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6권 육합귀진(六合歸眞)편 : 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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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26권 육합귀진(六合歸眞)편 : 2화


제 263 장 투망대어(投網待魚)

흑삼객이라는 별호는 복건성 일대에서는 상당히 널리 알려진 이름이었으나, 강북에서는 거의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무당십이검 중의 한 명인 청현도 별호만 듣고는 그가 누구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이다.

모용봉은 임지홍과의 인사가 끝난 후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는 사항에 대해 물음을 던졌다.

“임 대협께서는 현우 도장과 상당히 오랫동안 전음을 주고받으며 대화를 나누셨다고 하는데, 그게 사실이오?”

임지홍은 조금도 망설이거나 주저하지 않고 선뜻 시인을 했다.

“확실히 현우 도장과 적지 않은 이야기를 나눈 적은 있었소.”

아무리 모용봉이라도 다음 질문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자칫 무림인의 은밀한 비밀을 들춰내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때 두 분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알 수 있겠소?”

예상대로 임지홍은 고개를 내저었다.

“현우 도장과 나와의 지극히 개인적인 일을 의논했을 뿐이니 밝히지 못하는 점을 양해해 주었으면 하오.”

임지홍이 딱 부러지게 거절하자 모용봉도 더 이상은 그 일에 대해 물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단순히 현우 도장과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만으로 그를 흉수로 의심하여 추궁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모용봉은 슬쩍 화제를 돌렸다.

“임 대협께서는 전에도 현우 도장을 뵌 적이 있소?”

“아니오. 이번이 처음 뵙는 것이오.”

“임 대협께서 우연히 유 대협과 동행했다가 현우 도장을 만난 건 아닐 듯 한데…….”

임지홍은 모용봉이 이렇게 물어보는 의도를 짐작하고 있는지 눈을 빛내며 맑고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현우 도장을 긴히 뵈어야 할 일이 있어서 평소 친분이 있던 유 대협에게 소개를 부탁드렸소. 유 대협께서 기꺼이 응해주셔서 덕분에 어렵지 않게 현우 도장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이오.”

“임 대협이 현우 도장을 긴히 만나야 했던 이유가 무엇인지도 말할 수 없소?”

“조금 전에도 말했다시피 그건 전적으로 나의 개인적인 일이니 이런 자리에서 밝힐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오.”

임지홍의 태도는 당당했고, 음성이나 표정에 한 점의 가식이나 거짓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래서 그가 자세한 사정을 밝히지 않는 것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도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지 못했다. 사실 별다른 증거도 없이 의심뿐인 상황에서 지극히 개인적인 일을 이렇게 공개된 석상에서 밝히라고 무작정 강요하는 것은 무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모용봉은 임지홍의 단정한 얼굴을 응시하고 있다가 다시 물었다.

“임 대협께서는 이번 현우 도장의 죽음에 대해 혹시 짐작 가는 일이나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상황을 아시는 것이 있소?”

임지홍은 결연한 동작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전혀 없소. 혹시라도 내가 현우 도장과 대화를 나눈 것이 이번 일과 어떤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걸 다시 한 번 분명하게 말씀드리겠소. 그 일은 순전히 내 개인적인 신상(身上)에 관한 사소한 문제였을 뿐이오.”

임지홍이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부정을 하자 모용봉도 더 이상은 그에게 물어볼 수가 없었다.

“알겠소. 답변해 주셔서 감사하오.”

임지홍이 가볍게 포권을 하고 자리로 돌아가자 위해동이 모용봉에게 다가왔다.

“이번 일은 아무래도 간단하게 해결될 문제가 아닐 것 같군. 일단 현우 도장의 유해를 조용하고 안전한 곳으로 옮긴 다음 다시 사건을 조사하는 것이 어떻겠나?”

모용봉은 자신이 결정할 수 없는 일이라 청현과 청명을 바라보았다.

“두 분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청현은 무거운 표정으로 청명과 의견을 주고받더니 이내 승낙을 했다. 그들 입장에서도 사숙의 시신을 중인환시리에 방치하다시피 공개해 두고 있는 현재의 상황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곧 현우 도장의 시신이 다른 곳으로 안치(安置)되었고, 어수선한 장내도 차츰 진정이 되었다.

모용봉은 현우 도장의 시신이 있던 자리에 선 채로 한동안 묵묵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모습이 심상치 않아 보였던지 위해동이 나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왜 그러는가?”

“현우 도장께서 이 위치에서 독침을 맞았다면 흉수가 어느 방면에 있어야 했을 지를 잠시 가늠해 보았습니다.”

위해동은 모용봉의 시선이 향해 있는 쪽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너무 막연한 방향이라 나로서는 짐작도 할 수 없군. 자네에게 좋은 생각이 있다면 사람 애태우지 말고 어서 말해보게.”

모용봉의 음성은 담담했으나, 그의 눈빛은 이상하리만치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독침 같은 가느다란 암기는 일직선으로 밖에 날릴 수 없습니다. 따라서 현우 도장께서 쓰러진 자세와 목덜미의 흔적을 유추해 보면 독침이 날아온 방향은 저쪽 외에는 달리 없습니다.”

위해동의 시선이 자연스레 모용봉의 손가락이 향하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은 현우 도장이 쓰러진 곳에서 북서쪽 방향으로, 점창파의 고수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점창파 고수들도 마침 그 모습을 보고 있었는지 모두들 표정이 굳어졌다.

이번에 구궁보에 온 점창파 고수들 중 최고 연장자이자 가장 지위가 높은 사람은 장로인 비류단홍검(飛流斷鴻劍) 초일재(楚溢才)였다. 그는 강직한 성품에 쾌검의 달인으로 명성이 높은 인물이었다.

초일재는 그동안 자리에 앉은 채 조용히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모용봉이 자신들 쪽을 손으로 가리키자 살짝 눈을 치켜뜨고는 냉엄한 음성을 내뱉었다.

“모용 공자는 지금 본 파를 현우 도장을 해친 흉수로 지목하는 건가?”

그의 나이는 이미 육십을 넘었고, 강호에서의 배분이나 명성으로 보아 모용봉에게 하대를 하는 것이 그리 어색해 보이지는 않았다. 하나 그의 차가운 눈빛과 딱딱한 음성은 단순히 강호의 선배가 후배를 대하는 것을 넘어 그의 지금 심정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걸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모용봉은 그를 향해 조용한 음성을 내뱉었다.

“그럴 리 있습니까? 다만 독침이 그쪽 방향에서 날아왔을 가능성이 높은 만큼 그 점에 대해 초 대협의 도움을 받았으면 합니다.”

초일재는 모용봉의 의중을 파악하려는 지 한동안 그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다가 거의 알아차리기 힘들만큼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노부가 무엇을 도와주면 되겠는가?”

약간은 가시가 돋친 말임에도 모용봉은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이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독침은 그 특성상 십 장 이상의 거리에서는 거의 효과를 보기 힘듭니다. 더구나 현우 도장 같은 분이 인지하지 못할 정도의 위력을 발휘하려면 아무리 실력이 뛰어난 암기의 고수라 할지라도 사 오장 이내에서 발출해야 합니다.”

“그러고 보니 자네가 서 있는 곳에서 여기까지의 거리가 삼 장 정도 되어 보이는군.”

“제 생각에는 지금 초 대협께서 계신 곳의 사방 이 장 이내가 흉수가 독침을 발출할 수 있는 최대한의 사정거리가 아닐까 합니다.”

초일재는 날카로운 눈으로 모용봉을 쳐다보더니 한 차례 주위를 쓰윽 둘러보았다. 둘러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그의 좌우에는 점창파의 제자들이 있었고, 앞쪽으로는 지금 모용봉이 서있는 곳까지 뻥 뚫려 있었다. 뒤쪽에는 군소문파의 고수들이 십여 명 앉아 있었는데, 그들 중 뚜렷하게 눈에 띄는 고수는 보이지 않았다.

“결국 본 파가 가장 의심스럽다는 말이로군.”

초일재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으나, 장내의 모든 고수들은 똑똑하게 들을 수 있었다.

초일재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일어나자 주위에 있던 점창파의 고수들도 모두 일어나 그의 주위에 둘러섰다. 그 바람에 장내에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감돌았다.

초일재는 한손을 들어 흥분해하는 점창파의 제자들을 제지시키고는 차갑게 가라앉은 음성을 내뱉었다.

“그래, 자네가 노부에게 바라는 도움이란 게 무엇인가? 노부가 독침을 날려 현우 도장을 살해한 범인이라고 자백이라도 하라는 것인가? 아니면 본 파의 제자 중에 흉수가 있으니 내 손으로 그를 잡아내라는 것인가? 자네의 본심을 말해 보게.”

“제가 그런 생각을 할 리 있습니까? 다만 한 가지만 부탁드리고 싶군요.”

“그게 무엇인가?”

모용봉의 시선이 처음으로 초일재의 두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모용봉과 눈이 마주친 순간 초일재의 철탑처럼 흔들림 없이 냉정했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물처럼 고요한 모용봉의 두 눈 깊숙한 곳에서 의미를 알 수 없는 괴이한 광망이 이글거리고 있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초 대협은 점창파의 절학인 회풍무류검을 최고의 경지까지 익히셨을 뿐 아니라, 지난 삼십 년간 점창파에서 아무도 익히지 못했던 비전(秘傳)의 암기수법인 단사성선(單絲成線)을 완성한 고수라고 들었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에 초일재의 얼굴에 순간적인 당혹감이 떠올랐다.

그가 점창파 최고의 암기수법인 단사성선을 익힌 것을 아는 사람은 점창파 내에서도 불과 열 명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런데 모용봉이 그것을 어찌 알고 있단 말인가? 더구나 그의 질문을 던진 시기와 방법이 실로 묘해서 초일재로서는 원치 않는 의심을 받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초일재는 마음속의 당혹감을 억누르며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이런 자리에서 어울리지 않는 말이로군.”

초일재가 무어라고 하던 모용봉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계속했다.

“제가 알기로는 단사성선은 은침(銀針)이나 은사(銀絲) 같은 암기를 발출하는데 있어서는 가히 무림 최고의 수법 중 하나라서 일단 발출하면 상대는 영문도 알지 못한 채 쓰러지고 만다고 하는데, 희대의 암기수법이라는 그 단사성선을 볼 수 있는 영광을 저에게 주시지 않겠습니까?”

중인들의 시선이 모두 초일재에게 쏠렸다. 개중에는 아직도 일이 어떻게 진행 되는지 몰라 어리둥절해 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흥미로워 하거나 설마 하는 마음으로 의혹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초일재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 모용봉을 응시했다.

“자네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지 모르지만, 굳이 이런 상황에서 노부의 솜씨를 보겠다고 하는 이유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군.”

모용봉은 양 팔을 벌려 보였다.

“제게 특별한 의도는 없습니다. 다만, 조금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모든 일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초 대협이 약간의 도움을 주시기를 바라고 있을 뿐입니다.”

초일재는 다시 평소의 냉정함을 되찾은 모습이었다.

“그래서 노부가 단사성선을 펼친다면?”

“저를 비롯한 이곳에 계신 모든 분들은 모처럼 제대로 된 눈요기를 하는 것이고, 무당파의 두 분 도장들도 현우 도장의 시신에 나있는 자국과 전혀 다른 무공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보시고 마음을 놓으실 겁니다.”

“자네의 말은 노부의 단사성선이 흉수가 사용한 것과 다른 무공임을 입증해 보이라는 것이군.”

모용봉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노부가 자네의 말에 따르지 않겠다면?”

“그건 전적으로 초 대협께서 판단하셔야 할 문제이지요. 다만 저로서는 초 대협이 스스로의 미혹을 벗을 수 있는 기회를 박차버린 것에 안타까움을 느낄 것입니다.”

“자네는 지금 노부를 협박하고 있는 건가?”

“그럴 리 있습니까? 오히려 저로서는 단순히 솜씨를 한 번 보이면 되는 일인데, 초 대협께서 너무 민감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아 의아스럽군요.”

몇몇 사람들이 모용봉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초일재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냉소를 날렸다.

“자네는 이곳이 구궁보라는 것에 너무 큰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군.”

모용봉은 고개를 저었다.

“본 보와는 상관없습니다. 저는 그저 제 이름을 믿고 있을 뿐입니다.”

“굉장한 자부심이로군.”

“초 대협은 본인을 믿고 계십니까? 아니면 점창파를 믿고 계십니까?”

초일재의 얼굴이 다시 살벌하게 굳어졌다.

“말조심 하게.”

그때 그의 귀로 모용봉의 전음이 들려왔다.

“아니면 당신의 배후에 있는 그 사람을 믿는 것입니까?”

초일재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막 무어라고 소리치려 했다. 바로 그때, 그의 바로 뒤에 서있던 점창파의 제자 하나가 수중의 검을 뽑아 초일재의 목덜미를 그대로 찔러 버렸다.

“끄윽!”

초일재는 답답한 신음을 토하더니 뒤를 돌아보며 무어라고 입을 열려다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초일재의 신경은 온통 모용봉에게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의 뛰어난 무공으로도 전혀 대항도 해보지 못하고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설마 문하 제자가 자신을 향해 검을 휘두르리라고 누가 생각할 수 있겠는가?

중인들은 눈앞에서 벌어진 뜻밖의 사태에 놀라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특히 점창파의 제자들은 눈으로 보고도 믿어지지 않는지 망연자실한 모습들이었다.

점창파의 제자들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초일재를 살해한 흉수를 찾아보았을 때는 이미 흉수가 막 그 자리를 벗어나 대청을 가로질러가고 있었다.

“소정병(邵丁秉)! 네놈이 감히……!”

초일재의 적전제자(嫡傳弟子)중 대제자(大弟子)인 마조현(馬朝現)이 이를 부드득 갈며 흉수를 향해 몸을 날렸고, 그 뒤를 나머지 제자들이 우르르 따라갔다.

흉수는 더욱 빠르게 신형을 움직여 대청을 반쯤 벗어나려는 했으나, 그때 어디선가 어른의 손바닥 만한 크기의 유엽비수가 날아와 흉수의 옆구리에 틀어박혔다. 그 유엽비수가 날아오는 속도가 워낙 빨라서 흉수가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몸을 피하려 했을 때는 이미 유엽비수가 그의 옆구리를 파고든 상태였다.

“크윽!”

흉수는 답답한 신음을 토하며 한 차례 몸을 휘청거리더니 이를 악물고 유엽비수가 박혀 있는 옆구리를 움켜쥔 채 재차 몸을 날리려 했다. 하나 그때는 이미 그의 주위는 분노한 점창파 고수들에 의해 단단히 둘러싸여있는 상태였다.

“소정병! 네놈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아느냐?”

마조현은 눈가에 눈물마저 글썽인 채 성난 외침을 토해냈다. 사실 그는 소정병과는 어려서부터 친하게 지내던 사이여서 아직도 그가 자신의 사부를 살해한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소정병은 검에 대한 재질도 뛰어나고 성격도 침착해서 이번에 초일재가 점창산을 내려올 때 선뜻 자신을 수행할 인원으로 낙점한 인물이었다. 이번에 함께 온 다른 고수들이 모두 초일재의 직전제자들임을 생각해 본다면 소정병의 합류는 그만큼 그가 평소에 초일재의 눈에 들었다는 의미였다.

그런 소정병이 난데없이 검을 휘둘러 초일재를 암살했으니 마조현의 심정이 어떠하겠는가?

마조현의 가슴이 분노와 원한, 그리고 원인모를 억울함으로 터질 듯이 날뛰고 있건만 소정병의 얼굴표정은 의외로 침착하고 냉정해 보였다. 그는 마조현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자신의 옆구리에 꽂혀 있는 유엽비수를 움켜잡더니 힘껏 뽑아냈다.

“음!”

핏물이 솟구치며 악다문 그의 입술을 뚫고 나직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소정병은 피 묻은 유엽비수를 내려 보더니 날카로운 눈으로 한쪽을 돌아보았다.

그쪽에는 짙은 녹색 장삼을 입은 헌칠한 키의 청년이 차가운 눈을 번뜩이며 서 있었다. 그를 보자 중인들 틈에서 짤막한 외침이 흘러나왔다.

“당문오공자(唐門五公子) 중 둘째인 당호(唐浩)다!”

당문오공자는 사천 당문이 자랑하는 최고의 후기지수들로, 모두 직계후손들이었다. 사천당문에는 그들 외에도 당문칠영이 있었으나, 실력이나 무공은 물론이고 혈통 면에서도 당문오공자와는 비교할 대상이 아니었다. 그런 만큼 그들의 자부심은 남달라서 오만하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당호는 원래 한쪽에서 장내의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었으나, 소정병이 자신이 있는 쪽으로 다가오자 순간적인 호승심을 이기지 못하고 유엽비수를 날린 것이다.

하나 당호가 무어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마조현이 주위를 돌아보며 크고 분명한 음성을 내뱉었다.

“이 일은 점창파 내부의 일이니 우리가 이번 일을 마무리 지을 때까지 누구도 나서지 말아 주기를 부탁드리겠소. 이것은 점창파의 일대제자인 마조현이 본 파에서 구궁보로 파견 나온 모든 제자들의 대표로서 공식적으로 밝히는 바이오.”

당호의 눈살이 살짝 찡그려지며 막 움직이려던 걸음이 멈춰졌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다가가려던 모용봉과 위해동 등 많은 사람들도 모두 그 자리에 선 채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마조현이 이렇듯 공개적으로 점창파의 일임을 선포한 이상 타파의 사람들이 함부로 개입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적어도 마조현보다 배분이 높은 점창파의 선배 고수가 나서거나 마조현 본인이 요구하지 않는 한 누구도 그들의 일에 섣불리 끼어들 수 없게 된 것이다.

마조현은 단번에 좌중의 시선을 집중시킴과 동시에 그들의 불필요한 개입을 차단해 버리고는 다시 소정병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솔직히 말해 보아라. 정병! 너는 대체 무엇 때문에 사부님을 암살한 것이냐?”

소정병은 옆구리의 상처를 지혈하고는 마조현을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할 말이 없다는 것인지, 아니면 어떤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인지 의미를 알기 어려웠으나 마조현의 얼굴은 더욱 일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정병. 마지막으로 묻겠다. 네가 사부님께 검을 휘두른 이유가 무엇이냐? 이번에도 답하지 않겠다면 나도 더 이상 묻지 않겠다.”

그의 음성에는 결연한 각오와 비장한 심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소정병은 물끄러미 마조현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떨구었다. 다시 고개를 쳐들었을 때 그의 얼굴에는 한 줄기 야릇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무언가 복잡하고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듯한 미소였다.

“조현. 자네에게는 아무런 감정이 없네. 왜인지 아나?”

마조현은 그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우두커니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소정병은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자네는 이번 일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있기 때문이지.”

말이 끝나자마자 소정병은 들고 있던 유엽비수를 그에게 던졌다.

땅!

마조현이 황급히 유엽비수를 검으로 쳐내는 순간, 소정병의 신형은 그의 머리를 훌쩍 뛰어넘어갔다.

“도망칠 수 없다!”

마조현은 벼락같은 노성을 터뜨리며 유엽비수를 쳐낸 검으로 소정병의 하반신을 쓸어갔다. 소정병은 몸이 허공에 떠 있는 상태에서 아래로 검을 내리 그었다.

차창!

두 사람의 검이 허공에서 격렬하게 맞부딪히며 요란한 검명을 토해냈다. 하나 세찬 검기가 사라지자 드러난 광경은 중인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옆구리에 부상을 입고 있던 소정병이 부상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앞으로 몸을 날리고 있는데 비해 마조현은 머리를 산발한 채 부러진 검을 들고 피를 토하며 비틀거리고 있었다. 비슷한 경지로 보였던 두 사람의 격돌이 한쪽의 일방적인 우세로 끝나버린 것이다.

소정병이 달려가는 곳에는 한 떼의 무림인들이 서 있었다. 소정병은 다른 곳은 시선조차 주지 않고 그 중 한 사람을 향해 미친 듯이 몸을 날리고 있었다.

하나 그가 채 그 인물에게 다가가기도 전에 그의 옆에 서 있던 사람이 앞으로 성큼 나서며 오른손을 휘저었다.

쐐액!

무시무시한 파공음과 함께 시퍼런 섬광이 소정병을 향해 쏘아져갔다. 소정병은 이를 악문 채 그 섬광을 장검으로 쳐냈다.

따앙!

귀청이 찢어질 듯한 굉음이 터져 나오며 무서운 기세로 다가들던 소정병의 신형이 한 차례 휘청거렸다. 그의 장검을 든 손이 부르르 떨리는 것으로 보아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게 분명해 보였다.

하나 놀라운 일은 뒤이어 일어났다. 그가 장검으로 쳐낸 그 섬광이 허공에서 빙글 회전하더니 다시 그의 뒷등을 향해 더욱 빠르게 날아들었던 것이다.

소정병은 두 눈을 부릅뜬 채 번개같이 몸을 선회하며 장검으로 자신의 뒤쪽에서 날아오는 섬광을 후려쳤다.

땅!

다시 한 번 요란한 굉음과 함께 그의 신형이 뒤로 주르르 밀려났다. 하나 섬광의 움직임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장검에 튕겨져 나가는 듯 하던 섬광이 더욱 빠르게 선회하며 그의 앞가슴으로 날아들었던 것이다.

“회선무궁(廻旋無窮)!”

누군가가 그 섬광의 움직임을 보고는 놀란 외침을 토해냈다.

소정병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그 섬광을 다시 후려쳤다. 하나 그때는 그의 손은 이미 확연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덜덜 떨리고 있었고, 검을 쥔 손아귀가 찢어져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따앙!

소정병은 세 번째로 섬광을 쳐냈으나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폭포수처럼 피를 토하며 털썩 무릎을 꿇었다.

“우웩!”

그가 한바탕 시커먼 피를 게워내는 순간에도 섬광은 다시 매섭게 회전하며 그의 목을 향해 육박해 들어왔다.

그 광경을 본 모용봉이 다급하게 소리를 내질렀다.

“곽 대협! 아직은 그를 해쳐서는 안 되오!”

그 말을 듣기라도 한 듯 소정병의 목을 향해 무서운 기세로 날아들던 섬광의 방향이 살짝 틀어지며 소정병의 아랫배에 가서 틀어박혔다.

“큭!”

소정병은 답답한 신음을 토하며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제야 사람들은 소정병의 아랫배에 둥근 원반 하나가 박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원반의 주위에는 날카로운 톱날이 달려 있었다. 그토록 가공할 위세를 보였던 섬광의 정체는 하나의 비륜(飛輪)이었던 것이다.

중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비륜을 던진 주인에게로 향했다.

그의 차갑게 번뜩이는 두 눈과 굳게 다물어진 입술은 보는 사람을 섬뜩하게 만드는 냉혹함을 담고 있었다. 바닥에 쓰러져 끙끙거리고 있던 소정병이 그를 올려다보고는 나직한 신음성을 흘렸다.

“곽자령……!”

무표정한 얼굴로 소정병을 향해 다가오는 그 사람은 다름 아닌 팔비신살 곽자령이었다. 방금 전에 그가 던진 것은 지금의 독보적인 명성을 만들어 준 그의 독문병기 혈선륜(血旋輪)이었다.

곽자령은 그의 앞에 우뚝 선 채로 묵묵히 그를 내려 보았다. 무표정하게 소정병을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은 왠지 한없이 비정해 보였다.

곽자령은 허리를 숙여 소정병의 아랫배에 박혀 있는 혈선륜을 뽑아냈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사람의 몸에 박힌 혈선륜을 뽑는 그의 모습은 냉혹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다.

소정병은 그때까지도 지혈도 하지 못하고 계속 바닥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으나, 곽자령이 혈선륜을 뽑고 일어나자 그를 올려다보며 무어라고 입을 열려 했다.

그때 한 사람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곽 대협.”

소정병과 일검을 겨루고 낭패스런 처지에 빠졌던 마조현이 다가와 그를 향해 포권을 했다.

곽자령은 무심한 시선으로 그를 응시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도움이랄 것도 없네. 그가 내가 있는 쪽으로 오지 않았다면 손을 쓰는 일은 없었을 것이네.”

마조현도 그 점이 이상하기는 했다. 자신을 물리친 소정병이 왜 하필이면 강호에서 무시무시한 명성을 날리고 있는 곽자령이 서있는 곳으로 달려갔는지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단순히 운이 나쁘다고 하기에는 소정병의 태도에는 무언가 필사적인 구석이 있어 보였다.

그의 그런 의심을 증명이나 하려는 듯 바닥에 쓰러져 있던 소정병이 한 사람을 돌아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유 대협! 당신은 계속 이렇게 보고만 있을 셈이오?”

피를 토하듯 절규하는 그의 음성에 중인들은 모두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소정병의 시선을 받고 있는 사람은 곽자령의 옆에 있는 환상제일창 유중악이었던 것이다. 유중악은 담담한 표정으로 뒷짐을 진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으나, 그를 응시하는 소정병의 눈은 뜨거운 무언가를 내뿜고 있었다.

그제야 마조현은 소정병이 목표로 했던 사람이 곽자령이 아닌 그의 옆에 있던 유중악임을 알 수 있었다.

대체 소정병은 무엇 때문에 절체절명의 순간에 유중악을 향해 달려갔던 것일까? 그리고 그가 내지른 고함은 대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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