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1권 철혈행로(鐵血行路)편 : 4화
제 212장 생사비무
한 시진의 휴식을 끝내고 다시 연무장으로 돌아온 종남파 고수들은 커다란 당혹감을 느껴야만 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청의방의 고수들만이 도열해 있던 연무장 주위가 각양각색의 사람들도 가득 에워싸여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대부분이 병장기를 소지한 무림인들이었고, 남녀노소가 뒤섞여 있어 특정한 방파의 소속은 아닌 듯 보였다.
“와아…. 종남파의 고수들이다!”
그들은 진산월 일행을 보고는 우렁찬 함성을 내질렀다.
좀처럼 냉정을 잃지 않던 동중산마저도 당황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마침 그들을 마중 온 청의방의 수석총관 서일명을 보자 동중산은 황급히 물었다.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서일명은 태연스런 음성으로 대꾸했다.
“본 방과 종남파가 비무를 벌인다는 소문이 알려지자 여남은 물론이고 이 일대의 무림인들이 모두 구경하기를 간절히 원했소. 본 방의 방주께서 이를 승낙하시어 사람들이 몰려든 것이니 신경쓰지 않아도 되오.”
동중산은 어이가 없다는 듯 언성이 높아졌다.
“이게 어떻게 신경 쓰지 않을 일이란 말이오? 이런 일을 하려면 적어도 사전에 우리와 상의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오?”
서일명의 눈초리가 싸늘하게 변했다.
“본 방에서 벌어지는 비무에 본 방이 자발적으로 연무장을 공개하는 일조차 다른 문파의 승낙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오?”
동중산은 더 말을 해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음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이미 일은 저질러졌는데 뒤늦게 왈가왈부해보았자 모양새만 이상해질 뿐이었다.
연무장 주위는 이미 흥분한 사람들의 고함 소리와 격정에 가득 찬 시선이 어우러져서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사전에 무슨 커다란 집회라도 계획된 줄 알았을 것이다.
‘사전에 계획되긴 한 셈이군. 청의방에서 일방적으로 계획한 것이긴 해도 말이지.’
동중산은 씁쓸한 고소를 머금으며 진산월의 표정을 살폈으나, 진산월은 평상시와 전혀 달라진 바가 없었다. 전혀 흔들림 없는 진산월의 모습을 보고는 동중산은 이내 들끓었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동중산은 저런 점이야말로 진산월을 진산월답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고 무리의 중심을 잡아주는 것은 우두머리라면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할 필수조건이었다. 하나 실제로 이런 조건을 갖추고 있는 사람은 쉽게 찾아보기 힘들었다.
진산월은 무공이 보잘것없던 시절에 감당하기 힘든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은 인물이었다. 몸과 마음이 모두 성장한 지금은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종남파 인물들이 단상에 마련된 자리로 올라가자 관중들의 흥분은 최고조에 달해 여기저기서 고함 소리가 연거푸 터져 나왔다.
“저 사람이 바로 일검에 구름을 일으킨다는 진산월이다. 그 유명한 대종남파의 장문인이다!”
“신검무적 일검운해!”
일부는 종남파 만세를 외치기도 했다.
중인들의 열렬한 환호에 종남파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하면서도 그다지 싫은 기분은 아니었다. 하나 그만큼 부담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동안 몇 차례의 비무가 있기는 했으나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곳에서의 비무는 처음이었다. 이런 상황에서의 패배는 생각도 하기 싫은 것이었다.
단상에는 조금 전에 보았던 청의방의 수뇌들이 모두 자리하고 있었고, 곽존해의 옆으로 새롭게 세 명의 노인들이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세 노인 모두 하얀 백발에 푸른 학창의를 입고 있었는데, 이목이 청수하고 눈빛이 맑아서 속세와는 어울리지 않는 선인들을 보는 것 같았다. 단상으로 올라온 뇌일봉이 그 노인들을 보고는 반색을 하며 성큼성큼 그들에게 다가가더니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세 분 선배께서는 별래무양하신지요?”
세 노인 중 가운데 앉은 이마에 작은 점이 있는 노인이 온화하게 웃었다.
“자네를 이곳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군. 몸이 불편하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이제 쾌차한 것인가?”
“아직은 염라대왕이 부를 때가 아니었나 봅니다. 그나저나 세 분께서는 오대산 선운봉에서 신선같은 생활을 즐기시고 계실 줄 알았는데 여기까지는 어인 일이신지요?”
“친우의 초대를 받고 호북성 쪽으로 가다가 이곳을 지나게 되었네. 예전에 안면이 있던 곽 방주가 마침 비무의 참관인을 부탁하기에 승낙을 했는데, 자네가 종남파 고수들과 동행을 하고 있는 줄은 미처 알지 못했군.”
뇌일봉은 약간은 수척한 얼굴에 한 줄기 웃음을 매달았다.
“많지 않은 친우 중의 한 명이 마침 종남파의 전대 장문인이었는지라 오래 전부터 이들과는 친족처럼 가깝게 지내고 있습니다.”
“그렇군. 자리에 앉게.”
뇌일봉이 착석하자 세 노인의 시선이 진산월에게로 향했다.
물처럼 맑은 세 개의 시선이 진산월의 얼굴을 구석구석 스치고 지나가더니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그려냈다.
“정말 범상치 않은 기도로군. 우리는 하삭삼은이라는 별 볼일 없는 노인네들일세. 자네가 바로 종남파의 장문인인 진산월인가?”
진산월은 그들을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진모가 하삭삼은 선배님들을 뵙니다.”
진산월이 비록 일파의 장문인 신분이라고 해도 하삭삼은의 강호에서의 명성이나 배분이 워낙 높아서 공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삭삼은은 가장 나이가 어린 선유농학 구조홍조차 칠십이 훨씬 넘었을 정도로 나이가 많았고, 자연히 배분도 대문파의 장로보다 반 배가 높았다. 특히 가장 연장자인 풍설무진 육장청은 구십에 가까운 고령이어서, 강호의 최고 어른인 환우삼성과 비슷한 연배였다.
이마에 점이 있는 노인이 바로 하삭삼은의 첫째인 육장청이었다. 육장청은 주름 가득한 노안에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의 명성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네. 강호에서 좀처럼 보기 드문 희대의 검객이 나타났다고 해서 그렇지 않아도 호기심에 좀이 쑤셨던 참일세. 오늘 자네의 솜씨를 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설레는군.”
“부족한 실력으로 공연히 세 분의 눈을 어지럽히지 않을까 걱정이 되는군요.”
“허허…. 그럴 일은 없을 것 같군. 비무의 규칙은 간단하네. 독을 사용해서는 안 되며, 암수를 써서도 안되네. 하지만 암기는 허용이 되며, 어느 한쪽의 우열이 분명하게 판가름 나면 우리가 비무를 중지시키겠네. 어떤가?”
“좋습니다.”
“그나저나 올 사람이 모두 온 것 같으니 이제 슬슬 시작하는게 어떻겠나? 벌써 오후 해가 조금씩 지고 있으니 말일세.”
곽존해가 진산월을 향해 당당한 음성을 내뱉었다.
“본 방은 준비가 되었소. 종남파는 어떠시오?”
“우리도 괜찮소.”
곽존해는 날카로운 눈으로 진산월을 응시하다가 이내 입가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매달았다.
“그럼 시작합시다.”
이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한 차례 훑어보았다. 그러자 시장 바닥처럼 소란스러웠던 장내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이것만 보아도 여남에서 그의 위세가 어떠한지 여실히 알 수 있었다.
곽존해는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본 방과 종남파와의 비무를 시작하겠소. 출전자는 각 파에서 다섯 명씩 나오게 되며, 비무의 방식은 이긴 자가 패할 때까지 계속 싸우는 연승식이오. 강호에서 명망이 높은 하삭삼은 세 분을 참관인으로 모셨으니 이분들이 비무의 판정에 대해 공평한 심사를 해주실 거요.”
그제서야 중인들 사이에서 요란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
“그럼 비무를 시작하겠소. 연 호법은 앞으로 나오게.”
단상에 있던 청의방 고수들 중 비쩍 마른 체구의 중년인이 날렵한 신법으로 연무장의 중앙으로 내려섰다. 그의 표홀한 신법을 보자 중인들은 흥분에 가득 찬 환성을 내질렀다.
“와아! 비영무궁이다.”
중년인은 주위를 향해 포권을 한 후 종남파 고수들을 쳐다보았다. 누가 나와도 거리낄 것이 없다는 듯 자신에 찬 모습이었다.
진산월의 시선이 전흠에게로 향했다. 전흠은 진산월이 말하기도 전에 이미 연무장을 향해 신형을 날리고 있었다. 그 화급한 모습에 뇌일봉은 나직이 혀를 찼다.
“쯧. 저 성미는 영락없이 제 할아버지를 닮았군.”
중년인은 전흠을 한 차례 훑어보더니 약간은 거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청의방 삼대호법 중 인자호법인 비영무궁 연소명이라고 하네. 자네의 이름은?”
전흠의 대답은 짤막했다.
“종남파의 전흠이오.”
“처음 드는 이름이군. 별호는 없나?”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연소명의 말에 전흠의 눈꼬리가 꿈틀거렸다.
“궁금하면 알아보시오. 아니면 새로 하나 지어주든가.”
연소명의 입가에 냉막한 미소가 떠올랐다.
“흐흐… 별호도 없는 애송이와 다투게 생겼군. 종남파라고 해서 잔뜩 기대를 했는데 오늘 일진이 별로 좋지 못한 것 같구나.”
“그 일진을 정말 사납게 만들어주지.”
연소명의 거듭된 놀림에 격분했는지 전흠은 사전 예고도 없이 장검을 뽑았다.
창!
날카로운 검명과 함께 시퍼런 검광이 번뜩이자 연소명의 신형이 한 차례 흔들거리더니 옆으로 이 장 떨어진 곳에 나타났다. 그야말로 귀신이 무색할 신법이 아닐 수 없었다.
하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일단 검을 뽑게 되자 전흠은 두 눈을 무섭게 번뜩이며 연소명을 향해 질풍처럼 달려들어 빗발치는 듯한 검광을 뿌려댔다. 그 기세가 어찌나 살벌했던지 주위에서 지켜보고 있던 중인들이 놀란 경호성을 터뜨릴 정도였다. 금시라도 연소명의 전신을 난도질할 듯 사방을 휘몰아치는 검광이 자신들에게 날아오는 듯한 착각이 들었던 것이다.
시작하자마자 맹렬한 기세로 연소명을 몰아치고 있는 전흠을 보고 사람들이 역시 종남파의 고수답다고 탄성을 내질렀으나 동중산의 표정은 오히려 무겁게 굳어졌다.
“전 사숙께서 상대의 도발에 흥분하여 처음부터 무리하시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됩니다.”
진산월은 조용한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그렇게 보이느냐?”
“연소명은 청의방의 천지인 삼호법 중 서열은 세 번째에 불과하지만 신법이 뛰어나고 심기가 깊어서 상대하기에는 가장 까다로운 인물입니다. 전 사숙께서 자칫 그를 경시하셨다가는 의외의 고전을 하실지도 모릅니다.”
“네가 그렇게 봤다면 그들도 그렇게 생각하겠지.”
“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전흠은 겉으로는 투박하고 성격이 거친 것 같아도 싸움에 임해서는 누구보다도 진지한 사람이다. 상대의 사소한 말장난에 흔들리거나 상대를 무시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단 말이지. 전흠이 처음부터 맹공을 펼치는 것은 상대의 신법이 자신보다 뛰어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상대에게 마음 놓고 신법을 펼칠 수 있는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해 전흠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아!”
“문제는 네 말대로 연소명의 신법이 예상보다 뛰어나다는 것이다. 전흠의 검을 저토록 쉽게 피하는 자는 좀처럼 보지 못했다. 이번 싸움은 아무래도 누가 먼저 지치느냐 하는 것이 관건이 될 것 같구나.”
동중산은 새삼스런 눈으로 비무가 벌어지고 있는 연무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전흠은 마치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무서운 기세로 연소명을 몰아치고 있었다. 사방이 온통 그가 뿌려대는 검광에 휩싸여 사람의 모습은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에 비해 연소명의 신형은 마치 허깨비처럼 검광과 검광 사이로 조금씩 보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 신법이 어찌나 표홀하고 영활한지 전흠의 가공할 검광 사이에서도 옷자락만 몇 군데 잘라졌을 뿐 몸에는 작은 상처 하나 나 있지 않았다.
지금 연소명이 펼치고 있는 것은 무궁무종보라는 것으로, 이름 그대로 보법의 변화가 무궁무진하여 움직임이 끝도 없이 이어져서 마침내는 종적조차 제대로 찾기 어려운 상승의 절학이었다. 연소명은 이 무궁무종보와 비영추풍신법만으로 청의방의 호법 자리에 올랐거니와, 특히 임기응변에 능하고 성격이 냉정해서 남과의 싸움에서 좀처럼 손해를 보지 않았다.
전흠은 처음에는 천하삼십육검을 위주로 초식을 펼치다가 연소명의 보법이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것을 알고는 이내 성라검법으로 변화시켰으나 좀처럼 우세를 점하지 못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백여 초가 지나갔다. 전흠은 여전히 폭풍같은 검초를 퍼붓고 있었고, 연소명 또한 반격은 생각도 하지 않고 계속 이리저리 신형을 움직여 검광 속을 누비고 있었다.
동중산은 전흠의 얼굴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는 것을 보고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무래도 전 사숙의 체력이 생각보다 많이 소진되어 가는 것 같은데…. 이러다가는 설사 승리한다 해도 다음의 비무를 치르기에는 힘들지 않을까?”
연소명이 반격을 하지 않고 피하기만 하는 것도 신경에 거슬렸다. 아무리 전흠의 공격이 매섭다고 해도 몸이 상처 하나 입지 않고 피할 수 있다는 건 반격을 가할 충분한 여지가 있다는 의미였다. 그런데도 연소명은 피하는 일에만 매진하기로 결심한 사람처럼 허리춤에 매달린 장검을 뽑을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아무리 신법이 뛰어나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피하기만 해서는 비무에서 승리할 수 없는 법이다. 당장 구경을 하던 군웅들 중에서도 연소명의 행동에 대해 이런저런 비난의 소리가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동중산은 연소명의 행동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궁리하고 있다가 퍼뜩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연소명의 검법은 경이적일 정도로 뛰어난 보법이나 신법에 비하면 아무래도 손색이 있었다. 그가 만약 무리하게 반격을 가했다면 오히려 보법에 허점을 노출시켜 낭패를 당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연소명은 계속 이런 식으로 피해서 전흠의 체력을 떨어지게 하여 역전의 기회를 노리는 것일까?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연소명의 목적은 당장의 승리보다는 전 사숙의 체력을 바닥나게 하는 것 같구나. 전 사숙이 특별한 돌파구를 찾지 않는 한 이번 싸움은 예상보다 훨씬 힘들 것 같구나.’
동중산의 우려를 입증이라도 하듯 전흠의 검이 조금씩 느려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연소명의 얼굴에는 조금 전과는 다른 당혹스런 표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검의 속도가 떨어지는 대신에 시퍼런 검기가 줄기줄기 흘러나왔던 것이다.
찌익!
연소명의 옆구리 부근 옷자락이 찢어지며 그의 옆구리에서 처음으로 핏자국이 내비쳤다. 조금 전이었다면 단순히 옆구리의 옷만 조금 잘려져 나갔을 텐데 검기가 워낙 강력해서 피부가 베어진 것이다.
연소명의 몸도 땀으로 흠뻑 젖은 지 오래였다. 아무리 보법이 뛰어나다고 해도 이토록 강력한 검광 속을 이백초에 가깝게 피해 다닌다는 것은 심력을 막대하게 소모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전흠의 검에서 검기가 흘러나오자 연소명으로서는 더욱 위험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놈은 지치지도 않는단 말인가?’
대부분의 고수들은 자신의 보법에 지레 놀라 기세가 꺾이거나 무리하게 무공을 펼치느라 진력이 바닥나서 제풀에 나가떨어지기 마련인데, 전흠은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더욱 무섭게 검을 휘둘러대고 있었다.
지금도 무질서하게 그어대는 검기의 다발이 연소명의 상반신을 맹력하게 압박해 들어왔다. 성라검법 중의 절초인 낙성빈분이라는 초식이었는데, 연소명의 눈에는 시퍼런 검기의 그물이 허공에서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 검기에 한 가닥이라도 격중되었다가는 팔다리가 무 조각처럼 잘려져 나갈 것이 분명했다.
연소명은 무궁무종보 중의 무궁연운을 펼쳐 허공으로 신형을 날렸다. 그의 몸이 마치 한 가닥 연기처럼 흐릿한 잔상을 남기며 전흠의 머리 위로 날아올랐다.
팟팟!
그 와중에 연소명의 양쪽 어개가 검기에 스쳐 피투성이가 되었으나 연소명은 이를 악물어 고통을 눌러 참으며 전흠의 머리를 뛰어넘어 그의 뒤로 내려섰다. 그의 눈에 전흠의 뒷등이 송두리째 들어왔다. 여기서 검을 앞으로 내찌르기만 해도 전흠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 연소명은 검을 찌르기는커녕 오히려 몸을 뒹굴 듯 공중회전을 하며 뒤로 날아가는 것이었다.
그 순간, 전흠의 몸이 무섭게 선회하며 눈부신 검광 한 가닥이 조금 전까지 연소명이 서 있던 공간을 휩쓸고 지나갔다. 연소명의 동작이 조금만 느렸어도 그 검광에 허리가 두 동강이 나고 말았을 것이다.
방금의 일식은 성라검법 중의 성이두전이라는 것으로, 등 뒤의 상대를 단숨에 쓰러뜨리는 무서운 초식이었다. 연소명이 살인적인 초식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그의 풍부한 경험과 순간적인 임기응변 때문이었다. 자신이 너무 쉽게 전흠의 뒤를 잡았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거의 무의식적으로 몸을 피했던 것이다.
공중회전을 하던 연소명의 몸이 채 바닥에 내려서기도 전에 전흠은 재차 그를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이글거리는 눈으로 연소명을 쏘아본 채 검을 휘두르는 전흠의 모습은 그야말로 성난 늑대를 보는 것 같았다.
연소명의 두 발이 허공에서 정신없이 춤을 추며 그의 신형이 다시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회전을 하던 상태에서 몸을 멈추지도 않고 두 발만을 움직여 허공으로 오르는 것은 그야말로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동중산조차도 놀란 탄성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대단하구나!”
하나 그 순간 전흠의 신형이 그보다 더 높이 뛰어오르더니 위에서 아래로 화살처럼 내리꽂히는 것이었다. 시퍼런 검광이 번득이며 외마디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큭!”
중인들이 놀라 보니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던 연소명의 몸이 바닥에 떨어진 채 나뒹굴고 있었고, 전흠의 검이 그의 앞가슴에 꽂혀 있었다.
전흠은 그의 가슴을 찔렀던 검을 뽑았다.
팟!
핏줄기가 뿜어 나왔으나, 의외로 연소명의 상처는 그리 깊지 않았다. 전흠의 검은 피육만을 살짝 뚫고 들어갔던 것이다.
전흠은 검을 거둔 채 광망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연소명을 쏘아보았다.
“별호도 없는 애송이한테 진 기분이 어떤가? 정말 일진 한번 더럽지?”
연소명의 얼굴이 여러 차례 변했다. 자신의 조카뻘밖에 되지 않는 전흠에게 패한데다 모욕적인 말을 듣자 분기를 참기 힘들었던 것이다.
하나 패자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이번 비무는 종남파의 승리요.”
육장청의 선언에 그제서야 중인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와아! 최고다!”
“종남파의 이름 없는 고수가 비영무궁을 꺾었다.”
“이 사람아, 이름이 없긴…. 서안에서는 폭뢰검 하면 울던 아이도 울음을 멈춘다고 하네.”
“아니 왜?”
“성격이 불같은데다 검법마저 난폭해서 그렇다고 하더군.”
“폭뢰검이라… 정말 딱 어울리는 별호로군.”
사람들의 흥분된 고함과 박수 소리가 한동안 연무장을 뒤흔들었다.
그 우레와 같은 환호성을 들으며 연무장의 중앙에 우뚝 서 있는 전흠의 사정은 사실 그리 좋지 않았다. 연소명의 보법은 그가 지금까지 상대했던 어떤 고수보다도 뛰어난 것이었다. 그 보법을 따라잡느라 전력을 다해 이백여 초를 퍼부었으니 아무리 강철 같은 체력을 지닌 그일지라도 피곤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땀에 흠뻑 젖어 찰싹 달라붙은 무복 사이로 그의 건장한 앞가슴이 세차게 뛰고 있는 광경이 여실히 드러나 보였다. 하나 그 모습은 추레하기보다는 오히려 보는 이의 마음을 뜨겁게 만드는 무인다운 강렬함을 진하게 느끼게 했다.
군웅들의 환성이 잦아들 즈음, 청의방에서 다시 한 명의 인물이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체구가 건장하고 손에 커다란 안령도를 든 텁석부리 장한이었다. 텁석부리 장한은 성큼성큼 전흠에게 다가오더니 이내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는 것이었다.
“멋진 검법이었네. 마지막 초식은 무어라고 하는 건가?”
“괴성척두요.”
“괴성척두라… 정말 위력에 어울리는 이름이군. 멋진 초식을 보여준 답례로 이번에는 내 칼솜씨를 맛보게 해주겠네. 어떤가. 지금 싸울 수 있겠나?”
“당연히.”
전흠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자 텁석부리 장한은 굵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나는 장호라는 사람이네. 청의방에서 천자호법을 맡고 있지.”
그는 오른손에 들고 있는 안령도를 왼손으로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나는 다른 재주는 보잘것없고 평생을 오직 이 칼 한자루에 의지해 살아왔네. 이 칼의 이름은 염왕이고, 내가 익힌 도법은 초혼십팔도일세. 그래서 사람들은 나를 염왕초혼이라고 부르지. 자네는 올해 들어 내 염왕도에 쓰러진 열다섯 번째 인물이 될 걸세.”
전흠의 입꼬리에 냉랭한 미소가 내걸렸다.
“말 많은 자치고 실속 있는 자를 보지 못했소. 쓸데없는 헛소리는 집어치우고 어서 그 염왕인지 뭔지 하는 칼을 뽑으시오.”
텁석부리 장한, 장호는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 좋아, 무인이라면 말보다는 실력으로 자신을 나타내는 법이지.”
그는 주저하지 않고 안령도를 칼집에서 뽑아들고 전흠을 향해 겨누었다.
단순히 칼을 쳐들기만 했는데도 장호의 기도가 몰라보게 달라졌다. 미소를 짓고 있던 얼굴은 냉막한 기운으로 뒤덮여 있었고, 전신에서 날카로운 기운이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그의 몸 전체가 예리한 칼날로 변해버린 것 같았다.
전흠 또한 수중의 장검을 힘주어 움켜잡은 채 불타는 눈으로 장호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뿜어내는 기도가 어찌나 살벌했던지 방금 전까지도 시끌벅적했던 장내가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을 수 있을 만큼 조용해졌다.
“꿀꺽….”
누군가의 침 삼키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그 순간, 두 사람의 신형이 서로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차차창!
검과 도가 부딪치는 음향이 고막을 찢을 듯 쉴 사이 없이 터져 나오는 가운데 연무장은 삽시간에 검풍과 도영에 휩싸여버렸다.
동중산은 안력을 돋구어 장내의 격전이 치열하여 도무지 누가 우세한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는 진산월을 향해 조심스런 음성으로 물었다.
“전 사숙은 어떻습니까?”
의외로 진산월의 음성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좋지 않다.”
동중산의 표정 또한 덩달아 무거워질 수밖에 없었다.
“어느 정도입니까? 제 안력으로는 도저히 현재의 상황을 파악하기 힘들군요.”
“속도는 전흠이 더 빠르지만 힘에서 장호에게 조금씩 밀리고 있다. 전흠의 몸 상태로 보아 그의 속도는 앞으로 점차 느려질 것이 뻔하니 시간이 흐를수록 그가 불리할 수밖에 없다.”
“염왕초혼 장호의 칼이 무섭다는 소문은 많이 들었지만 전 사숙의 실력으로 당해내지 못하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조금 전에 연소명과의 비무에서 너무 힘을 뺀 게 아닌가 싶습니다.”
“연소명은 이것을 노리고 비무를 장기전으로 끌고 간 모양이다.”
동중산은 억지로 미소 지었다.
“설사 전 사숙께서 패한다 할지라도 낙 사숙이라면 충분히 장호를 감당할 수 있으실 겁니다.”
진산월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걱정하는 건 전흠이 패하는 것이 아니다.”
“예?”
“단순히 비무의 일승을 위해서 청의방이 이런 술수를 부렸다면 괜찮으나, 나는 비무의 승리만이 아닌 또 다른 무언가를 노리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한 생각이 드는구나.”
“그게 무엇입니까?”
진산월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살짝 눈살을 찡그렸다가 이내 평정을 회복했다.
“내가 너무 넘겨짚은 것일까? 청의방에서 그렇게까지 할 이유는 없을텐데….”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동중산은 외눈을 번쩍 치켜떴다.
‘장문인께선 무엇을 걱정하는 것일까? 비무의 승리말고 청의방의 노릴 만한 것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진산월은 잠시 상념에 잠겨 있다가 격전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차피 잠시 후면 보다 분명한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전흠은 승부에 관한 한은 천부적인 소질을 가지고 있으니 그의 실력을 믿어보도록 하자.”
비무는 그야말로 승부를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치열한 격전의 연속이었다. 전흠은 성라검법의 절초들을 쉴 사이 없이 펼쳐내고 있었고, 장호 또한 자신이 자랑하는 초혼십팔도로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맞서고 있었다. 전흠의 검이 한 줄기 유성처럼 무서운 속도로 장호의 가슴팍을 노린다 싶으
면, 어느새 장호의 안령도가 괴이한 궤적을 그리며 전흠의 옆구리로 파고들고 있었다.
하나 시간이 흐를수록 서서히 우열이 판가름 나고 있었다. 간혹 그들의 검과 도가 부딪칠 때마다 귀청이 떨어지는 듯한 파열음이 터져 나왔는데, 그때마다 조금씩 전흠의 신형이 흔들리고 있었다.
장호의 초혼십팔도에는 색혼경이라는 기이한 경력이 담겨 있어 상대의 병기와 염왕도가 부딪치는 순간 색혼경의 경력이 병기를 진동시켜 상대의 경맥을 뒤흔들게 된다. 이런 충격이 누적되면 상대는 자신도 모르는 새 치명적인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전흠은 시간이 갈수록 검을 든 팔이 무거워지고 자신의 몸 상태가 나빠지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미 연소명과의 비무로 진력을 상당히 허비한 그로서는 장호의 염왕도에서 흘러나오는 색혼경의 위력에 점차로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런 상태로 가다가는 자신이 필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이를 악물었다.
종남파의 비무행이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전흠이었다. 그 안에는 자신의 조부의 이십 년에 걸친 피와 땀과 눈물이 담겨 있었다. 이제 겨우 그 여정의 첫 걸음을 떼었을 뿐인데 자신으로 인해 일을 그르칠 수는 없었다.
전흠의 검법이 갑자기 거칠게 변했다. 수비는 도외시한 채 무모할 정도로 공격일변도로 나가는 것이다. 그 바람에 그의 검법의 곳곳에 허점이 드러났지만, 장호는 쉽사리 그 허점을 파고들지 못했다. 살을 주고 뼈를 깎겠다는 의도가 뻔히 보이고 있는데 무작정 달려들 수는 없었던 것이다.
‘누가 살을 주고 누가 뼈를 깎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
장호는 두 눈에 날카로운 광망을 번뜩이며 안령도를 풍차처럼 세차게 휘둘렀다. 그것은 괴이한 변화를 일으켜 상대의 시야를 현혹하던 지금까지의 도법과는 판이한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초혼십팔도 중에서 가장 무서운 세 초식 중 하나인 사향탈혼이었다. 삽시간에 사방이 온통 칼 그림자에 휘감겨버렸다.
까까깡!
전흠의 검과 안령도가 수십 번이나 맹렬하게 부딪치더니 전흠의 신형이 처음으로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비록 한 걸음에 불과했으나 전흠이 처음으로 분명한 약세를 드러낸 것이다. 그의 소맷자락은 이미 도기에 갈가리 찢겨 맨 팔뚝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어지나 검을 세게 움켜잡고 있는지 팔뚝에 시퍼런 핏줄이 지렁이처럼 여기저기에 튀어나와 있는 모습이 유난히 시선을 끌었다.
장호의 안령도가 다시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가 뒤집히더니 더욱 빠른 속도로 떨어져 내렸다. 그와 함께 시퍼런 도기가 아직도 비틀거리고 있는 전흠의 관자놀이를 쪼갤 듯 가공할 기세로 날아들었다. 바로 추혼낙백의 일식이었다.
누가 보기에도 전흠의 머리통이 안령도에 그대로 갈라져 뇌수를 뿌려댈 것만 같았다.
“아앗!”
여기저기서 놀란 경호성이 터져 나오는 순간, 비틀거리고 있던 전흠의 신형이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그 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쓰러진 것이 아니라 전흠의 몸이 장호의 말을 향해서 던져졌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장호의 수염이 가득한 얼굴이 핼쑥하게 굳어졌다.
자신의 발을 향해 쓰러지던 전흠의 신형이 뒤집히며 바닥에서 자신의 목을 향해 한 가닥 검기가 무서운 속도로 솟구쳐 올라왔던 것이다. 이것은 완전히 상궤를 벗어난 수법으로, 강호에서 남과 싸운 경험이 풍부한 장호로서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놀라운 초식이었다. 전흠이 순간적인 임기응변으로 남해삼십육검 중의 절초인 해저발침에 성라검법의 비폭성류를 연계한 것이다.
장호의 두 눈에 악독한 빛이 어른거리더니 아래로 내려치는 안령도의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팟!
“크윽!”
“윽!”
아래에서 위로 솟구쳐 오르는 검광과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도기가 서로 교차하며 짤막한 비명이 연거푸 흘러 나왔다.
전흠은 가슴에 일도를 맞고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장호 또한 무사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옆구리에는 전흠의 장검이 깊숙이 꽂혀 있었다.
중인들은 느닷없이 벌어진 참변에 놀라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비무가 치열하긴 했으나, 설마 눈 깜빡할 사이에 두 사람이 양패구상하게 되리라고는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던 것이다. 더구나 한 사람은 가슴이 갈라지고 한 사람은 검에 옆구리가 관통 당했으니 언뜻 보기에는 두 사람 모두 당장 죽는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셈이었다.
동중산이 황급히 연무장으로 달려와 전흠의 상세를 살피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비록 가슴이 갈라져 상반신이 온통 피투성이가 되긴 했으나, 전흠의 숨은 끊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동중산은 재빨리 지혈을 하고는 금창약을 꺼내 전흠의 상처에 골고루 발라주었다.
청의방에서도 몇 사람이 나와서 장호의 상처를 살피고 있었다.
장호는 자신을 부축하려는 사람의 손을 뿌리치고는 자신의 옆구리에 꽂혀 있는 장검을 잡더니 힘주어 뽑아버렸다. 덕분에 핏물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으나 장호는 인상 한번 찡그리지 않고 뽑아낸 장검을 동중산에게 내밀었다.
“좋은 승부였다고 전해주시오.”
동중산은 그의 손에서 검을 건네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꼭 전해드리겠소.”
그제서야 장호의 신형이 크게 휘청거렸다. 두 사람이 양옆에서 그를 부축하지 않았다면 그는 보기 흉한 자세로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을 것이다. 장호는 두 사람의 부축을 받으면서도 끝끝내 자신의 두 발로 연무장을 벗어났다.
동중산은 전흠이 비록 의식을 잃었으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의 몸을 안고 종남파의 자리로 돌아왔다.
“상처가 깊기는 했으나 천만다행으로 심장까지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상처가 아물 때까지는 남과 싸우기는커녕 무공을 펼치지도 못할 것 같습니다.”
진산월은 전흠의 상세를 살피고는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태을신공의 화후가 깊어 다행히 주요한 경맥이 다치지 않았구나. 그러지 않았다면 살아난다고 해도 완치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낙일방이 와서 보고는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전 사형은 그자의 목을 꿰뚫을 수도 있었는데 일부러 옆구리를 찌르는 데 그쳤습니다. 그런데도 그자는 전 사형의 심장을 정면으로 노렸습니다. 청의방에서는 단순한 비무가 아닌 사생결단을 원하는 모양입니다.”
“나도 그러지 않을까 염려하긴 했다면 아무래도 청의방은 우리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구나.”
낙일방의 얼굴에 결연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들이 그것을 원한다면 그렇게 해주겠습니다. 본 파의 피를 보기 위해서 어떠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분명하게 보여 주겠습니다.”
평소와는 다른 낙일방의 모습에 동중산이 불안한 얼굴인 반면 진산월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