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3권 무림세가(武林世家)편 : 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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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23권 무림세가(武林世家)편 : 10화


제 238장 쌍룡쟁검(雙龍爭劍)

전흠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전면을 바라보았다. 그의 앞에는 남궁선이 어깨를 들썩이며 힘든 자세로 서 있었다. 주위는 아주 조용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비무대 주위를 에워싸고 있건만 누구도 소리를 지르거나 소란을 떠는 자가 없었다. 모두들 입을 벌린 채 경악과 감탄이 담긴 눈으로 두 사람을 지켜 보고 있을 뿐이었다. 격돌하는 순간부터 전흠과 남궁선은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팽팽한 대결을 펼쳤다. 처음부터 전력을 투구할 생각이었는지 전흠은 자신의 장기인 성라검법을 사용했고, 남궁선 또한 남궁세가의 상징과도 같은 대연검법(大衍劍法)으로 맞서 왔다. 비무대 위는 온통 그들이 뿜어내는 검풍과 검영에 휩싸여 버렸고, 그들의 격전은 순식간에 수십 초나 이어졌다. 누구도 뒤로 물러서거나 다른 편법을 사용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섰기에 그들의 격전은 치열함을 넘어 장엄해 보이기까지 했다.

땅! 비무가 시작된 후 처음으로 두 사람의 검과 검이 부딪치며 격렬한 음향이 장내를 뒤흔들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신형 또한 삼장 밖으로 떨어졌다. 숨 쉴 사이도 주지 않고 긴박하게 벌어졌던 두 사람의 비무가 이제 비로소 조금의 틈을 허락한 것이다.

“와아! 최고다!”

그제야 침묵을 지키고 있던 중인들이 폭포수 같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과연 남궁세가의 대공자답다! 겁법이 어찌나 유연하고 매끄러운지 마치 붓을 들어 그림을 그리는 것 같구나.”

“종남파의 고수는 어떻고? 검이 어찌나 난폭하고 살벌하던지 보는 것만으로도 몸에 소름이 날 지경이군그래.”

적막감마저 감돌았던 비무대 주위가 온통 감탄성과 박수 소리로 뒤덮여 버렸다. 그런 주위의 소란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전흠은 남궁선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공력이 부족하거나 겁법이 딸린 것은 아니다. 충분히 상대해 볼 만하다고 느꼈다. 오히려 처음에는 단전에서 흘러나오는 공력의 양이 너무 많아서 그걸 조절하는 데 신경을 써야 할 정도였다. 그런데 상대의 반격이 만만치 않았다. 성라검법의 폭포수 같은 검세 속에서도 조금도 물러서거나 머뭇거리지 않고 절묘하게 그 공간속을 파고들어 왔던 것이다. 그래서 하마터면 두 번 정도는 상대의 검날이 피부에 스칠 뻔한 적도 있었다. 물론 자신의 검 또한 몇 번이나 잘생긴 상대의 얼굴에 핏자국을 낼뻔했지만 그때마다 상대는 현묘한 몸놀림으로 자신의 검을 피하며 날카로운 반격을 해왔던 것이다. 결코 만만한 적수는 아니라고 예상하고 있었지만, 지금에서야 비로소 전흠은 자신의 상극(相剋)을 만났음을 알아 차렸다. 성격이나 기도, 검을 사용하는 방식과 검법의 형태까지 자신과는 정반대의 인물이 바로 남궁선이었던 것이다.

몇 차례 심호흡을 하여 잠시 가빠진 숨을 가라앉힌 전흠은 수중의 장검을 힘주어 움켜잡았다. 그리고는 주저 없이 남궁선을 향해 비호처럼 달려드는 것이었다.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두 눈을 번뜩이며 자신을 향해 맹렬하게 돌진해 오는 전흠의 모습을 남궁선은 조용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상대의 검법은 그의 예상만큼이나 난폭하고 살벌했다. 그리고 그안에 담긴 공력은 예상보다 훨씬 더 강력한 것이었다. 지금도 마지막 순간에 검끼리 부딪쳤을 때 느꼈던 충격으로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두렵거나 걱정스럽지는 않았다. 살벌할 정도로 매서운 검법이었지만. 약점도 뚜렷하게 보였고, 막강한 내공을 지녔으면서도 아직 능숙하게 사용하지 못해서 파고들 여지는 얼마든지 있었다. 다만 그런 모든 것을 상쇄할 정도로 무모하고 거친 상대의 기세가 마음에 걸릴 뿐이었다.

“이자는 이것이 사생결단의 혈투가 아니라 단순한 비무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일까?”

그런데도 자신의 가슴 한구석이 묘하게 들끓고 있는 것은 대체 무슨 이유에서란 말인가?

‘어쩌면…….’

남궁선은 떨리던 손으로 장검의 손잡이를 힘껏 움켜잡았다. 떨림이 멈추며 검을 쥔 손을 중심으로 구름 같은 기세가 피어올랐다.

‘나는 이런 싸움을 하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남궁선은 무서운 기세로 달려드는 전흠을 향해 주저 없이 몸을 날렸다.

차차창!!

이번에는 두 사람의 검이 시작부터 수십 차례나 부딪치며 불똥을 일으켰다. 그만큼 그들의 격전은 치열해져서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모골을 송연케 했다. 비무라고는 할 수 없을 정도로 살벌한 그들의 싸움을 본 몇몇 중인들은 인상을 딱딱하게 굳힐 정도였다. 둘 중 누가 죽어 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살기가 난무하고 있는 것이다. 참관인석에 있던 이동정이 걱정스런 눈으로 비무대를 바라보다가 정소소를 향해 말했다.

“이거 비무가 너무 흉험해지는 것 같지 않소?”

정소소 또한 그런 점을 느꼈는지 표정이 약간 어두워졌다.

“확실히 두 사람의 검은 기필코 상대를 쓰러뜨리고야 말겠다는 살기가 가득 담겨 있군요. 이런 상태라면 단순히 승패를 가리는 것에서 벗어나 둘 중 한 사람은 반드시 피를 뿌리며 쓰러지고 말 거예요.”

옆에 있던 뇌일봉이 모처럼 입을 열었다.

“자칫하면 두 사람 모두 그런 꼴이 될지도 모르겠군.”

유소응이 비무를 할 때는 입 한번 뻥끗하지 않던 뇌일봉이 그가 비무를 마친 후에는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아온 모양이었다. 이동정은 그런 그의 모습이 우스우면서도 장내의 싸움이 우려되어 걱정스런 음성을 내뱉었다.

“아무래도 두 사람의 분위기가 너무 과열되는 것 같은데, 정당한 선에서 제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뇌일봉은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무슨 수로? 우리는 비무의 당사자가 아니라 단순한 참관인일 뿐이네. 우리가 제멋대로 끼어들었다가는 양측 모두에게서 지탄을 면치 못할 걸세.”

“그건 알고 있지만……결과가 뻔히 보이는데 명색이 무림의 선배로서 그냥 손을 놓고 보고만 있자니 가슴이 답답해지는군요.”

정소소가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저들의 싸움을 제지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두 명뿐이에요.”

이동정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진 장문인과 남궁 가주요.”

“바로 그래요. 하지만 그들도 쉽사리 끼어들 수는 없을 거예요.”

“문파와 가문의 명예가 달려 있기 때문이란 말이오? 그렇다고 앞날이 창창한 두 명의 젊은 기재가 뻔히 종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걸 알면서도 지켜보기만 한다는 건 너무 잔인한 일 아니오?”

“남궁 가주는 몰라도 진 장문인은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을 거예요.”

이동정은 그답지 않은 진중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유일하게 기대 볼 수 있는 게 그것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소만… 과연 진 장문인이 우리의 뜻대로 움직일지는 자신할 수 없구려.”

“지켜보면 알게 되겠지요.”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장내의 격전은 한층 더 치열해져서 이제는 누가 보아도 둘 중 하나가 죽지 않고는 싸움이 끝나지 않으리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경탄과 환호성으로 가득했던 비무대가 점차로 조용해지며 검이 움직이는 음향과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전흠은 옆구리와 왼쪽 어깨에 각기 삼검씩을 맞아서 상반신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비록 피육(皮肉)의 상처에 불과했지만 옆구리에 맞은 검은 한 치만 더 파고들었어도 내장을 다칠 뻔할 만큼 심각한 것이었다.

남궁선도 그리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그는 오직 일검만을 맞았으나 검날이 이마 쪽을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에 매고 있던 두건이 잘라져 머리가 산발이 되어 흩날렸을 뿐 아니라,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핏물이 얼굴 한쪽을 피투성이로 만들어 버렸다. 다정군자라는 외호만큼이나 정갈하고 수려한 외모의 그에게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처참한 모습이었다.

그런데도 남궁선의 얼굴은 여전히 담담하기 그지없었고, 움직임 또한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검법을 펼치는 집중력이 올라갔는지, 검로(劍路)가 한층 더 자유분방해지면서 대연검법 본연의 위력을 최고로 발휘하고 있었다.

오죽했으면 남궁세가의 장로이며 좀처럼 남을 칭찬할 줄 모르는 오만한 성정의 검패 남궁철조차도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토해낼 정도였다.

“놀랍구나, 놀라워……본 가의 대연검법에 저런 변화가 있는 줄을 지금까지도 몰랐다니…..그동안 나는 대체 무엇을 연마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의 옆에 있던 남궁추 또한 더할 나위 없이 무거운 표정으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문제는 저런 검법을 펼치면서도 상대에게 우세를 점하고 있지 못하다는 거지. 정말 걱정스럽군, 걱정스러워…..”

그의 말대로 남궁선은 최고의 검법을 펼치고 있으면서도 아직 전흠을 압도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전흠의 날카로운 검에 위험한 상황을 맞이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때마다 남궁세가의 고수들 입에서는 자신들도 모르게 신음성과 비명이 흘러나왔으나 그것도 어느 순간부터 점차로 잦아들기 시작했다.

남궁선이 우세해서가 아니었다. 사력을 다해 자신의 모든 것을 펼쳐 보이는 두 젊은이의 모습에 압도당했기 때문이었다.

지금의 두 사람은 승패를 초월한 것처럼 보였다. 그저 상대를 쓰러뜨리기 위해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수법을 검으로 펼치고 있을 뿐이었다. 이미 그들의 전신은 흐르는 땀과 피로 흠뻑 젖어 있어,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바닥으로 물기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숨은 턱 끝에 닿아 있었고, 검을 쥔 오른손은 아예 감각이 없을 정도였다.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통증은 아예 느낄 겨를조차 없었다.

창!

몇 번째인지 기억도 할 수 없는 검의 격돌로 오른손에 다시 상당한 충격이 느껴지자 전흠은 눈을 번뜩이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 상태로는 안 된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때 그의 뇌리에 문득 종남산에서의 어느 날 밤이 떠올랐다.

종남의 모든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떠들썩한 잔치 분위기가 늦게까지 이어졌다. 정말 흥겨운 자리였고. 즐거운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문인의 검무(劍舞)…. 월광 아래 펼쳐진 장문인의 춤사위는 너무도 아름다웠다. 그 표표히 흐르는 검의 움직임과 그 안에 담겨진 무궁무진한 변화, 그리고 고아하면서도 유장한 분위기를 전흠은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나도 그때처럼 검을….’

이 긴박한 순간에 왜 당시의 일이 떠올랐는지는 전흠도 알지 못했다. 다만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자 걱정과 흥분으로 들끓었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으며 검을 움직이는 자신의 손길이 미묘하게 달라지는 것을 느꼈을 뿐이었다. 마치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대신 검을 휘두르고 있는 것 같았다.

사아악…… 난폭할 정도로 거칠었던 그의 검이 유연하게 움직이며 전혀 다른 변화를 일으켰다. 그것은 지금까지 펼쳐졌던 전흠의 패도적인 성라검법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매끄럽고 장중한 검초였다. 막 전흠을 향해 대연검법의 삼대절초 중 하나인 대연참영(大衍斬影)을 펼치려 했던 남궁선은 누구보다도 빨리 전흠의 검에 실린 변화를 감지해 냈다. 그가 공격적인 대연참영을 거두고 완벽한 수비초식이라는 대연천망(大衍天網)을 펼친 것은 거의 본능적인 동작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목숨을 살렸다.

스스승!

전흠의 검에서 줄기줄기 흘러나오는 검기가 너무도 수월하게 남궁선의 검영을 뚫고 그의 몸으로 다가들다가 마지막 순간에 남궁선의 검에 막혀 버렸다. 하나 검에 막힌 검기가 튕겨져 나오면서 남궁선의 가슴을 피범벅으로 만드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다. 남궁선의 신형이 금시라도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악!”

남궁세가에서 여인의 짤막한 비명이 터져 나온 것도 그때였다. 비명의 주인은 남궁경이었는데, 그녀는 자신의 입에서 비명 소리가 나온 것도 알지 못했는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미동도 않고 서 있었다. 남궁선의 앞가슴이 쩌억 갈라져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자 이동정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승부가 판가름 났음을 선포하려 했다. 하나 그가 채 입을 열기도 전에 휘청거리던 남궁선이 무서운 속도로 전흠을 향해 달려드는 것이 아닌가? 이동정도 그 순간만큼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전흠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남궁선의 기세는 그야말로 폭풍노도와 같아서 전혀 부상당한 사람이라고는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차차창!

요란한 소리와 함께 두 사람 사이에 다시 맹렬한 공방이 오고갔다. 남궁선은 수비는 완전히 도외시한 사람처럼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는데, 그것은 지금까지의 유연하면서 일면 고지식하기까지 했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순식간에 그는 질풍 같은 십여 초를 내뿜었고, 전흠의 몸에 두 줄기의 상처를 만들어 냈다. 그 위세는 정녕 보기 드문 것이어서 사색이 되었던 남궁세가 사람들의 얼굴에 희색이 돌기 시작했다. 하나 남궁철은 오히려 가슴을 치는 듯한 안타까운 음성을 토해냈다.

“이런 바보 같은…..진원지기(眞元之氣)까지 끌어올렸구나.”

남궁선이 무림인이라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사용해서는 안 되는 진원지기를 끌어낸 상태임을 알아차린 것이다. 진원지기는 일단 손상되면 절대로 복구가 되지 않을뿐더러 일단 사용하게 되면 내공의 운영에 큰 지장을 초래하여 자칫하면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지게 되기 십상이었다. 그 후유증이 너무 심각하여 무림인들은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이 아니라면 절대로 진원지기까지 끌어올리지 않았다. 하물며 이와 같은 비무에서 진원지기를 사용한다는 것은 단순히 승패를 판가름 내는 것이 아닌 기필코 사생결단을 내고야 말겠다는 선언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장내의 격전은 그야말로 살벌하다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처절해서 중인들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남궁선은 풀어헤쳐진 머리가 사방으로 흩날리는 모습이 흡사 귀신을 보는 것 같았다. 갈라진 가슴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하의를 시뻘겋게 물들이고 있었고, 이마와 목덜미에도 검이 격중 당해서 전신이 그야말로 유혈낭자했다. 지금의 그를 보고 강호제일의 풍류남아인 강호 삼정랑 중의 다정군자를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전흠 또한 그와 별반 차이 없는 모습이었다. 전흠은 전신에 크고 작은 상처가 열 개를 넘어서서 멀쩡한 곳이 한군데도 없어 보였다. 가슴이 갈라진 남궁선처럼 치명적인 상처가 없다는 것이 그나마 그보다 나은 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전흠은 남궁선과 무시무시한 검초를 주고 받으면서도 조금 전에 경험했던 기이한 감각을 되살리려고 노력했다. 하나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때 자신이 어떻게 움직였는지 좀처럼 생각이 나지 않았다. 문득 떠오른 장문인의 검무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검을 움직였는데, 자신도 놀랄 만큼 가공할 검초가 흘러나왔던 것이다. 그 검초는 천하삼십육검을 닮은 것도 같았고, 성라검법의 변종(變種)같기도 했으며, 어찌 보면 유운검법의 초식을 흉내 낸 것 같기도 했다. 자신의 손으로 펼쳐진 검초이면서도 전혀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은 초식이었다.

‘그때의 감각을 다시 되살릴 수만 있다면…..’

자신의 검은 지금보다 한 단계 더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전흠은 장문인의 검무를 다시 떠올리려고 했으나 남궁선의 검은 그런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파파팍! 시퍼런 검영 수십 개가 그의 전신을 난도질할 듯 무섭게 퍼부어졌다. 그것은 지금까지 전흠이 보았던 어떤 초식보다도 무서운 것이었다. 놀랍게도 남궁선은 이 한 초에 창궁검법의 세 가지 초식과 대연검법의 두 가지 초식에 있는 변화를 몽땅 담아냈던 것이다.

“드…..드디어 창궁대연검(蒼穹大衍劍)이 부활했구나!”

그것은 남궁세가 오랜 숙원(宿願)이었다.

창궁검법과 대연검법을 완벽하게 조화시킬 수만 있다면 능히 강호의 초절정검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남궁세가 역사상 이런 경지에 오른 자는 단지 다섯 사람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후대에까지 찬란한 명성을 전해 오고 있었다. 가장 최근에 창궁대연검을 익힌 자는 오십 년 전의 강남제일검(江南第一劒) 남궁태(南宮太)였다. 그는 혈마 좌무기에게 패할 때까지 강호에서 가장 뛰어난 무적의 검객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가 혈마 좌무기와 반나절 동안의 철저한 사투(死鬪) 끝에 아깝게 분사(憤死)한 이후 남궁세가는 본거지를 강남의 금릉(金陵)에서 이곳 회남으로 옮겨 왔다. 좌무기의 복수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나중에 좌무기가 검성 모용단죽에게 죽은 후에도 남궁세가는 금릉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창궁대연검을 완성하지 않으면 결코 금릉으로 돌아가지 않겠다’

는 것이 당시 남궁세가 사람들의 비장한 마음이었다. 그런데 전혀 뜻하지 않은 곳에서 뜻하지 않은 상황에 창궁대연검을 보게 되었으니 남궁세가 사람들이 격동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물론 남궁선이 완벽하게 창궁대연검의 경지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반드시 승리하고야 말겠다는 결연함과 진원지기까지 끌어올린 절박감이 잠시 그에게 창궁대연검의 비밀을 엿보게 한 것뿐이었다. 하나 그것만으로도 남궁세가 사람들은 충분한 감동을 맛보았으며,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쁨과 절망을 함께 느끼고 있었다. 남궁선의 폭풍노도 같은 검영 속에서도 전흠이 전혀 흔들림 없이 유연하게 검을 움직이는 광경을 보았던 것이다. 그것은 조금 전에 남궁선의 가슴을 갈라놓았던 것과 흡사한 동작이었다. 그리고 결과도 그때와 마찬가지였다. 그토록 가공할 위세로 전흠의 전신을 짓쳐 가던 남궁선의 검세가 눈처럼 허물어지며 전흠의 검이 그의 옆구리를 사정없이 가르고 지나가 버리는 것이었다.

“아아…..”

남궁철의 입에서 도저히 억누를 수 없는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 진원지기까지 끌어올린 남궁선의 공력이 딸려서 창궁대연검의 본연의 위력을 끝까지 발휘하지 못한 것을 알았던 것이다.

남궁선은 한차례 휘청거리다 마침내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의 옆구리는 쩌억 벌어진 채 얼핏 내장이 내비칠 정도였다. 이동정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비무의 종료를 알리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하나 그가 채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남궁선이 벌떡 일어나더니 또다시 전흠을 향해 몸을 날리는 것이었다. 이동정은 참으려 했지만 이 광경을 보고는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탄식을 토해내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무엇이 그를 저토록 집요하게 만든 것일까?”

남궁선은 다정군자라는 외호 그대로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정의 소유자였다. 험한 말을 입에 담지도 않았고, 남을 시기하거나 모략하지도 않았다. 무림인치고는 지나치게 유순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으나, 그래서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를 좋아했다. 무공을 사용할 때도 그는 나름대로 격식과 예의를 잃지 않았으며, 격조 높은 그의 솜씨에 반해서 기꺼이 그와 사귀려는 무인들이 적지 않았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흥분하지 않고, 화를 내지 않으며, 언성을 높이지 않는 그는 군자라는 말이 가장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다정했던 군자는 가슴과 옆구리가 쩌억 갈라지고 전신은 유혈이 낭자한 채로 산발한 머리를 흔들며 미친 사람처럼 검을 휘두르고 있는 것이다. 남궁선의 처절한 모습에 중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할 수가 없었다. 반드시 이기고야 말겠다는 강한 집념과 절대로 굴복하지 않겠다는 그 결연한 각오를 어찌 한낱 몇 마디의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헉헉…”

숨이 턱까지 차올라 올랐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인지 머리가 어지러웠고, 검을 휘두를 때마다 가슴과 옆구리에서 엄청난 고통이 솟구쳐 올랐다. 하나 검을 멈출 수는 없었다. 조금이라도 멈추게 되면 두 번 다시 휘두르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상대는 계속 자신의 검을 피하고만 있었다.

‘덤벼라. 피하지 말고 어서 덤벼! 그 검으로 내 목을 자르지 않는 한 너는 이긴 엇이 아니다!’

남궁선은 마음속으로 절규를 토해냈으나 상대는 듣지 못한 것처럼 계속 자신의 검을 이리저리 피하기만 했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핏물이 눈에 들어갔는지 눈이 따끔거리며 상대의 모습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남궁선은 미친 사람처럼 허우적거리며 계속 검을 휘둘렀다.

비장한 각오를 하고 끌어올렸던 전원지기도 점차 바닥을 드러냈는지 단전 부위가 바늘로 찌르는 듯 쑤셔 오고 있었고, 검을 잡고 있는 팔은 아예 자신의 팔이 아닌 것처럼 전혀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시 한차례 사력을 다해 검을 휘둘렀으나 전흠이 살짝 피하자 남궁선은 금시라도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간신히 검을 바닥에 짚어 추하게 쓰러지는 것을 면한 남궁선은 피 묻은 얼굴로 전흠을 보며 웃었다.

말 한마디 내뱉을 힘도 없었지만 그는 눈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말을 다했다.

‘이기고 싶다면 나를 베라. 그렇지 않고서는 절대로 승리할 수 없다.’

전흠은 그 시선에 담긴 의미를 알아차렸는지 눈빛이 무섭게 굳어졌다. 그는 결코 마음이 넓은 사람이 아니었으며, 쉽사리 인정에 흔들리는 나약한 성격을 지니고 있지도 않았다. 그가 남궁선에게 마지막 살수를 쓰지 않은 것은 이미 승부가 판가름 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강호에서의 승부는 한 사람이 완전히 굴복하기 전까지는 결코 끝난 것이 아니었다. 전흠은 자신이 남궁선의 처지였다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자신도 결코 쓰러지지 않기 위해서 발버둥을 치고 있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같은 길을 걷고 있는 한 사람의 무림인으로서 남궁선의 그런 결정을 존중해 주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전흠은 마음을 결정하고 수중의 검을 힘주어 잡았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중인들은 그의 표정이 바뀐 것을 보고는 침을 꼴깍 삼키며 긴장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막 전흠이 남궁선의 목을 향해 일검을 날리려는 순간, 갑자기 비무대 아래에서 누군가 뛰어 올라왔다.

“이제 그만!”

큰소리와 함께 비무대에 뛰어든 사람은 다름 아닌 남궁탄이었다. 항상 냉정하기만 했던 남궁탄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고 입가로는 쉴 사이 없는 경련이 일어나고 있었다. 남궁탄은 검에 몸을 지탱한 채로 간신히 서 있는 남궁선에게로 다가갔다.

남궁선은 흐릿한 눈을 들어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람을 보려고 했으나 시야가 흐려져 알아볼 수가 없었다.

‘누구지? 전흠은 아닌 것 같은데….누구라도 좋으니 이제 그만 나를 보내주었으면 좋겠군…..’

그 사람은 남궁선에게 바짝 다가오더니 손을 내밀어 그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의 손이 닿자 남궁선은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힘없이 그의 품속으로 쓰러져 버렸다. 낯선 사람의 체향을 맡은 것 같은데도 왠지 그 체격과 품안의 온기가 익숙하게 느껴졌다.

그는 남궁선의 몸을 안으며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이제 됐다. 이제 됐다….선아야.”

‘아버님. 나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남궁선은 소리 높여 외치려 했으나 말이 목에 걸렸는지 입 밖으로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남궁탄은 그의 표정만 보아도 그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알았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이제 그만해도 된다, 선아야. 너는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한 거야.”

‘아버님, 아직은 끝난 게 아닙니다. 아직은…..’

남궁선은 사력을 다해 소리치려 했다. 그때 그의 얼굴 위로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남궁선은 비가 오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하나 비가 오는 것은 아니었다. 남궁탄은 남궁선의 몸을 꼬옥 끌어안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다음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려 비무대를 내려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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