칠을 했습니다.”
동중산은 오늘 벌어진 비무 중에서 가장 일방적으로 패했기에 더욱 면목이 없을 수밖에 없었다. 하나 진산월은 웃는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가일소의 쾌검은 나로서도 쉽게 볼 수 없는 것이다. 직접 겪어 본 소감이 어떠하냐?”
동중산의 얼굴에 씁쓸한 표정이 떠올랐다.
“아직도 본 파가 갈 길이 멀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가일소의 쾌검은 비록 무서웠지만 종남파에도 그와 견주어 손색이 없는 고수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당장 이곳에 있는 낙일방과 전흠만 해도 결코 가일소에 뒤지지 않았고, 종남산에 남아 있는 소지산도 그들에 못지않았다.
하나 점창파는 가일소 같은 고수를 얼마든지 내보낼 수 있지만 종남파에서는 다른 문파에 떳떳이 내세울 수 있는 고수의 숫자가 몇 명 되지 않았다. 그런 숫자의 부족함은 종남파가 당면한 가장 큰 문제였으며, 당장은 뾰족한 방법이 없다는 점에서 커다란 암초이기도 했다. 수십 년의 쇠락을 불과 몇 년 만에 모두 복구할 수는 없는 것이다. 동중산이 의기소침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진산월은 그의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에 그의 어깨를 가만히 두드려주었다.
“네가 생각한 본 파의 부족함은 일조일석에 메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한 걸음씩 꾸준히 걷다보면 언젠가는 반드시 목적한 곳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우리는 그저 매순간에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이다.”
동중산은 이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서 밝은 음성으로 말했다.
“너무 눈부신 쾌검을 보아서 제자의 마음이 흔들렸던 것 같습니다. 본 파도 머지않아 그들에 못지않은 성세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자, 이제 일방의 솜씨를 구경해보자.”
낙일방이 연무장의 중앙에 모습을 드러내자 주위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만큼 옥면신권이라는 이름이 강호에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이다.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연무장의 중앙에 우뚝 서 있는 낙일방의 준수한 모습은 임풍옥수라는 말에 너무도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종남파의 일대제자인 낙일방이라 하오. 어느 파의 고수분께서 먼저 가르침을 내려주시겠소?”
비무에서 일승도 올리지 못한 종남파의 현재 상황을 생각해볼 때 그가 느끼는 부담감이 막대할 텐데도 낙일방의 얼굴에는 전혀 그런 빛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오히려 뒷짐을 진 채 상대를 기다리는 그의 모습에서는 당당한 자신감과 여유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대방선사가 그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고는 이내 흡족한 듯한 감탄성을 토해냈다.
“저 시주가 바로 요즘 후기지수들 중에서 권법의 최고고수라는 바로 그 옥면신권이란 말이지? 선재로군, 선재야.”
“정말 준수한 용모에 기도 또한 범상치 않군요. 누구를 내보내시겠습니까?”
“그야 정명이지. 그 아이가 요즘 들어 부쩍 권법에 재미를 느끼고 있지 않나? 아마 제법 볼 만한 승부가 될 거야.”
대방선사의 뒤에 있던 젊은 승려들 중 가장 체구가 건장하고 키가 큰 승려가 연무장으로 걸어 나왔다. 승려의 체구는 무척이나 장대해서 낙일방보다 한 볌은 더 커보였다. 더구나 승포 자락 사이로 드러난 팔뚝과 앞가슴은 단단한 근육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마치 청동으로 만든 나한상을 보는 것 같았다.
“소승은 정명이라 하오. 소문으로만 듣던 옥면신권과 겨룰 수 있게 되어 반갑소.”
정명의 목소리 또한 우람한 체구만큼이나 굵고 묵직했다. 낙일방은 가볍게 포권을 한 후 물었다.
“정명 스님은 어떤 병기를 사용하시겠습니까?”
정명은 솥뚜껑 같은 두 개의 주먹을 들어 보였다.
“나는 본사의 나한권으로 낙 소협의 주먹에 맞서보겠소.”
낙일방은 상대가 자신에게 권법으로 승부를 걸어오자 호승심과 흡족한 마음이 동시에 솟구쳐 올랐다.
“그럼 나는 본 파의 장괘장권구식을 사용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자세를 잡자 날카로운 눈으로 서로를 응시했다. 먼저 손을 쓴 사람은 정명이었다. 정명은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맹렬한 기세로 낙일방의 상반신을 공격해 들어왔다. 나한권 중의 반타산문 일신이었는데, 언뜻 평범해 보이는 주먹 안에 막강한 힘을 담고 있어 마치 두 개의 커다란 철퇴가 날아드는 듯했다.
그에 맞서 낙일방은 오른손은 주먹을 쥐고 왼손은 편 상태로 정명의 두 주먹을 비스듬히 막아갔다. 장괘장권구식 중의 금강서벽이었다.
파팍!
두 사람의 팔뚝이 서로 허공에서 강력하게 부딪쳤다. 둘 중 누구도 물러서지 않았고, 맹렬한 기세 또한 그대로여서 중인들은 마치 불똥이 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다음 순간, 낙일방의 오른손이 미끄러지듯 정명의 팔뚝을 타고 내려와 그의 복부를 가격했다. 권에서 장으로의 변화가 어찌나 매끄러운지 마치 물 흐르는 듯 자연스러워 보였다.
정명은 엉겁결에 왼 팔뚝을 세로로 세워 낙일방의 손바닥을 막았다.
팡!
가죽북이 터지는 듯한 음향과 함께 정명의 커다란 체구가 휘청거리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정명은 비록 임기응변으로 낙일방의 공격을 막기는 했으나, 낙일방의 손바닥에 격중된 팔꿈치가 퉁퉁 부어오르며 막대한 통증이 느껴졌다.
하나 그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오히려 두 주먹을 풍차처럼 휘두르며 앞으로 돌진해 들어왔다. 얼핏 무질서해 보이는 이 초식은 나한권 중의 복호항룡이라는 것으로, 폭풍노도 같은 기세로 상대를 제압하는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낙일방 또한 장괘장권구식 중의 조운육환과 천성탈두를 연거푸 전개하여 정명을 상대해갔다. 원래 조운육환은 변화가 무쌍한 반면 강맹한 위력이 부족했고, 천성탈두는 빠르고 날카로운 데 비해 투로가 단순하고 변화가 별로 없는 초식이었다. 그런데 두 초식을 교차로 펼치자 서로의 단점이 상쇄되면서 전혀 다른 독특한 위력을 가진 무공같이 보였다.
대방선사는 종남파의 장괘장권구식이 거의 입문무공과 같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낙일방이 평범한 장괘장권구식을 교묘하게 사용하여 정명을 몰아치자 크게 감탄해 마지않았다.
“절묘한 수순이로구나. 순서와 시기가 맞아떨어져 별 볼일 없는 두 개의 초식이 무서운 절초로 변했으니 정말 재주가 놀랍구나.”
순식간에 십여 초가 지나자 장내의 대결은 누구의 눈에도 우열이 확연하게 판가름 났다. 정명은 나한권의 절초들을 사용해 맹렬하게 맞섰으나, 시간이 경과될수록 낙일방의 뛰어난 초식 운용과 다채로운 동작에 점차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그렇다고 나한권이 장괘장권구식에 뒤처지는 무공은 아니었다. 오히려 나한권은 소림 권법의 가장 기본이면서도 또한 그 정화를 담고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실제로 소림사의 승려들 중에는 평생을 나한권 하나에만 정진하여 강호를 뒤흔든 뛰어난 절세고수가 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도 정명이 일방적으로 수세에 몰리는 것은 초식의 운용과 속도에서 조금씩 뒤처지기 때문이었다. 나한권 자체의 위력은 분명 장괘장권구식보다 뛰어났으나 그가 공격을 하려 할 때마다 번번이 맥이 끊겼고, 반면에 낙일방의 공격은 항상 그가 예상치 못한 절묘한 각도를 파고들었다.
정명은 지금의 열세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전혀 다른 선택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권법만으로는 자신이 도저히 낙일방의 적수가 되지 못함을 인정한 것이다.
‘사자모니인이라면……’
한순간 그의 눈에 망설임의 빛이 떠올랐다. 하나 이내 그는 그 생각을 접어버렸다. 자신의 입으로 나한권만으로 상대하겠다고 이미 발설해 버렸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십여 초를 더 버티다가 낙일방의 주먹에 가슴을 가격 당하고는 한 차례 신형을 휘청거리다가 이내 정중하게 반장을 했다.
“아미타불. 소승은 스스로 부족함을 알고 이만 불러나고자 하오. 손에 사정을 보아주신 점에 감사드리오.”
낙일방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단정한 모습으로 포권을 했다.
“별말씀을. 정명 스님 덕에 제대로 된 나한권을 견식할 수 있어 기뻤습니다.”
낙일방이 승리를 거두자 비로소 종남파의 다른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비록 낙일방이 이길 것이라고 예상하기는 했으나, 막상 승리의 순간까지는 절로 애가 탔던 것이다.
지금까지 별로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비무를 구경하고 있던 손풍도 가슴을 쓸어내리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휴우…. 이거 심장이 떨려서 살겠나? 대체 이런 비무를 무엇 때문에 하는 거야?”
동중산이 조용히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그건 우리가 강호인이기 때문이지.”
손풍은 퉁명스런 어조로 되물었다.
“강호인이면 뭐 특별한 거라도 있소?”
“강호인은 원래 남에게 지고는 못 사는 족속일세. 한 번의 승리를 위해서 기꺼이 자신의 모든 것을 불살라버릴 수 있는 사람들이지.”
“제 명에 못 살 자들이로군.”
“그래서 강호인들의 삶을 왕왕 유성에 비유하기도 하지. 불꽃처럼 살다가 이슬처럼 사라지는 게 바로 강호인들일세.”
“나는 가늘고 길게 사는 게 신조인 사람이오.”
“본 파에 들어온 이상 자네도 이제 강호인이 되어야 하네.”
“그런 법이 어딨소?”
“그게 싫으면 한 가지 방법이 있지.”
손풍은 반색을 하며 급히 물었다.
“그게 무엇이오?”
“본 파를 나가면 되네.”
손풍의 얼굴이 휴지처럼 구겨졌다.
“제길.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요?”
동중산은 조용히 웃었다.
“어쩌겠나? 그게 바로 강호의 생리인걸. 일단 강호에서 살기로 결심했다면 하루라도 빨리 그런 생활에 익숙해져야 하네. 만약 그럴 자신이 없다면 당장이라도 강호를 벗어나는 게 좋을걸세.”
손풍은 여전히 불만족스러운 표정이 역력했으나 동중산의 말에 더 이상 토를 달지는 않았다. 자신도 조금씩 그런 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손풍은 강호인이 되어 칼 한 자루에 목숨을 맡긴 채 천하를 주유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어쩐지 그런 날이 쉽게 올 것 같지 않았다.
‘강호인이라…. 나도 저 낙 사숙처럼 사람들의 환성을 받을 수 있을까?’
지금의 낙일방의 모습에 자신을 대비시켜 보았다. 그러자 한결 마음이 밝아지며 자신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 누구는 처음부터 고수로 태어났나? 나도 하면 되는 거야. 강호에 명성을 날리는 고수가 되어서 보란 듯이 낙양의 아버지에게 본때를 보여주겠어.’
손풍은 정말 모처럼 다부진 각오를 되새겼다.
어쨌든 이번의 비무로 종남파도 비로소 첫 번째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의 마지막 비무이자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결전이 될지도 모를 승부가 낙일방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