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0권 소림기변(少林奇變)편 : 9화
제 207장 용인용병
서안의 뒷골목은 미로와 같았다. 그 좁고 복잡한 골목은 토박이가 아니면 제대로 알 수 없을뿐더러 토박이라 하더라도 자신이 자주 다니는 구역이 아니면 길을 잃고 헤매기 십상이었다.
그 복잡한 서안의 뒷골목을 빠르게 질주하는 인영이 있었다.
그는 허름한 장포를 걸친 삼십대의 중년인이었는데, 머리가 잔뜩 헝클어지고 옷의 여기저기가 찢어져 몹시 낭패스런 몰골이었다.
중년인은 이곳 골목의 지리에 익숙한 듯 잠시도 지체하거나 머뭇거리지 않고 골목을 요리조리 빠져나가고 있었다. 한동안 정신없이 골목길을 달려가던 중년인이 몸을 멈추고 조심스런 동작으로 주위를 살폈다. 그러다 자신의 뒤에서 아무도 쫓아오는 사람이 없자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간신히 떨쳐낸 모양이구나.”
그는 땀으로 범벅이 된 이마를 훔치며 투덜거렸다.
“질긴 놈들 같으니라구. 대충 포기하고 말 것이지 반 시진이나 쫓아오다니. 때마침 용사혈이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잡힐 뻔했네.”
용사혈은 이 일대의 미로같이 복잡한 골목길을 가리키는 것으로, 마치 뱀구멍처럼 여기저기에 통로가 뚫려 있다고 하여 그런 이름이 붙게 된 것이다.
중년인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골목의 한쪽 벽에 붙어서 은밀히 그를 관찰하고 있는 두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비슷한 흑의를 입은 삼십대 초반의 인물들이었는데, 한 명은 비쩍 마른 체구에 검은 수염을 기르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거무스름한 피부에 날카로운 인상을 하고 있었다.
두 흑의인은 벽에 바짝 달라붙은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중년인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이 숨어 있는 위치는 골목의 그림자가 겹치는 곳으로, 안력을 돋우어 살펴보기 전에는 찾기 힘들 정도로 교묘한 곳이었다.
중년인은 다시 몇 차례 주위를 둘러보다 아무도 사람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다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벽에 숨어 있던 두 명의 흑의인은 중년인이 사라질 때까지도 꼼짝도 않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휙!
사라졌던 중년인이 다시 나타났다. 중년인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다 비로소 안심을 했는지 한결 밝아진 얼굴로 몸을 돌려 사라져갔다.
중년인의 신형이 골목을 돌아 멀어져가자 그제서야 두 명의 흑의인이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왔다.
검은 수염을 기른 제법 청수한 얼굴의 흑의인이 나직하게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놈. 간뎅이가 밤톨만한지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는구나. 사내놈이 무슨 겁이 저리도 많단 말이냐?”
검은 피부의 중년인이 피식 웃었다.
“겁이 많기로는 누가 네놈을 따라가겠느냐?”
검은 수염은 눈을 부릅뜨며 그를 쏘아보았다.
“나는 겁이 많은 게 아니라 조심성이 많은 것이다. 내 직업상 신중함은 가장 큰 덕목임을 모르느냐?”
“어련하겠느냐? 그나저나 늦기 전에 어서 따라가보자.”
두 사람은 조심스런 동작으로 먼저 사라진 중년인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그들의 신형은 그리 빠르지 않았으나 은밀하기 그지없어서 중년인은 그들의 추적을 전혀 알지 못한 채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중년인은 복잡한 용사혈의 골목길을 망설이지 않고 이리저리 걸어갔는데, 그 모습이 마치 자신의 집안을 걷는 것 같았다.
일각 정도 걷던 중년인이 걸음을 멈춘 곳은 용사혈의 거의 끝부분에 있는 허름한 가옥이었다. 중년인은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고는 신속하게 가옥 안으로 들어갔다.
두 명의 흑의인은 중년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저 집이 도둑놈들의 소굴인가?”
검은 수염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거무스름한 피부의 중년인이 피식 웃었다.
“도둑놈 소굴이면 네놈의 집이란 말이냐?”
검은 수염은 그를 째려보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언젯적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냐? 이 몸이 도계에서 손을 씻고 정보통이 된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네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
“언젯적은? 그래봤자 겨우 두 달 전 아니냐?”
검은 수염이 이를 부드득 갈았다.
“네놈이 내 친구만 아니었다면 그저…..”
“그저 어떻게 할 건데? 나보다 무공도 약하고 몸도 빠르지 않으면서 한 대 치기라도 할 테냐?”
“으이구….. 어서 돌아가자. 노 대형이 기다리시겠다.”
두 사람은 투닥거리면서도 재빠른 동작으로 골목 저편으로 사라졌다.
두 사람의 모습이 다시 나타난 곳은 취영루의 내실 안이었다.
그곳에는 두 사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노해광과 정해였다.
“다녀왔습니다.”
그들이 머리를 조아리자 노해광이 걸걸한 음성으로 물었다.
“찾았느냐?”
검은 수염이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예. 그놈이 제법 애를 먹이기는 했으나 저희를 떨쳐내지는 못했습니다.”
“쓸데없는 자화자찬은 그만하고 본론만 말해라.”
노해광의 질책에 검은 수염은 찔끔하여 황급히 입을 열었다.
“용사혈 끝에 있는 노란색 대문으로 들어갔습니다.”
“누구의 집이지?”
“방현이라는 자의 집입니다.”
“방현? 뭐 하는 작자지?”
검은 수염이 거무스름한 피부의 중년인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러자 거무스름한 피부의 중년인이 조금 뻣뻣한 태도로 말했다.
“상인이라고 합니다. 일 년 중 대부분을 외지로만 돌아다녀 집에는 거의 돌아오지 않는다더군요.”
노해광은 거무스르한 피부의 중년인을 바라보더니 이내 빙긋 웃었다.
“자네는 아직 보고하는 데 서투르군. 이제 이런 일에 익숙할 때도 되지 않았나?”
거무스름한 피부의 중년인은 어색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마음대로 잘 안 되는군요. 점차 나아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칠살추혼 마정기라면 의리 있고 일처리가 분명하기로 유명해서 나도 기대를 많이 하고 있네. 조금만 더 분발해보게.”
“알겠습니다.”
검은 수염의 중년인은 노해광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와 마정기를 대하는 태도가 확연히 다른 것에 입술을 삐죽거렸다.
‘쳇. 차별 대우하기는. 나는 도둑놈 출신이고 마정기는 낭인이기는 하지만 당당한 무사라서 같은 대우를 해줄 수 없단 말인가?’
검은 수염의 중년인은 서안 일대에서 밤도둑으로 명성을 날렸던 상로객 지일환이었다. 그와 마정기는 둘도 없는 친구 사이로, 마정기는 한때 지일환이 종남파에 잡혀 있는 줄 알고 그를 구하기 위해 단신으로 종남파에 쳐들어간 적도 있을 정도로 그들 사이의 우애가 깊었다.
그대의 인연으로 그들 두 사람은 종남파와 친분을 유지하다가 두 달 전에 소지산의 소개로 노해광을 알게 되어 그의 밑에서 일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노해광은 이미 서안 일대의 실력자로 군림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밑에서 일하게 된 것에 두 사람은 아무 불만도 없었다. 다만 지일환은 자신보다는 마정기를 더 우대하는 듯한 노해광의 처우가 못내 서운할 뿐이었다.
하나 그것은 지일환의 착각이었다.
노해광은 수하들을 편애하거나 차별을 주는 성품이 아니었다. 그러한 성격이었다면 그의 밑에 있는 수하들이 그토록 그를 따를 리 없었다. 다만 노해광은 지일환과 마정기의 성격을 파악하고 그에 맞게 그들을 대하는 것뿐이었다.
지일환은 눈치가 빠르고 잔머리가 잘 돌아가는 반면에 쓸데없는 잡생각이 많고 평지풍파를 곧잘 일으켰다. 그래서 노해광은 그를 엄격하게 다루어 그가 엉뚱한 행동을 하지 않도록 제어해야 했다.
그에 비해 마정기는 성격이 불같고 자존심이 강한 성격이라 그를 어느 정도 존중해주어 체면을 살려주는 것이다.
노해광의 이러한 용인술이야말로 빈털터리에서 불과 몇 년 사이에 서안의 실력자로 자리 잡게 된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노해광은 다시 마정기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그럼 방현은 지금 그 집에 없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럼 그 집에는 누가 살고 있나?”
“방현의 아내와 노모가 살고 있습니다.”
“여자 둘이 살고 있는 집에 그놈이 들어갔단 말인가?”
“제가 알기로는 그렇습니다.”
“그럼 두 여자 중 한 명이 그놈과 관련이 있겠군. 아니면 여자 둘이 모두 해당되거나.”
마정기는 아직 거기까지 조사하지는 못했는지 대답하지 못했다.
노해광은 잠시 마정기를 응시하다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어떤 일을 조사할 때는 마음속으로 질문을 던져보게. 그래서 그 질문의 답이 모두 밝혀질 때까지 조사를 멈추면 안 되네. 그 점을 명심하게.”
마정기는 머쓱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노해광의 시선이 다시 지일환에게로 향했다.
“지금 당장 나가서 두 여자에 대해 상세히 조사해오거라. 그들이 어디 출신인지, 누구를 자주 만나며 무엇을 해서 먹고살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음식을 좋아하며 옷은 어떤 색을 즐겨 입는지까지 샅샅이 조사해야 한다.”
지일환은 노해광의 거창한 주문에 질려버린 듯한 표정을 지었으나 노해광은 추호도 사정을 보지 않고 엄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기한은 두 시진을 주겠다. 나는 그놈이 여자만 두 명 있는 집에 들어가서 무슨 짓을 했는지 속속들이 알아야겠다. 오늘 저녁까지 보고가 올라오지 않으면 이달의 급료는 없는 줄 알아라.”
지일환은 무어라고 항변하려다 노해광의 사나운 눈을 보고는 찔끔하여 두말없이 몸을 돌렸다.
마정기가 따라 나가려 했으나 노해광은 그를 제지했다.
“자네는 따로 할 일이 있네.”
이번 일로 노해광은 마정기가 남의 뒤를 조사하는 일에는 별로 재주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다른 일을 맡기려 한 것이다.
“내 가게의 창고를 턴 놈들 중 그나마 종적이 밝혀진 놈은 모두 둘이네. 자네도 알고 있겠지?”
“한 놈은 자네들이 추적했고, 다른 한 놈은 다른 곳으로 가버리는 바람에 소식을 알 수 없었네. 그런데 조금 전에 그놈에 대한 정보가 들어왔지.”
마정기는 노해광의 입에서 중요한 말이 나오는 것을 알고 바짝 긴장한 표정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멀지 않은 남전에 숨어 있네. 그를 잡아서 이번 일의 내막을 실토 받아 오게. 어떤 수단을 쓰든 상관하지 않겠네.”
노해광은 쪽지 하나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쪽지에는 한 사람의 이름과 살고 있는 곳이 적혀 있었다. 마정기는 긴장된 얼굴로 그 쪽지를 품속에 갈무리하고는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이번에는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너무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네. 설사 자네가 실패한다고 해도 지일환이 쫓는 놈이 남아 있는 이상 이번 일을 해결하는 것에는 무리가 없네.”
“알겠습니다.”
마정기가 물러나자 노해광은 한숨을 내쉬었다.
‘조사하는 데 재주가 없으니 고문하는 일이라도 잘했으면 좋겠군. 손속이 제법 매섭다고 하니 기대해봐도 되려나.’
노해광이 생각에 잠겨 있자 이제껏 아무 말 없이 지켜보고만 있던 정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흉수의 꼬리를 잡았는데 마음에 안 드시는 일이라도 있습니까?”
노해광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쓸 만한 놈들이 너무 부족해. 가뜩이나 사람이 없는데 얼마 전에 두 놈이 죽은 건 너무 손실이 커. 몇 년 동안 데리고 다니면서 간신히 사람 구실하게 만들어놓았는데 맥없이 죽어버렸으니…..”
노해광은 정체 모를 흉수에게 창고를 털릴 때 죽은 부하들이 생각나는지 쓴입맛을 다셨다.
“오죽했으면 네 사숙에게 병신이 된 천남사살을 다시 부를 생각까지 했겠느냐?”
노해광이 말한 천남사살은 노해광이 서안으로 올 때 처음 동행한 인물들이었다. 하나 그들은 백동일과 시비가 붙어 그의 손에 처참하게 당하고 말았다.
노해광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아무리 살펴도 도무지 쓸 수 있는 몰골들이 아니었어. 네 그 백 사숙이 어찌나 확실하게 짓밟아놓았는지 제법 솜씨 좋은 의원들이 손을 보았는데도 반신불수를 면치 못했다. 성질들은 더러워도 제법 믿을 만한 놈들이었는데…..”
“마정기와 지일환 두 사람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괜찮다. 마정기는 듣던 대로 무공도 제법 강하고 강단이 있어서 힘을 쓰는 일에는 제법 도움이 될 것 같다. 지일환도 겁이 많고 소심하기는 하지만 의외로 책임감이 있어서 맡은 일은 실수없이 처리하고 있다.”
“다행이군요. 소 사형께서 그들이 잘 적응하는지 걱정하셨습니다.”
노해광은 피식 웃었다.
“네 소 사형은 겉으로는 무뚝뚝한 녀석이 잔정이 너무 많아 탈이다. 강호에 어울리지 않는 놈이야.”
“저는 어떻습니까?”
노해광은 껄껄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 정말 알고 싶은 게냐?”
정해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는 그저 노 사숙과 함께 일을 하게 되어 기쁠 뿐입니다.”
노해광은 빙글거리며 입을 열었다.
“알고 싶다면 말해주마. 네 녀석은…..”
정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이 제가 관리하는 객잔의 결산을 하는 날이군요. 제가 깜빡 잊었습니다. 그러니 이만…..”
노해광은 웃으며 그의 소매를 잡아 반강제로 다시 자리에 앉혔다.
“알았다. 말하지 않을 테니 도망가지 마라. 그렇지 않아도 네 녀석에게 할말이 있다.”
정해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두 눈을 초롱초롱하게 반짝였다.
“말씀하십시오, 사숙.”
정해는 눈앞의 이 사숙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사부인 임장홍이 죽은 후 선배고수 하나 없이 단출했던 종남파에 처음으로 생겨난 사숙이었다. 물론 전풍개도 있지만 전풍개는 항렬이 두 배나 높고 성격이 까다로워서 쉽게 접근하기 힘든 사람이었다.
반면에 노해광은 성격이 원만할 뿐 아니라 재주가 비상하고 언변이 뛰어나서 같이 대화를 하면 시간이 가는 줄 모를 정도였다. 더구나 그가 하는 일 자체가 생동감 넘치고 쉴사이없이 머리를 쓰는 것이어서 정해의 적성에도 잘 맞았다.
그래서 소지산이 정해를 불러 노해광을 도와주라고 지시했을 때 정해는 하마터면 환성을 내지를 뻔했다.
노해광 또한 이 머리 좋고 총명한 사질이 마음에 들었는지 항상 웃는 낯으로 그를 대하곤 했다.
노해광은 정색을 하며 신중한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사실 나는 이번 일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 대충 파악하고 있다.”
“저도 그러리라 짐작했습니다.”
“그걸 어찌 아느냐?”
“사숙의 성격에 배후가 궁금했다면 이번 일에 신출내기들인 마정기와 지일환을 보내지 않았을 겁니다. 아마 좀 더 믿을 만하고 오래 데리고 있던 다른 부하들을 투입하셨겠지요.”
노해광은 안면이 일그러지도록 활짝 웃었다.
“네 녀석은 정말 내 뼛속의 기생충처럼 날 잘 알고 있구나.”
정해의 얼굴이 살짝 찡그려졌다.
‘좋은 비교도 많은데 하필이면 기생충이냐?’
노해광은 그의 어깨를 툭 치고는 다시 원래의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내가 의심하는 자들은 유화상단이다. 아니 의심이 아니라 확신이라고 해야겠지. 내가 잃어버린 물건들은 대부분이 유화상단이 취급하는 물품들과 중복이 되는 것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내가 술수를 써서 유길상의 취선방을 무너뜨렸다고 생각하고 나에게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지.”
“하지만 취선방의 일은 손노태야의 솜씨가 아닙니까?”
“상단이라고 해도 대놓고 적대시하지는 못한다. 그가 너무 거물이라서가 아니라 손노태야와 공개적으로 싸우게 되면 서안 일대의 상권이 초토화되기 때문이다. 누가 이기든 남는 건 뼈다귀밖에 없게 되지.”
정해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들은 손노태야 대신 만만한 노 사숙을 건드린 거군요.”
노해광은 다시 웃는 시선으로 정해를 쳐다보았다.
‘이 녀석은 정말 머리 하나는 비상하군. 이런 놈이 종남파에 있는 줄도 모르고 인재를 찾는답시고 쓸데없이 엉뚱한 곳만 뒤지고 다녔으니……”
노해광은 속으로 혀를 끌끌 차며 말을 계속했다.
“잘 보았다. 아마 내 창고를 털어 간 물건들은 이미 깨끗하게 정리되어 사방으로 팔려 나갔을 것이다. 그러니 그 두 놈을 잡아서 족쳐봤자 뒤늦은 화풀이밖에는 되지 않지.”
“그래도 유화상단이 개입했다는 분명한 증거를 확보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거야 아래 녀석들이 할 일이지. 너와 나는 따로 할 일이 있다.”
“그게 무엇입니까?”
노해광의 얼굴에 언뜻 매서운 빛이 떠올랐다. 그것은 늘 사람 좋은 미소를 매달고 있는 노해광에게서 좀처럼 볼 수 없는 표정이었다.
“나를 건드린 유화상단 놈들에게 그 빚을 몇 배로 되갚아주는 것이지.”
정해는 노해광의 이런 모습을 처음 보았다. 공연히 가슴이 떨리는 자신을 인식하며 정해는 새삼 노해광이 겉보기와는 달리 정말 무서운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쉽지 않은 일이겠군요.”
“물론 쉽지 않다. 하지만 나는 충분히 그들을 물 먹일 자신이 있다.”
“그런데 무얼 그리 걱정하십니까?”
노해광의 눈꼬리가 꿈틀거리더니 표정이 무거워졌다.
“유화상단만이라면 두려울 것이 없으나, 그들의 배후에 있는 자들이 나를 두렵게 한다.”
정해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노해광 같은 인물이 두려움을 느낄 정도의 자들이 있다니 쉽게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그들이 누굽니까?”
노해광은 잠시 허공을 응시하더니 낮게 가라앉은 음성을 내뱉었다.
“쾌의당.”
노해광이 일을 맡긴 지일환과 마정기는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다.
지일환은 자신이 추적했던 인물이 방현의 사촌동생인 방립이며 그가 오래전에 죽은 방현을 대신해 그의 행세를 해왔다는 것을 알아냈다. 또한 방현의 아내로 알려진 여인도 그의 부인이며, 두 사람 모두 무공을 익힌 무림인이라는 사실도 밝혀냈다.
그리고 그들의 무공 사부가 함께 사는 노모라는 충격적인 사실까지 알아내어 모처럼 노해광의 칭찬을 들었다.
“그 여자 이름이 임유화라고?”
“그렇습니다. 그녀가 방립과 그의 부인의 사부이며 방립을 뒤에서 조종해온 것 같습니다. 그녀는 여인치고는 특이하게도 원앙월의 고수라고 합니다.”
노해광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의 한쪽에 있는 커다란 서가로 다가갔다. 서가의 한편을 이리저리 뒤지던 노해광이 책 한 권을 꺼내들고 읽기 시작했다.
“이쯤에서 봤던 것 같은데… 그렇군. 여기 있군.”
노해광은 책의 한 부분을 소리 내어 읽었다.
“광동원앙문은 항상 남녀 두 사람을 제자로 받아들이며, 그들 중 여인을 문주로 삼는다. 그것은 광동원앙문을 만든 인물이 여인이기 때문이다. 문주의 신물은 작은 손도끼이며, 당대의 문주인 천희방에게는 임유화와 방솔기라는 두 제자가 있다….”
노해광은 다시 책을 덮었다.
“…..라는군.”
지일환은 신기한 표정으로 노해광이 들고 있는 책을 응시했다.
“그 책은 무엇입니까?”
“네가 내 밑에서 삼 년만 더 일하면 이 책을 읽어볼 수 있다.”
그 말에 지일환은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필시 강호의 은밀한 속사정을 적어놓은 기서일 것이다. 저런 걸 어디서 구했지?’
노해광은 책을 다시 서가에 꽂아놓은 후 이번에는 마정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마정기는 고개를 떨군 채 의기소침한 모습으로 서있었다.
“그놈이 죽었다고?”
마정기의 고개가 더욱 아래로 숙여졌다.
“면목이 없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졌나? 그놈이 몸에 병이라도 가지고 있던 건가?”
“아주 건강한 녀석이었습니다.”
“그럼 누군가가 그놈의 입을 막기 위해서 암습이라도 했나?”
“저와 그자 외에는 주위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죽었나?”
마정기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제가 그를 추궁하다가 입을 열지 않길래 분기를 참지 못하고 손을 과하게 썼습니다.”
노해광은 어처구니 없다는 눈으로 마정기를 응시했다.
‘손속이 매서운 대신에 성격이 급해서 고문과는 상극인 게로군. 이놈을 어디다 써먹지?’
노해광은 머리가 지끈거려 왔으나 그래도 부드러운 음성으로 그를 달랬다.
“자네 잘못이 아닐세. 내가 무슨 수를 써도 좋다고 말했으니 자네는 할 일을 한 셈이네.”
마정기는 노해광에게 혼쭐이 나리라고 생각했으나 그가 의외로 담담하게 나오자 이내 표정이 풀어졌다.
“앞으로는 더욱 주의하겠습니다.”
노해광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주의해도 불같은 성격을 고치지 않으면 똑같은 일이 벌어질걸.’
그래도 그는 점잖게 말했다.
“두 사람 모두 수고했네. 특실을 비워놓았으니 올라가서 푹 쉬도록 하게.”
지일환과 마정기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밝아졌다.
취영루의 특실은 하루에 숙박료만 은자 다섯 냥이 되는 호화스런 객실로, 지일환과 마정기도 말만 들었지 아직 한 번도 들어가보지 못한 곳이었다. 게다가 특실에 투숙하는 손님에게는 수발을 드는 미녀가 두 명씩 주어지니 두 사람의 입이 벌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두 사람이 희희낙락하여 물러가자 정해가 다가왔다.
“임유화를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광동원앙문의 고수라면 지일환과 마정기로는 감당할 수 없으니 따로 사람을 보낼 생각이다.”
“그녀가 유화상단의 지시를 받았다고 해도 쉽게 입을 열지 않을겁니다.”
노해광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유화상단이 아니라 쾌의당에 속한 인물일 것이다.”
정해는 눈을 크게 떴다.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광동원앙문의 문주인 천희방은 쾌의당의 수중용왕인 황충의 애인이었다. 그러니 그녀의 뒤를 캐나가면 황충의 꼬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정해는 제기발랄한 평소의 모습과는 달리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사숙께서는 황충을 감당할 자신이 있으십니까?”
황충은 쾌의당의 칠대용왕 중 한 사람일 뿐 아니라 오랫동안 강호무림에서 수공의 최고고수로 군림하던 인물이었다. 또한 절세의 도객으로도 알려져 있으니 정해가 걱정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노해광은 솔직하게 말했다.
“나 혼자로는 어렵다. 하지만 한 사람이 도와준다면 충분히 가능하지.”
“그가 누굽니까?”
노해광이 막 입을 열려 할 때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노해광은 정해를 돌아보며 빙긋 웃었다.
“마침 그 사람이 온 모양이구나. 나가보자.”
정해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노해광의 뒤를 따라 방을 벗어났다. 내실 밖에는 작은 대청이 있었는데, 대청 입구에서 두 명의 인물들이 시비의 안내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의 얼굴을 본 정해가 반색을 했다.
“엇? 저분은…..”
그는 짙은 흑의를 입은 준수한 얼굴의 미남자였다. 허리춤에 장검 한 자루를 차고 걸어오는 그의 모습은 왠지 한없이 자유스러우면서도 당당해 보였다. 그의 옆에는 청삼을 입은 청년이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걷고 있었다.
정해는 흑의미남자 앞으로 가서 반가운 표정으로 인사를 했다.
“조 형님, 접니다. 기억나십니까?”
흑의미남자는 진산월의 친구인 마검 조일평이었다. 조일평은 정해를 보자 차가워 보이는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떠올렸다.
“물론 기억하고 있지. 자네는 종남파의 꾀주머니라는 정해가 아닌가?”
정해는 조일평이 자신을 알아보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동안 자네의 소식이 없어 자네 사형이 무척이나 걱정하던데 다시 종남으로 돌아온 모양이군.”
“제가 가정을 꾸리느라 몇 년간 본 파에 소홀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군. 늦게나마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조일평은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청삼청년을 소개해주었다.
“이 사람이 내 사제일세. 인사라도 나누게.”
청삼청년은 정해를 향해 포권을 했다.
“풍시헌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종남파의 제자인 정해입니다.”
그들이 인사를 나누자 그제서야 노해광이 느긋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이제 왔군. 그렇지 않아도 오늘쯤 오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네.”
“제가 너무 늦지 않았습니까?”
아닐세. 적당한 시기에 도착했네. 일단 안으로 들어가지.”
네 사람은 내실로 자리를 옮겨 자리에 앉았다.
정해는 냉막하고 사교성이 없는 조일평이 노해광과 잘 알고 있는 사이인 듯하자 신기한 생각에 몇 번이고 두 사람을 살펴보고 있었다.
노해광이 끌끌 웃었다.
“이 녀석아, 궁금한 점이 있으면 솔직하게 대놓고 물어보거라. 나이 먹은 노파처럼 속으로 궁시렁거리지 말고.”
정해는 멋쩍게 웃으면서도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물었다.
“조 형님이 장문사형과 친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노 사숙과도 친분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두 분은 어떻게 알게 되신 겁니까?”
“내가 장성에 있을 때 일평의 사부인 나력지와 잠시 알고 지낸적이 있다.”
“장성에 계신 적도 있었습니까?”
“천하에서 내가 안 돌아다녀 본 곳이 있는 줄 아느냐? 자랑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내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것이다.”
저해는 감탄했다는 듯 탄성을 토해냈다.
“그래서 사숙이 만사에 그렇게 해박하셨군요. 저로서는 그저 부러울 뿐입니다.”
노해광의 얼굴에 씁쓸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떠돌아다니는 인생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다. 사람이란 모름지기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보금자리가 필요한 법이니…..”
그 음성 속에는 무어라 형용키 어려운 씁쓰름한 감정의 빛이 담겨 있었다.
노해광의 방황은 그 자신의 성격보다는 그가 처한 상황에 기인한 바가 더 컸다. 종남파에서도 인정을 받지 못하고 밖으로 나돌던 노해광은 유일하게 사랑했던 여인마저 사형에게 빼앗기고는 상심하여 천하를 떠돌게 되었던 것이다. 오랜 방황 끝에 그가 정착하려고 찾아온 곳이 종남파가 지척에 있는 서안이었으니 수구초심이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정해는 무거워지려는 장내의 분위기를 바꾸고자 짐짓 쾌활한 음성으로 말했다.
“조 형님은 사람을 잘 사귀지 않는 성격인데 사숙께서 무슨 재주로 조 형님을 알게 되었나 신봉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사숙께서는 이번 일의 해결을 위해 조 형님을 부르신 거로군요.”
노해광은 잠시 착잡했던 마음을 가다듬고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에도 말했다시피 막상 일이 터지니 쓸 만한 녀석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무엇보다 상대방의 절정고수들에 맞설 만한 실력있는 인물이 절대적으로 부족했지. 그래서 고민 끝에 과거에 안면이 있었던 일평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다.”
“조 형님이 도와주신다면 커다란 힘이 될 것입니다.”
“일평이 가세하면서 비로소 우리도 그들과 상대할 전력이 갖추어졌다. 이제는 나를 건드린 대가를 받는 일만이 남아 있다.”
노해광은 다부진 표정으로 허공의 한 점을 응시했다.
“피가 흐르는 것을 걱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 피가 종남파로 이어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