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3권 무림세가(武林世家)편 : 11화 (23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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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23권 무림세가(武林世家)편 : 11화


제 239장 무영검군(無影劍君)

남궁선의 비장한 퇴장을 본 장내의 분위기는 숙연해졌다. 남궁선은 무림인답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비무에 임했다. 비록 그 과정에서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몰골마저 흉하게 변했지만 그가 마지막까지 보여 준 모습은 모두의 가슴에 진한 인상을 남기는 것이었다.
남궁선을 안고 내려오는 남궁탄을 맞이하는 남궁세가 사람들의 표정은 침울하기 그지없었다. 남궁추가 황급히 남궁탄에게서 남궁선을 건네받아 그의 상세부터 살폈다. 남궁선은 이미 의식을 잃고 혼절해있는 상태였다.
한동안 남궁선의 몸을 살피던 남궁추는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에 걱정에 가득 찬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는 남궁세가 식솔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남궁탄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남궁추의 입에서 불길한 소리가 나올까 봐 차마 시선도 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남궁추는 안쓰러운 눈으로 그를 쳐다보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단전(丹田)이 깨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육 개월간은 정양(靜養)을 해야만 내공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아!”

중인들 틈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안도와 안타까움이 뒤섞여 자신들도 모르게 새어 나온 음성이었다. 남궁철이 가슴과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두 곳의 상처는 어떻소? 얼핏 보기에도 상세가 제법 위중해 보이는데.”

“그래서 지금 신약당(神藥堂)으로 가 볼 생각이다. 아무래도 당장 봉합을 하지 않으면 나중에 상당히 문제가 될 소지가 있을지 모르겠구나.”

남궁철의 얼굴에 다급한 빛이 떠올랐다.

“그럼 무얼 망설이고 있는 거요? 어서 데리고 갑시다.”

남궁철의 재촉에 남궁추는 남궁선의 몸을 안아들고 몸을 일으켰다. 이어 그는 아직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남궁탄을 향해 물었다.

“가주는 가지 않을 생각이오?”

남궁탄은 묵묵히 고개만 가로저었다.
남궁추는 알 듯 모를 듯한 한숨을 내쉬고는 이내 남궁선을 안은 채 남궁철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남궁경이 조심스런 동작으로 그들의 뒤를 따랐으나 누구도 그녀를 재지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의 몸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도 남궁탄은 여전히 그런 자세로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고개를 들어라. 가주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식솔들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묵직한 음성에 남궁탄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쳐들어 자신의 앞에 선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이 아주 살짝 일그러졌다.

“형님…..”

그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은 그가 마음속으로 늘 꺼려하고 신경을 쓰는 존재였다. 평생의 경쟁자이기도 했으며, 어느 면에서는 결코 넘을 수 없는 벽(壁)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남궁탄의 친형인 남궁연(南宮淵)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남궁연은 무학(武學)의 기재로 모든 남궁세가 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당시의 가주였던 남궁정(南宮楨)은 그가 강남제일검 남궁태의 뒤를 이을 만하다고 판단하여 그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그 결과, 남궁연은 소가주의 지위에서 내려오고 말았다. 무공을 익히는 데 전념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남궁연의 의사는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남궁연의 뒤를 이어 소가주에 오른 사람은 그의 동생인 남궁탄이었고, 남궁탄은 무사히 가주의 지위까지 오를 수 있게 되었다. 그런 남궁탄에게 형인 남궁연은 언제나 부담스러운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남궁연은 남궁세가의 모든 일에 관여하지 않으면서도 또한 어떠한 일도 해도 제약을 받지 않는 기이한 위치에 서 있게 되었다. 그야말로 세가에 속해 있으면서도 세가와는 동떨어진 천외천(天外天)의 인물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는 평생 결혼도 하지 않았고, 오직 세가의 한쪽에 자신을 위해 특별하게 지어진 건물에만 틀어박혀 있을 때가 많았다. 사람들은 그 건물을 망원각(望源閣)이라고 불렀는데, 그 이름에는 자신들의 간절한 염원과 기대가 담겨져 있었다. 하나 그 이름을 남궁연도 좋아할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남궁연은 하루의 대부분을 망원각에서만 지냈고,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거의 없었다. 세가 밖으로 나가는 일은 더더욱 없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의 존재를 아는 외부인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남궁세가의 참관인으로 와 있는 혁리공은 그 극소수의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향해 물어보는 백리장손의 물음에 선뜻 대답할 수 있었다.

“남궁 가주의 앞에 있는 자는 누구인가? 신태(神態)가 비범해 보이는군.”

혁리공은 공손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남궁 가주의 친형인 남궁연이라고 합니다.”

언뜻 백리장손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남궁 가주에게 형이 있었단 말인가? 그런 말은 듣지 못한 것 같은데.”

“남궁세가에서 특별히 외부로 알리지 않았으니 아는 사람은 많지않을 겁니다. 하지만 삼십 년 전만 해도 남궁세가의 소가주는 바로 남궁연, 그 사람이었습니다.”

백리장손은 즉시 혁리공의 말 속에 숨은 뜻을 알아차렸다. 남궁세가 같은 강호의 명문이 한번 정한 소가주를 바꾸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소가주가 치명적인 잘못을 저질렀거나 아니면 소가주에게 더욱 중대한 일을 맡겼을 경우뿐이었다.

소가주에서 쫓겨날 정도로 큰 잘못을 저질렀다면 남궁연은 지금 저곳에 있을 수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다른 일을 위해서 소가주의 지위에서 내려왔을 게 분명했다.
남궁세가에서 가주의 지위를 승계하는 것보다 더욱 큰일이 무엇이 있었는가?
백리장손은 각별한 눈으로 남궁연을 뚫어지게 주시했다.

“남궁세가의 숨겨진 검(劍)이라는 말이로군. 그렇다면 기대해 봐도 좋겠는걸.”

혁리공은 살짝 웃었다.

“아마 실망하시는 일은 없을 겁니다.”

백리장손은 안광을 번뜩이며 그를 힐끔 쳐다보았다.

“자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더욱 기대가 되는군. 그의 무공을 본 적이 있나?”

“몇 년 전에 남궁 가주의 생일을 축하해 주러 갔다가 그가 흥에 겨워 한바탕 춤사위를 벌이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이미 대연검법이 화경(化境)에 이르렀더군요. 그 뒤로 창궁대연검을 복원하기 위해서 폐관에 들어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창궁대연검이라…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군. 그가 창궁대연검을 완성했을 거라고 보나?”

“그걸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다만…..”

백리장손은 궁금한 듯 입을 주시했다.

“그가 몇 년 동안의 폐관에서 나온 것이 단순히 종남파와의 비무 때문은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럴지도 모르겠군. 아무튼 재미있게 되었네. 종남파에서는 누가 나오기로 되어 있나?”

“신검무적의 사숙이라고 하더군요.”

백리장손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검무적의 사숙이라면 철면호밖에 없을 텐데? 그자는 지금 서안일대를 온통 뒤집어 놓고 있다고 하던데 이곳에 왔단 말인가?”

“그렇다면 더욱 이상하군. 지금 종남파에는 그 항렬의 고수가 없을텐데 말이지.”

“저도 궁금하긴 합니다만, 신검무적의 사숙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하긴, 그런 일에 거짓말을 할 수는 없겠지.”

백리장손은 잠시 침음하다가 지금까지 한쪽에 앉은 채 아무런 말이 없는 궁장(宮裝)의 여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냉 소저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오만무도하고 남들을 눈 아래로 보는 백리장손에게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부드럽고 예의를 갖춘 음성이었다.
궁장여인은 이제 갓 이십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젊은 나이였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눈빛이 초롱해서 자기 주관이 확실한 성격으로 보였으나, 그만큼 도도하고 차가운 인상이어서 선뜻 다가서기 힘든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궁장여인은 강호의 유명한 절정고수이며 점창파의 장로 중에서도 배분이 높은 독검취옹 백리장손의 정중한 물음에도 전혀 긴장하지 않고 조용한 음성으로 되물었다.

“무엇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남궁세가와 종남파의 이번 비무 말이오. 남궁세가에서 비밀리에 숨겨 둔 검이라고 할 수 있는 남궁 가주의 친형이 나오고 종남파에서는 존재도 알 수 없었던 신검무적의 사숙이라는 자가 나온다는데,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정말 귀추가 주목되지 않소?”

백리장손답지 않게 자상하고 친절한 말이었다. 궁장여인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군요. 저도 기대하고 있어요.”

하나 그녀의 말과 달리 백리장손과 혁리공은 그녀가 이번 비무에 별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무에는 신경도 쓰지 않으면서 대체 무엇 때문에 이곳까지 와서 참관인이 되었단 말인가?’

그런 의문이 두 사람의 뇌리에 거의 동시에 스치듯 떠올랐다.
백리 장손은 짐짓 너털웃음을 지어 보였다.

“허허…… 냉 소저는 아직 젊은 나이이니 그런 중년들보다는 청년들의 비무에 더 흥미가 일었을지도 모르겠군. 혹시 절세의 미남자라는 옥면신권이 나오지 않아서 실망했던 거요?”

어찌 보면 약간은 조롱 섞인 말로 들릴 수도 있었으나 백리장손의 성격을 일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나름대로 신중하게 단어를 선택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상대가 다른 여인이었다면 좀 더 직설적인 말을 내뱉었을 것이다.
궁장여인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옥면신권이 비록 요즘 강호 전체에 명성을 날리는 고수이기는 해도 별로 관심이 없어요.”

“허 헛…….그렇구려. 노부가 괜한 말로 소저의 심기를 어지럽힌 것같소.”

“저는 괜찮습니다. 심려하지 마세요.”

두 사람은 서로 예의를 갖추어 말을 맺었다. 하나 그들의 대화를 들은 혁리공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 두 눈에 한줄기 기광을 번뜩이고 있었다.

‘옥면신권에게도 관심이 없다……그런데도 굳이 강호 전체에 명성을 날리는 고수라는 말을 한 것은 고수 자체에는 신경을 쓰고 있다는 뜻이니…

그렇군. 그녀는 신검무적을 보러 이곳에 온 것이로군.’

혁리공의 머리는 어느 때보다 민첩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녀가 이곳에 온 것은 모용 공자의 지시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모용 공자가 그녀를 통해 신검무적을 만나려는 걸까? 아니면 모용 공자는 단순히 비무의 참관만을 지시했고, 신검무적을 만나려는 것은 순수한 그녀의 의도인 것일까?

어느 경우이든 그녀의 목적이 신검무적에게 있다면 두 사람이 조만간 만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일 것이다.

‘이것 참 공교롭군. 아니면 재수가 좋다고 해야 하나?’

혁리공은 아무도 알기 힘든 묘한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유중악을 끌어들여 신검무적과 부딪치게 할지 고민스러웠는데 저절로 해결책이 생기는군. 비매 냉옥환이 가장 따르는 그녀의 대사저(大師姐)가 유중악과 한때 연인이었던 신수옥녀(神手玉女)능자하(凌紫霞)였지? 그렇다면……’

혁리공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주위에서 커다란 환호성이 터졌다. 문득 고개를 들어 보니 남궁연이 천천히 비무대로 오르고 있었다. 이번에도 비무대 위에는 종남파에서 나온 고수가 먼저 올라와 있었다. 검은 수염을 기른 청수한 이목의 중년인을 보자 백리장손의 눈이 매섭게 번뜩였다.

“고수로군.”

혁리공은 백리장손이 남을 칭찬하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었기에 한편으로는 의아스럽고 한편으로는 재미있게 생각되었다.

“여기서도 그게 느껴집니까?”

“다른 건 몰라도 검도의 고수라면 다르지. 지금도 보이지 않나? 비무대에 무심히 서 있는 것 같아도 마음속으로 검을 닦고 있느라 전신에서 끊임없이 무형지기가 흘러나오고 있네.”

혁리공은 멋쩍게 웃었다.

“저야 검을 익히지 않았으니 알 리가 없지요. 그런데 백리 대협께서 그렇게 말씀하실 정도면 종남파의 저 고수도 결코 만만한 상대는 아니겠군요.”

“저렇게 잘 정제된 무형지기를 발출하는 자는 정말 모처럼 보는군. 만만한 정도가 아니라 능히 강호의 어떤 절정검객과도 견줄 만할 걸세.”

“그렇다면 남궁연이 아무리 남궁세가의 숨겨진 검이라고 해도 선뜻 승리를 장담할 수 없겠군요.”

“신검무적도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저자를 내보낸 것이겠지.”

그 말에 혁리공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신검무적을 저자들과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백이장손은 잠시 인상을 찡그렸다가 다답을 회피했다.

“신검무적의 솜씨를 직접 본 적이 없어서 무어라고 말할 수 없네.”

혁리공은 백리장손의 의증을 짐작하겠다는 듯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백리장손은 그의 그런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인상이 더욱 찌푸려졌으나 그에게는 무어라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시선을 비무대 위로 주시하며 나직한 음성으로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멀쩡한 신검무적이라면 나조차도 자신할 수 없지, 하지만….”

그의 마지막 말은 들리지 않았다.

성락중은 담담한 눈으로 비무대를 올라오는 남궁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상대가 남궁세가의 가주인 남궁탄의 형이며, 한때 안휘성 일대를 떠들썩하게 했던 무공의 천재라는 것은 그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다만 기도를 보고 남궁세가에서 제일가는 검술의 소유자일 거라고 짐작했을 뿐이다. 이런 자리에서 이런 상대와 겨룰 수 있다는 건 그리 나쁘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성락중의 나이는 올해로 마흔넷이었다. 기산취악이 벌어졌을 때 그는 약관 스물하나의 피 끓는 청년이었다. 사부와 함께 소림사로 갔다가 그는 난생처음 느껴 보는 강렬한 충격을 받아야만 했다. 하늘처럼 높게만 보였던 사부의 비참한 모습도 보았고, 상상도 못했던 지고(至高)한 검술의 경지도 목격했다. 종남파의 하늘은 높았지만, 형산파는 더욱 높은 곳에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주위 사람들의 비아냥 섞인 시선은 참아낼 수 있었다. 허무한 패배를 당한 장문인의 망연자실한 모습과 사부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피눈물도 감당할 수 있었다. 하나 형산파 오결검객들의 검을 보고 느꼈던 충격과 흥분은 도저히 그를 견뎌 낼 수 없게 했다.

아마 사부가 그와 사제인 하동원을 데리고 종남파를 떠나지 않았다면 그 자신이 먼저 스스로 종남파를 나왔을 것이다. 종남파가 싫어서는 아니었다.

종남의 좁은 울타리 안에서는 결코 형산파의 검술을 넘어설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종남파를 떠난 그들 세 사제(師弟)의 발길은 해남으로 이어졌다. 어디를 가도 만족할 만한 검법을 찾지 못했던 전풍개가 어느 날 문득 해남검파의 남해삼십육검에 대한 소문을 듣고 해남으로 발길을 향했던 것이다. 해남에서 남해삼십육검을 본 전풍개는 나름대로 해법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예 가족들을 모두 데려와 해남에 거처를 정했고, 수시로 해남검파에 들락거리며 그들의 무공을 눈에 담았다. 그의 하루 일과는 오직 검의 수련과 남해삼십육검에 대한 분석뿐이었다. 그 외의 모든 것이 그의 관심 밖이었다. 제자들에 대한 그의 태도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전에도 그리 자상한 사부라고 할 수 없었으나, 그래도 제자들의 진척에 나름대로 신경을 기울였던 전풍개는 해남에 온 이후에는 오직 그들을 몰아치기만 했다.

하동원은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밖으로 나돌기 시작했고, 이내 해남의 특이한 풍물과 분위기에 휩쓸려 버렸다. 하나 성락중은 묵묵히 전풍개의 채근을 감강해 냈다. 눈만 감아도 소림사에서 보았던 형산파 고수들의 검법이 가득 떠올랐기에 오히려 사부의 혹독한 성화가 고맙게 느껴졌다. 그 순간만큼은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형산파 검학(劍學)에 대한 두려움을 잊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났다. 사부의 큰아들이며 자신과는 어려서부터 절친했던 전관평(典關平)은 해남검파로 들어가 단숨에 모든 사람을 사로잡는 전도양양한 제자가 되더니 종내에는 해남검파의 장문인이 되어 버렸다. 외지인이 해남으로 와서 불과 십여 년 만에 장문인의 자리에까지 오른다는 것은 그 전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것은 그만큼 전관평의 무공에 대한 재질이 탁월하고 그의 인품이 사람들을 감복시켰기 때문이었다. 성락중은 함께 종남파에 뼈를 묻을 줄 알았던 친우의 변신을 씁쓸한 마음으로 한 축하해 주었다. 그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전관평은 진산절학(鎭山絶學)이 대부분 실종된 종남의 무공으로는 앞으로도 영원히 형산파의 검학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름대로의 다른 길을 모색했던 것이다. 그가 찾은 길이 올바른 길인지 아니면 자신의 변절에 대한 구차한 변명인지는 성락중도 확신할 수 없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전관평은 자신에게 가장 맞는 길을 걷게 되었으며, 지금은 누가 뭐라 해도 해남검파의 모든 문인(門人)들이 가장 존경하는 장문인이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전풍개는 끝없는 탐구와 각고의 노력 끝에 성라검법에 남해삼십육검의 다양한 변화를 융합시킬 수 있게 되었다. 전관평의 도움으로 해남검파의 많은 고수들과 다양한 비무를 할 수 있었던 것이 커다란 요인 중 하나라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하동원은 해남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명물이 되었다. 원래부터 사람 사귀기를 좋아하고 넉살이 좋았던 하동원은 해남의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니며 크고 작은 사고를 저질렀으나,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그를 좋아했다. 술에 만취해 웃통을 벗은 채 통통한 배를 드러내 놓고 거리의 한쪽 구석에 처박혀 잠들었을 때도, 무림 최고의 검법을 보여 주겠다며 동네 꼬맹이들을 모아놓고 저잣거리 한편에서 괴상한 검무를 추었을 때도, 별미를 만들겠다며 잡아온 멧돼지가 죽은 게 아니라 기절한 상태여서 불에 구워지기 직전에 깨어나는 바람에 온 마을을 수라장으로 만들어 놓았을 때도 사람들은 그를 꾸짖거나 탓하기는커녕 오히려 웃으며 그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오직 사부인 전풍개만이 그런 그를 못마땅하게 쳐다보았으나, 성락중은 그런 하동원이 귀엽게만 느껴졌다. 이제 사십이 가까워 오는 나이임에도 하동원은 아직도 어린 시절의 치기(稚氣)와 순진함을 잃지 않고 있었다. 아마 그것이 기산취악의 쓰라린 고통을 견디어 내는 그 자신만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사부인 전풍개가 남해삼십육검을 성라검법에 접목시키는 것에 자신의 일생을 바치는 것처럼. 성락중은 다른 방법을 사용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잊을 정도로 미친 듯이 수련에 열중하는 것이었다. 그는 아침에 눈을 뜰 때부터 밤에 잠이 들 때까지 단 한 시도 수중에서 검을 놓아 본 적이 없었다. 그 때문에 처음에는 몇 번이나 무심결에 검에 몸을 베인 적도 있었지만, 그런 생활을 몇 년이나 계속하자 지금은 어떤 상태에서도 검을 자신의 수족처럼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사부의 검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검의 움직임과 변화가 일목요연하게 눈에 들어왔고, 그 검이 앞으로 어떻게 움직이게 될지 알 수 있게 되었다. 누가 가르쳐 줘서 그리 된 것이 아니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그렇게 되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것은 점점 더 분명해졌다. 사부도 그것을 느꼈는지 자신이 가만히 바라볼 때면 검을 멈추고 그를 쳐다보고는 했다. 하나 사부는 그 점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부가 자신에 대한 채근을 멈춘 것은 그 즈음부터였다. 그때 그는 자신이 더 이상 사부에게서 배울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후로 그는 혼자 해남의 깊숙한 오지에 머물며 검법을 수련했다. 그는 몇달에 한번씩 식료품을 구입하러 밖으로 나갔고, 그때마다 전관평과 비무를 했다. 처음에는 승패가 서로 엇갈렸으나 조금씩 그가 우세를 보이게 되자 어느 날 전관평은 그에게 투덜거렸다.

“이제 너와는 비무를 하지 않겠다. 재미도 없고 성과도 없는 이런 비무는 정말 질색이다.”

성락중은 그것이 전관평만의 찬사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다음 비무 상대를 찾았으나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동원은 그와 한 번 비무를 해보고는 질겁을 하고 그만 보면 피해다녔고, 해남검파의 다른 고수들도 그를 보면 쉬쉬하며 거리를 두었다. 비무에서 이기는 것도, 비무에서 패하는 것도 모두 만족스럽지 못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가끔씩은 해남도의 밖으로 나가 이름난 검객들을 찾아다녔다. 철저히 정체를 숨겼기 때문에 그의 이름이 알려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만 광동성(廣東省)과 복건성(福健省)일대에서는 언제부터인가 무영검군(無影劍君)이라는 신비한 인물에 대한 소문이 고수들 사이에서 조금씩 퍼지기 시작했을 뿐이다. 누구도 종적을 알 수 없었고, 그의 검법이나 기도가 중후하면서도 탈속(脫俗)한 것이기에 그런 별호가 붙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생활은 지루하고 단조로운 것이었으나, 성락중은 충분히 지낼만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검법을 과거 소림사에서 보았던 형산파 오결검객들의 그것과 비교해 보는 것은 잠들기 전에 그가 늘상 하는 일이었고 그 순간은 다른 무엇보다 행복하고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아마 사부인 전풍개가 종남파가 멸문했다는 소문을 듣고 해남을 박차고 나가지 않았다면 성락중은 언제까지고 그런 일상을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사제인 하동원과 함께 사부의 뒤를 쫓아 강호로 나온 성락중은 두가지 사실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자신의 무공이 당금 무림에서도 능히 통용될 정도로 뛰어나다는것과 아무리 자신의 무공이 뛰어나도 한두 사람만으로는 결코 강호의 문파를 당해 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광동성에서 벌어진 백학문과의 다툼으로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그때 성락중은 백학문의 최고 고수 두 사람을 연이어 격파했으나, 결국은 그들의 추격을 피해 정신없이 도망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개인의 힘은 아무리 강력해도 절대로 집단을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그때 성락중은 뼈저리게 깨달았다.

백학문의 추격을 벗어난 두 사람은 하남성에 와서야 종남파의 부활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그것은 또 다른 놀라움의 시작이었다. 무림은 온통 종남파에서 배출된 희대의 검객에 대한 이야기로 들끓고 있었다. 어느 주루에 가든 사람들의 공통된 화재는 종남파와 새롭게 나타난 검객에 대한 것이었다. 처음 그 소문을 들었을 때 하동원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종남파에 놀라운 솜씨를 지닌 젊은 검객이 나타났다니…아마도 전흠, 그 녀석이 제법 실력을 발휘한 모양이군요.”

하나 이내 소문의 주인공은 전흠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훤칠한 키, 칼자국이 나 있는 얼굴, 그리고 일단 검을 휘두르면 풍운이 변색하고 검기가 구름처럼 일어난다는 검객의 솜씨는 결코 전흠의 그것이 아니었다.

소문은 시간이 갈수록 커져서 나중에는 자신들이 들은 말이 진짜로 존재하는 사람에 대한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가 지어낸 신화와 전설 속의 주인공에 대한 것인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였다.

‘신검무적 일검운해’ 라니….

강호에 검을 찬 검객들이 얼마나 많은데 한 사람의 별호에 무적 이라 이름을 달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대체 일검에 구름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그 사람이 종남파의 장문인이라는 것은 더욱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평생을 종남파의 무공에 헌신해 온 두 사람으로서는 아무리 큰기연을 만나고 절대적인 재질을 가졌다 할지라고 순수한 종남파의 무공으로 그와 같은 경지에 도달할 수는 없다고 나름대로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신검무적이 종남파 고수들을 이끌고 종남산을 벗어나 소림사로 향한다는 소문을 듣자 두 사람은 자신들의 행도를 결정했다. 하동원은 사부인 전풍개를 만나러 종남산으로 가고, 성락중은 그 신비와 전설의 주인공인 신검무적을 직접 보러 소림사로 가기로 한 것이다. 하동원은 자신도 소림사로 가고 싶었으나, 성락중의 굳어진 얼굴을 한번 보는 것만으로 그런 마음을 깨끗이 지워 버렸다.

성락중이 신검무적을 직접 보게 된 것은 그로부터 보름 후의 일이었다. 여남의 청의방에서 그는 신검무적이 단 십 초 만에 청의방주를 완전히 무력화시키는 놀라운 광결을 목격했다. 그때 그가 느꼈던 감흥을 무어라고 해야 할까? 그는 기산취악의 치욕을 설욕하기 위해서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여기에 전혀 다른 방법으로 그 꿈을 실현시킨 사람을 보게 된 것이다. 종남파의 무공으로는 결코 형산파를 능가할 수 없다는 자신과 사부의 판단이 잘못된 것이었다는 생생한 증거를 직접 두 눈으로 보면서 성락중은 가슴 한구석에서 치밀어 오르는 뜨거운 격정을 참기 힘들었다.

사부에게 이 광경을 보여 주고 싶었다. 항상 웃고 있지만 마음속으로는 늘 슬픔을 억누르고 있는 사제에게도 보여 주고 싶었다. 그리고 종남파를 떠나 해남검파의 장문인으로 앉아 있으면서도 종남파의 소식이라면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친우에게도 꼭 보여 주고 싶었다.

‘이게 바로 좀남의 검(劍)이다. 내가 찾고 꿈궈 왔던 검은 바로 이런 것이다!’

성락중은 소리 높여 외치고 싶었다. 종남파가 결코 약한 것이 아니었으며. 형산파는 물론 천하의 어떤 문파와도 능히 자웅을 겨룰 수 있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하나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마음속의 격동을 온몸으로 느끼며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것뿐이었다.

그가 신검무적의 일행에 함류한 건 그로부터 사흘 후의 일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는 생애 처음으로 종남파를 위해서 검을 잡는 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상대는 필시 남궁세가가 내놓을 수 있는 최상의 고수일 것이다. 두렵거나 떨리는 마음은 전혀 없었다. 지난 세월 동안 홀로 갈고 닦은 검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처음으로 내보이는 것에 대한 긴장감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자신에게 이런 기회를 준 젊은 장문인이 고마울 뿐이었다. 성락중은 천천히 눈을 들었다.

그의 앞으로 허름한 마의를 입은 초로의 중년인이 걸어오고 있었다. 나이는 그보다 칠팔 세쯤 많아 보였다. 물 흐르듯 고요한 가운데 한 줄기 날카로운 기세가 느껴졌다. 눈빛만 보아도 상대가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고련(苦練)을 해왔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상대도 그에게서 비슷한 것을 느꼈는지 얼굴에 한 줄기 이채를 띠며 눈도 깜빡이지 않고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비슷한 인상의 두 사람이 나란히 서게 되자 그 기질이 확연히 다름을 알 수 있었다.

성락중은 조용하고 차분한 가운데 장중한 맛을 풍기고 있었다. 반면에 남궁연은 고요함 속에 폭풍 같은 강력함이 느껴졌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본 채 한동안 묵묵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다가 성락중이 먼저 입을 열었다.

“종남의 성락중이오.”

“남궁가의 남궁연.”

짤막한 통성명을 끝으로 두 사람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천천히 세워지는 장검 두 개. 하늘은 청명했고 날씨는 따듯했으나, 바람은 불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너무나 싱거운, 그러나 고수들이 보기에는 너무도 놀라운 싸움이 시작되었다.

<23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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