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0권 소림기변(少林奇變)편 : 8화
제 206장 선실방담
진산월이 대방선사와 다시 마주앉은 것은 사방이 온통 붉은 노을로 물들고 있을 저녁 무렵이었다. 대방선사의 선실에 나 있는 작은 창문 사이로 붉은 해가 떨어지고 있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대방선사는 물끄러미 그 석양을 바라보고 있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장문인이 된 후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이곳에서 보는 석양이 너무도 아름답다는 것이오. 매일 저녁 저 떨어지는 해를 바라보는 것이 어느새 빈승의 가장 큰 도락이 되었소.”
진산월의 시선도 그 석양을 향해 있었다. 붉은 태양이 눈에 비치자 눈도 또한 붉게 물들어가는 것 같았다.
“정말 멋진 풍경입니다. 아쉽게도 종남산의 제 방에서는 해를 보기 힘들군요.”
“그럴 거요. 대부분의 문파는 가장 외지고 깊숙한 곳에 장문인의 거처를 정하니 말이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소림사의 옛 분들은 삶에 여유를 지니셨던 것 같습니다.”
“허허… 아니면 산중 생활이 너무 심심해서 석양을 보면서 신세한탄이라도 하려고 했는지도 모르는 일이오.”
진산월은 대방선사의 농담에 빙긋 웃으며 말을 받았다.
“설마 불심 깊은 고승들께서 그런 생각을 하셨겠습니까? 아무튼 이곳의 정취는 몹시 마음에 드는군요. 두 번밖에 오지 않았지만 편안하고 친숙한 느낌이 듭니다.”
“그런 말을 종종 듣고 있소. 아마도 그만큼 평범하고 소박한 곳이라는 뜻 아니겠소?”
대방선사의 말마따나 방장실은 별다른 집기도 없고 크기가 넓지 않아서 단촐하기 그지없었다. 다만 중앙에 있는 탁자만이 세월의 흐름을 반영하듯 고풍스럽고 질 좋은 나무로 만들어져 있을 뿐이다.
대방선사는 탁자 위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신 다음 신광이 번쩍이는 눈으로 진산월을 응시했다.
“빈승이 진 장문인을 뵙자고 한 것은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경청하겠습니다.”
“삼 년 전의 무림대집회에 진 장문인도 참석한 것으로 알고 있소.”
“그렇습니다.”
“올해가 가기 전에 그와 같은 일이 한 번 더 있을 거요.”
“무림대집회가 다시 열린단 말입니까?”
“당시와 같은 커다란 규모는 아니오. 그때는 너무 일을 크게 벌이느라 효과적으로 움직일 수가 없었소. 그래서 이번에는 구대문파를 비롯한 무림의 몇몇 인물들만 모일 생각이오.”
진산월은 잠시 침음하다가 입을 열었다.
“서장무림의 동향이 이상하다는 말은 저도 얼핏 들었습니다. 보다 자세한 사정을 알고 싶군요.”
“삼 년 전의 무림대집회는 모용 공자와 야율척이 일대일의 승부를 벌이는 바람에 별다른 성과가 없이 끝났소. 당시 두 사람의 대결은 승부가 갈리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사실은 조금 다르오.”
대방선사는 차분하면서도 굵직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그때 모용 공자는 자신의 가진바 진재절학을 모두 발휘하여 공격했지만 야율척은 오직 막기만 했을 뿐 단 한 번의 반격도 하지 않았소. 결국 삼백 초가 넘게 공격을 퍼붓던 모용 공자는 스스로의 부족함을 깨닫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소.”
“야율척이 왜 공격을 하지 않고 수비만 했는지 아십니까?”
“모용 공자가 지친 얼굴로 손을 멈추자 야율척이 말했다고 하오. ‘이것으로 자네 조부에게 진 십 년 전의 빚을 갚았네.’ 라고 말이오. 야율척은 십 년 전에 모용 대협과의 싸움에서 모용 대협이 손에 사정을 두어 자신이 크게 다치지 않고 물러난 것을 그런 식으로 보은한 것이오.”
진산월은 내심 침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과거에 정소소로부터 두 사람의 대결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 정소소는 모용봉이 야율척에게 반 수 뒤지기는 했으나 거의 비등한 싸움을 했다고 알려줬었다. 그런데 지금 대방선사의 말을 들으면 두 사람 사이의 격차는 단순히 반 수 정도가 아니었다. 어느 한쪽에서 삼백 초나 일방적으로 공격을 퍼붓고도 수비만 하는 상대를 물리치지 못했다면 적어도 한 단계 이상 차이가 나는 실력이라도 봐야 했다.
“야율척은 의기소침한 모용 공자에게 자신은 모용 대협처럼 십 년이나 기다려줄 여유가 없으니 삼 년 후에 한 번 더 기회를 주겠다고 했소. 그리고 그대는 손에 사정을 보지 않고 반드시 결판을 내겠다고 확언했다고 하오.”
대방선사는 목이 마른지 차를 한 모금 더 마신 후 말을 계속했다.
“모용 공자는 당시의 패배에 큰 충격을 받고 지난 삼 년간 구궁보에 칩거하며 오직 무공수련에만 매달렸다고 하오. 다행히 얼마전에 모용 공자가 모용 대협의 천양신공을 대성했다는 소식을 들었소. 모욕 공자는 돌아오는 중추절에 야율척과 다시 승부를 벌여 삼 년 전의 패배를 설욕할 생각이오.”
그것은 진산월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결투에서 이기게 되면 모용봉이 임영욱에게 청혼을 하려 한다는 사실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중추절까지는 몇 달의 시간이 남았지만 이미 적지 않은 서장의 고수들이 중원에 들어와 있소. 그건 진 장문인도 알고 있을 거요.”
“그렇습니다. 이곳에 오기 전에도 서장의 절정고수들인 십육사와 십이기의 몇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흑갈방을 비롯한 몇몇 중소문파들을 장악하여 중원 진출의 교두보로 삼고 상당한 세력을 확장하고 있소. 그래서 중원무림에서도 그에 대항하여 새로운 무림집회를 열지 않을 수 없게 되었소. 하지만 삼 년 전의 잘못된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 그 규모를 축소하고 정예화하려고 계획했소.”
진산월은 이미 누산산에게서 이와 같은 이야기를 들었으나 굳이 지금 대방선사에게 자신이 알고 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누산산이 그대 자신에게 이야기를 꺼냈던 것은 그녀의 즉흥적이고 경솔한 행동의 발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방선사의 표정을 보니 자신의 짐작이 맞았음이 분명했다. 대방선사는 진산월이 이번 일에 대해 전혀 모른다고 생각하고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있는 것이다.
“당시에 결성된 무림맹의 조직에 기존의 구대문파를 비롯한 명문정파들과 무림의 유명한 명숙들, 그리고 몇몇 우호세력이 동참하기로 했소.”
대방선사가 우호세력이라고 돌려 말했지만 진산월은 그것이 천봉궁을 지칭하는 것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당시의 무림맹 인물들 중에는 신상에 변이 있거나 소속을 바꾼 자들도 적지 않을 텐데 그들은 어떻게 하기로 했습니까?”
진산월의 질문은 초가보의 호법으로 활약하다 자신의 손에 죽은 패왕신창 전괴를 염두에 둔 것이다. 전괴는 무림맹 결성 당시 하락지단의 단주로 선출되었던 인물이었다.
“단주급 인물들 중 행동거지가 불분명하거나 신원이 확실치 않은 사람들은 모두 제외를 했소. 당시의 무림맹 수뇌부 중 이번 일에 동참하는 사람들은 절반쯤 될 거요.”
“이번 집회의 주최자는 누가 되는 겁니까?”
진산월이 민감한 문제를 거론하자 줄곧 평온한 안색으로 말을 이어 오던 대방선사의 얼굴에 한 줄기 곤혹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원래 이번 집회를 처음에 기획한 사람은 무림구봉 중의 한 분이신 번신봉황 이북해 대협이오. 이 대협은 줄곧 서장무림의 동향을 주목하고 있다가 올해 들어와서 그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 보고 빈승을 비롯한 몇몇 무림 명숙들에게 새로운 무림집회의 필요성을 역설했소.”
“….”
“그런데 막상 무림집회를 열기 위한 준비모임을 하게 되자 이 대협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이 대협의 휘하 세력인 성숙해의 인물들만 참여를 했소. 그러자 무림맹주인 일장개천지 위지립 대협이 이에 불만을 표출하여 주도권을 놓고 알력이 벌어지게 되었소.”
“번신봉황 이 대협이야 행적이 신비롭고 신룡 같은 분이니 남들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도 특별히 문제가 될 것은 없지 않겠습니까?”
“빈승도 그렇게 생각하오만, 위지 대협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오. 그의 말인즉, 모임의 주최자가 앞장서서 일을 진행해야만 삼 년 전과 같은 시행착오가 벌어지지 않는다는 거요. 그런데 모임을 발의만 해놓고 참석도 하지 않는다는 건 너무 무책임한 행동이라는 것이지. 몇몇 사람들이 그의 말에 동조를 하면서 사태가 심각해졌소.”
대방선사는 일이 시작도 되기 전에 내분부터 일어나게 된 현재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표정이 무거워졌다.
“위지 대협의 말도 사실 틀린 말은 아니오. 삼 년 전의 실패는 수뇌부를 너무 방만하게 조직하여 위에서 결정한 내용이 밑에까지 제대로 연결되지 않았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소. 위지 대협은 수뇌부를 확실히 정해서 보다 많은 실권을 주어 명령체계를 신속하고 분명하게 하자는 것이지.”
“무림맹주라면 그 정도 권리는 있지 않겠습니까?”
“허허… 모두 진 장문인과 같은 생각이라면 빈승이 굳이 말을 꺼낼 필요도 없었을 거요. 위지 대협이 수뇌부에 몇몇 자신의 측근들을 기용하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불만을 표출했소. 그들은 삼 년 전의 무림집회가 이미 실패로 드러난 만큼 이번에는 새로운 수뇌부를 결성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소.”
“그들이 누굽니까?”
대방선사의 얼굴에 무거운 빛이 떠올랐다.
“그런 주장을 하는 자들의 중심에 있는 사람은 무당파의 현령 장문인이오.”
그제서야 진산월은 대방선사가 왜 그 일에 대해 이토록 난감해 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무림맹주와 무당파의 장문인이 주도권을 놓고 다투고 있으니 소림사의 장문인인 대방선사로서는 누구의 편을 들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지금 집회는 열리지도 않았는데 그 집회의 주최자 자격을 놓고 위지 대협과 현령 장문인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는 실정이오. 강호의 분란을 막기 위해서는 둘 중 한 사람이 양보를 해야 하는데 아무도 물러나려 하지 않으니 사태가 점점 심각해질 수밖에 없소. 그러다 현령 장문인이 일방적으로 유월 일일에 무당산에서 집회를 열겠다고 선포하는 일이 벌어졌소.”
“그래서 무림에 무당에서 커다란 모이이 있다는 소문이 퍼진 것이로군요.”
“그렇소. 극비리에 진행되어야 할 무림집회가 두 세력간의 알력때문에 오히려 공개되어 버린 것이오. 정말 안타까운 일이지.”
대방선사는 한 차례 깊은 탄식을 토해낸 후 다시 입을 열었다.
“구대문파의 대부분은 심정적으로 현령 장문인을 지지하고 있소. 그리고 구대문파의 독주를 못마땅해하는 다른 사람들은 위지 대협의 주위로 몰려들고 있는 판국이오.”
“방장께선 누구를 지지하십니까?”
진산월의 물음에 대방선사는 고졸한 미소를 머금었다.
“본사도 구대문파에 속해 있으니 현령 장문인을 지지해야 하겠지만, 위지 대협의 주장도 틀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오. 이미 삼 년 전에 힘들게 짜놓은 조직이 있으니 미흡한 부분을 보완하기만 하면 쉽게 집회를 이끌 수 있는데 굳이 판을 몽땅 뒤엎고 새롭게 조직을 꾸미느라 심력을 소모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
“그럼 방장께선 위지 대협이 주최자가 되는 것이 더 낫다고 보시는군요.”
“그게 순리에 더 가깝다는 것이오. 사실 삼 년 전의 실패가 꼭 위지 대협의 잘못만은 아니지 않소? 당시에 그는 비록 무림맹주의 자리에 오르기는 했으나 구대문파를 배려해주느라 제대로 권리를 행사하지 못했소. 그러니 그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한 거요.”
진산월은 잠시 침음하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방장께서 저를 보자고 하신 건 그 점에 대해 무언가 따로 복안이 있기 때문이겠군요. 제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십니까?”
대방선사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진 장문인과는 말을 하기가 참으로 편하구려. 그렇지 않아도 빈승은 진 장문인에게 한가지 부탁할 것이 있소.”
“말씀하십시오.”
“유월 일일 무당에서 개최될 집회는 아마도 성공하게 될 가능성이 높소. 구대문파가 모두 참석하고 천봉궁이 지지를 표한다면 대세가 기울어지게 될 거요.”
“천봉궁도 현령 장문인을 지지하고 있습니까?”
“이미 구대문파와 천봉궁은 서로 공조하기로 약조를 해둔 상태요.”
“장문인의 계획은 어떤 것입니까?”
“그 자리에서 빈승은 종남파의 구대문파 복귀에 대한 안건을 꺼낼 생각이오.”
대방선사의 말에 담담함을 유지하고 있던 진산월의 표정이 크게 흔들렸다.
종남파의 구대문파 복귀를 논한다!
그것은 그야말로 진산월을 비롯한 모든 종남파 고수들이 꿈에서도 그려왔던 상황이 아닌가? 하나 결코 쉽게 이루어질 리 없다고 생각했던 그 일이 막상 소림사의 장문인 입으로 먼저 거론되게 되니 아무리 침착하고 냉정한 진산월이라도 격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산월은 이내 평정을 되찾고 신광이 번뜩이는 눈으로 대방선사를 쳐다보았다.
“그런 일이 가능한지 궁금하군요. 구대문파에서 퇴출된 문파가 다시 복귀된 일은 전례가 없지 않습니까?”
“허허…. 전례가 없다면 만들면 되는 일이오. 진 장문인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소?”
진산월은 솔직히 시인을 했다.
“저를 비롯한 종남파 고수들의 필생의 소원이 형산파를 꺾고 구대문파로 복귀하는 것입니다.”
“그러리라 짐작했소. 하지만 종남파 스스로가 나서서 그것을 주장해도 다른 문파에서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아무 성과도 없을 거요. 그러니 빈승이 자리를 마련해주겠다는 거요.”
진산월은 대방선사의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주시했으나 대방선사는 조용한 미소를 짓고 있을 뿐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저로서는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입니다. 그런데 본 파를 위해서 굳이 그런 일을 해주시려는 이유를 알고 싶군요.”
“두 가지 이유가 있소. 첫째는 무당의 집회가 현령 장문인의 의도대로 진행되는 것을 막아보려는 것이오. 빈승이 안건을 발한다면 무당 집회는 그 안건에 집중하느라 다른 일은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오.”
대방선사가 순순히 자신의 뜻을 밝히자 진산월은 내심 수긍을 했다. 어찌 보면 종남파를 자신의 뜻에 맞게 이용하겠다는 말이었으나, 진산월로서는 이런 이용이라면 기꺼이 당해주겠다는 심정이었다. 더구나 대방선사는 그런 의향을 떳떳하게 밝히고 있지 않은가?
“다른 한 가지 이유는 무엇입니까?”
대방선사의 표정이 진중해졌다.
“과거의 빚을 청산하기 위해서요.”
“과거의 빚이라니요?”
“이십여 년 전 본사에서 벌어진 기산취악을 말하는 거요.”
진산월의 눈빛이 한층 더 강렬해졌다.
“방장께서 먼저 그 일을 꺼내실 줄은 몰랐습니다.”
“종남파에는 잊고 싶은 기억이겠지만, 본사로서도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일이기도 했소. 진 장문인은 기산취악에 대해 잘 알고 있소?”
“본 파의 제자라면 누구나가 뼛속 깊이 새겨놓고 있습니다.”
진산월의 음성은 비록 담담했으나 그 안에는 필설로 형용치 못할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 안의 내막에 대해서는 자세히 모를 거요. 종남파의 구대문파 퇴출을 처음 안건으로 내놓은 사람은 당시의 무당파 장문인이었던 목엽진인이었소.”
뜻밖의 말에 진산월은 황급히 되물었다.
“형산파가 먼저 주장한 게 아니라 무당파의 장문인이 발의했단 말입니까?”
“그렇소. 당시 형산파의 기세가 욱일승천하기는 했으나 목엽진인이 말을 꺼내기 전에는 누구도 구대문파의 한 문파를 퇴출시키고 그들을 그 자리에 집어넣는다는 발상을 하지 못했소.”
어찌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무림에서 융성했다가 사라지는 문파가 어디 한둘이겠는가? 그때마다 구대문파의 지위를 변경했다면 지금과 같은 유구한 전통은 생가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그의 제안은 모두 경악시키기에 충분했소. 몇몇 문파는 반대를 했고 몇몇 문파는 찬성을 했으며, 몇몇 문파는 침묵했소. 그리고 본사는 그때 침묵을 선택했소.”
당시 소림사의 장문인은 대방선사의 스승인 굉요대선사였다. 굉요대선사는 무공보다는 불심이 깊기로 더욱 유명한 고승이었는데, 기산취악 당시의 소림사 장문이이었다는 것 때문에 종남파 고수들에게는 결코 좋게 생각되지 않았다.
“선사께서는 기산취악 후에 그 일에 대해 늘 깊은 번뇌를 느끼셨소. 그리고 원적하시기 얼마 전에 빈승에게 비로소 당시의 일에 대해 설명해주셨소.”
“노납은 평생을 살아오면서 후회되는 일을 한 적이 없지만 딱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다. 그 일 때문에 아마도 죽어서 정토에 이르지 못할 것 같구나.”
“사부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너는 석년에 본사에서 벌어진 기산취악을 알고 있느냐?”
“종남파가 구대문파에서 퇴출되고 형산파가 들어온 사건 말입니까?”
“그렇다. 당시 그 일은 무당파의 목엽진인이 처음 발의했는데, 구대문파 중 당사자인 종남파를 제외한 여덟 문파 중 다섯 개의 문파가 찬성을 하고 두 개의 문파가 반대를, 그리고 다른 하나의 문파는 찬성도 반대도 표하지 않았지. 너는 본사가 어떤 선택을 했다고 생각하느냐?”
“그 일에 대해서는 별로 들은 바가 없어 알지 못합니다. 제자의 어리석음을 꾸짖어주십시오.”
“허허…. 당시의 일은 본사에서도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으니 아무도 네게 알려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대 노납은 침묵을 선택했다. 너는 그 이유를 아느냐?”
“모르겠습니다.”
“목엽진인이 그 발의를 하기 전날에 은밀히 노납을 찾아왔다. 그는 자신이 내일 종남파의 구대문파 퇴출을 안건으로 내놓을 것이니 노납이 그 안건에 찬성해달라고 부탁했다.”
“구파에 대한 발의는 사전에 아무런 논의나 협상도 하지 못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원칙이야 그렇다만 원칙이란 늘 깨어지기 마련이지. 실제로 그 일 이전에도 구파 발의 전에 발의할 사람이 미리 다른 문파를 찾아가서 사전에 정지작업을 하는 게 일상적이었다. 소모적인 논쟁과 불필요한 오해를 없애기 위한 방편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편의적인 발상에 불과할 뿐이었다.”
“사부님께서는 목엽진인의 부탁을 승낙하셨습니까?”
“나는 승낙하지 않았다. 어떠한 이유에서건 구대문파의 지위를 바꾼다는 것은 구대문파라는 이름에 대한 존립 자체를 유명무실하게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목엽진인은 찬성을 하지 않아도 좋으니 제발 반대는 하지 말아달라고 말했고, 노납은 그것을 승낙했다.”
“사부님을 이해합니다. 무당파 장문인이 일부러 찾아와 사정했다면 저로서도 거부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그래도 반대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비록 무당파와 소원한 사이가 되었을지 몰라도 마음은 편안했을 것이다. 아니면 이런 생각 자체가 노납의 자위일 뿐인가?”
“목엽진인의 발의에 반대한 문파는 어디입니까?”
“곤륜과 아미다. 다른 파는 대부분 목엽진인이 사전에 방문을 하여 동의를 얻었지만, 곤륜파는 속세의 명리에 관심이 없고 청정무위를 추구하는 문파답게 목엽진인의 제의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아미파는 종남파와 친분이 두터워서 목엽진인이 찾아가지도 않았고, 본사를 제외한 다섯 문파는 모두 찬성을 했지.”
“사부님께서는 제자가 그 일을 바로잡기를 원하십니까?”
“순리에 따르거라.”
“제자가 불민하여 사부님의 말뜻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종남파를 다시 구대문파로 복귀시키라는 말씀이신지요?”
“그게 너 혼자만의 힘으로 되겠느냐? 모든 일은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노납은 그 후에 목엽진인에 대해 어느 정도의 거리감을 두게 되었다. 기산취악 전후 목엽진인의 행동에 얼마쯤의 의문스런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지.”
“어떤 것입니까?”
이때 굉요대선사는 한참이나 말문을 열지 못하고 망설였다고 한다.
“지금부터 노납이 하는 말은 너만 알고 있거라.”
“알겠습니다.”
“노납은 목엽진인이 누군가의 지시를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예? 그게 정말입니까?”
“확신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강호에서 노납 정도 나이를 먹게 되면 여러 가지 정황을 유추하여 숨겨진 사실을 파악할 수가 있지. 목엽진인의 뒤에는 그를 조종하는 자가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여자일 가능성이 높다.”
“어떻게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기산취악 후 노납은 그 일의 부당함에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목엽진인의 거처를 찾아간 적이 있다. 그런데 그대 그의 방에서 그가 여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소리를 들었다.”
“어떤 여자였습니까?”
“직접 보지는 못하고 음성만 들었을 뿐이다. 노납이 십여 장 밖에서 여자의 음성을 듣고 귀를 기울였을 때 그들이 노납의 기척을 알아차렸는지 말을 멈추었다. 잠시 후에 노납이 목엽진인의 거처로 안내되었을 때는 장내에는 목엽진인 혼자만이 앉아 있을 뿐이었다.”
“단순히 그 일만으로 목엽진인의 배후에 여자가 있다고 믿기는 어렵지 않습니까?”
“그것은 많은 파편 중 하나일 뿐이다. 목엽진인의 행동거지 하나하나와 평소에 그가 내뱉은 언어, 가벼운 눈짓 하나, 그리고 사소해 보이는 몸짓들이 이루어져 노납으로 하여금 그가 누군가의 지시를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한 것이다.”
“그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군요.”
“놀랍고 또한 두려운 일이지. 강호의 가장 거대한 문파 중 하나의 장문인이 누군가의 지시로 구대문파를 송두리째 뒤흔드는 일을 벌이고 있다면 어찌 걱정스럽지 않겠느냐? 그래서 노납은 그 이후 줄곧 목엽진인의 행적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 십오 년 동안 목엽진인은 특별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무당산에 머물며 강호에 내려온 적도 없었지. 그래서 노납은 그 일을 무덤 속으로 가지고 가려 했다.”
“그런데 생각이 바뀌신 거로군요.”
“막상 생의 마지막 순간이 가까이 오자 기산취악의 일이 노납을 괴롭게 했다. 그러다 그 일이 끝난 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종남파가 아직 존재하고, 형산파와 무당파가 건재하다면 그들 사이의 일은 종결된 게 아니라 잠시 수면 밑으로 잠복된 걸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든 것이다. 그래서 너에게만은 이 일의 내막을 알려줘야겠다고 결심했다.”
“제자가 어떻게 하길 바라십니까?”
“지켜보거라.”
“예?”
“그저 조용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들을 지켜보도록 해라. 그러다 만약에 그들 사이에 이상한 기운이 감지된다면 오늘 노납이 네게 말한 내용을 기억하고 네 행동을 결정하도록 하거라. 그게 노납이 네게 바라는 유일한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사부님.”
“아미타불. 불법은 무변하건만, 인간의 고해는 어찌 이리도 끊기 어려운지….”
그것이 굉요대선사의 마지막 말이었다.
대방선사의 긴 이야기가 끝나자 작은 선실 안은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
진산월은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숱한 상념에 깊게 침잠해 있었다.
대방선사의 말대로라면 이십여 년 전 기산취악의 진정한 원흉은 형산파가 아닌 무당파였다. 그렇다면 대체 목엽진인은 종남파와 무슨 원한이 있기에 그런 발의를 한 것일까?
그는 굉요대선사의 예측대로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움직인 것일까?
그리고 그를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신비의 여인은 누구란 말인가?
많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지금 당장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진산월로서는 기산취악을 일으킨 당사자가 누구인지 알게 된 것으로 만족하는 수밖에 없었다.
대방선사는 진산월이 빠른 시간에 마음속의 복잡한 상념을 털어내고 담담한 신색을 유지하는 것을 보고는 내심 찬탄을 금치 못했다.
‘무척이나 심란한 상태일 텐데도 결코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는군. 신검무적의 진정 무서운 점은 검술이 아니라 심계라고 하더니 정말 나이답지 않게 신중하고 속이 깊은 인물이로구나.’
대방선사는 그런 진산월의 모습이 믿음직스럽게 생각되었는지 부리부리한 눈에 엷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빈승이 무당에 가서 종남파의 구대문파 복귀에 대한 안건을 발의하는 것에는 선결 과제가 있소. 빈승이 진 장문인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유월 일일이 되기 전에 그걸 해결해달라는 것이오.”
“그게 무엇입니까?”
“첫째는 종남파의 명성이 지금보다 더욱 높아져야 한다는 것이오. 다른 문파의 고수들이 종남파가 구대문파에 복귀하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을 할 정도로 말이오.”
“두 번째는 무엇입니까?”
“무림의 이목이 종남파에 집중되어야 하오. 사람들이 종남파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기울이고, 종남파가 어디로 움직일지 촉각을 곤두세울 정도가 되어야 하오, 마지막으로 그 종남파가 최종적으로 도착하는 곳이….”
“무당파가 되어야 하는군요.”
“바로 그렇소.”
진산월은 잠시 침음하다가 담담한 음성을 내뱉었다.
“쉽지 않은 일이군요.”
“물론 쉽지 않소. 하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오.”
“좋은 생각이 있으십니까?”
“그 세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해결할 방법이 하나 있소.”
“그게 무엇입니까?”
대방선사는 묵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비무행.”
진산월의 눈이 번쩍 빛났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는 대방선사가 왜 굳이 점창파와 종남파의 일에 끼어들면서까지 삼파비무를 기획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대방선사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진산월의 얼굴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이번에 본사에서 벌어진 삼파비무는 조만간에 강호 전역에 알려지게 될 거요. 그렇다면 사람들은 종남파의 다음 행도에 관심을 기울일 거요. 그리고 그 행도가 다른 문파들과의 비무행이라면…..”
“강호인들의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겠지요.”
“단순히 주목 정도가 아니라 모든 강호인들의 화두에 오르내리게 될 거요.”
진산월은 대방선사의 제안이 확실히 종남파의 명성을 드높이는 데 효과적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십 년 전의 굴욕을 깨고 초가보와의 치열한 싸움에서 승리한 종남파가 강호의 제문파들을 향해 도전장을 내민다면 강호인들로서는 열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강호인들이 바라고 좋아하는 조건들이 모두 모여 있기 때문이다. 진산월조차도 비무행이란 말을 듣는 순간부터 가슴이 뛸 정도였으니 오죽하겠는가?
하나 그만큼 그것은 험하고 거친 가시밭길이 될 수밖에 없었고, 종남파로서는 한발만 삐끗해도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는 백척간두의 상황에 스스로 올라서게 되는 셈이었다.
그 위험은 제안을 한 대방선사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비무행에는 커다란 함정이 있소. 단 한 번이라도 비무행에서 패배를 하게 되면 모든 것이 공염불이 되고 만다는 것이오.”
공염불이 되는 정도가 아니라 종남파의 구대문파로의 복귀는 영영 물거품이 되고 말 것이다.
“진 장문인도 지금은 짐작했겠지만 빈승이 이번에 삼파비무를 계획했던 것도 종남파 고수들에게 과연 비무행을 치를 역량이 있는지 알아보고자 함이었소. 진 장문인의 실력이야 강호의 소문으로 충분히 짐작이 갔지만 비무행을 하려면 진 장문인 외에 적어도 두 명의 고수가 더 필요하기 때문이오. 그리고 진 장문인의 두 명의 사제들은 그들의 능력을 충분히 입증해 보였소.”
“전흠은 귀사의 제자에게 패했습니다.”
대방선사의 입가에 걸려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그건 단순히 비무였기 때문이 아니겠소? 문파의 부활을 내건 비무였다면 전 시주의 자세도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빈승이 잘못 본 거요?”
대방선사의 말에 진산월은 쓴웃음을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소림사에서 벌어진 모든 일이 대방선사의 눈을 벗어나지 못했음을 깨달은 것이다.
“저로서는 그저 제 사제들을 믿고 있다는 말씀밖에 드릴 게 없군요.”
“진 장문인의 두 사제들은 기초가 튼튼하고 무공에 대한 이해도 뛰어나서 앞날이 기대되는 인재들이오. 그들과 함께라면 진 장문인도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을 거요.”
“그렇게 되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대방선사는 한 번 더 각별한 눈으로 진산월을 응시하다가 가장 중요한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빈승의 제안을 승낙하겠소?”
진산월은 더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듯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