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4권 모산지연(姆山之宴)편 : 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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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24권 모산지연(姆山之宴)편 : 3화


제 242장 판옥주인(判玉主人)

숙소로 돌아온 후 제일 먼저 진산월은 성락중을 찾아갔다.

“성 사숙,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성락중은 자신의 방에서 조금 전의 결투를 되새기며 상념에 잠겨 있다가 진산월의 방문을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오게.”

“쉬시는데 제가 방해를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군요.”

“아닐세. 그렇지 않아도 자네가 찾아오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네.”

진산월은 성락중의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성락중은 그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내게 묻고 싶은 게 있을 테지?”

진산월은 굳이 부인하지 않았다.

“제가 감히 사숙께 그럴 수 있겠습니까? 단지 궁금한 점이 있기는 합니다.”

“내가 사용한 무공에 의문을 느끼고 있을 테지. 특히 내공에 대해 말일세.”

“자세한 내용을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렇지 않아도 조만간에 자네에게 말하려고 했었네. 내가 남궁연을 쓰러뜨릴 때 마지막으로 사용한 것은 본 파의 현청건강기였네.”

“역시 그렇군요. 하지만 제가 알고 있는 것과는 많이 달라 보였습니다.”

“그럴 테지. 내가 사용한 것이 바로 온전한 현청건강기일세.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현청건곤강기(玄淸乾坤강氣)라고 해야 옳겠지.”

진산월의 눈이 번쩍 빛났다.

“현청건곤강기…..”

“자네도 들어 본 적이 있는 모양이군. 현청건강기의 원형(原型)이지만, 이미 오래전에 구결은 물론 익히는 방법마저 사라져 버려 이름으로만 어렴풋이 남아 있게 된 바로 그 무공일세.”

현청건곤강기.

진산월도 사부였던 태평검객 임장홍에게서 얼핏 전해 듣기만 한 이름이었다. 종남파 사람들에게는 그저 전설의 일부분으로만 여겨졌고, 종남파 외에는 아예 존재 자체를 알고 있는 사람도 거의 없는, 그야말로 잊힌 무공이었다. 지금 현재 종남파에 남아 있는 현청건강기는 비록 패도적인 위력을 지니고 있으나, 심오하고 정순한 맛이 떨어질 뿐 아니라 익히면 익힐수록 진기의 흐름도 불안해져서 주화입마에 빠지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진산월조차도 구결만 외우고 있을 뿐 제대로 수련한 적이 없었다.

그 원인은 바로 현청건강기가 불완전한 구결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원래 현청건곤강기는 음(陰)과 양(陽)이 조화를 이루어 양의 패도적인 면을 음의 면면부절(綿綿不絶)함이 뒷받침해 주어야 비로소 본연의 위력을 나타낼 수 있는데, 바로 이 음에 해당하는 곤(坤)의 구결이 실전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이름 또한 현청건강기라는 다소 괴이한 명칭으로 바뀌고 말았다.

하나의 신공 구결에서 어떻게 특정 부위의 구결만 송두리째 빠져 버린 채 전해질 수 있었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지만, 불완전한 구결이나마 남아 있게 된 것도 종남파 선조들의 끊임없는 노력 때문이었다. 개중에는 스스로 현청건강기의 미흡함을 보완하기 위해 평생을 현청건강기의 수련에 매진한 사람들도 있었으나 그들의 말년은 대부분이 불행한 것이었다. 주화입마에 빠져 제대로 몸을 가눌 수 없게 되거나 불안한 내공의 흐름 때문에 무공도 펼칠 수 없는 허약한 몸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현청건강기를 구성 이상 익히면 반드시라고 할 만큼 내공의 흐름에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었다. 하나 팔성의 현청건강기만으로도 종남파에 남아 있는 태을신공보다 훨씬 더 강력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나마 현청건강기를 익히고 있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 형편이었다.

지금에서야 진산월과 낙일방이 태진강기와 천단신공의 구결을 찾아온 덕에 익힐 수 있는 신공의 종류가 다양해졌지만, 한때는 종남파에 남아 있는 내공심법이 현청건강기와 태을신공 두 가지뿐인 상태였기에 선택의 폭이 그만큼 좁을 수밖에 없었다. 종남삼검의 일인이었던 전풍개도 현청건강기를 익혔고, 자연스레 그의 제자들인 성락중과 하동원도 현청건강기를 위주로 수련했다. 태을신공은 너무 수비적인 면이 강해서 직선적이고 공격적인 성향의 전풍개의 마음에 그다지 차지 않았던 것이다.

성락중은 현청건강기의 불완전함이 신경 쓰였으나 달리 다른 방법이 없기에 내공은 검술을 보조하는 용도로만 사용하고 검법의 수련에 좀 더 많은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다. 하나 그의 검술이 사부인 전풍개를 능가할 정도로 발전하면서 그는 점차로 내공에 대한 아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검술의 경지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내공이란 것이 단순히 검을 펼치는 데 도움을 주는 보조 수단으로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검과 혼연일체(渾然一體)가 될 수 있어야만 비로소 진정한 검의 위력을 나타낼 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좁은 해남도를 나와 광동성과 복건성 일대의 고수들을 찾아다니며 비무를 하면서 그런 점은 더욱 확실해졌다.

‘이대로는 안 된다. 현청건강기의 미흡함을 어떤 식으로든 보완하든지. 아니면 새로운 신공 절학을 익혀야 한다.’

성락중은 후자의 경우는 생각하지 않았다. 종남파 부흥을 목표로 하는 자신이 타 파의 신공을 익혀서 실력을 키운다는 건 말고되지 않는 소리였다. 그렇다고 이미 오래전에 실전된 종남파의 신공이 하늘에서 떨어질 리도 없었다. 그렇다면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현청건강기의 단점을 보완해서 완벽한 신공으로 만드는 것뿐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하루의 절반은 검법을 수련하고 나머지 절반은 현청건강기의 연구에 매진했다. 하나 그가 느낄 수 있는 건 종남파 선조들이 겪었던 것과 똑같은 절망감뿐이었다. 구결의 한 부분이 없어졌다면 어떻게 길을 마련해 볼 수도 있겠으나, 곤에 해당되는 모든 구결이 통째로 빠져 버려서 당최 뚫고 나갈 길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음에 관한 연구를 하려 해도 마찬가지였다. 종남파에는 어떤 종류의 음공(陰功)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성락중은 종남파의 무공 중에서 유독 음공에 관한 것이 전혀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예전에는 분명 육합귀진신공에서도 칠음진기라는 최상승의 음공 절학이 존재했었고, 현청건곤강기에도 완벽한 음공 구결이 있었다. 그 신공들로 인해 파생된 난화지나 무염보, 염화옥수(염花玉手) 같은 무공들은 그야말로 당시의 강호를 진동시켰던 개세의 절학들이었다. 하나 종남파에서 음공 계열의 모든 내공심법들이 사라지면서 자연스레 음공을 이용한 절학들도 모습을 감추어 버린 것이다.

음과 양은 서로 보완되는 것이어서 절정 수준에 이르기 위해서는 음과 양의 조화가 필연적이었다. 그런데 종남파에는 유독 음공에 관한 무공들이 모두 사라져 버렸으니, 애초부터 종남파 무공으로 도달할 수 있는 한계가 명확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성락중은 자신이 구할 수 있는 음공 계열의 무공들을 하나둘씩 섭렵하기 시작했다. 익히지는 못해도 연구는 할 수 있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실전된 현청건곤강기의 에 관한 부분을 보완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나 그가 접할 수 있는 무공이라고 해야 해남검파의 것이 대부분이었고, 그마저도 해남파의 무공이 양강(陽剛) 계열이라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러다 그는 남해청조각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여인들로만 이루어진 음공의 집합체이며, 절정 검객들을 배출해 내는 무공의 요람!

더구나 남해청조각이 있는 보타산은 제법 멀기는 해도 해남도에서 배를 타면 한 번에 갈 수 있는 위치였다. 귀가 번쩍 뜨인 성락중은 황급히 남해청조각으로 달려갔다. 남해청조각의 여인들은 복면을 한 채 비무를 청하는 그를 기꺼이 받아 주었고, 여러 차례 그와 실전에 가까운 비무를 벌여 주었다. 남해청조각의 무공은 확실히 성락중이 일찍이 접해 보지 못했던 수준 높은 음공의 일종이었으며, 그녀들의 검술 또한 변화무쌍한 가운데 냉엄한 살기를 지닌 최고의 검학들이었다.

그렇게 그녀들과 비무를 하면서 성락중은 한결 높은 검술의 경지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그러다 세 번째로 남해청조각을 찾아갔을 때 성락중은 뜻밖의 사고를 당했다.

격렬한 비무 도중에 순간적으로 법열(法悅)의 시기가 와서 멈칫거리다 상대의 검에 그대로 가슴을 관통당한 것이다. 다행히 상대의 검이 노렸던 부위가 그의 오른쪽 가슴이라 목숨이 끊어지는 참변은 면했으나, 하필이면 그때가 그의 내공이 막 상승(上乘)의 경지에 진입하려던 순간이었는지라 내공이 역류하고 기혈이 막혀 자칫하면 내공을 모두 잃게 될지도 모르는 긴박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무려 한 달간이나 남해청조각 여승들의 간호를 받아야 했다.

그녀들이 무슨 수를 썼는지 용케도 그는 내공이 모두 회복되었을 뿐 아니라 법열의 순간에 느꼈던 깨달음마저 그대로 간직하여 임독양맥이 타통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해남으로 돌아와서 현청건강기를 본격적으로 다시 수련하기 시작한 성락중은 이내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내공에 한 줄기 기이한 음기가 담겨 있음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 음기가 현청건강기의 구결과 너무도 쉽게 융합하더니, 이내 마치 본래의 것인 양 자연스레 하나로 합쳐지는 것이 아닌가?

삼 일 밤낮을 꼬박 운공으로 지새운 성락중은 자신의 현청건강기가 완벽해졌음을 깨닫고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흡했던 의 구결이 저절로 머릿속에 떠올랐고, 실전되었던 구결마저 스스로 보완할 수 있을 정도로 내공의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몸을 추스른 성락중은 어찌 된 영문인지 알기 위해 남해청조각을 찾아갔다.

하나 남해청조각에서는 더 이상 그의 방문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의 몸을 치유해 준 것으로 그와 모든 인연은 끝이 났다며 비무는커녕 잠깐 머무르는 것조차 거절해 버린 것이다. 성락중은 자신을 고쳐 준 사람이라도 만날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했으나 일언지하에 거절당하고 쓸쓸히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거처로 돌아온 성락중은 완벽해진 현청건곤강기를 연마하는데 심혈을 기울였으며, 그 수준이 올라갈수록 자신의 검술 또한 무헙도록 발전되고 있음을 절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삼 년 후, 성락중은 사부인 전풍개의 뒤를 쫓아 사제인 하동원과 함께 해남도를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성락중은 긴 이야기를 듣고 난 진산월은 한동안 깊은 침묵에 잠겨 있었다. 성락중은 골똘히 생각에 잠긴 진산월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자네가 부상을 당했을 때 남해청조각 전인의 도움을 받았다고 들었네.”

진산월은 퍼뜩 상념에서 깨어나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직접 만나 보지 못하고 나중에 개방의 용두방주인 만리무영개 나자행 대협에게 말씀만 전해 들었습니다.”

성락중은 한결 신중해진 표정으로 물었다.

“그 이후에 공력을 운용할 때 무언가 이상한 점이 없었나?”

“그렇지 않아도 조금 전에 사숙의 말씀을 듣고 계속 그 부분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성락중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렇다면 혹시 자네도…..”

“음기인지 확실치는 않은데. 제 본연의 공력과는 조금 다른 설질의 기운이 감지되더군요. 아마 저의 내상(內像)을 치료할 목적으로 자신의 기운을 주입한 것 같은데, 이런 기운은 며칠 지나면 자연스레 사라지는 법인지라 처음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이미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 기운이 계속 느껴지더군요.”

성락중의 차분했던 음성에 한 줄기 열기가 담겼다.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었네. 남해청조각에서 치료를 받았을 때도 이질적인 기운을 느꼈지만, 그들이 내 몸에 주입한 내력의 기운이 남아 있는 것으로만 단순하게 생각했지. 그런데 나중에 해남도로 돌아와서 본격적으로 현청건강기의 내공을 수련하자 그 기운이 자연스럽게 내 본신의 내력과 융합되는 바람에 무척이나 놀랐었네. 더구나 그때 비로소 그 기운이 강력한 음기의 결정체임을 알게 되었으니 실로 기이한 일이 아닌가?”

원래 내공은 심법의 종류만큼이나 사람마다 그 기운이 다른 법이어서 아무리 자신의 내공을 다른 사람에게 주입한다고 해도 쉽게 융합되거나 하지 않았다. 격체전력(隔體傳力)을 하는 경우에도 서로 동문이거나 같은 종류의 내공을 익힌 사이에서만 가능하며, 그 또한 실제로 자신의 내공에 융합되는 것은 주입받은 양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성락중은 남해청조각에서 치료를 받을 때 주입받은 상대의 공력이 오히려 너무도 쉽게 자신의 기운에 융합되었을 뿐 아니라, 그 기운이 자신이 가장 필요로 하는 음기여서 불완전했던 신공까지 완성되어 버렸으니 단순한 기연(奇緣)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의 무공 상식으로는 서로 다른 이종(異種)의 진기는 어떠한 경우에도 융합되거나 섞이지 않는 것이 정설이었던 것이다. 진산월은 잠시 숙고하다가 신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우선은 제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기를 주입한 사람이 나 방주인지, 아니면 남해청조각의 전인인 이동심 소저인지를 확인하는 것이 선결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런 다음 제 몸에 남아 있는 기운이 과연 사숙의 경우처럼 저의 내공에 융합되는지를 지켜본 후에 남해청조각과의 일을 궁리하는 것이 순서일 듯합니다.”

성락중은 진산월의 의견에 동의를 했다.

“나도 그것이 순리라고 보네. 무턱대고 남해청조각에 찾아가서 사정을 알아보는 것은 자칫 불필요한 오해를 사기 십상이니 말일세.”

그것은 양파의 진산(縝山) 내공에 관한 본질적인 문제를 야기 시킬 수도 있는 사안이어서 최대한의 신중하고 철저한 접근이 필요했다. 진산월은 화제를 살짝 돌렸다.

“사숙과 마지막으로 비무를 했던 사람은 누구입니까?”

“여진(여眞)이라는 중년의 비구니였네.”

“사숙께서 부상을 당하시게 된 상황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아무리 비무가 실전처럼 격렬했다 해도 사람의 몸을 검으로 관통하는 것은 그렇게 하려고 마음먹지 않는 한 쉽게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성락중의 눈빛이 살짝 빛났다.

“자네는 그녀가 내 가슴을 찌른 게 고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그녀와 나는 그것이 두 번째 비무였네. 처음에는 좀 더 젊은 여인들이 나왔으나 내 상대가 되지 못하자 두 번째 찾아갔을 때는 승부를 내기 위해서라도 동수(同手)를 이루었지. 그래서 세 번째 갔을 때는 승부를 내기 위해서라도 두 사람 모두 치열해질 수밖에 없었네.”

진산월도 그 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리 중년의 나이라고 하지만, 일단 검을 잡은 이상은 상대에 대한 호승심(好勝心)이 없을 수 없었다. 더구나 처음의 비무에서 동수를 이루었다면 그 호승심이 더욱 부채질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어느 한쪽이 갑자기 손을 멈추고 우두커니 서 있는다면 뜻밖의 사고가 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진산월은 아무리 그런 상황이라 할지라도 검을 중도에 멈추지 않고 끝까지 상대의 가슴을 관통할 정도로 찔러 넣었다는 것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 일정 수준 이상의 검수라면 피육의 상처만으로 충분히 그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성락중 또한 그점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생각해 온 것이 있었다.

“나도 처음에는 그 점이 약간 미심쩍었네. 그녀의 실력으로 중도에 충분히 검을 멈출 수 있지 않았을까 의심했지. 하지만 이내 오히려 그녀에게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네.”

“왜 그렇습니까?”

성락중은 뜻밖에도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당시 나의 현청검강기는 팔성에 도달해 있었네. 그래서 나는 평상시 더 이상의 내공 수련은 하지 않고 있었지. 그런데 내가 비무도중에 법열을 느꼈던 그 순간 자연스레 나의 현청건강기가 팔성을 넘어서더니 순식간에 구성을 지나 십성에 육박해 버렸던 걸세.”

진산월의 입에서 짧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아! 그렇다면….”

“그때 그녀는 검이 내 가슴을 관통하지 않았따면 나는 십중팔구 불완전한 현청건강기의 폭주로 주화입마에 빠져들었을 것이네. 그런데 막 내공이 요동을 치며 심맥을 뒤흔드는 순간에 가슴을 검에 찔려 진기의 흐름이 끊어졌기에 오히려 주화입마를 벗어나게 되었던 것이지.”

“사숙께선 그 여진이란 승려가 사숙의 위급함을 알고 가슴을 찌른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계시는군요.”

상락중의 얼굴에 씁쓸한 빛이 감돌았다.

“그녀의 일검이 순정히 우연한 것인지, 아니면 그러한 상황을 인식한 의도적인 것인지는 나도 알 수가 없네. 하지만 나로서는 그녀 덕분에 위기를 모면했으니 그녀의 일검을 마땅히 고마워해야 하지 않겠나?”

진산월은 성락중의 심정을 알 것도 같았다. 어쨌든 성락중은 그녀와의 비무에서 패했으며, 다시 그녀에게 설욕하고 싶다는 마음과 그녀의 일검에 담긴 의문을 풀고 싶다는 마음이 겹쳐서 복잡한 심정일 수밖에 없었다.

성락중이 남해청조각에서 겪은 일은 의문투성이였지만 지금으로서는 그 의문을 해결할 방도가 없었다. 남해청조각이 그의 방문을 거절하고 문을 굳게 걸어 잠근 이상, 머릿속에 떠오르는 숱한 의문들을 그저 마음 한구석에 담아 두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진산월은 성락중의 내공에 대한 한 가지 의문을 풀었으나 몇 가지의 새로운 의문을 안은 채 그동안의 그의 노고를 치하했다.

“사숙께서 각고의 노력으로 불완전했던 본 파의 신공 절학을 새롭게 완성하신 것을 경하드립니다.”

그가 정중하게 포권을 하자 성락중은 겸허히 인사를 받았다. 이런 사례는 문파의 선배 고수로서 당연히 받는 것이 오히려 예의였다.

“고맙네. 모두 사부님을 비롯한 선대 고수님들의 보살핌 덕분이 아니겠나? 자네야말로 실전되었던 본 파의 절학들을 되찾았을 뿐 아니라 이백 년 만에 본 파의 검술을 최고의 경지로 끌어 올렸으니 진심으로 그 노고에 종남의 문하로서 감사를 표하는 바일세.”

두 사람은 서로 정중하게 인사를 주고 받았다. 장내에는 훈훈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남궁세가와의 비무를 성공리에 마쳤을 뿐 아니라, 실전되었던 문파의 절학들을 하나씩 되찾아가고 있다는 현실이 그들의 마음을 기쁘게 만들었다. 더구나 내공심법은 무공의 근간이 되는 것이어서 그 기쁨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좀처럼 표정의 변화가 없던 진산월의 얼굴에 모처럼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이것으로 한 가지 걱정이 덜어지게 되었군요.”

성락중은 차갑고 냉정하게만 보였던 진산월의 얼굴에 훈풍 같은 미소가 어리는 광경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자신도 덩달아 웃어보였다.

“자네가 웃으니 세상이 온통 환해지는 것 같군. 그런 멋진 미소를 가지고 있으면서 왜 아직까지 보여 주지 않았나? 앞으로 내 앞에서만이라도 좀 더 자주 웃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그래. 자네가 덜었다는 걱정이 무엇인가?”

“본 파의 막내 제자인 손풍에 관한 것입니다.”

성락중의 입가에 떠올라 있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어찌 보면 어이없어 짓는 미소 같기도 했고, 어찌 보면 재미있어 하는 미소 같기도 했다.

“그 녀석 말인가? 정말 희한한 놈이더군.”

“어떤 면에서 말입니까?”

“성격이나 말하는 건 완전히 개차반인데, 그래도 특별히 밉지가 않네. 무의식적으로 마지막 선을 넘지 않고 지키고 있는 것 같은데, 본성이 그러하다면 뒷골목을 전전하던 파락호치고는 참으로 특별하다고 해야겠지. 그리고 그 몸 말일세.”

성락중의 음성에는 차분한 성격 답지 않게 약간은 희희낙락한 빛마저 담겨 있었다.

“자네도 알고 있겠지만 정말 대단한 기운을 담고 있더군. 어려서부터 온갖 영약들을 복용해 왔다고 들었는데, 무공을 익히지 않은 게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셈이지. 몸속에 그런 기운을 담은 채 어설픈 내공을 익혔다면 지금쯤 솟구치는 기운을 감당하지 못하고 광인이 되었거나 살기에 젖은 살인마가 되었을지도 모르니 말일세.”

“그래서 저도 그에게 어떤 내공심법을 익히게 할지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몸속의 그 엄청난 기운을 다스리기 위해 태을신공을 익히게 할 계획이었습니다만, 그의 기질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아서 진도가 너무 늦을 것 같아 걱정이었습니다. 천단신공은 익히기가 복잡하고 까다로워서 단순한 성격의 그에게는 맞지 않는 것 같고, 익히고 있는 태진강기도 공격적인 위력은 좋지만 기본을 다지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서 기초가 필요한 그에게는 소용이 없는 무공입니다.”

“확실히 그렇군 나도 그래서 처음 내공심법을 익힐 때는 꽤 오랫동안 고민을 거듭했었지.”

“그래서 현청건강기를 전수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기질에도 잘 맞을 듯하고 빠른 시일 내에 효과를 볼 수도 있어서 좋기도 하고. 하지만….”

“아무래도 구결이 불완전한 것이 마음에 걸렸겠지. 그렇다면 이번에 완성된 현청건곤강기를 그에게 전수할 생각인가?”

“사숙께서 꺼리지만 않으신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그를 위해서는 가장 좋은 방법인 듯합니다.”

“꺼릴 것이 뭐 있겠나? 어차피 본산의 내공심법이니 본산의 제자들에게 돌아가야지. 내가 생각하기에도 그 녀석에게는 현청건곤강기가 가장 어울리는 내공심법인 것 같네. 사실 현청건곤강기의 개념을 완전히 정립해서 남에게 전수할 수 있을 정도로 완성시킨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네. 그 바람에 사부님을 비롯한 누구에게도 아직 알리지 못했는데, 엉뚱한 녀석이 처음으로 혜택을 보게 되는군.”

진산월은 다시 그에게 인사를 했다.

“사숙께 번거로움을 드린 것을 미리 사과드리겠습니다.”

현청건곤강기를 완전하게 익히고 있는 사람은 성락중뿐이니, 손풍이 현청건곤강기를 익히기 위해서는 성락중이 직접 가르치는 것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성락중은 조용히 웃었다.

“그렇지 않아도 기회가 닿으면 그 천둥벌거숭이 같은 녀석의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을 생각이었네. 나에게 맡겨 놓으면 머지않아 본 파의 제대로 된 제자로 만들어 놓겠네.”

진산월의 얼굴에도 다시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쉽지는 않은 일일 겁니다.”

“사람을 만드는 일이 쉬울 리 있겠나? 오늘 저녁부터 당장 시작하겠네.”

“부탁드리겠습니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동중산의 음성이 들려왔다.

“장문인, 이곳에 계십니까?”

진산월은 방의 주인인 성락중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를 안으로 불러들였다.

“무슨 일이냐?”

동중산은 성락중에게 먼저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는 이내 진산월을 향해 한 장의 배첩을 내밀었다.

“누군가가 장문인을 뵙고자 찾아왔습니다.”

진산월이 배첩을 받아 보니 여인의 단정한 필치로 짤막한 글귀가 적혀 있었다.

잠시의 만남을 청합니다.

구궁보 냉옥환.

진산월은 고개를 들어 동중산을 쳐다보았다.

“그녀 혼자 왔느냐?”

“그렇습니다.”

“그녀가 왜 나를 만나려고 하는지 짐작 가는 일이 있느냐?”

“제자가 듣기로는, 그녀는 모용 공자의 지시를 받고 이번 비무에 참관하기 위해 남궁세가로 왔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번 방문도 모용 공자의 지시가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락중은 한편에서 진산월이 동중산에게 의견을 묻는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일파의 장문인일 뿐 아니라 강호 무림의 최정상에 있는 진산월이 사소한 일에조차 제자의 의견을 구한다는 것은 누구도 쉽게 예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것은 그만큼 동중산에 대한 그의 신임이 두텁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성락중은 동중산이란 인물에 대해 적지 않은 흥미가 일었다. 성락중은 해남에 주로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비천호리라는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가 동중산에 대해 제일 처음 들은 말은 종남파가 부흥하는 데 그의 역할이 작지 않았다는 강호의 소문이었다. 자신보다 훨씬 어린 신검무적의 제자를 자처하며 종남파의 온갖 궂은일은 마다하지 않고 문파를 위해 헌신하고 있는 그에 대해 성락중은 짙은 호기심과 호감을 함께 느끼고 있었다. 실제로 만나 본 동중산은 약삭빠르다는 세간의 평가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인물 됨됨이가 신중했고, 태도는 당당하면서도 민첩했으며, 사소한 일에도 소홀하지 않은 꼼꼼함을 지니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장문인인 신검무적을 대하는 태도는 공손하기 이를 데 없었고, 유소응을 비롯한 어린 제자들에게는 따듯한 대형처럼 감싸 주기도 했다. 그 버르장머리 없는 손풍조차도 동중산을 대할 때는 항상 웃으며 농담을 건넬 정도로 친밀감을 표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종남파의 안살림을 도맡아 하고 있는 살림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과 별로 나이 차이도 나지 않는 사람이 사조뻘이라고 불쑥 나타났음에도 동중산은 전혀 경계하거나 불만을 표하지 않고 극도의 공경을 다하고 있었다. 무공이 약하다는 점 외에는 흠을 잡기 힘들 정도로 완벽한 그의 모습에 성락중은 진실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일부러 남의 눈에 보이기 위한 행동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실 된 것임을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바로 며칠 전에도 성락중은 전흠에게 동중산에 대해 물은 적이 있었다. 그때 전흠은 할아버지인 전풍개의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할아버님은 그가 본 파의 좋은 제자라고 했어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 후로 성락중은 동중산에 대한 가지고 있던 일말의 의구심마저 버리게 되었다. 젊은 사람이 대부분인 종남파의 현 상황을 생각해 본다면 동중산의 존재는 다른 무엇보다 소중한 것임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것이다.

진산월은 동중산과 잠시 의견을 나누고는 곧 냉옥환을 접견했다. 냉옥환은 여인답지 않게 훨친한 키에 차갑고 냉정한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전형적인 미인상은 아니었으나 나름대로 독특한 매력을 지닌 여인이었다. 자리에 앉은 그녀는 물처럼 고요한 시선으로 진산월을 응시했다.

“먼저 남궁세가와의 비무를 승리로 끝내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정말 모처럼 보는 멋진 비무였어요.”

“고맙소. 큰 사고 없이 비무를 마칠 수 있게 되어 나도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소.”

“제가 불쑥 진 장문인을 뵙고자 한 건 모용 공자 님의 전언(傳言)때문이에요.”

진산월은 그런 게 아닐까 예상하고 있었으면서도 막상 그녀의 입에서 모용 공자가 자신에게 전하는 말이 있다고 하자 호기심과 두근거림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모용 공자도 자신을 의식하고 있는 걸까? 그가 좀처럼 바깥으로 내보내지 않던 사대신녀 중 한 사람을 일부러 보내면서까지 자신에게 전하려는 말은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그녀는 왜 하필이면 비무가 끝난 다음에 자신을 찾아온것일까? 진산월은 마음속에 떠오르는 모든 의문을 접은 채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모용 공자를 만난 지가 삼 년이 훌쩍 넘었군. 잠깐 동안의 만남이어서 그가 나를 기억하고 있는 것조차 신기할 일이거늘, 일부러 사람까지 보내다니 고마운 일이오. 그는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구려.”

그는 모용 공자에게 특별한 경칭을 쓰지 않았고, 냉옥환 또한 그 점에 별다른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공자님은 잘 계십니다. 물론 그분은 진 장문인을 잘 기억하고있습니다. 요즘에도 가끔 진 장문인에 대한 말씀을 하실 때가 있습니다.”

진산월로서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나에 대해 무어라고 했소?”

냉옥환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해서 아무 생각도 없는 목각 인형을 보는 것 같았다. 음성 또한 얼굴에 떠오른 표정만큼이나 무심했다.

“밑바닥에서 일어나 정상에 우뚝 섰으니 존경을 받아 마땅하다고 하셧습니다. 그리고…..”

진산월은 묵묵히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냉옥환의 물처럼 투명한 시선이 그런 진산월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 자라면 기꺼이 친구로 사귀어 볼 만하다고 하셧습니다.”

진산월은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친구라……쉽지 않은 단어로군. 그가 내게 전하려는 말이 무엇이오?”

“모용 공자께서는 이달 보름까지 진 장문인께서 본 보로 왕림해 주셧으면 하십니다.”

뜻밖의 말에 진산월은 눈을 살짝 빛냈다.

“구궁보로 나를 초청한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냉옥환은 품속에서 한장의 얇은 배첩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배첩은 좀처럼 보기 힘든 황금빛 용이 수놓아진 봉투에 담겨있었다. 히늘을 비상하는 듯한 금룡(金龍)은 금색 실로 한 땀씩 새겨 놓은 것인데, 언뜻 보기에도 평범한 솜씨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봉투의 겉에는 ‘종남파 장문인 진산월 친전’ 이라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 봉투 안에는 엷은 푸른빛을 띤 종이 한 장이 있었다. 종이를 펴자 마치 칼로 자른 듯 단정하면서도 힘이 느껴지는 필체로 하나의 시구가 적혀 있었다.

사남사북판춘수(舍南舍北判春水)
단견군구일일래(但見群鷗日日來)
옥경부증연주소(玉經不曾緣主掃)
봉문금시위인개(逢門今始爲人開)

우리 집 남쪽과 북쪽으로는
봄의 시냇물이 갈라서 흐르는 지라
보이는 건 오직 갈매기 떼가 매일 오가는 것뿐이오
옥 같은 오솔길을 주인을 위해 쓸어 두지는 않았지만
당신이 온다면 바로 사립문을 열어 두겠소

시구 밑으로

‘봉(峯)’이라는 짤막한 서명이 달려 있었다.

이것은 두보(杜甫)의 ‘객지(客至)라는 시의 전반부로, 손님을 맞이할 때 자주 인용되는 시구였다. 그런데 그 구절 중 네 개의 글자가 원래와 달라져 있었다.

첫 문구의 ‘판(判)’은 원래는 ‘개(皆)’였고. 셋째 문구의 ‘옥(玉)’과 ‘주(主)’도 원본은 ‘화(花)와 ‘객(客)’ 이라는 글자였으며, 네 번째 문구도 ‘인(人)’이 아닌 ‘군(君)’이었다.

언뜻 보기에는 손님을 초청하는 두보의 시구를 그대로 적어 놓은 서신 같지만, 네 군데의 글자가 살짝 바뀌어 있는 것이다. 강호제일의 기재라는 모용 공자가 설마 두보의 유명한 시를 잘못 적을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언가 또 다른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 아닐까? 공교롭게도 바뀐 글자들을 합쳐 보면 ‘판옥주인(判玉主人)’이라는 단어가 된다. ‘옥의 주인을 판가름 낸다.’ 라는 의미였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옥’이란….?

진산월은 천천히 서신을 접었다. 그런 다음 냉옥환을 향해 조용한 음성을 내뱉는 것이었다.

“기꺼이 초청에 응하겠다고 전해 주시로.”

그러고는 이내 짤막한 한마디를 덧붙였다.

“나도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다고……”

그의 나직한 말속에 담겨 있는 깊고 복잡한 감정의 소용돌이는 누구도 짐작하지 못할 것이다. 냉옥환은 의미를 알 수 없는 투명한 시선으로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용무가 끝나자 냉옥환은 인사를 하고는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모습이 밖으로 사라질 때까지도 진산월은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무수한 상념이 그의 머릿속을 이리저리 휘돌고 있었다. 청룡궤를 전하기 위해서라도 찾아가야만 했던 구궁보에서 정식으로 초청장이 온 것이다. 초청장의 주인이 자신이 만나고자 했던 모용단죽은 아니었지만, 모용봉의 초청은 나름대로 그에게는 더욱 각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엄밀히 말해서 모용봉이 보내온 것은 초청장을 빙자한 도전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옥의 진정한 주인을 가려 보자는 그의 제안은 놀랍도록 무례하고 직설적이었지만, 진산월은 그것만으로도 모용봉이란 인간의 한 단면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매사에 자신만만하고 세상이 자신을 위주로 돌아간다고 확신하고 있는 자 특유의 오만하고 독선적인 성격을 엿볼 수 있었던 것이다.

옥의 주인을 판가름 내자고? 기꺼이 그래 주겠다. 그녀를 되찾아올 수만 있다면 모용봉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존재라도 기꺼이 상대해 주겠다. 그녀를 위해서,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 모용봉은 반드시 넘어야할 봉우리였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진산월은 예전에 느꼈던 숙명이라는 이름의 괴물이 이미 자신의 곁에 가까이 다가와 있음을 강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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