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6권 육합귀진(六合歸眞)편 : 5화
제 266 장 양류요풍(楊柳搖風)
서안의 남쪽에는 유달리 고색창연한 건물이 하나 있었다. 남문대로 일대에서 가장 번성한 주루인 산해루를 마주 보고 있는 그 건물은 서안에서 제일 유명한 기루인 화월루였다.
화월루는 단순한 기루가 아니라 최고의 요리를 맛볼 수 있는 주루이기도 했고, 서안에서 가장 많은 돈이 오가는 큰 도박장이기도 했으며, 또한 취향에 따라 다양한 미녀들을 안을 수 있는 환락의 장소이기도 했다. 화월루는 삼층의 거대한 건물이었는데, 그 뒤로 크고 작은 수십 개의 별채를 가진 후원이 처처히 늘어서 있어 그야말로 상당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화월루의 주인은 물론 화대부인이지만, 그녀 혼자 이 거대한 화월루를 책임질 수는 없었다. 그래서 화대부인은 세 명의 능력 있고 믿을 수 있는 수하들을 두어 각기 주루와 도박장, 기루를 맡겼다.
화월루의 음식이 아무리 맛있고, 도박장이 문전성시를 이루며 성업을 한다고 해도 화월루에서 가장 중요하고 중심이 되는 곳은 기루였다. 알려진 바로는 화월루에 몸 담고 있는 기녀의 숫자는 사오백 명에 달했고, 매달 적지 않은 수의 새로운 기녀들이 들어온다고 하니 규모만으로 따져 보아도 서안은 물론이고 섬서성 전체에서 손꼽히는 크기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일반 사람들은 기루의 책임자인 포희(包嬉)가 화대부인의 뒤를 이은 화월루의 이인자일거라고 생각했다. 하나 화월루의 속사정을 좀 더 잘 알고 있는 자들은 실질적인 화월루의 이인자는 포희가 아니라 양소선(楊素仙)이라는 젊은 여인이라고 말하곤 했다.
양소선은 이제 겨우 이십 대 중반밖에 되지 않았지만 화월루의 재정을 총괄하는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었다. 나이도 그리 많지 않고 기녀 출신이 아니라서 기루의 일을 잘 알지도 못하는 양소선이 어떻게 화대부인의 눈에 들어 화월루의 이인자가 될 수 있었는지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었지만, 그녀는 사람들의 우려와는 달리 능숙하고 완벽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해치워 화대부인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어느 화창한 날의 오후였다.
이 날도 양소선은 화월루의 삼층 한쪽에 있는 자신의 방에서 수많은 전표와 수기를 앞에 놓고 계산에 여념이 없었다. 화월루에서 하루에 오가는 돈의 액수는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했다. 그 많은 돈을 모아서 각각의 쓰임새를 결정하고 수입과 지출을 책임지는 자리가 바로 양소선이 맡고 있는 총서기(總書記)라는 지위였다.
그녀 밑에는 모두 다섯 명의 서기(書記)와 일곱 명의 출납부원이 있지만, 모든 결재의 최종 판단과 그에 따른 책임은 양소선에게 있기에 그녀의 책무는 실로 막중하다고 할 수 있었다.
서기들이 모아온 지출명세서를 꼼꼼히 살피고 있던 양소선이 문득 고개를 들어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유난히 파란 하늘과 그 아래에 펼쳐진 서안의 시내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자 그녀의 고운 아미가 살짝 찌푸려졌다.
그녀의 나이는 이제 스물 넷. 결코 적은 나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많은 나이도 아니었다. 여느 여염집 여인이었으면 오늘 같은 날에는 밖으로 나가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한창 때의 젊음을 누리고 있겠건만 자신은 골방 같은 화월루의 꼭대기에 처박혀 끝없는 숫자와의 씨름을 벌이고 있으니 짜증이 날 법도 했다.
하나 그녀가 눈살을 찌푸린 것은 단순히 화창한 날을 즐기지 못하는 것 때문이 아니었다. 요사이에 그녀의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는 일이 문득 떠올라 마음이 심란해졌던 것이다.
그녀의 얼굴에 한 줄기 망설임의 빛이 떠올랐다.
그녀가 지금 고민하고 있는 것은 오늘 저녁의 약속이었다. 누군가를 만나기로 했으나, 그것은 상대방의 일방적인 약속이어서 그녀가 꼭 참석할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그 약속을 거절해야 하는지 아니면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놓고 벌써 이틀 동안 심사숙고 하고 있었으나 아직도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우유부단한 성격이어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는 누구보다도 강단이 있고 냉정한 심성의 소유자였으며, 계산이 빠르고 주관이 확실해서 남자보다도 더욱 강인한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람을 보는 눈이 까다롭기로 유명한 화대부인이 그녀를 전폭적으로 신임하여 화월루의 재정을 책임지는 막중한 자리에 앉히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그녀가 사람을 만나느냐 안만나느냐 하는 지극히 사소해 보이는 문제로 며칠째 끙끙 앓고 있는 것은 정말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양소선이 그 사람을 처음 본 것은 나흘 전의 어느 저녁 무렵이었다.
그때 양소선은 하루의 고된 일과를 끝내고 집으로 귀가하는 중이었다. 그녀의 앞에서는 그녀의 시비가 길을 인도하고 있었고, 뒤에서는 화대부인이 특별히 선정해 준 두 명의 호위무사들이 따르고 있었다. 두 무사들의 실력은 강호에서도 일류급이었으며, 양소선 본인 또한 어느 정도의 호신무공을 익히고 있어서 제 한 몸을 지키기에는 충분한 실력이었다.
그날따라 서안성의 오래된 성벽 너머로 기울어지는 석양은 유난히 아름다웠고, 노을은 잘 익은 석류처럼 붉었다. 양소선은 길을 걷다 말고 문득 그 석양빛에 취해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앞서 걷고 있던 시비가 그녀가 따라오지 않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가씨. 무슨 일이세요?”
양소선은 말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어린 소녀처럼 순간적인 충동에 사로 잡혀 붉은 석양에 취해 버린 자신의 심정을 한낱 시비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막 다시 걸음을 옮기려던 그녀의 시선에 문득 한 사람이 들어왔다. 그 사람은 근처의 좁은 골목에서 불쑥 튀어나왔는데, 그래서인지 마치 어둠 속에서 홀연히 나타난 듯한 착각이 들었다.
눈부신 백의를 입은 이십 대 중반의 청년이었다. 머리는 단정히 빗어 뒤로 넘겼고, 이마에는 영웅건을 매었으며, 허리에는 옥대를 차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단정하면서도 깔끔한 인상이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그의 별처럼 반짝이는 두 눈이었다. 생생한 활력이 가득 담겨 있으면서도 왠지 악동(惡童)의 미소를 보는 듯한 재기어린 빛이 번뜩이고 있었던 것이다. 영롱하게 반짝이는 두 눈 아래에 자리한 오뚝한 콧날과 여인의 그것처럼 붉은 입술은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려 보였다.
그녀는 그에게 살짝 호감을 느꼈다. 그가 보기 드문 준수한 미남자여서가 아니라 단정한 옷차림과 재기 발랄해 보이는 표정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뒤에 서 있던 두 명의 무사들은 백의 청년이 골목에서 튀어나오자 자연스레 그녀의 양 옆으로 바짝 다가섰다. 백의 청년은 한 차례 옷을 툭툭 털더니 이내 그들 네 사람을 보고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살짝 웃었다.
“놀라게 해서 미안합니다. 복잡한 골목에서 잠시 길을 잃어 황급히 큰 길을 찾다보니 본의 아니게 실례를 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얼굴에 떠올라 있는 표정만큼이나 낭랑하고 깨끗했으며, 태도는 우아하면서도 정중해서 고고한 품격이 느껴졌다.
양소선은 무심결에 그의 위아래를 훑어보고 있는 자신을 깨닫고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저희는 괜찮으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녀가 몸을 돌려 그대로 가버릴 듯 하자 백의 청년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잠시 도움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양소선은 잠깐 머뭇거렸으나 이내 그를 돌아보았다.
“말씀하세요.”
“이 근처에 초율당(楚聿堂)이라는 문방사우를 파는 가게가 있다고 하는데, 골목이 비슷비슷하여 당최 찾을 수가 없군요. 혹시 소저께서는 초율당이라는 곳을 아시는지요?”
양소선의 아름다운 눈이 살짝 빛났다.
초율당은 상당히 오래된 전통 있는 가게로, 문방사우 중에서도 특히 붓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필방(筆房)이었다. 초나라에서는 ‘필(筆)’을 ‘율(聿)’로 불렀는데, 그래서인지 초율당은 아주 오래전에 초나라 출신의 유생(儒生)이 차렸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나름대로 서예에 조예가 깊었던 그녀는 가끔 초율당에 들려 좋은 붓을 구입하고는 했었기에 초율당을 찾는다는 백의 청년의 말을 듣고는 그에 대해 더 큰 호감을 느꼈다.
“초율당을 찾으시는 걸 보니 붓을 구입하시려는 모양이군요.”
백의 청년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소저께서도 초율당을 알고 계시는군요. 최근에 초율당에 아주 좋은 자호(紫毫)가 들어왔다고 해서 급히 가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골목이 너무 복잡하고 비슷비슷해서 그만 길을 잃고 헤매다가 찾지 못하고 결국 큰 길로 다시 나오게 된 것입니다.”
붓은 산토끼 털로 만든 것을 가장 상품으로 쳤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흑자색 토끼털로 만든 최고급 붓이 바로 자호였다.
자호라면 그녀도 몇 개 가지고 있고, 서예를 하는 사람들이 좋은 붓을 찾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지 알고 있기에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그곳은 제가 자주 가는 곳입니다. 상당히 외진 곳에 있어서 처음 찾는 분들은 헤매기가 일쑤이지요.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백의 청년은 반색을 하며 그녀를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소저의 친절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하나 정히 바쁘시면 길만 알려주셔도 충분합니다.”
그의 예의바른 모습에 양소선은 살짝 웃으며 자신도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말로 설명 드리기는 복잡한 곳이니 저를 따라오시는 게 서로 시간을 절약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양소선이 먼저 걸음을 옮기자 백의 청년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녀와 두 명의 호위 무사들은 항상 주위 사람들에게 쌀쌀맞고 매사에 냉정하기 그지없던 양소선의 뜻밖의 모습에 다소 놀란 듯 했으나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서안의 뒷골목은 확실히 미로(迷路)와 같이 복잡하고 어지러웠다. 오죽했으면 ‘용사혈’이라는 기괴한 이름까지 붙었겠는가?
양소선은 서안의 좁은 골목길을 능숙한 걸음으로 걸어갔다. 묵묵히 그녀의 뒤를 따르던 백의 청년이 주위를 둘러보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소저의 말씀이 맞았습니다. 혼자 찾아오라고 하면 도저히 못 찾았을 것 같군요. 지금도 같은 길을 계속 맴도는 느낌입니다.”
양소선은 입을 가리고 웃었다.
“이쪽은 서안에서도 길이 복잡하기로 악명이 자자한 곳입니다. 성의 남문(南門)쪽에서 접근하는 것이 이쪽으로 오는 것보다 훨씬 찾기 쉬울 겁니다만, 지금은 이쪽 길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군요.”
“알겠습니다. 다음에는 꼭 남문 쪽으로 들어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양소선의 눈이 백의 청년의 준수한 얼굴을 슬쩍 스치듯 훑고 지나갔다.
“붓 한 자루를 사려고 이런 골목길을 헤매고 계신 걸 보니 문장에 상당히 조예가 깊으신 분 같군요.”
백의 청년은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글 솜씨가 너무 형편없어서 붓이라도 좋은 걸 쓰면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길을 나섰습니다만, 길눈이 어두워서 이렇게 소저까지 고생시키게 되었습니다.”
백의 청년의 겸손하고 소탈해 보이는 태도에 양소선은 배시시 웃고 말았다.
“호호. 자호를 찾으실 정도면 보통 솜씨가 아닐 텐데 너무 겸손하시군요. 그리고 저도 며칠 내로 초율당에 들릴 예정이었으니 오늘의 걸음이 쓸데없는 일은 아니랍니다.”
“제가 초율당을 찾게 된 건 그저 동문(同門)들에게 몇 가지 들은 풍월 때문이었습니다. 덕분에 이렇게 아름답고 친절한 소저를 알게 되었으니 저로서는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가 은근히 자신의 미모를 칭찬하자 양소선은 마음이 흐뭇해졌다. 그녀는 결코 쉽게 경동(驚動)하거나 귀가 얇은 사람이 아니었으나, 그래도 여인인지라 백의 청년 같은 미남자의 입에서 자신의 미모를 칭찬하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나쁠 리 없었다. 특히 예의를 잃지 않으면서도 매끄럽게 대화를 이끌어 나가는 백의 청년의 태도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복잡한 골목길을 걸어가면서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 덧 멀지 않은 곳에 고색창연한 현판을 내건 작은 가게가 시야에 들어왔다.
“저곳이 바로 공자께서 찾으시던 초율당입니다.”
양소선의 말에 백의 청년은 눈을 빛내며 가게를 둘러보더니 이내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현판에 쓰인 글씨와 진열된 물품만 보아도 얼마나 주인이 공을 들여 운영하는 곳인지를 알 수 있겠군요. 소저가 아니었으면 이런 좋은 곳을 찾지 못하고 발길을 돌리고 말았을 테니 다시 한 번 소저의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백의 청년이 정중하게 인사를 하자 양소선은 살짝 옆으로 몸을 틀었다.
“과공(過恭)은 비례(非禮)라 했습니다. 그런 인사는 한 번으로 족하니 예를 거두시기 바랍니다.”
백의 청년은 말없이 웃으며 인사를 거두었는데, 양소선의 마음이 결정적으로 흔들린 것은 그때 그가 보인 미묘한 웃음 때문이었다. 그 미소는 그녀의 마음 속 깊숙한 곳을 들여다보는 듯 노련해 보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치기어린 소년의 아무런 사심도 담겨 있지 않은 순진한 웃음 같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여인의 마음을 묘하게 자극해서 설렘을 안겨주기도 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마음 속 흔들림에 당황한 양소선은 제대로 인사도 하지 않고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나고 말았다. 백의 청년이 등 뒤에서 무어라고 소리치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그녀는 달리는 것처럼 걸음을 빨리해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나중에야 그녀는 자신이 그의 이름도 알지 못하고 사는 곳이나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조차 묻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으나, 그때 그녀는 이미 자신의 방안에 혼자 외롭게 앉아 있는 신세였다.
그녀가 그를 다시 만난 것은 그로부터 사흘 후였다.
그날의 일로 심란했던 그녀는 흐트러진 마음을 잡으려는 듯 미친 듯이 일에 매달렸다. 그러던 중 화대부인이 자신을 찾는 다는 말에 하던 일을 멈추고 화월루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화대부인의 거처로 향했다.
“부르셨습니까?”
“어서 오너라. 너에게 소개해 줄 분들이 계셔서 불렀다.”
화대부인의 방에는 두 명의 낯선 손님이 앉아 있었다.
무심결에 그들을 둘러본 양소선은 가슴이 세차게 뛰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알록달록한 화의를 입은 중년인과 하얀 백삼을 입은 젊은이였는데, 놀랍게도 그중 젊은 남자는 바로 며칠 전에 보았던 백의 청년이었던 것이다.
백의 청년 또한 그녀를 이곳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는지 눈이 살짝 크게 뜨였으나 그녀처럼 입을 다문 채 겉으로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있었다.
화대부인은 두 명의 손님들을 소개했다.
“인사 올리거라. 이분들은 화산파에서 내려온 분들이시다.”
화산파라는 말에 양소선은 속으로 깜짝 놀랐으나 침착하게 머리를 숙였다.
“화산파의 고인들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양소선이라 합니다.”
화의 중년인이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반갑소. 화대부인에게 보물처럼 아끼는 인재가 있다는 말을 듣고 늘 만나고 싶었는데, 드디어 오늘 보게 되었구려. 나는 곡수라 하오.”
곡수라면 화산파의 집법을 맡고 있는 수뇌급 인물이었다. 더구나 그는 지략이 뛰어나고 심계가 깊어서 화산파에서도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운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양소선은 머리를 더욱 깊숙이 조아렸다.
뒤를 이어 백의 청년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이제 보니 양 소저 이셨군요. 저는 화산파의 일대제자인 두기춘이라 합니다.”
곡수가 그의 말에 한 마디를 덧붙였다.
“두 노제는 본 파의 장문인께서 아끼시는 직전제자이자 가장 장래가 촉망되는 뛰어난 인재요.”
백의 청년의 신분을 알게 되자 양소선은 더욱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억제하지 못했다.
어쩐지 백의 청년의 신태가 비범해 보이고 태도와 언행 하나하나에 품격이 어려 있다 싶었는데, 과연 명문정파의 제자였던 것이다. 더구나 화산파 장문인의 직전 제자라면 그야말로 당금 무림의 어디에 내놓아도 손가락으로 꼽을만한 최고의 기재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양소선입니다.”
대답을 하는 양소선은 자신의 목소리가 떨려나오지 않은 것을 천지신명께 감사드렸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 화대부인은 화산파의 고수들이 이곳에 온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화산파에서는 이번에 상당히 대규모의 투자를 계획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화산파의 속가(俗家)에서 만든 전장에 맡겼는데, 이번에는 그 전장에서 소화하기에는 금액이 너무 커서 새로운 거래처를 물색하는 중이시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양소선은 명문중의 명문인 화산파가 비록 서안의 유력인물이라고는 하나 기루를 운영하는 화대부인을 찾아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들은 화대부인이 운영하는 화월루에 용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전장(錢莊)인 만방루 때문에 찾아온 것이다.
만방루는 서안에서 가장 큰 다섯 개의 전장 중 하나였다.
화대부인은 만방루의 실무를 담당하고 있으며, 자연히 양소선도 만방루의 일에 대해 상당한 관여를 하고 있었다. 특히 거금을 움직여야 하는 그녀의 지위 때문에 만방루의 금전 거래도 실질적인 책임을 도맡다시피 해야 했다.
만방루는 서안 일대의 귀부인들이 물주(物主)로 있기에 오히려 강호의 문파들로 이루어진 전장보다 탄탄한 면이 있었다. 어지간히 탐욕스러운 흑도의 무리들이라도 만방루의 일에는 개입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 귀부인들의 남편은 대부분이 서안과 섬서성의 고위 관료들이거나 전직 고관대작 출신이니 감히 그들의 비위를 건드렸다가는 폭도의 무리로 몰려 관(官)의 엄벌과 가혹한 탄압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 귀부인들이 전장의 치열한 물밑 싸움과 주도권 쟁탈 같은 지저분한 일에 능숙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들은 자신들을 대신해 궂은일을 해줄 사람이 필요했으며, 마침 기루를 운영하면서 뒷배의 필요성을 절감한 화대부인과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함께 일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즉, 만방루에 자금을 대고 만방루를 외부로부터 보호하는 일은 귀부인들이 맡고, 만방루의 자금을 운용하고 전장을 관리하는 일은 화대부인이 하게 되는 이중 구조가 형성된 것이다. 화대부인이 만방루의 실무를 맡게 되면서 비로소 화월루는 서안 뿐 아니라 섬서성 제일의 기루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화대부인은 귀부인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만방루의 자금을 차곡차곡 불려 나갔고, 일체의 잡음이 들리지 않도록 과도한 폭리나 지나친 추심(推尋)을 하지 않고 원만하게 사업체를 운영했다. 만방루가 수많은 전장이 난립하는 서안에서 오대전장에 속할 수 있게 된 것도 그녀의 역량이 절대적이었다.
화산파의 집법과 장문인의 제자가 투자를 위해 찾아온 것에 화대부인은 물론이고 양소선 또한 뿌듯한 마음이 없지 않았다. 그것은 섬서성 최고의 명문정파인 화산파에서도 새로운 투자처를 물색할 때면 제일 먼저 고려 대상에 넣을 정도로 만방루가 크게 성장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 마음 한구석에는 희미한 경계심도 도사리고 있었다.
화산파는 그동안 전장업에 뛰어들기 위해서 여러 번의 시도를 한 적이 있었다. 하나 그때마다 서안 전체의 전장들이 모두 하나가 되어 반대를 했기에 황금알을 낳는 거위임을 알면서도 전장업에 발을 디디지 못했다. 화산파 같은 거대문파가 전장업에 뛰어든다면 그 결과가 어떨지는 불을 보듯 뻔한 노릇이었으니 전장들의 반대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다행히 화산파도 명문정파라는 이름 때문인지 주위의 극렬한 반대를 무시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나고 만 것이다.
그래서 그녀들은 혹시라도 화산파가 이번 일을 빌미로 전장업에 다시 관심을 보이는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 이어진 거래에서 곡수는 전혀 그런 의도가 없다는 듯 단순 명료한 계약 조건을 내걸었고, 화대부인 또한 그 결과에 흡족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양소선은 두기춘이 아무 말 없이 묵묵히 대화를 듣고만 있는 것이 조금 아쉬웠으나, 커다란 거래를 무사히 성사시켰다는 것에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며칠 후에 정식으로 본 계약을 체결하기로 하고 두 사람이 자리를 떠나자 그제야 화대부인은 모처럼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양소선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수고했다. 네 덕분에 당초 예상보다 훨씬 좋은 조건으로 계약할 수 있게 되었구나.”
“아직 정식계약을 할 때까지는 안심할 수 없습니다.”
“물론이지. 하지만 곡수는 단순한 집법이 아니라 현재 화산파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다. 장문인인 용진산이 무림집회 때문에 화산파를 떠나 있기에 그가 실질적으로 화산파의 모든 일을 관리하고 있지.”
양소선도 무당파에서 중요한 집회가 있을 거라는 소문을 들은 기억이 났기에 표정이 밝아졌다.
“그렇다면 일은 성사된 것이나 마찬가지이겠군요.”
“그래서 내가 특별히 너를 불렀던 것이다. 곡수는 워낙 머리가 비상하고 계산이 빨라서 그를 상대하려면 네가 나서야만 했다. 그나저나…….”
화대부인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양소선을 바라보았다.
“화산파의 그 젊은 제자가 유독 너를 눈여겨 보는 것 같던데, 너는 어떠냐?”
양소선은 움찔 놀랐다.
“무슨 말씀이신지…….”
“네 나이도 이제 스물을 훨씬 넘지 않았느냐? 아까 보니 화산파의 그 젊은 고수는 인물도 준수하고 기개도 헌앙해 보이더구나. 더구나 장문인이 아끼는 제자라고 하니 전도양양할 게 뻔하니 신랑감으로는 그 이상 가는 인물이 없지 않겠느냐?”
뜻밖의 말에 양소선의 얼굴에 절로 홍조가 감돌았다.
“저는 아직…….”
“좋은 사람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머뭇거리다가 그가 다른 여자의 품으로 날아가 버린 뒤에 후회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네가 마음이 있다면 내가 곡 집법에게 넌지시 말을 건네 보마.”
양소선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옵니다. 저는 아직은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하긴. 너 또한 집안의 문제가 있으니 네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겠지. 아무튼 내 말을 허투루 듣지 말고 잘 생각해 보도록 해라. 오늘은 정말 수고가 많았다.”
화대부인의 칭찬을 뒤로 하고 방을 나서는 양소선의 심정은 자신도 알 수 없을 만큼 복잡하게 헝클어져 있었다. 그런데 자신의 처소로 돌아온 양소선에게 뜻하지 않은 서신이 기다리고 있었다.
<양 소저 친전.
양 소저. 조금 전에 보았던 화산파의 두기춘이오.
먼저 이렇게 불쑥 서신을 전하게 된 것을 진심으로 사과드리오.
며칠 전에 양 소저를 뵌 후 제대로 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급하게 헤어져서 지난밤을 무척이나 후회하며 지냈었다오. 오늘 전혀 생각도 못했던 곳에서 양 소저를 다시 뵙게 되니 이게 바로 세인들이 말하는 인연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용기를 내었소.
며칠 전의 도움에 대한 보답을 드리고 싶소.
내일 저녁 유시(酉時)에 비림(碑林) 경운종(景雲鐘) 앞에서 소저를 뵈었으면 하오.
부디 나를 여인의 은혜도 갚지 못하는 졸장부로 만들지 말아주시기를 바라오.
화산파 두기춘.>
서신을 받은 후 양소선은 그날과 다음날 오후까지 계속 고민에 빠졌으나 당최 마음을 정할 수가 없었다.
사적으로 외부인을, 그것도 커다란 계약을 앞두고 이해 당사자를 만나는 일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상대는 화산파 장문인의 촉망받는 제자였다. 자칫 이번 일이 상대의 계략이나 음모에 의한 것임을 배제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요사이 서안 일대에서는 화산파와 유화상단이 전장업에 뛰어들기 위해 무언가 일을 꾸미고 있다는 소문이 조금씩 퍼져나가고 있었다. 이런 미묘한 시기에 개인적으로 화산파의 고수를 만나는 것은 오해를 받기에 딱 좋았다.
이런 여러 가지 상황을 생각해 볼 때 그녀는 당연히 두기춘의 서신을 무시하는 것이 옳았다.
하나 그녀의 뇌리에는 아직도 며칠 전에 보았던 두기춘의 순진한 듯 하면서 꾸미지 않은 미소가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이 비록 화월루의 재무 담당자이며 만방루의 일을 하고 있다고 해도 수뇌급 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자신 같은 여인에게 화산파 같은 명문정파에서 수작을 부릴 리도 없었고, 부린다고 해도 그 효과 또한 그리 크지 않을게 뻔했다.
무엇보다 그녀는 화대부인의 방에서 자신을 보았을 때 두기춘의 놀라는 모습이 꾸민 것이라고 여겨지지 않았다. 두기춘은 정말 자신의 신분을 몰랐으며, 그렇다면 그와의 만남은 순수한 우연이었고 그의 말대로 질긴 인연의 한쪽 끈이 닿아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정말 그렇다면, 화대부인의 말대로 되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겠는가?
결국 그녀는 꼬박 하루 하고도 반나절을 고민한 끝에 어렵사리 용기를 내어 약속장소인 비림으로 향했다.
내딛는 걸음마다 납을 달아맨 듯 무거웠고, 가슴은 쉴 새 없이 쿵닥거렸으나 그녀는 마침내 유시가 조금 넘은 시각에 비림 안에 있는 경운종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경운종은 당의 예종(睿宗) 때 만들어진 것으로, 한때 천하제일종(天下第一鐘)이라 불리기도 했다. 경운종이 있는 작은 종루(鐘樓) 한쪽에 서성거리고 있는 한 사람을 보는 순간 양소선의 가슴은 금시라도 터져버릴 듯 맹렬하게 뛰었고,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
그 사람은 그녀를 발견하자 한 달음에 달려왔다.
“와 주었구료, 양 소저.”
감격한 듯 가볍게 떨리는 그의 음성을 듣자 그녀는 지금까지의 고민이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고 마음 한 구석에 달콤한 감정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두기춘은 손을 내밀어 그녀의 섬섬옥수를 잡으려다 멈칫했다. 그 모습이 너무도 순진해 보여서 얼굴이 붉어진 와중에도 양소선은 살짝 미소 짓고 말았다.
그녀의 미소를 보았는지 두기춘은 용기를 내어 그녀의 소맷자락을 잡았다.
“오늘 은혜를 갚기 전에는 이 손을 놓지 않겠소. 그날처럼 양 소저를 그냥 보내는 일은 결코 없을 거요.”
양소선의 얼굴이 더욱 붉어져 홍시처럼 변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간신히 입을 열었다.
“은혜 같은 건 없습니다, 두 공자님.”
두기춘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양 소저 같은 분은 없는 은혜라도 만들어서 억지로 만나야 할 판인데, 실제로 나는 적지 않은 은혜를 입었소.”
두기춘은 다른 한손을 품에 넣어 하나의 물건을 꺼냈다.
그것은 두 치쯤 되는 붓이었다. 은은한 흑자색이 감도는 붓은 한 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것 같았다.
“양 소저 덕분에 이 좋은 자호를 구입할 수 있었소. 이 붓으로 제일 먼저 양 소저에게 시구를 바치고 싶어서 아직 쓰지 않고 잘 보관하고 있었소.”
양소선은 며칠 전과는 달리 열정적인 그의 모습에 당혹스러우면서도 마음은 한없이 포근해졌다.
“그러실 필요는 없는데…….”
“좋은 붓은 좋은 사람을 위해 쓰여져야 한다고 믿고 있소. 소저에게 한 잔의 술을 대접한 후 이 붓에 내 마음을 담아 소저를 위한 글을 써서 바치겠소.”
두기춘이 소매를 잡아끌자 양소선은 못이기는 척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한데 두 사람이 막 경운종의 연못 앞을 벗어나려 할 때였다.
“이거 혼자 보기는 아까운 광경인걸. 너무 자극적이야.”
비아냥거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그들의 앞을 천천히 가로막았다.
짧게 깍은 머리에 두건을 뒤집어쓰고 험악한 눈빛을 번뜩이는 그 사람을 보자 두기춘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응 사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