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1권 철혈행로(鐵血行路)편 : 5화
제 213장 살기충천
참관인석에 있던 하삭삼은 세 사람이 무언가를 상의하더니 육장청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번 비무는 두 사람이 양패구상을 하고 말았소. 부상의 정도는 종남파의 고수가 조금 더 심하지만, 그가 마지막 순간에 손길을 늦춘 것을 감안하여 무승부로 하겠소.”
중인들은 술렁거렸으나 특별히 반대하는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청의방에서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육장청은 청의방과 종남파를 차례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무림의 비무에서 부상자가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가급적이면 원만하게 일이 마무리되었으면 했는데 그 기대는 헛된 것이 되고 말았소. 아무쪼록 두 파에서는 가급적이면 살상을 자제하도록 최대한 노력해주었으면 하오.”
청의방주 곽존해는 알았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이내 한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최 당주, 이번에는 자네가 수고해줘야겠네.”
집혼당주 최력이 그를 향해 포권을 하고는 연무장으로 걸어 나왔다.
최력은 청의방의 최정예인 사당에서도 수석당주일 뿐 아니라 곽존해를 제외하고는 청의방 제일의 고수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가 나오자 그를 알아본 군웅들이 기대에 찬 함성을 내질렀다.
“철수패왕이다!”
“이번에야말로 청의방이 가장 확실한 패를 꺼내 들었군.”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나? 일무일패로 뒤지고 있으니 분위기를 반전시킬 필요가 있겠지.”
낙일방은 중인들의 고함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전에 최력이 나왔을 때보다 더욱 큰 함성이 일어났다.
“와아! 옥면신권이다!”
“철수와 신권이 맞붙게 되었다!”
사람들이 흥분에 차 소리를 지르든 말든 낙일방은 무표정한 얼굴로 최력의 앞까지 다가와서 몸을 멈춰 세웠다.
최력은 쭉 찢어진 눈에 음산한 안광을 번뜩였다.
“신검 대신에 신권이라…. 신검을 상대해보고 싶었는데 아쉬운 대로 신권으로 만족하도록 하지.”
낙일방은 아무 대꾸도 없이 품에서 묵령갑을 꺼내어 양손에 끼었다. 몇 차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낙일방은 최력을 향해 오른손 검지를 까닥거렸다.
그것을 본 최력의 얼굴에 언뜻 붉은 노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나이로 보나 강호에서의 경력으로 보나 애송이에 불과한 낙일방이 하늘같은 선배인 자신을 도발하고 있는 것이다.
‘나를 도발하겠다고? 그렇다면 기꺼이 도발에 응해주지.’
최력은 양손에 공력을 끌어올린 채 싸늘한 눈으로 낙일방을 쏘아보았다.
먼저 몸을 움직인 것은 낙일방이었다. 낙일방은 최력이 자세를 잡자마자 그를 향해 일직선으로 곧장 달려들었다. 얼핏 보기에는 상대를 완전히 무시하는 행동 같았으나, 종남파 사람들만은 낙일방이 진짜 화가 난 상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천단신공을 익힌 후 심상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낙일방에게서 좀처럼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최력 또한 피하지 않고 자신의 유명한 철수를 들어 낙일방을 향해 일장을 내갈겼다.
꽝!
낙일방의 주먹과 최력의 장력이 정면으로 부딪치며 폭음이 터져 나왔다.
세찬 경기가 사방으로 휘몰아쳤으나, 두 사람 중 누구도 물러나지 않았다. 낙일방은 오히려 더욱 빠르게 최력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고, 최력 또한 이번에는 그 자리에 있지 않고 낙일방의 우측을 노리고 신형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단 움직이자 최력의 몸은 눈부시도록 빨랐다. 그의 비마보는 단혈철수와 함께 오늘의 그를 만든 최고의 절학이었다.
순식간에 최력은 낙일방의 오른쪽을 돌아 그의 옆구리 쪽으로 다가갔다. 불그스름한 색으로 물든 그의 손이 예리한 궤적을 그리며 낙일방의 늑골을 파고 들었다.
낙일방은 최력이 움직인 방향으로 몸을 반쯤 돌며 그 기세를 살려 질풍 같은 이권을 내질렀다. 쌍봉관뢰는 낙뢰신권 중에서도 빠르고 강력하기로 손꼽히는 초식이어서 최력은 채 철수를 반도 내뻗기 전에 낙일방의 주먹을 맞닥뜨려야만 했다.
파팡!
두 번의 폭음이 거의 동시에 울리며 최력의 신형이 한 차례 휘청거렸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낙일방은 최력의 앞가슴으로 뛰어들며 주먹을 휘둘렀다. 뇌력천심의 권세가 최력의 가슴을 꿰뚫을 듯한 기세로 날아들었다.
최력의 양쪽 어깨가 한 차례 흔들렸다. 그러자 그의 신형은 어느새 낙일방의 주먹을 피해 그의 옆으로 돌아서고 있었다. 그의 양손이 번갈아가며 폭풍 같은 십여 장을 내갈겼다.
낙일방은 내뻗었던 주먹을 거두어들임과 동시에 오른손을 앞으로 내뻗었다. 그 수발이 어찌나 신속했던지 최력이 십여장을 모두 내갈긴 순간에 낙일방의 장력 또한 최력의 코앞에 거의 도달해 있었다.
쾅!
엄청난 굉음과 함께 최력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놀랍게도 십여 장을 날린 최력이 단 일장만을 발출한 낙일방에게 열세를 보인 것이다. 낙일방의 옥뢰신장이 십성을 넘어 서면서 비로소 본연의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최력의 얼굴이 자신도 모르게 살짝 찡그려졌다. 그의 손은 단혈철수를 익힌 후로 맨손으로 병기를 잡아도 멀쩡했는데, 지금은 상당한 통증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가 슬쩍 자신의 손을 내려보니 양쪽 손 모두 여기저기에 베어진 상처가 나 있었다. 단혈철수공의 특이점 때문에 피는 보이지 않았으나, 자신의 철수에 절대적인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최력으로서는 적지 않게 충격적인 일이었다.
‘저놈이 손에 칼날이라도 숨기고 있단 말인가?’
최력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낙일방의 손을 응시했으나 손가락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 검은 장갑 외에는 별다른 점을 찾을 수 없었다. 최력은 직감적으로 그 장갑에 무언가 묘용이 있음을 알아차리고 경각심을 늦추지 않았다.
낙일방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최력을 향해 돌진해 들어왔다. 옥을 깎아놓은 듯한 준수한 얼굴에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고 오직 두 주먹을 앞세운 채 무모할 정도로 맹렬하게 공격을 가하는 그의 모습은 보는 이의 뇌리에 진한 인상을 남기는 것이었다.
최력 또한 여기서 약세를 보였다가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하리라고 생각하고 전력을 기울여 단혈철수로 맞서왔다. 한동안 두 사람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미친 듯이 양손을 휘둘렀다. 손과 손이 마주치고 주먹과 주먹이 격돌하는 그 모습은 중인들을 열광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와아…. 최고다!”
경탄성이 장내를 뒤흔드는 가운데 순식간에 두 사람은 삼십여 초를 주고받았다.
아무리 두사람이 맨손 무공의 고수라고 해도 지금같이 가까운 거리에서의 박투는 위험천만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자칫 한순간이라도 실수했다가는 도저히 회복할 겨를도 없이 치명적인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눈도 깜빡거릴 수 없는 살벌한 순간이 계속되자 최력의 얼굴에 초조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자신의 나이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낙일방이 설마 정면으로 자신과 맞설 수 있는 내공을 지녔으리라고는 짐작도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낙일방의 주먹에서는 끊임없이 괴이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어 단순히 스치기만 해도 피부가 갈라지는 형편이었다. 단혈철수를 익힌 상태가 아니었다면 그의 양손은 이미 피범벅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다시 이십여 초가 지나가자 마침내 최력은 결단을 내렸다. 이런 상태가 지속된다면 나이가 많은 자신이 젊은 나이의 낙일방의 체력을 감당하지 못할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할 수 없다. 시기가 조금 이르긴 하지만…’
그의 두 눈에서 섬뜩한 광망이 번뜩이고 지나갔다.
마침 그때 낙일방은 낙뢰신권 중의 신뢰삼격으로 최력의 앞가슴을 가격해오고 있었다. 일권보다 이권이 빠르고, 이권보다 삼권이 빨라서 종내에는 세 개의 주먹이 동시에 날아드는 듯한 위력을 지닌 것이 신뢰삼격이었다. 최력은 단혈철수 중의 천풍노호 수법을 펼쳐 정면으로 부딪쳐 갔다.
파파팡!
세 번의 북 치는 듯한 음향과 함께 최력의 신형이 뒤로 주르르 밀려났다.
기세를 잡은 낙일방이 물러나고 있는 최력을 향해 전력으로 날아들었다. 굳게 쥐어진 그의 오른 주먹이 마치 거대한 뇌전처럼 최력의 아랫배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쏘아져 갔다. 낙일방은 단숨에 승부를 낼 요량으로 낙뢰신권 중에서도 가장 파괴적인 위력을 자랑하는 일점천뢰를 펼친 것이다.
막 낙일방의 주먹이 최력의 아랫배를 가격하려는 순간, 최력이 양손을 교차하여 자신의 아랫배를 감싸 안았다.
콰득!
뼈마디가 으스러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낙일방의 주먹에 격중 당한 그의 양 손목이 퉁퉁 부어올랐다. 하나 그 바람에 낙일방의 강력한 일격은 제지당하고 말았다.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은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낙일방이 재차 주먹을 날리려 할 때, 의당 부러진 줄만 알았던 최력의 양손이 기이하게 꿈틀거리며 그의 양쪽 팔뚝을 감싸 안는 것이 아닌가?
“엇?”
낙일방이 뜻밖의 사태에 놀라 경호성을 터뜨리자 최력이 그를 향해 음산한 웃음을 날렸다.
“흐흐… 내가 왜 패왕이라고 불리는지 알게 해주지.”
낙일방의 양 팔뚝을 붙잡은 최력이 그의 앞가슴으로 바짝 다가오며 오른쪽 무릎을 쳐들어 낙일방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쾅!
낙일방의 준수한 얼굴이 살짝 찡그려졌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최력의 반격에 상당한 통증을 느낀 것이다. 최력은 다시 왼쪽 무릎으로 낙일방의 오른쪽 옆구리를 가격하려 했다. 낙일방은 붙잡힌 양손을 잡아 빼려 했으나 최력의 손이 어찌나 강철처럼 단단하게 옭아매고 있는지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낙일방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자신도 무릎을 이용해 최력의 옆구리를 공격하는 것뿐이었다.
한동안 두 사람 사이에 보기 드문 공방이 벌어졌다. 두 명의 절정고수가 서로 손을 맞잡은채 무릎으로 상대의 옆구리를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자세로 공격을 피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두 사람은 상대의 무릎에 옆구리를 맞으면서도 쉬지 않고 공격을 가할 수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낙일방은 일곱 번의 무릎 공격을 받았고, 다섯 번의 반격을 했다. 최력의 무릎이 옆구리를 가격할 때마다 낙일방은 갈비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고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려야만 했다. 그런데 최력은 아무리 낙일방이 세찬 공격을 해도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낙일방은 자신이 철탑을 상대로 싸우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마치 시정잡배들의 다툼같이 어설퍼 보였으나 그 안의 흉험함은 겉으로 드러난 것과는 전혀 달랐다. 최력의 무릎 공격은 갈수록 위력적이었고, 낙일방의 옆구리를 이미 피부가 시커멓게 죽은 채 퉁퉁 부어오르고 있었다. 아직 갈비뼈가 부러지지 않은 것은 순전히 낙일방이 천단신공 중의 천강결을 운용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나 최력의 공격이 시간이 흐를 수록 강력해지는 것으로 보아 지금처럼 무방비로 공격을 허용해서는 천강결이 아닌 그보다 더한 신공이라도 견디지 못할 게 분명했다.
최력의 무릎 공격은 그가 회심의 절기로 숨겨둔 윤회금강술이었다. 양쪽 무릎을 번갈아 가며 공격하여 아무리 강력한 호신강기로 보호된 신체라고 해도 철저히 파괴해버리는 가공할 무공이었다.
그에 비해 낙일방은 제대로 된 슬격술을 익힌 적이 없기 때문에 공격이 그다지 위력적이지 못했다. 이런 식으로 양손을 서로 잡은 채 무릎으로 상대의 옆구리만을 공격하는 싸움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는 그였다.
마침내 낙일방의 코에서 검은 핏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최력이 윤회금강슬이 천강결을 뚫고 그의 내부에 적지 않은 타격을 주고 있다는 증거였다.
낙일방은 피를 철철 흘린 채 최력을 쏘아보았다. 최력은 징그런 미소를 지으면서도 계속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그 순간, 낙일방은 고개를 뒤로 젖혔다가 전력을 다해 최력의 이마를 들이받았다.
쾅!
머리와 머리가 부딪치는 소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굉음이 울리며 두 사람의 이마가 피범벅이 되었다. 최력은 경악과 당혹이 뒤섞인 표정으로 눈을 크게 떴다. 하나 그가 채 다른 생각을 하기도 전에 낙일방이 재차 이마를 부딪쳐 왔다.
쾅! 쾅!
세 번이나 거푸 이마를 부딪치자 두 사람의 얼굴은 그야말로 유혈이 낭자했다. 최력은 얼굴이 부서지는 듯한 통증에 정신이 없었으나, 그 와중에도 윤회금강슬을 멈추려 하지 않았다. 그 바람에 그는 낙일방의 양 팔꿈치로 잡고 있던 자신의 팔이 허술해지는 것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최력이 막 낙일방의 옆구리를 무릎으로 가격하려는 순간, 낙일방의 몸이 뒤로 훌쩍 움직였다. 최력의 무릎이 허공을 가르고 지나가자마자 낙일방의 주먹이 그의 아래턱을 사정없이 가격해버렸다.
쾅!
“크헉!”
최력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떴다가 내려앉았다. 더 볼 것도 없었다. 최력은 아래턱이 완전히 뭉개진 채 정신을 잃고 말았다. 목숨을 잃지 않는다 해도 그는 평생 고기를 씹을 수 없는 신세가 되어버릴 것이다.
“헉…. 헉……”
낙일방은 가쁜 숨을 몰아쉰 채 옆구리를 부여잡았다. 몇 번만 더 최력의 무릎 공격을 받았다면 아무리 그라도 더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을 것이다.
비록 승리를 거두기는 했으나, 임풍옥수 같았던 그의 얼굴은 피로 범벅이 되어 흉측스럽기조차 했다. 게다가 이마를 부딪치는 바람에 풀어헤쳐진 머리가 어깨까지 늘어져 봉두난발이 되어 있었다.
낙일방은 몇 차례 심호흡을 하고 어깨를 쭉 폈다. 옆구리에서 숨이 끊어질 듯한 통증이 느껴왔으나, 그는 인상을 찡그리지 않고 몸을 똑바로 했다.
그런 다음 참관인석을 응시했다.
“이번 비무의 결과는 어떻습니까?”
하삭삼은은 눈앞의 처참한 결과에 놀라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강호의 경험이 누구보다도 많은 그들로서는 조금 전에 보았던 광경은 해괴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다. 강호의 절정고수 두 사람이 뒷골목의 부랑아들처럼 양손을 움켜잡은 채 무릎으로 공격을 하다가 결국에는 박치기로 승부가 갈렸으니 말이다.
하삭삼은은 서로 나직하게 의견을 교환하고는 이내 비무의 결과를 발표했다.
“험. 이런 난투를 비무라고 해야 할지 모르지만, 어쨌든 결과가 갈렸으니, 이번 비무는 종남파의 승리일세.”
그제서야 중인들이 환성을 내질렀다.
“와아…. 신권이 철수를 꺾었다!”
하나 그 환호성은 처음 낙일방이 등장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미약한 것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강호의 떠오르는 신성인 옥면신권과 하남성의 유명한 고수인 철수패왕의 비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민망스러운 싸움이었던 것이다.
동중산이 낙일방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다가오려 했으나 낙일방은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그는 옷자락을 찢어 아직도 피가 흐르고 있는 이마를 대충 감싼 다음 청의방주인 곽존해를 응시했다.
“다음 상대는 누구요, 곽 방주? 마땅한 사람이 없으면 곽 방주의 신묘한 솜씨 한번 구경해봅시다.”
그의 도발적인 음성에 곽존해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곽존해 또한 눈앞의 결과가 당혹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는 최력이 낙일방에게 패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긴 했으나, 이런 식의 패배를 당하리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자신을 쏘아보는 낙일방의 모습은 단순히 애송이라고만 치부했던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분명하게 나타내는 것이었다.
곽존해의 시선이 천천히 움직여 장내의 한 사람에 고정되었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네가 나서야 할 것 같구나.”
그의 시선을 받고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은 곽승이었다. 곽승은 아무 말 없이 연무장으로 걸어 나갔다.
자신의 다음 상대가 곽승임을 안 낙일방은 하얀 이를 살짝 드러내며 웃었다.
“그래, 일이 이렇게 되어야지. 당신이 나오지 않았으면 서운할 뻔했소.”
곽승은 무심한 시선으로 낙일방을 응시했다.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투로군.”
“그렇소. 점창파와는 아직 매듭짓지 못한 게 있거든.”
낙일방이 이미 자신의 정체를 파악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어도 곽승의 표정은 전혀 변화가 없었다.
“본 파의 응안문을 알아본 모양이군.”
그는 자신의 장검의 손잡이에 새겨져 있는 매의 눈 문양을 손가락으로 쓰다듬더니 조용한 음성으로 내뱉었다.
“그렇다면 내가 자네가 며칠 전 상대했던 곽희의 동생이라는 것도 짐작할 수 있겠군.”
“그때 당신의 형에게서 제법 매서운 대접을 받았지. 당신의 검도 그처럼 날카로운지 모르겠소.”
곽승의 얼굴에 처음으로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냉정함을 넘어 스산해 보일 정도로 차가운 미소였다.
“둘째 형은 우리 형제 중 가장 진척이 늦어 어렸을 때부터 늘 바보라고 놀림을 받았지. 내 검은 그와는 조금 다를 테니 각오를 단단히 하는 게 좋을 걸세.”
“기대가 되는구려.”
곽승의 오른손이 잠깐 흔들리는 것 같더니 어느새 그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장검이 뽑혀져 그의 손에 쥐어졌다. 그 발검하는 자세만 보아도 낙일방은 곽승이 자신이 이제껏 상대했던 어떤 고수들보다도 뛰어난 검법의 소유자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 사이에 더 이상 어떤 말도 오가지 않았다. 대신 질식할 듯한 침묵만이 감돌고 있을 뿐이었다. 곽승은 검을 쥔 채로 낙일방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고, 낙일방 또한 묵령갑을 낀 손을 꼼지락거리며 두 팔을 자연스레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러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의 신형이 거의 동시에 움직였다.
팟!
그들의 신형이 교차되며 삼 장의 간격을 두고 서로 멈춰 섰다. 다시 몸을 돌려 서로를 응시하던 두 사람의 입가에 비슷한 미소가 떠올랐다.
낙일방은 슬쩍 자신의 오른쪽 옆구리를 내려다보았다. 옆구리가 베어져 시커멓게 죽은 피부가 훤히 드러나 보였다. 곽승 또한 왼손으로 검을 쥔 오른쪽 어깨를 가볍게 주물렀다. 방금 전의 일격에서 두 사람은 서로 가볍게 일검과 일권을 주고받은 것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해볼까?”
곽승은 오른쪽 어개를 한 차례 돌리고는 낙일방을 향해 먼저 몸을 날렸다. 미끄러지듯 연무장을 질주해가는 그의 신형은 흡사 먹이를 본 한 마리 매를 보는 것 같았다. 낙일방이 일전에 본 적이 있는 창웅보였으나, 당시 관을진이 펼쳤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다.
낙일방은 그 자리에 꿈쩍도 않고 있다가 곽승의 신형이 지척으로 다가오자 오른 주먹으로 빠르게 두 번 앞으로 찔러댔다. 그 순간 곽승의 검이 공간을 가르며 다가왔다.
단상에서 초조한 표정으로 비무를 지켜보고 있던 동중산이 신음 같은 음성을 흘려냈다.
“진공검….. 확실히 저자도 진공검을 익혔군요.”
진산월의 반응은 담담했다.
“그거야 이미 예상했던 일이지.”
“낙 사숙께서 과연 저자의 진공검을 깨뜨릴 수 있겠습니까?”
“일방에게도 나름대로의 계획이 있을 것이다.”
곽승의 검은 무풍지대처럼 낙일방의 권풍을 뚫고 들어왔다. 낙일방은 낙뢰신권의 절초들을 계속 펼쳤으나, 곽승의 검은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은 것처럼 유연하게 다가와서 낙일방의 몸을 위협했다.
불과 십초도 지나지 않아 낙일방은 세 번이나 검에 격중당할 뻔했다. 낙뢰신권은 비록 빠르고 강력한 무공이었지만, 그만큼 동작이 크고 변화가 단순해서 진공검을 상대하기에는 난점이 있었다.
낙일방은 곽승의 검이 자신의 왼쪽 어깨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가자 권에서 장으로 공격 방법을 변화시켰다. 드디어 구반장법을 펼친 것이다. 눈을 현혹시킬 정도로 변화가 무쌍한 구반장법을 펼치자 과연 곽승의 검이 파고드는 기세가 주춤거렸다.
여기까지는 소림사에서 벌어진 곽희와의 비무와 유사한 전개였다.
그런데 그때부터 곽승의 검이 판이한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곽승의 검이 한 차례 부르르 떨리더니 공간을 가르고 들어오는 속도가 몰라보게 빨라진 것이다. 오히려 낙뢰신권으로 상대했을 때보다 더욱 수월하게 낙일방이 펼친 구반장법의 장세 속을 파고들어왔다. 일전에 진산월이 말한 대로 단순히 변화가 많은 정도로는 진보된 파형 진공검을 막을 수 없는 게 분명했다.
구반장법으로도 막을 수 없고, 낙뢰신권으로도 소용이 없다.
낙일방으로서는 그야말로 속수무책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나 낙일방은 수세에 몰리면서도 전혀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두 눈을 번뜩이며 더욱 맹렬하게 구반장법을 펼치고 있었다. 피가 흘러내리는 이마를 옷자락으로 대충 감싼 채 상대의 진공검에 맞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양손을 질풍처럼 휘두르며 정면으로 대항하는 그의 모습은 장중함을 넘어 비장감마저 느끼게 했다.
파팟!
곽승의 검이 장세 사이를 예리하게 파고들어와 낙일방의 옆구리를 훑고 지나갔다. 가뜩이나 장호의 윤회금강슬에 가격당해 숨을 쉴 때마다 통증이 전해졌던 낙일방의 옆구리는 상처가 벌어지며 피범벅이 되어버렸다.
낙일방의 안색이 순간적으로 창백하게 변했다. 하나 그는 조금도 몸을 멈추지 않고 계속적으로 곽승에게 접근하며 구반장법의 절초들을 펼쳐냈다. 다시 십여 초가 흐르자 낙일방은 각기 왼쪽 어깨와 등에 이검을 격중 당해 상반신이 온통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이번에는 곽승이 낙일방을 향해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낙일방은 전력을 다해 장력을 휘둘렀으나, 곽승의 검은 너울을 타고 넘는 산들바람처럼 유연하게 낙일방의 공세를 뚫고 그의 목덜미를 찔러 갔다. 곽승이 지루한 승부를 끝내기 위해 마침내 살초를 펼친 것이다.
참관인석에 있던 육장청이 이 광경을 보고 손을 들어 비무를 제지하려 했다.
하나 그때 누구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 펼쳐졌다.
진공검에 베이면서도 조금씩 곽승에게 다가가던 낙일방이 갑자기 장을 권으로 변화시키며 질풍 같은 십이권을 내지르는 것이었다. 곽승이 낙일방의 목을 향해 찌러낸 검이 순간적으로 허공에서 멈춰졌다. 그의 검이 움직일 수 있는 모든 각도가 십이권에 완벽하게 가로막혀버린 것이다.
그 십이권이야말로 낙뢰신권의 최절초인 뇌정만균이었다. 진공검이 초식 사이를 파고들 때는 낙일방으로서도 막을 방법이 없었지만, 지금처럼 특정 목표를 향해 날아올 때는 강력한 권세로 사전에 공간을 압박해서 일시지간 제어할 수 있는 것이다.
곽승의 검이 멈춘 시간은 촌음에 불과했으나, 낙일방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낙일방의 오른손 중지에서 한 줄기 섬광이 번뜩거리며 곽승의 미간을 향해 쏘아져 갔다. 곽승의 검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그 섬광이 곽승의 미간에 거의 도달해 있었다.
곽승은 안색이 굳어진 채 찔러 가던 검으로 사력을 다해 자신의 미간을 가로막았다.
땅!
귀청이 떨어지는 듯한 음향과 함께 그의 검이 그대로 부러져 버렸다.
곽승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주춤거리며 서 있었다. 낙일방의 오른 주먹이 어느새 그의 얼굴에 닿아 있었다. 낙일방은 오른손으로 그의 뺨을 톡톡 건드리며 웃었다.
“물결을 가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빠른 속도로 한 점을 찌르는 것이지. 파형 진공검은 찌르기를 위주로 하는 창법의 고수가 상극일 것이오. 그렇지 않소?”
곽승의 안색이 몇 차례 변했다.
그는 낙일방의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응시하고 있다가 자신의 장검을 내려다보았다. 장검의 끝부분이 부러져 있었고, 장검을 잡은 그의 손은 아귀가 찢어져 피범벅이 된 상태였다.
“방금 전의 수법은 무엇이었나?”
그가 중얼거리듯 묻자 낙일방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옥잠지.”
옥잠지는 위력이 강력한 반면 일직선으로만 발출되는 비교적 단순한 무공이었다. 평상시의 곽승이었다면 아무리 옥잠지가 가공할 위력을 지니고 있다 해도 검을 부러뜨리는 봉변은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 뇌정만균에 검로가 순간적으로 봉쇄당하는 바람에 당황했고, 너무 접근을 허용해 가까운 거리에서 옥잠지가 발출되었기에 낭패를 당하고 만 것이다.
낙일방은 여전히 그의 얼굴에 닿아 있는 오른손을 거두지 않은 채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승부는?”
곽승은 한 차례 눈자위를 실룩거리다가 힘없이 말했다.
“자네가 이겼네.”
그제서야 낙일방은 손을 거두고 물러났다.
“이번 비무는 종남파의 승리요.”
육장청의 선언이 떨어지자 군웅들의 함성 소리가 장내를 뒤흔들었다.
“와아…. 옥면신권이 최고다!”
동중산이 재빨리 낙일방에게 다가와 그의 상세를 살폈다. 그는 낙일방의 상반신이 상처로 뒤덮이다시피 한 것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가 옆구리를 확인하고는 혀를 내둘렀다. 낙일방의 양쪽 옆구리는 피부가 거무스름하게 죽어 있는데다 검기에 베어져 그야말로 심각한 상태였던 것이다. 조금만 더 상처가 깊었다면 내장이 보였을지도 몰랐다.
이런 상태로 곽승을 꺾었으니 동중산의 눈에는 이제까지 어리게만 보였던 낙일방의 모습이 달리 보일 수밖에 없었다.
“정말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낙 사숙.”
동중산이 옆구리에 붕대를 감기 위해 손을 댈 때마다 낙일방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이것만 보아도 그가 지금 얼마나 심한 고통을 참고 있는지를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낙일방은 그런 상태에서도 투지를 잃지 않고 있었다.
“대충 피가 나오지 않게만 해줘요. 이제 곧 마지막 비무를 해야 하니까.”
동중산은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은 무리입니다. 앞으로의 일은 장문인께 맡기고 낙사숙은 쉬셔야 합니다.”
낙일방은 고개를 내저었다.
“이 정도 방파와의 비무에 장문인까지 나서게 할 수는 없어요.”
“낙 사숙의 심정은 저도 잘 알지만, 본 파의 비무행은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합니다. 앞으로를 위해서도 지금은 상처를 치료하고 휴식을 취해야 할 때입니다.”
낙일방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동중산의 말이 맞다는 것은 그도 알고 있었다. 다만 비무의 흥분으로 들끓었던 가슴이 좀처럼 쉽게 가라앉지 않아 격정을 참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는 몇 차례 심호흡을 하고 나서야 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는 붕대로 감겨지다시피 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고는 씁쓸한 웃음을 매달았다.
“강호에는 괴물이 살아서 자칫 방심했다가는 자신의 마음을 송두리째 먹혀버리고 만다고 했는데, 나도 잠시나마 그 괴물을 본 것 같군요. 조금 전에 사실 곽승의 머리를 부수고 싶어서 손가락이 간질거려 애를 먹었어요.”
동중산은 그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기에 부드러운 음성으로 그를 달랬다.
“잘 참으셨습니다.”
낙일방은 동중산의 부축을 받지 않고 제 발로 종남파의 인물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걸어왔다. 뇌일봉이 황급히 그의 상세를 살펴보고는 인상을 있는 대로 찡그렸다.
“몸이 완전히 누더기처럼 변했구나. 이러다 준수한 얼굴이 다 망가지겠다. 비무의 승리도 좋다만 꼭 이렇게까지 싸워야 하는 거냐?”
낙일방은 이마를 동여맨 옷자락을 풀고 새로운 붕대로 이마를 감으면서도 대수롭지 않은 듯 심드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이 정도는 충분히 견딜 만합니다. 초가보와 싸울 때는 정말 죽는 줄 알았습니다.”
“목숨을 건 격투와 비무가 비교가 되겠느냐?”
“어차피 저에겐 같은 것입니다. 비무행에서 패하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나을 테니 말입니다.”
그 진중한 음성에 뇌일봉은 말문을 잇지 못했다. 종남파 고수들이 이번 비무행에 대해 가지고 있는 심정을 나름대로 알고 있다고 생각했으면서도 그들이 느끼고 있는 절실함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음을 깨달은 것이다.
‘이들은 이번 비무행에 목숨을 걸고 있구나.’
그제서야 그는 어째서 진산월이 낙일방의 심각한 부상을 보고도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정도의 부상은 비무행을 시작하기 전부터 이미 각오하고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에게도 패하지 않고 비무행을 계속하는 것이 지금의 종남파 고수들에게는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절대명제인 것이다.
사람들의 우레와 같은 환성이 깊은 상념에 잠겨 있던 뇌일봉을 다시 제정신으로 되돌려놓았다.
“와아! 신검무적이다!”
“드디어 강호제일검의 검법을 볼 수 있게 되었구나!”
뇌일봉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돌아보니 어느새 진산월이 연무장의 중앙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진산월이 중인들의 환호를 받으며 연무장의 중앙에 우뚝 몸을 멈춰 세웠다. 그의 시선이 단상에 앉아 있는 곽존해를 향했다.
진산월이 아무 말 없이 자신을 응시하고만 있자 곽존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마치 어서 나오지 않고 무얼 망설이고 있느냐는 무언의 시위 같았던 것이다.
곽존해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몸을 일으키자 장내의 함성 소리가 더욱 커졌다.
“청의방주와 신검무적의 대결이라… 이거야말로 최근 십년 동안 하남성에서 벌어진 비무 중 최고의 볼거리로구나!”
중인들의 기대에 찬 환호성을 받으며 곽존해는 한 자루의 붉은빛이 감도는 도를 들고 연무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진산월과 그가 삼 장을 격하고 나란히 서자 중인들의 함성 소리가 잦아들었다.
곽존해는 진산월과 시선이 마주치자 묵직한 음성을 내뱉었다.
“이번 비무에서 피를 보게 되어 유감이오.”
진산월은 담담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강호에서 실력을 겨루다보면 그보다 더한 일도 일어날 수 있소.”
곽존해의 얼굴에 야릇한 빛이 떠올랐다. 진산월의 말은 해석하기에 따라서 전혀 다른 뜻으로 들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곽존해는 진산월의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 날카로운 눈으로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으나, 진산월의 표정은 전혀 변함이 없었다.
곽존해는 한 차례 어깨를 으쓱거렸다.
“옳은 말이오. 그러고 보니 다친 사람은 진 장문인의 사제들 뿐 아니라 본 방의 인물들도 있었군. 이번 비무의 승부가 어떻게 난다 해도 본 방으로서는 적지 않은 손실을 입은 셈이오.”
“곽 방주가 나를 이긴다면 오히려 얻는 게 훨씬 더 많을 거요.”
곽존해의 입가에 메마른 미소가 떠올랐다.
“역시 듣던 대로 진 장문인의 입심은 대단하오. 검법도 소문대로이길 바라겠소.”
곽존해는 수중에 들고 있는 도를 천천히 쳐들어 중단을 겨누었다. 붉은빛이 어른거리는 도는 일견하기에도 절세의 보도임을 알 수 있었다. 보도의 이름은 혈룡도로, 곽존해의 부친인 곽단의가 애용하던 칼이기도 했다.
진산월 또한 주저하지 않고 용영검을 뽑아 들었다.
어떠한 검명도 없이 미끄러지듯 뽑혀 나온 용영검에서 우윳빛 검광이 어른거리자 곽존해의 얼굴에도 비로소 긴장 어린 빛이 떠올랐다.
“좋은 검이로군.”
진산월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용영검을 천천히 앞으로 내밀었다.
곽존해는 예전초식이겠거니 하고 있다가 용영검이 멈추지 않고 계속 자신을 향해 다가오자 비로소 그가 이미 손을 쓰기 시작했음을 알아차렸다.
느릿느릿 다가오는 용영검은 검끝마저 흔들거리고 있어 마치 어린아이의 손에 쥐어진 검 같았다. 하나 그것을 본 곽존해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미약하게 흔들리는 용영검의 검끝이 어디로 움직일지 짐작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마침내 진산월의 검이 일 장 거리 안으로 들어오자 곽존해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자신이 먼저 공격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혈룡도가 난폭할 정도로 세차게 휘둘러지며 붉은 도광이 노도처럼 피어올랐다.
그가 사용한 무공은 혈해도법이라는 것으로, 그중에서도 혈천망이라는 초식이었다. 혈해도법은 곽존해가 부친인 곽단의의 노호십이도에 어렵사리 입수한 혈령참혼도를 융합시켜 독자적으로 창안한 절기였다. 빠르고 강맹한 노호십이도에 다양한 변화와 기괴한 살수를 지니고 있는 혈령참혼도가 조화를 이루어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뛰어난 절학이 탄생한 것이다. 이 혈해도법을 익힌 후 곽존해는 비로소 청의방을 하남성 최고의 방파로 만드는 일에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혈천망이 진산월의 전신을 에워싸듯 덮어올 때까지도 진산월은 용영검을 천천히 앞으로 전진시키고 있었다. 막 곽존해가 발출한 도광이 진산월의 몸에 도달하려는 순간, 느릿하게 움직이던 용영검이 세차게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구름같은 검영이 솟구쳐 올랐다.
차차차창!
귀청이 떨어지는 듯한 음향이 거푸 터져 나오며 연무장이 온통 우윳빛 검광과 붉은 도광에 휩싸여 버렸다. 하나 붉은 도광은 이내 우윳빛 검광에 가려 급속도로 사그라들어 버렸다.
곽존해는 얼굴이 시퍼렇게 변한 채 연신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그토록 엄밀하고 광폭하기조차 한 혈천망이 진산월의 검광에 마치 햇살을 받아 녹아 없어지는 찬 서리처럼 너무도 맥없이 허물어져 버린 것이다.
하나 그가 채 신형을 안정시키기도 전에 진산월의 검이 다시 뭉게구름처럼 피어올랐다. 곽존해는 사력을 다해 혈해도법 중의 절초인 혈망개와 혈천심, 혈운파를 거푸 전개해 정면으로 맞서갔다.
눈 깜빡할 사이에 두 사람은 오초를 주고받았다. 다시 그들의 몸이 떨어졌을 때, 곽존해의 얼굴은 그야말로 시체처럼 핼쑥하게 굳어 있었고 가슴팍 부근 옷자락이 너덜너덜하게 잘려져 가슴이 송두리째 드러나 있었다.
곽존해는 말로만 듣던 진산월의 검법이 이토록 무서우리라고는 정녕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십초 가까이 싸우는 동안 곽존해는 단 한 번도 승기를 잡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몰리고 만것이다.
곽존해는 무어라고 입을 열려 했다. 하나 그때 다시 진산월의 용영검이 무시무시한 검기를 일으키며 날아들었다. 그 검기에 담긴 압도적인 기운을 보자 곽존해는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그는 눈을 부릅뜨며 수중의 혈룡도를 부러져라 움켜쥔 채로 미친 듯이 혈해도법을 펼쳤다.
파파파팍!
붉은 도광이 맹렬한 기세로 허공으로 솟구쳤다가 이내 구름 같은 검영에 가려졌다.
“으아아!”
고함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가 터져 나오더니 도광과 검영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중인들은 영문을 몰라 황급히 장내를 주시하다가 이내 탄성을 터뜨렸다.
“아!”
곽존해는 그 자리에서 십여 걸음이나 물러난 채 금시라도 쓰러질 듯 연신 휘청거리고 있었다. 그의 상반신은 옷자락이 대부분이 잘려나가 넝마 조각을 걸친 것 같았다. 그런데도 용케도 그의 전신에는 단 하나의 핏자국도 보이지 않았다.
“으웩!”
시체처럼 푸르뎅뎅한 얼굴로 비틀거리고 있던 곽존해가 한 모금의 시커먼 핏물을 토해냈다. 그제서야 그의 안색이 정상에 가까운 색으로 돌아왔다.
그는 흔들리는 신형을 간신히 고정시킨 후 떨리는 눈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진산월은 어느새 용영검을 거둔 채 산책이라도 나온 사람처럼 담담한 신색으로 우뚝 서 있었다. 칼자국이 나있는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고, 눈빛 또한 무심하여 한 점의 흔들림도 없었다.
하나 그를 쳐다보는 곽존해의 눈에는 경악과 분노, 은은한 두려움의 빛이 복잡하게 뒤엉켜 있었다.
중인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남성 일대를 금시라도 석권할 듯 무서운 기세로 세력을 확장했던 청의방의 방주가 불과 십초 만에 패하고 만 것이다.
그들은 신검무적의 소문을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지만, 실제로 그의 검술을 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서안에서 퍼진 소문이 전 중원을 뒤흔든 지는 몇 달이나 되었으나, 막상 신검무적의 그 가공하다는 검술을 눈으로 직접 목격한 사람의 수는 서안일대를 제외하고는 손가락으로 헤아릴 정도였다.
그래서 신검무적의 실력을 반신반의하는 자들도 적지 않은 형편이었다.
이제 그들은 오늘에야 비로소 신검무적의 검법을 직접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소문이 결코 과장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신검무적의 가공함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장내는 전율과 경악에 휩싸여 한동안 고요한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그러다 누군가의 박수 소리와 함께 우렁찬 함성이 연무장을 뒤흔들었다.
“우와아! 과연 신검무적이다!”
“신검무적 일검운해!”
“신검무적은 강호제일검이다!”
중인들은 박수를 치고 함성을 내지르며 발을 굴렀다. 그들의 열광적인 환호는 강호의 전설을 눈으로 목격했다는 환희와 감격을 웅변적으로 나타내는 것이었다.
곽존해는 그때까지도 넝마 조각 같은 옷을 입은 채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는 아직도 자신이 제대로 힘도 써보지 못하고 불과 십초 만에 진산월의 손에 처참하게 패한 것을 믿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이럴 수가 없는데… 내 혈해도법이 이토록 무력할 수가 없는데….”
진산월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곽존해를 보고 있다가 조용한 음성을 내뱉었다.
“당신의 도법은 나쁘지 않았소.”
곽존해는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어째서…”
“당신은 남과 싸운 지 얼마나 되었소?”
진산월의 돌연한 물음에 곽존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당신의 도법은 빠르고 강력했지만, 그 안에는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빠져 있었소. 그건 바로 상대를 반드시 쓰러뜨리고야 말겠다는 치열한 살기요. 살기 짙은 도법을 만들어놓고는 막상 살기가 빠진 무공을 펼쳤으니 내 손에 십초를 버틴 것도 용하다고 해야 할거요.”
곽존해의 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부르르 떨렸다.
“그건 아마도 당신이 남과 직접 손을 겨루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겠지. 남과 칼을 맞대고 승부를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도법에 꼭 필요한 살기를 일으키지 못했던 거요.”
진산월의 말을 듣고서야 곽존해는 자신의 패인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진산월의 말대로 지난 십여 년간 그는 다른 사람과 칼을 들고 싸워본 적이 없었다. 아니, 싸울 기회가 없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청의방의 세력이 일정 수준을 넘어간 순간부터 감히 그에게 싸우자고 달려드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었으니까.
그는 연공장에서 혈해도법을 만들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무공을 수련했으나, 실전을 겪지 못한 그 무공은 죽은 무공이나 마찬가지였다. 진산월과의 비무는 바로 그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던 것이다.
진산월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서 있는 곽존해를 한동안 응시하더니 천천히 몸을 돌렸다.
“설욕하고 싶다면 언제든지 나를 찾아오시오. 살기가 갖추어진 당신의 도법이 어떤 것인지 나도 보고 싶으니 말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