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1권 철혈행로(鐵血行路)편 : 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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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21권 철혈행로(鐵血行路)편 : 2화


제 210장 연환삼수

진산월이 숙소로 돌아왔을 때 제일 먼저 본 것은 후원의 앞마당에서 무공을 수련하고 있는 낙일방의 모습이었다.
진산월이 담장을 넘어 들어온 것을 알면서도 낙일방은 무공을 시전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진산월은 한쪽에 서서 낙일방이 다채로운 동작으로 무공을 수련하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낙일방은 확실히 예전보다 여유가 있어 보였다. 단순히 빠르고 급하게 내지를 줄만 알았던 동작에 완급과 강약이 가미되어 얼핏 보기에도 평생 동안 무공을 닦아온 대가에 못지않았다.
지금 낙일방이 펼치고 있는 것은 구반장법이었다. 소림사의 비무에서 처음 사용한 후로 낙일방은 부쩍 이 장법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최근에는 무공 수련의 대부분을 이 장법에 소비하고 있었다.
구반장법은 이백여 년 전의 종남파 최전성기 시절에 당시 장문인이었던 소선 우일기를 천하제일수로 불리게 한 세 가지 절학 중 하나였다. 당시 우일기는 천단신공과 태인장, 구반장법으로 성명했거니와, 그 중에서도 구반장법은 복잡한 노수와 변화무쌍한 화려함으로 천하인들을 경악케 한 놀라운 무공이었다.
하나 우일기가 의문의 실종을 한 후 구반장법의 비전 또한 사라져버렸고, 보는 이의 넋을 빼놓을 듯한 화려한 구반장법의 전설만이 종남파 문인들의 입으로 가끔씩 전해져 올 뿐이었다.
구반장법은 그 변화의 다양함만큼이나 익히기가 어렵고 구결이 난해하여 당시에도 우일기 외에는 누구도 제대로 익힌 사람이 없었다. 우일기조차도 실종되기 전까지의 구반장법에 대한 조예가 구성에 머물러 있었으니 그 수련의 어려움이 어떠한지는 능히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었다.
낙일방 또한 우일기가 남긴 칠종절학 중에서 아직 제대로 입문도 하지 못한 태인장을 제외하고는 구반장법에 대한 조예가 가장 떨어지는 편이었다. 그가 자주 사용하는 낙뢰신권이나 옥뢰신장은 벌써 팔성이 넘었는데, 구반장법은 아직 채 오성에도 이르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도 최근에 전력을 기울여 이룩한 성과였고, 종남파를 떠날 때만 해도 남들 앞에 내보이기 부끄러운 수준에 불과했다.
지금 낙일방은 구반장법 중의 우랑장의라는 초식을 펼치고 있었다. 부드럽고 다소 해학적인 이름처럼 우랑장의는 상당히 유연하면서도 경쾌한 초식이었다. 하나 그 안에는 빠르고 과격한 움직임이 은밀히 담겨 있어 자칫 방심했다가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되는 것이다. 이 초식은 특히 왼손과 오른손의 속도가 판이하게 다르고 노수 또한 복잡해서 낙일방은 벌써 삼 일 동안이나 하루에 두 시진 이상씩을 이 초식 하나에 투자하고 있었다.
이 초식을 제대로 익혀야만 뒤이어 천손직금과 금슬상화로 이어지는 구반장법의 절초인 연환삼수의 수법을 완성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삼수를 완벽하게 익힌 상태에서만이 삼벽과 삼전에 입문할 수 있다. 이 삼수와 삼벽, 삼전이 바로 팔십일초나 되는 구반장법의 가장 핵심이 되는 수법들임을 생각해본다면 낙일방이 구반장법을 완성하기 위해서 가야 할 길은 그야말로 까마득하게 멀다고 할 수 있었다.
낙일방은 열 번이나 계속해서 우랑장의를 시전하고도 만족스럽지 못한지 표정이 그리 밝지 않았다. 하나 이내 손을 멈추고는 한쪽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서 있는 진산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디 다녀오셨습니까, 장문사형?”

진산월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잠이 오지 않아서 잠시 강변을 거닐었다.”

낙일방은 진산월이 허리춤에 용영검을 차고 있는 것을 보고는 그가 단순히 산책을 나갔다 온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했으나 굳이 그 점에 대해서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그는 요즘 자신을 고민스럽게 하고 있는 것에 대해 토로했다.

“구반장법을 익히는 게 생각만큼 수월치 않습니다. 노력한 것에 비해서 진척도 더딘 것 같고… 특히 이 우랑장의가 아주 애를 먹이는군요. 이제 겨우 연환삼수의 시작일 뿐인데 벌써부터 이리 헤매고 있으니 답답한 생각이 듭니다.”

“연환삼수는 구반장법의 초반에서 중반으로 넘어가는 아주 중요한 초식이다. 비급에 적혀 있는 우일기 조사의 주해를 보면 조사께서도 당년에 이 부분에서 상당히 고심하셨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 너는 너무 초조해할 필요가 없다.”

낙일방은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그건 알고 있지만…. 앞으로 비무할 자들을 상대하려면 적어도 구반장법의 삼수가 꼭 필요한데 며칠째 아무 성과도 없으니 절로 걱정이 되는군요.”

아닌 게 아니라 지금까지의 비무는 중소문파나 그다지 강하지 않은 고수들이 대상이었으나 앞으로는 점차 강력한 상대가 나타날 것이 분명했다. 당장 오늘 오후에 비무첩을 보내기로 한 청의방만 해도 하남성에서 손꼽히는 거대방파일 뿐 아니라 뛰어난 실력의 고수들이 수두룩하게 속해 있는 만만치 않은 곳이었다.
낙뢰신권의 위력이 비록 대단하다고는 해도 변화가 단순한 편이어서 낙일방으로서는 구반장법의 현묘한 절초들이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었다. 강과 변, 쾌와 환이 조화를 이루어야만 어떤 상대와 싸워도 쉽게 흔들리지 않을 것임을 이제는 그도 충분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진산월은 낙일방의 얼굴에 걱정기가 가시지 않는 것을 보고는 앞으로 성큼 다가오더니 용영검을 뽑아 들었다.

“실전보다 훌륭한 스승은 없지. 나는 천하삼십육검을 사용할 테니 너는 구반장법만으로 상대해보거라.”

낙일방은 찌푸렸던 얼굴을 활짝 펴며 기꺼운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래 주시겠습니까?”

그로서는 진산월과의 비무가 다른 무엇보다도 반갑고 기쁜 일이었다. 어느 정도의 수준차가 있는 만큼 부상의 걱정 없이 마음껏 자신의 실력을 발휘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비무 후에 자신의 약점을 지적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진산월은 말없이 용영검을 앞으로 쭈욱 내밀었다.
천하제탄의 일식이 막강한 검기를 뿌리며 낙일방에게로 다가갔다. 낙일방은 슬쩍 옆으로 몸을 반 걸음 이동시켜 검기를 피함과 동시에 다시 앞으로 두 걸음 빠르게 전진하며 진산월에게로 바짝 다가섰다.
시퍼렇게 번뜩이는 검기를 보고도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돌진해 들어오는 낙일방의 모습은 확실히 예전보다는 자신감이 많이 늘어나 보였다. 하지만 이 정도로 만족할 수는 없었다.
진산월의 용영검이 허공에서 미끄러지듯 유연하게 움직이더니 세찬 떨림을 일으켰다. 그러자 마치 폭죽이 피어오르듯 십여개의 검기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바로 천하성산의 초식이었다.
낙일방은 두 눈을 깜박거리지도 않고 예리하게 반짝이며 양손을 질풍처럼 휘둘렀다.
파파파팡!
그의 손에서 수십 줄기의 경풍이 연이어 흘러나오며 폭발하듯 다가오는 검기들을 하나씩 파괴하기 시작했다. 지금 낙일방이 펼치고 있는 것은 구반장법 중의 금라천망이라는 초식으로, 절정에 이르면 사십팔 개의 장영을 일으켜 자신의 주위를 온통 뒤덮어버릴 수 있는 뛰어난 수법이었다. 낙일방은 현재 스물네 개의 장영을 겨우 만들 수 있는 수준이었으나, 자신을 노리고 날아드는 천하성산을 막기에는 충분한 것이었다.
천하성산의 검기를 모두 파해하자마자 낙일방은 재차 앞으로 달려들며 반격을 가하려 했다. 하나 그의 신형이 채 움직이기도 전에 다시 진산월의 검이 허공에서 괴이한 궤적을 일으키며 낙일방의 앞가슴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 움직임이 어찌나 영활하고 기기묘묘했던지 낙일방은 순간적으로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분명 자신도 익히 알고 있는 천하삼십육검 중의 천하승월이라는 초식이었는데도 진산월의 손에서 펼쳐지자 전혀 다른 무시무시한 절초 같았던 것이다.
낙일방은 순간적으로 오른 주먹을 쥐고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검날을 후려치려다 아차 하는 표정으로 황급히 주먹을 장으로 변환시켜 세차가 흔들어댔다. 구반장법만으로 맞서라는 진산월의 지시를 깜빡 잊고 무심결에 손에 익은 낙뢰신권을 펼치려고 했던 것이다.
매서운 검광을 뿌리며 낙일방의 앞가슴으로 파고들던 용영검이 무언가 보이지 않는 암경을 만난 듯 주춤거렸다. 찰나의 순간이었으나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낙일방은 진산월의 왼쪽으로 파고들며 질풍노도 같은 삼장을 내갈겼다. 그의 이 추산진해에서 옥장금절로 이어지는 변초는 절묘하기 그지없어 순식간에 절대적인 열세를 벗어나 오히려 공세로 돌아설 수 있었다.

“좋은 연계 수법이다!”

진산월에 입에서 나직한 탄성이 흘러나오며 그의 용영검이 거친 움직임을 선보였다.
파파팍!
낙일방이 내갈긴 삼장이 씻은 듯이 사라지며 오히려 폭포수 같은 검광의 낙일방의 우측 상반신을 휘감아버렸다. 낙일방은 재빨리 몸을 선회하며 구반장법의 절초들을 펼쳐 맞서갔다. 하나 어찌된 일인지 그의 전신을 노리고 날아드는 검광의 기세는 점점 강력해지기만 했다. 진산월은 천하삼십육검 중의 천하도도와 천하성진, 천하비사를 연거푸 전개하여 낙일방의 전신을 송두리째 검광 속에 몰아넣어버린 것이다.
이 삼절초는 연환했을 때 특히 그 본연의 위력이 나타나는데, 진산월의 손에서 펼쳐지자 단순한 연환 정도가 아니라 세 명이 동시에 공격한 듯한 착각이 들었다. 낙일방은 이런 상태라ㅕㄴ 자신이 앞으로 몇 초 더 버티지 못한다는 것을 직감하고는 세차게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상대가 진산월이라고 해도 우일기를 천하제일수로 올려놓았던 구반장법으로 천하삼십육검에 맥없이 격퇴당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단순한 호승심이나 무공에 대한 자부심 때문이 아니라 무인이라면 누구나가 가지고 있는 투쟁심의 자연스런 발로였다.
낙일방은 갑자기 세차게 휘두르던 양손을 가슴 앞으로 모으더니 진중한 표정으로 오른손과 왼손을 번갈아가며 앞으로 내뻗었다. 그리 빠르지 않은 동작이어서 그동안에 날카롭게 그를 위협하던 검광에 먼저 당할 것만 같았는데, 기이하게도 그토록 삼엄하게 몰아치던 검광이 그의 가까이에 오지 못하고 하나씩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낙일방은 단순히 양손을 번갈아가며 앞으로 내미는 것 같았으나 자세히 보면 그의 양손이 내밀어지는 속도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더구나 오른손은 좌우로 가늘게 떨리고 있는 데 비해 왼손은 작은 원을 그리고 있어 더욱 기이해 보였다. 낙일방이 조금 전까지 수련에 몰두하고 있던 우랑장의를 펼친 것이다.
그토록 호탕한 기세로 몰아쳐 오던 천하도도와 천하성진, 천하비사의 연환초식은 이미 씻은 듯이 사라져버렸다. 대신에 전후와 좌우로 복잡하게 움직이는 낙일방의 두 손이 진산월의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진산월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낙일방의 두 손을 보고 있다가 손과 손이 움직이는 사이로 용영검을 불쑥 집어넣었다. 전혀 틈이 없어 보였던 낙일방의 양손 사이가 뻥 뚫려지며 낙일방의 창백하게 굳어진 얼굴이 드러나 보였다.
낙일방은 설마 우랑장의가 이토록 맥없이 파해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있었기에 경악을 금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비록 아직 채 절반도 완성되지 않은 우랑장의라고 해도 그 위력은 익히고 있는 낙일방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어떤 무공을 만나도 쉽게 뚫리지 않으리라고 은근히 믿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낙일방이 아직 우랑장의를 완벽하게 펼치지 못했던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진산월의 초식을 보는 눈이 그만큼 날카롭고 예리하기 때문이었다.
원래 우랑장의를 완벽하게 펼치면 왼손과 오른손의 각기 다른 속도가 서로 보완이 되고, 좌우로 움직이는 오른손과 원형을 이루는 왼손의 변화가 조화를 이루어 빈틈을 찾아볼 수 없게 된다. 하나 낙일방이 펼친 우랑장의는 아직 속도의 조절이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왼손과 오른손의 조화 또한 완벽한 것이 아니어서 진산월의 효과적으로 찔러대는 일검에 너무나도 맥없이 뚫려버린 것이다.
막 용영검에 앞가슴이 격중되려는 순간, 낙일방은 자신도 모르게 번갈아 내지르던 양손을 좌우로 세차가 흔들었다. 마치 손사래를 치는 듯한 그의 모습은 자신의 가슴을 찔러오는 장검을 막으려는 무의식적인 동작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 어설픈 동작에 진산월의 용영검이 제지당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엉겁결에 흔들어댄 낙일방의 소맷자락에 검날이 휘감겨 옆으로 날아가버렸다. 때마침 진산월이 용영검을 재빨리 회수하지 않았다면 아마 손에서 검을 놓치고 말았을지도 몰랐다.
검을 거두고 물러난 진산월은 물론이고 위기의 순간에 검을 물리친 낙일방조차도 어안이 벙벙하여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낙일방은 자신의 소맷자락을 신기한 듯 내려보았다. 예리하기 그지없는 용영검을 휘감았는데도 그의 소맷자락은 찢겨진 구석 하나 보이지 않았다.

‘이게 어찌된 일이지? 가만… 그러고 보니….’

낙일방은 자신이 해놓고도 어찌된 영문이니 몰라 멍하니 서있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안색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대 용영검을 다시 허리춤에 찬 진산월이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네가 방금 사용한 초식이 무엇인지 알겠느냐?”

낙일방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천손직금이었습니다.”

“그렇다.”

“천손직금이 설마 소맷자락을 이용한 초식일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어쩐지 비급의 설명을 아무리 읽어보아도 어떻게 펼치는 것인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더라니…. 그런데 어떻게 제가 아직 익히지도 않은 천손직금을 펼칠 수 있었을까요?”

“천손직금의 다음 초식인 금슬상화를 떠올려보거라.”

낙일방은 금슬상화가 내뻗었던 양손을 접어들이며 팔꿈치로 상대의 양쪽 관자놀이를 가격하는 수법임을 상기해냈다. 진산월은 낙일방의 얼굴을 주시하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우랑장의부터 천손직금과 금슬상화로 이어지는 세 초식을 연환하여 사용한다고 생각해보거라.”

낙일방의 두 눈에 번쩍하는 신광이 피어올랐다.
생각해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조금 전에 자신이 직접 경험한 일이 아닌가? 만약 조금 전의 상황에서 자신이 소맷자락으로 진산월의 용영검을 날려버린 후 쉬지 않고 금슬상화를 펼쳐 팔꿈치 공격을 가했다면 진산월은 치명적인 상태에 빠졌을지도 몰랐다.
낙일방은 한동안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보니 우랑장의는 단순히 그 자체만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초식이 아니라 뒤이어 연환되는 천손직금과 금슬상화를 보다 효과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상대를 유인하는 초식이었군요.”

“그렇다. 삼수는 각기 다른 세 가지 초식이 아니라 그 세가지가 모여 하나의 치명적인 살수를 이루는 무서운 수법이다. 나도 조금 전까지는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으니, 구반장법이 얼마나 오묘하고 정심한 무공인지 새삼 절감하겠구나.”

“그래서 그 앞에 ‘연환’이라는 단어가 붙게 된 것이로군요.”

“아마 삼벽과 삼전 또한 그와 마찬가지로 세 개의 초식이 모여 상대로 하여금 꼼짝도 못하게 하는 무시무시한 수법들일 것이다. 단순히 화려하기만 한 줄 알았던 구반장법 속에 그런 무서운 살수들이 숨어 있으니, 당년에 우일기 조사께서 이 무공으로 천하제일수라 불리게 된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두 사람은 모두 구반장법의 새로운 묘용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낙일방은 열띤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제 비로소 제가 아무리 수련을 해도 우랑장의를 완벽하게 익히지 못하는 이유를 알았습니다. 우랑장의는 원래 상대를 유인하기 위한 초식이므로 다음 초식을 위해 절반 이상의 힘을 남겨놓아야 하며, 공력의 배분 또한 좌우로 움직이는 오른손보다는 원형을 그리는 왼손에 더 집중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상대의 공격을 원형의 소용돌이에 몰아넣어 천손직금과 금슬상화로 상대를 제압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상대를 쓰러뜨릴 생각에 무조건 공력을 양손에 똑같이 나누어 전력을 기울였으니 초식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을 수밖에요.”

낙일방의 두 눈은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는 희열감에 가득 차 있었다.
구반장법은 단순한 장법이 아니었다. 그 속에는 소맷자락과 팔뚝을 이용한 수법뿐 아니라 손목, 팔꿈치, 심지어는 어깨를 이용한 수법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하나 사실을 알고 보면 놀랄 일도 아니었다. 구반장법의 구반이란 장(손바닥), 권(주먹), 지(손가락), 조(손톱), 완(손목), 수(소매), 박(팔뚝), 주(팔꿈치), 견(어깨) 등 신체의 아홉 부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실상 상반신 전체를 사용하여 상대를 제압하는 무공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낙일방은 장법이란 당연히 손바닥만을 사용하는 무공일 거라는 선입견에 사로잡혀 구반장법의 무궁한 효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조금이나마 구반장법의 진정한 위력을 맛보게 되었으니 그는 마치 새로 개안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충격을 받은 것은 진산월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진산월은 누관의 석실에서 검정중원을 완성한 이후 적어도 검에 관한 한은 절대적인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채 오성에 이르지도 못한 낙일방의 구반장법에 뜻밖의 낭패를 당할 뻔하자 그동안 자신이 검법에만 너무 신경을 쓰느라 여타 무공에 소홀했음을 자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본 파의 무공은 어느 것 하나 아무런 의미도 없이 대강 만들어진 것이 없다. 그런데 나는 장문인의 신분으로 유운검법과 삼락검을 과신한 나머지 무공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권장법을 등한시했으니 본 파의 선대 조사들을 뵐 면목이 없구나.’

진산월은 구반장법을 비롯한 여타 무공에 대해 자신이 좀 더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완성된 줄 알았던 검정중원에 아직도 보완해야 할 구석이 적지 않게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검정중원의 가장 기본이 되는 뼈대는 물론 유운검법이었지만, 그 밑바탕에는 곽일산과 정립병이 연구한 무수한 초식들이 자양분이 되어 있었다. 하나 그 초식의 대부분은 검법의 초식들이었고, 장법이나 권법에서 파생된 것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 진산월 또한 지금까지 그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었다.
이제 진산월은 종남파의 권법이나 장법도 충분히 연구해볼 가치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비록 뒤늦은 개달음이었으나, 그로 인해 그의 검정중원이 한 단계 더 발전할 계기를 맞게 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오늘 이 작은 깨달음이 두 사람의 앞날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 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하나 그 파장은 언제고 두 사람은 물론이고 중원무림 전체를 뒤흔들게 될 것이다.


화창한 날이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은 눈이 시릴 듯 파래서 아무리 올려보아도 지겨울 것 같지 않았다.
손풍은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우두커니 서 있는 낙일방을 힐끔거리고는 동중산을 향해 소곤거렸다.

“오늘따라 낙 사숙이 조금 이상해진 것 같지 않소? 아까부터 자꾸 먼 산을 쳐다보며 멍하니 서 있으니 말이오.”

동중산도 낙일방이 평소와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고 생각했으나 겉으로는 대수롭지 않은 듯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 오후에 어떤 식으로 비무를 벌일 건지 마음속으로 그려보시는 듯하군. 혹시라도 방해가 될지 모르니 오늘은 되도록 낙 사숙 곁으로 가지 않는 게 좋겠네.”

손풍의 입고리가 삐죽거렸다.

“내가 근처에 가면 머릿속이 꽉 막혀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기라도 한단 말이오?”

동중산은 심통에 가득 찬 손풍의 얼굴이 귀엽다는 생각이 들어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그만큼 오늘 오후에 있을 청의방과의 비무가 만만치 않다는 말이네. 자네도 청의방에 대한 소문은 들었겠지?”

동중산은 아무리 무림과는 담을 쌓고 살아온 손풍이라도 청의방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했으나 손풍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도리질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 이름의 방파는 들어보지 못했소. 청의방이라니…. 옷장수들이 모여서 만든 방파인가 보죠? 이름만 봐도 별 볼일 없다는 걸 알겠는데, 낙 사숙 실력에 고민할 건덕지나 있겠소?”

손풍은 지난 며칠간 낙일방이 비무하는 모습을 여러 차례 봐왔기 때문에 낙일방의 무공에 대해 나름대로 확고한 믿음 같은 게 생긴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의 비무라고 해보았자 중소문파를 상대로 한 것이어서 낙일방은 어렵지 않게 승리를 거두어왔던 것이다. 그러니 손풍으로서는 처음 비무행을 떠날 때의 설렘과 두려움은 까맣게 잊고 청의방과의 비무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옆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뇌일봉이 어처구니 없다는 듯 손풍을 한심스런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의 뒤통수를 손으로 후려갈겼다.

“네놈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함부로 아가리질 좀 하지 마라. 청의방이 어떤 문파인데 옷장수 운운하는 거냐?”

손풍은 뇌일봉에게 몇 차례나 혼쭐이 난 적이 있기 때문에 지금도 잔뜩 조심을 하긴 했으나 뇌일봉의 번개같은 손놀림에 피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뒤통수를 싸맨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이고… 왜 자꾸 머리를 때리는 겁니까? 이러다 머리가 나빠져서 바보라도 되면 어르신께서 저를 책임지실 겁니까?”

“이놈아! 너는 더 나빠질 머리도 없느니라. 어쩌면 그렇게 아무생각 없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이는지 모르겠구나. 아무래도 이번 기회에 네놈의 머릿속을 해부해서 그 안에 대체 뭐가 들어 있는지 확인해봐야겠다.”

뇌일봉이 오른손을 갈고리처럼 오므라뜨린 채 머리를 잡으려 하자 손풍은 질겁을 하고 바닥을 떼굴떼굴 굴러 진산월 옆으로 피했다. 그 바람에 옷이 먼지투성이가 되었으나 손풍은 전혀 거리낌 없이 바닥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진산월에게 넙죽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었다.”

“장문인, 혹시 제게 시키실 일은 없으십니까?”

진산월은 흙이 덕지덕지 묻어있는 손풍의 얼굴을 쳐다보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너를 부르려 했다.”

손풍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무슨 일이십니까?”

“이 근처에 대장간이 있는지 찾아보도록 해라.”

손풍은 진산월이 왜 갑자기 대장간을 찾는지 의아했으나 이내 큰 소리로 대답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쏜살같이 알아가지고 오겠습니다.”

그는 뇌일봉이 다시 손찌검을 할 것이 두려운지 재빨리 몸을 돌려 길 저편으로 달려갔다.
뇌일봉은 그의 뒷 모습을 보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그놈 참!”

진산월이 뇌일봉을 바라보며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뇌 숙부께선 손풍이 무척 마음에 드신 모양입니다.”

뇌일봉은 그답지 않게 실실거리며 웃었다.

“저놈을 보면 꼭 몇 년전의 일방이 생각난단 말이야. 때릴수록 제법 손맛이 느껴지는 것도 비슷하고….”

뇌일봉의 시선이 슬쩍 낙일방에게로 향했다. 낙일방은 주위의 소란도 모른 채 그때까지도 하늘을 올려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 무언가 깊은 상념에 잠긴 듯 눈동자만이 가끔 반짝거릴 뿐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뇌일봉의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저 녀석은 너무 거물이 되었어. 이제는 예전처럼 마음 놓고 놀리지도 못하겠으니 영 재미가 없구나. 그래서 아쉬운 대로 손가놈에게 더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그의 재질이 어떻다고 보십니까?”

“재질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근골은 제법 훌륭하더구나. 손노태야가 내놓은 자식이라고 해서 별로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무슨 놈의 영약을 그리도 많이 쳐먹었는지 어제 잠시 기맥을 살펴보았더니 몸속에 채 용해되지 않은 영약의 기운이 가득하더구나.”

뇌일봉이 갑자기 정색을 하며 물었다.

“그놈은 아직 종남파의 무공에 입문하지 않았지?”

“며칠 전부터 운기토납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운기토납은 괜찮다만 내공심법을 가르칠 때는 신중해야 할거다. 그놈의 몸속에는 거대한 폭탄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자칫하면 제대로 내공을 쌓기도 전에 전신의 경맥이 터져 버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운기토납법이 익숙해지면 태을신공부터 익히게 할 생각입니다.”

뇌일봉은 종남파의 태을신공이 기초를 닦고 몸을 보호하는데는 최고의 내공심법 중 하나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구나. 잘만 키운다면 그놈은 단기간 내에 내공으로는 그 나이 또래에서 적수가 없을 정도의 고수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쉬운 일은 아닐겁니다.”

“물론이지. 아무리 근골이 뛰어나고 영약을 밥처럼 먹은 놈이라고 해도 고수가 되는 게 쉬울 리 있겠느냐? 다만 남보다 그렇게 될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뿐이지.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저 놈은 정말 복받은 놈이 아니겠느냐?”

“본인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을 겁니다.”

“흐흐… 그게 그놈의 귀여운 점이기도 하지. 입으로는 저 혼자 잘난 것처럼 떠들어대지만 막상 자기의 몸이 어떠한지도 전혀 모르고 있지 않느냐? 그 급한 성미만 잘 제어할 수 있다면 제법 좋은 재목이 될 수 있을 텐데….”

진산월은 그 점에 대해서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손풍은 잘할 겁니다. 보기보다는 참을성이 강하고 성격이 담대해서 연습보다 실전에서 더 힘을 발휘하는 유형입니다. 무인이 되기에 아주 적합한 체질이라고 할 수 있지요.”

뇌일봉은 다소 의외라는 눈으로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네가 그를 좋게 보고 있다니 뜻밖이로구나. 그를 별로 탐탁지 않아 하는 줄 알았는데….”

“그럴 리 있습니까? 손풍의 행동거지가 썩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장래만큼은 누구보다도 확신하고 있습니다.”

뇌일봉은 급히 물었다.

“그의 장래가 어떻다고 보느냐?”

진산월은 한 차례 그를 응시하더니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는 본 파의 좋은 제자가 될 것입니다.”

뇌일봉은 멍하니 그를 쳐다보고 있다가 이내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었다.

“허허… 그래, 그거면 충분하지. 종남파의 좋은 제자라…. 그놈은 반드시 그렇게 될 수 있을 것이다.”

마침 그때 일행에게로 돌아오던 손풍이 멀리서 그의 웃음소리를 들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늙은이가 또 무슨 꿍꿍이를 부리려고 저렇게 신나게 웃고 있는 거지? 어째 산 넘어 산이라더니 다른 사람들에게 적응할 만하니까 어디서 저런 산도개비 같은 늙은이가 튀어나와 나를 못살게 구는지…. 손풍아! 너는 정말 지지로도 복이 없는 놈이로구나.’

손풍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움직여 진산월에게로 다가갔다.

“장문인, 대장간을 찾았습니다.”

진산월은 가만히 있는데 옆에 있던 뇌일봉이 껄껄 웃으며 그의 등을 탁 쳤다.

“허허… 이놈! 참 빨리도 찾았구나. 어서 가보자.”

손풍은 그가 손을 휘두르자 지레 놀라서 뒤통수를 감싸안고 있다가 그의 손이 자신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고는 물러가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늙은이가 갑자기 제정신으로 돌아왔나? 아무래도 조금전에 장문인께서 이 늙은이에게 한소리 하신 모양이구나. 남의 문파의 귀한 제자에게 함부로 손찌검하지 말라고 말이지.’

손풍은 고마운 생각이 들어 초롱초롱한 눈으로 진산월을 바라보았다.

‘장문인은 겉으로는 무뚝뚝한 것 같아도 보면 볼수록 자상하고 인정이 넘친단 말이야.’

그는 진산월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큰소리로 외쳤다.

“저쪽으로 백여 장만 가면 제법 큰 대장간이 있습니다. 제자가 안내할 테니 따라오십시오.”

그리고는 훵하니 몸을 돌려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것이었다.
손풍의 말대로 대장간은 이런 작은 도시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커다란 규모였다. 대장간 옆에 병기나 철물을 파는 제법 큰 점포가 따로 있어서 망치질을 하는 장인들말고도 물건을 판매하는 점원들의 수가 대여섯 명이나 되었다.
진산월 일행이 점포 안으로 들어오자 가장 나이 많은 점원이 재빨리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무얼 찾으시는지요.”

진산월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이내 검이 가득 진열되어 있는 곳을 턱으로 가리켰다.

“검을 한 자루 사려고 하네. 검날이 너무 예리하지 않으면서도 강도가 단단해서 쉽게 부러지지 않는 놈으로 골라주게.”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점원이 진열장으로 가자 손풍이 재빨리 진산월에게 다가와 머리를 숙였다.

“장문인, 감사합니다. 잘 사용하겠습니다.”

진산월은 고개를 저었다.

“네가 아니라 소웅에게 줄 물건이다.”

손풍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예? 유….. 사형은 이제 겨우 열한 살에 불과한데 그런 어린아이에게 검을 주시다니요.”

“너는 아직 검을 잡을 시기가 아니다. 하지만 소웅은 어제 날짜로 장괘장권구식을 모두 마쳤으니 이제 천하삼십육검에 입문해야 한다. 그래서 그에게 검을 선사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면 제자는 언제쯤에나 검을 받을 수 있는지…”

“우선은 운기토납법을 완벽하게 익히고…”

“그건 오늘이라도 당장 완벽하게 마칠 수 있습니다.”

“태을신공에 입문한 후에…”

“지금이라도 태을신공을 가르쳐주시면…”

“장괘장권구식을 모두 배우게 되면 그때 비로소 손에 검을 쥘 수 있다.”

손풍은 우거지상을 했고, 중인들은 큭큭거렸다.
뇌일봉이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웃으며 손풍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우하하! 이놈아, 아직 걸음마도 떼지 못한 주제에 벌써 하늘로 날려 하느냐? 네놈이 검을 잡으려면 적어도 서너 달은 죽을 고생을 해야 하느니라.”

“아이고… 제기랄! 제발 머리 좀 때리지 말라니까요!”

손풍이 뒤통수를 부여안으면서도 버럭 소리를 지르자 뇌일봉이 고리눈을 부릅뜨고 그를 쏘아보았다.

“이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 감히 노부에게 대들어? 정말 단단히 혼이 나고 싶은 게냐?”

손풍은 진산월이 뇌일봉을 잘 타일렀으리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가 뇌일봉이 노성을 터뜨리지 자신이 잘못 생각한 것임을 알아차렸다.

‘이런 빌어먹을… 장문인이 이 늙은이에게 잔소리한 것이 아니었단 말인가? 어재 내가 하는 일은 하나같이 이렇게 재수가 없단 말이냐?’

그는 한숨이 푹푹 나왔으나 이대로 있다가는 뇌일봉의 주먹에 정말 호되게 당할 것 같아 재빨리 꽁무니를 뺐다.

“앗? 벌써 점심시간이 다 되었군요. 제자가 이 근처에서 제일 음식 잘하는 집을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그가 후다닥 가게 밖으로 달려 나가자 옆에서 이 광경을 웃으며 지켜보고 있던 동중산이 진산월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몸을 날렸다.

“손 사제, 같이 가세.”

동중산은 손풍이 뇌일봉에게 당한 분풀이를 엉뚱한 곳에 풀려고 할지 몰라 그의 뒤를 따라 나간 것이다. 뇌일봉은 이런 속사정을 짐작하고는 끌끌 혀를 찼다.

“쯧. 저 나이에 어린 사제의 뒷수발이나 들고 있다니 천하의 비천호리가 정말 신세 한번 처량하게 되었구나.”

“중산은 본 파의 제자들 중 가장 서열이 높습니다. 나이 어린 사제들을 돌보는 건 당연한 일이지요.”

“예전과는 너무 달라져서 저런 모습이 낯설어서 그런다. 보기에 그리 나쁘지는 않구나.”

“중산은 잘 하고 있습니다. 손풍도 이제는 제법 그에게 대사 형 대우를 해주는 것 같더군요.”

“그러지 않으면 주위에 자기를 편들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까 그런 거지.”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점원이 세 자루의 검을 들고 왔다.

“손님이 말씀하신 것들 중 가장 부합되는 놈들입니다. 이중에서 골라보시지요.”

노련해보이는 점원의 말마따나 그가 들고 온 세 자루의 검은 모두 쓸 만해 보였다. 이런 작은 도시의 대장간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물게 잘 만들어졌고, 재질 또한 우수해 보였다. 보검이라고 할 수는 없어도 어디에 내놓아도 크게 흠 잡히지 않는 수준의 검들이었다.
진산월은 세 개의 검을 꺼내 한 차례씩 살펴보더니 한쪽에 조용히 서 있는 유소웅을 불렀다.

“이리 와서 하나씩 들고 휘둘러보거라.”

“예.”

점원은 당연히 어른이 사용할 줄 알고 있다가 웬 키가 작고 얼굴이 가무잡잡한 소년이 나와서 검을 잡자 움찔 놀랐다.

“이 아이가 사용할 거라면 좀 더 작은놈으로 골라오겠습니다.”

진산월은 그를 제지했다.

“그럴 필요 없소. 어차피 검을 쥐게 된 이상 나이의 구별은 무의미한 것이니 말이오.”

옆에서 뇌일봉이 그의 말을 받았다.

“옳은 말이긴 하지만, 그래도 처음 검을 쥐게 되는데 소웅이 부담을 느끼지 않겠느냐?”

진산월이 무어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유소웅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이어 그는 세 개의 검을 차례로 잡고 검을 뽑아 이리저리 휘둘러보았다. 뇌일봉은 검을 수발하는 그의 자세나 태도가 몹시 자연스러운 것을 보고 눈을 크게 뜨며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저 녀석은 하는 짓도 나이답지 않더니 검을 잡는 동작 또한 보통이 아니구나. 왜 손가놈이 애늙은이라고 부르는지 알 것 같다.”

“소웅은 어린 나이에 몽고의 거친 대초원을 한 자루 단검에 의지한 채 혼자의 힘으로 횡단한 아이입니다. 검을 배우는 건 처음이지만, 검이나 도 같은 병장기에는 이미 익숙해진 상태입니다.”

“보면 볼수록 대단한 아이로구나. 성격이 침착하고 근골 또한 나쁘지 않으니 잘만 가르치면 머지않아 강호에 뛰어난 소년 검수가 탄생할 수 있을 것이다.”

유소웅은 세 개의 검을 번갈아가며 휘둘러보더니 이내 그중 한 녀석을 골랐다.

“이것으로 하겠습니다.”

진산월은 유소웅이 고른 검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검은 그가 보기에도 세 개의 검들 중 가장 무게중심이 잘 잡혀 있고 담금질이 잘되어 있는 검이었다. 비록 다른 두 개의 검보다 날카롭지는 않았으나, 처음 검을 배우는 사람이 사용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것이었다.
검의 대금을 지불한 진산월은 검의 손잡이에 붉은색의 작은 수실을 매달았다. 그 수실에는 <견(堅)>이라는 글씨가 수놓아져 있었다.
진산월은 검을 든 채로 엄숙한 눈으로 유소웅을 바라보았다.

“예전에 너는 나에게 무공을 배울 수만 있다면 어떠한 고통도 참을 수 있다고 말했다. 기억하느냐?”

“예.”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도 물러서지 않겠으며,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후회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것도 기억하고 있느냐?”

“예.”

“도한 어떠한 최후를 맞이하더라도 기꺼이 감수하겠다고 했다. 이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느냐?”

유소웅은 작지만 단호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예, 사부님.”

“이 ‘견’이란 글자는 너의 그러한 결심이 굳게 지속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무엇이건 초지일관한다면 장부가 될 수 있지. 고수가 되는 것은 그 다음 문제다. 나는 네가 단순히 무공만 뛰어난 고수가 아닌 진정한 장부가 되기를 바란다.”

유소웅의 작은 얼굴에 결연한 표정이 떠올랐다.

“명심하겠습니다.”

진산월이 검을 내밀자 유소웅은 그 자리에서 세 번 절을 한 후 두 손으로 공손하게 검을 받았다.

“검명을 내려주십시오.”

“견정이다.”

“견정검….”

유소웅은 나직하게 중얼거리고는 검을 가슴에 안은 채 소중하게 쓰다듬었다. 절세의 보검도 아니고 천하에 이름이 알려진 명검도 아니었으나, 그에게는 세상의 어떤 신검보다도 더욱 소중한 검이었다. 하늘같은 사부가 초심을 잃지 말라며 직접 검명까지 하사한 최초의 검인 것이다.
견정검은 어른들이 사용하는 일반적인 크기여서 그가 허리춤에 매달기에는 너무 길었다. 그래서 유소웅은 그 검을 품에 안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이 영락없이 검동(검객의 검을 대신 들고 다니는 시동)을 연상케 했으나 유소웅은 조금도 거리껴 하지 않았다.
뇌일봉은 바닥에 대면 자신의 목 근처까지 올라오는 커다란 장검을 소중하게 안고 다부진 표정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는 유소웅을 한참이나 지켜보고 있다가 진산월을 향해 확신에 찬 음성으로 말했다.

“저 아이는 반드시 강호를 뒤흔드는 절정검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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