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5권 취와미인(醉臥美人)편 : 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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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25권 취와미인(醉臥美人)편 : 6화


제 256 장 재회지야(再會之夜)

달빛은 그의 어깨 위에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 진산월은 끝없이 내려앉고 있는 달빛을 받으며 무거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모용봉은 망천정의 입구에 있던 두 명의 쌍둥이 중년인 중 한 사람을 안내자로 붙여 주었다. 그의 뒤를 따라 월광이 흐르는 소로를 걷고 있는 진산월의 마음은 자신도 알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미묘한 것이었다.

이제 다시 그녀를 만난다고 생각하니 그는 한없는 설렘과 흥분, 그리고 두려움을 느꼈다. 그녀를 다시 보게 된다는 기쁨이 더 큰 것인지, 아니면 그녀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더 큰 것인지는 그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문득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니 자신은 어느 새 몇 개째의 화원을 지나 얕은 담장이 둘러쳐진 어느 낯선 공간에 서 있었다. 담장 너머로 유난히 둥그렇게 솟은 야산이 어스름히 보이고 있었다.

중년인은 담장 한쪽에 있는 작은 월동문 앞에 우뚝 선 채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진산월이 다가가자 중년인은 월동문 안쪽의 우측으로 난 소로를 가리켰다.

“저 길을 곧장 가면 되오.”

“고맙소.”

진산월은 짤막하게 인사를 하고는 월동문을 들어섰다. 어디선가 향긋한 화향(花香)이 풍겨 나오자 진산월은 한 차례 깊은 숨을 들이마시고는 천천히 소로를 따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중년인은 월동문 앞에 선 채 월광을 받으며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주위를 환하게 비추는 월광 아래 형형색색의 꽃들이 펼쳐진 화원을 따라 둥그런 언덕을 바라보며 작은 소로를 걷는 기분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얼마쯤 걸어가니 과연 하나의 작은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진산월은 건물로 곧장 가지 않고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언덕 위로 올라갔다.

언덕은 그리 높지 않았으나 정상 부위가 상당히 가팔라서 그 위에 올라서니 주위가 한 눈에 내려다 보였다. 언덕의 경계가 의외로 넓어서인지 반대쪽으로 올라오면 굳이 담장을 지날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진산월은 언덕의 정상에 선 채 한동안 묵묵히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아마 저녁 무렵이었다면 지금 그가 보고 있는 하늘은 석양에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그 석양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진산월은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저녁마다 석양을 바라보았던 그녀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헤아려 보고자 했다. 지금은 석양 대신 둥근 만월이 자리하고 있었고 붉은 하늘 대신 검은 하늘이 시야를 가득 메우고 있었으나, 진산월은 계속 그 자리에 선 채로 가만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틀림없이 외로웠을 것이다. 그래서 붉은 노을 속에 자신을 침잠(沈潛)시킨 채 끝없는 고독(孤獨)속을 배회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오랜 방황 동안 자신은 조금도 그녀에게 도움을 주지 못했다. 그러니 그녀가 그 방황 속에서 어떠한 길을 걷기로 결심했든 자신은 기꺼이 그 결정을 받아들일 것이다. 설사 그것이 자신에게는 죽음과도 같은 깊은 절망과 고통을 주는 것일지라도 말이다.

진산월은 스스로에게 몇 번이나 다짐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언덕을 내려올 수 있었다.

올라갈 때는 느끼지 못했는데, 내려오는 길은 너무도 짧았다. 건물로 다가갈수록 그의 걸음은 느려졌으나, 어느 사이엔가 그의 몸은 건물 앞에 도착하게 되었다.

몇 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작은 건물의 한쪽 방에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 불빛에 한 여인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진산월은 한동안 불빛에 흔들리는 여인의 그림자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마침내 무거운 입술을 떼었다.

“사매.”

입속으로 웅얼거리는 듯한 조용하고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었으나, 그 순간 방안에서 그녀의 음성이 들려왔다.

“사형……?”

진산월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의 음성을 듣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는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들이 샘물처럼 솟구쳐 올랐던 것이다.

문이 열리며 그녀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으나, 진산월은 왠지 그동안 그녀가 무척이나 수척해진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아마도 달빛이 그녀의 얼굴에 짙은 음영(陰影)을 드리웠기 때문일 것이다.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진산월은 그녀를 향해 웃어 주려 했으나, 이상하게도 웃음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았는데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저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녀 또한 하염없이 그를 응시한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녀의 눈은 달빛을 닮았다. 예전에도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지금 다시 보니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음을 알았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그녀가 적어 보낸 머리띠의 글귀가 생각이 났다.

– 월광천추(月光千秋)!

달빛은 천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녀의 눈빛 또한 그러할 것이다. 언제까지고 지금처럼 보는 사람의 마음을 한없이 뒤흔들어 놓을 것이다. 변함없는 그녀의 눈빛처럼 그녀의 마음 또한 변함이 없을 것이다.

진산월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많이 여위었군. 몸은 괜찮은 거야?”

그는 자신의 목소리가 떨려 나오지 않는 것을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괜찮아요. 사형이야말로 그때 부상이 심했던 것 같은데…….”

처음으로 진산월은 희미하게나마 미소 지을 수 있었다.

“사매도 알잖아. 나는 회복이 빠르다는 걸.”

그가 웃자 왼쪽 뺨에 있는 흉터가 깊게 파이며 그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그녀는 우두커니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산월은 다시 입을 열었다.

“잠시 안으로 들어가도 될까?”

그제야 그녀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그를 자신의 방안으로 안내했다.

작은 대청을 지나 들어선 그녀의 방은 그의 예상처럼 단정하고 깔끔해 보였다. 화려하지는 않았으나 차분한 분위기에 아늑한 느낌이 들어서 진산월은 흡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좋은 방이군.”

진산월이 중앙의 탁자에 가서 앉자 그녀는 그의 앞에 다소곳이 마주 앉았다. 이토록 가까운 거리에서 그녀와 마주 하고 보니 진산월은 과거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라서 마음 속의 격정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그는 그 격정을 억누르려는 듯 그녀 몰래 탁자 밑에 있는 손을 몇 차례 세게 쥐었다 폈다. 다시 탁자 위로 손을 올려놓았을 때 그의 손은 떨리지 않았고, 그의 마음 또한 평상시처럼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제야 비로소 그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약간 창백해 보였으나 윤기 있는 입술과 영롱한 눈빛은 그대로였다. 진산월은 그녀의 얼굴을 몇 번이나 찬찬히 살펴보고는 이내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불편한 곳은 없어 보이는군. 정말 다행이야. 속으로 걱정을 많이 했었거든.”

그녀는 그의 시선이 자신의 얼굴을 구석구석 살피는 동안에도 미동도 않고 가만히 있더니 그의 말을 듣고서야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사형도 좋아 보여요. 그때는 사형이 잘못되었을 줄 알고 무척이나 놀랐었는데…….”

그녀가 말한 건 영하 강변에서 진산월이 양천해와 싸울 때의 일이었다. 당시 진산월은 악전고투 끝에 양천해를 쓰러뜨렸으나, 뒤이은 소수마후의 암습에 의식을 잃고 말았다. 그때 그곳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쾌의당 고수들의 습격으로 정신이 없어서 누구도 그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했는데, 그녀는 그 와중에도 진산월을 계속 주시하고 있었기에 그가 무언가 심상치 않은 상태에 빠졌음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운이 좋았지. 때마침 개방의 용두방주인 나 대협이 그 근처에 있었기에 그 분의 도움을 받았어.”

“그랬군요. 연기가 피어오르고 그 와중에 누군가가 사형을 구해갔다는 건 어렴풋이 짐작했는데, 그 사람이 바로 나 방주였군요. 몸은 모두 회복된 건가요?”

“그래. 사매는 어때? 나중에 나 방주에게서 천봉궁의 고수들이 나타나 도움을 주었다는 말을 대충 듣기는 했는데, 나 방주도 정확한 내용은 모르는 것 같더군.”

“나 방주가 사형을 데려간 후 천봉궁의 단봉공주가 나타났어요. 그러자 운중용왕과 화중용왕은 사태가 불리함을 알고 순순히 물러나고 말았어요.”

진산월은 다소 의외라고 생각했다.

“두 명의 용왕이 단봉공주 때문에 물러났다니 정말 놀라운 일인걸?”

“그때 단봉공주는 적지 않은 천봉궁의 고수들을 대동하고 있었어요. 그들 중 몇 사람은 아무리 쾌의당의 용왕이라고 해도 상대하기 만만치 않았을 거예요.”

“그들이 누구인데?”

“팔대신장의 우두머리인 활염라(活閻羅) 고악산(高握山)과 사대신군(四大神君)중의 풍뢰쌍군(風雷雙君)이예요.”

진산월은 처음 듣는 이름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풍뢰쌍군?”

“사대신군은 천봉궁의 호법(護法) 역할을 하는 고수들인데, 각기 풍운뇌우(風雲雷雨)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고 해요. 그들 개개인의 무공은 무림구봉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절정고수들이라고 하더군요.”

진산월은 전혀 들어보지도 못했던 고수들이 무림구봉과 비슷한 수준의 무공을 지녔다고 하자 새삼 강호가 얼마나 넓고 기인이사들이 많은지 실감할 수 있었다.

“천봉궁에는 그런 고수들이 얼마나 있는 것이지?”

“사대신군 외에 쌍왕(雙王)과 쌍노(雙老)가 있다고 하더군요. 그들 말고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진산월은 신기한 얼굴로 임영옥을 바라보았다.

“사매는 천봉궁에 대해 잘도 알고 있군.”

임영옥은 입을 가리고 살포시 웃었다.

“저도 아는 게 그 정도 밖에 없어요. 요새 백봉 정 소저와 친해져서 그녀에게 몇 가지 단편적인 이야기를 건네 들었을 뿐이에요.”

진산월은 임영옥이 정소소와 친하게 지낸다는 말을 듣고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사실 그는 태연히 웃으며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있지만, 그의 마음은 전혀 다른 일에 온통 집중되어 있기에 그 외의 일에 관심을 기울일 여유가 없었다.

진산월은 잠시 침음하다가 다시 물었다.

“화면신사는 어떻게 되었어?”

“임조몽이란 자 말인가요?”

“그의 본명은 백석기(伯錫騎)야. 서장의 제일지자였던 천애치수 단목초의 제자 중 한 명이지.”

진산월의 설명에 임영옥은 놀란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렇군요. 어쩐지 비범한 모습이었어요.”

진산월은 살짝 미소 지었다.

“준수하긴 하더군.”

“정말 화면(花面)이라는 말에 손색이 없더군요. 당시 그곳에 있던 대부분의 여인들이 그자의 용모에 관심을 보였을 정도 였으니까요.”

진산월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사매는?”

임영옥의 얼굴에도 엷은 미소가 그려졌다.

“저도 물론 눈이 번쩍 뜨이는 것 같았어요. 그런 미남자를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니 말이에요.”

진산월은 손으로 자신의 턱을 어루만졌다.

“사매가 미남을 좋아하는 줄 알았으면 나도 좀 더 외모에 신경을 쓸걸 그랬어.”

“호호……. 사형도 예쁜 여자를 좋아하잖아요.”

“보는 것만.”

“저도 그래요. 아무튼 사형이 그토록 관심을 가지고 있는 화면신사는 누구보다도 재빨리 모습을 감추었어요. 외모만큼이나 눈치도 비상한 사람 같더군요.”

두 사람은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았다.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지자 두 사람은 한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진산월은 영하 강변에서 그녀와 헤어진 후 남궁세가와 비무를 하고 이곳까지 오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해 주었고, 그녀는 두 눈을 반짝이며 그의 말에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낙일방이 중도에 갑작스럽게 실종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걱정에 가득 찬 얼굴로 탄식을 토하기도 했고, 새롭게 합류한 성락중이 놀라운 무공으로 남궁세가의 최고고수를 물리쳤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기쁨에 찬 목소리로 작은 환성을 터뜨리기도 했다. 진산월과 낙일방이 출전하지 않고도 강남의 유수한 명문세가인 남궁세가와의 비무를 일방적인 승리로 끝냈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두 눈이 보석처럼 빛나고 두 뺨은 흥분으로 붉게 상기되어 버렸다.

그때의 그녀가 어찌나 아름다웠는지 진산월은 때때로 입을 다물고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다음 이야기를 재촉했고, 진산월은 나머지 여정에 대해 계속 말을 해야만 했다.

하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진산월의 음성은 점차로 나직해졌고, 그녀 또한 점점 말이 없어졌다.

마침내 진산월이 구궁보에 들어와 모용봉을 만났다는 말을 했을 때, 그녀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진산월은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모용봉은 자신이 사매에게 청혼을 했는데 아직 그 대답을 듣지 못했다고 하더군.”

모용봉의 청혼 이야기가 나오자 그녀는 굳어 버린 듯 석상처럼 그 자리에 앉은 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진산월은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회남을 떠나 이곳으로 오기 전에 장풍이란 곳에서 큰 비를 만나 하루를 머무르게 되었지. 그때 빗속을 뚫고 달려온 누군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어.”

“…….”

“그가 주로 말을 했고 나는 듣기만 했었어. 사실 모처럼 빗속에서 술이라도 마시며 넋두리를 하고 싶었는데, 오히려 그의 넋두리를 들어주는 신세가 되어버린 거야. 그런데 들으면 들을수록 가슴 한 구석이 저려 오더군.”

진산월의 말은 혼자 중얼거리는 독백(獨白)처럼 들렸으나, 임영옥은 한 자도 빼놓지 않고 똑똑하게 들을 수 있었다.

“지난 세월동안 많은 일들을 겪고 나서 이제는 어지간한 일로 가슴이 아프거나 고통을 받을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나의 착각이었어. 여전히 나는 상처를 받으면 고통스러워하는 존재였고, 예전보다 오히려 더욱 큰 아픔을 느끼게 되더군. 특히 사매에 관한 일이라면 말이야.”

“……!”

“그 자는 사매가 구궁보에서 어떤 대접을 받고 있으며,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를 소상하게 말해 주더군. 그리고 사매에 대한 자신의 감정 까지도……. 그동안 나는 사매 생각만 하면 너무 가슴이 아파서 일부러라도 사매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했었어. 그런데 전혀 엉뚱한 사람에게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사매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자 가슴 속에서 무어라고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이 치밀어 오르더군. 슬픔이라고 해야 할지, 분노라고 해야 할지 나도 알 수 없는 묘한 감정들이 뒤섞여 온 몸으로 퍼져 나가는 거야. 술을 마시지도 않았는데 취한 것 같은 기분이 들더군.”

“…….”

“사매가 지금은 돌아갈 수 없다고 말해도 나는 참을 수 있었어. 사매가 다른 사람의 여인이 되었으니 이제 그만 그녀를 놓아주라는 말을 들었어도 나는 빙긋 웃고 말았지. 그런데 사매가 나를 만나러 구궁보를 나오기 위해서 모용봉과 흥정을 했다는 말을 듣자 도저히 솟구치는 격동을 억누를 수가 없었어. 사매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서, 사매에게 보다 떳떳한 남자가 되기 위해서 그토록 애를 썼는데도 결국 나는 다시 사매에게 짐이 되고 말았다는 생각에 견딜 수가 없더군. 내가 참을성이 없어진 건가? 아니면 갑자기 비관적인 인간이 된 것인가? 나 자신도 의아한 생각이 들 정도였지.”

진산월은 피식 웃었다.

“나도 참 한심한 놈이지? 그때 못한 넋두리를 모처럼 만난 사매에게 하고 있으니 말이야.”

한동안 가만히 그의 말을 듣고만 있던 임영옥이 어느 때보다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속삭이듯 물었다.

“그 사람이 누구인가요?”

“남궁선.”

그의 이름을 들었을 때, 임영옥은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남궁 공자가 사형을 찾아갔었군요.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짐작은 했었지만…….”

“나는 그가 와준 걸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그 덕분에 사매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자세히 알게 되었으니까.”

“그는…….”

임영옥은 무어라고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진산월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한 거야. 그리고 나도 내가 해야 할 일을 할 생각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에는 사매를 본 파로 데려갈 거야. 어떠한 난관이 있을지라도 내 결심은 흔들리지 않아.”

그의 음성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임영옥에게는 어떠한 고함 이냐 절규보다도 더욱 크고 절절하게 들렸다. 진산월은 섣불리 장담하거나 자기주장을 고집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가 이토록 단호한 어조로 말하는 것은 그만큼 그의 마음속 결심이 굳건하다는 방증인 셈이었다.

“그러니 이제는 나에게 말해줘. 사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니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두 번 다시 사매에 관한 일을 다른 사람에게서 듣고 싶지 않아.”

임영옥은 한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녀는 무언가 깊은 상념에 잠긴 듯 허공의 한 점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미동도 않고 있었다.

진산월 또한 더 이상은 입을 열지 않고 묵묵히 그녀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그녀는 복잡한 감정이 어른거리는 눈으로 그를 마주보았다.

“사형…….”

낮게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나 포근하고 부드러워서 진산월은 하마터면 참지 못하고 그녀를 끌어안을 뻔 했다. 진산월은 간신히 마음속의 격동을 억누르며 그녀의 두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말해, 사매.”

“남궁 공자가 저에 대해 많은 말을 했겠지만, 그가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건 아니에요. 제가 구궁보에 온 이후 여러 가지 제약을 받기는 했지만, 그건 대부분 저의 안전을 위한 조치의 일환이었을 뿐이에요. 남들의 눈에는 어떻게 보였을지 몰라도 저로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였어요.”

이번에는 진산월이 묵묵히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임영옥의 음성은 그녀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표정만큼이나 차분했다.

“모용 공자가 저에게 청혼을 한 건 사실이에요. 그는 청혼의 증표로 제게 작은 비녀 하나를 주었고, 언제든 그것을 돌려주면 청혼을 거절한 것으로 알고 있겠다고 했어요.”

“……!”

“이번에 사형을 만나기 위해서 구궁보를 나서려 할 때 모용 공자는 저에게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어요. 자신의 부탁을 한 가지만 들어달라는 것이었지요. 저는 그동안 보여준 모용 공자의 인품(人品)을 믿고 그의 조건을 받아들였어요.”

진산월의 뇌리에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그녀의 말은 남궁선이 말한 것과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남궁선은 모용봉이 그녀에게 내건 조건이 그녀가 자신의 청혼을 거절하지 말라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녀의 말은 그것과 달랐다.

대체 남궁선은 왜 그런 착각을 한 것일까?

“모용 공자가 내건 조건은 단순한 것이었어요. 청혼의 증표인 작은 비녀를 중추절까지는 어떤 일이 있어도 몸에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저는 그 말을 중추절까지는 자신의 청혼을 거절하지 말아달라는 말로 받아들였어요.”

그녀의 말을 듣고 보니 남궁선이 그렇게 오해한 것이 이해가 되었다. 남궁선은 임영옥이 자신의 청혼을 거절하지 못하도록 모용봉이 술수를 쓰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번에 사형을 만나러 강호로 나오면서 뜻하지 않은 습격으로 저를 호위하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어요. 그들의 목표가 제가 가지고 있는 비녀이며, 그것이 바로 봉황금시라는 걸 알게 되자 저는 모용 공자가 이것을 저에게 준 의도에 대해 의혹을 품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저는 구궁보로 돌아오자마자 모용 공자에게 봉황금시를 돌려주려고 했어요. 하지만 모용 공자는 처음의 약속을 상기시키며 돌려받으려 하지 않더군요. 중추절까지는 제가 봉황금시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진산월의 시선이 절로 그녀의 머리 쪽을 향했다. 그녀의 풍성한 머리카락 한 쪽에 봉황 문양의 금빛 비녀 하나가 그의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힐끗 보는 것만으로도 진산월은 그것이 봉황금시임을 알 수 있었다. 소림사의 선방에서 자신의 손으로 직접 모용봉에게 건네준 물건이니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봉황금시를 보는 진산월의 심정은 말할 수 없이 착잡한 것이었다.

저 작은 봉황금시 하나 때문에 사 년 전에도 적지 않은 시련을 겪어야 했는데, 지금 또 다시 그 물건으로 인해 어려움에 처해 있는 것이다. 저 작은 물건이 대체 무엇이기에 사람을 이토록 고통의 수렁 속에 빠뜨리게 하는 것일까?

모용봉이 봉황금시를 그녀에게 준 것은 과연 단순한 청혼의 증표로서일까? 아니면 무언가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일까?

만약 다른 의도가 있다면 그것은 대체 무엇이며, 중추절까지 그녀가 봉황금시를 지니고 있어야할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진산월은 모용봉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상당수의 일들이 중추절이라는 특정 시간의 영향을 받고 있음을 깨달았으나,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정확히 파악할 수가 없었다.

중추절에 모용봉은 야율척과 일생일대의 승부를 벌이기로 했다. 하나 그 일과 임영옥이 봉황금시를 지니고 있는 것에 어떠한 상관관계가 있는지 도무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던 것이다.

진산월은 문득 자신의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다시 품 밖으로 나온 그의 손에는 하나의 상자가 쥐어져 있었다. 진산월은 그 상자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별다른 문양도 없는 거무튀튀한 그 상자는 볼 품 없어 보였다.

“이것은 천룡궤라는 것이야. 적지 않은 고수들이 이 상자를 노리고 달려들었지.”

임영옥은 한동안 천룡궤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더니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바로 천룡궤로군요.”

“사매도 이 상자에 대해 알고 있었군?”

“정 소저에게 들었어요. 봉황금시의 진정한 가치는 천룡궤라는 상자를 여는 열쇠라는 것에 있다고요. 그 안에 대체 무엇이 들어있는 거죠?”

“나도 몰라. 누군가는 천룡객이란 전대 고수의 무공비급이 들어 있다고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절세의 무학이 담긴 미인상이 들어있을 거라고도 하더군. 지금 열어볼 테야?”

임영옥은 뜻밖의 말에 아름다운 봉목을 살짝 뜨고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그래도 되나요?”

“원래 이것은 석가장의 장주인 석곤이 모용 대협에게 전해달라고 나에게 부탁한 것이야. 그가 열어보지 말라는 말을 하지 않았으니, 잠깐 뚜껑을 열고 내용물을 확인한다고 해도 잘못된 일은 아닐 거야. 물건만 확실하게 전하면 되는 일이니 말이야.”

임영옥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아요. 석 장주도 그걸 바라고 사형에게 부탁한 건 아닐 거예요.”

진산월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왠지 상처 받은 듯 거칠고 사나운 눈길이었다.

임영옥은 달래듯 차분하고 조용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열면 왠지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르게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진산월은 다시 천룡궤를 움켜잡았다.

천룡궤를 응시하는 그의 눈에는 평소와는 다른 위험한 빛이 번뜩이고 있었다. 그가 천룡궤를 꺼내든 것은 다소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자신과 임영옥을 보이지 않는 쇠사슬로 친친 동여매고 있는 것 같은 작금의 현실이 봉황금시와 천룡궤로 인한 것 같아서 불쑥 그것들을 파괴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게만 하면 자신과 그녀를 둘러싼 모든 억압과 난관이 모두 사라질 것만 같았다.

천룡궤 안에 무엇이 들어있든 자신들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이대로 손에 공력을 가득 돋우기만 하면…….

항상 냉정하고 침착했던 그에게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격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때 임영옥이 그를 불렀다.

“사형…….”

정말 조용한 음성. 단 한 마디의 나직한 음성이었으나, 그 말을 듣는 순간 진산월은 평상시의 냉정함을 되찾을 수 있었다.

갈증의 한 순간이 지나가자 진산월은 다시 천룡궤를 품 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임영옥을 향해 어느 때보다도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사매, 집으로 돌아가자.”

그 말 속에는 어떤 이유도 용납지 않겠으며, 그 어떤 자의 반대도 단호히 뿌리치고야 말겠다는 결연한 빛이 담겨 있었다.

임영옥은 눈이 부신 듯 몇 번이나 눈썹을 깜박거렸다. 창백했던 그녀의 뺨에 엷은 홍조가 어른거렸다고 느낀 순간, 그녀는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사형의 말에 따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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