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3권 무림세가(武林世家)편 : 9화
제 237장 낙입함정(落入陷穽)
“죄송합니다.”
남궁탄은 고개를 숙이는 남궁기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차라리 화를 내거나 실망감을 표했으면 남궁기도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 자신을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하는 남궁탄의 무표정한 모습에 남궁기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몸을 돌려 그 자리를 떠나고 말았다. 돌아서는 그를 막거나 제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지 남궁경을 비롯한 몇몇 사람만이 안타까운 눈으로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남궁탄의 시선은 남궁선에게 고정되었다. 남궁선은 남궁기가 비무대에서 내려올 때부터 점차로 얼굴에 표정이 없어지더니 종내에는 석상이 된 듯 무심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남궁탄은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주시하며 한 자 분명한 음성으로 말했다.
“네가 패하면 본 가의 수백 년 영화(榮華)도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만다.”
남궁선은 그의 말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그래도 남궁탄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씹어뱉듯 한 음성으로 말했다.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 따위는 하지 마라. 너는 무조건 이겨야 한다. 어떠한 방법을 써서라도 반드시 이기고 돌아와라.”
남궁선은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때 참관인석에서 작은 소란이 일어나더니 이동정이 헛기침을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험, 종남파 장문인께서 조금 전의 비무에 대해 의견을 내셨소. 비록 남궁기 소협이 자신의 입으로 공언한 것을 어겼다고 하지만 명백하게 승부가 판가름 난 만큼 무조건 종남파의 승리라고 할 수는 없다는 말씀이셨소.”
그 말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이동정에게로 향했다. 이동정은 한차례 참관인석을 둘러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양 파의 참관인들끼리 상의를 한 끝에 이번 비무는 무승부로 하기로 결정했소. 이점을 강호의 동도(同道)들께서 양해해 주시기 바라오.”
그 말에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남궁세가의 사람들은 모두 반색을 하며 기쁜 기색이 역력한 반면에 일부의 사람들은 가문의 이름을 걸고 나온 비무에서 스스로 말을 내뱉었으면 무조건 지켜야 한다고 불만을 표하기도 했다. 하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런 결정에 수긍하는 빛을 보였다.
이번 비무는 단순히 양 파의 친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서로 간의 명예와 자존심을 내건 결전이었다. 그러니 보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결과가 되어야만 했다.
유소응의 무공은 확실히 남궁기에 미치지 못했고, 승패는 누가 보아도 분명한 것이었다. 단지 남궁기가 입 밖으로 내뱉은 말 때문에 명백한 승패가 뒤집혀진다면 그것은 그다지 공정한 일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한 자루 검에 의지하여 강호를 행도하는 무림인들이라면 더욱 그렇게 느낄 것이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환성을 내지르며 그 결정에 승복하겠다는 표시를 했다. 종남파 고수들만이 담담한 얼굴로 있을 뿐, 장내는 흥분된 사람들의 고함 소리로 더욱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런 주위의 소란을 들으면서 남궁선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궁탄은 여전히 아들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힘주어 말했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네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승자(勝者)로 돌아오는 것뿐이다.”
남궁탄의 음성이 너무나 엄숙하고 단호해서 듣는 사람 모두 그의 말속에 담긴 비장함을 느낄 수 있었다. 남궁선은 어떠한 의사 표현도 하지 않고 무심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남궁탄은 그의 뒷등을 향해 다시 무어라고 입을 열려다 다물어 버렸다. 더 이상의 말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남궁선이 비무대로 올라갔을 때 전흠은 이미 비무대의 중앙에 선채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상대가 신검무적이 아님을 알게 되자 남궁선은 아쉬움과 안도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아쉬움은 모용 공자의 구애조차 뿌리칠 정도로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를 자신의 손으로 꺾어 보고 싶다는 바람이 무산되었기 때문이고, 안도감은 강호 제일 검객과 세가의 명예를 걸고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승부를 내지 않아도 된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둘 중 어느 것이 더 강한지는 지금의 그로서는 알 수 없었다. 하나 전흠과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남궁선은 자신이 무언가를 착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종남파에서 신검무적을 대신해 나오는 고수가 절대로 평범할 리가 없다는 단순하면서도 당연한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전흠의 두 눈에 담긴 투지와 열망, 그리고 강한 신념의 빛은 남궁선이 좀처럼 보지 못했던 강렬한 것이었다. 더구나 전흠이 자신을 향해 일언반구 말도 없이 검을 뽑아 드는 광경을 보게 되자 남궁선은 절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자들은 정말 진심으로 본 가와의 비무에 임하고 있구나.’
쓸데없는 미사여구나 허례를 일체 배제하고 오직 실력을 겨루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대라면 기꺼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싸워볼 만하지 않겠는가? 남궁선은 허리를 쭉 편 채 똑바로 섰다. 그리고는 자신도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런 다음 검을 자신의 몸 중앙에 세우고 조용한 음성을 내뱉었다.
“남궁세가의 남궁선이오.”
상대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종남의 전흠.”
두 사람 사이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리고 훗날
“쌍룡쟁검(雙龍爭劍)”
이라 불리며 안휘성 일대에서 오랫동안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될 두 젊은 검객들의 화려하면서도 치열한 검투(劍鬪)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 * *
회남의 남궁세가에서 두 기재 사이의 보기 드문 격전이 시작될 즈음, 전혀 다른 장소에서 또 하나의 처절한 싸움이 막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낙일방은 묵령갑을 낀 손을 꼼지락거리며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을 향해서 다가오는 네 명의 고수를 보면서도 그는 전혀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장문사형이 무사히 돌아오셨나 모르겠군, 남궁세가와의 비무는 어떻게 됐는 지도 궁금하고……’
아마 누군가가 지금 그의 생각을 알 수 있었다면 버럭 호통을 내지르고 말았을 것이다.
“지금 제정신인가? 서장무림 최고의 고수들인 십이기(十二寄)와 십육사(十六邪) 중의 네 명한테 합공 당하기 직전인 긴박한 상황에서 무슨 쓸데없는 걱정이란 말인가?” 하고 말이다.
사실 지금 그가 처한 상황은 긴박하다는 말로도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위태로운 것이었다. 지난 삼 일 동안 낙일방은 잠시도 쉬지 않고 엄청난 거리를 계속 달려왔으며, 다섯 번의 크고 작은 싸움을 했다. 임독양맥을 타통하여 바다같이 마를 줄 몰랐던 공력도 점차 고갈되기 시작했고, 체력은 이미 바닥이 난 지 오래였다. 그런 상태에서 지금까지 만났던 어떤 자들보다 강해 보이는 네 명의 고수가 사방에서 압박해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그들 중 낙일방이 한 번이라도 보았던 인물은 매부리코의 날카롭게 생긴 노인뿐이었다. 그 노인은 서장의 고수인 십이기 주의 잠사교등이란 인물로, 낙일방은 천하현의 귀봉루에서 그를 만난 적이 있었다. 교등의 오른쪽에 있는 사람은 허름한 장삼을 걸치고 이마에 노란색 두건을 쓴 텁석부리 장한이었다. 추레한 모습이었으나, 낙일방은 바로 어제 그와 몇 차례 장력을 주고받은 적이 있기 때문에 그의 장공이 정말 무섭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등곽, 서장 십육사 중에서도 장공으로는 세 손가락 안에 든다는 철사자가 바로 그였다.
교등의 왼쪽에는 봉두난발에 커다란 철도를 어깨에 걸친 우람한 체구의 중년인이 얼굴에 징그러운 미소를 지은 채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파귀도(杷鬼刀) 적광(狄廣)이라는 인물로 십육사에서의 서열은 아래쪽에 있었으나 살인을 밥 먹듯이 저질러서 홍안령(홍安嶺) 일대에서는 누구나가 두려워 마지않는 일대의 흉인(兇人)이었다. 그리고 낙일방의 뒤에서는 금빛 찬란한 륜(輪)을 들고 있는 비쩍 마른 체구의 삼십대 중년인이 무표정한 얼굴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십육사 중의 한 사람이며 고륜(庫倫)의 패자인 독수금륜(毒手金輪) 대일관(垈一關) 이었다.
한 장소에 서장무림의 최고 고수들인 십이기와 십육사 중 무려 네 사람이나 한꺼번에 나타난 것이 알려진다면 중원 전체가 떠들썩해질 것이다. 하나 아쉽게도 이곳에는 그들 외에는 아무도 지켜보는 사람이 없었다. 회남에서 갑자기 모습을 감추었던 낙일방이 어째서 이런 곳에서 네 명의 서장 고수들에게 포위당하는 신세가 되었을까?
낙일방이 남궁세가와의 비무를 앞에 둔 상황에서 숙소를 벗어난 것은 그의 침상 위에 놓여진 한 통의 편지 때문이었다. 여인의 고운 필체로 정성들여 쓴 듯한 그 편지는 남봉 엄쌍쌍이 보낸 것이었다. 아니, 엄쌍쌍으로 추측되는 여인이 보낸 것이라고 해야 더 정확할 것이다. 낙일방이 엄쌍쌍의 필체를 직접 본 적은 한 번도 없으니 말이다.
낙일방은 얼마 전부터 정식으로 엄쌍쌍과 교제를 시작했으며, 그녀의 다소곳하고 조용한 성품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노군묘에서 정표까지 주고받으며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던 것이다. 그 편지에는 자신을 향한 그리움과 건강에 대한 걱정이 여인 특유의 섬세한 필치로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말미에는 낙일방을 긴히 만나기 위해 자신이 회남으로 왔으며, 미시(未時)경에 팔공산의 중턱에 있는 회심정(回心亭)으로 꼭 나와 달라는 당부의 말이 쓰여 있었다.
그 편지를 모두 읽었을 때 낙일방은 반가움보다는 의아한 생각이 먼저 들었다. 회남으로 왔으면 자신의 숙소로 바로 찾아오면 되는 일이거늘 왜 남들의 눈을 피해 서신까지 보내서 자신을 팔공산으로 불러낸단 말인가? 그리고 그녀같이 수줍음 많고 조용한 여자가 혼자 일행과 떨어져 자신을 보기 위해 달려왔다는 것도 선뜻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었다.
하나 편지와 함께 담겨진 물건을 분명히 자신이 그녀에게 정표로 주었던 옥가락지가 끼어진 목걸이였다. 그 옥가락지는 돌아가신 어머님의 유품(遺品)이었고, 자신이 집을 나올 때 챙겨서 나온 단 하나의 물건이었다. 비참하고 혹독한 유년기를 지탱하게 해준 고마운 존재이기도 했다. 자신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그 물건을 낙일방은 자신이 처음으로 마음에 담게 된 여인에게 선물했던 것이다. 낙일방은 그 옥가락지를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이건 두 가지 중의 하나일 것이라고.
수줍은 많은 그녀가 차마 혼자 남자들이 즐비한 숙소로 찾아오지 못하고 자신을 조용히 불러냈을 수도 있었다. 그녀의 성격으로 보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녀를 방자한 누군가가 자신을 유인하기 위해 획책한 일일 수도 있었다. 강호에 출도한 이후 몇 차례의 함정에 빠진 적이 있을 뿐 아니라, 남궁세가와의 비무라는 중대한 일을 코앞에 둔 상태였기 때문에 그런 의심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둘 중 어느 것이 진실인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어느 쪽이든 이 일에 엄쌍쌍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에게 정표로 준 옥가락지가 편지와 함께 담겨 있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그렇다면 그녀의 안위를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가 보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동중산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진짜 회심정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고,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그녀가 관계된 일은 반드시 자신의 손으로 해결하고 싶었다. 문파의 중대사를 목전에 둔 상태에서 자신의 여인 때문에 심력을 소비하게 하거나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이 낙일방이 말도 없이 숙소를 벗어나게 된 연유였다.
회심정에는 과연 한 명의 여인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낙일방이 익히 알고 있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낙일방을 보자 빙긋 미소 지었다. 그녀가 웃자 두 눈이 유난히 가늘어지며 남자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하는 교태가 흘러나왔다.
“엄쌍쌍이 아니라서 실망했나요?”
목소리 또한 끈적하면서도 요염해서 묘한 색기를 느끼게 했다. 낙일방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묵묵히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오며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녀는 오지 않아요. 이곳에는 오직 당신과 나, 두 사람뿐이에요.”
그녀가 다가옴과 동시에 사람을 취하게 하는 듯한 독특한 체향이 흘러나왔다. 낙일방은 담담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더니 이내 냉랭한 음성을 내뱉었다.
“그 수법은 다시 통하지 않을 거요.”
그녀는 다가오던 몸을 멈추더니 가만히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의 눈빛이 여전히 맑게 빛나고 있는 것을 본 그녀는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이제는 내 소녀표향대법 정도는 눈에 차지 않는다는 뜻인가요?”
“아니, 내가 같은 수법에 두 번씩이나 당할 정도로 미련하지 않다는 말이오.”
약간 가무잡잡한 피부에 흑백이 분명한 눈동자를 가진 여인은 다름 아닌 선약연이었다. 천하현의 귀봉루에서 잠사 교등과 함께 떠났던 그녀가 느닷없이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선약연은 도톰한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이제는 제법 강호에 명성이 알려졌다고 나 정도는 우습게 보이는 모양이군요. 말해 봐요, 엄쌍쌍의 어디가 마음에 들었던 거죠?”
“그런 말은 이런 분위기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오. 그녀는 어디 있소?”
선약연의 눈에 야릇한 빛이 떠올랐다.
“그녀가 걱정스러운가요?”
“그러지 않았다면 이곳까지 나오지 않았을 거요.”
너무나 솔직담백한 말에 오히려 선약연이 할 말을 잊은 듯 잠시 침묵을 지켰다.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녀의 입에서는 짤랑한 교소가 흘러나왔다.
“호호….안 본 사이에 당신은 제법 남자다워졌군요. 고지식했던 당신도 제법 강호의 다채로운 맛을 느끼게 된 모양이지요?”
“그런 것과는 상관없소. 나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 이곳에 왔으니 당연히 그녀의 행방을 알아야겠소.”
“내가 말하지 않겠다면? 나에게 그 무서운 주먹을 휘두르기라도 할 생각인가요?”
그녀의 음성에는 야릇한 빛이 담겨 있어서 정말 두려워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를 희롱하려는 것인지 알기 힘들었다.
“필요하다면 기꺼이.”
낙일방의 단호한 대답에 선약연의 얼굴이 처음으로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녀는 성난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무어라고 쏘아붙이려 했으나, 신광을 번뜩이며 자신을 정면으로 주시하는 낙일방의 기세에 놀랐는지 입을 다물어 버렸다.
낙일방은 그녀를 향해 성큼 한 걸음을 내디뎠다. 단지 한 걸음뿐이었으나, 선약연은 그가 자신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며 달려드는 착각이라도 들었는지 흠칫 놀라며 뒤로 주춤 물러났다. 그러다 이내 자신의 실태를 깨닫고는 표독스런 눈으로 낙일방을 쏘아보았다.
“그렇게 군자연(君子然)하더니 감히 나를 협박하는 건가요? 그렇게도 그녀가 좋아요?”
“나는 군자가 아니오.”
“그럼…”
“나는 무림인이오.”
낙일방의 음성은 담담했으나 그 안에는 강한 의지와 결연한 각오의 빛이 담겨 있었다.
“다가오는 도전을 피하지 않고, 어떤 위협에도 굴복하지 않으며,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내던지는 무림인이오.”
“…..!”
“그러니 나를 향해 허튼수작을 부리려 하지 말고 그녀의 행방을 알려 주기 바라오.”
그의 기백에 압도당한 듯 그녀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낙일방은 묵묵히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한참 후에야 그녀는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이곳에서 남쪽으로 백 리쯤 가면 채가강(菜家崗)이 있어요. 채가강 정상에 채보(菜堡)가 있는데, 그곳에 가 보세요.”
“그녀가 그곳에 있소?”
“가 보면 알 거예요.”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낙일방은 더 이상은 그녀에게서 아무런 말도 들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의 입을 열기 위해서 억압적인 방법을 사용할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단지 그녀가 말한 단서가 사실이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낙일방은 그녀를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다음에 다시 보게 되면 지금보다는 부드러운 대화를 하게 되길 바라겠소.”
이어 그의 신형은 빠른 속도로 회심정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선약연은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그녀의 눈에 떠오른 눈빛은 참으로 복잡 미묘해서 그녀의 속마음이 어떠한지를 누구도 짐작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낙일방의 모습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다음에야 그녀는 몸을 돌려 한곳을 바라보았다.
“그를 목적지로 보냈어요. 이제 내가 할 일은 모두 끝난 건가요?”
회심정에서 멀지 않은 나무 뒤에서 한 사람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앙상할 정도로 마른 체구에 짙은 남삼을 걸치고 이마에는 같은 색의 두건을 동여맨 이십대 후반의 청년이었다. 청년의 얼굴은 유난히 창백했고 입술은 여인의 그것처럼 붉었는데, 그래서인지 어딘지 모르게 병약해 보였다. 하나 그의 두 눈에 한줄기 기광이 번뜩이자 조금 전까지의 병약함은 어딘가로 사라지고 잔인하고 냉혹한 인상으로 변해 버렸다. 남삼청년은 회심정으로 올라오더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곳이 회남의 거리를 구경하기에는 제일 좋다고 하더니 과연 멋진 경치로군.”
그의 음성은 가늘고 조용했으나, 듣는 사람에게는 무언지 모를 섬뜩함을 안겨다 주는 것이었다. 그녀는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이곳에 와서도 경치 타령인가요?”
남삼청년의 메마른 얼굴에 한 줄기 희미한 선이 그어졌다. 차갑고 괴이했으나 분명 미소였다.
“천하의 절경을 구경하는 건 나의 세 가지 도락 중 하나요.”
“다른 두 가지는 무언가요?”
“아름다운 미녀를 감상하는 것과 남들이 피 흘리며 싸우는 것을 보는 것이오.”
그녀는 냉랭하게 대꾸했다.
“모두 돈을 들이지 않아도 되는 일들이군요.”
남삼청년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그게 바로 나의 가장 큰 도락이지.”
“그래서 모두들 당신을 수전공자(守錢公子)라고 놀리고 있는 거예요.”
“나에게는 그게 더할 나위 없는 칭찬이오.”
선약연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쌀쌀맞은 음성을 내뱉었다.
“아무튼 나는 내 할 일을 모두 다했어요. 이제부터는 당신이 알아서 할 일이에요.”
“당연한 말이오.”
“그녀가 정말 채보에 있나요?”
남삼청년은 그녀를 놀리듯 빙글거리며 되물었다.
“당신이 말해 놓고도 나에게 물으면 어쩌란 말이오?”
선약연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난 그저 당신이 하라는 대로 했을 뿐이에요. 약 올리지 말고 어서 말해 줘요.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지요?”
“정말 알고 싶소?”
“그래요.”
“그렇다면 한 가지만 말해 주겠소. 그녀가 어디에 있든 오늘 그는 그녀를 만나지 못할 거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낙일방이 채보로 가서 한바탕 소란을 피우며 채보를 뒤집어 놓아도 그녀의 행방을 찾을 수는 없다는 뜻이오.”
“그래서요?”
“결국 채보의 보주인 채무상(蔡無傷)을 닦달한 후에야 그는 자신이 애타게 찾는 그녀가 채보에서 이백 리 떨어진 쌍교(雙橋)의 어느 사찰에 있다는 말을 들을 수 있을 거요.”
그녀는 여전히 냉랭한 얼굴로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남삼청년은 그녀의 표정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느릿느릿 말을 계속했다.
“낙일방은 쉬지 않고 쌍교로 움직이겠지. 하나 그가 쌍교의 백원사(百願寺)에 도착해서 볼 수 있는 것은 자신을 노리는 살수들의 암습과 그녀의 피 묻은 옷가지밖에 없을 거요. 그가 소문대로의 고수라면 비록 약간의 낭패를 당하긴 하겠지만 살수들을 쓰러뜨리고 그녀의 옷가지를 얻을 수 있겠지.”
“……!”
“그 옷가지에는 ‘그녀를 구하고 싶으면 염유묘(炎劉廟)로 오라’는 쪽지가 붙어 있을 거요. 그가 장님이 아니라면 필시 그 쪽지를 볼 수 있을 테고, 다시 염유묘로 달려가지 않을 수 없겠지. 그리고 염유묘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쾌검의 고수를 만나 자신의 진짜 실력을 입증할 기회를 얻게 될 거요.”
“그녀는 그곳에도 없겠지요?”
“물론이오. 그렇게 쉽게 찾으면 내가 고생한 보람이 없지 않겠소? 염유묘에 있는 쾌검의 고수를 물리칠 수 있다면 아마 그에게서 비서(肥西)의 태허관(太虛觀)이라는 이름을 듣게 될지 모르오. 그는 지치고 짜증이 나겠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비로소 가지 않을 수 없을 거요.”
“대체 그를 어디까지 유인할 생각이죠?”
“내 말을 조금만 더 들어 보시오. 태허관주는 아직 무림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상당한 내가공력(內家功力)의 고수요. 아무리 옥면신권이라고 해도 그를 이기기 위해서는 악전고투를 격지 않으면 안 될거요. 용케도 그가 태허관주마저 이긴다면 태허관주의 도동(道童)이 그를 풍락하(豊樂河)의 강변으로 인도할 거요. 그곳에서 강을 건너면 비로소 그는 목적지가 멀지 않았음을 알게 될 거요.”
그녀는 약이 올라서 그의 말이 끝날 때까지 더 이상 묻지 않으려고 했으나 이내 그 생각을 바꾸어야 했다.
“왜 그렇죠?”
“강을 건넌 그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을 테니까.”
“그가 누구죠?”
“등곽.”
그녀의 눈이 살짝 치켜떠졌다.
“서장에서도 장공으로는 몇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바로 그 철사자 말인가요?”
“바로 그렇소. 등곽은 늘 옥면신권의 주먹을 자신의 손으로 깨고 싶다는 말을 했소. 이번 기회에 소원을 풀게 된 거지.”
“그런데 낙일방이 어떻게 그를 보고는 목적지가 가까워졌다는 것을 안다는 말이죠?”
“등곽은 오직 한마디를 할 거요. ‘그녀는 지금 도계(挑溪)의 안락서원(安樂書院)에 있다’고 말이오. 어쩌면 한마디를 덧붙일지도 모르지. ‘최대한 서두리지 않으면 그녀 대신 그녀의 시신을 보게 될지 모른다’고 말이오. 어찌 되었건 옥면신권은 등곽의 괴혈장이 어떤 무공인지 몸소 격어야 할 거요.”
선약연은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가 등곽마저 넘어선다면요?”
그제야 남삼청년의 입가에 떠올라 있던 사람을 거북하게 하는 괴이한 미소가 거두어졌다. 대신 그의 눈에서는 주위를 질식시킬 듯한 광망(光芒)이 이글거렸다.
“만약 그렇다면 그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뛰어난 인물일 거요. 그렇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우를 해줘야겠지. 그는 도계의 숲 속에서 서장 십이기와 십육사의 네 사람에 의해 화려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 거요.”
그녀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왜 그런 번거로운 방법을 쓰는 거죠?”
남삼청년의 눈에 떠올라 있던 광망이 어느새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남삼청년은 다시 입가에 예의 이상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향해 웃어 보였다.
“나는 사실 옥면신권을 상대로 이런 일을 벌일 생각은 없었소. 나의 당초 목표는 그가 아니었으니 말이오. 그런데 남궁세가에서 그를 제거해 주었으면 하는 부탁을 해온 게 아니겠소? 비록 정중하고 조심스런 부탁이긴 했으나, 나로서는 거절하기 힘든 것이었소.”
“…..!”
“그들의 부탁이 너무 갑작스러웠던지라 나로서도 일정 시간의 준비 기간이 있어야 했소. 이 근처에서 일을 벌일 수는 없으니 말이오. 무엇보다 잠사 교등과 등곽이 다른 일을 하느라 강남에 가 있어서 그들을 부르는 데 적어도 이틀의 시간이 필요했소.”
“그래서 그를 이리저리 유인했다는 말이군요.”
“처음부터 그를 도계로 유인했다면 그는 절대 가지 않았을 거요. 회남에서 달려가기에는 지나치게 먼 거리이니 말이오. 하지만 가까운 곳이라도 일단 한번 움직이게 되면….”
“끝까지 계속 갈 수밖에 없겠지요.”
“바로 그렇소. 그러니 내 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과연 이곳 회심정으로 오느냐 오지 않느냐 하는 것이었소.”
“편지만이라면 몰라도 그녀의 정표가 함께 있는 한 그는 반드시 이곳까지는 올 거라고 당신 입으로 말하지 않았나요?”
“그렇지, 그리고 일단 이곳에 온 이상, 그는 도계까지 가지 않을 수 없었을 거요. 다시 말해서 그가 그녀의 정표가 든 편지를 펼쳐 본 순간, 그의 운명은 이미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는 말이지.”
그녀는 잠시 낙일방의 준수한 모습을 떠올려 보다가 이내 도리질을 했다. 그가 자신을 거절한 이상 정상적인 방법으로 그를 수중에 넣을 길은 없었다. 자신과 그와의 인연은 이미 끊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녀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원하는 것을 수중에 넣지 못한 적은 몇 번이나 있었지만 이번처럼 가슴 한구석이 아린 적은 없었다. 그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이렇게 그의 영상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지 그녀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런 생각을 지우려는 듯 몇 번이나 머리를 내젓더니 다시 남삼청년을 향해 물었다.
“이제 사실을 말해 줘요. 그녀는 정말 안락서원에 있나요?”
남삼청년은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그녀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더니 이내 다시 미소 지었다.
“당신도 의외로 순진한 구석이 있군. 그녀가 왜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비리비리한 학사(學士)들만 우글우글한 서원에 간단 말이오?”
그녀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방금 당신 입으로……”
“내가 언제 내 입으로 그녀가 안락서원에 있다고 했소?”
그녀는 그의 말을 가만히 곱씹어 보고는 확실히 그가 그녀의 행방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말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등곽이나 다른 사람들이 모두 거짓말을 했다는 건가요? 그건 너무 치졸한고 유치한 수작이에요.”
“그렇소. 아주 치졸하고 유치한 방법이지. 그래서 오히려 더욱 효과적인 것이오. 누구나가 설마 그렇게까지 할 리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그녀는 그의 말에 일리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그렇다면 백원사에 있다는 그녀의 피 묻은 옷가지는?”
“피 묻은 옷가지야 어느 여인의 것인지 내가 알 게 뭐요? 백원사의 살수들이 지나가는 여인네 한 명을 겁간(劫姦)이라도 했나 보지.”
“편지에 든 그녀의 정표도 가짜였나요?”
“그건 그럴 수 없지. 그랬다가는 옥면신권을 유인할 수 없었을 테니까. 다만 엄쌍쌍이 아무리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정표라 할지라도 친한 언니가 잠시 보겠다고 하면 빌려 줄 수도 있지 않겠소? 그리고 그 언니가 급한 일로 외출하느라 미처 그 정표를 그녀에게 돌려주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오.”
선약연은 단숨에 남삼청년의 말 속에 포함된 의미를 알아차렸다.
“천봉궁에도 당신의 손길이 미치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군요. 당신에게 정표를 가져다 준 엄쌍쌍의 친한 언니라는 그 여자는 대체 누구인가요?”
남삼청년은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엉뚱한 말을 했다.
“나에게는 한 가지 철칙(鐵則)이 있소.”
“그게 무언가요?”
“꼭 알아야 할 일이 아니라면 귀가 있어도 듣지 않고, 눈이 있어도 보지 않으며, 입이 있어도 말하지 않는다는 거요.”
그녀는 샐쭉해져서 한차례 그를 쏘아보고는 이내 화제를 돌렸다.
“그렇다면 당신은 비밀리에 입수한 정표 하나로 그를 죽음의 함정으로 몰아넣은 것이로군요. 그는 아마도 죽는 순간까지도 그녀가 진짜로 안락서원에 있을지 궁금해할 거예요.”
“나를 이만큼 수고하게 만들었으니 결코 값싼 죽음은 아닐 거요. 그보다 당신이 해줘야 할 일이 한가지 더 있소.”
“무언가요?”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오. 한 사람에게 편지 한 장을 써 주면 되오.”
“이번에도 같은 수법을 사용할 생각인가요?”
남삼청년의 입가에 떠올라 있는 괴이한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그럴 리 있겠소? 난 한 번 사용한 수법은 절대로 재활용하지 않소. 이번에는 연서(戀書)가 아니라 초청장이오.”
“그걸 꼭 내가 써야 하나요?”
“아무나 써도 상관은 없지만, 여인의 필체라면 더욱 효과적일 거요.”
그녀는 또다시 그의 일에 얽힌다는 게 선뜻 내키지 않았으나 자신에게는 다른 선택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누구에게 보낸단 말인가요?”
남삼청년, 소주 혁리가의 넷째 공자이며 특정 인물들에게는 이공자(二公子)라고 불리는 혁리공은 메마른 얼굴에 유령 같은 미소를 지었다.
“환상제일창 유중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