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2권 용왕대전(龍王大戰)편 : 6화
제 224장 적전논담(適前論談)
아침 해가 밝아올 즈음, 동중산이 조용히 낙일방을 찾아왔다.
“낙 사숙,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잠시 시간을 내어주시겠습니까?”
“들어오세요. 장문사형 일로 온 건가요?”
낙일방이 묻자 동중산은 가볍게 웃었다.
“역시 낙 사숙께서도 알고 계셨군요.”
“어제 장문사형이 흑기보주와 함께 나간 뒤로 돌아오지 않아서 나도 걱정 중이었어요. 늦게까지 방에 불이 켜져 있던데 장문사형을 기다리느라 밤을 꼬박 샌 건가요?”
동중산은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저는 새벽녘에 잠시 눈을 붙였습니다. 낙 사숙께선 한잠도 주무시지 않은 모양이군요.”
“일부러 밤을 샌 건 아니에요. 잠이 오지 않아서 몇 차례 운공(運功)을 했더니 어느새 날이 밝아오더군요.”
낙일방이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으나 동중산은 낙일방이 새벽부터 숙소의 입구에서 진산월이 오기만을 기다렸음을 알고 있었다. 자신도 입구에서 기다리려다 낙일방이 있는 것을 보고는 발걸음을 돌렸던 것이다. 동중산은 잠시 숨을 골랐다가 진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장문인께서 흑기보주와 함께 나가시지 전에 제자를 불러 말씀하신 게 있습니다.”
낙일방은 귀가 번쩍 뜨이는지 반색을 하고 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장문사형이 아무 언급도 없이 나갔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었어요. 장문사형이 뭐라고 말씀하셨나요?”
“장문인께서는 일이 잘못될 경우 돌아오는 게 늦어질 수도 있다며, 하루를 더 기다렸다가 그때까지도 장문인께서 돌아오지 않으시면 먼저 회남으로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낙일방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물었다.
“장문 사형께서 무슨 일 때문에 그렇게 급히 나가셨는지 혹시 들은 게 없나요?”
“그 점에 대해서는 별다른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흑기보주는 우리와 전혀 친분이 없는 사람인데, 장문사형이 왜 갑자기 그와 동행하여 나갔는지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군요. 흑기보주가 장문사형에게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알고 있나요?”
“저는 흑기보주를 장문인께 안내하고는 밖으로 자리를 비켜주었기 때문에 두 분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염치 불구하고 그 자리에 버티고 있을 걸 그랬습니다.”
동중산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하자 낙일방이 살짝 웃었다.
“그게 어디 동 사질의 잘못인가요? 문파의 법도가 그러한데요. 그런데 진짜 그 일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나요?”
낙일방이 눈을 반짝이며 재차 묻자 동중산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이내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휴…. 낙 사숙께선 갈수록 예리해지시는 것 같습니다. 사실은 어제 흑기보주에 대해 수소문을 하다가 한 가지 소식을 들은 게 있습니다.”
“동 사질이 장문인의 외출에 대해 별로 궁금해하지 않는 것 같아서 아마도 그 이유를 짐작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한 거지요. 동 사질이 들었다는 소문이 어떤 것인가요?”
동중산은 정양의 외곽 근처에서 구궁보의 것으로 보이는 마차의 잔해가 발견되었다는 소문을 전해주었다. 낙일방은 조용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질문을 던졌다.
“동 사질은 장문사형께서 흑기보주와 함께 그 마차의 잔해가 있는 곳으로 갔다고 생각하나요?”
“그렇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겠지요?”
동중산은 이 얘기까지 꺼내야 하나 하고 순간적으로 망설였으나 낙일방이 맑은 눈으로 자신을 빤히 응시하고 있자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사실은…… 이번 일이 일어나기 얼마 전에 구궁보의 마차에 대해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진산월 일행이 종남파를 내려온 이후 어느 지역을 가든 동중산이 제일 먼저 해당 지역의 정보를 탐문해 왔기에 그가 강호의 소식에 밝은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동중산은 자신이 들은 구궁보의 마차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이번에 강호에 나온 구궁보의 마차는 아주 특별한 것으로, 구궁보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인물이 타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중 가장 파다하게 퍼진 소문은 그 핵심 인물이 모용 공자의 정혼녀라는 것이었습니다.”
낙일방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용 공자에게 정혼녀가 있었나요?”
“몇 년 전부터 모용 공자가 한 여인을 구궁보에 데리고 와서 끈질기게 구애하여 결국 얼마 전에 청혼에 성공했다고 하더군요. 돌아오는 중추절에 그 여인과 혼인을 하기로 했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처음에는 낙일방도 모용 공자의 정혼녀에 대한 이야기를 동중산이 왜 이렇게 장황하게 꺼내는 지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러다 갑자기 한가지 상념이 그의 머리를 퍼뜩 스치고 지나갔다.
“몇 년 전에 모용 공자가 구궁보로 데려온 여인?”
그 생각이 어찌나 충격적이었는지 임독양맥이 타통된 후로 평정심을 흐트러뜨려본 적이 없던 낙일방이 안색이 변한 채 몸을 세차게 떨었다. 동중산은 낙일방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창백하게 굳어진 것을 보고는 자신도 표정이 어두워졌다. 낙일방은 한동안 깊은 상념에 잠겨 있더니 진지한 눈으로 동중산을 응시했다.
“동 사질, 솔직하게 말해줘요. 동 사질은 그 여인이 임 사저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고 있는 거죠?”
동중산의 외눈에 복합한 빛이 떠올랐다.
“그럴 가능성이 조금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임 사고를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시기적으로 너무 완벽하게 맞아떨어져서 의심해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낙일방은 표정이 굳어진 채로 무거운 음성을 내뱉었다.
“동 사질이 근거 없는 의심을 할 리는 없으니 무작정 아니라고 부인할 수도 없겠군요. 대체 그동안 임 사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아니, 그 여인이 임 사저가 맞기는 한 걸까요?”
“아직은 아무것도 확실한 것이 없습니다. 제가 생각이 짧아서 엉뚱한 착각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낙일방은 동중산이 그렇게 경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지만, 굳이 그의 말에 토를 달지는 않았다. 동중산의 말대로 모용 공자의 정혼녀라는 여인이 임영옥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잘못된 착각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너무도 강력했던 것이다.
한동안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낙일방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장문사형도 모용 공자의 정혼녀에 대한 소문을 알고 계시나요?”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쪽으로는 통 말씀이 없으신 분이라서 말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먼저 이야기를 꺼낼 수도 없는 형편이라……”
“만약 장문사형이 구궁보의 마차 때문에 황급히 나간 것이라면 그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다는 말이 되겠군요.”
낙일방의 지적에 동중산은 아차 하는 표정이 되었다.
“아, 그렇군요! 낙 사숙의 말씀대로 장문인께서는 아마도 그 여인에 대한 소문을 이미 들어서 알고 계셨고, 나름대로 추측도 하셨던 모양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남궁세가와의 비무행을 앞에 두고 이렇게 훌쩍 자리를 비우지는 않으셨을 겁니다.”
“지금이라도 구궁보의 마차가 발견된 곳으로 가봐야 하지 않을까요?”
“이미 늦었을 겁니다. 그곳에서 해결될 일이었으면 어젯밤에 장문인이 돌아오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공연히 그쪽으로 이동했다가 장문인과 길이 엇갈리거나 장문인이 하고자 하는 일에 지장을 초래하게 된다면 정말 낭패스런 일이 될 겁니다.”
“하지만 이대로 있자니 답답하군요.”
낙일방이 그답지 않게 인상을 찡그리며 한숨을 내쉬자 동중산은 진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이 정말 임 사고와 관련된 것이라면 더욱 장문인께 맡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잘못 끼어들었다가는 자칫 일이 엉망으로 될지도 모릅니다. 두 분 사이의 일은 두 분에게 전적으로 맡기느 것이 옳다고 봅니다.”
“……!”
“그리고 만약 임 사고와 상관없는 일이라면 당연히 우리가 끼어들 필요도 없겠지요. 결국 어찌되었건 장문인을 믿고 그분의 말씀에 따르는 게 가장 올바른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낙일방은 침울한 표정으로 한참 동안이나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동 사질의 말이 맞겠지요. 장문사형을 믿어볼 수밖에요. 이럴 때 무언가 힘이 되어주고 싶은데, 그럴 수 없다는 게 너무나 원통하군요.”
“회남을 지나면 구궁보가 있는 구화산이 멀지 않습니다. 그곳에 가면 임 사고에 대한 자세한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겁니다. 그때가 되면 반드시 우리가 힘을 보탤 수 있는 기회가 올 것입니다.”
낙일방의 무거웠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과연 그럴 기회가 올까요?”
동중산은 허공의 한 점을 응시하고 있다가 결연한 음성으로 말했다.
“올 겁니다. 안 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필코 오게 만들어야지요.”
두 사람은 각오가 서린 눈빛을 주고받았다.
“초희의 고향은 하북성(河北省) 곡주현(曲周縣)입니다. 그녀는 일곱 살 때까지 그곳에서 살다가 부모가 역병(疫病)으로 사망하자 다섯 살 손위의 오빠와 함께 유랑을 시작했습니다.”
지일환은 또렷한 목소리로 자신이 조사해 온 사실들을 발표했다.
“그렇게 오 년을 떠돌다가 산서성(山西省) 대동(大同) 인근의 석화촌(石花村)에 정착을 했습니다. 오빠인 초력은 일을 찾아 뒷골목을 전전했고, 그녀는 꽃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고 하더군요. 그러다 그녀는 기연을 만나 어느 여고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녀가 바로 취호접(醉蝴蝶) 적경홍(狄驚泓)입니다.”
지일환은 목이 타는지 입술에 살짝 침을 바르고는 재차 말을 이었다.
“적경홍의 문하로 들어가는 바람에 오빠와 헤어지게 된 초희는 칠 년 후에 무공 수련을 마치고 오빠를 찾아 대동으로 갔습니다. 하나 그녀의 오빠는 이미 몇 년 전에 어디론가로 사라져 아무도 종적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후로 그녀는 계속 강호에서 활동하면서도 오빠의 행적을 수소문했고……”
노해광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의 말의 뒤를 이었다.
“이번엔 운명처럼 다시 오빠를 만나게 되었다는 말이군.”
지일환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그녀의 오빠라는 작자에 대해서는 어디까지 알아보았느냐?”
“그것이….. 시간이 너무 촉박해서 거의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지일환이 우물쭈물하며 고개를 떨구자 의외로 노해광은 화를 내지 않고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렇게 오빠를 찾아 헤매던 그녀도 십 년이 넘게 행방을 알지 못했는데 내가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한 것 같군. 어깨를 펴고 기운을 차려라. 넌 지금 충분히 잘하고 있다.”
“예? 예.”
지일환은 뜻밖의 칭찬에 잔뜩 고무되어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그나저나 초희의 오빠 이름이 초력이라고 했느냐?”
“그렇습니다.”
“강호에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이름이 분명하지?”
“저는 물론이고 제 주변에 제법 발이 넓고 소식이 빠른 자들에게 물어보아도 그런 이름을 들어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강호 초행이나 특정 단체에 소속된 인물이겠군.”
노해광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 한쪽에 말없이 서 있는 가휘를 돌아보며 물었다.
“천희방에게 포천망(쇠그물)을 씌울 때 옆에 있던 항삼인 기억나나?”
가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그 자가 미심쩍단 말이야. 유현상의 수하들은 우리가 모두 파악하고 있었는데, 그런 인상착의를 지닌 자는 없었네. 그렇다고 광동원앙문의 고수라고 하기에는 그자가 사용한 무공의 성질이 전혀 달랐단 말이지.”
가휘는 눈을 빛내며 물었다.
“대형께선 그 자가 초희의 오빠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럴지도 모른다는 걸세. 아무튼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문제는 초희가 어디까지 개입하느냐 하는 것일세.”
묵묵히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하응이 의아한 듯 물었다.
“어디까지 개입하다니요?”
“초희가 비록 우리의 뒤통수를 치고 유현상을 빼돌리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우리와 완전히 등을 돌린 것도 아니야. 무엇보다도 오빠 때문에 그런 일을 했다고 이렇게 서신까지 남겼지 않느냐?”
노해광은 손에 들고 있는 종잇조각을 흔들었다. 그 종이는 초희의 방에서 발견된 것인데, 오랫동안 헤어졌던 오빠의 지시를 어길 수 없어 미안하다는 짤막한 사과문이 적혀 있었다.
하응은 선뜻 노해광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서신까지 남긴 건 우리와 완전히 갈라서겠다는 통보라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노해광은 고래를 흔들며 혀를 찼다.
“쯧… 그렇게 오랫동안 같이 지냈으면서 아직도 초희의 성격을 모르느냐? 초희는 일단 마을을 먹었으면 뒤도 돌아보지 않는 성격이다.”
“그렇지요. 남자 못지 않은 그런 점 때문에 초희를 좋아하는 녀석들도 많았지요. 그래서 더욱 초희가 우리에게 다시 돌아올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되는 데요.”
“머리를 좀 굴려보라구. 초희가 정말 우리를 적으로 삼을 결심이었다면 이런 편지 같은 건 남기자도 않았을 거란 말이야. 어차피 싸우게 될 상대에게 사과문 같은 걸 남긴다는 게 초희 성격에 맞기나 해?”
하응은 곰곰이 생각해보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대형의 말씀을 듣고 보니 확실히 그렇긴 하군요. 그렇다면 대형은 초희가 이 편지를 남긴 의도가 무어라고 보십니까?”
“그녀는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거야. 오빠 때문에 우리를 배신하기는 했는데, 그게 썩 마음에 내키지 않는 거지. 그래서 우리에게 제발 자신을 붙잡아 달라고 애원하고 있는 거란 말이야.”
“편지에 그런 말도 적혀 있었습니까?”
하응이 고개를 내밀고 편지를 읽어보려 하자 노해광이 피식 웃으며 그의 머리를 살짝 밀었다.
“너는 눈치도 빠르고 임기응변도 강한 녀석이 머리를 굴리는 일에는 도통 관심이 없으니 정말 큰일이구나. 제발 생각 좀 하고 살아라.”
하응은 뒤통수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하도 여러 신분으로 변장을 하고 지냈더니 복잡한 생각을 하는 건 질색이 되더군요. 머리를 굴리는 거야 대형도 있고, 가휘 형님도 계시니 저는 그저 지금처럼 살겠습니다.”
“들어봐라. 초희가 편지를 남긴 건 무언가 미련이 남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에게 남은 미련이 무엇이 있겠느냐?”
하응은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눈을 반짝였다.
“우리로군요.”
“그래. 그녀가 강호에서 활동하면서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고 지낸 건 너희들과 나뿐이다. 그런데 오랫동안 소식이 끊겼다가 불쑥 나타난 오빠 때문에 그동안 쌓아놓았던 모든 인간관계가 사라지게 생긴거야. 그녀로서는 갈등이 일어날 만하지.”
하응의 눈알이 갑자기 빨개졌다.
“그녀는 불쌍한 여자입니다. 우리가 도와줘야 해요.”
노해광은 하응이 감정의 기복이 심한 편이라 화도 잘 내고 눈물도 곧잘 흘린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별반 대응을 하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그녀가 우리에게 미련이 남아있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자신의 그런 마음을 우리가 알 수 있도록 암시를 했다는 것이다. 바로 이렇게 편지를 남겨놓음으로써 말이다.”
아무리 생각하기를 싫어하는 하응도 이제는 확연히 알았는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녀는 다시 우리에게 돌아오고 싶어 하는군요.”
“그렇지! 그래서 우리는 그녀가 자연스럽게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어야 한다.”
“어떻게 말입니까?”
“그녀가 지은 죄보다 더욱 큰 공을 세우게 하면 된다. 그러면 공과 잘못이 자연스레 상쇄되니 그녀는 다시 우리 일행에 떳떳하게 합류할 수가 있게 되지.”
“그러니까 어떻게 그녀가 큰 공을 세우게 한다는 겁니까?”
하응이 꼬박꼬박 말대꾸와도 같은 질문을 던졌으나 노해광은 조금도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내지 않고 친절하게 대답해주었다.
“그녀가 지은 죄는 우리의 손에 잡혔던 유현상을 풀어준 것이다. 그러니 유현상보다 더욱 중요한 인물을 잡게 되면 공이 더 커지지 않겠느냐?”
하응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손뼉을 쳤다.
“정말 옳은 말씀입니다. 대형.”
“그래서 네가 할 일이 있다.”
“그게 무언데요?”
노해광은 하응을 향해 전음으로 말했다. 지일환은 옆에서 그들의 대화를 열심히 듣고 있다가 정작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 노해광이 전음을 사용하자 김이 팍 새어 버렸다.
‘제길, 내가 들을까봐 전음을 쓰는 모양이군. 나는 아직 완전히 신임할 수 없단 말이지?’
그래도 나름대로 노해광의 수하가 된 이후 열성을 다해 일해왔기에 그들의 조직에 잘 적응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지일환으로서는 내심 실망스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 이건 그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데서 비롯된 오해였다. 노해광이 그를 조금이라도 의심을 했다면 초희가 다시 돌아오고 싶어한다는 중요한 사실을 그가 알도록 내버려두었을 리가 없었다. 노해광이 굳이 하응만 들을 수 있도록 전음을 사용한 것은 굳이 계획의 세세한 부분까지 공개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원래 알고 있는 사람이 적을수록 비밀은 지키기에 용이한 법이었다.
노해광이 지일환을 다시 부른 것은 그날 오후였다.
“서안 일대의 지리를 잘 아는 사람을 구해 올 수 있겠느냐?”
지일환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그럼 데려오도록 해라.”
“언제까지 말입니까?”
“최대한 빠른 시간에.”
“알겠습니다.”
지일환은 자신있게 대답하고는 몸을 한 바퀴 돌리더니 이내 노해광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대령했습니다.”
노해광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게 무슨 짓이냐?”
지일환은 히죽 웃어 보였다.
“서안 일대의 지리는 저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노해광은 잠시 멍하니 그를 쳐다보고 있다가 이내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하하….. 그렇지. 네 별호가 무엇이었는지를 내가 깜빡 잊었구나.”
지일환은 노해광의 밑에 들어오기 전에 서안 일대를 주릅잡던 최고의 밤도둑이었다. 오죽했으면 밤이슬만 감상하고 다닌다고 해서 상로객이라는 외호까지 붙어 있겠는가? 그런 지일환이니만큼 서안의 지리는 다른 누구보다 훤히 꿰뚫고 있을 게 분명했다.
“저 같은 자를 찾으신 용건이 무엇입니까?”
노해광은 지일환을 손짓해 가까이 불렀다.
“한 군데 장소를 찾으려고 한다.”
“그 곳이 어디입니까?”
“물길이 만나는 곳이다.”
“예?”
영문 모를 말에 지일환이 어리둥절했으나 노해광은 아랑곳하지 않고 눈을 빛내며 말을 계속 이었다.
“서안 성내에서 너무 가까워도 안 되고, 그렇다고 또 너무 멀어도 곤란하다. 반나절 안에는 도착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도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주변 십 리 이내에 인적이 드물어야 하고, 배를 댈 수 있는 곳이 주변에 서너 군데는 되는 장소여야 한다.”
“…..!”
“수심(水深)이 깊고 물살이 빠른 곳이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가까운 곳에 모래톱이 있어 물에 빠지더라도 최악의 경우에 몸을 피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주변에 그러한 곳이 있느냐?”
지일환은 노해광이 묻는 뜻을 알아차렸는지 한동안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노해광은 그의 생각을 방해하지 않고 묵묵히 그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한참 후에야 지일환은 정신을 차리고 힘찬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있습니다. 말씀하신 모든 조건에 부합하는 지형이 딱 한 군데 있습니다.”
노해광은 눈을 번쩍 빛내며 물었다.
“그 곳이 어디냐?”
지일환은 자신에 찬 목소리로 하나의 지명을 말했다.
“쌍수마(雙水磨)”
지일환을 돌려보낸 노해광이 다음에 부른 사람은 가휘였다.
“부르셨습니까? 대형.”
그의 나이는 사실 노해광보다는 세 살이 더 많았다. 하나 그는 노해광을 자신의 대형으로 인정한 이후에 그에게 꼬박꼬박 존칭을 사용했으며, 단 한 번도 그를 대하는 데 소홀함이 없었다. 노해광 또한 다른 부하들과는 달리 가휘만은 일정 수준의 대우를 해주고 있었다.
“자네와 한 가지 상의할 일이 있네.”
“말씀하십시오.”
“자네는 초희가 알고 있는 우리의 가장 큰 비밀이 무어라고 생각하나?”
가휘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즉시 대답했다.
“그야 우리의 주거래 전장(錢莊)이 손노태야의 손가전장이 아니라 방가보(方家堡)의 방보당(方寶堂)이라는 것이지요.
방보당의 비밀창고에 우리의 금전 대부분과 비밀 장부가 보관되어 있으니 말입니다.”
서안에 소문나기로는 노해광이 거래하는 전장은 손가전장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서안에서 가장 크고 공신력 있는 곳이 바로 손가전장이었고, 손노태야와 노해광의 사이도 나쁜 편이 아니었으니 누구나가 그렇게 생각할 만했다.
노해광도 손가전장을 이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나 그들의 거개량은 남들의 생각만큼 그렇게 많지 않았다. 겉으로 드러난 것과는 달리 노해광은 대부분의 금전 거래를 방보당과 하고 있었다.
방보당은 손가전장보다 작고 그리 유명하지도 않았으나, 역사는 서안에 있는 어떠한 전장보다도 오래된 곳이었다.
방씨 일가는 대대로 서안에 거주하는 토박이였고, 벌써 오대째 전장을 가업(家業)으로 이어오고 있었다.
하나 서안의 상류층이 아니라 하류층을 주고객으로 삼았기 때문에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노해광이 방보당과 거래를 시작한 것은 종남파에 있을 때부터였다.
종남파의 일대제자 신분이면서도 종남파에서 무공을 익히기보다는 밖으로 돌아다니기를 좋아했던 노해광은 곧잘 방보당과 금전 거래를 했고, 그것은 나중에 그가 오랜 유랑을 끝내고 서안에 돌아와 정착했을 때도 계속 이어졌다.
노해광이 방보당을 자주 이용한 것은 방보당이 서안에서도 제법 후미진 뒷골목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었다.
떳떳한 종남파의 일대제자가 전장에 들락거리는 모습이 남들 눈에 뜨이면 결코 좋을 게 없었다.
그런데 방보당은 별로 유명한 곳도 아니고 서안의 외진 곳에 위치해 있어서 자주 들락거려도 쓸데없는 소문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당시 방보당의 젊은 주인이었던 방태동(方泰動)과도 죽이 잘 맞아서 젊은 시절에는 두 사람이 자주 의기투합해서 어울리기도 했었다.
노해광은 외견상으로는 손가전장을 주거래 전장으로 삼은 것처럼 행동하면서도 실질적으로 중요하고 큰 거래는 어김없이 방보당을 이용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노해광의 가장 친한 측근인 삼묘와 손노태야, 그리고 방보당의 주인인 방태동과 실무책임자인 고옥기(高鈺期)뿐이었다.
방보당은 규모도 작았고 인원도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에 노해광의 주거래 전장이 그곳이라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주변에 많지 않은 적을 가진 노해광으로서는 치명적인 위험을 당하게 될 소지가 다분했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노해광은 방보당과 거래를 유지했고, 방태동 또한 최대한의 성의를 다해 그의 믿음에 보답하고자 했다.
노해광은 가휘를 향해 다시 물었다.
“자네는 초희가 방보당에 대한 것을 그들에게 발설하리라고 보는가?”
가휘는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겁니다. 유현상이 바보가 아니라면 그녀에게서 제일 먼저 우리의 자금줄부터 확인하려 들 테니까 말입니다.
그녀도 그들의 편에 선 이상 신임을 얻기 위해서라도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만약에 유화상다네서 방보당이 노해광의 주거래 전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고수 몇 명을 보내 방보당을 없애는 것만으로도 노해광의 자금원을 봉쇄할 수 있을 것이다.
무척이나 암울한 상황이었는데도 노해광은 별로 당황하거나 침울해하지 않고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다.
“그렇다면 방보당이 피바다로 변하는 것도 시간문제겠군. 방보당에는 무공을 익힌 사람도 없으니 살수 몇 명만 보내도 아무도 막을 수 없을 테니 말일세.”
‘수하들을 보내 지켜야 할까요?’
노해광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미봉책에 불과하네. 그들이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기약도 없이 수하들을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리고 보낸다면 몇 명을 보내겠나? 우리가 몇 명을 보내든 그들이 더 많은 숫자를 보내면 아무 소용없는 일이 될텐데 말일세.”
“그렇다고 손 놓고 가만히 있을 수만도 없지 않습니까?
가휘가 답답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자 노해광이 그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자네를 찾아와 상의하는 게 아닌가?”
가휘의 눈이 번쩍 빛났다.
“대형께선 무언가 다른 복안(腹案)이라도 가지고 계십니까?”
“모든 일은 상대적인 면이 있네. 이번 일도 안 좋게 생각하면 그들이 우리의 자금줄을 파악하여 우리의 목줄을 쥐게 된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우리가 그들에게 한 방 먹일 절호의 기회를 갖게 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지.”
가휘는 순간적으로 노해광의 말뜻을 파악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어떻게 말입니까?”
“적어도 우리는 그들의 다음 목표가 어딘지를 알게 되었네. 상대가 노리는 곳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데, 그냥 당하고만 있을 텐가?”
가휘는 이내 반색을 하며 절로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상대의 목표를 안다면 오히려 그들을 옭아매는 것은 여반장(如反掌)입니다.”
“그래서 내가 이번 일을 기회라고 하는 것일세. 그들이 방보당을 노리고 있다면 이번에야말로 그들의 숨통을 끊어 놓을 기회를 잡게 될 테니 말일세.”
“대형의 말씀을 듣고 보니 이번이 그들과 승부를 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겠군요.”
“그래. 이번 싸움은 너무 길게 끌면 좋지 않아. 벌써 이번 일의 여파로 이달에는 심한 적자를 면치 못하게 되었네.
이번에야말로 일을 확실히 마무리 짓도록 하세.”
“알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초희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네.”
가휘의 얼굴에 망설임의 빛이 떠올랐다.
“그녀가 우리를 도와주려 할까요?”
“그거야 그녀의 마음에 달린 일이지. 그래도 편지를 남긴 것으로 보아 마음이 아주 없지는 않을 걸세. 우리로서는 충분히 시도해볼 만한 일이지.”
“하지만 그녀와 연락할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자네가 실력을 발휘해야 하네.”
노해광은 가휘를 향해 나직한 음성으로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노해광이 그날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은 조일평이었다. 조일평은 숙소에서 쉬고 있다가 자신을 찾아온 노해광을 반가운 얼굴로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쉬고 있는데 방해가 된 것은 아닌가?”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도 며칠째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고 있어서 좀이 쑤시던 참이었습니다.”
노해광은 빙그레 웃었다.
“잘 되었군. 자네가 해주었으면 하는 일이 있네.”
조일평의 눈이 번쩍 빛났다.
“이제 시작하는 겁니까?”
“아직은 아닐세. 지금은 준비 단계지. 하지만 일단 일이 궤도에 오르면 순식간에 모든 일이 마무리될 걸세. 그러니 지금부터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좋을 걸세.”
조일평은 차가운 얼굴에 엷은 미소를 그려냈다.
“준비야 항상 하고 있습니다. 다만 너무 오래 기다리면 준비만 하다가 지치게 될 테니 그게 걱정이지요.”
“이번에는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될 걸세.”
“기대하겠습니다. 이번에 제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한 사람을 죽여주게.”
조일평은 조금도 놀라지 않고 담담하게 물었다.
“그게 누굽니까?”
노해광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방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