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5권 취와미인(醉臥美人)편 : 4화
제 254 장 비성신좌(飛星新座)
낙일방이 능자하를 따라 도착한 곳은 합비(合肥)의 동남쪽에 있는 함산(含山) 인근의 어느 이름 모를 작은 산장(山莊)이었다.
현판도 내걸려 있지 않은 산장은 야산의 한쪽 귀퉁이에 자리 잡고 있어서 여간해서는 눈에 잘 뜨이지도 않았고, 담벼락이 낡고 허름해서 볼 품 없어 보였다. 하나 막상 안으로 들어서니 잘 손질된 정원과 여러 채의 아름다운 전각들이 늘어서 있어서 겉으로 보기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더구나 입구에서 정원을 지나 중앙의 전각에 도착하기까지의 풍경이 상당히 수려할 뿐 아니라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어서 무척이나 공들여 꾸민 곳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낙일방이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자 능자하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이곳은 표일산장(飄逸山莊)이라고 하는데, 우리의 주요 거점 중 하나야. 그러니 너무 긴장할 필요 없어.”
낙일방은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사방에 적지 않은 고수들의 기척이 느껴져서 저도 모르게 신경이 쓰여 졌나 봅니다.”
능자하는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이 표일산장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과는 달리 성숙해에서도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곳이라, 상당수의 고수들이 도처에 잠복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고도의 훈련을 쌓고 특이한 은신술을 익히고 있어서 어지간한 사람들은 그들이 숨어 있다는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낙일방은 산장에 들어선 순간부터 그들의 기척을 알아차리고 있었던 것이다.
뒤에서 그들의 뒤를 졸래졸래 따라오던 송옥령이 호기심이 생긴 듯 물었다.
“오라버니는 나이도 그렇게 많지 않은 데 어떻게 그런 높은 내공을 가지게 되었나요?”
열다섯 살짜리 소녀의 입에서 나이가 많지 않다는 말이 나오니 약간은 우스꽝스러웠는지 낙일방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남자에게도 숨기고 싶은 비밀이 있는 법이란다.”
“피! 잘난 척 하기는…….”
송옥령은 그의 말이 못마땅한 지 입술을 삐죽거렸으나, 때마침 능자하가 그녀를 가볍게 꾸짖었다.
“무림인에게 무공 내력을 물어보는 것은 강호의 금기라는 것을 모르느냐? 쓸데없이 말썽을 피우지 말고 얌전하게 있도록 해라.”
송옥령은 움찔 하여 입을 다물었다. 하나 얼굴에는 무언가 심통 난 표정이 역력해 보였다. 사실 그녀는 잘생긴 낙일방이 마음에 들어서 그와 좀 더 친해지려고 노력했는데, 그때마다 낙일방이 자신을 너무 어린애 취급 하는 것 같아 내심 불만이 작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그의 앞에서 대사저인 능자하에게 야단맞는 모습까지 보이고 말았으니 창피하기도 하고 속이 상하기도 했던 것이다.
하나 이곳 표일산장은 워낙 중지(重地)이고 삼엄한 분위기인지라 자기 마음대로 성질을 부릴 수도 없어서 그저 심통 사나운 얼굴로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전각 안으로 들어가니 제법 널따란 대청이 나왔다. 대청 안에는 커다란 팔선탁이 놓여 있고, 그 주위로 의자들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전체적으로 고아(古雅)하면서도 실용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낙일방은 산장 안으로 들어와서 이곳까지 오면서 단 한 사람의 모습도 보지 못했기에 의아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숨어 있는 사람은 적지 않은데 정작 모습을 드러낸 사람이 없으니 괴이하구나. 이들은 설마 모두 이렇게 숨어서 지내고 있단 말인가?’
그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내실 쪽의 주렴이 열리며 다기(茶器)를 든 시비가 들어왔다. 시비가 찻잔에 차를 따르고 물러나자 능자하가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낙일방을 보고 조용히 웃었다.
“사람이 너무 없어서 이상하지?”
“평상시에도 이렇게 사람이 없습니까?”
“사실 이 산장의 진짜 시설들은 지하에 설치되어 있어. 다시 말해서 지상에 보이는 건물들은 모두 겉만 번지르르 할 뿐이고, 실제로 사람들이 주로 활동하는 공간은 지하에 있는 시설들이야.”
낙일방은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사람들이 모두 지하에 있다니 무척 특이하군요. 일부러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습니까?”
“그만큼 이 산장이 기밀을 유지해야 한다는 정도만 알아두면 돼.”
낙일방은 피식 웃었다.
“보다 자세한 사정을 알고 싶으면 성숙해에 가입이라도 해야 한다는 뜻이군요.”
지나가는 말로 대수롭지 않게 말했는데 의외로 능자하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녀의 표정이 진지하게 변해 있는 것을 보고서야 낙일방은 자신이 무심결에 한 말이 정곡을 찌른 것임을 알아차렸다. 그제야 낙일방은 이곳이 성숙해의 비밀거점 중에서도 무척이나 중요한 곳임을 알 수 있었고, 능자하가 자신을 이런 곳에 데려온 것에 대해 호기심과 부담감을 동시에 느끼게 되었다.
그때 주렴이 열리며 다시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에 들어온 사람은 건장한 체구에 짙은 흑삼을 입은 삼십 대 중반의 문사였다. 흑삼 문사의 얼굴은 그리 준수하지 않았으나, 태도가 당당하고 눈빛이 맑아서 호감이 가는 인상이었다.
흑삼 문사가 나타나자 앉아 있던 능자하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았다.
“어서 오세요.”
흑삼 문사는 그녀를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내가 너무 늦지 않았소?”
“우리도 조금 전에 도착했어요.”
“다행이구려.”
흑삼 문사는 그녀와 가벼운 인사를 주고받은 후 낙일방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낙일방은 왠지 가슴이 시원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아마도 그의 눈빛이 유난히 맑고 차갑게 정제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흑삼 문사는 별빛같이 반짝이는 눈으로 낙일방의 준수한 얼굴을 바라보고 있더니 이내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과연 옥면신권이란 이름이 과찬이 아니었구려. 만나게 되어 반갑소. 나는 이정악(李正岳)이라고 하오.”
낙일방은 별 생각 없이 그를 향해 포권을 했다.
“반갑습니다. 종남의 낙일방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듣고도 낙일방이 별다른 반응이 없는 것을 보고 흑삼 문사는 가만히 웃기만 했으나, 옆에 있던 송옥령이 참지 못하고 불쑥 끼어들었다.
“오라버니는 저 분의 이름을 듣지 못했나요?”
낙일방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유명한 분이신가?”
그 말에 송옥령은 물론이고 능자하마저 깜짝 놀란 표정이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호호……!”
능자하가 입을 가리고 웃더니 차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동생이 이분을 몰라보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지. 이분은 무림의 이름난 고수도 아니고, 강호에서 크게 활동한 적도 드물었으니 말이야.”
낙일방은 계면쩍은 표정으로 뒷통수를 긁적였다.
“제가 워낙 강호 경험이 일천(日淺)하여 아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누님이 자세하게 알려 주십시오.”
“번신봉황 이북해, 이 대협은 알고 있겠지?”
“그럼요. 무림구봉 중에서도 가장 신비하다는 분 아닙니까?”
“이분은 이 대협의 큰 아드님이셔. 성숙해 십이비성 중의 보병좌(寶甁座)를 맡고 계시지.”
강호제일의 신비인인 번신봉황 이북해의 큰아들이라는 말에 낙일방은 눈을 크게 떴다.
“아, 그렇군요. 제가 몰라 뵈어 죄송합니다.”
이정악은 담담하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나는 강호의 유명인사도 아니고 아버님처럼 뛰어난 무공을 지니고 있지도 않으니 낙 소협이 모르는 것도 당연한 일이오. 너무 신경 쓰지 마시오.”
하나 낙일방이 십이비성에 대해 조금만 더 자세하게 알았다면 보병좌가 십이비성의 첫 번째이며, 이정악이 실질적으로 십이비성의 우두머리로서 그들을 총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원래 성숙해는 십이비성과 이십팔숙의 두 개의 조직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성숙해를 만든 이북해는 외곽조직이라 할 수 있는 이십팔숙을 둘째 아들인 이정문에게 맡겼으나, 본진인 십이비성 만큼은 자신이 직접 관리를 했다. 십이비성 개개인이 하나같이 출중한 고수들이기 때문에 남에게 맡길 수 없었던 것이다.
하나 이북해는 천하를 돌아다니며 자리를 비울 때가 많아서 실질적으로 십이비성을 통솔하고 있는 사람은 큰 아들인 이정악이었다. 이북해가 십이비성의 첫 번째 자리인 보병좌를 이정악에게 맡긴 것도 자신의 부재 시에 이정악으로 하여금 십이비성을 이끌게 하려는 의도를 지닌 것이었다.
이정악은 이정문만큼 뛰어난 문명(文名)을 떨치지는 않았으나, 사람을 부리고 계획을 세우는 일에는 천부적인 자질을 보유하고 있어서 이북해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십이비성을 잘 이끌고 있었다. 그래서 이정문의 지혜보다는 이정악의 통솔력을 더 높게 평가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십이비성은 하나같이 비범하기 그지없는 인물들로서 그만큼 개성이 강하고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남달랐다. 그런 그들이 이정악의 지시를 순순히 따르고 있는 것은 그만큼 이정악이 그들에게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었다.
자리에 앉자 이정악은 다시 한 차례 낙일방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듣기로는 낙 소협이 심한 부상을 당했다고 했는데, 겉으로는 전혀 그런 흔적을 찾을 수 없구려. 몸 상태는 어떠시오?”
“노 신의께서 워낙 실력이 좋으셔서 회복이 빨랐습니다. 지금은 몸을 움직이는 데 전혀 불편함이 없습니다.”
이정악의 눈이 번쩍 빛났다.
“남과 싸우는 것에도 지장이 없겠소?”
뜻밖의 말에 낙일방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으나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내가 엉뚱한 질문을 해서 이상하게 생각하겠구려. 하지만 내 말을 듣고 나면 내가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알 수 있을 거요.”
이정악은 돌연 정색을 했다.
“낙 소협은 당금 강호의 최대 현안(懸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오?”
너무 거창한 질문에 낙일방은 잠시 멈칫 거렸으나 이내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그야 서장 무림과의 일이 아닙니까?”
“바로 보았소. 강호란 곳이 원래 크고 작은 일들이 수시로 벌어지는 곳이지만, 코앞으로 닥친 서장 무림과의 싸움이야말로 현재 모든 무림인들이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야 할 가장 큰 현안이라고 할 수 있소.”
이정악의 음성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말꼬리가 분명하고 울림이 뚜렷해서 듣는 사람의 마음에 묘한 신뢰감을 심어주고 있었다.
“문제는 이미 상당수의 서장 세력이 중원에 들어와 있다는 것이오. 그중 대표적인 것이 흑갈방인데, 낙 소협도 그 점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오.”
낙일방은 부지불식간에 고개를 끄덕였다. 흑갈방 때문에 몇 차례나 고충을 당한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이가 갈릴 지경이었다. 결국 자신이 일행들과 헤어져 생사지경(生死之境)에 처하게 되었던 것도 원인을 쫒아 올라가 보면 흑갈방과의 싸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겠는가?
“능 여협에게 들었을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서장 세력이 강북 뿐 아니라 강남 무림에도 침투해 있다고 생각하고 있소.”
“누님께 그에 대한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말하기가 편하겠구려. 나는 강남의 유수한 명문(名門)중 적어도 한 곳 이상이 서장 세력과 깊은 연계가 되어 있다고 보고 있소.”
낙일방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도 누님께 그런 말씀을 듣기는 했습니다만, 솔직히 아직까지도 선뜻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강남이라면 서장과 상당한 거리가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모두들 오랫동안 중원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가문들일 텐데, 어떻게 서장 무림과 손을 잡을 생각을 했을지 의문입니다.”
“낙 소협의 의문은 당연한 것이오. 실제로 우리도 처음에는 그런 점 때문에 많은 고민을 했었소. 하지만 이제는 그 점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확신을 가지고 있소.”
이어 이정악은 자신들이 그렇게 믿게 된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서장 무림이 중원에 세력을 심기 시작한 것은 십여 년 전부터요. 그리고 그 일의 중심에는 야율척이 있소.”
야율척이란 이름이 나오자 낙일방의 얼굴에 관심어린 빛이 가득했다. 강호에 몸을 담고 있는 무림인으로서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낙 소협도 알다시피 야율척은 서장 무림의 실질적인 우두머리요. 그의 이름이 처음 세상에 알려진 것은 이십여 년 전이지만, 강호인들이 그를 두려워하기 시작한 것은 십여 년 전의 모용 대협과의 일전 이후였소.”
그것은 강호인들이라면 누구나가 알고 있는 유명한 싸움이었다.
당시 모용 대협은 거의 반나절 동안이나 치열한 격전을 벌인 끝에 간신히 승리를 거두었다. 하나 모용 대협과 그의 나이를 생각해 보면 앞으로 시간이 흐를수록 모용 대협이 야율척을 상대로 이길 가능성은 극도로 희박하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짐작할 수 있었다.
야율척 또한 이번에는 모용 대협이 승리했으나 다음에는 자신이 승리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발언을 했고, 모용 대협은 그 말을 부인하지 못했다.
“당시 모용 대협과 싸우고 난 야율척은 서장으로 바로 돌아가지 않고 잠시 중원을 주유(周遊)했소. 그가 다시 서장으로 돌아간 것은 그로부터 육 개월 후였는데, 그동안 그는 중원에서 재질이 뛰어난 세 명의 기재들을 제자로 삼았고, 네 명의 능력 있는 고수들을 부하로 거두게 되었소. 서장에서는 그들을 삼공자(三公子)와 사패천(四覇天)이라고 부르고 있소.”
이정악은 짤막하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취미사 혈겁을 일으킨 서안 이씨세가의 이존휘가 바로 삼공자 중의 셋째요.”
낙일방이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존휘가 서장 세력과 연관이 있다는 건 알았는데, 역시 그렇게 된 일이었군요.”
이존휘에 대한 일은 워낙 인상이 깊어서 낙일방은 세세한 부분까지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이존휘는 취미사 혈겁을 조사하려는 각 문파의 고수들을 공격한 배후 인물로 지목되었고, 결정적인 순간에는 서장의 절학인 대수인으로 철장개천 공료를 살해하여 많은 무림인들을 경악케 했다. 하나 그 직후에 그가 매장원의 손에 죽음으로서 그에 대한 숱한 의문이 해결되지도 못하고 흐지부지하게 일이 마무리되고 말았다.
그런데 지금 이정악에게서 이존휘가 야율척이 중원에서 거둔 세 명의 제자들 중 한 명이라는 말을 듣게 되자, 그에 대한 많은 의문들이 상당부분 해소되었던 것이다. 당시 진산월과 동중산은 초가보의 배후에 이존휘가 있을 거라고 추측했었는데, 그들의 추측이 정확했다는 것이 다시 한 번 입증된 셈이었다.
낙일방은 문득 의아한 생각이 들어 물었다.
“이존휘가 삼공자라면 다른 두 명의 공자들은 누구입니까?”
이정악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바로 그 점이 내가 오늘 낙 소협을 만나려고 한 이유요.”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야율척의 제자가 세 사람인 것은 오랜 동안의 노력 끝에 알게 되었지만, 그들의 진실한 정체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소. 몇 달 전 서안에서 벌어진 일로 그중 한 사람의 신분은 밝혀졌지만, 다른 두 명의 정체는 여전히 오리무중(五里霧中)인 상태요.”
야율척의 두 제자의 정체가 밝혀지지 않는 것과 이정악이 자신을 만나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이정악은 낙일방의 마음 속 의문을 풀어주려는 듯 침착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우리는 그동안 꾸준히 강남 일대를 주시한 끝에 야율척의 제자로 의심할 만한 몇 사람을 찾아낼 수 있었소.”
낙일방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아직 확실치 않은 일이라 섣불리 밝힐 수는 없소. 자칫하면 엉뚱한 사람에게 누명을 씌우는 일이 될 테니 보다 확실한 증거를 잡게 되면 그때 알려 주겠소.”
예전의 낙일방이었다면 이런 말을 듣게 되면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거나 맥이 빠져 버려 불평어린 말을 토해냈을 것이다. 하나 이제는 그도 이런 식의 대화에 상당히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 말씀을 하려고 저를 보자고 한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좀 더 자세한 사정을 밝혀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낙일방이 침착한 표정으로 말하자 그의 반응이 의외였는지 이정악의 눈빛이 살짝 변했다. 심지어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능자하도 새삼스런 눈으로 낙일방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한없이 순진하고 어리숙하게만 보였던 낙일방이 노련한 강호인처럼 이정악을 대하는 것을 보고 내심 적지 않게 놀랐던 것이다.
이정악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 하더니 이내 마음을 결정한 듯 진중한 표정으로 낙일방을 응시했다.
“낙 소협이 그렇게까지 직설적으로 말하니 나도 솔직하게 털어놓겠소. 내가 능 여협을 통해 낙 소협을 보려고 한 것은 낙 소협에게 한 가지 제안할 것이 있어서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나는 낙 소협이 성숙해의 십이비성 중 한 자리를 맡아 주었으면 하오.”
뜻밖의 제안이었으나 낙일방은 별로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조금 전에 능자하의 반응을 보았을 때부터 어쩌면 이런 일이 있을 지도 모른다고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단순히 성숙해의 일원으로 포섭하려는 것이 아니라 성숙해의 핵심인 십이비성의 한 자리를 제시할 줄은 그도 미처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십이비성은 강호제일의 정보조직인 성숙해의 실질적인 중추세력으로, 개개인이 모두 가공할 실력을 지닌 무공의 고수들일 뿐 아니라 당금 강호에서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신분의 소유자들이라고 했다. 그들의 진실 된 정체가 알려지면 강호 무림 전체가 송두리째 뒤흔들릴 것이라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한결같은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제 비로소 강호에 이름이 퍼지기 시작한 자신에게 십이비성의 한 자리를 제시한다는 것은 낙일방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파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낙일방은 솔직하게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저는 아직 강호의 경험도 일천하고 명성도 그다지 확고하지 않습니다. 이런 저의 무엇을 보고 십이비성의 한 자리를 맡길 결심을 하셨는지 의아한 생각이 드는군요.”
이정악은 낙일방의 침착한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입가에 엷은 미소를 떠올렸다.
“물론 낙 소협이 최근 들어 강호에서 상당한 명성을 얻기는 했지만 아직은 후기지수(後起之秀)에 불과하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소. 내가 주시한 것은 낙 소협의 무궁한 가능성과 현재 낙 소협이 처한 현실, 그리고 능 여협이 낙 소협을 추천했다는 사실이오.”
그는 낙일방이 무어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자신의 말을 부연 설명했다.
“능 여협은 낙 소협의 무공이 강호에 알려진 것보다 더욱 고강하여 능히 절정 고수로 불려도 손색이 없다고 했소. 낙 소협의 현재 나이를 감안해 본다면 나조차도 선뜻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능 여협의 평소 성격이나 언행으로 보아 절대로 허언을 하는 사람이 아니니 그건 그만큼 낙 소협의 무공이 무서운 속도로 일취월장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겠소?”
“…….”
“또한 낙 소협은 이미 서장 무림의 최고 고수들과 심각한 충돌을 일으켜서 어차피 그들과는 도저히 양립할 수가 없는 상태요. 아마 모르긴 해도 낙 소협이 그들의 제거 대상 순위에서 상당히 위쪽에 올라 있을 거라는 건 낙 소협 본인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을 거요.”
이정악은 한 점의 흐트러짐도 없는 단정한 자세로 말을 계속했다.
“마지막으로 능 여협은 낙 소협이 공석이 된 십이비성의 한 자리를 맡을 충분한 역량과 심성을 가지고 있다며 낙 소협을 강력히 추천했소. 솔직히 능 여협의 추천이 아니었다면 아무리 낙 소협의 무공이 뛰어나고 서장 무림과 척을 지고 있다고 해도 십이비성의 한 자리를 맡길 생각은 하지 않았을 거요. 그만큼 나는 능 여협의 안목을 믿고 있소.”
낙일방의 시선이 옆에 있는 능자하에게로 향했다. 그녀가 자신을 그렇게까지 생각할 줄은 미처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능자하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상냥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동생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 혼자 멋대로 결정을 내린 것은 정말 미안해. 하지만 나로서는 동생 같은 인재를 그냥 보낼 수가 없었어. 동생은 성숙해에 꼭 필요한 존재야. 그리고 동생에게도 우리가 필요할 거야. 그건 장담할 수 있어.”
낙일방은 그녀를 탓할 생각은 없었다. 그녀가 자신을 위하는 마음에서 이런 일을 벌였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나 그래도 마음 한 구석으로 씁쓸함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자신은 순수한 마음에서 그녀에게 호감을 느꼈던 것인데, 그녀는 자신의 필요 유무(有無)를 저울질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조직에 끌어 들이고, 높은 자리를 제시하는 것이 꼭 상대를 위하는 길은 아니다. 그것 자체가 굴레가 될 수도 있고, 선택을 강요하는 일이 될 수도 있었다.
자신을 진정으로 위한다면 그저 말없이 지켜보는 것만으로 충분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낙일방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기도 했다.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던 이정악이 재차 입을 열었다.
“얼마 전 십이비성 중 사자좌(獅子座)에 있던 사람이 임무 중에 희생되고 말았소. 사자좌는 십이비성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위치중 하나요. 나는 낙 소협이 그 자리를 맡아주었으면 하오.”
십이비성의 사자좌! 강호에 몸을 담고 있는 무림인이라면 누구라도 이 자리가 가지는 매력을 뿌리치기 힘들 것이다. 단숨에 강호제일 정보조직의 수뇌부에 들어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어찌 놓칠 수 있겠는가?
이정악은 낙일방도 여러 가지 계산을 하겠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제안을 승낙하게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낙일방은 별다른 고민도 없이 주저하지 않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부족한 것이 많은 저를 그렇게까지 보아주시니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맞지 않는 자리인 것 같군요.”
낙일방이 이토록 쉽게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기에 냉정하고 침착한 이정악도 약간은 당혹스런 모습이었다.
“맞는 자리인지 맞지 않는 자리인지는 일단 활동해 보고 나서 판단해도 늦지 않소. 능 여협과 나는 낙 소협이라면 충분히 사자좌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으리라고 보고 있소.”
이정악의 거듭된 부추김에도 낙일방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강호의 사정에 어두운 저로서는 그런 중책을 감당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저에게는 성숙해의 일보다 제가 속해 있는 종남파의 사정이 더욱 급하고 중하게 생각되는군요.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낙일방이 이렇게 까지 단호하게 말하는데 이정악도 더 이상은 그에게 강권할 수 없었다. 그는 잠시 낙일방의 얼굴을 묵묵히 응시하고 있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낙 소협이 우리와 함께 일을 하는 것이 종남파에도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낙 소협의 의중은 그렇지 않은 것 같으니 아쉽구려. 하지만 이런 일은 강요에 의해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니 낙 소협의 결정을 존중해주도록 하겠소.”
“감사합니다.”
“감사받을 일은 아니오. 이것은 전적으로 낙 소협의 의향을 미리 확인해 보지도 않고 이런 제안을 한 나의 잘못이오.”
의향을 물어보지 않은 게 아니라 물어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이정악의 관점에서는 무림인들 중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는 자가 있으리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만의 하나 이런 일에 대비해서 또 다른 계획을 세워놓기는 했으나, 이정악으로서는 정말 모처럼 자신의 예상을 깨는 일을 겪게 되어 나름대로 신선한 느낌마저 들었다.
잠시 장내에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당사자인 낙일방과 이정악은 물론이고 낙일방을 이정악에게 추천한 능자하 또한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낙일방은 이런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자리에서 일어나서 작별을 고하려 했다. 그때 이정악이 지나가는 말처럼 대수롭지 않은 듯 입을 열었다.
“낙 소협이 이번에 서장의 고수들에게 습격을 당한 것은 나로서는 다소 의외의 일이었소.”
자신에 관한 일이 언급되자 낙일방은 막 일어서려던 몸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정악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기대 반, 우려 반의 심정이었다.
“낙 소협이 비록 요즘 강호에서 무섭게 떠오르는 신성(新星)이라고 해도 서장 무림의 절정고수들이 종적을 드러내면서까지 반드시 척살해야할 대상은 아니라고 생각하오. 그런데도 그들은 적지 않은 고수들을 파견하여 낙 소협을 제거하려 했을 뿐 아니라 그로 인해 자신들의 정체가 드러나는 위험까지 기꺼이 감수하려 했소.”
그 점은 낙일방도 궁금해 하는 것이었다. 비록 흑갈방으로 인해 서장 무림과 몇 번의 충돌이 있기는 했으나, 그들이 그토록 복잡하고 정교한 방법으로 자신을 함정으로 유인하여 제거하려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우리는 야율척의 제자가 아닐까 하는 의혹을 가지고 있던 한 사람에 대해 나름대로의 확신을 가지게 되었소. 그것은 모두 낙 소협의 공(功)이라고 할 수 있소.”
“그 자가 누구입니까?”
이번에는 이정악도 낙일방의 물음에 대답을 피하지 않았다.
“혁리세가의 넷째 공자인 혁리공이오.”
낙일방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이름에 어리둥절함을 넘어 당혹스런 느낌마저 들었다.
“제가 전혀 모르는 사람이군요. 그런데 그 자가 야율척의 제자 중 한 사람이란 말입니까?”
“그런 심증(心證)을 가지고 있소.”
“저는 그 자가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는데, 그 자가 왜 서장의 고수들을 보내 저를 제거하려 한 것입니까?”
“자세한 내막은 우리도 알지 못하오. 다만 낙 소협의 실종 전후에 혁리공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고, 그에게서 강남에 있는 서장 고수들에게 밀지(密旨)가 전해졌다는 정황이 포착되었을 뿐이오.”
“단순히 그것만으로 혁리공이 야율척의 제자라고 판단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물론이오. 우리는 그전부터 혁리공이 상당히 가능성이 높은 인물이라고 생각하여 은밀히 그를 주시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낙 소협의 일로 좀 더 분명한 심증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오. 하나 그에 대한 물증(物證)이 전혀 없으니, 공개적으로 그를 압박할 수는 없소. 더구나 그는 소주 혁리가의 공자이니 우리로서는 단순한 심증만으로 그를 어쩔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난점(難點)이라고 할 수 있소.”
“소주 혁리가라면 삼대부귀가문 중 하나가 아닙니까?”
“그래서 더 문제인거요. 혁리공은 혁리가의 공자들 중에서도 후계구도에 가장 가까이 접근해 있는 인물이오. 그를 잘못 건드렸다가는 혁리가의 가주인 혁리아의 분노를 사게 될 것이오.”
낙일방은 강호의 세세한 정세까지는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가보다 하고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하나 소주 혁리가는 단순한 상인가문(商人家門)이 아니라 당금 무림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거대한 집단이었다. 더구나 당금의 가주인 혁리아는 무척이나 상대하기 까다로운 인물이어서, 강호의 일류문파 중에서도 그의 눈치를 보는 곳이 적지 않았다.
이정악은 낙일방의 준수한 얼굴을 지그시 응시했다.
“혁리공은 특히 여인들을 이용해 계략을 꾸미는 방법을 자주 사용하는데, 이번에 낙 소협에게도 그런 식으로 일을 도모하지 않았나 짐작하고 있소. 낙 소협의 생각은 어떠시오?”
낙일방의 몸이 한 차례 움찔거렸다. 그것은 그가 지금까지 일부러라도 떠올리지 않으려고 마음 깊숙한 곳에 숨겨놓았던 은밀한 비밀이었다.
이번 일에 엄쌍쌍이 개입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은 낙일방을 가장 번민하게 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엄쌍쌍에게 선물한 옥가락지가 자신을 유인하는 도구로 쓰였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 옥가락지가 어떠한 경로로 선약연의 손을 거쳐 자신에게 전달되었는지 낙일방은 감히 추측조차 할 수 없었다. 그 생각만으로도 너무도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부상에서 회복한 그가 엄쌍쌍에 대한 생각을 아예 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정악의 말은 그의 그런 마음 속 고통과 상처를 송두리째 다시 끄집어내는 것이었다.
“낙 소협에게 가까운 누군가가 그에게 이용당했을 것이오. 낙 소협이 그에 대한 내막을 확실히 파악해 놓지 않으면 언제고 똑같은 일을 당하게 될지 모르오. 그리고 그때는 이번과 같은 천운(天運)을 기대하기 힘들 것이오.”
이정악의 말 대로였다.
자신이 이번의 암습에서 살아난 것은 실로 천운이었다. 만약 능자하가 서장 고수들의 뒤를 추적하지 않았다면 자신은 도계의 이름 모를 숲속에서 차디찬 시신이 되어 쓰러져 있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하는 것조차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그 일의 진실한 내막은 알아야만 했다. 그리고 이정악의 말대로 엄쌍쌍은 아무 것도 모르고 단순히 이용당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만약 그렇다면 일부러 그녀에 대한 모든 억측을 억눌러 버렸던 자신의 판단은 너무 경솔한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낙일방의 복잡한 속마음을 짐작이라도 한 듯 이정악은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내게 낙 소협의 고민도 해결하면서 우리의 일에도 도움이 되게 하는 한 가지 방법이 있는데, 낙 소협은 들어보시겠소?”
낙일방은 묵묵히 이정악을 쳐다보았다.
그는 사실 성숙해에 대해 그다지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능자하의 간절한 부탁이 아니었다면 이곳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 년 전, 진산월이 성숙해의 일을 돕다가 처참한 일을 당했다는 것을 알고 난 후 그는 사람을 한낮 도구로 이용하는 성숙해의 방식에 대해 내심으로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이정악 앞에서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던 것은 그만큼 그동안 갈고 닦은 마음 속 수양(修養)이 상당한 경지에 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또 다시 자신을 은밀히 유혹하는 듯한 이정악의 말을 듣자 마음 깊숙한 곳에서 그에 대한 불만과 거부감이 솟구쳐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문제는 이정악의 제안이 그로서는 도저히 거부하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엄쌍쌍에 대한 일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한 그로서는 그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이정악의 말을 단순한 거부감만으로 무작정 뿌리칠 수 없었던 것이다.
낙일방은 한동안 여러 가지 상념에 잠겨 복잡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한참 후에 그는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말씀해 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