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4권 모산지연(姆山之宴)편 : 9화
제 248장 산장만찬(山莊晩餐)
소호(巢湖)의 물살은 끝없이 푸르렀다. 언제 비가 왔느냐는 듯 맑게 갠 하늘 아래 출렁이는 소호의 물살은 마치 물감을 뿌려 놓은 듯 깊고 푸른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진산월 일행이 소호에 도착한 것은 장풍을 떠난 다음 날의 늦은 오후였다. 아직 해가 지지는 않았으나, 오후의 햇살이 긴 그림자를 사방에 드리우고 있었다. 일행보다 먼저 소호의 호반(湖畔)으로 말을 달려 갔던 동중산이 이내 한 사람을 대동하고 돌아왔다.
“혁리 공자의 수하라는 자가 찾아왔습니다.”
얼굴의 하관이 길쭉하고 단단한 체구의 이십 대 청년이 진산월의 앞으로 다가와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혁리 공자님을 모시고 있는 환악(桓岳)이라 하옵니다. 천하에 대명이 자자한 진 장문인을 뵙게 되어 금생의 다시없는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진산월은 담담하게 그의 인사를 받았다.
“반갑네. 안내를 부탁하네.”
환악은 민첩한 동작으로 일행의 앞에서 길을 선도하기 시작했다. 행동이나 눈빛만 보아도 제법 탄탄한 수련을 쌓은 고수임을 알 수 있었다.
모산도는 소호의 한복판에 있는 섬이었다. 섬 자체가 하나의 산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산과 호수가 빛어내는 풍광이 가히 절경이라 할 만해서 예로부터 소호 일대에서 가장 유명한 경승지로 손꼽히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모산도에는 명문 세가나 대부호의 별장이 곳곳에 있었고, 소호 호반에서 모산도로 가는 나룻배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진산월 일행이 호숫가에 있는 나루터로 가니 상당히 큰 배 한 척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환악이 그들을 배로 인도하며 배에 대한 설명을 했다.
“이 배의 이름은 피번(避繁)이라고 하는데, 소호 일대에서는 가장 크고 화려한 배들 중 하나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동중산이 그의 말을 듣고 있다가 나직하게 웃었다.
“혁리 공자께서는 꽤나 세속의 번잡함을 싫어하시는 모양이오. 피번을 타고 추한산장으로 간다니 상당히 운치 있는 일 아니오?”
“배 이름이 지어진 경위는 제가 모르고 있습니다.”
환악의 다소 엉뚱한 대답에 동중산은 피식 실소를 터뜨렸으나 더 이상은 묻지 않았다. 피번의 내부는 제법 크고 안락했으나, 중인들은 모두 선실로 내려가기보다는 갑판에 있는 것을 택했다. 그것은 그만큼 피번의 넓은 갑판에서 바라보는 소호의 경치가 일품이었기 때문이다.
날은 그야말로 일 년 중 여행하기 가장 좋은 계절인 오월의 정점을 지나고 있었고, 오늘의 날씨는 비가 온 후라서인지 그 어느 때보다도 맑고 쾌청했다. 진산월이 남들처럼 가만히 소호의 끝없이 출렁이는 물결을 바라보고 있을 때, 성락중이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제 남궁가의 공자를 만난 후로 계속 표정이 어둡더니 오늘은 조금 나아 보이는군. 마음이 불편하면 굳이 이번 초대에 응할 필요가 없지 않겠나?”
진산월은 조용히 고개를 내저었다.
“가야만 하는 일입니다.”
“아직도 혁리공이 낙사질을 밖으로 유인해 낸 당사자라고 생각하고 있나?”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이번 여정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피아(彼我)를 구분해야만 앞으로의 일을 차질 없이 진행할 수 있습니다.”
성락중의 표정은 평소답지 않게 조금 무거웠다.
“하지만 상황을 보니 일이 잘못되었을 경우 만만치가 않을 듯 하네. 호수에 있는 섬이라고 해서 그러려니 했는데, 막상 와 보니 이건 바다 한복판에 있는 섬이라 해도 믿을 정도이니 말일세. 이 정도 거리라면 만약의 사태에 섬에서 뭍으로 몸을 피하는 것도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을 걸세.”
“뭍으로 피할 일은 없을 겁니다. 어떤 상황이든 섬 안에서 모든 일이 종결될 테니 말입니다.”
진산월의 단호한 말에 성락중은 퍼뜩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진산월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해 보였으나, 그의 눈속에 번뜩이고 있는 강렬한 안광을 보는 순간 성락중은 진산월이 무언가 단단히 결심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성락중은 눈앞에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모산도의 전경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까딱하면 저 아름다운 섬이 피로 물들지도 모르겠군.”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야지요.”
진산월의 말에 성락중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조금씩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노을 속에 떠 있는 모산도의 모습이 마치 앞으로 닥칠 불길한 일을 예고하는 것 같아서, 성락중은 자신도 모르게 한 차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서 오십시오, 진 장문인.”
혁리공은 추한산장의 정문까지 나와서 진산월 일행을 맞이했다. 추한산장은 모산도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 높지 않은 모산도 정상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추한산장은 부근에 다른 건물의 모습도 전혀 보이지 않았고 짙고 울창한 수림만이 펼쳐져 있어서, 그 안에 있으니 이곳이 그리 크지 않은 섬 안의 장소라는 것을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추한산장이라는 이름에 너무도 어울리는 곳이 아닐 수 없었다. 추한산장 안으로 들어서니 한 채의 고색창연한 전각과 몇 채의 작고 아담한 건물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혁리공은 일행을 좌측의 건물 중 한 곳으로 안내했다.
‘적휴각(適休閣)’이라는 작은 편액이 달린 건물은 고아(高雅)하고 한적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적휴각 안으로 들어가자 사방으로 크고 작은 방들이 연결된 제법 커다란 대청이 나왔다.
“이곳에서 잠시 쉬고 계십시오. 잠시 후에 정식으로 모시겠습니다.”
진산월은 지나가는 말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다른 건물에 제법 인기척이 들리던데, 오늘의 손님은 우리뿐이오?”
혁리공은 자신의 머리를 탁 쳤다. “내 정신 좀 보게. 그렇지 않아도 말씀드리려 했는데, 진 장문인을 다시 만난 기쁨에 깜박 잊고 말았습니다. 제 산장에 귀빈 몇 분이 와 계십니다. 괜찮으시다면 잠시 후의 연회에 그분들과 동석을 하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어느 방면의 고인들인지 알 수 있겠소?”
혁리공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내걸렸다. “모두 강호의 기인(奇人)들이시니 진 장문인의 영명(英名)에 누(汚)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 그분들의 정체를 아는 것은 연회의 작은 즐거움으로 남겨 두시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군요.
마찬가지로 그분들께도 진 장문인 일행의 신분은 알리지 않았습니다.”
진산월은 혁리공의 미소 띤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시오.”
“고맙습니다. 그럼 잠시 후에 뵙도록 하지요.”
혁리공이 밖으로 나간 후 동중산이 진산월에게 다가왔다.
“제가 나가서 다른 곳의 손님들이 누구인지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그럴 필요는 없다. 혁리공의 말대로 잠시 후의 소소한 즐거움으로 남겨 두는 것도 좋겠지.”
동중산의 얼굴에 약간은 걱정스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하지만 연회의 상대가 누구인지 미리 알아 두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진산월은 동중산을 바라보더니 모처럼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걱정스러운 게냐?”
동중산도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제자가 소심해서인지 왠지 이번 연회가 순탄하게 끝날 것 같지 않은 예감이 자꾸 드는군요.”
“혁리공이 이번 연회에서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면 네가 나간다 해도 쉽사리 상대의 정체를 알기는 힘들 것이다. 반면에 혁리공이 순수한 마음에서 연회를 여는 것이라면, 상대가 누구인지 조금 일찍 안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장문인의 말씀이 옳습니다만….”
동중산은 아직도 미련이 남는지 입구 쪽을 힐끔거렸다. 성락중이 진산월을 향해 입을 열었다.
“손풍과 소응은 어찌할 생각인가? 그들도 연회에 참석하게 할 텐가?”
진산월은 한쪽에 있는 손풍과 유소응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손풍은 저녁마다 계속되고 있는 성락중과의 내공 수련에 지쳤는지 안색이 초췌하고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진산월과 눈이 마주치자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호탕하게 소리쳤다.
“제자는 기꺼이 연회에 참석하여 본 파의 제자다운 면모를 보이도록 하겠습니다.”
진산월의 시선이 손풍의 옆에 있는 유소응에게로 향했다. 유소응은 평소의 무덤덤한 모습으로 짤막하게 말했다.
“사부님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어린아이답지 않은 그의 모습에 뇌일봉이 피식 웃고 말았다. “저 녀석은 정말 보면 볼수록 애늙은이로군. 두 녀석은 내가 지켜 줄 테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뇌 대협께서는 연회에 참석하지 않으실 생각이십니까?”
“이틀 동안 먼 길을 달려왔더니 조금 피곤하구나. 더구나 혁리가 애송이 녀석의 기분 나쁜 면상을 계속 보는 것도 그리 내키지 않고…. 어차피 그 녀석이 접대하고 싶은 사람은 너일 테니, 이번에 노부는 그냥 쉬도록 하마.”
이번 연회는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길흉(吉凶)을 예측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진산월은 뇌일봉이 두 사람과 함께 쉬겠다는 말에 흔쾌히 승낙을 했다. 백척간두(百尺竿頭)의 위험한 곳이 될지도 모르는 연회장에 무공도 제대로 익히지 않은 그들을 데려가는 것은 아무래도 불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손풍이 뭐라고 나직하게 투덜거렸으나 심하게 반항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매일 계속되는 십이경맥의 타통으로 심신이 많이 지친 모양이었다.
십이경맥을 뚫을 때마다 손풍은 여전히 고통스러워했으나 처음처럼 꼬리를 말고 도망치려 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성락중이 그에게 모든 사실을 솔직하게 밝히고 십이경맥을 타통하는 것만이 그가 온전히 무림인으로 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무언가 특이한 영약을 먹은 적이 없느냐는 성락중의 물음에 한동안 골똘히 생각에 잠기던 손풍은 손뼉을 탁 치며 말했다.
“어렸을 때부터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별의별 약을 다 먹긴 했는데…. 아! 그러고 보니 열다섯 살 때인가 아버지의 보물 창고에 몰래 들어갔다가 그곳에서 이상하게 생긴 물을 마신 적이 있습니다.”
“보물 창고?”
“남들은 보정산이라고 하는 모양인데, 저는 그냥 보물 창고라고 부릅니다. 그 안에 별의별 희한한 것이 다 있거든요.”
성락중은 다시 물었다. “어떻게 생긴 물이냐?” 손풍은 당시의 일을 기억하려는 듯 잠시 눈을 가늘게 뜬 채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특별하게 담가 놓은 술인 줄 알았습니다. 푸르스름한 빛을 띠고 있는 투명한 액체라서 별다를 게 없어 보였거든요. 한쪽 구석에 있던 작은 유리병 안에 담겨 있어서 한동안은 못 보고 지나치기도 했었습니다.”
“그래서?”
“병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아도 아무 냄새도 나지 않기에 맛만 살짝 보려고 혀를 갖다 댔는데, 혀에 닿자마자 차가운 것이 목구멍 안으로 쑥 들어가더군요. 깜짝 놀라서 병을 보니 어느새 그 안에 있던 푸른 물들이 몽땅 제 뱃속으로 사라진 겁니다. 처음에는 잘못 마신 것이 아닌가 하여 걱정을 하기도 했는데, 며칠이 지나도록 아무 이상이 없어서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아무 맛도 느끼지 못했느냐?”
“느낄 겨를도 없었습니다. 그 푸른 물이 언제 내 뱃속으로 들어갔는지도 몰랐으니 말입니다.”
성락중의 눈에 한 줄기 날카로운 기광이 번뜩이고 지나갔다.
“무미무취(無味無臭)한 청수(靑水)라…… 그 물이 혀에 닿는 순간 차가운 기운을 느꼈다고 했느냐?”
손풍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게 무슨 물인지 아십니까?”
성락중은 한동안 침묵하다 묵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내 짐작이 맞다면 그건 물이 아니다.”
“예? 물이 아니라고요?”
“그건 음기(陰氣)의 결정(結晶)이다. 취수정(翠髓精)이라고 하지.”
손풍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취수정? 마시면 안 되는 겁니까?”
“보통 사람이 그걸 마시면 온몸이 얼어붙어서 차디찬 시신이 되고 만다.”
손풍의 손가락이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예? 전 멀쩡했는데요?”
“잘 생각해 보아라. 그걸 마신 다음에 무언가 다른 걸 먹지 않았느냐?”
손풍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러고 보니…. 그때 몸에 한기가 들어서 하수오같이 생긴 과일 하나를 먹긴 했습니다. 그러자 추위가 가시며 뱃속이 든든해져서 배를 두드리며 보물 창고를 나온 기억이 나는군요.”
“그 과일은 어떻게 생겼느냐?”
“짙은 녹색에 꼭지가 붉은색이었고, 어린아이의 주먹만 했습니다. 아주 달고 맛있더군요.”
성락중은 그의 말을 듣고는 어이가 없는지 허허거리며 웃다가 말해 주었다.
“그건 아마도 홍녹룡(紅綠龍)일 것이다.”
“그것도 먹으면 안 되는 겁니까?”
“그건 천하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강한 양기(陽氣)를 지닌 열매다. 네가 취수정을 마시지 않고 그걸 먹었다면 한 입 베어 무는 순간에 몸속의 내장이 송두리째 타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손풍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이구…. 제가 큰일 날 뻔했군요.”
성락중은 그의 과장된 모습에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 정도가 아니라 너는 정말 천운(天運)을 만난 것이다. 취수정과 홍녹룡은 무림인이라면 누구나가 꿈에서도 얻길 원하는 귀중한 영약들인데, 너는 그 두 가지를 모두 먹지 않았느냐? 만약 홍녹룡을 먼저 먹었다면 참변을 면치 못했을 텐데, 취수정을 먼저 마시고 홍녹룡을 먹는 바람에 변을 당하기는커녕 오히려 인세(人世)에 보기 드문 막대한 기운을 몸속에 지니게 된 것이다.”
“그렇군요. 제가 운이 좋았네요.”
손풍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성락중은 그저 웃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단순히 운이 좋다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천고(天古)의 기연(奇緣)이었다. 다만 그때 손풍이 내공을 익힌 상태여서 스스로 운공을 했거나, 누군가 강호의 고수가 진기로 도인(導引)을 해 주었다면 그의 몸은 단번에 벌모세수(伐毛洗髓)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어 최고의 내공력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며, 상황에 따라서는 환골탈태(換骨奪胎)도 가능할지 몰랐다. 하나 손풍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그저 건강해지는 정도에 그치고 말았다. 오히려 몸속의 기운을 감당하지 못하고 그때부터 점점 행동이 거칠어지고 난폭해져서 나중에는 누구나가 고개를 내젓는 파락호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성락중은 그런 점까지는 말하지 않고 진중한 눈으로 손풍을 지그시 응시했다.
“너의 신체는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탐을 내는 최고의 기운을 간직하고 있다. 네가 그 기운을 네 마음대로 조절할 수만 있다면 누구보다 빠른 시일 내에 강호의 뛰어난 고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손풍은 눈을 반짝인 채 열심히 그의 말을 듣고 있다가 그답지 않게 다부진 음성으로 말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사숙조께서 지켜봐 주십시오.”
“이를 말이냐? 그러니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앞으로 구일 동안은 이를 악물고 참아야 한다.”
“자신 있습니다.”
손풍은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큰소리를 쳤다. 그 덕분에 그는 매일 저녁 아프다는 내색도 못 하고 끙끙거리며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손풍이 과연 인간으로는 참기 어려운 고통을 견디고 십이경맥을 모두 타통하여 취수정과 홍녹룡의 기운을 자신의 뜻대로 조절할 수 있게 될지는 며칠 안으로 판가름 나게 될 것이다.
- * *
낙일방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려 보았다.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제외한 나머지 손가락은 모두 정상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오른손 엄지손가락은 부러진 상태에서 무리하게 태인장의 공력을 사용한 탓에 상처가 워낙 깊어서 아직도 움직일 때마다 상당한 통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도 억지로라도 주먹을 쥐려면 못 할 것도 없었다. 왼쪽 팔의 부상도 많이 아물어서 어깨를 돌려도 약간의 뻐근함만을 느낄 정도였고, 전신의 기력은 상당히 회복되어 있었다. 옆구리의 뼈가 완전히 아물지 않아서 아직 격렬한 움직임을 할 수 없다는 걸 제외하고는 전반적인 몸 상태는 당초 기대보다 훨씬 양호해 보였다.
‘이제는 돌아갈 때다.’
낙일방은 말도 없이 사라진 자신 때문에 걱정하고 있을 진산월과 일행들을 생각해서라도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었다. 남궁세가 이후의 목적지는 임영옥이 있는 구궁보이므로, 지금쯤 일행들은 합비 부근을 지나고 있을 것이다. 낙일방은 합비에서 구궁보가 있는 구화산까지 가는 가장 빠른 길이 어디쯤인가 생각하다가, 어차피 구화산으로 가려면 장강(長江)을 건너야 한다는 것을 떠올렸다.
‘용왕취(龍王嘴) 부근에 가서 수소문하면 되겠군.’
구화산으로 가려면 장강 너머에 있는 대통(大通)을 지나야 하는데, 장강 이북에서 대통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 용왕취에서 장강을 건너는 것이다. 낙일방이 앞으로의 일정을 생각하고 있을 때, 문이 열리며 능자하의 모습이 나타났다.
“어서 오십시오, 누님.”
그동안 능자하와 상당히 가까워진 낙일방은 자연스레 그녀와 누님, 동생 하는 사이가 되었다. 여자에게는 늘 무심했던 낙일방으로서는 이례적이라 할 만큼 빠른 시간 내에 그녀와 친해진 것이다. 능자하는 차분한 시선으로 낙일방을 살펴보더니, 그의 옷차림이 어느 때보다 깔끔하고 단정해진 것을 보고는 이내 그의 마음을 알아차렸다.
“종남파 고수들에게로 돌아가려는 것이로구나?”
그녀의 음성은 나이 먹은 큰누나가 막내 동생을 대하듯 포근하고 부드러웠다. 그녀의 이런 모습이 낙일방의 굳게 닫힌 마음을 허무는 데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낙일방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몸도 대충 나은 것 같으니 이제 돌아가야지요. 장문 사형이 몹시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낙일방의 장문 사형이라면 당금 강호를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는 불가일세(不可一世)의 검객 신검무적일 것이다. 그녀는 지난 며칠간 낙일방이 틈만 나면 그에 대한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낙일방이 그를 얼마나 흠모하고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지독한 부상에도 신음 소리 한 번 내지 않을 정도로 독한 구석이 있는 낙일방이 신검무적에 대한 말을 할 때면 마치 어린 소년처럼 한없이 들뜨고 천진해졌다. 그런 낙일방이 정신을 차리자마자 돌아가지 않은 것은 그나마 부서진 갈비뼈가 붙기 전까지는 꼼짝도 하지 말라는 노방의 엄명 때문이었다. 능자하는 낙일방이 얼마나 돌아가고 싶어 하는지 알고 있기에 잠시 머뭇거렸으나, 이내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는 나직한 음성으로 속삭이듯 말했다.
“나와 같이 한 군데 들러 보면 안 될까?”
낙일방의 눈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누님과 같이 어디를 간단 말입니까?”
“동생을 꼭 만나고 싶어 하는 분이 계셔.”
낙일방은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잘라 말했다.
“그럼 장문 사형을 뵌 다음에 그분을 찾으러 가도록 하지요.”
능자하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내걸렸다.
“그럴 수 있으면 내가 지금 말하지도 않았지. 나는 동생이 가급적 빨리 그분을 만났으면 해.”
낙일방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능자하가 어지간한 일로는 자신에게 이런 채근을 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기에 낙일방은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급한 일입니까?”
“내 생각에는 다른 어떤 일보다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인 것 같아. 동생을 위해서도 그게 가장 바람직한 일일 거야.”
“나를 위해서 바람직한 일이라니요?”
“그분을 만나 보면 내 말뜻을 알게 될 거야.”
낙일방의 마음은 이미 하늘을 훨훨 날아 자신의 일행에게 가고 있었기 때문에 절로 답답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자신에게 일행에게로 돌아가는 것보다 더 급하고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그녀가 정확한 내용도 설명하지 않고 누군가를 만나야 한다고만 말하고 있으니 낙일방으로서는 거절하기도 뭐하고 승낙하기도 뭐한 난감한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하나 낙일방은 이내 자신의 마음을 정리했다. 며칠 되지 않았으나 지금까지 그가 보아 온 능자하라는 여인은 결코 불필요한 일을 강요하거나 헛된 마음으로 남을 농락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자신이 모습을 감춘 지 이미 상당한 시일이 경과해 버렸는데, 며칠쯤 더 늦는다고 큰 문제가 일어날 것 같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항상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 주는 능자하가 처음으로 하는 부탁을 매몰차게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낙일방은 한 차례 어깨를 으쓱하고는 이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누님 말씀대로 할 테니 제발 그 말 안 듣는 남동생을 보는 듯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지 마십시오.”
능자하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고마워. 결코 동생에게 해가 되는 일은 아닐 거야.”
* * *
연회는 유시(酉時)에 시작되었다. 자신들을 이곳까지 안내했던 환약이란 청년의 인도로 산장의 중앙에 있는 커다란 전각으로 간 진산월 일행은 곧 넓은 대청에 화려하게 차려진 연회석을 볼 수 있었다. 길게 늘어선 연회석은 십여 명 정도는 충분히 앉을 수 있어서 단지 네 명뿐인 진산월 일행의 숫자에 비하면 지나치게 넓어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연회석에는 이미 몇 명의 인물들이 앉아 있다가 대청으로 들어오는 진산월 일행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진산월 일행을 반갑게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누추한 곳에 모시게 되어 송구스럽습니다.”
인사를 하는 사람은 혁리공이었다. 혁리공의 말과는 달리 대청 안은 적당히 호화로웠고, 온갖 산해진미가 펼쳐져 있어서 전혀 누추해 보이지 않았다. 아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결코 소홀한 대접도 아니었다. 오히려 이곳이 섬 안의 산장임을 생각한다면 상당한 정성을 기울여 연회를 준비했음을 알 수 있었다.
혁리공과 함께 앉아 있던 사람은 모두 이남일녀였는데, 두 명의 남자는 사십 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중년인과 이십 대 중후반의 젊은 청년이었다. 두 사람 모두 신태 비범해 보였으며, 특히 청년의 이목구비가 수려해서 중인들의 시선을 끌었다.
여인은 사십 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평범한 외모의 소부(少婦)였는데, 앉아 있는 위치나 분위기로 보아 중년인과 부부인 듯했다. 동그란 얼굴에 다소 복스럽게 생긴 인상이었다.
혁리공은 그들을 먼저 진산월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이쪽 두 분은 강호에서 금실 좋기로 소문난 곽산쌍려(藿山雙侶) 여씨(呂氏) 부부이고, 저 친구는 내 죽마고우인 화옥(華玉)이라고 합니다.”
중년인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했다.
“반갑소. 곽산의 여불회(呂不悔)라 하오.”
곽산쌍려 여불회와 기아향(祁雅香) 부부는 곽산은 물론이고 안휘성 일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고수들이었다. 그들은 개개인이 놀라운 실력을 지닌 무림의 고수들일 뿐 아니라 사람 사귀는 걸 좋아해서 무척이나 폭넓은 대인관계를 자랑하고 있었다.
젊은 청년 또한 정중하면서도 깔끔한 태도로 포권을 했다.
“소주 화씨세가(華氏世家)의 화옥이라 하오.”
화씨세가는 소주에서 혁리가를 제외하고는 가장 유명한 명문세가였다. 혁리가가 강호의 무가(武家)가 아닌 상인 가문임을 생각해 본다면 화씨세가가 실질적인 소주 제일의 무가(武家)라고 할 수 있었다.
진산월은 그들을 향해 짤막하게 인사를 했다.
“종남의 진산월이오.”
여불회와 화옥은 물론이고 한쪽에서 조용히 앉아 있던 기아향마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신검무적?”
화옥이 참지 못하고 경호성을 터뜨리자 혁리공이 손뼉을 치며 웃었다.
“하하, 너의 그런 표정은 정말 모처럼 보는구나. 어떠냐? 놀랐지?”
화옥은 그를 꾸짖을 생각도 못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물었다.
“정말 신검무적이란 말이냐?”
“그렇다. 내가 진 장문인을 모셔오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아느냐?”
화옥은 반쯤 입을 벌린 채 진산월을 쳐다보고 있다가 황급히 다시 허리를 숙였다.
“진 장문인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진산월은 담담하게 그의 인사를 받았다.
“별말씀을. 나도 화씨세가의 신수공자(神繡公子)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었소.”
‘수(繡)’라는 단어는 남자의 별호에 붙이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하나 한 사람에게만은 예외였다.
화옥은 어려서부터 수를 놓는 것을 좋아했다. 다만 그가 수놓을 때 사용하는 것이 바늘이 아니라 검(劍)이고, 수를 놓는 대상이 옷감이 아니라 사람의 얼굴이라는 점만이 여느 여자들의 바느질과 다를 뿐이었다.
그는 불과 열일곱의 어린 나이에 소주의 뒷골목에서 오랫동안 악행을 일삼던 흑도방(黑刀幇) 무리 서른두 명을 제압하여 그들의 얼굴에 검으로 ‘제악(制惡)’이라는 글자를 새겨 넣음으로써 일약 유명해졌다. 그 후로 소주 일대의 흑도 무리들은 그를 보기만 해도 꼬리를 말고 도망쳐야만 했다.
몇몇 사람들은 그의 그런 행동이 지나치다고 생각했으나, 소주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히려 그의 행동에 찬사를 보내는 걸 마다하지 않았다. 그가 얼굴에 검으로 수를 놓은 자들이 하나같이 인면수심의 악도(惡徒)들이었기 때문이다.
화옥에 이어 여불회와 기아향 부부도 진산월에게 다가와 조금 전과는 달리 한결 정중해진 모습으로 인사를 해 왔다.
진산월은 그들에게 자신의 일행들을 한 명씩 소개해 주었다. 여불회는 진산월의 옆에 있는 점잖게 생긴 중년인이 남궁세가의 최고 고수를 꺾은 신비의 고수임을 알게 되자 감격 어린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성 대협이 남궁가의 남궁연과 겨룬 비검(比劍)은 검을 익힌 강호의 많은 검객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소. 나도 또한 그 소식을 듣고 가슴이 설레어 밤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할 정도였소.”
“오늘 이렇게 강호를 위진(威震)시키고 있는 전설의 주인공들인 진 장문인과 성 대협을 직접 만나게 되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소.”
여불회는 쾌활하고 사람 사귀기를 좋아한다는 강호의 소문처럼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겉으로 드러내었다. 그래서 다소 경박하다는 인상을 주기도 했으나, 호탕한 웃음과 구김살 없는 표정으로 많은 사람들의 호감을 사고 있었다.
기아향은 좀처럼 말이 없는 조용한 여인이었으나, 표정이 밝고 인상이 선해서 여불회와는 잘 어울려 보였다.
서로 간에 인사를 마치자 여불회와 화옥 등은 진산월에게 가장 상석에 가서 앉으라고 권유했다. 하나 진산월은 성락중에게 상석을 양보하고 자신은 그의 오른쪽 자리로 가서 앉았다. 공식적인 자리였다면 장문인인 진산월이 상석에 앉았을 것이나, 오늘의 연회는 어디까지나 사석(私席)이므로 사숙인 성락중을 배려해 준 것이다.
전흠이 성락중의 좌측에 앉고, 동중산이 진산월 옆에 착석하자 그제야 여불회 부부와 화옥도 자리에 앉았다. 진산월은 주위를 둘러보고는 이내 아직도 연회석에 몇 자리가 비어 있음을 알아차렸다.
“아직 올 사람이 모두 온 건 아닌 것 같군.”
혁리공의 입가에 예의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확실히 진 장문인은 날카로우시군요. 아직 몇 분이 오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말이 나오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그때 두 명의 인물이 대청 안으로 들어섰다. 삼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황삼인과 그보다 대여섯 살쯤 많아 보이는 흑의 중년인이었다.
진산월은 황삼인이 나타날 때부터 그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황삼인에게서 좀처럼 보기 힘든 강력한 기도를 느꼈던 것이다. 황삼인은 양팔을 휘두르며 휘적휘적 앞으로 걸어오더니, 진산월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을 알았는지 혁리공을 향해 퉁명스런 음성을 내뱉었다.
“저자가 누구인가?”
그의 거칠고 무례한 말에 혁리공이 질겁을 한 채 재빨리 말했다.
“견 대협(甄大俠)께서는 너무 성급하시군요. 그렇지 않아도 제가 소개해 드리려고 했습니다. 이분은 종남의 장문인이시며 당금 무림의 제일가는 검객이신 신검무적 진산월, 진 대협이십니다.”
황삼인과 그의 옆에 나란히 서 있던 흑의 중년인이 일제히 흠칫하는 눈으로 진산월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흑의 중년인은 신기하단 눈으로 진산월의 전신을 요모조모 살펴보고 있는 반면에 황삼인은 입가에 냉랭한 미소를 매달았다.
“훗. 누가 내 앞에서 이토록 태연스레 앉아 있나 했더니, 요즘 최고의 명성을 날리고 있는 종남파의 장문인이셨군. 하나 당대 무림에서 제일간다는 표현은 영 귀에 거슬리는걸.”
다분히 시비조인 그의 말에 혁리공은 울상을 지어 보였다.
“그게 제가 지어낸 말입니까? 모든 무림인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보다 두 분께선 인사를 나누시지요. 진 장문인, 이분은 강호 제일의 쾌도(快刀)이신 질풍추혼 견동, 견 대협이십니다.”
진산월은 이미 ‘견’이라는 성을 들었을 때부터 황삼인의 정체를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강호 무림에서 ‘견’이라는 성은 결코 흔하지 않으며, 황삼인처럼 쳐다보기만 해도 칼로 베일 것 같은 날카로운 기세를 뿌리는 자는 더더욱 흔치 않았다.
더구나 그의 허리춤에는 그 유명한 붉은색의 혈전도(血電刀)가 매달려 있지 않은가? 견동의 혈전도가 일단 움직이면 핏빛 섬광과 함께 상대의 목이 떨어진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그만큼 그의 쾌도는 빠르고 무서웠다.
그와 함께 무림쌍쾌라 불리고 있는 분광검객 고심홍이 눈부신 쾌검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것에 비해 견동은 일단 손을 쓰면 반드시 피를 보고야 말았다. 그래서 강호인들은 고심홍의 검이 더 빠를 거라 생각하면서도 견동의 도를 더 두려워했다. 견동이 포권도 하지 않고 우뚝 서 있자 혁리공이 난처한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누군가가 먼저 인사를 해야 자연스럽게 일이 진행될 텐데, 둘 중 누구도 상대에게 인사를 하려 하지 않았다. 진산월의 입장에서도 상대가 자신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는데 일파의 장문인 신분으로 먼저 고개를 숙일 수는 없었다. 자연스레 장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다행히 그때 견동과 함께 왔던 흑의 중년인이 앞으로 나서며 진산월을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유독 기개가 현앙하다 싶었는데, 이제 보니 신검무적 진 장문인이셨구려. 반갑소. 나는 곤명(昆明)에서 온 동방야(東方野)라고 하오.”
그 말에 동중산이 안색이 가볍게 변한 채 진산월을 향해 빠르게 속삭였다.
“운남 동방세가(東方世家)의 대공자(大公子)입니다.”
동방세가라는 말에 진산월은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사 년 전, 용문의 강변에서 봉황금시를 노리고 자신들을 습격했던 흑수사 동방건이 바로 동방세가 출신의 인물이 아니었던가? 비록 동방건은 임영옥의 손에 패해 아무런 성과 없이 물러나고 말았으나, 종남파로서는 동방세가의 인물을 만나는 것이 결코 달가울 리가 없었다.
더구나 동방야는 동방세가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위로 셋이나 되는 형들을 누르고 동방세가의 차기 가주로 낙점된 비범한 인물이었다. 부드러운 인상과 달리 그는 일 처리가 치밀하고, 누구보다도 냉정하고 결단력 있는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종남파 인물들의 반응을 알아차렸는지 동방야는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하하… 몇 년 전에 내 아우 녀석이 감히 종남파 고수들에게 헛된 짓을 하려다 봉변을 당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소. 그 녀석은 어려서부터 온갖 말썽만 저지르고 다니다 세가에서도 내쳐진 신세였는데, 지금은 살았는지 죽었는지 생사(生死)조차 알 수가 없구려. 그러니 그 녀석 때문에 나를 경계하는 일은 없었으면 하오.”
상대가 이렇게까지 나오는데 과거의 일에 연연해서 그를 멀리할 수는 없었다.
“종남의 진산월이오. 동방 대협을 뵙게 되어 반갑소.”
동방야의 나이는 마흔여섯이었으나, 그의 아버지인 패존(覇尊) 동방광일(東方光日)이 여전히 정정한 몸으로 가주의 지위를 지키고 있기 때문에 그는 아직도 대공자의 신분에 머무르고 있었다. 대개의 명문 세가의 가주들이 육십을 넘거나 자식의 나이가 사십을 넘으면 가주의 지위를 인계하고 뒤로 물러나는 것과는 전혀 달라서 한동안 무림인들의 입에 오르내리기도 했었다. 동방광일의 나이는 무려 일흔다섯이나 되었던 것이다.
동방야 덕분에 장내의 긴장감이 누그러들자 혁리공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모습이었다. 견동도 심드렁해졌는지 두 팔을 휘적거리며 한쪽에 가서 앉고 말았다. 동방야가 빙긋 웃으며 진산월을 향해 입을 열었다.
“진 장문인께서 이해하시오. 견동은 오늘 한 사람과 승부를 내려다 실패하여 잔뜩 골이 나 있는 상태요. 평소라면 저렇게 무례한 행동을 하지 않았을 거요.”
무림 제일 쾌도라는 견동이 누군가와 싸워서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는 말에 중인들은 모두 호기심 어린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진산월 또한 그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견 대협이 승부를 내지 못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겠소?”
“곧 알게 될 거요. 여기서 만나기로 했으니까.”
동방야의 말에 중인들이 어리둥절하여 서로 쳐다볼 때, 다시 한 사람이 대청 안으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