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6권 육합귀진(六合歸眞)편 : 3화
제 264 장 영웅실족(英雄失足)
중인들의 시선이 온통 유중악에게 집중되었다. 그중 적지 않은 사람들의 눈에는 당혹감과 희미한 의혹의 빛이 어려 있었다.
유중악은 장내의 따가운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전혀 당황하거나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당당했고, 태도에는 여유가 있었으며, 눈빛은 정명(精明)했다. 그를 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가 마음속에 한 점 부끄럼이 없는 떳떳한 심정의 소유자임을 믿어 의심치 않을 것이다.
모용봉조차도 유중악의 그런 모습에 내심 찬탄하는 마음이 들었다. 또한 그만큼 아쉽고 안타까웠다.
유중악은 오늘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며, 그동안 쌓아온 모든 명성이 철저하게 짓밟힐 것이다. 그것은 그의 힘으로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일이며, 누구도 그것을 막거나 제지할 수 없을 것이다. 일이 여기까지 진행된 이상,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장내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누구도 선뜻 나서서 바닥에 쓰러진 소정병을 추궁하거나 사태를 진정시키려는 자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건이 무섭도록 빨리 확대되고 있고 전혀 예상치 못한 쪽으로 번질 가능성도 있어서 섣불리 나섰다가는 오히려 오물을 뒤집어 쓸 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중인들이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을 때, 모용봉이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그를 보자 사람들 사이에서 비로소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모용봉은 누가 뭐라 해도 당금 무림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이었고, 모용 대협의 유일한 후계자로서 무림인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오늘 연회의 주인이었고, 이번 사건의 가장 큰 피해자 중 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생일연이 뜻밖의 살인으로 엉망진창이 되었으니 생일연의 당사자인 그가 사건의 해결에 나서는 것은 여러모로 가장 자연스럽고 합당한 일이었다.
모용봉은 먼저 마조현을 향해 입을 열었다.
“마 대협. 아무래도 이번 사건은 단순히 점창파에 국한된 일만은 아닌 듯 하군요. 사태의 공정한 해결을 위해서 제가 조사를 진행해도 되겠습니까?”
마조현도 마침 소정병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던 참이라 즉시 머리를 끄덕였다.
“모용 공자의 말씀이 타당합니다. 이번 일은 모용 공자께서 주재(主宰)하시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마조현은 이번 일이 자신의 역량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판단했는지 뒤로 순순히 물러났다.
모용봉은 아직도 바닥에 쓰러진 채 피를 흘리고 있는 소정병에게 다가가 그의 아랫배에 있는 상처를 지혈한 후 그의 혈도를 몇 군데 점했다. 그런 다음 그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더니 차분한 음성으로 물었다.
“기분이 어떻소?”
예상치 못했던 엉뚱한 질문에 잔뜩 긴장한 눈으로 모용봉을 보고 있던 소정병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내 기분은 왜 물어보는 거요?”
“자신의 손으로 문파의 존장을 살해한 사람의 기분은 과연 어떠한 지 궁금한 생각이 들었소.”
소정병은 눈살을 찌푸린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모용봉은 아랑곳 하지 않고 계속 입을 열었다.
“귀하가 초 대협을 살해한 이유는 묻지 않겠소. 물어보았자 대답을 들을 수는 없을 것 같으니 말이오. 혹시 내 생각이 틀린 거요?”
소정병은 그의 말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여전히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모용봉은 그의 반응에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귀하가 초 대협을 살해할 때 사용한 수법은 정통적인 점창파의 검법과는 조금 달라 보이더군. 혹시 귀하는 점창파의 것 외의 다른 무공을 익히지 않았소?”
소정병의 눈빛이 살짝 떨렸다. 하나 그는 이내 눈을 부릅뜨며 냉소를 날렸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요? 내가 사용한 초식은 본 파의 분광십팔수검 중의 분광비격이오.”
“분광비격은 확실히 빠르고 날카로운 검초지. 하지만 단순히 그것만으로 초 대협같은 절정 고수의 목에 저토록 선명한 구멍을 만들어낼 수는 없소.”
아닌 게 아니라 초일재의 시신을 보면 왼쪽 턱 밑에 섬뜩한 피구멍이 생생하게 뚫려 있었다. 그 구멍이 어찌나 예리하고 날카로웠던지 검이 아니라 커다란 송곳이나 뾰쪽한 창으로 뚫은 것 같았다.
마조현이 초일재의 시신에 나 있는 혈흔을 자세히 살펴보고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이건 분광비격의 흔적이 아니다. 분광비격은 검첨(劍尖)을 이용하기 때문에 그 구멍이 이렇게 깊거나 선명하지 않고 아주 작은 상처만을 낼 뿐이다. 이 망할 자식!”
마조현이 금시라도 소정병을 향해 달려들 듯 하자 모용봉이 손을 들어 그를 제지시키고는 소정병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이 사용한 건 분광비격이 아니라 천왕격정(天王擊頂)이라는 초식이오.”
소정병의 얼굴에 흠칫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모용봉은 그의 표정 변화에 아랑곳 하지 않고 말을 계속 했다.
“천왕격정은 원래 검법이 아니라 창법(槍法)의 일종이오. 그래서 검으로 그 초식을 펼치면 저렇게 검도 아니고 창도 아닌 묘한 흔적이 남게 되는 것이오.”
옆에서 듣고 있던 위해동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대체 천왕격정이 어떤 무공인데 그러나?”
그는 모용봉이 중인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채 나서서는 기껏 흉수가 사용한 무공만을 계속 거론하는 모습이 의아했던 것이다.
“천왕격정은 조화십이창법(造化十二槍法)이라는 무공의 한 초식입니다.”
“조화십이창법?”
“그리고 조화십이창법은 전대(前代)의 천하제일창(天下第一槍)이셨던 조화신창(造化神槍) 감화(甘華), 감 대협의 독문절학입니다.”
그 말에 위해동은 물론이고 주위에 있던 모든 중인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조화신창 감화는 삼십 년 전의 사람으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전설적인 고수였다. 하나 단순히 그것 때문에 사람들이 놀라고 당황해 하는 것은 아니었다.
조화신창 감화는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절학은 그의 제자에게 전해져 더욱 화려한 모습으로 부활했다. 그것이 바로 여의조화창(如意造化槍)이었다. 사람들은 여의조화창법의 무궁무진한 조화와 환상과도 같은 창의 움직임에 넋을 잃었고, 그 창법의 주인에게 환상제일창이라는 영광된 이름을 붙여 주었다.
다시 말해서 당대의 조화십이창법의 주인은 환상제일창 유중악이었던 것이다.
모용봉은 소정병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당신에게 천왕격정을 가르쳐준 사람이 누구요?”
소정병의 이마에 진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조용한 시선이었으나 모용봉의 전신에서 뿜어 나오는 기세가 서서히 그의 전신을 무겁게 압박했던 것이다.
소정병은 끝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나 마지막 순간에 그가 슬쩍 고개를 돌려 유중악을 힐끔거리는 모습을 장내의 모든 사람들이 목격할 수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유중악에게 집중되었다. 조금 전과는 확연히 다른 짙은 의혹과 불신감이 가득 담겨 있는 시선들이었다.
유중악은 그때까지도 여전히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조금 전에는 여유 있고 당당해 보였던 그 모습이 지금은 왠지 속을 알 수 없고 의뭉스러워 보였다.
모용봉은 천천히 유중악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느릿한 움직임이었으나 중인들은 무거운 중압감이 자신들의 마음을 짓누르는 듯한 느낌에 몸을 떨어야 했다.
유중악의 시선도 모용봉을 향해 있었다. 한동안 두 사람은 서로를 응시한 채 아무런 말이 없었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의외로 유중악이었다.
“자네를 처음 본 건 칠 년 전의 진회하(秦淮河)에서였지.”
모용봉은 눈을 빛내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쯤으로 기억합니다. 가을이 깊은 어느 날 저녁이었지요.”
유중악의 음성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말꼬리가 분명했고 좋은 울림을 가지고 있어서 듣는 사람의 마음에 묘한 평온함을 불러일으켰다.
유중악은 그런 음성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때 자네는 약관의 나이로 처음 보는 나에게 무척이나 강한 인상을 남겼었네. 그때 자네를 나에게 소개했던 낙혼진군(落魂眞君) 하홍(賀紅)의 말이 지금도 기억이 나는군.”
하홍은 무이산의 패자로서 지금은 모용봉의 절친한 측근인 경천사객의 일인이 된 인물이었다. 그와 유중악은 몇 년 전 만 해도 상당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최근에는 서로 소원해져서 지금은 전혀 왕래를 하고 있지 않았다.
“그때 하홍은 자네가 ‘당대 무림의 제일가는 기재로서 앞으로 무림은 그에 의해 좌우될 것이다’라고 했네. 나는 그 말에 일견 수긍을 했고, 한편으로는 고개를 갸우뚱했지. ‘무림을 좌우한다’라는 말은 결코 일개 젊은이에게 붙일 수 있는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지.”
모용봉은 담담한 음성으로 물었다.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 가지는 확실하더군. 당금의 무림은 확실히 자네가 좌우하고 있네. 오늘 일을 보면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지.”
모용봉은 빙긋 웃었다. 오늘 그를 계속 유심히 지켜보았던 사람이라면 그가 연회장에 나와서 처음으로 웃는 것임을 알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의 생일연에서 웃음 한 번 보이지 않던 그가 유중악의 무언가 비아냥이 섞인 듯한 말에 처음으로 미소를 지어 보인 것이다.
“저를 그렇게 보아주시니 고마운 일이군요. 저도 그때 유 대협을 소개해 주겠다며 저를 데려가던 하 대협의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유중악이 물었다.
“그가 자네에게 나를 무어라고 소개하던가?”
“‘천하제일의 호한이며 강호에서 가장 가슴이 뜨거운 남자’라고 하더군요. 저는 지금도 그 말에 전적으로 공감하고 있습니다. 특히 ‘가슴이 뜨겁다’라는 말은 유 대협을 나타내는 말로는 너무도 적절한 표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시종일관 부드럽고 조곤조곤해서,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두 명의 친우가 우정을 나누는 광경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다행히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지금까지의 상황을 모두 지켜보았을 뿐 아니라 강호의 경험이 풍부한 인물들이어서 눈에 보이지 않는 두 사람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유중악은 모용봉의 미소 띤 얼굴을 한동안 응시하고 있더니 의미모를 말을 내뱉었다.
“자네는 정녕 이렇게까지 해야 했나?”
모용봉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가 해야 할 말을 유 대협께서 하시니 난감한 일이군요. 저는 소정병이 어떤 식으로든 유 대협과 관계가 있는 인물이라고 판단하는데, 유 대협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람들은 모용봉이 그렇게 물어보면 유중악이 당연히 부인하리라 생각했으나, 웬일인지 유중악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시인을 하는 것이었다.
“소정병은 내가 잘 알고 있는 사람일세.”
사람들은 자신에게 불리할 것이 뻔한 상황에서도 선뜻 시인을 하는 유중악의 배포에 놀라면서도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고 표정이 무거워졌다. 자신들이 철석같이 믿고 있는 어떤 절대적인 존재가 조금씩 무너지고 있는 듯한 참담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유중악은 중인들의 그런 심정을 아는 지 모르는 지 계속 말을 이었다.
“소정병의 삼촌인 소인혁(邵仁爀)은 나와 절친한 사이였네. 그래서 나는 그가 어렸을 때부터 몇 번이나 만난 적이 있었네.”
소인혁은 인자검(仁慈劍)이라는 별호로 한때 상당한 명성을 날렸던 검객이었으나 몇 년 전에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인물이었다.
모용봉은 다시 물었다.
“그에게 천왕격정의 수법을 알려 주셨습니까?”
유중악은 이번에도 부인하지 않았다.
“어렸을 적에 그에게 조화십이창법의 한두 가지 초식을 알려준 적이 있었네. 하나 그가 그것을 지금까지 익히고 있는지는 알지 못하네.”
모용봉은 한쪽에 있는 초일재의 시신을 가리켰다.
“소정병이 초 대협을 살해한 수법이 천왕격정이 확실합니까?”
유중악의 심정이 어떠하든 그의 대답은 막힘이 없었다.
“그런 것 같네.”
중인들은 이렇게 직설적으로 물어보는 모용봉의 태도에도 놀랐고, 그런 노골적인 질문에도 선뜻 시인을 하는 유중악의 모습에 더욱 큰 놀라움을 느꼈다. 하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초일재를 살해한 소정병이 유중악이 알려준 무공을 사용했다고 해서 그것이 유중악의 사주를 받아 벌인 일이라고 속단할 수는 없었다. 다시 말해서 흉수가 사용한 무공이 유중악에게서 배운 것이라는 점 외에는 아직 아무 것도 밝혀진 것이 없었던 것이다.
하나 모용봉의 다음 질문은 중인들의 마음에 다시 커다란 의혹을 불러일으키게 하는데 족한 것이었다.
“유 대협은 어제 본 보로 오신 후, 늦은 밤에 몇 사람을 연거푸 방문하지 않았습니까?”
유중악은 이번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만 의미를 알 수 없는 눈으로 모용봉을 빤히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모용봉은 다시 거듭된 질문을 던졌다.
“유 대협이 어젯밤에 은밀히 만난 분 들 중에는 혹시 오늘 살해당한 무당파의 현우 도장도 계시지 않았습니까?”
“……!”
“그리고 현우 도장과 무언가 언쟁을 벌인 후 이번에는 점창파의 초 대협을 만나지 않았습니까?”
중인들의 얼굴에 점차로 경악어린 빛이 떠올랐다. 모용봉의 질문이 의미하는 바가 점점 더 분명해졌던 것이다.
모용봉은 마지막으로 비수처럼 예리한 질문을 던졌다.
“원래 점창파에서 이번에 오시기로 한 분은 독검취응 백리장손, 백리 대협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초 대협으로 바뀐 것은 초 대협의 강력한 주장 때문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초 대협은 유 대협의 친우인 오조추혼(五爪追魂) 신불이(申不易)와 생사지교를 맺을 정도로 친한 사이여서 평소에도 유 대협과도 상당한 친분이 있다고 하는데, 혹시 초 대협이 그런 결정을 하게 된 것은 유 대협의 지시나 부탁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유중악은 입을 굳게 다문 채 침묵을 지켰다. 그의 침묵은 그 자신 뿐 아니라 대청 전체를 무거운 정적에 잠기게 했다. 중인들은 말로 표현 못할 침중함과 답답함을 가슴에 담은 채 그가 무슨 말이든 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용봉의 말이 잘못되었다고, 그가 너무 섣부른 추측을 한 것이거나 무언가를 착각한 것이었다고 말해주기를 바랬다. 그것은 자신의 마음 속 동경(憧憬)이 깨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이었다.
한참 후에야 열린 유중악의 입에서는 의외의 말이 흘러나왔다.
“자네는 나를 철저하게 조사했군.”
유중악이 모용봉의 말에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고 전혀 엉뚱한 이야기를 꺼내자 적지 않은 사람들의 얼굴에 희미한 실망의 빛이 떠올랐다. 그들은 유중악이 좀 더 완강하게 부인하기를 원했으나, 유중악은 순간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 공개된 자리에서 거짓을 말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이 모용봉이 파악한 그의 가장 큰 약점 중 하나였다.
“초 대협이 내 친구인 신불이와 절친한 사이라는 것도 사실이고, 신불이의 소개로 초 대협과 친분을 맺은 것도 사실이네. 그리고 초 대협이 이번 연회에 참석하게 된 것도 내가 신불이를 통해 그에게 부탁했기 때문일세.”
유중악은 중인들의 기대와는 반대로 오히려 모용봉의 주장이 사실임을 스스로 밝혔다. 중인들이 놀라고 당혹해 하는 모습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유중악은 자신이 할 말을 계속했다.
“그래서 자네가 이번 사건에 나를 연계시키려 하는 것이겠지. 하지만 분명히 말해서 오늘 벌어진 두 건의 살인 사건은 전혀 내가 의도한 것이 아니었네.”
모용봉은 날카로운 음성으로 물었다.
“현우 도장과 초 대협의 죽음에 유 대협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말씀입니까?”
유중악은 다시 잠깐 침묵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관련이 아주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 그들이 이곳에 온 것은 모두 나의 부탁에 의한 것이었으니 말일세.”
모용봉의 눈이 번쩍 빛났다.
“초 대협 뿐 아니라 현우 도장이 오신 것도 유 대협의 부탁 때문이었단 말이군요. 유 대협이 그 분들을 이곳에 오시게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유중악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밝힐 수 없네.”
모용봉의 입가에 냉랭한 미소가 떠올랐다.
“밝힐 수 없다는 말입니까? 밝히지 못한다는 말입니까?”
유중악은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언제고 밝힐 수 있을 때가 오겠지. 나는 그렇게 믿고 있네. 또한 지금은 그럴 시기가 아니라는 것도 분명하게 알고 있지.”
모용봉의 눈썹이 거의 알아차리기 힘들만큼 살짝 찌푸려졌다. 하나 모용봉은 그 점에 대해서는 더 이상 유중악을 추궁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공격 방향을 조금 바꾸었다.
“유 대협께서는 오늘 현우 도장께 흑삼객 임 대협을 소개해 주셨다고 했는데, 그것도 이번 일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일입니까?”
이번에는 유중악의 눈썹이 한 차례 꿈틀거렸다. 지금까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던 그로서는 처음으로 보여주는 이례적인 모습이었다.
“그것도 밝힐 수 없는 것으로 해두지.”
모용봉은 그가 그런 식으로 대답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쉬지 않고 질문을 던졌다.
“초 대협이 자신의 제자들 외에 하필이면 유 대협과 친분이 있는 소정병을 대동하게 된 것도 혹시 유 대협의 입김이 들어간 것은 아닙니까?”
유중악은 이번에는 입을 다물었다.
모용봉은 다시 물었다.
“소정병이 연회장에서 줄곧 초 대협의 지척에 있었던 것은 혹시라도 초 대협의 신상에 무슨 일이 있을 때 그것을 제지하기 위한 유 대협의 사전 지시가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습니까? 소정병이 마지막 순간에 다급하게 유 대협을 찾은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도 밝힐 수 없는 일들 중 하나입니까?”
유중악은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옆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위해동이 답답함을 참지 못하겠는지 불쑥 끼어들었다.
“여보게, 청천. 대체 무슨 내막이 있는지 속 시원하게 밝히면 안 되겠나? 오늘의 자네는 그동안 보았던 평상시의 모습과 너무 달라서 당혹스럽기조차 하군.”
위해동은 유중악과 몇 차례 술자리를 함께 한 적이 있어서 어느 정도의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유중악은 위해동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시선은 여전히 담담했으나 위해동은 그 조용한 시선이 껄끄러운지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그는 한층 진지해진 얼굴로 엄숙한 음성을 내뱉었다.
“항상 남들 앞에 당당하고 매사에 충실하던 자네의 모습을 보여주게. 현우 도장과 초 대협을 이곳에 부른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들은 왜 차례로 살해당해야만 했나? 그들의 죽음과 자네는 대체 어떤 관련이 있나? 이런 의문이 완벽하게 해소되지 않고서는 자네에게 쏠리고 있는 의혹의 빛을 거두기 힘들 걸세.”
유중악의 옆에 서 있던 친우 중 한 사람이 분노와 격동으로 벌겋게 상기된 얼굴을 하고 무어라고 입을 열려 했으나 유중악은 손을 살짝 들어 그를 제지시키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분들을 이곳에 오게 한 이유는 조금 전에도 말했다시피 당장은 밝힐 수 없소. 설사 그것이 그 분들의 죽음의 직접적인 이유가 된다고 해도 말이오.”
그 말을 할 때의 유중악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 진중했고, 음성은 조금의 떨림이나 막힘도 없이 안정되어 있었다. 몇몇 중인들이 불만 섞인 탄식을 토해냈으나 유중악은 망설임 없이 자신의 뜻을 명백하게 밝혔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이번 일에 관한 한 나는 누구에게도 당당할 수 있다는 것이오. 그 분들을 이곳에 오시게 한 것이 결과적으로 그들을 죽음으로 인도한 격이 되고 말았지만, 내 의도는 한없이 순수한 것이었소.”
위해동이 가슴을 치며 고함치듯 언성을 높였다.
“그러니 그 이유가 무엇인지 말해보란 말일세. 그들을 모용 공자의 생일에 구궁보로 오게 한 이유가 무엇인가? 이곳에서 대체 무슨 일을 벌이려고 한 것인가?”
그 말에 중인들의 표정이 모두 변했다.
그제야 사람들은 살인 사건이 벌어진 이곳이 중원무림의 성지(聖地)와도 같은 구궁보의 연회장이며, 오늘이 모용 공자의 생일임을 새삼 깨달은 것이다. 그렇게 되자 이번 사건의 내막이 더욱 궁금해지고, 유중악의 침묵이 더욱 의미심장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유중악은 왜 하필이면 모용봉의 생일에 그들을 이곳으로 오게 한 것일까?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도 그 이유를 밝히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아무리 그 의도가 순수했다고 해도 두 명의 무림 명숙이 비참하게 살해되고 모든 사람들이 의혹어린 눈길을 보내고 있는 현재의 상황에서 무작정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이란 말인가?
만일 그에게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할 필연적인 이유가 있다면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수많은 의문들만큼이나 짙은 의혹이 중인들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리고 그것은 점차로 유중악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유중악이 무림인들 사이에서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던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늘 당당했기 때문이다. 그가 무림구봉 중의 일인이고 최고의 풍류남아로 손꼽히고 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천하제일의 고수나 천하제일의 미남자는 아니었다. 무림에는 그보다 더 강한 무공을 지닌 자도 있고, 그보다 더 잘생기거나 말을 잘하는 미남자도 적지 않았다. 다만 그보다 더 무림인들에게 신뢰를 받는 존재가 없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러한 그의 신화가 깨어지려 하고 있었다. 그의 가장 큰 장점이자 무기인 주위의 신망(信望)이 급속도로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모용봉은 한 차례 주위를 둘러본 후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유 대협이 굳이 이유를 밝히지 않겠다면 나도 더 이상 묻지 않겠소. 다만 한 가지만은 대답해 주길 바라겠소.”
유중악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유중악은 직감적으로 무언가 거대한 함정이 눈앞에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렇다고 묻지 않을 수는 없었다.
“무엇인가?”
모용봉은 유중악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맑고 분명한 목소리로 물었다.
“유 대협이 노리는 목표는 나요, 내 조부님이오?”
주위 사람들은 아연실색한 표정이었다. 개중에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자신의 귀를 후비는 사람들도 있었고, ‘맙소사’라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자들도 있었다. 하나 대부분은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로 유중악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유중악의 얼굴 또한 순간적으로 경직되었고, 두 눈가로 한 줄기 신광(神光)이 번뜩이고 지나갔다.
모든 사람들이 초조하게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유중악의 옆에 서 있던 흑삼객 임지홍이 붉게 상기된 표정으로 앞으로 나서려 했다. 하나 그는 움직일 수 없었다. 곽자령이 그의 소매를 굳게 움켜잡고 있었던 것이다.
임지홍이 붉게 충혈된 눈으로 돌아보자 곽자령은 고개를 저었다. 절대로 나서지 말라는 무언(無言)의 신호였다. 임지홍은 금시라도 눈물이 떨어질 듯한 얼굴로 몇 번이나 망설였으나 끝내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를 제지한 곽자령의 표정은 철탑처럼 차갑게 굳어 있어 그의 지금 심정이 어떠한 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하나 임지홍의 소맷자락을 잡고 있는 그의 손끝은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유중악은 마침내 굳게 다물어진 입술을 열었다.
“자네가 이겼군. 나는 모용 대협에게 용무가 있었네.”
그것은 한 영웅의 몰락이 시작되었음을 나타내는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그날 오후, 유중악은 구궁보에 올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친우들 다섯 명과 함께 조용히 구궁보를 떠나갔다. 하나 그의 처지는 짧은 시간 사이에 너무도 판이하게 바뀌어져 있었다.
이곳에 올 때는 그를 향해 뜨거운 환호를 보내던 사람들이 모두 등을 돌린 채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대신 차가운 경멸과 짙은 분노, 그리고 조롱이 가득 담긴 눈빛만이 그에게 쏟아지고 있을 뿐이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가 이번 생일연에서 모용단죽을 제거하려고 고수들을 몰래 불러 모았으며, 그 제안을 거절한 현우 도장을 초일재로 하여금 살해하게 했고, 흉수가 초일재임이 드러날 위기에 처하자 은밀히 숨겨 두었던 소정병으로 하여금 초일재마저 살해하게 했다는 소문이 정설(定說)처럼 굳어져 가고 있었다.
뚜렷한 물증(物證)이 없어서 구궁보에서 그를 구금하거나 제지하지 못했지만, 그러한 사실이 밝혀지자 유중악이 황급히 꼬리를 말고 도망쳤다는 말은 삽시간에 중원천지로 넓게 퍼져나갔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러한 말을 듣고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유중악이 연회장에서 보인 어딘가 의심스러운 언행(言行)이 알려지자 그에 대한 의혹이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다.
다만 극소소의 사람들만이 이번 일의 내막이 알려진 것보다는 훨씬 더 복잡하고 기괴하며, 어쩌면 진실은 전혀 다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강호의 절대적인 존재로 떠오르고 있는 종남파의 젊은 장문인도 있었다.
☆ ☆ ☆
숙소로 돌아온 진산월을 동중산이 찾아온 것은 유중악이 쫒기 듯 구궁보를 떠난 직후였다.
“장문인.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오너라.”
방문을 열고 들어온 동중산은 진산월을 향해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쉬고 계신데 제자가 방해를 하여 죄송합니다.”
“아니다. 마침 나도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고 싶어서 너와 이야기를 나누려고 했다.”
“역시…… 유 대협 때문입니까?”
진산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무언가 미심쩍은 것이 있어서 나를 찾아온 것이 아니겠느냐?”
동중산은 부인하지 않았다.
“제자는 몇 가지 점이 이해가 되지 않아 의아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장문인이시라면 그 점에 대해 나름대로의 해석을 가지고 계실 것 같아 염치 불구하고 방문을 두드렸습니다.”
“무엇이 그리 궁금했느냐?”
진산월이 순순히 자신과의 대화에 응하는 모습을 보이자 동중산은 다시 한 차례 머리를 조아리고는 자신이 오늘 벌어진 일에서 의문스럽게 느꼈던 점들에 대해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유 대협이 살해된 초일재 대협을 사주하여 자신의 제안을 거절한 현우 도장을 암살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초 대협의 범행이 발각될 상황에 대비하여 소정병을 초 대협의 지척에 있도록 해서 결국 초 대협 마저 소정병의 손에 쓰러지고 말았다고 하더군요.”
진산월은 묵묵히 동중산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전후 사정을 보면 그런 의심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만은 아니라고 봅니다. 유 대협 본인이 직접 시인한 내용으로 판단해도 이번 일을 전후해서 그의 행동에 몇 가지 의문스러운 점이 있고, 소정병이 유 대협에게 배운 무공으로 초 대협을 살해한 것도 분명한 사실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동중산은 말을 멈추었다가 자신의 생각을 다시 한 번 머릿속으로 정리하고는 침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유 대협이 그런 일을 계획했다면 왜 굳이 소정병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배운 무공을 사용하게 했느냐 하는 점이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그렇게 되면 자신에게 제일 먼저 의심의 화살이 올게 너무도 뻔한데 말입니다. 둘째는 유 대협이 아무리 부탁을 했다고 해도 유 대협과 단순히 친분이 있는 정도에 불과한 초 대협이 선뜻 무당파의 중요 인사인 현우 도장을 살해했다는 것이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암기를 이용한 독살이라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방법으로 말입니다.”
“…….”
“세 번째는 소정병을 잡을 때 곽자령, 곽 대협이 왜 살수(殺手)를 쓰지 않았나 하는 점입니다. 곽 대협이 유 대협의 가장 친한 친우 중 한 사람으로 이번 일을 공모했다면 소정병의 입을 막기 위해서라도 그를 죽여야 했을 텐데, 모용 공자의 한 마디에 단순히 부상을 입히는 것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차라리 살인멸구를 했다면 훨씬 더 비밀 엄수를 하기에 좋았을 텐데도 말입니다.”
진산월이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자 동중산은 음성을 가다듬고는 자신의 생각을 마저 밝혔다.
“넷째로 모용 공자의 추궁에 대한 유 대협의 반응도 저에게 많은 의문을 주었습니다. 유 대협이 정말 이번 사건을 사전에 계획한 것이라면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서 어떤 식으로든 변명할 답변을 마련해 두었을 텐데, 유 대협은 이런 식의 전개가 되리라는 것을 전혀 몰랐던 사람처럼 당혹스러워 했습니다. 모용 공자의 거듭된 질문에 그가 침묵을 지킨 것은 전혀 음모를 꾸미는 사람의 모습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동중산은 한숨인지 탄식인지 모를 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휴우. 그의 침묵은 보는 사람을 정말 힘들게 하더군요. 마지막으로 제자는 유 대협을 이번 일의 범인으로 몰면서도 뚜렷한 물증이 없다는 이유로 그를 순순히 내보내준 모용 공자의 처사에도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 대협이 진정으로 모용 대협을 노리고 이번 일을 계획한 것이라면 모용 공자는 없는 핑계를 대서라도 그를 구궁보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을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상황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강제하지 않은 것은 모용 공자의 의중에 무언가 다른 생각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들게 하더군요. 제자가 너무 소심한 것입니까?”
말없이 동중산의 말을 듣고 있던 진산월은 동중산의 마지막 말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소심하다기 보다는 생각이 많다고 해야겠지.”
동중산도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제자가 보기에도 그런 것 같습니다.”
“네 의문에 답하기에 앞서 나는 세 가지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동중산은 황급히 물었다.
“그게 무엇입니까?”
“첫째, 모용봉은 왜 은형신침을 꺼낸 것일까? 둘째, 모용봉은 왜 현우 도장의 시신을 치운 다음에야 비로소 초 대협을 흉수로 지목한 것일까? 그리고 셋째로 흑삼객 임지홍은 대체 누구일까? 이 세 가지 의문에 대한 해답을 구하면 너의 모든 의문은 자연스레 해소되리라고 생각한다.”
동중산은 멍하니 진산월을 쳐다보고 있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제자가 아둔해서인지 장문인의 말씀에 담겨 있는 깊은 뜻을 전혀 짐작하지 못하겠습니다.”
“너는 오늘 벌어진 일을 파악하는 데 있어 가장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동중산은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머리를 저었다.
“제자는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교해 주십시오.”
진산월의 얼굴 표정은 여느 때처럼 담담했으나 음성에는 이상한 힘이 담겨 있었다.
“과연 현우 도장을 살해한 흉수가 누구냐 하는 것이다.”
“예? 그건 초 대협이라고…….”
“모용봉은 초 대협일지 모른다고 의심을 제기하기는 했으나 확실한 증거는 단 한 가지도 내놓지 못했다. 또한 그가 제기한 의문점들조차도 모두 그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다.”
동중산은 외눈을 빛내며 진산월의 입을 주시했다.
“오늘 벌어진 모든 일의 시초는 현우 도장의 죽음이다. 그러니 그의 죽음에 대한 모든 의문을 풀어야만 비로소 오늘 일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모용봉은 가장 중요한 현우 도장의 죽음에 대한 조사는 대충 넘어가고 초 대협이 살해당한 일에만 관심을 집중시켰으니, 일이 끝난 후에도 무언가 미진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동중산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장문인의 말씀을 듣고 보니 확실히 모용 공자는 처음 시작부터 방향을 잘못 잡은 것 같군요.”
“잘못 잡은 것인지, 일부러 그렇게 잡은 것인지는 누구도 모르는 일이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진산월의 말에 동중산은 무언가를 느낀 듯 가뜩이나 빛나던 외눈에 형형한 안광을 뿌렸다.
“장문인의 말씀은…….”
“먼저 현우 도장의 죽음을 놓고 보면 모용봉은 독침(毒針)에 의한 살인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현우 도장이 술을 마신 직후에 중독된 모습으로 쓰러진 상태라면 당연히 음독(飮毒)에 의한 살인을 먼저 의심해 보는 것이 자연스런 수순이 아니겠느냐?”
“그래서 위해동, 위 대협이 모용 공자에게서 건네받은 은형신침으로 술잔을 조사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그가 술잔에 독이 있는지를 조사하긴 했지. 하지만 생각해 보아라. 현우 도장이 당한 독은 천하에 산재한 극독 중에서도 가장 효과가 빠른 귀화라는 것이다. 효과가 빠르다는 것은 신경독(神經毒)이면서 또한 그만큼 휘발성이 강한 독이라는 뜻이다.”
동중산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술잔에 묻은 독이 이미 공기 중으로 날아가 버렸을 수도 있겠군요.”
“술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면 아마도 귀화의 독기도 남아 있겠지만, 술잔에 술은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그렇다면 술잔에 묻어 있는 술의 미약한 수분에서 독기를 찾아야 하는데, 귀화같이 즉효성이 뛰어난 독은 그만큼 빨리 증발되기 때문에 독기가 남아 있지 않을 확률이 높지.”
“하지만 독기가 남아 있을 가능성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모용봉이 시기적절하게 은형신침을 꺼낸 것에 대해서도 의문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은형신침은 철면군자 노 신의의 물건이 아닙니까? 노 신의의 평소 언행으로 보아 은형신침이 잘못된 것일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입니다.”
“노 신의가 모용봉에게 은형신침을 준 것은 사실이겠지. 하지만 그때 모용봉이 꺼내서 위해동에게 건넨 것이 노 신의의 은형신침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동중산은 진산월에 대해 절대적인 신심(信心)이 있지만 지금은 반신반의하는 심정이었다.
“모용 공자가 진짜 은형신침이 아닌 가짜 은형신침을 사용했을 거란 말씀입니까?”
“정황상 그런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모용봉이 굳이 은형신침이라는 기물(奇物)을 꺼낸 것에 의구심이 들었다. 그냥 아무 은침이라도 독의 유무를 판단하는 것에 지장이 없는데, 굳이 모용봉은 노 신의의 이름을 빌어서까지 은형신침이라는 특이한 물건을 꺼내 들었다. 그래서 그 은형신침으로 독을 검출하지 못하면 누구라도 술잔에는 독이 없다고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지.”
동중산은 진산월의 말에 일리가 있음을 인정했다. 확실히 당시에는 그도 모용봉이 은형신침을 꺼내든 것이 너무 거창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술잔에 독기가 증발했거나 은형신침이 가짜일 가능성은 분명히 존재하니, 결국 현우 도장이 술을 마시고 독살당한 것이 아니라는 결론은 시작부터 잘못된 것이로군요.”
“내가 독침으로 인한 살인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는 이유는 한 가지가 더 있다. 독침으로 인한 살해가 확실했다면 모용봉은 가장 먼저 시신에서 독침부터 찾아냈을 것이다.”
“독침 중에는 인체에 들어가면 녹아버리는 종류도 상당수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독침을 찾지 못한 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건 독침을 찾아보고 결정을 내릴 일이었다. 그런데 모용봉은 아예 현우 도장의 시신에서 독침을 찾을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동중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현우 도장의 시신에는 독침의 흔적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본 것은 단지 현우 도장의 목에 있는 작은 구멍뿐이다. 그것이 독침으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가 만들어낸 흔적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
동중산은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더니 무언가에 억눌린 사람처럼 낮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만약 그 구멍이 누군가가 일부러 만들어낸 것이라면 남들의 눈을 피해 시신에 손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명뿐입니다.”
“위해동은 너무 빨리 현우 도장의 시신으로 다가갔지.”
“확실히 그가 있던 곳에서 현우 도장이 있는 곳까지는 아주 가깝다고 할 수 없는데도 그는 누구보다 빨리 현우 도장의 시신에 도착했습니다. 제일 먼저 시신을 살펴본 사람도 그이니, 그때 살짝 현우 도장의 시신에 자국을 만드는 일도 어렵지 않았을 겁니다.”
일단 생각을 굴리기 시작하자 동중산의 머리는 무섭도록 빠르게 회전을 더해갔다.
“위해동이 현우 도장과 친한 사이이기는 하지만, 오늘 일을 하나하나 되짚어 보면 그의 행동이 유 대협을 추궁하는 모용 공자를 보조하는데 치우쳐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만약 현우 도장이 술잔에 든 독으로 독살 당했다고 판단했다면 사람들은 가장 먼저 구궁보의 인물들을 의심했을 것이고, 모용 공자 또한 의혹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아무리 모용 공자라고 해도 오늘처럼 일을 자기 마음대로 주재하지 못했을 것이고, 사건의 진행 또한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을지 모릅니다.”
“…….”
“그런데 은형신침으로 인해 사람들이 술잔에 독이 들어 있지 않다고 믿었기에 모용 공자는 그런 의심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고, 자신이 의도한 대로 일을 진행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장문인께서는 조금 전에 모용 공자가 은형신침을 꺼낸 일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거로군요.”
진산월은 동중산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들을 정리해서 말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렇다면 두 번째 말씀하신 왜 현우 도장의 시신을 치운 다음에야 초 대협을 흉수로 지목했느냐는 말씀에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너도 지금쯤은 무언가 생각하는 게 있는 모양이니, 네 의견을 말해 보거라.”
동중산은 그에게 가볍게 머리를 숙이고는 이내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다.
“만일 모용 공자와 위해동이 이번 일을 기획했다면 장문인의두 번째 지적은 정말 주목할 만한 것이라고 봅니다. 확실히 지금 생각해 보면 모용 공자와 위해동은 너무 급하게 현우 도장의 시신을 치웠습니다. 초 대협의 시신을 사건이 거의 끝날 때까지 방치한 것에 비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제자는 그것이 그들이 초 대협을 흉수로 지목한 일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계속 말해 보거라.”
“시신이 치워진 다음에야 비로소 모용 공자는 흉수가 독침을 날린 방향을 밝혔습니다. 만일 시신이 계속 그곳에 있었다면 사람들은 모용봉이 가리킨 방향이 시신의 목에 난 흔적과는 별로 상관이 없다는 걸 알았을 지도 모릅니다. 하나 시신이 없으니 그 방향이 조금 어긋난다고 해도 그것을 알아차릴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진산월은 빙그레 웃었다.
“이제야 비로소 비천호리 다운 모습으로 돌아왔구나.”
동중산도 따라 웃었으나 그의 외눈은 어느 때보다 영활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장문인의 말씀을 듣고 난 후에 굳어 있던 제 머리가 풀어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초 대협이 소정병에게 살해된 것은 그가 흉수이기 때문이 아니라 흉수가 아니기 때문이었겠군요?”
“그렇다. 살인멸구(殺人滅口)는 비밀을 지키는데도 유효하지만, 없는 죄를 뒤집어 씌우는 것에도 유효한 방법이지.”
“죽은 자는 말을 할 수 없으니 말입니다.”
“결국 초 대협은 모용봉의 추궁에 제대로 된 항변조차 하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그리고 자연스런 결과로 유 대협이 모든 일의 배후자로 지목되어 버렸지.”
동중산은 한숨을 내쉬었다.
“장문인의 말씀을 듣고 보니 현우 도장의 죽음부터 모든 일이 마치 톱니바퀴처럼 정교하게 짜여져 있다는 걸 알겠습니다. 또한 모용봉이 살수를 쓴 소정병에게는 별다른 심문을 하지 않고 유 대협만을 추궁한 이유도 설명이 되는군요. 아마 소정병은 모용 공자의 사주를 받은 것이겠지요. 장문인께서 그런 점들을 공개리에 밝히지 않으신 것은 아마도 물증이 없어서였겠지요?”
“그렇다. 너도 알다시피 내가 말한 모든 것들은 상황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분석일 뿐, 어떠한 객관적인 증거도 되지 못한다.”
확실한 물증이 없는 상황에서 어설프게 나섰다가는 유중악을 돕기는커녕 오히려 같은 무리로 오인 받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더구나 상대는 강호인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모용봉이었으니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동중산은 무거운 탄식을 토해냈다.
“유 대협 같은 분이 음모에 빠지는 걸 알면서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없으니 정말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장문인께서 흑삼객 임지홍을 주목하라고 하신 세 번째 말씀의 의미는 아직도 알지 못하겠습니다.”
“유 대협은 오늘 벌어진 일들이 모용봉이 자신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것임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는 많이 놀라고 당황했겠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자신의 무죄를 입증할 몇 가지 방법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강호에 알려진 그 분의 소문이 사실이라면 그렇겠지요.”
유중악은 강호제일의 풍류남아일 뿐 아니라 그만큼 두뇌가 뛰어나고 명석한 인물이었다. 단순히 인품이 뛰어나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그를 좋아하고 그의 주위에 몰려든 것은 아니었다. 준수한 외모만큼이나 그는 성격이 강직했고, 누구보다 영명(英明)한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유중악이 오늘은 입을 굳게 다문 채 자신을 향한 그 숱한 의혹들을 묵묵히 받기만 한 것이다.
“나는 유 대협의 표정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는데, 모용봉의 거듭된 의혹 제기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었던 그의 얼굴표정이 살짝 일그러지는 것을 보았다.”
동중산은 떠오르는 것이 없는 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적이 있었습니까? 제자에게는 유 대협이 어떠한 비난이나 의혹에도 철탑같이 꿈쩍도 않는 모습만 뇌리에 남아 있습니다만.”
“있다. 딱 한 번. 바로 모용봉이 유 대협에게 흑삼객 임지홍이 이번 일과 관련이 없느냐고 물었을 때였다.”
동중산은 기억을 되살리려 애를 썼다.
“그러고 보니 그때 유 대협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던 것 같기는 한데……. 그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모용봉의 그 질문 이후에 유 대협은 자신을 변호하는 것을 포기하고 모든 의혹에 침묵으로 일관했지. 나는 그것이 의혹이 임지홍에게까지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한 유 대협의 고육지책이었다고 생각한다.”
“임지홍을 보호하기 위해서 유 대협이 스스로를 수렁 속으로 빠뜨렸단 말입니까?”
“그렇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모용봉이 그 상황에서 아무 연관도 없어 보이는 임지홍을 거론한 진정한 이유였겠지.”
동중산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안타까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대체 임지홍이 누구이기에 유 대협이 그런 고난을 자초했던 겁니까?”
“나도 그 점이 궁금하기는 하다. 하나 대충 유추해 볼 수는 있지.”
“그게 무엇입니까?”
“유 대협은 오늘 임지홍을 현우 도장에게 소개했고, 현우 도장은 무척이나 반가워하며 그의 손을 잡고 오랫동안 긴밀한 대화를 나누었다고 했다. 그리고 유 대협은 임지홍을 거론하는 일을 막기 위해 스스로 오욕을 뒤집어쓰고 말았지. 이 두 가지 사실을 생각해 볼 때 아마 임지홍은 이번에 유 대협이 벌이려고 했던 일에 대한 가장 중요한 열쇠였을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끝까지 보호해야만 하는 증인(證人)이나 살아있는 증거일지도 모르지.”
“유 대협이 벌이려고 했던 일이라면?”
“유 대협이 제일 마지막에 말하지 않았느냐? 그는 모용 대협에게 볼 일이 있었다.”
동중산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모용 공자가 자신의 생일에 이런 위험천만한 음모를 기획한 것은 유 대협이 그 일을 하지 못하게 막기 위한 것이었겠군요?”
“모용봉은 그렇게 하기 위해서 유 대협을 자신의 생일에 초대했을 것이다. 유 대협은 모용봉의 생일이 모용 대협을 만나기 위한 가장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그의 초대에 응한 것일 테고.”
동중산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유 대협이 모용 대협에게 볼 일이란 무엇이었을까요? 그리고 왜 굳이 모용 공자는 그 일을 막기 위해 강호의 명숙들을 두 명이나 살해하는 끔찍한 일까지 저지른 것일까요?”
진산월은 고개를 저었다.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다만 그 일이 모용 대협, 본인에 관한 일일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에 대한 일을 상의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후자가 더 가능성이 있다고 봐야지. 내 생각이 맞다면 오늘 벌어진 일들에 관련된 많은 의문점이 해소된다.”
“다른 사람이라면?”
진산월은 한동안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가 조용한 음성을 내뱉었다.
“모용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