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1권 철혈행로(鐵血行路)편 : 6화
제 214장 금계탁속
“유운검법의 묘미는 무수히 변하는 검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변화가 끝없이 이어진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서 한번 펼쳐진 초식이 다음 초식과 연계되어 두 개의 초식이 원래 하나의 초식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합쳐진다는 것이지. 이 면면부절함이야말로 유운검법의 가장 큰 장점이다.”
방화는 소지산의 말에 귀를 기울인 채 미동도 않고 있었다.
그가 유운검법에 입문한 지는 열흘 남짓에 불과했다.
유운검법은 종남파의 검법 중에서도 특별한 위치에 있는 무공이었다.
오대 장문인인 풍운무정검 곽일산이 처음 창안한 이후 유운검법은 종남파의 제자들이 가장 사랑하는 검법 중 하나가 되었다. 하나 그 변화무쌍함만큼이나 익히기가 수월치 않아 점차로 익히는 사람이 줄어들다가 종내에는 삼락검보다 낮은 평가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진산월이 삼 년의 폐관을 마치고 돌아온 후 유운검법은 새로운 각광을 받게 되었다. 진산월의 손에 펼쳐진 유운검법은 그야말로 광세의 절학이라 할 수 있었다. 누구도 그의 손에서 구름처럼 펼쳐져 나오는 검법을 제대로 받아내지 못했다. 초가보와 서안의 절정고수들이 유운검법 아래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는 광경을 목격한 종남파 고수들의 가슴에는 유운검법이야말로 종남파 검법의 최고봉이며 반드시 익혀야 할 무공으로 각인되었다.
방화 또한 소지산에게서 유운검법을 처음 배우게 되었을 때에는 너무나 흥분하여 전날 밤을 꼬박 뜬눈으로 지새우고 말았다. 하나 막상 유운검법에 입문하게 되자 그 엄청난 검로의 다양함과 복잡함에 넋이 나가버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그 복잡 무궁한 변화를 익힐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의 능력으로는 절대로 안 될 것이라는 이상한 확신마저 들었다.
그때 소지산은 자신 또한 유운검법을 아직 팔성밖에 익히지 못했음을 말해주었다.
“유운검법은 본 파 무공의 정화일 뿐 아니라 당금 무림에서 가장 다양한 변화를 지닌 검법이다. 이런 무공을 일조일석에 쉽게 익힐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천하에서 가장 어리석은 인물일 것이다. 무릇 본 파의 제자라면 평생을 두고 유운검법을 연마해야 하는 것이다.”
“평생을 말입니까?”
“그렇다. 장문인 또한 본 파를 떠날 때까지도 매일 밤마다 유운검법을 수련하셨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소지산의 말을 듣고서야 방화는 도저히 유운검법을 익힐 수 없다는 절망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소지산은 성격적으로 나약한 구석이 있는 방화에게 무공을 전수해줄 대는 여러모로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칭찬과 격려를 베풀어주어야 했다.
소지산은 언젠가는 방화의 이런 성격을 뜯어 고쳐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결코 서두르거나 성급하게 몰아붙이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유운검법을 익히는 것이야말로 방화의 성격을 고치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복잡한 검로와 그것에서 파생된 다양한 변화에 빠져들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검도의 깊은 경지에 젖어들게 된다. 그리고 그런 세월이 어느 정도 흐르다 보면 유운검법의 특성상 필연적으로 내포되어 있는 날카로운 예기와 질식할 듯한 살기에 자연스레 적응하게 되는 것이다.
요새 소지산이 방화에게 전수하고 있는 것은 유운검법의 첫번째 초식인 유운출곡이었다. 십팔초로 이루어진 유운검법의 가장 근간이 되면서도 유운검법 특유의 복잡한 변화를 어렵지 않게 맛볼 수 있는 중요한 초식이었다.
“유운출곡의 가장 중요한 점은 이 초식이 다른 열일곱 가지의 초식 중 어느 것과 연환해도 잘 어울린다는 것이다.”
소지산은 멋들어진 자세로 유운출곡을 시전해 보였다. 방화는 황홀한 표정으로 허공을 가르며 창공을 유영하는 듯 한 검의 움직임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지산의 유운검법에 대한 경지는 팔성에 불과하다는 자신의 말과 달리 거의 구성에 육박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검은 조금도 어색하거나 막히는 구석이 없어 너무도 유연하게 유운출곡과 이어지는 유운축월의 연환초식을 그리듯 펼쳐내고 있었다.
한데 소지산이 막 유운축월에 이은 탄운적월의 변화를 선보이려 할 때였다. 허공을 가르던 그의 신형이 갑자기 선회하더니 오 장 밖의 나무 위를 향해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앗?”
방화가 놀란 경호성을 터뜨리는 순간, 나무 위에서 굉량한 웃음소리와 함께 하나의 인영이 떨어져 내렸다.
“크하하…. 내 종적을 알아차리다니 제법이구나!”
그 인영은 작달막한 키에 뚱뚱한 체구를 지닌 흑의인이었다. 흑의인은 체구와는 달리 탄력 잇는 동작으로 바닥을 박찬 후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고 있는 소지산을 향해 몸을 날렸다.
“유운검법에 대한 설명은 제법 그럴듯했다만, 어디 말만큼 실력도 좋은가 보자!”
흑의인의 손에서 눈부신 검광 한 가닥이 소지산의 목덜미를 향해 쏘아져 갔다. 그 검광이 어찌나 빠르고 영활했던지 소지산은 상대의 정체를 물을 겨를도 없이 수중의 장검으로 유운검법 중의 추운축전을 펼쳐 검광을 막아 갔다.
막 두사람의 검이 서로 부딪치려는 순간, 흑의인의 검이 옆으로 미끄러지더니 두 가닥의 검화를 일으켰다. 소지산의 검영에서 튀어나온 검광이 검화와 마주치며 불똥이 튀었다.
차창!
원래 추운축전은 검영 속에 진검을 숨기고 있는 초식이었는데, 흑의인이 이를 알고 있기라도 하듯 검을 교묘하게 변화시켜 추운축전의 살수를 봉쇄해버린 것이다.
그것을 시작으로 두 사람은 십여 초간 맹렬한 초식을 주고받았다. 소지산이 유운검법의 초식들을 집중적으로 펼친 반면, 흑의인은 상식을 벗어난 듯 보이는 괴이한 검으로 대응해왔다.
소지산은 흑의인의 검법이 보기에는 무질서하고 두서없는 것 같아도 사실은 무척이나 정교하게 짜여진 상승의 검학임을 깨닫고 육성에 머물렀던 공력을 팔성까지 끌어올렸다.
그러자 그의 검법이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맹렬한 기세를 일으켰다.
“이크! 이제 진짜 실력을 선보일 모양이구나! 하지만 유운검법만으로는 내 검을 당해낼 수 없을 것이다.”
흑의인은 유운검법의 초식들을 훤히 꿰뚫고 있는지 소지산의 검이 변화를 일으킬 때마다 교묘하게 진로를 막거나 공간을 선점했다. 그 바람에 소지산의 유운검법은 빈번이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허공을 가르고 말았다.
소지산의 침착하게 가라앉아 있던 눈에서 한 줄기 기광이 번쩍였다. 다음 순간, 그의 신형이 미칠 듯 선회하며 줄기줄기 검광을 뿌려댔다. 그 검광은 작은 소용돌이를 이루며 흑의인의 전신을 감싸기 시작했다.
흑의인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멋진 승룡와운이로구나. 하지만 이 초식의 약점은 소용돌이의 한가운데가 비어 있다는 것이지.”
흑의인은 수중의 장검으로 소용돌이를 이루는 검광의 한복판을 찔러들어 갔다. 그런데 의당 비어 있을 줄 알았던 검광 속에서 돌연 세 줄기의 검광이 폭사해 나오는 것이 아닌가?
“앗?”
흑의인은 다급한 경호성을 내지르며 황급히 몸을 비틀었다.
팟!
검은 옷자락 한 가닥이 잘려져 허공에 나풀거렸다. 흑의인은 삼 장 밖에 내려선 채 식은땀을 흘리더니 버럭 노성을 질렀다.
“이건 무슨 초식이냐?”
흑의인의 왼쪽 소맷자락이 잘려져 팔뚝까지 훤하게 드러나보였다. 흑의인은 잘려진 소맷자락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성난 눈으로 소지산을 노려보고 있었다.
의외인 것은 소지산의 반응이었다. 제자에게 무공을 가르쳐 주는 연무장에 외인이 침입하여 소리를 지르는데도 화를 내기는 커녕 오히려 검을 거두고 그를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하는 것이었다.
“종남파의 이십일대 제자 소지산이 사숙을 뵙니다.”
흑의인의 표정이 이상야릇하게 변했다.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
“사숙조님께 들었습니다. 하동원 사숙이 아니십니까?”
흑의인은 한 차례 몸을 움찔거렸다가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사부님이 벌써 내 이야기를 했단 말이냐? 그런데 사부님의 제자는 두 사람인데 내가 하동원인 줄은 어떻게 알았느냐?”
소지산은 공손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사숙조께서는 대제자인 성락중 사숙께서는 키가 훤칠하고 침착한 성격이고, 반면에 이제자인 하동원 사숙께서는 단신에 활달한 성품을 지니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흑의인의 얼굴이 구겨졌다.
“사부님 성격에 행여나 그렇게 말씀하셨겠다. 필시 대제자는 앙상하게 마르고 키만 껑충하게 큰데다 쓸데없이 무게만 잡는 놈이라고 하셨을 테고, 나는 불어터진 찐빵 같은 몸에 경솔하기 짝이 없는 한심스러운 놈이라고 하셨겠지. 내 말이 틀리느냐?”
소지산의 얼굴에 한 줄기 난처한 표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저로서는 무어라고 말씀드릴 수 없군요.”
흑의인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흐흐… 이놈, 보기보다 순진한 구석이 있구나. 너무 불편해할 필요 없다. 사부님 말씀이 아주 틀린 것도 아니니 말이다. 그나저나….”
흑의인은 돌연 정색을 하고 날카로운 눈으로 소지산을 응시했다.
“조금 전에 네가 펼친 초식이 무엇이냐? 정녕 승룡와운이더냐?”
“그렇습니다.”
“승룡와운에 무슨 그런 해괴망칙한 변화가 숨어 있단 말이냐? 내가 아홉 살 때부터 유운검법을 익혀서 눈을 감고도 모든 초식을 훤히 그려낼 수 있는데, 그런 변화가 있다는 것은 금시초문이다.”
소지산은 침착한 음성으로 말했다.
“장문인께서 유운검법의 창시자인 곽일산 조사의 비전을 연구하여 새롭게 구성한 초식입니다.”
흑의인은 가뜩이나 동그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오, 신검무적인가 하는 녀석이 새로 구성한 초식이라고?”
“그렇습니다. 당초에 있던 허점을 보완하고 상대가 예상치 못한 변화를 일으키는 데 주안점을 두셨다고 하셨습니다.”
흑의인은 통통한 손가락으로 자신의 아래턱을 긁으며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더니 문든 소지산의 전신을 쓰윽 훑어보았다.
“신검무적이 그렇게 대단한 놈이란 말이지? 네 솜씨를 보니 이미 검법이 절정에 이르러 있는데, 신검무적에 비하면 어느 정도냐?”
참으로 곤란한 질문이 아닐 수 없었다. 하나 소지산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저 같은게 어찌 장문인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너의 겸손함을 몰라줄까봐 그러느냐? 너를 통해서 본 파를 이끌고 있는 장문인의 실력을 간접적으로나마 알고 싶어서 그런다. 솔직하게 말해보거라.”
소지산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진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두 사람이 똑같이 전력을 기울인다면 저로서는 장문인의 십초를 감당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 말에 흑의인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가 조금 전에 겪어 본 바로는 소지산의 무공은 절대로 그의 아래가 아니었다. 그런 실력으로도 십초를 버티지 못한다니 대체 신검무적의 실력은 얼마나 가공스러운 것이란 말인가?
흑의인은 평생 동안 종남파의 무공을 익혀왔기 때문에 종남파의 무공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종남파의 무공은 비록 정심하고 현묘했으나, 많은 절학이 유실되어 현재 남아 있는 무공만으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어느 수준 이상의 고수는 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종남파의 무공으로 그런 엄청난 고수가 배출되었다니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흑의인은 전풍개의 제자인 하동원이란 인물이었다. 원래 전풍개는 하동원 외에도 성락중이라는 제자가 있었다. 기산취악 후에 종남파를 떠날 때 전풍개는 가족들 외에도 두 명의 제자를 데리고 해남도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수십 년의 세월을 보낸 후 종남파가 멸문했다는 소식에 격분한 전풍개가 손자인 전흠만을 데리고 길을 떠난 것은 주지의 사실이었다. 그때 공교롭게도 하동원과 성락중은 다른 곳에 일이 있어 자리를 비운 상태였었다. 그들이 나중에 거처로 돌아와서 전풍개가 종남파로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한참이나 시간이 흐른 뒤의 일이었다. 두 사람은 부랴부랴 전풍개의 뒤를 따라나섰는데, 어찌된 일인지 하동원 혼자만 종남파의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소지산은 한쪽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는 방화를 불러 하동원에게 인사하게 했다.
“종남파의 이십이대 제자인 방화가 사숙조님을 뵈옵니다.”
방화가 공손하게 인사를 하는 모습을 하동원이 흐뭇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이놈! 어디 가서 무슨 짓을 하고 있었기에 이제야 나타난단 말이냐?”
불같은 노호성과 함께 무서운 경력이 하동원의 등을 후려쳐왔다. 하동원은 그 음성만 들어도 누가 왔는지 알아차리고 그 자리에 넙죽 엎드렸다.
“아이고, 사부님! 이 못난 제자가 이제야 겨우 찾아왔습니다. 그동안 별래무양하셨는지요.”
그가 몸을 엎드린 시기가 무척이나 교묘해서 등 뒤에서 날아든 경력이 아슬아슬하게 그의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가버렸다.
그와 함께 싸늘한 표정을 지은 전풍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동원은 그를 향해 더 이상 정중할 수 없는 모습으로 절을 올렸다.
하나 그를 보는 전풍개의 시선은 결코 곱지 않았다.
“사부가 없어졌으면 냉큼 찾아올 일이지 무얼 하다 삼 개월이나 늦게 기어온 것이냐?”
절을 마친 하동원은 전풍개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원래 저희 두 사람은 사부님께서 종남파로 떠나셨다는 걸 알자마자 그날 밤으로 행장을 꾸려 길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워낙 오랜만에 중원을 오는지라 길을 제대로 찾지 못해서 이리저리 헤매다보니…”
“그게 아니라 모처럼 중원에 오니 구경하고 싶은 게 많아서 이리저리 쏘다니다보니 늦은 거겠지.”
하동원은 배시시 웃어 보였다.
“헤헤… 구경도 조금 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정말 섬서성까지 오는 길을 잘 알지 못해서…”
전풍개는 싸늘한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늙은 사부는 이곳에서 생사가 오가는 격전을 치르고 있는데, 새파랗게 젊은 제자놈들은 중원을 유람하고 다녔다는 말이지?”
하동원은 뒤통수를 긁적이며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사부님, 정말 저희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이곳으로 달려 왔습니다. 해남에서 여기까지가 가까운 거리가 아니지 않습니까? 저희가 사부님의 위중을 알았다면 어찌 한치라도 눈을 팔 수 있겠습니까? 넓은 마음으로 헤아려주십시오.”
전풍개는 여전히 분기가 가라앉지 않는 모습이었다. 하동원은 슬쩍 한쪽에 서 있는 방화를 돌아보았다.
“더구나 이곳에는 처음 만나는 사손도 있는데 이만 화를 푸시는 게 어떨지….”
전풍개는 그제서야 방화를 발견하고는 굳었던 표정을 조금 누그러뜨렸다. 문파의 법도를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그로서는 아무리 제자가 괘씸하다고 해도 나이 어린 사손 앞에서 그를 무한정 꾸짖을 수만은 없었다. 제자의 체면이 곧 자신의 체면이 아니겠는가?
하동원은 전풍개의 분노가 조금씩 숙여지는 것을 재빨리 알아차리고는 예의 활기찬 표정으로 넉살좋게 웃었다.
“헤헤.. 그나저나 소문으로 듣던 것과는 달리 본 파 고수들의 무공이 상당합니다. 소 사질의 실력을 알아보려고 덤벼 들었다가 하마터면 호된 꼴을 당할 뻔했습니다.”
전풍개는 다시 그를 꼬나보았으나, 조금 전보다는 많이 가라앉은 모습이었다.
“지산은 너희 밥버러지들과는 달리 지금도 하루에 대부분을 무공을 연마하는 데 보내고 있다. 그러니 어찌 실력이 늘지 않을 수 있겠느냐?”
“과연 그렇군요. 정말 나이답지 않게 노련하고 능숙한 솜씨였습니다.”
“그나저나 네 사형은 어디로 가고 너 혼자 이곳에 온 것이냐?”
하동원의 얼굴에 다시 난처한 기색이 떠올랐다.
“저… 그게 말입니다, 사부님.”
전풍개의 눈이 다시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이실직고하지 못할까?”
전풍개가 버럭 노성을 지르자 하동원은 찔끔하여 황급히 입을 열었다.
“원래 우리는 하남성까지는 함께 왔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마침 그때 그곳에서….”
이곳은 한 채의 호화로운 장원이었다.
장원의 크기는 여타 장원의 몇 배나 될 정도로 넓었고, 담장 또한 끝을 볼 수 없을 정도로 길었다. 사람의 키보다 훨씬 높은 담장 때문에 가까이에서는 안이 전혀 보이지 않았고, 상당히 떨어진 거리에서만 붉은색으로 단장한 전각의 지붕들이 살짝살짝 보일 뿐이었다.
장원의 입구는 사두마차가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널찍한 대문이 있었고, 대문의 옆에는 사람 한두 명이 통과할 만한 넓이의 쪽문이 나 있었다.
대문 앞에는 네 명의 장한들이 나란히 선 채 장원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을 통제하고 있었다. 그들의 두 눈에서는 연신 정광이 이글거렸고 양쪽 태양혈이 불룩 솟아올라 있어 내외공을 상당히 경지까지 쌓은 고수들임이 분명해 보였다. 이 정도 수준의 고수들이 정문을 지키는 문지기의 역할을 하고 있으니 이 장원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여실히 알 수 있었다.
한낮의 햇살이 중천을 향해 기를 쓰고 기어오를 무렵, 장원의 정문 앞으로 한 명의 여인이 다가왔다. 정문을 지키고 있던 네 명의 무사들은 그 여인을 보자 정신이 번쩍 나는지 표정들이 일변했다.
그들의 앞으로 다가오고 있는 여인은 굴곡이 완연한 몸매에 보기 드문 미모를 지닌 미녀였던 것이다. 이십대를 갓 넘어 보이는 미녀의 두 눈에는 생동감이 가득했고, 걷고 있는 모습 또한 탄력이 넘쳐서 보기만 해도 사람의 마음을 흥겹게 만들고 있었다.
네 명의 무사들은 정문을 지키느라 조금 지루했던 참이어서 뜻하지 않은 미녀의 접근에 크게 흥미가 동하는 표정들이었다.
여인은 정문의 앞까지 다가오더니 옥구슬이 구르는 듯한 음성으로 물었다.
“여기가 손노태야의 손가장인가요?”
그녀의 음성은 얼굴만큼이나 매혹적인 것이었다.
네 명의 장한들 중 가장 체격이 건장하고 이목구비가 반듯한 삼십대 초반의 장한이 그녀의 말을 받았다.
“그렇소. 소저는 무슨 일로 본 장을 찾아오셨소?”
“만날 사람이 있어서 왔어요.”
“본 장에 말이오? 그가 누구요?”
“응계성이라고 해요.”
네 사람의 표정이 모두 굳어졌다. 특히 말을 꺼냈던 삼십대 장한은 보기에 험악함을 느낄 정도로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그자는 무슨 일로 만나려는 거요?”
여인은 네 사람의 반응에서 그들과 응계성의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음을 알았으나 크게 신경쓰지 않고 말했다.
“개인적인 일이므로 굳이 당신들에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되는군요.”
삼십대 장한의 입에서 거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흐… 그자만큼이나 건방진 소저로군. 용건을 알려주기 전에는 그자를 만날 수 없소.”
여인의 눈꼬리가 살짝 꿈틀거렸으나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음성은 여전히 달콤하고 부드러웠다.
“당신들은 당신들이 해야 할 도리를 하면 되는 거에요.”
“우리가 해야 할 도리라니?”
“손님이 찾아왔으니 안으로 들어가서 알리는 게 도리 아니겠어요?”
삼십대 장한의 얼굴에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소저가 본 장의 손님이란 말이오?”
“응계성은 귀 장에 몸을 담고 있으니 그를 찾아온 나는 당연히 귀 장의 손님이지요. 내 말이 잘못되었나요?”
그녀의 말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정확해서 꼬투리를 잡을 건덕지도 없었다. 하나 삼십대 장한은 반드시 트집을 잡아야 직성이 풀리는지 퉁명스런 음성을 내뱉었다.
“병기를 가지고는 본 장을 들어갈 수 없으니 소지하고 있는 병장기를 모두 꺼내시오. 뒤져보면 나올 테니 숨겨도 소용없을 거요.”
여인의 고운 아미가 처음으로 살짝 찌푸려졌다.
“손가장에 들어가는데 몸수색을 한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군요.”
“방문자가 누구인지에 따라 그냥 통과시킬 수도 있고, 몸수색을 할 수도 있소. 그건 어디까지나 우리의 권한이오.”
장한은 그녀의 전신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음충맞게 웃었다.
“흐흐… 소저의 몸은 유달리 수색할 곳이 많아 보이는군.”
그 말에 다른 세 명의 장한들도 모두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헤헤… 이번 몸수색은 내가 해야겠으니 자네들이 양보하게.”
“무슨 소리인가? 나이를 먹어도 내가 더 먹었고, 이 일을 한 것도 내가 더 오래되었으니 당연히 내가 해야 하네.”
“안 돼! 저 여자는 내 거야. 내 손으로 구석구석 확실히 뒤져보도록 하겠네.”
그들이 서로 옥신각신하는 모습을 여인은 냉정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들의 모습만 보아도 응 사형이 손가장에서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 짐작이 가는구나. 대체 장문사형이 왜 응사형을 이런 곳으로 보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구나.’
네 명의 장한이 조금만 머리를 굴렸다면 응계성을 만나러 온 여자가 평범한 여염집 아녀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응계성의 출신이 어느 문파인지를 알았다면 그녀의 정체 또한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요사이 욱일승천의 기세로 서안 일대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종남파의 여고수를 상대로 희롱에 가까운 행태를 보이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나 그들은 그러지 못했고, 그에 따른 합당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파파팍!
눈앞에서 무언가 그림자가 어른거린다고 느낀 순간, 세 명의 장한은 각기 입을 감싸 안으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억!”
“어이구!”
여인이 거의 보이지도 않는 동작으로 세 사람의 입을 가격한 것이다. 아무리 그들이 방심하고 있었다고 해도 단 일수에 세 사람을 동시에 공격한 그녀의 솜씨는 그야말로 대단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다름 아닌 응계성의 사매인 방취아였다. 그리고 서안 사람들에게는 종남파 제일의 여고수인 무영낭랑으로 더욱 널리 알려져 있었다.
제일 처음 말을 꺼냈던 삼십대 장한은 자신의 동료들이 단숨에 쓰러져 버리자 놀란 경호성을 토해냈다.
“앗? 이년이 감히…”
그것으로 그의 운명도 결정되었다.
방취아의 어깨가 한 차례 흔들린다 싶은 순간, 장한은 복부를 작살에 관통당하는 듯한 통증을 느끼고 허리를 절반으로 꺾었다.
“크헉!”
그의 몸이 앞으로 숙여질 때 하나의 고운 손이 그의 입을 살짝 두드렸다. 마치 애무를 하는 듯한 부드러운 동작이었으나 그 결과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뿌드득!
장한의 앞 이빨이 송두리째 부러져버린 것이다.
“어어어….”
장한은 이빨이 부러진 충격과 배가 구멍 뚫린 듯한 통증 때문에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방취아는 장한의 이빨을 박살낸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장문사형이 알려준 약류장은 사용하기 편해서 좋기는 한데, 힘 조절을 하기가 힘들단 말이야. 언제쯤 장문사형처럼 능숙하게 펼칠 수 있을까?”
그녀는 바닥을 나뒹굴고 있는 네 명의 장한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비어 있는 대문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데 그녀가 막 손가장의 장원 안으로 한 걸음을 내디디려 할 때였다.
“소저는 누구요? 본 장과 무슨 원한이 있기에 백주 대낮에 이런 일을 벌인단 말이오?”
싸늘한 외치과 함께 하나의 인영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나타난 인물은 청의를 입고 건장한 체격을 지닌 삼십대 초반의 인물이었다.
청의인은 날카로운 눈으로 바닥에 스러져 있는 네 명의 장한들을 훑어보고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세 명의 장한은 단순히 따귀를 조금 세게 맞은 정도에 불과해서 금세 몸을 추스르고 일어났으나 장한 하나는 아직도 굼벵이처럼 몸을 구부린 채 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장한의 입에서 부러진 이빨과 시뻘건 피에 섞여 꾸역꾸역 흘러나오는 모습이 처참해 보일 정도였다.
‘이놈들의 실력이 비록 일류는 아닐지라도 어지간한 고수는 충분히 제지할 수 있는데 이 여자가 누구이길래 이런 꼴을 당한단 말인가?’
청의인의 시선이 재빨리 방취아를 훑고 지나갔다.
청의인은 손가장을 지키는 호위무사들의 우두머리로, 신풍검 표일립이라는 인물이었다. 쾌검의 달인으로, 인물됨이 진중하고 신의가 있어서 서안 일대에서는 상당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그는 요사이 손노태야를 노리는 암습이 몇 차례나 있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신경이 잔뜩 곤두서 있는 상태였다. 그의 성격이 침착하고 냉정하지 않았다면 부하들이 쓰러져 있는 모습만 보고도 그녀에게 손을 썼을지도 몰랐다.
방취아는 표일립이 쉽게 경동하지 않고 침착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붉은 입술을 살짝 열었다.
“나는 응계성의 사매인 방취아라고 해요.”
표일립의 얼굴에 흠칫하는 빛이 떠올랐다.
“이제 보니 종남파의 무영낭랑 방 여협이셨구려. 본 장에는 무슨 일로 오신 거요?”
“그야 당연히 응 사형을 만나러 왔지요. 그런데 저자들이 나를 들여보내기는커녕 오히려 몸을 수색해야 한다며 희롱하더군요.”
표일립은 그녀의 말을 듣고는 이내 사정을 짐작했다.
‘이놈들이 며칠 전에 소벽력에게 호된 꼴을 당하고는 애꿎은 여자에게 화풀이를 하려 했구나.’
그는 노한 시선으로 한쪽에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세 명의 장한들을 쏘아보았다. 그들은 표일립과 시선이 마주치자 찔끔하여 고개를 떨구었다.
‘본 장의 정문을 지키는 것은 본 장의 얼굴을 대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매사에 신중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예의를 잃지 말라고 누누이 말했거늘….’
표일립은 그들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으나 일단 사태를 수습하는 게 먼저였다.
그는 방취아를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이들에게는 본 장의 규율에 따른 처벌을 내리도록 하겠소. 본 장을 대신해 이들의 잘못을 사과하겠으니 방 여협께서는 화를 풀기 바라오.”
“화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요. 그저 어이가 없었을 뿐이니까.”
표일립의 시선이 아직도 바닥에 쓰러져 있는 장한에게로 향했다.
“그런데 한 사람에게는 유독 심하게 손을 쓰신 듯하구려. 이들이 비록 방 여협을 몰라보고 실수를 했다고 해도 평생 밥을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신세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너무 과한 처사가 아닌가 하오.”
방취아도 내심 자신의 손속이 조금 지나쳤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인지라 상대가 예의를 차리면서도 그 점을 예리하게 지적하자 순순히 자신의 실수를 시인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미안하게 생각해요. 그가 욕을 하기에 무심결에 지나친 힘이 들어가고 말았어요.”
표일립은 그녀가 선뜻 사과를 하자 그녀의 솔직함에 내심 호감이 생겼다.
강호에서 명성이 자자한 고수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경우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법이었다. 특히 여고수일수록 그런 경향이 더욱 심했다. 그런데 요즘 최고의 성가를 드높이고 있는 종남파에서도 첫손가락으로 꼽히는 여고수인 무영낭랑은 여타의 여고수들과는 달라 보였다.
표일립은 새삼스런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이들이 방 여협을 몰라보고 실수를 한 죄가 있으니 이쯤에서 일을 마무리하는 게 좋을 듯하오. 방 여협의 생각은 어떠시오?”
방취아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내 생각도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당신은 여자의 이름은 물어보면서 자기가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는군요.”
방취아의 반쯤 농담 섞인 말에 표일립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인사가 늦었소. 나는 본 장의 경비를 책임지고 있는 표일립이라 하오.”
“당신이 바로 신풍검이군요. 응 사형에게서 당신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표일립의 눈이 번쩍 빛났다.
“응 소협이 나에 대해 무어라고 했소?”
방취아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성격이 너무 고지식해서 융통성이 부족하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했어요.”
표일립은 어색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응 소협이 나를 그렇게 보아주었다니 예상치 못한 일이오.”
“이제 응 사형을 만나러 들어가도 괜찮은가요?”
표일립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내가 응 소협의 거처까지 안내해드리겠소.”
“부탁드리겠어요.”
표일립은 부상이 심한 장한을 약방으로 데려가게 한 후 정문을 지키는 인원을 전원 다른 사람들로 교체했다. 그리고는 방취아를 안내하여 손가장 안으로 들어갔다.
손가장은 겉으로 보던 것과는 달리 화려함보다는 차분함이 돋보이는 장원이었다. 건물들도 하나같이 고풍스러웠고, 사치스런 가구나 번쩍이는 금빛 장식 같은 건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대신 구석구석에 크고 작은 화원들이 잘 꾸며져 있었고, 손님들이 머무르는 전각이 도처에 늘어서 있었다. 그 전각들마다 손님들로 가득 차 있었다.
어찌 보면 손가장 자체의 인원보다는 손가장에 머무르는 손님들의 수가 더 많아 보이기도 했다. 전국시대의 사공자 중 맹상군이 인재들을 모으는 것을 좋아해서 수천 명의 식객들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했는데, 손가장의 식객 또한 그 정도는 아니어도 수백 명은 족히 되는 것 같았다.
바로 이 식객들과 수십 년의 경험으로 쌓은 탄탄한 인맥과 신용이 손노태야를 서안 뿐 아니라 섬서성 제일의 거부로 만든 원동력이었다.
표일립 또한 원래는 손가장의 식객으로 머물러 있다가 손노태야의 눈에 띄어 경비책임자로 발탁된 인물이었다. 표일립은 방취아를 안내하면서 특히 식객들이 머물러 있는 건물들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해주었다.
“손가장의 식객들은 대부분이 스물네 개의 건물에서 기거하고 있소. 그들이 있는 곳을 이십사숙이라고 하는데, 저 건물이 그중에서도 가장 큰 청명숙이오. 저곳에는 거의 오십 명에 가까운 식객들이 머물러 있소.”
“건물의 이름들을 절기에서 따온 모양이군요.”
“방 여협의 지혜가 대단하구려. 옳게 보았소.”
“이십사라는 숫자와 청명이라는 이름을 연상시켜 보니 자연적으로 떠오르는군요. 이십사숙에 있는 식객들의 수는 모두 얼마나 되지요?”
“정확한 숫자는 나도 모르오. 식객들 중에는 수십 년을 머물러 있는 자들도 있지만 수시로 들락거리는 자들도 적지 않은 편이라 인원은 계속 변동이 있소. 대략적으로는 적게 잡아도 오백 명이 넘지 않을까 생각되는구려.”
방취아는 나직하게 감탄을 했다.
“정말 대단한 숫자로군요. 그들을 먹이고 재우는 일도 만만치 않겠어요.”
표일립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을 수발하는 하인과 시비들의 수만 해도 백 명이 넘는다고 알고 있소. 하루 식비만 해도 어지간한 문파의 한 달 수입은 될 거요. 하지만 결국은 그 모두가 본 장의 힘이 아니겠소?”
방취아는 수긍을 했다.
“그렇지요. 관리만 제대로 할 수 있다면 언제든 손을 빌릴 수 있는 오백 명의 고수들을 보유하고 있는 셈이니 말이에요.”
“그들 중에는 무공의 고수들도 적지 않지만, 의외로 무림인이 아닌 자들도 상당수 있소. 어느 한 가지라도 재주만 있고 본 장의 규율을 지키기로 약속만 한다면 자신이 원할 때까지 식객으로 머무를 수 있소.”
“규율이란게 어떤 거지요?”
“모두 세 가지요. 본 장을 적대시하지 않으며, 본 장 내에서 살인을 하지 않고,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은 손노태야와 식사를 하는 것이오.”
방취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첫째와 둘째 규율은 이해가 되는데 셋째 규율은 조금 이상하군요.”
“특별한 의미는 없소. 단지 손노태야는 자신의 집에서 자고 자신의 돈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라면 일 년에 한 번쯤은 주인된 도리로 얼굴을 보고 서로 아는 척이라도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소.”
방취아는 배시시 웃었다.
“손노태야의 용인술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알겠군요. 그럼 정말 그 세가지만 약속하면 손가장 내에서 마음껏 활보해도 상관이 없단 말인가요?”
표일립은 멀리 보이는 작은 가산과 그 앞에 있는 수정처럼 맑고 깨끗한 호수를 가리켰다.
“저 산은 보정산이라고 하고 그 앞의 호수는 보정호라고 하는데, 저 두 곳만이 유일하게 외인들이 출입할 수 없는 금지요. 그러니 차후라도 저곳으로 가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기 바라오.”
“보석이 머무르는 산이라… 무척 의미심장한 이름이군요.”
“그래서 간혹 호기심이 많은 자들이 식객을 가장하고 들어와서 보정산에 침입한 적이 있었소.”
“그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표일립의 표정이 처음으로 무겁게 굳어졌다.
“그들 중 누구도 살아서 나오지 못했소.”
“경비가 철저한 모양이군요.”
“어떤 사람들은 손노태야의 거처보다 오히려 보정산의 경계가 더욱 철저할 거라고 말하기도 하오. 그곳은 경비를 전담하는 조직이 따로 있고, 수많은 기관장치가 설치되어 있어 아무리 뛰어난 무공의 소유자라도 손노태야의 허락을 받기 전에는 침입을 할 수 없다고 알고 있소.”
방취아는 상계의 거두인 손노태야가 그토록 꽁꽁 감춰둔 보정산의 비밀이 무엇일까 잠시 생각하다가 이내 도리질을 했다.
‘내가 그곳에 갈 일은 없을 텐데 신경 쓸 게 뭐람.’
대화를 나누는 도중 그들은 붉은색 기와를 씌운 아담한 건물 앞에 도착했다.
“이곳에 응 소협의 거처요.”
방취아는 건물이 그리 크지 않았으나 대신에 깨끗하고 단정할뿐더러 주변의 경치 또한 좋은 것을 보고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응 사형이 손노태야의 보표로 들어온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데 벌써 개인 숙소를 얻은 것을 보니 대우가 그리 나쁘지 않은 모양이군요.”
표일립은 정색을 했다.
“응 소협은 짧은 시간에 손노태야의 목숨을 두 번이나 구해서 손노태야의 상당한 신임을 받고 있소. 그래서 본 장에서는 은근히 응 소협을 경계하는 자들이 적지 않소. 정문의 경비들이 방 여협에게 무례했던 것도 밑바탕에 응 소협에 대한 시기심이 깔려 있기 때문이오.”
“그랬군요. 응 사형은 책임감이 강하고 끈기가 있지만 무뚝뚝하고 거친 성격이어서 보표 일을 잘할 수 있을지 은근히 걱정이 되었는데 정말 다행이군요.”
“조만간 응 소협의 상세가 모두 낫는다면 손노태야께서 중용하실 게 분명하니 방 여협은 걱정하실 필요 없소.”
표일립이 무심코 내뱉은 말에 방취아가 깜짝 놀랐다.
“상세가 낫다니… 응 사형이 어디 다치기라도 했단 말인가요?”
표일립은 자신이 괜한 말을 꺼낸 게 아닌가 싶어 표정이 굳어졌다.
“한 달 전쯤에 손노태야의 대한 암습이 있었소. 그때 응 소협은 손노태야 대신 가슴에 일검을 맞고 지금 요양 중이오. 나는 방 여협께서 그 대문에 응 소협을 병문안 온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구려.”
방취아의 짙은 속눈썹이 부르르 떨렸다.
“나는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별다른 소식이 없기에 그냥 잘 지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다행히 위급한 순간은 넘어가고 회복이 빨라서 얼마 전부터는 혼자 힘으로 산책도 할 수 있을 정도로 나아졌소.”
이 말을 하던 표일립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근 한 달만에 자리에서 일어나 산책을 나왔던 응계성이 경비무사들과 시비가 붙어 상처가 낫지도 않은 몸으로 그들을 모두 때려눕힌 일이 떠올랐던 것이다. 당시에 그와 시비가 붙었던 경비들이 바로 오늘 방취아에게 혼쭐이 난 자들이었다.
응계성의 숙소는 침실과 손님을 맞을 객청, 그리고 아담한 정원으로 이루어져 있어 혼자 지내기에는 충분히 만족할만한 곳이었다. 정원의 한쪽에는 연무를 할 수 있는 공간마저 있어 무인의 숙소로는 더 바랄 것이 없어 보였다.
안으로 들어서자 은은한 약향이 흘러나왔다.
그 냄새를 맡은 방취아의 안색은 더욱 딱딱하게 굳어져서 표일립이 말을 건네지도 못할 정도였다. 표일립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녀보다 먼저 안으로 들어와서 방문을 두드리는 것 뿐이었다.
똑똑….
“누구요?”
“표일립이오.”
“들어오시오.”
응계성의 목소리를 듣자 방취아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그리 크지 않은 음성이었으나 응계성 특유의 날카로운 기운이 담겨 있어 안심이 되는 모양이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제법 커다란 침상이 눈에 들어왔다. 응계성은 웃통을 벗은 채 침상 위에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자세를 보아하니 연공을 하고 있던 게 분명했다.
그의 가슴에는 아직도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으나, 안색은 걱정했던 것보다는 훨씬 더 좋아 보였다.
응계성은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가 표일립 뒤에 서 있는 방취아를 보고는 눈을 살짝 치켜떴다.
“네가 무슨 일이냐?”
모처럼 만나는 사매에게 대하는 태도로는 지나치게 차가운 것이었다. 하나 방취아는 응계성의 성격을 잘 알고 있기에 조금도 서운하지 않았다. 오히려 심각한 부상을 입고도 예전의 모습을 전혀 잃지 않은 그가 반갑기조차 했다.
방취아의 시선이 힐끗 표일립에게로 향했다. 표일립은 그녀의 속뜻을 알아차리고는 이내 몸을 돌렸다.
“그럼 두 분이 말씀을 나누시오.”
표일립이 문을 닫고 사라지자 방취아는 침상 가까이에 있는 의자로 가서 앉았다. 그리고는 유심한 시선으로 응계성의 가슴을 살펴보는 것이었다.
비록 붕대가 감겨 있다고는 해도 벌거벗은 남자의 상반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은 어지간히 낯이 두꺼운 여인이 아니라면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방취아는 한동안 그의 상세를 살피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사형은 정말 운이 좋았군요. 검이 한 치만 옆을 찔렀어도 심장이 관통당해 즉사했을 거에요.”
응계성은 퉁명스런 음성을 내뱉었다.
“의원들도 그런 말을 하더군. 그게 뭐 어때서? 어쨌든 나는 살았고, 암습을 한 놈은 죽었다. 그러면 된 거 아니냐?”
방취아의 얼굴에 씁쓸한 표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응 사형은 자신의 몸을 소중히 다룰 필요가 있어요. 응 사형의 뒤에는 늘 응 사형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다는걸 잊지 마세요.”
응계성의 입꼬리가 씰룩 거렸으나 결국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방취아는 한숨을 내쉬더니 품속에서 얇은 책 한 권을 꺼내어 응계성에게 내밀었다.
“받으세요.”
“이게 뭐냐?”
“한번 살펴보세요.”
응계성이 책을 들고 몇 장 뒤적거리더니 갑자기 눈을 번뜩이며 방취아를 쳐다보았다.
“보법을 적어놓은 것이로구나. 네가 만든 것이냐?”
“그래요. 응 사형의 다리가 불편해서 몸을 움직이는 데 제약이 많은 것을 알고는 장문사형이 부탁을 했어요. 두 달 가까이 끙끙거렸는데, 얼마 전에 그런대로 쓸 만한 게 만들어져서 응 사형에게 주려고 가져온 거에요.”
“장문사형이 괜한 짓을 했군. 난 이런게 없어도 충분하니 도로 가져가거라.”
응계성이 책을 내밀었으나 방취아는 받지 않고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시선이 너무 따가워서 응계성은 눈을 부라리며 그녀를 쏘아보았다.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냐?”
방취아는 한참 동안이나 의미를 알 수 없는 눈으로 응계성을 응시하더니 돌연 그의 손을 꼬옥 잡았다.
“응 사형, 응 사형은 본 파의 제자지요?”
응계성은 그녀의 돌연한 행동에 놀라 붙잡힌 손을 잡아 뺄 생각도 못하고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쓸데없는 질문을 하는구나.”
“응 사형이 아직도 본 파의 제자라면, 그리고 나를 사매로 생각한다면 이걸 받으세요. 이 무공을 익혀서 사형이 건재하다는 걸 사람들에게 보여주세요.”
그녀의 음성에는 간절한 빛이 담겨 있었다.
응계성은 한동안 눈자위를 씰룩거리더니 그녀의 손에 붙잡힌 자신의 손을 잡아 뺐다.
“너는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더 뻔뻔해지는구나. 아무리 사형이라고 해도 남자의 손을 제멋대로 잡아버리니 말이다.”
방취아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사형은 남자가 아니에요. 가족이지.”
“여전히 말은 잘하는구나.”
“이 책을 받아주실 거죠?”
응계성은 그녀가 자신의 손에 꼬옥 쥐어준 책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여인 특유의 정교한 필치로 꼼꼼히 써내려간 책에는 군데군데 인물의 그림과 도해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 많지 않은 분량이었으나, 이 책을 만들기 위해 그녀가 어떠한 노력을 했는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응계성은 말없이 그 책을 보고 있다가 갑자기 퉁퉁 부은 음성을 내뱉었다.
“그런데 무공 이름이 이게 뭐냐? 금계탁속이라니… 나보고 닭이라도 되란 말이냐?”
방취아는 배시시 웃었다.
“사형에게 가장 어울리는 동물이 무언가 고민하다가 고른거에요. 사형은 누가 뭐래도 종남파 제일의 싸움닭이잖아요.”
응계성은 더 이상 어떤 불만도 표하지 않았다. 아마 속으로는 그녀의 싸움닭이라는 말을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했음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