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7권 호한위난(豪漢危難)편 : 10화 (27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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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27권 호한위난(豪漢危難)편 : 10화


제 281장 신마대면(神魔對面)

동굴에서 오 장 쯤 떨어진 그늘 속에서 두 개의 인영이 은밀히 움직이고 있었다.

원래 동굴 입구는 면사 여인이 틀어막고 있어서 누구도 그녀의 눈을 피해 동굴로 접근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녀가 종담과 마여상의 합공에 수세에 몰리면서 조금씩 옆으로 밀려나는 바람에 동굴 입구가 환하게 트여 버린 것이다.

하나 장내의 고수들은 치열한 격전을 벌이고 있어서 아무도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틈을 노려 숲속에 숨어 있던 자들이 동굴로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움직임이 어찌나 조심스럽고 신묘한지 귀호와 교리조차도 직접 눈으로 보고 있지 않았다면 그늘 속에서 두 사람이 동굴로 접근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들은 유령처럼 재빠른 동작으로 그늘을 벗어나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귀호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재주는 곰이 넘고 이득은 사람이 본다고 하더니. 남들은 이토록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데 엉뚱한 자들이 대어를 낚게 생겼군. 명색이 강호의 내로라하는 고수들이라는 자들이 어찌 단 한 명도 저걸 눈치 채지 못했을까?”

“그게 아닐걸.”

“무슨 말인가?”

“동굴 속으로 두 사람이 들어가는걸 아무도 몰랐던 건 아닐걸. 최소한 몇 사람은 알고 있을 걸세.”

“그게 누군가?”

교리는 턱으로 면사 여인을 가리켰다.

“첫째로 저 여인. 지금까지 동굴 앞을 철저히 지키고 있던 여인이 합공에 못 이겨 동굴 앞을 벗어났다고 해도 그쪽에 관심을 두지 않았을 리가 없네. 오히려 더욱 그쪽에 신경을 기울이고 있다고 봐야겠지.”

귀호는 한동안 종담과 마여상의 공세에 쩔쩔매고 있는 면사 여인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가끔 한 번씩 고개를 돌리는 것을 보니 동굴 속으로 누가 들어간 것을 알고 있는 모양이군.”

“더구나 나는 그녀가 두 사람의 합공에 밀리고 있다는 것도 의심스럽네. 그녀의 움직임으로 보아 아직도 충분한 여력이 있음을 느낄 수 있거든.”

귀호의 눈이 번쩍거렸다.

“그게 정말인가?”

교리는 그를 돌아보며 희미한 웃음을 흘렸다.

“능청스런 친구로군. 자네도 이미 알고 있지 않나? 그녀가 아직 자신의 전력을 다하지 않았음을 말일세. 아마 자네는 그녀가 누구인지도 알고 있을 걸세. 그렇지 않나?”

귀호는 멋쩍게 웃었다.

“그게 그렇게 티가 났나?”

“조금 전 그녀가 명옥공을 사용했을 때 자네의 눈빛이 유난히 예리하게 반짝이고 있었네. 그걸 보고 자네가 그녀의 정체를 파악했음을 직감했지.”

귀호의 얼굴이 살짝 구겨졌다.

“그러면서도 지금까지 시치미를 뚝 떼고 있었단 말이지?”

“피차일반 아닌가? 그런데 궁금하긴 하군. 명옥공이 비록 강호의 절학이기는 하지만 익힌 사람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닌데 어찌 단순히 그걸 보고 그녀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단 말인가?”

“명옥공 하나만이라면 나도 장담할 수 없지. 하지만 명옥공에 이어 그녀가 옥대를 휘두르는 수법에서 누군가의 흔적을 발견해 냈네.”

“옥대? 단순한 편법(鞭法) 같지는 않고 무언가 손으로 쓰는 무공을 변형시킨 것 같던데? 아마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원래의 무공이 아니라 일부러 옥대를 사용했던 것이겠지?”

귀호는 감탄 어린 눈으로 교리를 바라보았다.

“맞았네. 정확히는 필법(筆法)이지. 구상필법(具象筆法)이라는 것인데, 내가 알기로는 천하에 산재한 수많은 필법 중 가장 완성도가 높은 무공일 것이네.”

“그런데 왜 나는 그런 이름의 필법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지?”

교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민스런 표정을 짓자 귀호가 피식 웃었다.

“당연한 일일세. 구상필법은 이십 년 전에 어느 여기인(女奇人)이 창안한 것일세. 그러니 강호에서도 극히 일부분의 사람들 외에는 아무도 아는 자들이 없지.”

“어쩐지. 그런데 이번에도 역시 그 극히 일부분의 사람 중에 자네도 끼어 있군.”

교리가 약간은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보자 귀호는 한 차례 어깨를 들썩이고는 말을 계속했다.

“운이 좋았을 뿐이네. 아무튼 그 여기인의 구상필법은 오직 그녀와 그녀의 제자들 몇 사람이 익히고 있을 뿐이니 나로서는 어렵지 않게 면사 여인의 정체를 알 수가 있게 된 것일세. 그 여기인의 제자들 중 저 나이대의 제자는 오직 한 사람뿐이거든.”

“대체 그 대단한 여기인이 누구인가?”

교리의 물음에 귀호는 잠시 망설였으나 순순히 말해주었다.

“천수관음.”

교리는 짤막한 감탄성을 발했다.

“오, 그 백 년 내 여중제일고수라는 천수관음 말인가?”

“그래. 구상필법은 천수관음께서 자신의 제자들에게 암기술을 가르치기 위해 만든 보조무공일세. 구상필법을 익히면서 자연스레 손가락과 손목을 사용하는 법을 깨우치게 한 것이지.”

“정말 대단하군. 보조무공이 저 정도라면 그런 무공을 익혀야만 제대로 배울 수 있다는 그녀의 암기술은 과연 얼마나 놀라운 것일까?”

“그녀의 암기술이 달리 천하일절(天下一絶)인 것이 아니지.”

“그렇게 대단한 여기인의 제자이니 종담과 마여상 같은 고수들의 합공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은 것이겠지. 그런데 그녀는 왜 그들의 공세에서 밀려 지키고 있던 동굴 입구를 스스로 포기한 것일까?”

귀호는 마침 동굴 속에서 한 명의 백의인을 업고 나오는 두 인영을 슬쩍 가리켰다.

“그건 아마도 저들 두 사람에게 중인들의 눈을 피해 동굴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기 위해서가 아닐까?”

“그렇다면 저 두 사람과 면사 여인은 같은 편이란 말이로군?”

“적어도 사전에 의견교환 정도는 해두었겠지.”

교리는 귀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자네 말을 듣고 보니 저 두 사람이 누구인지도 알고 있는 모양이군?”

귀호는 슬쩍 웃었다.

“저 두 사람의 행색과 인상은 무척 특이하여 일견 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정체를 알 수 있었네.”

교리는 안광을 빛내며 동굴을 빠져나오는 두 인영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일남일녀였는데, 남자는 사십 대 중반의 듬직한 체구를 지닌 중년인이었고 여인 또한 비슷한 나이의 오동통한 중년여인이었다.

교리는 아무리 보아도 너무나 평범한 용모의 두 남녀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외모만 보아서는 도저히 귀호가 말한 특색을 알아차리기 힘들었던 것이다.

“아무리 봐도 난 잘 모르겠는데. 두 사람 모두 인상이 좋기는 한데 너무 평범해 보여서 말일세.”

“그게 바로 그들 부부의 특징이지. 강호에서 저렇게 소박하고 다정한 인상의 중년 부부는 그리 많지 않네. 그들 중 유중악을 위해서 위험을 무릅쓸 정도로 유중악과 친분이 두터운 부부는 더욱 흔치 않지.”

“자네 말을 듣고 보니 떠오르는 부부가 있기는 한데…….”

“한 번 말해보게.”

“유중악과 친분이 두터운 강호인들 중 곽산쌍려라는 특이한 부부가 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나는군.”

귀호는 나직하게 웃었다.

“하하. 자네의 식견도 아주 엉터리는 아니로군. 저들이 바로 금슬 좋기로 유명한 곽산쌍려 여씨 부부일세.”

그런데 교리는 의외로 혀를 차는 것이었다.

“쯧. 그 좋은 금슬도 오래가지는 못하겠군.”

귀호는 어리둥절하여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내가 조금 전에 한 말을 잊었나? 그들이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알고 있는 자는 면사 여인만이 아닐세.”

그제야 무언가를 깨달은 듯 귀호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좌측 숲에 있던 무리들!”

“그래. 곽산쌍려는 자신들의 명성이 실추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어떻게든 유중악을 구하기 위해 남들의 눈을 속이기까지 했지만, 좋은 결과를 얻지는 못할 것 같네. 그 무리들은 그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강할 뿐 아니라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는 무지막지한 자들이거든.”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장내의 상황이 급변했다.

곽산쌍려가 중인들의 눈을 피해 동굴에서 백의인을 업고 나와 막 그늘 속으로 몸을 숨기려는 순간, 그들이 들어서려던 그늘에서 오히려 몇 개의 인영이 튀어나오며 그들을 향해 가공할 경력을 뿌려댔다.

“앗?”

파팡!

다급한 경호성과 격렬한 굉음이 거푸 터져 나오며 그늘 속으로 들어가려던 곽산쌍려 두 사람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중에서도 백의인을 업고 있던 여불회는 금시라도 쓰러질 듯 연신 휘청거렸으나, 부인인 기아향이 때맞춰 손을 내미는 덕분에 바닥에 나뒹구는 꼴은 당하지 않게 되었다.

하나 그들 부부의 안색은 누가 보기에도 참혹할 정도로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장내의 싸움은 어느새 멈춰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곽산쌍려와 그들의 앞을 막아선 일단의 흑의인들에게 고정되었다.

모든 사람들은 뜻밖의 사태에 처음에는 어리둥절하다가 이내 사태의 추이를 짐작하고는 분노에 찬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경만리의 분노는 누구보다도 큰 것이었다.

만만하게 보았던 희인몽에게서 뜻밖의 반격을 당하고 그녀에게 집중해 있는 사이 누군가가 동굴 속으로 들어가 유중악을 데리고 나오는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으니 그로서는 창피막심한 일이었다. 장내의 상황을 압도할 자신이 있었기에 방해자들을 제거할 생각만 했지, 설마 자신들의 눈을 피해 술수를 꾸미는 자가 있으리라고는 추호도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경만리는 한눈에 곽산쌍려를 알아보고는 이를 부득 갈았다.

‘여불회, 기아향! 이 두 연놈들이 감히 나를 우롱하려 하다니…….’

하나 그보다는 누가 그들을 막아 세웠는지 호기심이 치밀어 오른 경만리는 시선을 돌려 흑의인들을 살펴보고는 표정이 무겁게 굳어졌다.

곽산쌍려의 앞에 나란히 서 있는 사람들은 두 명의 흑포인들이었다. 검은 흑립을 쓰고 검은 색 피풍의를 두른 그들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칠흑같이 검은 색 일색이었다. 그들의 특이한 복장과 전신에서 흐르는 은은한 살기에 경만리는 이내 그들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흑상문신…….”

그의 입술을 뚫고 나직한 침음성이 흘러나오자 중인들의 얼굴에 경악 어린 빛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말이 나오기를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다시 몇 개의 인영이 장내에 나타났다. 마치 장내를 포위하듯 눈부신 신법으로 중인들을 에워싸고 있는 그들은 두 명의 흑포인과 네 명의 백포인들이었다. 곽산쌍려의 앞을 막아섰던 흑포인들을 합치면 그들의 숫자는 정확히 여덟 명이었다.

단순히 여덟 명이 팔방(八方)에 서 있을 뿐인데도 장내의 고수들은 모두 무거운 중압감을 느껴야 했다. 그것은 단순한 기세 이전에 보다 근본적인 심리상의 문제였다. 심지어는 오랫동안 한 지역의 패자(覇者)로 군림해오며 거칠 것이 없었던 경만리도 마찬가지였다.

자신들을 둘러싼 여덟 명의 흑포인과 백포인들을 빠르게 훑던 경만리의 눈꼬리가 가느다란 경련을 일으켰다.

‘흑백상문신이 모두 나타났구나. 그렇다면 혹시 그도 와있는 것이 아닐까?’

뇌리에 한 사람이 떠오르자 두려움을 몰랐던 경만리의 몸이 자신도 모르게 부르르 떨렸다.

그리고 그의 그런 마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수풀을 가르고 한 사람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음양포를 입고 머리가 눈처럼 새하얀 백발의 노인이었다.

그를 보자 경만리는 오히려 담담한 심정이 되었다. 두렵고 놀라던 가슴이 가라앉고 뜨겁게 끓어올랐던 머리가 차갑게 식어버린 것이다.

백발노인은 마치 산책이라도 하듯 뒷짐을 진 채 느긋한 자세로 걸어오고 있었다. 간혹 다른 사람과 시선이 마주치면 싱긋 웃어 보이기까지 했는데, 그때마다 누구도 따라서 웃거나 계속 그와 시선을 마주치는 사람이 없었다.

백발노인의 시선은 마침내 경만리에게로 향했다. 백발노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반색을 했다.

“자네는 혹시 적선(赤仙) 나인기(羅仁起)의 제자가 아닌가?”

경만리는 웃는 얼굴로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저를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파동 적인문의 경만리가 복양 대협을 뵙니다. 별래무양 하셨습니까?”

“노부야 늘 잘 있지. 그래, 자네 사부께선 정정하신가?”

“선사께선 이미 십여 년 전에 별세하셨습니다.”

백발노인은 나직하게 혀를 찼다.

“쯧, 강호의 큰 별 하나가 또 이렇게 사라지는군. 그나저나 자네를 이곳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네. 여기는 무슨 일인가?”

“제가 속해 있는 집단의 일을 보러 왔습니다.”

“적인문의 일인가?”

“저는 얼마 전부터 강북녹림맹에 몸을 담고 있습니다.”

백발노인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사여명은 능력이 좋은 인물이지.”

경만리는 귀가 번쩍 뜨여 기대에 차서 물었다.

“사 맹주를 아십니까?”

“한 번 만난 적이 있네. 재기가 넘치면서도 자신의 분수를 잘 알아서 호감이 가는 젊은이였네.”

사여명은 사십이 넘은 중년인이어서 젊은이라고 하기에는 민망한 나이였다. 하나 백발노인은 그가 새파랗게 젊은 애송이처럼 생각되었던 모양이었다.

경만리는 그걸 알면서도 굳이 그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천하의 어떤 고수라도 백발노인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 법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백발노인이야말로 우내사마의 일인이며 강호에서 환우삼성과 함께 가장 배분이 높은 인물인 음양신마 복양수이기 때문이었다.

경만리조차도 적은 나이는 아니지만 복양수에 비하면 모든 면에서 애송이에 불과했다.

경만리는 복양수가 사여명과 친분이 있는 것 같자 내심 기대하는 마음이 생겼다. 하나 복양수의 다음 말은 그의 그런 기대를 산산이 깨뜨리는 것이었다.

“사여명에게서 무슨 지시를 받았는지는 모르지만 이만 돌아가도록 하게. 특별히 자네의 선사를 생각해서 자네에게 손을 쓰지는 않겠네.”

경만리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한 마디도 더 꺼낼 수 없었다. 그가 선사인 나인기에게 들은 복양수의 성격이 사실이라면 복양수의 말마따나 순순히 물러가도록 해준 것만으로도 그로서는 큰 선심을 쓴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경만리는 거의 손에 잡힌 일을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해 아쉬웠으나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 없음을 알고 강북녹림맹의 고수들과 함께 물러나고 말았다.

강북녹림맹의 고수들이 숨도 제대로 못 쉬고 떠나자 장내에는 경요궁의 인물들과 면사 여인, 그리고 곽산쌍려만이 남게 되었다.

복양수는 그들을 차례로 둘러보더니 이내 여불회가 업고 있는 백의인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백의인은 안색이 백짓장처럼 창백했고 입가에는 핏자국이 선명했다. 입고 있는 백의 또한 여기저기가 찢어져 있어 낭패스런 모습이었다. 백의인의 숨결은 너무도 미약해서 자세히 듣지 않으면 숨이 끊어진 시체로 생각될 정도였다.

복양수는 물끄러미 백의인을 보고 있다가 나직하게 혀를 찼다.

“내 음양수 공력에 석 장을 맞고도 살아 있다니 무림제일호한(武林第一豪漢)의 명성이 거짓은 아니로군. 하지만 이래서야 시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때 의식을 잃고 있는 줄 알았던 백의인이 천천히 눈을 떴다. 비록 예전의 형형한 안광에는 비할 수 없지만 그는 또렷한 눈빛으로 복양수를 응시했다.

“아직 시체는 아니지. 당신도 내 여의신창에 옆구리를 찔렸는데 어떻게 그리 멀쩡할 수가 있소?”

그의 음성은 그리 크지 않았고 힘도 거의 담겨 있지 않았으나 중인들의 귀에는 똑똑하게 들렸다. 그것은 아마도 그가 말꼬리를 흐리지 않고 분명하게 말을 내뱉었기 때문일 것이다.

복양수는 백의인이 눈을 뜰 것을 짐작이라도 하고 있었는지 조금도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고 자신의 왼쪽 옆구리를 한 차례 쓰다듬었다.

“자네의 창법은 확실히 고명했네. 다른 사람이었다면 아마 옆구리 부상 때문에 움직이기는커녕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자리에 누워 있었을 것이네. 하지만 노부의 음양대진력(陰陽大眞力)은 천하에서 가장 회복이 빠르고 요상(療傷) 효과가 뛰어난 무공일세. 삼일 동안 꼬박 운공(運功)을 했더니 부상 부위가 씻은 듯이 나아버리더군.”

백의인, 유중악의 얼굴에 고졸(古拙)한 미소가 떠올랐다. 환상제일창이라는 명성에 어울리지 않는 약간은 허탈하고 씁쓸한 미소였다.

“확실히 내 무공은 당신에게 미치지 못하는군. 나는 몇 차례나 운공을 하려 했으나 진기를 끌어올릴 수가 없었소.”

뿐만 아니라 그 뒤로 줄곧 그를 뒤쫓는 무리들이 있어서 운공은커녕 제대로 쉴 수도 없었다.

하나 유중악은 그 점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설사 자신이 쫓기지 않았더라도 삼일 만에 몸을 완전히 회복하고 추적에 나선 복양수에 비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노부의 음양수에는 상대의 진기를 전문적으로 흩어버리는 파쇄(破碎)의 기운이 담겨 있어서 일장(一掌)만 맞아도 내공을 사용할 수가 없지. 그런데 자네는 삼 장이나 맞았으니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용한 것일세.”

“확실히 그런 것 같소.”

복양수는 유중악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자네는 언제까지 남의 등에 업혀 있을 셈인가?”

유중악은 자신을 업고 있는 여불회의 어깨를 두드렸다.

“여 형, 나를 내려 주시오.”

여불회는 고개를 저었다.

“안 되네, 청천.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노방에게 데려갈 때까지 자네를 내려놓지 않겠네. 노방이라면 자네를 회복시킬 수 있을 거야.”

유중악은 씁쓸하게 웃었다.

“내 몸은 내가 잘 알고 있소. 이미 진기가 가닥가닥 끊기고 진력이 고갈 나서 아무리 노방이라도 나를 회복시키기는 쉽지 않을 거요.”

여불회는 더욱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안 되네.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듣지 않을 테니 자네도 말하지 말게.”

유중악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남에게 업힌 채로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고 싶지 않소.”

그 말에 여불회는 물론이고 기아향과 면사 여인, 희인몽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청천…….”

“나를 내려주시오.”

유중악의 음성은 어느 때보다 조용했으나 그래서 더욱 비장하게 들렸다. 여불회는 입가를 실룩거린 채 몇 번이나 망설이더니 이윽고 조심스레 그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몸이 차가운 바닥에 닿자 유중악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으나 한 마디의 신음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몸을 길게 누인 유중악은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편하군. 사실 당신의 등은 너무 굳은 근육으로 뭉쳐 있어서 조금 불편했었소.”

여불회는 억지로 미소 지었다.

“그런 줄 알았으면 내 마누라에게 업으라고 할 걸 그랬네.”

“여자에게는 업히는 게 아니라 안기는 거요. 하지만 남의 아내 품에 안길 수는 없으니 딱딱한 당신 등에 업히는 게 나로서는 최선의 방책이었소.”

여불회가 다시 무어라고 대꾸하려 했으나, 그때 복양수의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말이 너무 많아지면 미련도 많아지는 법일세. 이제 그만 우리 사이의 일을 마무리 짓도록 하세.”

유중악은 바닥에 누운 채로 복양수를 올려보며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오. 우리의 수다를 듣느라 지겨웠을 텐데 기다려줘서 고맙소.”

복양수는 천천히 뒷짐을 풀고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그의 손에 가공할 경력이 모여드는 것이 중인들의 눈에 확연히 보일 정도였다.

그때 몇 사람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그들은 면사 여인과 희인몽이었다.

복양수는 조용한 눈으로 두 여인을 바라보았다.

“노부의 앞을 가로막은 사람은 지난 십여 년간 너희들이 처음이다. 그런 점에서 자부심을 느껴도 좋을 것이다.”

마치 할아버지가 손녀딸을 대하듯 부드러운 모습이었으나, 면사 여인과 희인몽은 커다란 압박감을 느끼는 듯 신형이 한 차례 부르르 떨렸다. 하나 둘 중 누구도 뒤로 물러서는 사람은 없었다.

복양수는 그런 두 여인이 신기한 듯 두 사람을 차례로 훑어보더니 이내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확실히 유중악이 강호 제일의 풍류남아라더니 거짓이 아닌 모양이로구나. 이렇듯 젊고 미색이 출중한 미녀들이 다 죽어가는 그를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려 하다니 말이야.”

두 여인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굳게 다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노부는 여인이라고 해서 사정을 봐준 적이 없다. 어차피 자신이 하는 행동에 대한 결과는 자신이 책임지는 법이지.”

복양수가 손을 쓰는 것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는데 어느새 그의 양손이 면사 여인과 희인몽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날아들었다. 강호에서의 명성이나 지위로 보아 선수를 양보하거나 공격을 하기 전에 기척을 보일 법도 한데, 복양수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상대가 누구든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를 동원해 전력으로 대하는 것이 지금까지 복양수가 강호에서 싸워온 방식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가 ‘신마(神魔)’라 불리게 된 가장 큰 이유였다.

두 여인의 반응은 판이하게 달랐다.

면사 여인은 뒤로 훌쩍 물러나며 왼손을 빠르게 휘둘렀는데, 가뜩이나 새하얀 옥수가 유난히 하얗게 반짝거렸다. 그에 비해 희인몽은 어느새 뽑아들었는지 수중의 연검을 휘두르며 앞으로 몸을 날렸다.

두 사람의 움직임은 서로 달랐으나 그 결과는 비슷했다.

콰앙!

귀청이 찢어지는 듯한 폭음과 함께 면사 여인의 몸이 훌훌 날아 삼 장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희인몽은 순식간에 다섯 번이나 복양수의 가슴을 노리고 다가들었으나 그때마다 그의 음양건곤수에 가로막혀 제대로 검식을 이어나가지 못했다. 그녀는 공세를 무리하게 이어나가다가 복양수가 내뻗은 음양탈화(陰陽奪華) 일식을 감당하지 못하고 피를 뿌리며 바닥을 굴렀다. 그녀의 손에 쥐어져 있던 연검이 십여 장 밖에 떨어져 내리는 광경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허무함을 느끼게 할 정도였다.

복양수는 불과 십 초도 안 되어 무공이 절정에 달해 있는 두 여고수를 쓰러뜨리고도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다만 그는 면사 여인의 하얀 손에 부딪혔던 자신의 왼손을 슬쩍 내려 보았을 뿐이다.

“명옥공? 그렇다면…….”

그가 채 무어라고 중얼거리기도 전에 무언가 섬뜩한 것이 그의 미간으로 날아들었다. 그 섬광이 날아드는 속도는 너무도 빠르고 순간적이어서 복양수가 고개를 쳐들었을 때는 이미 그의 이마에 거의 도달해 있는 상태였다.

팍!

한 줄기 예리한 섬광이 번뜩였다가 사라졌다.

삼 장 밖으로 나가떨어졌던 면사 여인은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기대에 찬 눈으로 복양수를 바라보았다.

“아……!”

그녀의 입에서 탄성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가 흘러나왔다.

복양수는 오른손을 자신의 이마에 갖다 댄 자세로 우뚝 서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의 오른손에는 여인의 장신구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장신구는 손가락 반절 길이에 끝이 유달리 뾰족했는데, 안목이 예리한 사람이라면 그것이 여인의 귀걸이임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복양수는 자신의 손에 들린 대나무 잎 모양의 귀걸이를 내려 보고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면사 여인을 쳐다보았다.

“명옥공에 죽엽배(竹葉环)라……. 너는 옥부용의 제자로구나.”

그 말을 듣고 있던 면사 여인이 갑자기 왈칵 피를 토했다.

“우욱!”

그 바람에 면사가 벗겨지며 삼십 대 초반의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녀는 다름 아닌 천수관음의 대제자 신수옥녀 능자하였다. 그녀는 한때 유중악과 염문이 나돌 정도로 그와 친밀한 사이였으나, 어느 순간부터 사이가 멀어져 많은 사람들의 아쉬움을 산 적이 있었다. 그런데 유중악이 위기에 처한 이 순간에 정체를 감추고 그를 위해 목숨마저 도외시하고 있으니 알다가도 모를 여심(女心)이 아닐 수 없었다.

능자하는 복양수와 정면으로 맞선 순간에 이미 심각한 내상을 입고 있었는데, 내상을 억지로 억누른 상태에서 무리하게 암기술을 펼치느라 내상이 더욱 도져 있었다. 정면 대결로는 도저히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일부러 삼 장이나 나가떨어져 그의 방심을 유도하고 치명적인 일격을 노렸음에도 복양수의 몸에 상처 하나 입히지 못한 것이 그녀에게는 더욱 큰 충격이었다.

능자하는 심신이 모두 크게 다쳐 자신의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었고, 희인몽은 애검마저 놓쳐버릴 정도로 심각한 부상을 입고 말았다. 단후명과 수신사위는 희인몽에게 다가가고 싶어도 자신들을 에워싼 흑백상문신에 가로막혀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복양수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곽산쌍려 여씨 부부에게로 향했다. 아무 말 없이 물끄러미 그들을 응시하고 있는 복양수의 눈에는 그들에게 덤빌 테면 덤벼보라는 무언의 빛이 담겨 있었다.

여불회와 기아향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더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불회는 나직하게 소곤거렸다.

“예전에 내가 당신에게 한 약속을 기억하지?”

“무슨 약속이요?”

“당신과 한날한시에 태어나지는 못했어도 한날한시에 죽겠다는 약속 말이오.”

기아향의 눈은 기이할 정도로 반짝거렸다.

“그걸 어떻게 잊겠어요?”

여불회는 빙긋 웃었다.

“그 약속을 지킬 때가 된 것 같소.”

기아향은 부드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속에 담긴 따뜻한 정을 여불회는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당신은 정말 멋진 남자예요.”

“당신도 정말 좋은 여자지.”

두 사람은 서로 웃으며 손을 마주 잡았다.

“이제 저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마인에게 우리 부부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주도록 합시다.”

여불회가 가슴을 탕탕 치며 큰 소리를 쳤으나, 기아향은 복양수를 힐끔거리며 낮은 음성으로 속삭이듯 말했다.

“우리가 아무리 용을 써도 그가 우리를 무서워할 것 같지는 않군요.”

여불회는 그런 그녀가 못내 사랑스러운 듯 입가에 미소를 매달았다.

“그럼 우리의 사랑이 얼마나 뜨거운지 보여주는 걸로 하지.”

기아향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좋겠어요. 우리가 가장 자신할 수 있는 것이니.”

“역시 그렇지?”

두 사람은 몸을 돌려 복양수의 앞에 나란히 섰다. 유중악은 몇 번이나 그들을 향해 무어라고 말을 하려다 그들의 표정을 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들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미소만 보아도 그들의 지금 심정을 너무도 잘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마 자신이 그들의 입장이 되었어도 역시 같은 행동을 취했을 것이다. 그러니 그가 어찌 그들의 마지막 소원을 깰 수 있겠는가?

유중악은 차마 그들의 최후를 보고 싶지 않아 고개를 돌렸다. 눈이 흐릿해지는 것이 눈물 때문인지 아니면 진기의 흐름이 끊긴 때문인지는 그도 알 수가 없었다.

그때 문득 유중악은 멀지 않은 숲속의 한편에서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자신 하나 때문에 오늘 이곳에 그토록 많은 고수들이 몰려들었는데 아직도 더 올 사람이 남아 있단 말인가?

유중악은 문득 우스운 생각이 들어 소리 내어 웃으려다 그 사람의 모습이 어딘지 낯익은 것을 깨닫고 안력을 최대한 돋우어 보았다.

흐릿한 시야에 그 사람의 모습이 조금씩 선명하게 보이고 있었다.

유난히 훤칠한 키에 차분한 눈빛을 한 사나이였다. 자세는 곧았고, 허리춤에 한 자루의 검을 차고 있었다. 왼쪽 뺨에 움푹 파여 들어간 칼자국이 유난히 시선을 끌었다.

그 칼자국을 보다 사나이의 시선과 마주친 유중악의 눈에 뿌연 물기가 차올랐다. 유중악은 눈물을 보이기 싫어 고개를 떨구었다.

진산월은 그런 유중악을 한동안 바라보다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야에 이글거리는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복양수의 모습이 가득 들어왔다.

<28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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