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2권 용왕대전(龍王大戰)편 : 10화
제 228장 강중조룡(江中釣龍)
서안 일대가 온통 한 가지 살인 사건으로 소란스러웠다.
서안같이 큰 도시에서는 하루에도 수십 건의 살인이 벌어지고 많은 사람이 원인 모를 이유로 죽기도 한다. 그래서 어지간한 일로는 서안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없었다.
하나 이번 사건은 몇 가지 점에서 여느 사건과 판이하게 달랐기에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우선 살해된 사람이 서안의 토박이이며 오랫동안 일대에서 명망을 얻어온 방태동이라는 점이었다. 방태동은 방보당이라고 하는 작은 전장을 운영하고 있는데, 금전 관계가 담백하고 이윤을 과다하게 책정하지 않아 인근에서 가장 믿을 만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더구나 그는 심한 가뭄이 들거나 홍수가 나서 사람들의 생활이 극도로 궁핍해질 때는 곧잘 창고를 열어 곡식을 나누어주기도 해서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아온 인물이었다.
그런 방태동이 하나뿐인 딸의 혼인식 전날 처참한 모습으로 살해되었으니 사람들이 경악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더구나 그 흉수로 지목된 사람이 방태동의 딸과 혼인하기로 했던 고옥기여서 사람들의 놀라움은 더욱 컸다.
고옥기는 방보당에서 오랫동안 충실하게 일했던 점원으로, 인물됨이 성실하고 이재(理財)에 밝아서 방태동의 신임을 두텁게 받고 있었다. 오죽했으면 방태동이 장중보옥(掌中寶玉)처럼 애지중지하던 외동딸을 그에게 시집보내려 했을까?
그런데 고옥기가 그런 방태동의 믿음을 배반하고 그를 살해했다고 하니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한 가운데도 커다란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세 번째로 사람들을 가장 놀라게 한 것은 고옥기가 방태동을 살해한 이유였다.
방태동은 자신의 사위가 될 고옥기를 혼인식 전날 특별히 불러 자신이 그동안 은밀히 관리하고 있던 거래 장부를 인계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장부를 본 고옥기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장부에 적힌 액수가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거액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 거래처들이 하나같이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곳이라서 고옥기는 놀라움과 함께 당혹스러움을 느껴야만 했다.
만에 하나 이 장부가 밖으로 유출되면 서안 일대가 온통 난리법석이 날 것이 너무도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방태동이 자신에게 이런 중요한 장부를 인계하는 것에 감격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운 마음도 들었다.
“주인님, 제가 이 장부를 관리하기에는 아직 능력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방태동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허허….. 언제까지 주인님이라고 부를 텐가? 장인이라고 불러보게.”
“하지만 아직 혼인식도 올리지 않았는데…..”
“그런 허례허식이 무어 그리 중요한가? 중요한 건 나는 이미 자네를 내 사위로 인정했다는 것이고, 자네는 우리 집 사람이 되었다는 것일세.”
“가…. 감사합니다. 장인어른.”
“그래, 너무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네. 그렇다고 내가 자네에게 모든 일을 일임하고 뒤로 물러나겠다는 뜻은 아니니까. 단지 이제는 자네가 내 사위가 되었으니 우리 집안의 가장 중요한 비밀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뜻에서 이 장부를 보여준 것일세.”
방태동은 겉표지가 누렇게 변색된 두터운 장부를 소중한 듯 손으로 쓰다듬었다.
“이 장부는 우리 방씨 일가의 오대에 걸친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 것일세. 다른 어떤 것으로도 이 장부를 대신할 수는 없지.”
“정말 놀라운 물건입니다.”
“자네도 살펴봐서 알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이 장부의 내용이 밖으로 알려진다면 서안 일대는 물론이고 섬서성 전체가 커다란 혼란에 빠지게 될 걸세. 그만큼 중요하고 기밀을 요하는 물건이지.”
고옥기는 바짝 긴장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장부에 적혀 있는 면면들을 대략 훑어보아도 방태동의 말이 결코 거짓이 아님을 충분히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장부는 여벌을 만들지 않았네. 오직 이것 하나뿐이지. 비록 파손의 위험은 있지만 그것이 분실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한 선조의 지시일세. 다만 다음 세대의 주인이 정해지면 표지와 제본만은 새로 꾸민다네. 머지않아 자네가 이 장부의 주인이 된다면 자네 손으로 직접 표지를 만들고 제본을 새로 해야 하네.”
“제가 감히 이 장부의 주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
“나는 하나뿐인 아들 녀석도 일찍 죽고 딸만 있을 뿐이네. 결국 사위도 자네 하나뿐인데, 자네가 내 후계자가 되지 않는다면 누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장인어른……”
“그러니 다른 생각 하지 말고 마음을 단단히 먹게. 이 장부의 비밀을 아는 순간, 자네는 방보당의 후계자임과 동시에 서안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금전을 주무르는 사람이 되는 걸세.”
고옥기로서는 그저 고개를 떨군 채 감격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하나 그로부터 반 시진 후에 고옥기는 대장간에서 사 온 예리한 검으로 방태동의 목을 정확하게 찔러버렸던 것이다.
이 말을 부하들에게서 들은 유현상은 피식 웃고 말았다.
“지금 그걸 나보고 믿으라는 건가?”
소식을 가지고 왔던 유송(劉松)은 찔끔하여 그의 눈치를 살폈다.
“이건 제가 조금 전에 믿을 만한 소식통으로부터 입수한 정보입니다. 고옥기가 방태동을 죽인 건 그 비밀장부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하기 위해서입니다.”
유송은 유화상단 방계의 친척으로, 원래 성은 장씨였으나 유씨 성을 하사받고 유현상의 밑에서 일하고 있었다. 눈치가 제법 빠르고 잔머리를 잘 굴리는 편이어서 가끔 괜찮은 소식들을 물어오곤 했었는데, 이번에 가져온 소식은 영 유현상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지금도 유현상은 빙글빙글 웃으면서 유송을 빤히 쳐다보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고옥기가 비밀장부 때문에 방태동을 죽였다고?”
유송은 유현상 밑에서 오랫동안 일해왔기 때문에 방금의 이런 표정은 유현상이 기분이 좋지 않을 때 나타내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을 수는 없어서 그는 무작정 머리부터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한시라도 빨리 알려드리려는 욕심에 제대로 확인도 해보지 않고 달려왔습니다.”
유현상은 유송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자네의 충성심이야 내가 잘 알고 있지. 그래, 지금 자네가 들은 소문이란 게 누구에게서 나온 것인가?”
“흑선방의 당주로 있는 추풍이란 자입니다.”
유현상의 시선이 옆으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이목이 청수한 청의 중년인이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소 선생은 흑선방이란 단체와 추풍이란 자를 알고 계시오?”
청의 중년인은 유화상단에서 식객으로 있는 소정방이란 자였다. 두뇌가 비상하고 성격이 침착해서 유현상이 자신의 책사로 생각하는 인물이었다.
소정방은 맑고 청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흑선방은 서안의 남문대로 일대를 장악하고 있는 흑도 무리들입니다. 숫자는 백여 명에 불과하지만, 상당히 흉폭하고 고수들도 제법 있어서 그런대로 세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추풍은 흑선방에 있는 다섯 명의 당주 중 한 명으로, 뒷골목의 소식을 잘 탐문하고 다닌다고 해서 흑서(黑鼠)라는 별호가 붙었다고 하더군요.”
“그럼 아주 맹탕은 아니라는 말이로군.”
“추풍은 소식통으로는 제법 쓸 만한 자입니다.”
소정방의 말에 초조한 표정으로 서 있던 유송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유현상은 그것을 못 본 척하고 계속 소정방에게 물었다.
“그럼 소 선생은 그의 말이 사실일 거라고 믿는단 말이오?”
“적어도 두 가지는 사실일 겁니다.”
“그게 무엇이오?”
“방태동이 죽었다는 것, 그리고 방태동에게 비밀장부가 있다는 것.”
유현상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고옥기가 방태동을 죽였다는 것도 믿을 수 없다는 말이오?”
소정방은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믿을 수 없다기보다는 확인이 필요하다는 게 더 정확한 말이겠지요. 고옥기처럼 평생을 전장의 일개 점원으로 살아온 자가 대뜸 검으로 사람의 목을 정확하게 찌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그 대상이 자신이 오랫동안 충성을 바쳐오던 주인이었다면 말입니다.”
유현상은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확실히 소 선생의 말씀대로 확인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구려. 고옥기가 아닌 다른 흉수가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오.”
“그렇습니다.”
“방태동이 살해된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시오?”
“그것도 흉수가 누구인지에 따라 달라질 거라고 봅니다. 다만 그 주요한 원인이 비밀장부임에는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비밀장부라…… 너무 공교롭다고 생각하지 않소? 우리가 기껏 방태동이 철면호의 거래처임을 알게 되었는데, 방태동 본인은 죽어버리고 우리가 찾으려고 했던 비밀장부에 대한 이야기가 떠돌고 있으니 말이오.”
“확실히 의심스럽긴 합니다. 흑선방 같은 흑도 무리가 알 정도라면 서안의 유력한 문파는 모두 정보를 입수했다고 봐도 좋을 겁니다.”
“그렇지. 너무 냄새가 풀풀 난단 말이오.”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는 일 아닙니까?”
“그래서 더 골치 아프지. 만에 하나라도 비밀장부에 대한 게 사실이라면 우리로서는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니 말이오. 이걸 어찌해야 좋을까?”
유현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주위를 이러저리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소정방과 유송은 유현상의 그런 모습에 익숙한지 담담한 얼굴로 그가 생각을 마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주위를 서성거리던 유현상은 한참 후에야 걸음을 멈추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유현상은 자신을 주시하는 두 사람을 차례로 훑어보더니 이내 소정방을 향해 물었다.
“소 선생은 내가 어떤 결정을 내릴 것 같소?”
소정방은 차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어떤 결정이든 후회 없는 선택을 하셨을 게 분명합니다.”
유현상은 모처럼 커다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과연 소 선생은 나의 장자방이오. 나는 정면으로 뚫고 나가기로 결심했소. 도전이라면 응해주고, 함정이라면 격파해버리겠소. 그리고 진짜 기회라면……”
유현상의 두 눈은 어느 때보다 불타올랐다.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철면호의 목덜미를 움켜잡고야 말겠소.”
방태동의 장례식은 조용히 치러졌다.
그도 그럴 것이 방태동의 가족이라고 해야 딸 하나뿐이었고, 그 흉수는 딸과 혼인을 하기로 한 남자였으니 장례를 치를 상주조차 제대로 구하기 힘든 형편이었다. 결국 방태동의 딸은 정신을 잃고 누워 있었고, 방보당의 점원들과 평소에 방태동에게 은혜를 입었던 사람들이 힘을 모아 간신히 장례식을 마칠 수 있었다.
서안의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 성자(聖者)라고까지 불리던 사람의 장례식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조촐하고 초라했으나, 그래도 방태동의 관이 장지(葬地)로 떠날 때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배웅해 주었다.
장지는 방씨 일가의 선조들이 묻혀있는 서안 남쪽의 작은 야산이었다. 오래전에 방씨 일가의 선조 한 사람이 당시의 유명한 지관(地官)에게 거금을 주고 선택받은 곳이어서 복지(福地)로 널리 알려진 곳이었다. 실제로 이곳을 선산으로 사용한 후 방씨 일가는 대대로 큰 불행이나 어려움 없이 서안에 뿌리를 내리고 번창해왔는데, 이번에 방태동의 일로 그런 전통이 깨진 것이다.
방태동의 관을 묻기 위해서 온 사람들은 모두 과거에 그에게 신세를 졌던 자들이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몰려들어 삽을 들고 땅을 팠다. 순식간에 구덩이가 파지자 관을 묻기 위해 체구가 건장한 사람들이 관을 들어 올렸다.
방태동의 시신이 담긴 관은 특별히 주문한 질 좋은 오동나무로 만든 것이어서 상당히 무거웠다.
그래서인지 관을 들어 올리던 인부 중 한 사람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 바람에 몇 사람이 같이 넘어지면서 관이 바닥에 떨어져 버렸다.
쿵!
요란한 소리와 함께 관이 뒤집히며 관 안에 있던 방태동의 시신이 튕겨 나왔다.
“아이고……. 큰일 났네!”
놀란 사람들이 황급히 달려와 관을 일으켜 세우고 시신을 다시 관 속에 집어넣느라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다.
다행히 시신은 크게 훼손된 곳이 없어서 무덤을 만드는 일에 지장을 초래하지는 않았다.
관은 이내 잘 밀봉되어 구덩이에 묻혔고, 몇몇 사람들의 애절한 흐느낌 소리와 함께 봉분을 만들고 묘를 단장하는 행사가 진행되었다.
방태동의 죽음을 슬퍼하는지 어디선가 들려오는 산새의 울음소리가 장내의 공기를 더욱 숙연하게 만들었다.
유현상은 소정방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전문적인 검객의 솜씨란 말이오?”
“그렇습니다. 그것도 상당한 실력을 지닌 검객이 일검으로 정확하게 인후혈을 관통한 것이라고 합니다. 아마 방태동은 고통을 느낄 사이도 없이 숨이 끊어졌을 거라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고옥기가 흉수란 소문은 거짓이었군.”
“고옥기를 잡아서 확인해봐야겠지만, 그가 방태동을 살해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합니다.”
“그런데 왜 흉수가 고옥기라는 소문이 퍼진 거요?”
“방태동이 죽은 날 저녁에 고옥기가 대장간에서 검을 산 것은 사실로 확인되었습니다. 대장간 주인의 말로는 그 검을 살 때의 고옥기의 표정이 너무 심각해서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고 하더군요.”
“단지 그것 때문에 고옥기를 흉수로 몰았던 거요?”
“그럴 리가 있습니까? 검을 산 고옥기가 방태동의 집으로 간 것을 본 사람이 제법 많이 있습니다. 고옥기가 방태동의 거처로 들어간 후 인기척이 없길래 이상함을 느낀 사람들이 방태동의 방으로 들어가 보니 방태동이 목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고 하더군요.
방 안 한쪽에 있는 금고의 문이 활짝 열려 있고, 고옥기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당연히 그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아니겠습니까?”
“비밀장부에 대한 소문은 어떻게 퍼지게 된 거요?”
“고옥기는 서문대로의 외곽에 있는 두 칸짜리 집에서 노모를 모시고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방태동이 죽은 날 저녁에 새파랗게 질린 고옥기가 황급히 집으로 돌아와서는 노모와 언쟁을 벌였다고 합니다.
이웃에 사는 주민이 소란스러운 소리에 놀라 왔다가 마침 그들 모자가 다투는 말을 들었는데, 그때 고옥기가 ‘비밀장부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라고 했다더군요.
주민이 무슨 일이냐고 묻자 깜짝 놀란 고옥기가 입을 굳게 다물고는 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노모를 반강제로 데리고 나갔다고 했습니다.”
“흠, 미심쩍은 구석이 있기는 해도 그런대로 이야기가 맞추어지는군.”
“비밀장부에 대한 소문이 너무 상세하게 퍼진 것 외에는 그다지 흠잡을 데 없는 이야기입니다.”
“소 선생도 그렇게 생각하는구려. 고옥기가 방태동을 죽인 흉수가 아니라면 그가 비밀장부를 가지고 있다는 건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데 소 선생의 생각은 어떻소?”
“두 가지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고옥기는 방태동을 죽이기 위해 대장간에서 검을 사서 방태동의 거처로 갔습니다. 하지만 방태동은 이미 누군가에게 목을 찔린 시체가 되어 있었습니다.
고옥기는 놀랍기도 하고 당황하기도 해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문득 금고에 비밀장부가 있음을 기억해내고는 금고를 열어 비밀장부를 꺼낸 다음 집으로 가서 노모를 데리고 도망쳤습니다. 이게 한 가지 가정입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생각이오.”
“하지만 이 경우는 세 가지 의문이 남습니다.
첫째는 고옥기가 왜 무슨 이유로 그토록 믿고 따르던 방태동을 죽일 생각을 했느냐 하는 것이고,
둘째로는 왜 하필이면 자신에게는 별 필요도 없는 비밀장부를 가지고 갔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가 더욱 중요한데, 그가 가지고 간 비밀장부에 대한 소문이 어떻게 그리도 상세하고 빨리 퍼질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확실히 그런 점들이 의아하긴 하구려. 두 번째 경우는 무엇이오?”
“누군가가 고옥기를 흉수로 몰아 제거하려 한 경우입니다.”
“그 의견은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할 것 같소.”
“고옥기가 검을 사기 전에 이미 방태동이 죽었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렇다면 고옥기가 검을 산 건 방태동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방태동의 복수를 위해서란 말이요?”
“고옥기의 평소 성품이나 방태동에 대한 충성심으로 보아 그게 더 합리적인 생각이 아니겠습니까?
고옥기는 방태동이 살해당하는 장면을 보고 순간적으로 격분하여 대장간에 가서 검을 샀지만 이내 자신의 실력으로는 흉수에게 복수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럴 경우 그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그게 무엇이오?”
“흉수의 약점을 폭로하여 흉수를 궁지로 몰아넣는 것입니다.”
“소 선생은 그게 비밀장부라고 생각하는 거요?”
“방태동은 남에게 원한을 살 만한 일을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단 한 가지 있다면 그가 비밀장부를 소지하고 있다는 것뿐이지요.
그러니 흉수가 비밀장부의 존재가 남에게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 그를 살해했다면, 고옥기로서는 오히려 비밀장부를 외부로 유출함으로써 방태동의 복수를 하려고 했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그렇다면 고옥기가 방태동의 방으로 가서 금고를 열고 비밀장부를 가지고 간 경위도 납득이 됩니다.”
“그리고 그가 노모를 데리고 모습을 감춘 이유도 이해가 되는군.”
“그렇습니다. 아울러 우리의 가장 큰 의문이었던, 왜 그동안 아무도 몰랐던 비밀장부의 존재가 이토록 상세하고 빠르게 서안 일대에 퍼져 나갔는가 하는 것도 설명이 됩니다. 그건 바로 고옥기가 비밀장부에 대한 소문을 의도적으로 퍼뜨렸기 때문입니다. 바로 방태동을 살해한 흉수에 대한 복수심에서 말입니다.”
“소 선생의 의견은 정말 타당하다고 생각하오. 그렇다면 방태동을 살해한 흉수는 고옥기를 제거하기 위해서 눈에 불을 켜고 그를 찾고 있겠구려?”
“그렇습니다. 고옥기는 흉수의 정체를 알 뿐 아니라 비밀장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흉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를 잡으려 할 겁니다.”
“방태동을 살해한 흉수가 누구라고 생각하시오?”
“방태동이 비밀장부를 만든 것은 벌써 오래전의 일입니다. 그동안 아무 일도 없다가 이번에 갑자기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은 한 가지 추측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게 뭐요?”
“우리가 초희를 통해서 철면호와 방태동의 거래를 알게 된 직후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거지요.”
“그럼 소 선생은 철면호가 사람을 시켜 방태동을 제거했다고 생각하는 거요?”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생각합니다. 철면호는 틀림없이 우리가 자신과 방태동의 거래 사실을 알아냈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로서는 우리가 방태동을 사로잡거나 그를 추궁하여 비밀장부를 얻게 되는 게 다른 무엇보다 두려웠을 겁니다. 그러니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불안 요소를 제거한 거지요.”
“그럼 흉수는 철면호의 수하 중 한 명이겠구려?”
“틀림없을 겁니다. 그래서 고옥기가 흉수를 보자마자 그것이 철면호의 지시임을 알아차리고 비밀장부를 빼돌린 겁니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하나로군. 고옥기는 지금 어디 있다고 생각하시오?”
“솔직히 고옥기에 대해서는 그동안 우리도 전혀 모르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에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초 소저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오, 초희는 철면호의 가장 믿었던 수하였으니 고옥기와도 안면이 있었겠구려.”
“단순히 안면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철면호와 방보당의 거래 중 상당 부분을 그녀와 고옥기가 담당했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고옥기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고옥기의 행방을 알고 있소?”
“그녀도 지금 당장 고옥기가 어디에 숨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가장 유력한 곳 두 군데를 알려주었습니다.”
“그곳이 어디요?”
“한 군데는 서안의 북쪽에 있는 임동의 창호현입니다. 고옥기의 노모의 고향이 바로 그곳이라고 하더군요.”
“다른 한 곳은?”
“쌍수마라는 곳인데, 고옥기가 방보당에서 일하기 전에 그곳에서 한동안 뱃사공 일을 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둘 중 어느 곳이 더 유력하다고 했소?”
“초 소저는 아무래도 인적이 드물어서 종적이 드러날 염려가 있는 쌍수마보다는 사람이 많아서 숨기 좋고 노모의 지인들이 사는 창호현이 더 유력하지 않느냐고 했습니다.”
“소 선생의 의견은?”
“둘 다 일장일단이 있지만, 제가 고옥기여서 살수의 추적을 피해야 한다면 잘 모르는 타지보다는 저에게 익숙한 곳으로 몸을 숨길 겁니다.”
“흠… 내 의견도 그렇소. 그리고 그녀가 고옥기와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겠지.”
“지금 초 소저를 의심하시는 겁니까?”
“그렇지는 않소. 다만 그녀가 정말로 고옥기와 친한 사이였다면 고옥기가 흉수뿐 아니라 우리 손에 사로잡히는 것도 별로 달가워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오.”
“알겠습니다. 그러면 쌍수마 쪽으로 전력을 집중하도록 하겠습니다.”
“쌍수마라면 커다란 강물 두 개가 만나는 곳이겠구려?”
“그렇습니다. 알아보니 이 일대에서 가장 강폭이 넓고 강물의 깊이가 깊은 곳이라고 하더군요.”
“그런 곳이라면 더욱 좋군. 그분의 도움을 받도록 합시다.”
“그분이 선뜻 나서려고 하실까요?”
“그럴 거요. 강에서의 싸움은 그분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니 말이오.”
오후의 햇살이 푸른 물살 위를 따사롭게 비추고 있었다.
쌍수마.
쌍수마는 서안의 위쪽을 흐르는 위하(渭河)의 지류와 경하(涇河)의 지류가 만나는 곳으로, 마치 바다를 연상케 할 만큼 강폭이 넓었다. 워낙 강이 넓어서 강물이 많을 때에는 그야말로 대하(大河)라 불릴 만큼 일대 장관을 연출하지만, 강물이 적을 때는 군데군데 모래톱이 드러나서 다소 황량해 보이기도 했다.
요즘은 가뭄 편이어서 수량은 그다지 많지 않았으나 워낙 커다란 두 개의 강이 합류하는 지역이라 도도한 물살의 흐름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신시 무렵.
쌍수마 주변에 산재한 다섯 개의 나루터 중 하나인 진도장(秦渡場)은 유난히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예전에 진 씨 성의 뱃사공이 처음 배를 띄웠다고 해서 진도장이란 이름이 붙여진 이 나루터는 쌍수마 일대에서는 가장 크고 가장 복잡한 곳이었다.
오늘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배를 기다리느라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강가에 늘어서 있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봇짐을 멘 상인들이었고, 유랑을 나온 듯한 서너 명의 문사들과 나들이를 나온 것으로 보이는 젊은 부부도 있었다. 또한 병장기를 멘 거친 인상의 무사들이 네 명이나 있어서 사람들은 간혹 두려운 눈으로 그들을 힐끔거리기도 했다.
특히 젊은 아내와 동행을 하는 남자는 혹시라도 그 무사들이 자신들에게 시비를 걸까 봐 무척이나 초조해하는 모습이었다.
오후의 햇살은 제법 따사로웠으나 때마침 불어오는 강바람이 더위를 잊게 했다.
한적한 오후였고,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문사들 중 누군가가 우스갯소리를 했는지 사람들이 배를 잡고 웃는 모습이 유난히 정겨워 보였다.
무사들 중 얼굴에 칼자국이 나 있는 험상궂게 생긴 장한이 젊은 여자를 자꾸 쳐다보자 여자는 물론이고 그녀의 남편까지 불안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것을 보자 무사들 중 한 명이 껄껄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 이봐, 그만 쳐다보라구. 저치들이 겁을 먹고 있잖아.”
여자를 쳐다보았던 칼자국 무사가 벌컥 화를 내었다.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
“자네처럼 인상 험악한 친구가 자꾸 흘겨보니까 여자가 어쩔 줄 몰라 하잖아. 보아하니 갓 결혼한 새댁 같은데 그러다 놀라서 아랫도리라도 지리면 어떡하나?”
그 말에 다른 두 사람이 박장대소를 했다.
“크하하…. 맞아, 고노대(古老大)의 인상이 좀 무섭기는 하지.”
“명월원(明月院)의 춘월(春月)이가 밤에 소피 보러 나왔다가 마침 소피를 보고 나오는 고노대를 뒷간 앞에서 마주치고는 놀라서 그대로 기절했던 적도 있었지. 클클…..”
“아무튼 저 친구는 얼굴이 흉기야.”
“진짜 흉기는 배꼽 아래에 달고 있을 걸.”
그들이 괄괄한 음성으로 음담패설을 늘어놓자 다른 사람들이 모두 조용해졌다.
때마침 멀리서 배가 오지 않았다면 장내의 분위기는 몹시도 경색되었을 것이다.
“배가 왔다!”
상인들 중 한 명이 오랜 기다림을 벗어난 것이 기쁜지 큰소리로 외치자 중인들도 반색을 하며 한마디씩 했다.
“다행히 제시간에 오는군.”
“오늘은 유달리 사람이 많은데 한 번에 다 탈 수 있을까?”
“난 더 못 기다려. 뱃전에 매달려서라도 갈 거야.”
“아예 헤엄쳐서 따라오지 그러나?”
상인들이 히히덕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마침내 배가 도착하자 사람들은 허겁지겁 배 앞으로 모여들었다.
가장 먼저 배를 타는 사람은 네 명의 무사들이었다. 누구도 그들에게 무어라고 하지 않았다.
뱃사공 또한 그게 당연하다는 듯 다른 사람들을 물리치고 앞으로 휘적휘적 나와서 배를 타는 무사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사들 다음으로는 상인들이 하나둘씩 배에 올랐고, 이어서 세 명의 문사들이 조심스럽게 배를 타자 남은 사람은 한 쌍의 젊은 부부뿐이었다. 젊은 부부의 얼굴에는 난처한 기색이 역력했다.
배가 사람들로 가득 차서 그들이 타려면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렇게 해서라도 끼어들 자리가 오직 네 명의 무사들이 있는 공간밖에 없었다.
그것은 사람들이 일부러 젊은 부부를 골탕 먹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 중 누구도 무사들 옆으로는 가려 하지 않고 피하다 보니 생겨난 일이었다.
하나 어찌되었건 젊은 부부에게는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가뜩이나 게슴츠레한 눈으로 젊은 여자를 쳐다보는 무사들의 시선이 무서웠던 차에 그들 사이에 끼어서 강을 건너야 한다고 생각하면 절로 온몸에 소름이 돋아날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배를 그냥 보내자니 언제 다음 배가 올지도 모르고, 무엇보다도 더 이상 따가운 햇살 아래서 무작정 서 있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그들이 어쩔 줄을 몰라 망설이자 뱃사공이 재촉을 했다.
“배를 타려면 빨리 오르시오. 아니면 그냥 출발하겠소.”
“잠시만 기다리시오.”
뱃사공이 금방이라도 배를 띄울 듯하자 남자가 황급히 그를 제지하고는 여자에게 무어라고 소곤거렸다.
아마도 불안해하는 여자를 달래서 태우려는 모양이었다.
네 명의 무사들은 무언가 기대 어린 눈으로 그들을 지켜보며 낄낄거리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조금 안쓰러운 눈으로 젊은 부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내 남자의 설득에 넘어갔는지 여인이 용기를 내어 배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이어 남자가 그녀의 뒤를 따라 배에 오르려 할 때였다.
네 명의 무사들 중 아까부터 여인에게 눈독을 들이던 험상궂게 생기고 얼굴에 칼자국이 있는 무사가 슬쩍 그녀와 남자의 사이로 몸을 들이밀었다.
그 바람에 여인은 그 무사의 품속에 안기다시피 했고, 남자는 반대로 무사의 등 쪽으로 떠밀려버렸다.
“어어…..?”
남자가 당혹성을 지르며 칼자국 무사를 밀치고 여인에게 다가가려 했으나 그때 칼자국 무사가 눈을 부라리며 그를 돌아보았다.
“뭐야? 가뜩이나 좁아 죽겠는데 왜 자꾸 밀치고 난리야?”
칼자국 무사의 표정이 어찌나 살벌했던지 남자는 찔끔하여 더듬거렸다.
“아니, 그게……… 저…….. 내 아내에게 가려고…………..”
“이왕 자리 잡은 거 강 건너갈 때까지 그냥 가자구. 괜히 자리 옮기려다 강물에 빠지지 말고.”
칼자국 무사의 말은 남자가 빠지지 않으면 자기가 빠뜨려 주겠다는 의미가 강하게 담겨 있어서 남자는 안절부절못하면서도 차마 그를 밀치고 아내에게 다가가지는 못했다.
여인 또한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으나 칼자국 무사는 징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바싹 몸을 밀착했다.
“흐흐……”
그 바람에 그녀는 완전히 칼자국 무사의 품속에 파묻힌 형국이 되고 말았다.
자신의 가슴에 와 닿는 여인의 부드러운 촉감에 신이 났는지 칼자국 사내는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흐하하하….. 이봐, 사공! 이제 탈 사람은 다 탔으니 어서 출발하자구.”
뱃사공이 배를 출발시키자 배가 세차게 한 번 흔들렸다. 그 틈을 노려 칼자국 무사는 그녀의 몸을 살짝 안고는 득의만면한 표정을 지었다. 같은 일행인 무사들이 빙글거리며 농담을 던졌다.
“이봐, 너무 기분 내지 말라구. 남편 앞에서 그래도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지.”
“예의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대놓고 주무르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지.”
“그러다 놀라서 새색시가 강물로 뛰어들기라도 하면 어쩌려구?”
“남편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남편도 같이 강물에 던지면 알아서 구해주겠지.”
그들의 말 속에 담긴 내용이 점차로 험악해지자 여자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따가운 햇살을 피하기 위해 커다란 방갓을 눌러쓴 뱃사공은 열심히 노를 저어 배를 강의 한가운데로 몰고 갔다.
강심으로 갈수록 강바람이 거세어졌고, 뱃전을 때리는 물살 또한 거칠어졌다. 그 바람에 배는 한 번씩 크게 흔들렸고, 여인의 몸은 갈수록 칼자국 무사의 품속에 깊숙하게 안겨졌다.
마침내 젊은 남자가 도저히 못 참겠는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만 내 아내에게서 비켜, 이 날도둑 같은 놈아!”
배 안이 갑자기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사람들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젊은 남자를 쳐다보았다.
젊은 남자 또한 홧김에 소리를 버럭 지르기는 했으나 자기 목소리가 이렇게 크게 나올 줄은 몰랐던지 당혹스런 표정이 역력했다. 그러면서도 계속 칼자국 무사를 노려보고 있는 것으로 보아 비장한 결심을 한 모양이었다.
칼자국 무사는 자기가 잘못 들었나 하는 표정으로 멀거니 있더니 점차로 얼굴이 붉게 상기되며 거친 숨소리를 뱉어내기 시작했다.
“흐으………….. 이 하루살이 같은 놈이…………..!”
그의 몸에 파묻혀 있다시피 하던 여인이 칼자국 무사의 흉악살처럼 일그러지는 얼굴에 놀랐는지 달달 떨리는 손으로 그의 소맷자락을 움켜쥐었다.
“안 돼요!….. 제발 용서해주세요.”
칼자국 무사는 도저히 분기를 참지 못하겠는지 그녀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젊은 남자를 향해 몸을 날렸다.
“뭐라고 지껄였느냐?”
그가 세차게 움직이는 바람에 그의 주위에 있던 다른 무사들의 몸이 여기저기 밀려갔다.
“어? 밀지 말라구.”
“조심해. 이 바보야!”
칼자국 무사의 일행인 세 명의 무사는 휘청거리면서도 용케도 중심을 잡고 넘어지지 않았다.
뱃사공은 가뜩이나 좁아터진 배 안에서 소란이 일어 강물에 빠지는 사람이라도 나오게 될까 봐 노심초사하는 표정이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세 명의 무사가 서 있는 자세가 자신을 반원형으로 포위하는 형태였던 것이다.
게다가 젊은 남자를 향해 손찌검이라도 할 줄 알았던 칼자국 무사가 오히려 자신을 향해 한 걸음 앞으로 다가오자 완벽한 진형이 갖추어졌다.
뱃사공이 그들을 피하려면 강물로 뛰어드는 방법밖에 없을 정도로 엄밀한 포위망이 구축된 것이었다.
뱃사공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듯 네 명의 무사들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그때 칼자국 무사가 그를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어딘지 모르게 해학적인 웃음이었다.
“더운 날에 노를 젓느라 고생이 많군.”
음성 또한 조금 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뱃사공은 왠지 모를 불안한 마음에 표정이 어두워졌으면서도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고생은요. 제 직업인걸요.”
“오, 과연 충직한 뱃사공이로군. 자네가 노를 잡은 지 얼마나 되었나?”
칼자국 무사가 젊은 부부를 대할 때와는 달리 자상한 어조로 묻자 뱃사공은 더욱 어색함을 느꼈으나 겉으로는 공손하게 대꾸했다.
“칠 년쯤 됐습니다.”
“뱃사공 생활 칠 년이면 노를 젓는 데 고수가 되었겠군.”
“별 말씀을요. 그저 늦지 않게 배를 몰 수 있을 정도는 됩니다.”
칼자국 무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왜 나는 자네 말이 믿기지 않지?”
뱃사공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듯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네? 제 말이 믿기지 않다니요?”
칼자국 무사의 얼굴에 괴이한 미소가 어른거렸다.
“자네가 칠 년은커녕 칠 개월도 뱃사공 노릇을 한 사람 같지 않다는 말일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칼자국 무사는 번개같이 오른손을 내뻗어 뱃사공의 손을 움켜잡았다.
그 손이 어찌나 빨랐던지 뱃사공은 피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왜……… 왜 이러십니까?”
칼자국 무사는 자신의 손에 잡힌 뱃사공의 손을 들어 보였다.
“보라구. 이게 칠 년 동안 노를 잡은 사공의 손인가?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뽀얗고 매끄럽지 않나? 자네들 생각은 어떤가?”
그가 묻자 뱃사공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무사들 중 한 명이 뱃사공의 손을 힐끔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너무 보드라워서 여인네 손 같군. 돈이나 만지며 전표나 세면 딱 어울릴 손이야.”
뱃사공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아니…. 그게…..”
칼자국 무사는 두 눈을 번뜩이며 뱃사공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곳에 숨어 있으면 우리가 못 찾을 줄 알았나? 자네는 우리를 너무 무시하는군.”
“무…..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허….. 이런 상황에서도 시치미를 떼고 있나? 한 가지만 말해주지.
물건을 넘겨주면 자네를 해치지 않겠네. 자네는 앞으로 평생 자네가 하고 싶은 사공 일을 하며 살 수 있을 거야.”
“저……. 저는…..”
뱃사공이 부인하려 하자 칼자국 무사의 눈에서 흘러나오는 눈빛이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차가워졌다.
“거짓말을 하면 자네의 손 하나를 잘라주겠네. 두 번째로 거짓말을 하면 자네의 눈을 빼주지.
그래도 또 세 번째로 거짓말을 하면 그때는 자네의 혀를 잘라주겠네.
그다음 일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걸세.”
그 음성에 실린 냉혹함에 질렸는지 뱃사공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 마지막으로 묻겠네. 물건은 어디 있나?”
뱃사공은 주저주저했으나 칼자국 무사가 천천히 허리춤에서 병기를 꺼내자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정말 물건을 건네주면 저를 놔주시는 겁니까?”
“이를 말인가? 나는 절대로 허언을 하지 않아.
일단 약속을 하면 어떤 종류의 약속이든 반드시 지키지. 자네도 나를 잘 알고 있지 않나?”
뱃사공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누구신지….. 제가 처음 뵙는 분인데……”
칼자국 장한은 피식 웃으며 얼굴을 쓰윽 문질렀다.
그러자 얇은 인피면구가 딸려 나오며 그의 본래 얼굴이 드러났다.
그를 본 뱃사공의 눈빛이 격하게 떨렸다.
“노 대협……”
“그래, 나 철면호 노해광일세. 내가 직접 여기까지 온 것은 그만큼 자네를 중하게 생각했기 때문일세. 자네도 알지 않나? 내가 이런 일에는 좀처럼 직접 나서지 않는다는 걸.”
뱃사공은 한동안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노해광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이내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노 대협의 약속이라면 저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럼 사실대로 말씀드리죠. 물건은…..”
뱃사공이 노해광을 향해 무어라고 입을 열려 할 때였다.
지금까지 한쪽 구석에서 조용하게 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여섯 명의 상인들이 일제히 그들을 향해 무언가를 던졌다.
그것은 날카로운 낚시바늘이 빽빽하게 달려 있는 쇠그물이었다.
노해광을 비롯한 네 명의 무사는 물론이고 뱃사공마저 피할 사이도 없이 쇠그물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상인들의 행동이 워낙 일사불란하고 신속했을 뿐 아니라,
몸을 제대로 움직이기도 힘들 정도로 배 안이 너무 협소했기 때문이었다.
순식간에 장내의 상황이 반전되어 노해광 등이 꼼짝도 못하는 신세가 되자, 한쪽에 말없이 서 있던 문사들이 앞으로 나섰다.
“하하….. 당당한 철면호가 이렇듯 한 마리 물고기 신세가 될 줄은 몰랐군.”
노해광은 쇠그물을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치다가 상인들이 봇짐에서 병장기를 꺼내 겨누자 그제야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는 웃는 얼굴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문사들 중 짙은 자삼을 입은 문사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자삼문사는 노해광과 시선이 마주치자 빙긋 웃으며 자신도 얼굴을 문질렀다.
그러자 그 안에서 유현상의 얼굴이 나타났다.
“하하…… 설마 인피면구가 혼자만의 전유물이라고 믿는 것은 아니겠지요?”
노해광은 한동안 사나운 눈으로 그를 쏘아보다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아니오. 단지 이곳에서 당신을 만나리라고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기에 조금 놀랐을 뿐이오.”
유현상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노해광을 향해 빙글거렸다.
“하하…… 나는 당하고는 못 사는 성미요. 그래서 일부러 노형이 사용했던 쇠그물 수법을 그대로 흉내 내보았소. 직접 당해보니 어떻소?”
“기분이 더럽군.”
“아마 그럴 거요. 하지만 내 입장에선 정말 효과적인 수법이라고 생각하오. 이런 절묘한 공격법을 만들어 낸 노형의 솜씨에 박수를 보내고 싶은 심정이오.”
유현상이 박수를 칠수록 노해광의 얼굴은 더욱 딱딱하게 굳어졌다.
유현상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지 그런 노해광의 얼굴을 몇 번이고 보고 있다가
노해광과 함께 갇혀 있는 세 명의 무사들을 돌아보았다.
모두 처음 보는 얼굴이었으나 노해광의 측근들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노해광이 이들만을 대동하고 이곳으로 올 리가 없었다.
‘아마 저들 중에 가휘와 하응도 있겠지.’
그토록 속을 썩이던 철면호 노해광과 그 무리들을 일망타진했다고 생각하니 유현상은 절로 대소가 터져 나오려 했다.
하나 그는 꾹 눌러 참으며 노해광과 함께 그물 안에 갇혀 있는 뱃사공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자네가 바로 고옥기로군.”
뱃사공은 흠칫 놀란 눈으로 유현상을 바라보았다.
유현상은 부드럽게 웃었다.
“놀라지 말게. 자네 덕분에 철면호를 잡을 수 있었으니 자네는 내 은인이나 마찬가지일세. 이제 한 가지만 더 나를 도와주면 자네는 그 은혜에 대한 보답을 받을 수 있을 걸세.”
뱃사공은 조금은 두렵고 조금은 설레는 표정이 되었다.
“무엇을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예상하고 있을 텐데. 철면호가 원하던 바로 그 물건 말일세.”
과연 뱃사공도 대충 그러리라고 짐작을 했었는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 물건 하나로 너무도 큰일이 일어났군요.”
“세상 일이란 원래 그런 걸세. 아무리 큰일이라도 그 원인을 따져보면 지극히 사소한 경우가 대부분이지.”
“물건을 내놓으면 저를 어쩌실 겁니까?”
“내가 말하지 않았나? 자네에게 충분한 대접을 할 걸세. 아마 자네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보수를 받게 될 거야. 내 약속함세.”
그래도 뱃사공은 머뭇거리고 있었다.
유현상은 빙긋 웃었다.
“아직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군. 그렇지 않나?”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렇습니다.”
“내가 바로 유현상일세.”
“아!”
뱃사공이 탄성을 내지르자 유현상은 힘 있는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누구인지 안다면 내 성격도 들어서 알고 있겠지? 나는 약속을 깨는 걸 누구보다도 싫어하는 사람이라네.”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물건을 내놓게.”
뱃사공은 씁쓸하게 웃으며 그물에 갇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이런 몸으로 말입니까?”
유현상은 피식 웃더니 자신의 옆에 있는 백삼문사에게 턱짓을 했다.
백삼문사가 알았다는 듯 다가와 그물 한쪽을 열고 뱃사공을 꺼내주었다. 그 백삼문사는 다름 아닌 유송의 변장이었다.
유송의 도움을 받아도 뱃사공이 쇠그물을 빠져나오는 데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쇠그물에 달려 있는 낚싯바늘이 옷에 박혀 있어 그것을 떼어내는 게 힘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유현상은 조금도 짜증을 내지 않고 묵묵히 뱃사공이 그물에서 완전히 빠져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싸움의 승자이므로 느긋하게 승리의 여운을 즐기고 있었다.
뱃사공은 그물을 완전히 빠져나오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 쇠그물은 정말 지독하군요. 저 안에 있으니 꼼짝도 할 수가 없습니다.”
유현상은 이번에도 느긋한 웃음을 날리면서 말했다.
“그 효과는 나도 감탄하는 바일세.”
뱃사공은 그의 앞에서 주섬주섬 옆구리를 뒤척거렸다.
“그런 곳에 숨겨 놓았나? 하긴….. 몸에서 떼어놓기에는 불안했을 테지.”
뱃사공이 허리춤을 뒤지는 광경을 지켜보던 유현상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문득 눈에 들어온 뱃사공의 손은 조금 전에 노해광이 했던 말과는 달리 굳은살이 잔뜩 박혀 있는 것이 아닌가?
손바닥을 중심으로 굳은살이 가득 박힌 그 손은 전형적인 검객의 손이었다.
평생 검이라고는 한 번도 잡아본 적이 없는 고옥기가 저런 손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었다.
“너는……”
유현상이 버럭 외침을 터뜨리려는 순간, 허리춤을 뒤지던 뱃사공의 손에서 섬광이 번뜩이며 무언가 시퍼런 것이 그의 목덜미를 관통했다.
“끄윽!”
유현상은 눈을 부릅뜬 채 그를 노려보았다.
뱃사공의 손에는 허리춤에서 뽑아든 듯한 작은 단검이 쥐어져 있었다.
놀랍게도 뱃사공은 그 단검으로 일 장에 가까운 검기를 뽑아내어 유현상의 인후혈을 꿰뚫어버렸던 것이다.
뱃사공은 유현상의 경악 어린 눈을 보며 담담한 음성을 내뱉었다.
“내가 누구냐고? 나는 황성고검의 제자요. 그리고 당신을 죽인 수법은 사부님의 최고 무공인 혈천홍이라고 하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현상은 싸늘히 식은 채 그대로 뱃전에 쓰러지고 말았다.
“이….. 이런…..”
유송을 비롯한 여섯 명의 상인 차림의 유화상단 고수들이 대경실색하여 그에게 달려들려 할 때였다.
무사들에게 곤욕을 치렀던 젊은 부부가 재빨리 쇠그물의 양쪽 끝으로 각기 다가가더니 쇠그물의 한쪽을 잘라낸 다음 빠르게 찢어냈다.
그러자 쇠그물에 갇혀 있던 노해광과 세 명의 무사들이 어느새 알몸이 되어 쇠그물의 밖으로 나와 있었다.
부부가 양쪽에서 쇠그물을 쳐드는 순간에 교묘하게 입고 있던 옷을 벗으며 쇠그물을 빠져나온 것이다.
그것은 상당한 기간의 훈련이 없으면 불가능한 동작이었다.
덕분에 그들은 속바지만 입은 알몸을 고스란히 드러냈으나 누구도 부끄러워하거나 쑥스러워하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젊은 아내조차도 남자들의 벗은 몸을 스스럼없이 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젊은 아내야말로 천면묘객 하응의 변장이었던 것이다.
그의 남편인 젊은 남자는 정해의 변장이었고, 노해광과 함께 무사로 변한 세 명 중 한 명은 가휘였으며, 다른 두 명은 노해광의 오랜 수하들이었다.
지일환과 마정기는 쇠그물 벗어나는 훈련을 받지 못했기에 이번 일에 동참할 수 없었다.
순식간에 변한 상황에 유송을 비롯한 유화상단의 고수들이 어쩔 줄 몰라 할 때 노해광이 냉혹한 눈빛으로 그들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모두 없애버려.”
그러자 가휘를 비롯한 노해광의 부하들이 일제히 유화상단의 고수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리 크지 않은 배 안은 삽시간에 유혈 낭자한 혈우성풍이 몰아쳤다.
“크아악!”
처절한 비명 소리가 연신 터져 나오는 가운데, 유화상단의 고수들이 일방적으로 쓰러지고 있었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쿵!
그들이 탄 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격렬하게 흔들리는 것이 아닌가?
노해광을 비롯한 중인들이 흠칫 놀라 싸움을 멈추었을 때 또다시 커다란 소리와 함께 배가 뒤흔들렸다.
쿠웅!
“배의 아래쪽이다!”
누군가가 배의 충격이 어디서 오는지를 알아차리고 소리를 질렀으나 너무 늦은 일이었다. 배의 바닥에 커다란 구멍이 생기며 배가 가라앉기 시작한 것이다.
“황충, 드디어 나타났구나!”
노해광은 눈을 번뜩이며 배의 밑바닥을 노려보았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배의 아래 강바닥의 저 어딘가에 강호 제일의 수공 고수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모두 배가 부서지는 충격에 대비하고 준비한 물건을 꺼내라.”
노해광의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배에 세 번째 충격이 가해졌다.
쿠왕!
이번의 충격이 얼마나 거세었던지 스무 명 가까운 인원이 탈 정도로 커다랗던 배가 그대로 두 동강이 나버리고 말았다. 하나 노해광의 부하들은 언제 꺼내 들었는지 손바닥만 한 별 모양의 회전판을 손에 들고 있었다. 알몸이 된 노해광과 세 명의 고수들에게는 정해가 미리 준비한 회전판을 건네주었다.
배가 부서져 강물에 빠지기 직전에 그들은 일제히 그 회전판을 세차게 던졌다.
삐이이이익!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그들이 던진 회전판이 허공을 십여 장쯤 날아가더니 커다란 원을 그리며 다시 돌아왔다. 그 순간, 그들은 물속으로 거의 잠겨가는 뱃전을 박차고 회전판 위로 몸을 날렸다.
빠른 속도로 회전하며 허공을 날아가는 회전판 위에 몸을 실은 중인들은 거의 삼십여 장을 더 날아갔다. 하나 이내 한 사람씩 힘을 잃고 추락하는 회전판과 함께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때 부서진 채 거의 물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배의 옆으로 하나의 머리가 불쑥 솟아올라왔다.
그 인영은 이마와 눈만 물 밖으로 내민 채 회전판을 타고 삼십여 장 밖으로 날아간 노해광과 그의 수하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물기 젖은 이마 아래 번들거리는 두 눈이 유난히 노란색을 띤 괴인이었다.
“흐흐….. 제법 얕은 꾀를 쓰는구나. 하지만 강물을 벗어나지 못한 이상 네놈들은 모두 죽은 목숨들이다.”
괴인은 음산하게 중얼거리며 다시 물속으로 사라졌다.
삼십여 장 밖의 강물에 떨어져 열심히 헤엄을 치고 있던 노해광의 부하 중 한 명이 갑자기 다급한 표정을 지으며 물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우욱…..!”
그는 물 밖으로 나오려고 몇 번이나 발버둥 쳤으나 이내 힘을 잃고 물속으로 끌려 들어가고 말았다. 다른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고 더욱 필사적으로 헤엄을 치고 있었다.
하나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아 다시 한 명의 부하가 물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 부하는 마지막 순간에 스스로 칼을 뽑아 들고 잠수했으나, 얼마 되지 않아 가슴이 갈라진 채로 물위로 떠올랐다.
주위가 온통 시뻘건 핏물로 붉게 물들었을 때 시신의 바로 옆에서 다시 노란 눈동자의 괴인의 머리가 떠올랐다. 괴인은 눈까지만 물 밖으로 내민 자세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번에는 어느 놈을 데려갈까?”
그의 시선에 유현상을 살해한 가짜 뱃사공의 모습이 들어왔다. 괴인의 노란 눈동자에 기이한 살기가 꿈틀거렸다.
“나력지의 제자라고? 그럼 저놈이 바로 마검 조일평이구나. 유현상이 죽은 게 아쉽긴 하지만 저놈이라면 멋진 제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괴인은 천천히 몸을 움직여 뱃사공에게로 향해갔다.
천천히라고는 해도 그의 속도는 도저히 물속을 헤엄치는 사람 같지 않았다. 뱃사공이 사력을 다해 헤엄을 치는데도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뱃사공도 괴인이 자신을 노리고 다가오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진 채 더욱 빨리 양손을 놀렸으나 그 속도는 한계가 있었다. 그에 비해 괴인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는데도 마치 미끄러지듯 물속을 나아가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그는 가만히 있는데 물이 저절로 갈라지며 그의 몸을 앞으로 밀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침내 괴인은 뱃사공의 바로 뒤까지 다가갔다. 뱃사공도 이제는 자신의 수영 실력으로는 괴인의 손을 벗어날 수 없음을 알아차렸는지 더 나아가지 않고 오히려 몸을 돌려 괴인을 마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괴인의 노란 눈동자가 가늘어지며 미소가 떠올랐다. 도저히 살아있는 사람의 것이라고는 볼 수 없는 냉혹하고 끔찍한 미소였다.
뱃사공은 수중에 단검 하나를 든 채 신광이 번뜩이는 눈으로 괴인을 노려보더니 이내 단검을 앞으로 내찔렀다.
촤악!
물이 갈라지며 싸늘한 검기가 빠른 속도로 괴인을 향해 다가들었다.
“클클클…..”
괴인의 입에서 듣기 거북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뱃사공의 공격이 가소롭기 그지없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괴인은 피하지도 않고 맨손을 앞으로 뻗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검기를 움켜잡았다. 그러자 그토록 날카로운 기세로 날아들던 검기가 거짓말처럼 힘없이 사그라드는 것이 아닌가?
뱃사공은 깜짝 놀라서 황급히 재차 이검을 날렸다. 하나 마찬가지였다. 괴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맨손으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검기를 움켜쥐어 소멸시켜 버렸다.
그 깜짝 놀랄 모습에 뱃사공은 많이 의기소침해진 듯 표정이 극도로 어두워졌다.
괴인은 더 재주를 부려보라는 듯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뱃사공은 이를 부드득 갈더니 이내 단검을 빠르게 찔렀다가 빼었다. 그러자 조금 전과는 판이한 시퍼런 검기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쏘아져 나왔다.
그 검기는 물속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괴인의 인후혈을 향해 날아들었다.
괴인은 검기가 자신의 목덜미를 향해 정확하게 찔러오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피하지 않고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팍!
세찬 소용돌이가 일어나며 일 장 너비의 공간이 갈라졌다가 다시 합쳐졌다.
이것만 보아도 방금 뱃사공이 펼친 일초가 얼마나 가공할 것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나 뱃사공의 얼굴에는 오히려 암담한 절망감이 떠오르고 있었다.
놀랍게도 괴인은 그 자리에 선 채로 오른손바닥으로 자신의 목을 찔러오는 검기를 막아냈던 것이다.
검기에 찔린 괴인의 오른손에는 엷은 핏자국이 보이는 듯했으나, 괴인이 한차례 주먹을 쥐었다 펴자 핏자국조차 사라져버렸다.
그제서야 괴인은 뱃사공을 향해 살기로 가득 찬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미소가 너무도 잔인해서 뱃사공이 움찔하는 순간, 괴인의 몸이 믿어지지 않는 속도로 그를 향해 돌진해 왔다.
어찌 인간이 물속에서 이런 속도로 움직일 수 있단 말인가?
뱃사공의 얼굴이 시커멓게 물들었다. 도저히 피할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다.
괴인의 강철 같은 손에는 언제 꺼내 들었는지 여인의 장신구를 연상케 하는 작은 칼이 쥐어져 있었다. 그 칼은 돌진하는 속도를 그대로 유지하며 뱃사공의 가슴을 갈라왔다.
막 뱃사공의 가슴이 잘라지려는 순간, 어디선가 날카로운 물체가 괴인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 물체의 날아드는 속도가 워낙 맹렬해서 괴인으로서도 막지 않을 수 없었다.
펑!
괴인의 칼에 부딪친 물체가 산산이 부서져버렸다. 놀랍게도 그 물체는 노해광 일행이 배를 벗어날 때 사용했던 나무로 된 회전판이었다.
괴인은 자신의 방해를 받았다는 것이 분한지, 가뜩이나 노란 눈동자가 아예 샛노랗게 변하며 회전판이 날아온 곳을 노려보았다.
십여 장 떨어진 곳에 노해광의 모습이 보였다. 노해광은 자신에게 오라는 듯 괴인을 향해 오른손을 까닥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괴인은 미친 듯이 분노해서 뱃사공을 내버려 두고 그를 향해 쏜살같이 움직여 갔다.
노해광은 그를 도발하던 모습과는 달리 몸을 돌린 채 정신없이 도망치고 있었다. 하나, 괴인의 움직임을 벗어날 수는 없는지 이내 꼬리가 잡혔다.
괴인이 막 노해광을 향해 작은 칼을 휘두르려는 찰나, 다시 예의 회전판 하나가 그의 머리 위로 날아들었다.
“카아악!”
괴인은 물속에서 의미를 알 수 없는 괴성을 내지르며 칼을 휘둘렀다. 회전판은 박살이 났으나, 그 사이에 노해광과의 거리는 다시 벌어져 있었다.
이번에 회전판을 던진 사람은 가휘였으나, 괴인은 가휘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계속 노해광의 뒤를 쫓아갔다.
숨을 서너 번 들이마실 동안에 어느새 노해광의 뒤에 다다른 괴인이 칼을 휘두르기도 전에 다시 회전판이 날아들었다. 괴인은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으나, 자신의 머리만을 집요하게 노리는 회전판을 무시할 수가 없어 칼을 휘둘러 회전판을 박살 내버렸다.
그 바람에 다시 노해광을 놓치고 말았다.
이런 일이 두 번이나 더 계속되었다. 이제는 노해광의 일행 중 누구도 회전판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 모든 회전판이 괴인의 접근을 막느라 소요되었던 것이다.
노해광도 피하는 걸 포기했는지 헤엄치는 속도가 급격히 떨어져버렸다.
‘저놈이 도망 다니다 지쳤나 보군. 아예 여기서 끝장을 내주지.’
괴인은 언제 화를 냈느냐는 듯 느긋한 심정이 되어 노해광을 향해 다가갔다.
노해광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뭍으로 기어올라갔다.
괴인은 처음에는 강 한가운데 섬이라도 있는 건가 하고 깜짝 놀랐으나, 이내 노해광이 올라간 곳이 작은 모래톱임을 알았다.
‘강물이 줄어들어 모래톱이 군데군데 생겼구나. 물속보다는 물 밖에서 죽고 싶단 말이지? 소원대로 해주지.’
괴인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노해광을 따라 모래톱 위로 올라갔다.
모래톱의 크기는 반경 사오 장밖에 되지 않았다. 물 밖으로 나오니 별로 크지 않은 모래톱의 한가운데에 노해광이 가쁜 숨을 헐떡이며 서 있었다.
괴인은 그를 향해 다가가며 음산하게 웃었다.
“크흐흐….. 겨우 도망간 곳이 여기냐?”
노해광은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로 지친 모습이었으나, 입담만은 여전한지 싸늘한 음성을 내뱉었다.
“황충! 물속보다는 바깥 공기가 더 좋지 않으냐?”
괴인의 눈꼬리가 가늘게 치켜 올라가며 노란색 눈동자가 살기로 뒤덮였다.
“노해광, 감히 내가 누구인지 알면서도 그딴 식으로 말을 하는 거냐?”
노해광은 헐떡이면서도 큰소리로 웃었다.
“하하….. 네가 어려서부터 물만 좋아하는 변태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 그렇게 물속에만 쳐박혀 있으니 몰골도 그런 꼴로 변한 게 아니냐?”
괴인이야말로 쾌의당 칠대용왕 중의 수중용왕이며, 강호에서 수공의 제일인자라 불리는 수룡신군 황충이었던 것이다.
물 밖으로 완전히 드러난 그의 몸은 군살 하나 없는 미끈한 것이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피부에 작은 비늘 같은 것이 돋아나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섬뜩함을 느끼게 만들었다.
이것은 그가 익힌 흡룡공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나타나는 어새문(魚璽紋)이었다. 이 어새문은 물고기의 아가미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에 아무리 오래 물속에 있어도 숨을 쉬는 데 전혀 지장을 받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물속을 유영할 때도 물고기의 비늘처럼 민첩하고 매끄럽게 움직일 수 있게 해주어 수공을 익히는 사람이라면 꿈에서도 얻고 싶어 하는 최상의 경지였다.
그 바람에 그의 외모가 일반인과는 다르게 변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황충은 노해광이 자신의 가장 큰 약점인 괴이하게 변한 외모를 빗대어 놀리자 불같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오른손에 들고 있는 작은 기형도를 힘껏 움켜잡으며 노해광을 향해 다가갔다.
“이놈! 온몸의 살점을 한 점 한 점씩 저며서 포를 떠주마. 그때도 그런 소리를 입 밖으로 낼 수 있는지 한번 보자.”
살기가 뚝뚝 묻어나는 소리를 내뱉으며 다가오는 황충의 모습은 그야말로 꿈에 볼까 무서울 정도로 살벌한 것이었으나, 노해광은 오히려 더욱 큰소리로 웃었다.
“크하하하….. 물 밖으로 나온 물고기가 입만 뻥긋거리는 격이로구나. 물고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느냐?”
“흐으 흐으……”
황충은 너무도 화가 치밀어 올라 차라리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노해광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갈 뿐이었다.
마침내 노해광이 삼 장 앞까지 도달하자, 황충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를 향해 몸을 날렸다.
“끄아아!”
고함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를 내며 황충이 노해광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날아오는 순간, 노해광이 서 있는 바로 우측의 모래톱이 푹 꺼지며 그 안에서 하나의 인영이 튀어나왔다. 그 인영은 노해광을 향해 칼을 휘두르려는 황충을 향해 빛살 같은 십검(十劍)을 뿌려댔다.
파파파팟!
마치 번갯불을 연상케 하는 열 줄기의 검광이 날아들자 황충의 안색이 시커멓게 변해버렸다. 그때 황충은 전력을 다해 노해광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기 때문에 도저히 몸을 피하거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는 전력을 다해 수중의 도를 휘둘러 열 가닥의 검광에 맞서갔다.
까까까깡!
귀청이 찢어지는 듯한 파공음이 거푸 터져 나오며 끔찍한 비명 소리가 창공을 찢어버렸다.
“크아아악!”
선연한 핏물이 사방에 뿌려지는 가운데 비명 소리가 사라지며 죽음 같은 정적이 감돌았다. 노해광은 눈을 부릅뜬 채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전신에 다섯 개의 구멍이 뚫린 황충이 경련을 일으키며 비틀거리고 있었다. 그 구멍 하나하나는 어린아이의 주먹이 들락거릴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것이어서 그가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열 개의 검광 중 다섯 개는 막았으나 나머지 다섯 개는 막지 못했던 것이다. 황충의 시선은 자신의 왼쪽을 향해 있었다. 언제 나타났는지 그곳에는 검은 옷을 입은 미남자가 역시 몸을 휘청거리며 서 있었다. 그 미남자의 안색은 유달리 창백했고, 가슴 부근의 옷자락이 모두 잘려 나가며 피투성이로 변한 가슴에는 십여 개의 칼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우웩!”
흑의 미남자는 한바탕 검은 피를 토해낸 다음에야 간신히 신형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황충은 그때까지도 전신에 쉴 새 없이 경련을 일으키며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거의 알아듣기 힘든 목소리로 물었다.
“이…. 이게 두슨 무공이냐?”
흑의 미남자는 힘없는 음성으로 대꾸했다.
“십마혈류요….”
“십마혈류? 이것도 나력지의 무공이냐?”
“사부님이 가장 최근에 만드신 것이오.”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황충의 몸이 격렬하게 떨렸다.
“네가 바로 마검 조일평이구나.”
흑의 미남자, 조일평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너…. 너희들은 정말 치밀하게 나를 상대할 계획을 세워두었구나…..”
그제서야 황충은 모든 것이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음모였음을 알아차렸다.
노해광의 거래처였던 방보당의 방태동이 갑자기 의문의 죽임을 당한 것도, 방태동의 심복인 고옥기가 비밀장부를 노리고 방태동을 살해했다는 소문이 서안 일대를 뒤흔든 것도, 초희가 고옥기의 행방을 알아낸 것도, 하필이면 그 장소가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강변이었던 것도, 황성고검 나력지의 혈천홍을 쓰는 자가 뱃사공으로 변해 유현상을 살해한 것도, 노해광 일당이 괴상하게 생긴 회전판을 준비한 것도, 그리고 최후의 순간에 노해광이 작은 모래톱의 중앙에 서 있던 것도…
모두 자신을 노리고 준비된 철저한 함정이었던 것이다. 그 안에 담긴 음모의 치밀함과 상대의 심리를 이용하는 교묘한 술책에 황충은 진심으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황충은 다섯 개의 구멍에서 흘러나오는 피로 혈인처럼 변했으면서도 허공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크흐흐…… 너희들……… 정말 대단하다. 승리할 자격이 있어!…….. 다음에 만나면 좀더 멋지게……..”
그 말을 끝으로 황충의 몸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모래톱에 쓰러져 버렸다.
쿵!
그것은 서안의 상권을 두고 벌어졌던 노해광과 유화상단 사이의 치열한 각축전의 종장(終章)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탄과도 같은 것이었다.
<23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