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3권 무림세가(武林世家)편 : 7화
제 235장 심야방담(深夜放談)
정소소가 온 것은 자정이 되기 한 시진 전이었다. 혼자 자신의 방안에 조용히 앉아 있던 진산월이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방문이 소리 없이 열리며 그녀가 들어섰다. 언제나처럼 그녀는 새하얀 백의를 입고 정갈하면서도 단아한 자세로 걸어 들어왔다. 진산월과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는 별빛같이 영롱하게 반짝이는 눈으로 살짝 고개를 숙였다.
“정식으로 통보하지 않고 불쑥 들어와서 미안해요. 밤이 너무 늦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기 싫었어요.”
“어서 오시오. 정 소저가 지금쯤 올 거라고 생각하고 기다리고 있었소.”
그녀는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기 때문에 자정을 넘기기 전에는 반드시 자신의 앞에 나타나리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경계를 서겠다고 나서는 동중산을 돌려보냈고, 주위 사람들에게도 누군가가 찾아오더라도 놀라지 말라고 사전에 귀띔을 해둔 상태였던 것이다. 심야에 젊은 여자가 외간 남자의 방에 들어온다는 것은 자칫 쓸데없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일이었으나 두 사람 중 어느 누구도 그 점에 대해서는 특별하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것은 그만큼 두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자기 자신에게 당당한 사람이라면 굳이 남들의 시선에 신경 쓸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진산월은 직접 차를 따라서 그녀에게 건네준 후 그녀를 마주보고 탁자에 앉았다. 깊은 밤에 호젓한 방에서 아름다운 미녀와 단둘이 마주하고 있다면 젊은 남자라면 누구라도 가슴이 두근거릴 법도 한데, 그녀를 응시하는 그의 시선은 담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
“갑작스런 부탁을 들어주어 고맙소. 먼 길을 급히 오느라 힘들지 않았소?”
“아니에요. 마침 회남에서 멀지 않은 곽구(藿丘)쪽을 지나고 있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올 수 있었어요.”
진산월도 그들이 대충 그쯤에 있을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그들이 구궁보가 있는 구화산으로 가기 위해서는 곽구를 지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었기 때문이다.
진산월은 한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가 입을 굳게 다문 채 아무 말이 없자 정소소는 그윽한 눈을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정소소가 진산월을 만난 것은 제법 여러 번이었지만, 단둘이 독대를 하는 것은 이번이 세 번째였다. 삼 년 전, 사천에 있는 보광사의 선실에서 그를 보았을 때 그녀는 솔직히 그에게 짙은 연민을 느꼈다. 중원무림을 위해 무언가를 해보려고 열의를 다했던 한 젊은이가 강호의 비정함에 휩쓸려 처참한 몰골로 변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전에 보았던 후덕한 인상의 사람 좋은 젊은이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는 어느새 강호의 무정함을 뼛속까지 깨달아 버린 비정한 무림인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지금도 그때 흉터로 뒤덮인 얼굴을 하고서도 무심한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던 그의 모습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삼 년이 지난 몇 달 전의 어느 날, 비봉 유화화를 죽인 흉수로 짐작되는 오욕백의 행방을 쫓아 종남파로 왔을 때 그녀는 다시 진산월과 독대를 했다. 종남파에 있는 그의 거처에서였다. 짧은 만남이었으나, 그때 그의 모습은 그녀의 마음에 강한 인상을 남겨 주었다. 그는 여전히 담담하고 조용했으나, 그녀는 그에게서 거대한 벽(壁)같은 것을 느꼈다. 무엇으로도 그 벽을 깰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제 또다시 그녀는 그와 마주하게 되었다. 삼 년 전의 풋내기 장문인은 어느덧 강호의 전설이 되어 있었다. 하나 그녀의 뇌리에는 아직도 삼 년 전에 보았던 건장한 체구에 늘 웃음을 매달고 있는 젊은이의 모습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이런저런 상념으로 복잡한 심정이 되어 있을 때, 진산월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몇 가지 긴히 상의드릴 게 있어서 급히 정 소저를 뵙자고 했소.”
“말씀하세요.”
진산월은 정소소의 봉목(鳳目)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정소소는 피하지 않고 그의 시선을 마주보았다.
“남봉 엄 소저에 대해 알고 싶소.”
정소소는 이동정에게 들은 말이 있는지 조금도 놀라지 않고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우선 자세한 내막을 먼저 알고 싶군요.”
진산월은 주저하지 않고 낙일방이 갑작스럽게 모습을 감추었으며, 자신과 동중산이 그의 실종에 관여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몇 사람을 어떻게 예측했는지를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진산월이 정소소에게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밝힌 것은 단순히 그녀를 믿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 같은 여자에게는 복잡한 심기(心機) 싸움보다는 오히려 단순하고 직접적인 대응이 더 나을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녀는 조용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까닭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대로 말해 주어서 고마워요. 오면서 별의별 생각을 했거든요.”
“정 소저를 이곳까지 오시게 한 당연한 도리라고 생각하오. 엄 소저는 단봉공주와 함께 있소?”
진산월의 물음에 정소소는 고개를 저었다.
“공주님의 지시를 받고 다른 곳으로 갔어요.”
“어디로 갔는지 말해 줄 수 있겠소?”
정소소는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칠매(七妹)를 부르러 갔어요.”
“일곱째라면?”
“남들이 혈봉(血鳳)이라고 부르는 곡유유(谷幽幽), 바로 그 아이예요.”
“그녀는 언제 떠났소?”
“육 일 전이에요.”
육 일 전이라면 진산월이 미인루의 중독에서 깨어나 막 몸을 수습하고 있을 때였다. 그리고 낙일방이 실종되기 사흘 전이기도 했다. 참으로 공교로운 시기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언제 돌아올 예정이오?”
“칠매가 있는 곳으로 가서 그녀와 함께 오려면 열흘 정도 시간이 걸릴 거예요.”
“그 전에 그녀에게 소식을 전할 방법은 없소?”
“본 궁에 비합전서구(飛盒傳書鳩)가 있긴는 하지만, 그녀에게 전해진다고 완벽하게 보장할 수는 없어요.”
그것은 진산월도 알고 있었다.
훈련된 비둘기나 매를 이용해 소식을 전하는 것은 일방적인 수단이었다. 즉, 비둘기나 매는 사전에 훈련된 장소로만 날아가기 때문에 받을 사람이 그 장소에 있지 않으면 소식이 전달되지 않을 가능성이 너무 큰 것이다. 게다가 전서구가 날아가는 도중에 천적(天敵)을 만나거나 불의의 사고를 당하는 경우도 비일비재 했다. 거리가 멀수록 그럴 확률은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지게 된다.
“그렇다면 사 일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군.”
정소소는 진산월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진 장문인은 그녀를 의심하는 건가요?”
“나는 그저 엄 소저의 신상에 아무런 변고도 일어나지 않았기만을 바라고 있을 뿐이오.”
진산월의 말 속에는 다른 의미가 담겨져 있었으나 다행이 정소소는 누구보다 영리한 여인이기에 그의 말을 쉽게 이해했다.
“진 장문인은 그녀가 누군가에게 억압당해 이런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는 거로군요.”
“단지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일 뿐이오. 그녀는 이번 일과는 전혀상관이 없고, 일방은 전혀 다른 이유로 모습을 감추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봐야겠지.”
하나 말과는 달리 정소소는 진산월이 전자의 가능성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자신을 이곳까지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정소소는 진산월의 무심한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육매(六妹)외에 의심이 가는 인물이 더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물론 조사를 했소. 일방의 죽마고우인 개방의 위적풍은 현재 개방총타(塚舵)에서 수련중이라고 하오. 또 점창의 사인기는….”
그의 음성은 물처럼 고요해서 겉으로 보아서는 그의 의중을 전혀 짐작조차 할수 없었다.
“이번에 점창파의 장로인 독검취옹 백리장손을 따라 남궁세가로 왔다고 하오. 바로 어제의 일이오.”
“그에게 접촉은 해보셧나요?”
“하지 않았소.”
“왜 그랬죠?”
“일방이 사문의 어른과 동행하는 사인기를 만나려고 했다면 사전에 우리들에게 언급을 했을 것요.”
“사인기가 석가장에서 못다 이룬 승부를 가르자고 연락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요?”
“남궁세가와의 비무를 코앞에 둔 상태에서 일방이 다른 사람과 비무를 하러 나갔을 리는 더더욱 없소. 일방은 이제 경솔하고 덤벙대는 풋내기가 아니오.”
정소소의 뇌리에 일전에 보았던 건장한 체구에 준수한 미남 청년의 얼굴이 떠올랐다. 확실히 그때의 그는 진중하고 냉정한 한 명의 무림인으로 변해 있었다. 짧은 순간에 이들 종남파 고수들의 변화된 모습은 그녀에게도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대체 지난 삼 년 동안 그들의 어떠한 일을 겪은 것일까? 무엇이 그들을 이토록 달라지게 했을까?’
그들이 헤쳐 온 그 험악하고 처절한 아수라장(阿修羅場)을 그녀가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그녀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셈이로군요.”
“아니,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게 되었소.”
“그게 무엇인가요?”
“천봉궁에서는 이번 일에 개입하지 않았다는 것이오.”
정소소는 단번에 그 말 속에 굼은 뜻을 알아차렸다.
“육매 개인은 개입되었을 수도 있다는 말이로군요.”
“그건 어차피 조만간에 판가름 나게 되지 않겠소?”
정소소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으나, 표정은 그다지 밝아지지 않았다. 갑자기 진산월의 의심이 터무니없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물론 그녀는 엄쌍쌍에게는 절대적인 신심(信心)이 있었다. 하나 그녀가 곡유유를 만나러 갔다가 뜻밖의 변고를 당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그녀를 해친 흉수가 그 증거를 낙일방에게 보낸 것이라면? 낙일방이 그녀를 구하기 위해서 단신으로 뛰쳐나오는 것도 예상 가능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보다 더욱 불길한 예측은 억지로라도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다행히 그때 진산월의 음성이 들려왔다.
“정 소저에게 한 가지 청(請)이 있소.”
정소소의 봉목이 어느 때보다 영롱하게 반짝였다. 청이라니? 그와 같은 남자도 여자에게 부탁을 할 때가 있단 말인가?
“진 장문인이 그런 말씀을 하시니 겁부터 나는군요.”
“정 소저에게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닐 거요. 내일 본 파는 남궁세가와 비무를 벌이기로 했소.”
“알고 있어요.”
“그 비무에 양측에서 서로 세 명의 참관인을 두기로 했는데, 본 파는 아직 두 명의 친관인 밖에 구하지 못했소.”
정소소의 가슴에 그녀도 알 수 없는 묘한 실망감 같은 것이 스치고 지나갔다. 하나 정소소는 전혀 내색하지 않고 오히려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보고 종남파의 참관인이 되어 달라는 것인가요?”
“그렇소.”
“기꺼이 승낙하겠어요. 신검무적의 솜씨를 눈앞에서 볼 수 있다니 저로서도 놓칠 수 없는 기회군요.”
진산월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내일의 비무에 나는 나서지 않을 거요.”
정소소는 흠칫 놀랐으나 이내 그의 오른손을 쳐다보고는 사정을 이해했다.
“이동정에게 들었어요. 오른손의 상처가 아직 낫지 않았다고 하던데 그것 때문인가요?”
“그것도 있고, 이번 기회에 본 파의 역량을 강호인들에게 똑똑히 보여 줄 생각이오.”
“진 장문인을 제외하고 다른 사람들만으로도 남궁세가와의 비무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말인가요?”
“나는 그렇게 믿고 있소.”
참으로 담담한 음성이었으나 그 말을 듣는 순간 정소소는 가슴 한구석에서 울컥하는 감정이 솟구쳐 올랐다.
본산도 잃고 강호의 밑바닥까지 떨어졌던 종남파는 어느새 전혀다른 문파가 되어 있었다.
강호제일의 검객이라는 신검무적과 젊은층 중에서 단연 최고의 권법을 지녔다고 평가받는 옥면신권이 없는 상황에서도 명문 중의 명문인 남궁세가와의 비무에서 승리를 장담할수 있을 정도로 엄청나게 성장해 버린 것이다.
그녀는 종남파가 얼마나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는지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에 그만큼 지금의 변모된 모습에 실로 다양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으로는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내일의 비무는 어떤 방식으로 하기로 했나요?”
“소년과 청년, 중년층으로 나누어 각기 한 사람씩 겨루기로 했소.”
그녀는 언뜻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종남파에 소년 고수가 있던가요?”
“내 제자인 유소응이란 아이를 내보낼 생각이오.”
그녀의 고운 이마가 살짝 찌푸려졌다.
“그 아이로 남궁세가의 기재를 당해 낼 수 있겠어요?”
“그거야 겨루어 보면 알게 되겠지.”
그녀는 곰곰이 생각에 잠기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청년층에서는 낙 소협이 없으니 전 소협이 나올 테고, 중년층은 비천호리를 내보낼 생각인가요?”
“마침 일행 중에 사숙 한 분이 계시오.”
예상치 못했던 말에 정소소는 살짝 눈을 치켜떴다. 아름다운 눈빛이었다.
“사숙이라면 서안의 실력자라는 철면호 말인가요?”
“노 사숙은 서안에 계시고, 다른 분이 나오실거요.”
그녀는 종남파에 선대 고수가 거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순간적으로 의아한 생각이 들었으나 곧 그의 말에 수긍을 했다. 종남파가 화려하게 재건되었으니 떠나갔던 문파의 선배 고수들이 몇 사람 돌아왔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는 다른 점을 걱정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번 비무 방식은 종남파에 너무 불리한 조건인 것 같군요. 진 장문인이라면 더 좋은 방식을 선택할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그런 방식을 받아들인 건지 모르겠군요.”
진산월의 대답은 그녀의 예상을 벗어난 것이었다.
“나는 오히려 그 방식이 우리에게 이롭다고 생각하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종남파에는 나올 수 있는 사람이 한정되었지만, 남궁세가에서는 얼마든지 상대에 맞춰 고수를 선별할 수 있으니 훨씬 더 이로운 상황이 아닌가요?”
“어차피 방식과 상관없이 이번 비무에서 본 파가 내보낼 수 있는 사람은 정해져 있소. 그러니 우리로서는 범위를 최대한 축소시켜 상대의 선택을 좁게 할 필요가 있었소.”
진산월과 낙일방이 빠진 이상 종남파에서 비무에 나설 수 있는 사람은 전흠과 동중산은 무공이 떨어져서 승산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진산월은 과감하게 동중산을 배제하고 유소응을 선택한 것이다. 유소응은 비록 나이가 어리고 무공에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천부적인 재질과 꾸준한 노력으로 상당한 성취를 이루고 있는 상태였다. 하나 아무리 그래도 어려서부터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남궁세가의 고수들에 비할 수 없었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진산월은 남궁세가와 비무 방식을 협의하러 가는 동중산에게 비무 상대를 최대한 좁게 나누라는 지시를 한 것이다. 동중산은 남중한상과의 회담에서 자신들이 이번에 출전할 수 있는 사람은 장문인의 어린 제자와 장문인의 젊은 사제, 그리고 중년의 선배 고수뿐이라고 밝혔다. 남궁한상은 그의 예측대로 그들의 사정을 들어주는 척하며 소년과 청년, 중년층으로 나누어 비무를 하자고 제안을 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진산월이 가장 바라는 방식의 비무였다. 신검무적이 있는 한 남궁세가에서 연승식의 비무를 승락할 리 없는 상황에서 종남파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던 것이다.
양 파에서 각기 세 명씩의 고수들이 나이와 상관없이 출진한다면 종남파는 무조건 일패(一敗)를 안고 시작하는 셈이었다. 전흠과 성락중 외에는 어느 누구도 승리할 가능성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전흠 또한 비록 영약을 복용하여 내공이 일취월장하고 있다고 해도 아직 영약의 기운을 완벽하게 소화하지 못했을뿐더러 강호의 절정고수들과 상대하기에는 미흡한 구석이 있었다. 하나 나이별로 비무를 하게 되면 사정은 판이하게 달라진다. 전흠이라면 젊은 층에서 어느 누구와도 충분히 싸워 볼 만한 실력을 지니고 있으며, 치열한 승부의 경험은 그 나이 대의 누구보다도 많을 것이다. 유소응 또한 통상적인 비무의 상대와는 싸움 자체가 되지 않겠지만, 비슷한 또래의 소년이라면 승부를 걸어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사숙인 성락중에 대해서는 진산월은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 처음 본 순간부터 진산월은 성락중이 자신의 당초 예상보다 훨씬 뛰어난 검도의 고수임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실력은 오히려 사부인 전풍개보다 우월해 보였으며, 며칠간 지켜본 바로는 성격 또한 침착하고 냉정해서 일대 고수로서의 풍모가 여실히 느껴졌다. 자신이 나설 수 없는 상태에서 진산월은 종남파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을 찾았으며, 상대로 하여금 스스로 그 방식을 선택하게 만들었다. 이제 그의 생각이 옳은지 그른지는 내일 판가름이 날 것이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진산월은 그녀를 불러야 했던 두 가지 안건을 마무리 지었다. 이제 한 가지 일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통상적으로 마지막 일은 가장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것이었다. 정소소 또한 진산월의 태도에서 무언가를 느낀 듯 표정이 진지해졌다.
공교롭게도 지난 두 번의 독대에서 그녀와 그의 대화는 대부분이 그의 사매인 임영옥에 관한 것이었다. 이번에도 그녀는 임영옥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진산월이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자신에게 꺼내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도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진 장문인의 사매는 잘 있어요.”
막상 그녀의 입에서 사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진산월은 봇물처럼 솟구치는 감정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그토록 노력했고, 그토록 염원했건만 이번에도 그는 그녀를 데려오지 못했다. 세상의 어떤 것이라도 자신을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자신했었는데, 지척에서 또다시 그녀를 놓치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누구보다 마음이 강한 사람이었지만, 순간적으로 눈빛이 흐려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한동안 그는 말없이 침묵을 지켰다. 정소소도 지금은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잠시 후 입을 열었을 때, 진산월의 음성은 평상시의 담담함을 회복한 상태였다.
“그녀는 어떻소?”
너무나 막연한 질문이었으나 정소소는 진산월이 가장 궁금해하는 답변을 해주었다.
“다친 곳 없이 무사해요. 다만 그녀는 진 장문인을 걱정하고 있을뿐이에요.”
진산월은 잠시 침음하다가 다시 물었다.
“정 소저가 나를 만나러 오겠다고 했을 때 그녀가 내게 전해 달라는 말은 없었소?”
“그녀는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했어요.”
때라……그녀는 무슨 때를 말하는 것일까? 지금은 아직 두 사람이 만날 때가 아니라는 뜻일까? 아니면 자신이 종남파로 돌아갈 때가 아니라는 의미일까?
진산월로서는 재차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말은?”
“그녀는 그 말밖에는 하지 않았어요.”
진산월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 전부터 묻고 싶었던 질문을 던졌다.
“그녀는 자유롭소?”
정소소의 봉목이 그의 두 눈에 고정되었다. 그녀는 그렇게 묻는 그의 의도를 알고 싶은지 한참이나 그를 바라보고 있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육체적인 자유를 말하는 것이라면 지금 그녀는 충분히 자유로워요. 그리고 정신적인 자유를 말하는 것이라면 …..무어라고 대답하기 힘들군요.”
“정 소저의 의견을 듣고 싶소.”
진산월이 거듭 물었으나 정소소는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답할 수 없는 사항이에요.”
진산월도 더 이상은 그 점에 대해 캐묻지 않았다. 굳이 묻지 않아도 대답을 들은 셈이었다.
대신 그는 전혀 다른 것을 물었다.
“구궁보는 어떤 곳이오?”
진산월이 화제를 돌리자 그녀는 안도하는 표정이 되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는 이내 붉은 입술을 살짝 열었다.
“구궁보는 아름다운 곳이에요. 도처에 화원(花園)이 있고, 가암괴석과 작은 가산(假山)이 산재해 있어서 인세(人世)의 선경(仙鏡)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에요.”
진산월은 묵묵히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구궁보는 조용한 곳이기도 해요. 그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의 숫자는 무림인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적고, 머물러 있는 식객들을 포함해도 백 명도 되지 않아요. 더구나 구궁보의 백 리 안에서는 누구도 싸움을 하거나 소란을 피우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가끔은 깊은 산속에 있는 고찰(古刹)에 있는 듯한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
“또 구궁보는 무서운 곳이에요. 사방이 온통 절진(絶陣)으로 뒤덮여 있고, 곳곳에 기관장치가 되어 있어서 허락을 받지 않고는 누구도 그 안에서 단 한 걸음도 움직일 수가 없어요. 그것이 내가 본 구궁보에요.”
“실상은 다를 수도 있다는 말처럼 들리는구려.”
그녀는 모처럼 빙긋 미소 지었다. 보는 사람의 가슴이 두근거릴 만큼 매력적인 모습이었다.
“나는 구궁보의 사람이 아니니 그 안의 자세한 내막은 알 수가 없지요. 아무튼 내가 보았던 주인은 모용 대협이지만 그분은 오랫동안 심처(深處) 칩거한 채 좀처럼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모용 공자가 구궁보의 대소사(大小事)를 처리한다고 하는데 그게 사실이오?”
그녀는 부인하지 않았다.
“내가 구궁보에 간 것은 열 번쯤 되는데, 그동안 한 번도 모용 대협의 모습을 뵌 적이 없어요. 확실히 상당히 오래전부터 모용 공자가 구궁보를 이끌고 있다고 봐야겠지요.”
“또 듣자 하니 모용 공자에게는 몇 명의 친구와 수족같이 부리는 수하들이 있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당대에 보기 드문 절세의 기재들이거나 재녀들이라고 했소. 그들에 대해 말해 줄 수 있겠소?”
그녀는 진산월이 모용 공자에 대해 묻는 것에 별다른 의문을 품지 않았다. 누구라도 자신의 연적(戀敵)에 대해서는 보다 자세한 것을 알고 싶어 할 테니 말이다.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소상하게 설명해 주었다.
“모용 공자의 친우들은 두 부류가 있어요. 한 부류는 말 그대로 그의 절친한 벗들로, 사람들은 그들을 해천사우라고 부르지요.”
해천사우에 대해서는 진산월도 익히 알고 있었다. 일전에 만났던 절정수사 군유현을 비롯해서 정검 부옥풍, 분광검객 고심홍, 강남절품도 담중호가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개개인이 강호무림인을 진동시키는 절세의 고수들일 뿐 아니라, 인물됨이 수려하고 기개가 뛰어나서 누구나가 사귀고 싶어 하는 당대의 인재들이었다. 진산월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그전부터 궁금했는데, 강호삼정랑 중 유일하게 다정군자 남궁선만이 해천사우에 포함되지 않은 이유가 특별히 있소? 내가 듣기로는 강호삼정랑은 모두 구궁보에서 식객으로 머물면서 모용 공자와 절친해진 사이라고 하던데. 유독 남궁선만이 다른 자들과 별개의 취급을 받는 것 같으니 이상한 생각이 드는 구려.”
“남궁선이 구궁보의 식객으로 있었던 것은 사실이에요. 그곳에서 그는 강호삼정랑이라는 명성을 얻었지요. 하지만 그는 모용 공자의친구가 되지 못했어요. 아니 되지 않았다고 해야 옳겠군요. 그는 스스로 모용 공자와 일정 수준의 거리를 두었으니까요.”
“왜 그런거요?”
“자세한 사정은 나도 모릅니다. 다만 그와 모용 공자 사이에는 무언가 치열한 경쟁심 같은 것이 있는 것 같더군요.”
“흠. 모용 공자의 친우가 두 부류라고 했는데, 다른 한 부류는 누구요?”
“그들은 모용 공자를 추종하는 무리들이에요. 친구라고 하기에는 스스로 자신의 처지를 낮추고 있고, 그렇다고 수하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명성이 높은 자들이지요. 대표적인 인물들이 바로 경천사객(驚天四客)이에요.”
경천사객 또한 그 면면을 보면 해천사우에 못지않은 고수들이었다. 강동(江東)의 호랑이라고 하는 벽력선풍(霹靂旋風) 우진한(宇진漢)과 무이산(武夷山)의 패자(覇者)인 낙혼진군(落魂眞君) 하홍(賀紅). 강호십대법대가 중의 한 명인 섬전추혼(閃電追魂) 과일거(戈一居) 그리고 악양(岳陽) 제일의 고수로 오랫동안 명성을 떨쳐 온 성혼신창(星魂神槍) 탕해(湯海) 가 바로 그들이었다.
“네 명의 벗[四友]들과 네 명의 손님[四客] 들이라…. 모용 공자는 사람들을 구분 짓기를 좋아하는 모양이구려.”
진산월의 말에 그녀는 살짝 미소 지었다.
“모용 공자가 아니라 주변인들이 그런 편이지요. 해천사우와 경천사객이라는 외호는 그들이 붙여 준 외호이니 말이에요.”
“아랫사람들은 원래 주인의 취향을 따르는 법이오. 주인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을 테니 말이오.”
정소소는 굳이 그런 문제로 그와 다투고 싶지 않은지 순순히 수긍을 했다.
“그런 것도 같군요.”
“모용 공자의 수하들은 어떤 사람들이 있소?”
“네 명의 여자와 네 명의 남자예요. 여자들은 각기 비매(飛梅), 취란(醉蘭), 소국(笑菊), 한죽(寒竹)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구궁보에서는 그녀들을 사대신녀라고 부르고 있어요.”
“신녀라….. 일개 시비들에게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 이름 같구려.”
“그만큼 그녀들의 재주가 뛰어나고 범상치 않다는 의미겠지요. 실제로 그녀들에 대한 모용 공자의 신임도 각별하여 누구도 감히 그녀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못한다고 하더군요. 네 명의 남자들은 두 쌍의 쌍둥이예요.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을 쌍포사절(雙胞四絶)이라고 불러요.”
쌍둥이라는 말에 진산월은 문득 과거에 모용 공자를 만나러 갔을 때 보았던 쌍둥이 중년인들을 떠올렸다. 그때 그들에게서 받았던 인상이 상당히 강렬했기에 한동안 그들의 모습을 뇌리에서 지우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진산월은 잠시 침음하다가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남궁세가에서 내세우는 세 명의 참관인들 중에 비매라는 여인이 있다는 말을 들은 것 같소.”
그 말에 정소소는 뜻밖이라는 듯 아름다운 눈을 크게 떴다.
“그게 정말인가요?”
“위적풍의 행적을 묻기 위해 회남에 있는 개방 분타에 들렀을 때 그곳 분타주에게서 들었소. 다소 특이한 이름이라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소.”
정소소는 웬일인지 표정이 무거워졌다.
“사대신녀는 워낙 구궁보 밖으로 나가는 일이 별로 없기 때문에 강호무림에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실은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실력을 지닌 무공의 고수들이에요. 모용 공자가 괜히 그녀들을 자신의 수족같이 아끼고 있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내가 듣지 못했던 모양이오.”
“모용 공자가 그녀를 남궁세가에 보냈다니 정말 모를 일이군요.”
진산월은 그녀가 비매에 대해 유난히 신경을 기울이는 것 같자 호기심이 동해 물었다.
“그녀가 남궁세가에 온 것이 정 소저가 놀랄 정도로 큰일이오?”
“엄밀히 말하면 그녀들은 단순한 시비가 아니라 모용 공자의 여인들이나 마찬가지예요. 그녀들의 신분 또한 내로라하는 가문의 출신들이며, 미모나 지혜, 행실 등 단 한곳도 흠집을 잡기 힘든 일대기녀(一大奇女)들이에요.”
“그런 여인들이 왜 모용 공자의 시비로 있단 말이오?”
그녀의 얼굴에 씁쓸한 웃음이 감돌았다.
“원래 그녀들은 모용 공자의 배우자가 되기 위해 구궁보에 온 여인들이었어요. 하나 모용 공자는 그녀들 중 누구도 선택하지 않았지요. 결국 그녀들은 모용 공자를 포기하고 구궁보를 떠나든지,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구궁보에 남든지 하는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그녀들은 귀한 신분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신분을 낮추어 모용 공자의 시비로 들어갔단 말이오?”
“대충 비슷해요. 얼마나 많은 여인들이 모용 공자의 부인이 되기 위해 구궁보로 왔었는지 진 장문인은 짐작도 못할 거예요. 그녀들 중 대부분은 포기하고 돌아갔지만, 네 사람만은 끝까지 남아서 모용 공자의 주위를 맴돌고 있는 거예요. 사람들이 그녀들을 사대시비가 아니라 사대신녀라고 부르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랍니다.”
진산월은 여난(女難)에 파묻혀 있는 모용 공자의 신세를 부러워해야 할지 조롱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천하의 미녀들이 그의 배필이 되기 위해 구궁보로 모여들고, 결국 끝까지 남아 있는 네 명의 여인들만이 그의 곁에 머무를 수 있게 된 것이다. 신녀라고 했지만 그녀들의 신분은 어디까지나 시비에 불과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의 곁에 머무르려고 했던 그녀들의 심정을 진산월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추측할 수도 없었다.
“비매는 어떤 여인이오?”
“그녀는 암기의 고수예요. 바로 천수관음의 넷째 제자지요.”
천수관음이라면 백 년 내 강호에서 가장 뛰어난 여고수로 평가받고 있는 절세의 고수였다. 천수관음의 이름을 듣자 진산월은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그에게는 잊을 수 없는 사건에 관계된 여인이었다.
“천수관음의 제자라면 예전에 소호리 육난음이라는 여자를 만난 적이 있소.”
“비매 냉옥환(冷玉環)은 육난음의 사매예요.”
진산월은 절로 탄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당한 천수관음의 제자가 남의 시비가 되었다니…… 그녀의 사부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지 모르겠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는데. 정소소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당연히 알고 있을 거예요. 그녀를 구궁보에 보낸 사람이 바로 그녀의 사부였으니까요.”
진산월은 정말로 이해가 되지 않아서 물었다.
“천수관음 같은 강호의 기인이 자신의 제자가 남의 시비가 되는 것을 알면서도 방관하고 있었단 말이오?”
“원래 모용 공자에게 거절당하자 비매는 돌아가려고 했어요. 그녀는 자존심이 누구보다도 강해서 결코 남에게 사정하는 성격이 아니에요.”
“그런데도 결국 모용 공자의 시비가 된 것이 모두 그녀의 사부의 지시였단 말이오?”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리 모용 공자라고 해도 그녀를 시비로 거느리지 못했을 거예요.”
진산월은 한편으로 어이가 없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궁금증이 치솟았다.
“대체 천수관음은 무엇 때문에 자신의 아끼는 제자를 다른 남자에게 시비로 주었단 말이오?”
“그 안에는 곡절이 있어요. 젊었을 때 천수관음은 강호를 행도하다가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어요. 그녀는 기녀 중의 기녀였지만, 그 사람 또한 당대 제일가는 기재라서 그녀는 머지않아 그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어요.”
…..!
“하나 그 사람은 그녀의 구애를 뿌리치고 홀연히 떠나 버렸어요. 그녀는 그 일로 커다란 충격을 받고 평생 혼인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냈으며, 두 번 다시는 남자를 가까이하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듣자 진산월은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렇다면 그 남자는 혹시….?”
“그래요 그 사람이 바로 모용 대협이에요. 그녀는 자신의 제자라도 자신을 대신해 모용가의 여인이 되기를 바랐던 거예요.”
“그것은 너무 비참한 이야기요.”
“그녀의 생각은 다를 거예요. 여인의 집념은 다른 무엇보다 끈질기고 무서운 것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진산월로서도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남들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다른 무엇보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기 마련인 것이다.
진산월은 잠시 침음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일전에 쾌의당 화중용왕을 만난 적이 있소.”
“화중용왕의 정체는 소수마후예요.”
그러리라고 짐작했소. 그때 그녀의 암기술은 나로서도 상상치 못했던 가공스러운 것이었소.”
당시의 생각을 하자 진산월은 절로 마음이 무거워졌다. 아무리 양천해와의 치열한 사투를 벌인 직후였다고 하지만 상대의 안습에 당할 때까지도 암습이 있었는지조차 몰랐다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진산월로서는 쾌검에 이은 또 하나의 숙제를 안은 셈이었다.
“소수마후의 암기술이 그 정도일진대, 백 년 내 제일이라는 천수관음의 암기술이 어떠한지는 짐작조차 가지 않는구려.”
정소소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더니 조용한 음성을 내뱉었다.
“일전에 노총관(老總官)에게서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노총관이라면 천봉궁의 나이를 알 수 없는 괴물인 차복승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차복승은 강호의 누구보다 오래 산 사람이니 필시 강호에 대한 지식도 다른 누구보다 해박할 것이 분명했다.
“그때 노총관께서는 두 사람을 비교해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암기는 천수관음이 더 낫고, 수공은 소수마후가 더 뛰어나다. 하나 천수관음은 소수마후의 독심(毒心)을 당해 내지 못하고, 소수마후는 천수관음의 심계(心計)를 두려워한다. 두 사람이야말로 필생의 호적수(好敵手)들이라 할 것이다’ 라고 말이지요.”
원래 암기의 고수들은 필연적으로 수공(手功)을 함께 연마한다. 수공이 뛰어날수록 암기를 발출하는 수법 또한 상승되는 것이다. 게다가 암기의 자유로운 수발(收潑)을 위해서도 수공은 반드시 필요했다. 그래서 암기의 고수들은 대개 수공의 고수들이기도 했다. 그런데 두 여고수는 각기 암기와 수공에서 적수를 보기 힘들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으니 가히 호적수라는 말이 더할 나위 없이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진산월은 천수관음의 암기술이 소수마후보다 뛰어나다는 말이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소수마후의 암기에도 꼼짝 못하고 당했는데, 그보다 뛰어난 경지라면 대체 어떤 수준일지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을 수밖에 없었다. 진산월로서는 어떤 식으로든 암기의 고수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강호에서 천수관음보다 뛰어난 암기의 고수가 또 있소?”
정소소는 짤막한 말로 답변을 대신했다.
“천수관음은 아직 무림구봉에 오르지는 못했어요.”
그제야 진산월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이름 하나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렇군. 천수나타(天手나咤) 당각(唐角)이 있었군.’
천수나타 당각은 무림구봉 중 암기의 최고수였다. 사람들은 그를 수봉(手峯)이라고도 불렀고, 암봉(暗峯)이라고도 불렀다. 당각은 사천당문이 배출한 사상 최고의 고수로, 불과 약관의 나이에 강호에 출도한 이후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불패(不敗)의 전설은 어쩌면 그에게는 너무도 단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암기 무공의 특성상 상대를 쓰러뜨리지 않으면 자신이 상대의 손에 쓰러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가 무림구봉 중의 하나로 꼽히고 지금까지 생존해 있는 것은 다시 말하면 그가 지금까지 싸워 온 모든 싸움에서 승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이를 먹은 후 그는 당문의 깊숙한 곳에 머무르며 좀처럼 강호에는 나타나지 않았으나, 아직도 많은 무림인들은 그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목숨이 하나가 사라졌던 무시무시한 광경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제가 듣기로는 천수관음과 천수나타는 한때 의남매를 맺을 만큼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다고 해요. 두 사람 별로에 모두 천수(千手)라는 단어가 들어간 것도 그런 이유였어요.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두 사람 사이가 소원해지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서로 연락도 하지 않고 얼굴도 보지 않는 타인처럼 변했다고 하더군요.”
진산월은 두 사람의 교분 관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단지 소수마후를 뛰어넘는다는 천수관음의 암기술과 그녀를 능가할 것이 분명한 천수나타 당각의 솜씨만이 신경 쓰일 뿐이었다. 진산월은 마음속으로 깊은 탄식을 토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강호는 끝없이 넓고 깊은 바다와 같아서 안으로 들어갈수록 더욱 짙은 어둠 속을 헤매게 된다고 하던데 오늘에야 그 말뜻을 알겠구나. 앞으로 내가 넘어야 할 산과 건너야 할 강은 또 얼마나 광활하게 이어져 있을까?’
진산월은 자신이 가야 할 길이 정말 멀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절감했다. 진산월의 얼굴이 침울하게 굳어져 있는 모습을 정소소는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지금 그가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그녀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암기는 강호에서 종종 괄시받기도 하지만, 사실은 가장 실용적이고 효과적인 살인병기였다. 그 크기가 작아질수록 위력은 오히려 높아지고, 속도가 빠를수록 방비하기는 점점 더 힘들어진다. 그리고 그 수준이 어느 단계 이상을 지나게 되면 검도나 무도(武道)처럼 하나의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 거론된 세 사람의 암기 고수는 모두 자신만의 독보적인 영역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었다.
검을 익히는 사람에게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운 자는 다름 아닌 암기의 고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정 거리에 떨어져서 암기를 던져대는 자를 상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그 암기의 고수가 가히 절세적인 실력을 지니고 있다면 검을 익힌 검객들에게는 실로 악몽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천봉팔선자 중에도 검을 익힌 여인과, 암기술을 익힌 여인이 있었다. 전자의 대표는 혈봉 곡유유이고, 후자의 대표는 취봉 두청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두 사람 사이가 천봉팔선자 중에는 가장 안 좋은 편이었다. 곡유유는 어려서부터 주위 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자라서인지 성정이 오만하고 남을 무시하는 습성이 있으나 그 무공만큼은 단연 천봉팔선자 중의 제일일 뿐 아니라 천봉궁 내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였다. 두청청은 암기의 고수답게 냉정한 성격에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과묵한 여인이었다. 그녀의 수리검을 날리는 솜씨는 누구나가 인정하는 독보적인 것이었으나, 사람들의 평가는 곡유유를 그녀의 위에 놓고 있었다. 그녀가 그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는지는 정소소도 알지 못했다. 다만 그녀는 두 사람 사이가 좀 더 원만해지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시각은 자정을 훌쩍 넘어 있었다. 정소소는 아직도 깊은 상념에 잠겨 있는 진산월을 향해 무어라고 입을 열려다 포기해 버렸다.
대신 입을 굳게 다문 채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그의 얼굴을 한동안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의미 모를 한숨을 내쉬고는 왔을때처럼 소리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텅 빈 방안에는 그녀의 독특한 체향만이 아련히 머물고 있을 뿐이었다.
* * *
노해광이 종남파의 산문에 들어선 것은 짙은 어둠이 사위에 깔려 있는 초경(初梗) 무렵이었다. 야심한 시각에 종남산을 오르는 것은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노해광은 훤한 대낫에 길을 가는 사람처럼 여우로운 동작으로 몇 개의 산등성이를 넘어 종남파의 산물을 지나갔다. 한데 그가 막 산물을 지나치려 할 때였다. 그의 두 눈에 갑자기 날카로운 섬광이 번뜩이더니 그의 신형이 한곳을 향해 쏘아져 갔다. 단숨에 오 장을 날아간 그는 산문에서 멀지 않은 커다란 나무 위로 몸을 끌어올렸다. 하나 이내 다시 나무 아래로 내려온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새 내 귀가 잘못된 건가? 분명 사람 숨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노해광은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별다른 이상한 점을 찾지 못하고 다시 산문을 향해 몸을 돌렸다. 하나 산물을 지나치는 그의 얼굴에는 조금 전과는 다른 냉기가 흐르고 있었다. 산문을 들어간 그는 곧장 소지산의 처소로 향했다. 사숙인 전풍개에게 인사를 하기에는 너무 밤이 깊었기 때문이다. 소지산은 그때까지도 자지 않고 무공을 수련하고 있다가 반갑게 그를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사숙.”
노해광은 소지산의 얼굴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는 것을 보고는 혀를 내둘렀다.
“너도 참 대단하구나. 하나 지나치면 오히려 모자람만 못한 법이다. 자칫 과욕을 부려 몸이 상하는 일이 없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얼핏 보기에도 네 검술이 또 다른 경지에 올라서는 것 같구나. 낙하구구검의 조예가 어느 정도나 되는냐?”
“이제 겨우 팔 성을 넘어선 것에 불과합니다.”
소지산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으나 노해광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이 연습벌레 같은 놈. 낙하구구검을 익히기 시작한 지가 불과 몇 달 되지 않은 걸로 알고 있는데 벌써 그 정도일 줄이야….. 이거 자칫하다가는 사질에게도 뒤처지는 별 볼일 없는 사숙이 되고 말겠군.’
노해광은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고 대견하다는 듯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그러다 돌연 정색을 하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오늘 오면서 보니 산문 근처에서 본 파를 주시하고 있는 자들이 있는 것 같다. 너도 알고 있느냐?”
소지산은 놀라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부터 수상한 인기척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상대의 정체는 파악했느냐?”
“죄송합니다. 원낙 은밀히 움직이는지라 몇 차례 뒤를 쫓으려 했지만 실패라고 말았습니다.”
“나도 한번 시도했다가 헛수고를 했으니 네 잘못만은 아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솜씨가 보통은 넘는 것 같으니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참 얼마 전에 하동원이 돌아왔다며?”
“하 사숙을 아십니까?”
노해광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내걸렸다.
“알다 뿐이냐? 그 녀석은 예전부터 내 장난감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코빼기도 안 보이길래 해남에 뼈를 묻은 줄 알았더니 결국 뒤늦게 나타났구나.”
“하 사숙을 모시고 올까요?”
“아니다. 그 녀석과의 회포는 나중에 풀면 되는 일이다. 오늘은 너를 보러 왔다.”
“하교해 주십시오.”
“하교는 무슨. 오늘은 너에게 사과를 할 일이 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노해광의 얼굴에 평소의 그답지 않은 씁쓸한 빛이 감돌았다.
“이번에 내가 유화상단과 일을 벌인 것은 알고 있겠지?”
“예, 며칠 전에 정해가 직접 와서 자세한 사정을 이야기하고 돌아 갔습니다.”
“그 일이 잘 마무리된 줄 알았는데, 일이 이상하게 꼬여 버렸다.”
소지산은 그의 일이 꼬인 것과 자신에게 사과를 하는 일이 무슨 관련이 있는지 잠시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의 의문을 풀어 주기라도 하려는 듯 노해광은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내 예상으로는 그쯤 되면 유화상단에서 손을 들고 항복해 올 줄 알았다. 그랬다면 못이기는 척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적당한 선에서 양보를 받는 정도로 그치려 했다. 무엇보다 그들은 장문인의 제자인 소응의 친가(친가)이니 아주 망하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거지. 그런데 며칠
말미를 준 사이에 그들이 엉뚱한 곳에 도움을 청했다.”
이제는 소지산도 노해광이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좀처럼 표정이 변하지 않는 그의 안색에도 한 줄기 어두운 빛이 떠올랐다. 서안 일대에서 종남파를 배경으로 둔 노해광에게 정면으로 맞설 수 있는 문파는 오직 한 곳뿐이었다.
노해광은 그의 마음을 짐작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무거운 음성을 내뱉었다.
“그들이 화산파를 불러들였다. 내 불찰로 본 파에게 최악의 상황이 닥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