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7권 호한위난(豪漢危難)편 : 3화
제 274장 명쟁암투(明爭暗鬪)
서안의 동문대로에 자리한 넓은 공터에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병장기를 찬 무인들도 많았지만,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일반 사람들도 상당수 눈에 띄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서안에 뿌리를 둔 서안의 토박이였고, 심지어는 여인들의 숫자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장내의 분위기는 소란스럽기 그지없어서 시장터를 방불케 했다.
미시(未時)가 가까워오자 장내가 한층 더 시끌벅적해졌다. 그리고 이내 사람들의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왔다!”
인파의 한쪽 끝이 자연스럽게 벌어지며 그쪽에서 일단의 무리들이 공터의 중앙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모두 검은 색 무복(武服)을 걸치고 이마에는 흑건(黑巾)을 두르고 있었는데, 흑건의 중앙에 ‘관중제일(關中第一)’이라는 글귀가 붉은 색 실로 수놓아져 있었다.
그들의 가장 앞에서 무리를 이끌고 있는 사람은 우람한 체구에 검은 수염을 기른 오십 대 장한이었다. 장한의 얼굴은 대춧빛처럼 붉었고, 부리부리한 호목(虎目)에서는 정광(精光)이 이글거리고 있어서 마음이 약한 사람은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할 정도로 패기가 가득한 모습이었다.
그들을 본 중인들이 여기저기서 소곤거렸다.
“관중일관의 무사부(武師父)들이 모두 나왔구나.”
“노호공이 단단히 작정한 모양일세. 호랑이 콧수염을 건드리다니 이번에는 아무래도 냉혈교가 호된 꼴을 당할 것 같으이.”
흑의인들의 앞에 서 있는 장한이 바로 관중일관의 관주인 노호공 장력패였다. 관중일관은 생긴 지가 거의 백오십 년이나 되는 오래된 무관(武館)으로, 서안 사람들에게는 이웃처럼 친숙하기도 하고 든든한 보호소이기도 한 곳이었다. 장력패 또한 노저라고 불릴 만큼 성정이 화급하고 불 같았으나, 그만큼 믿음직한 구석도 있어서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관중일관의 고수들이 한쪽에 자리를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장내가 시끄러워지며 일단의 백의인들이 모습을 나타냈다.
그들은 관중일관의 고수들과는 달리 온통 새하얀 무복을 입고 머리에는 흰 띠를 두르고 있어서 더욱 두드러져 보였다. 언뜻 보기에도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외모에 당당한 기세를 풍기고 있는 그들은 바로 백인장의 고수들이었다.
그들의 선두에는 몸이 창같이 꼿꼿하고 기개가 헌앙해 보이는 준수한 중년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탈속(脫俗)한 듯 뛰어난 모습의 그 백의 중년인은 백인장의 주인인 교군 도지곤으로, 이십 년 전에 혈혈단신으로 서안에 와서 혼자의 힘으로 백인장을 일으켜 세운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장력패와 도지곤은 외모부터 풍기는 기세까지 너무도 판이하여 누가 보기에도 그들이 친하게 어울릴 것 같지 않았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두 사람은 나타날 때부터 다른 사람은 쳐다보지도 않고 서로를 무서운 눈으로 쏘아보고 있었다.
하나 두 사람의 태도는 조금 달랐다. 장력패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금시라도 도지곤을 향해 달려들 듯한 모습인 반면에, 도지곤은 냉정하고 차분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관중일관과 백인장의 고수들이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자 시장바닥처럼 소란스럽던 장내가 조용해지며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에게 집중되었다.
그때 다시 세 명의 인물들이 공터로 들어섰다. 그들은 금포를 입은 중년인과 우람한 체구의 갈의인, 그리고 문사 차림의 준수한 유생(儒生)이었다.
금포인은 관중일관과 백인장의 고수들이 서로 노려보고 있는 중앙으로 가서 몸을 멈춰 세웠다. 그 바람에 장력패와 도지곤은 어쩔 수 없이 그에게로 시선을 돌려야만 했다. 금포인은 그들을 향해 살짝 머리를 끄덕여 아는 척을 하고는 이내 좌중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나는 금륜장의 장주인 금륜군자 고소명으로, 오늘 벌어질 관중일관과 백인장 사이의 공개 대련에 공증을 맡기로 했소. 나 외에 장안표국(長安鏢局)의 총국주(總局主)인 신룡표객(神龍鏢客) 태을진(太乙眞) 대협과 현자(賢者)로 유명하신 명일수사(明逸秀士) 문인종(聞人宗) 대협께서도 함께 공증에 힘을 보태주시기로 하셨소.”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새삼스런 눈으로 그들을 보며 박수를 쳤다.
고소명은 초가보주였던 무영신군 초관이 등장하기 전만 해도 서안에서 제일가는 고수로 인정받던 인물이었다. 태을진 또한 서안에서 가장 큰 표국인 장안표국의 주인이었고, 문인종은 장안일현(長安一賢)이라고 불릴 정도로 학식이 뛰어나고 현명한 사람이었으니 오늘같이 중요한 싸움의 공증을 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인선(人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소명은 신광이 번뜩이는 눈으로 장력패와 도지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오늘의 대련은 실질적으로 장안에서 가장 뛰어난 무관이 어디인지를 가르기 위한 것으로, 오늘 승리한 무관에 패한 곳에서 ‘장안제일무관(長安第一武館)’이라고 쓰인 현판을 선사하고 무관의 문을 닫기로 사전에 약조했소. 이 점에 대해 두 분의 생각은 아직도 변함이 없으시오?”
장력패와 도지곤은 무겁게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없소이다.”
중인들은 단순한 두 무관 사이의 비무인 줄로만 알고 있다가 이번 내기에 걸린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자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무관끼리의 비무가 흔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럴 경우 대부분 승리한 무관은 문하생들이 대폭 증가하여 번성하게 되고, 패한 무관은 문도들을 많이 잃고 세가 약해져서 와신상담하여 재기를 노리게 되는 정도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예 패한 쪽에서 상대 무관을 ‘장안제일’로 인정할 뿐 아니라 제 무관의 문까지 닫는다고 하니 단순한 비무라고 하기에는 일이 지나치게 커져버렸다. 그야말로 어떠한 생사투(生死鬪)보다도 처절한 싸움이 벌어져도 하등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긴 무관은 자타가 공인하는 ‘장안제일무관’이라는 혁혁한 명성을 세울 수 있지만, 패한 무관은 존재조차 완전히 사라지는 전부 아니면 전무인 싸움이 된 셈이었다.
“이번 대련은 양측에서 다섯 명씩 나와서 먼저 세 번을 이기는 쪽이 승리하는 것으로 하겠소. 아무쪼록 이번 대련이 커다란 사고 없이 순탄하게 마무리되기를 바라겠소.”
고소명은 피를 보지 않기를 바란다는 식으로 말했으나, 그의 말대로 되리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고소명 자신도 그렇게 믿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아직 비무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장내의 분위기는 팽팽하게 긴장되었고, 양측의 신경은 곤두설 대로 곤두서서 사소한 일로도 한바탕 피바람이 몰아칠 것만 같았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서안에서 가장 큰 무관들인 관중일관과 백인장이 사소한 다툼으로 비무를 벌인다고만 알았지 설마 이토록 살벌한 싸움이 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모양이었다. 그들은 당황한 기색을 보이기도 했으나 곧 흥미진진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누가 뭐라 해도 싸움구경만큼 재미있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더구나 이번처럼 자신들의 모든 것을 내걸고 싸우는 싸움이야말로 승패를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 점에서 한층 더 흥미로울 수밖에 없었다.
고소명과 다른 두 명의 공증인들이 한쪽에 자리를 잡고 있자 양측의 인원들이 모두 뒤쪽으로 물러나고 곧 비무를 벌일 공간이 마련되었다.
관중일관에서 제일 먼저 출전하는 인물은 체구가 커다란 삼십 대의 장한이었다. 장력패 만큼이나 거구를 자랑하는 그 장한은 관중일관의 무사부들 중에서도 첫째 둘째를 다투는 실력을 지닌 만성호(萬星豪)라는 인물이었다. 비무가 다섯 번에 불과하니 처음부터 반드시 승리를 거두어 유리한 고지를 점하겠다는 장력패의 의중을 엿볼 수 있었다.
그에 맞서 백인장에서도 최고수 중 한 명인 보영웅(寶英雄)을 내세웠다. 보영웅은 도지곤이 서안에 들어온 후 가장 먼저 포섭한 인물로, 그와 함께 백인장을 세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도지곤이 가장 믿고 있는 최측근의 수하였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더니 가볍게 포권을 하고는 이 장의 거리를 두고 나란히 섰다. 그들은 오랫동안 서로를 지켜봐왔기에 상대의 무공이 자신에 결코 못하지 않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처음부터 전력을 다할 생각으로 맹렬하게 기세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이얍!”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은 커다란 고함과 함께 자신이 펼칠 수 있는 가장 강한 무공으로 상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만성호의 장기는 튼튼한 몸을 바탕으로 한 외공(外功)과 광마사십팔권(狂馬四十八拳)이라는 권법이었고, 보영웅은 빠른 신법과 철종각(鐵鐘脚)이라는 각법을 주 무기로 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두 사람의 대결은 주먹과 발길질이 서로 어울려져 보는 맛이 각별했다. 만성호의 솥뚜껑 같은 주먹이 무시무시한 파공음을 내며 금시라도 보영웅의 머리통을 박살 낼 듯 날아들 때면 관중일관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환성을 내질렀고, 보영웅이 허깨비의 움직임 같은 유연한 동작으로 만성호의 주먹을 피하며 날카롭고 빠른 발길질을 해댈 때는 백인장 측에서 요란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야말로 승패를 전혀 예측하기 어려운 팽팽한 대결이 펼쳐지자 장내의 분위기는 삽시간에 후끈 달아올랐다. 여기저기서 내지르는 고함과 박수 소리, 탄식과 감탄성이 주위를 시끄럽게 했다.
하나 보영웅보다는 만성호를 응원하는 사람들의 함성이 더욱 큰 것으로 보아 서안 사람들이 외부에서 들어온 백인장보다는 서안의 터줏대감격인 관중일관을 더 지지한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퍽! 퍽!
두 사람은 서로의 주먹과 발에 몇 번이나 격중 당해 몸의 여기저기에 크고 작은 상처가 나 있었다. 특히 보영웅의 창같이 날카로운 발끝 공격에 뺨을 스친 만성호의 얼굴은 피로 얼룩져 있었다.
보영웅의 상태도 그리 좋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비록 만성호의 몸에 다섯 번이나 공격을 격중 시켰으나, 자신도 두 번의 주먹질을 당해 코에서 검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특히 왼쪽 옆구리를 가격당한 충격은 상당해서 왼쪽 발을 들어 올리는 것에도 심각한 통증을 느낄 정도였다.
통상적인 비무대련이라면 이쯤에서 어느 쪽이 우세했는지로 승패를 판가름했을 텐데 지금은 두 사람 중 누구도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얼굴에 흉흉한 빛을 가득 뿌린 채 더욱 사납게 상대를 공격하고 있었다.
장내의 싸움이 단순한 비무가 아닌 두 사람의 사력을 다한 혈투로 변해가고 있을 즈음, 두 명의 인물이 공터가 환히 내려다보이는 근처의 이층 건물에서 그들의 격전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노해광과 정해였다.
노해광은 습관적으로 턱 밑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혀를 찼다.
“쯧. 이건 비무가 아니라 완전히 사생결단을 내려는 처절한 승부로군. 그들의 처지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너무 보기 딱하구나. 그나저나 너는 둘 중 누가 이기리라고 보느냐?”
정해는 한동안 장내의 치열한 싸움을 내려 보고 있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제 안목이 너무 보잘것없어서 두 사람 중 누가 우세한지를 알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노해광은 피식 웃었다.
“네 무공이 형편없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래도 제법 눈썰미가 있어서 무공을 보는 눈은 상당하다는 걸 알고 있는데, 무슨 겸손을 떠는 것이냐?”
정해의 얼굴에 멋쩍은 미소가 떠올랐다.
“겸손을 떠는 게 아니라 정말 모르겠습니다. 단순한 무공의 고하(高下)를 겨루는 것이라면 저도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만, 지금 저 두 사람은 그야말로 목숨을 도외시하고 있어서 승부가 어떻게 될지를 전혀 예측할 수가 없군요.”
“그러면 승패는 예측하지 말고 누구의 무공이 더 나은지를 말해 보아라.”
“아무래도 사숙께서 심심하신 모양이군요. 제가 보기에는 순수한 무공만 따지면 보영웅이 그래도 더 낫다고 봅니다.”
노해광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조금 더 짙어지며 두 눈이 반짝거렸다.
“정말 보면 볼수록 네 놈은 꼭 내 뱃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나에 대해 잘 알고 있구나. 네가 보기엔 보영웅이 이길 것 같단 말이지?”
정해는 우거지상을 했다.
“아이고, 제가 사숙의 마음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리고 보영웅이 이길 것 같다는 게 아니라, 그의 무공이 만성호보다는 좀 더 뛰어난 것 같다고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그게 그 말 아니냐?”
“무공은 보영웅이 조금 나아도 체력은 만성호가 훨씬 뛰어나니 누가 이긴다고 콕 집어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제법 내기가 되지 않겠느냐? 너는 보영웅이 이긴다고 본단 말이지?”
노해광이 장난스럽게 계속 추궁하자 정해는 울상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사숙께선 일전에 저와의 내기에서 진 것이 아직도 원통하신 모양이군요. 전 내기에 걸 것도, 얻을 것도 없으니 아무런 내기도 하지 않겠습니다.”
“얻을 게 없긴. 네가 이기면 내가 제법 괜찮은 무공서(武功書)를 주마.”
그 말에 정해는 솔깃한 표정이었으나 여전히 난색을 표했다.
“제가 지면 내놓을 것이 없는데…….”
“네놈이 지면 내 부탁 한 가지만 들어주면 된다.”
“그게 무엇입니까?”
“네 장인을 잠깐만 쓰도록 하자.”
정해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장인어른을 말입니까?”
“그래. 네 장인도 이곳에 와서 하는 일 없이 방구석에만 처박혀 있느니 그래도 나를 좀 도와주면 심심하지는 않을 게 아니냐?”
정해는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슬쩍 노해광의 눈치를 살폈다.
“힘들거나 위험한 일은 아니겠지요?”
노해광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망할 자식. 내가 아무려면 네 장인을 다치거나 죽게 할 것 같으냐? 내 주위에 쓸 만한 무공을 지닌 자가 너무 부족해서 그의 힘이라도 빌리려 하는 것이다.”
정해는 마음을 결정한 듯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저는 만성호의 승리에 걸겠습니다.”
노해광은 멀거니 그를 쳐다보더니 이내 히죽 웃었다.
“보영웅의 무공을 잔뜩 칭찬하더니 막상 내기는 만성호에게 걸겠다는 말이지? 약삭빠른 녀석.”
노해광이 보기에도 보영웅보다는 만성호의 승산이 더 높아 보였다. 보영웅의 무공이 만성호보다 뛰어나다고 해도 그 차이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러니 싸움이 계속될수록 체력이 떨어지는 보영웅이 만성호에게 당할 확률이 높아질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보영웅에게 걸겠다. 네가 비록 잔머리를 굴린 모양이다만, 강호에서의 목숨을 건 승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법이니라.”
노해광이 점잖게 말하자 정해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보영웅은 체력이 떨어지기 전에 승부를 걸었어야 했는데 지금은 너무 늦었습니다. 아무리 사숙께서 그렇게 말씀하셔도…….”
바로 그때 장내의 싸움에 격변이 일어났다.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서로 치열하게 공방을 벌이던 두 사람 중 보영웅이 갑자기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옆구리를 움켜쥐고 있는 것으로 보아 조금 전에 격중당한 갈비뼈의 통증이 심각해져서 더 이상 견디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다.
절대적인 기회를 포착한 만성호가 두 눈을 무섭게 번뜩이며 보영웅의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그와 함께 그의 주먹이 보영웅의 콧등을 향해 유성처럼 날아들었다. 단숨에 보영웅의 얼굴을 박살내 버리겠다는 듯 전력을 다한 무지막지한 공격이었다.
그것을 본 정해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짤막한 외침이 흘러나왔다.
“저런 바보……. 그건 함정이야!”
하나 그의 작은 외침은 멀리 떨어진 만성호의 귀에까지 들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대신 그가 우려했던 상황이 그대로 전개되었다.
만성호의 주먹이 얼굴을 가격하려는 순간, 보영웅의 몸이 그 자리에 허물어지듯 주저앉으며 빠르게 선회했다. 그 동작은 너무도 시기가 적절했을 뿐 아니라 선회하는 속도가 어찌나 빨랐던지 만성호가 자신의 주먹이 헛되이 허공을 가르고 지나가는 것을 느끼고 안색이 변하는 순간에 이미 보영웅의 몸은 만성호의 턱 밑에 도달해 있었다.
어느새 물구나무를 한 보영웅의 발이 그의 턱을 사정없이 강타했다. 그야말로 피하고 자시고 할 사이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쾅!
“크억!”
만성호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혼절한 그의 아래턱은 턱뼈가 부서진 채 흐물흐물해 있어 실로 보기에 끔찍할 정도였다.
삽시간에 우세를 보이고 있던 만성호가 처참한 몰골로 패하자 관중일관의 분위기가 침울해졌다. 장력패는 얼굴이 붉게 상기된 채 보영웅을 찢어죽일 듯이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무관 사이의 비무에서 이토록 참혹한 부상을 당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언뜻 보기에도 만성호는 기식이 엄엄한 상태였고, 설사 살아난다 해도 두 번 다시 입으로 아무것도 씹지 못하는 신세가 될 게 분명해 보였다. 관중일관의 제자들이 황급히 만성호를 들쳐 업은 채 의원을 찾아 인파 속을 뚫고 사라져갔다.
승리를 한 보영웅의 안색도 그리 밝지는 않았다. 만성호가 우세한 상황에서 그가 술수를 부려 승리했음을 누구라도 쉽게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사방을 향해 정중하게 포권하는 그를 향해 환호를 보내는 사람은 백인장의 고수들 외에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보영웅 또한 승리한 사람답지 않게 무겁게 굳어진 얼굴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관중일관에서 두 번째로 나선 사람은 만성호와 쌍벽을 이루는 실력자인 조중담(曹重擔)이었다. 그는 만성호와는 선의의 경쟁자였고, 또한 누구보다도 절친한 사이였다. 그래서인지 자신의 상대로 나선 백인장의 고수를 응시하는 그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결연했고, 분노에 가득 차 있었다.
그의 상대는 백인장의 이인자격인 총사부(總師父) 막고성(莫古城)이었다. 막고성이 두 번째 비무자로 나오자 제법 안목이 뛰어난 사람들은 상당히 의아하게 생각했다. 아직도 비무가 세 번이나 남았는데 벌써부터 막고성이 나선다면 그 다음에는 백인장의 장주인 도지곤 외에 마땅히 나올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 도지곤의 표정은 담담하기 그지없었고, 막고성 또한 전혀 부담스러워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노해광도 그들의 표정을 알아보았는지 얼굴에 흥미로운 기색이 가득했다.
“도지곤이 강수를 두는군. 초반에 확실한 승기를 잡아 자신이 나서기 전에 승부를 판가름 지을 속셈인 모양이구나.”
정해가 눈을 반짝이며 그의 말을 받았다.
“막고성이라면 확실히 도지곤을 제외하고는 백인장 제일의 고수라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조중담도 만만치 않은 실력의 소유자입니다. 알려지기로는 그의 삼절곤(三節棍)을 다루는 솜씨가 능히 장안제일이라고 하더군요.”
노해광이 정해를 보며 피식 웃었다.
“왜? 이번에도 또 나와 내기를 하고 싶은 게냐?”
정해는 커다란 머리통을 긁적거리며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그냥 구경만 하는 것은 사숙께서 너무 심심해하실 것 같아서 말이죠.”
노해광은 그를 빤히 쳐다보더니 불쑥 물었다.
“내가 가진 무공서를 그렇게 갖고 싶은 것이냐?”
정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응 사형은 한쪽 다리가 불편해서 본 파의 무공만으로는 제대로 실력을 발휘하기가 힘든 상태입니다. 사숙께서 오랫동안 보관하고 계실 정도면 상당히 괜찮은 무공서일 테니 응 사형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제가 무리하게 욕심을 부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사숙.”
정해가 머리를 조아리자 노해광은 한동안 그를 본 채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정해가 평상시에도 응계성에게 유난히 신경을 쓰고 있다는 건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정해의 말마따나 현재 종남파에 남아 있는 무공들 중 한쪽 다리를 쓰지 못하는 응계성이 사용할 만한 것은 거의 없는 형편이었다.
다른 파의 무공을 익히는 것은 명문정파의 제자로서 용납하지 못할 일이지만, 그런 만큼 특별한 문파의 무공이 아닌 오래전에 실전(失傳)된 절학이나 대(代)가 끊어진 개인의 무공은 익히는 것에는 커다란 제약이 없었다. 오히려 일부 문파에서는 그런 식으로 습득한 무공들을 수정 보완하여 자신들만의 독문 무공으로 만드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노해광은 오랫동안 강호를 떠돌면서 적지 않은 수의 무공서적들을 모아왔다. 물론 그 대부분은 절학이라고 하기 민망한 것들이었지만, 그래도 그중 세 가지는 어디에 내세워도 부끄럽지 않은 뛰어난 무공비급들이었다.
그중 하나는 잠행술(潛行術)과 몇 가지 살인수법(殺人手法)을 담은 <잠룡무종(潛龍無踪)>이라는 살수무예서(殺手武藝書)였고, 또 하나는 다섯 종의 암기를 사용하는 <비선혈류(飛線血流)>라는 암기비급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가 백여 년 전에 일대유협(一大儒俠)으로 명성을 날렸던 호천신유(昊天神儒) 수인영(隋仁英)의 비기를 적은 <호천비록(昊天秘錄)>이었다.
노해광은 원래 이중에서 <비선혈류>를 정해에게 줄 생각이었다. 내공은 조금 약하지만 눈치가 비상하고 손이 빠른 정해가 익히면 최후의 순간에 가장 효과적인 보호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응계성이 사용할 것이라면 <비선혈류>는 별로 어울리는 선택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살기가 짙고 사도(邪道)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잠룡무종>을 줄 수도 없었다. <잠룡무종>에 담긴 대부분의 수법들은 노해광의 수하들이 적재적소에 사용하면서 톡톡히 그 효과가 입증된 뛰어난 무공이지만, 명문정파의 제자가 익힐 만한 것은 아니었다.
수인영의 <호천비록>도 문제였다. <호천비록>상의 무공들이 비록 상승절학(上乘絶學)이기는 하나, 어려서부터 체계적으로 연마하지 않으면 절정에 도달하기 힘든 정종무공(正宗武功)이어서 노해광 자신도 어렵게 구해만 놓고 익히지 않고 있는 상황이었다.
기대에 가득 찬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정해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무언가 그럴듯한 무공서를 내놓아야 하는데, 마땅히 그럴 만한 게 떠오르지 않는다는 게 노해광을 고민스럽게 했다.
그러다 문득 노해광의 머릿속으로 한 가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어차피 <호천비록>은 지금의 나에게는 계륵(鷄肋)과도 같은 것이다. 하지만 이 비급을 반드시 필요로 하는 자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노해광은 이리저리 생각을 굴리다가 정해를 바라보았다. 정해는 두 눈을 유달리 반짝이며 노해광을 빤히 응시하고 있다가 시선이 마주치자 멋쩍은 웃음을 날렸다. 그 모습을 보자 노해광은 왠지 얄미운 생각이 들어 퉁명스런 음성을 내뱉었다.
“이 사숙이 어렵게 모은 것들을 네 녀석은 말 몇 마디로 얻으려 하고 있구나. 더 이상의 내기는 하지 않겠다.”
정해는 움찔하다가 울상을 지었다.
“사숙…….”
노해광은 엄격한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대신 네게 두 가지 일을 맡기겠다. 첫 번째 일을 성공시킨다면 네 녀석이 쓸 만한 무공서 하나를 넘겨주겠다. 그리고 두 가지 모두 이루게 된다면 계성에게 어울릴 만한 무공서를 주도록 하마.”
정해는 반색을 했다.
“그게 정말입니까, 사숙?”
“너무 좋아하지 마라. 그리 쉬운 일은 아닐 테니 말이다.”
노해광이 짐짓 엄포를 놓았으나 정해는 기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무공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 응계성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어렵사리 말을 꺼낸 것인데, 응계성뿐 아니라 자신도 적합한 무공을 얻을 수 있게 되었으니 아무리 무공에 별 욕심이 없는 그일지라도 기쁘지 않을 리 없었다. 정해 또한 아직은 무림인의 본성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감사합니다, 사숙. 무슨 일이든 맡겨만 주십시오.”
정해가 평상시와는 달리 자신 있는 표정으로 말하자 굳은 얼굴을 하고 있던 노해광도 슬며시 웃고 말았다.
‘계성에게 무공서를 얻어주는 게 그리도 기쁜가? 어려운 고비를 함께 헤쳐 나가서인지 사형제들 간의 우애가 참으로 돈독하구나.’
노해광은 사문의 선배로서 그들의 그런 모습이 뿌듯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내심 부러웠다. 자신도 충분히 그럴 기회가 있었는데, 결국 그러지 못했다는 회한이 마음 한 구석을 무겁게 했다. 노해광은 마음속의 짐을 억누르며 짐짓 호탕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네가 그리 자신한다니 나도 기껍게 일을 맡기도록 하마. 내가 네 녀석에게 맡길 일은…….”
그가 막 정해에게 일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할 때였다. 갑자기 처절한 비명 소리가 장내를 뒤흔들었다.
“크아악!”
두 사람의 시선이 절로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향했다.
조중담과 막고성의 비무는 처참한 결과를 맞이하고 말았다. 친우인 만성호의 비참한 모습에 분노한 조중담은 처음부터 살기가 가득한 수법을 계속 사용했고, 막고성은 나름대로 신중을 기하면서 반격을 노리려 했다. 결국은 두 사람의 그러한 상반된 대응이 의외의 결과를 불러일으켰다.
원래 조중담과 막고성의 무공은 엇비슷한 수준이어서 쉽게 승부가 갈릴 상황은 아니었다. 그런데 조중담은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공세에 임한 반면 막고성은 소극적으로 수비에 치중하다 보니 제대로 실력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딴에는 반격을 노린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지만, 조중담의 거듭된 살수에 반격은커녕 피하는 것에 급급했던 막고성은 비무가 시작된 후부터 일방적으로 몰리다가 결국 조중담의 삼절곤에 관자놀이를 정통으로 가격당하고 만 것이다.
입과 코로 시커먼 피를 줄줄이 흘리며 경련을 일으키던 막고성의 몸이 축 늘어지고 말았다. 백인장의 고수들이 다급히 그에게 달려갔으나, 그때는 이미 막고성의 몸은 싸늘하게 식어버린 후였다.
오늘의 비무에서 처음으로 희생자가 나오게 된 것이다.
장내의 사람들은 환성을 지르기보다는 웅성거리며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처음부터 비무의 분위기가 너무 과열되었다 싶었는데, 결국은 죽은 사람까지 나왔으니 두 무관은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철천지원수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 여파가 어디까지 미칠지 서안에 사는 사람들로서는 불안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조중담 또한 처음부터 전력을 기울였던지라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로 지치고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마 막고성이 조금만 더 버텼다면 조중담이 제풀에 먼저 쓰러지고 말았을지도 몰랐다. 하나 결국 그는 승리해 두 발로 서 있었고, 막고성은 비참한 시신의 모습으로 누워 있으니 승자와 패자의 운명이 너무도 극명하게 엇갈려 버린 것이다.
조중담이 만성호의 패배에 분노하지 않았다면 무모할 정도로 공격 일변도로 나가지 않았을 것이고, 막고성 또한 일방적으로 수세에 몰려 자기의 실력을 반도 발휘하지 못하고 허무하게 패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다소 폭급한 조중담보다는 신중한 막고성이 우세했을 가능성이 더 높았다. 강호에서의 승부란 이처럼 아주 사소한 일로도 전혀 판이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법이었다.
조중담은 부축을 하려는 관중일관의 수하들을 뿌리치고 스스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의외의 결과에 놀란 것은 노해광과 정해도 마찬가지였다.
하나 그들은 이내 다음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 관심을 집중시켰다.
이인자인 막고성이 시신으로 돌아오자 항상 냉정하고 침착했던 도지곤의 안색도 그리 평온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관중일관 쪽을 응시하는 그의 두 눈에는 진득한 살기가 가득 어려 있었다.
도지곤이 슬쩍 뒤로 눈짓을 하자 한쪽에 조용히 앉아 있던 백의인 한 명이 앞으로 나왔다. 얼굴이 길쭉하고 몸이 호리호리한 삼십 대 중반의 인물이었다.
그를 보자 노해광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드디어 나왔군.”
정해의 시선도 그 백의인에게 고정되었다.
“저자가 화산파에서 백인장에 은밀히 지원해준 두 명의 고수 중 하나입니까?”
“그래. 낙일검(落日劍) 하태목(何泰睦)이라고 하면 동북지방에서는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검의 고수로 손꼽힌다.”
정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는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군요.”
“중원에서는 새외(塞外)나 변방의 고수들을 대수롭지 않게 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동북이나 장성 이북의 고수들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 하지만 흥안령(興安嶺) 부근만 가도 하태목의 이름을 모르는 자가 거의 없는 형편이다.”
“검술이 대단한가 보지요?”
“쾌검이 놀랍지.”
“화산파에서는 어떻게 저런 고수를 포섭할 수 있었을까요?”
노해광이 턱 밑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진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하태목은 사실 화산파의 속가 출신이다. 나중에 다른 사부의 밑으로 들어가기는 했지만, 태생은 화산파에 속해 있던 인물이지.”
정해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화산파에서 그런 일을 한 자도 용납해 줍니까?”
노해광의 얼굴에 냉소가 떠올랐다.
“본산 제자가 아닌 속가 제자까지 일일이 신경 쓸 정신이 있겠느냐? 더구나 그 제자가 뛰어난 무공을 익히고 있다면 예전에 속가 제자였다는 연줄만으로도 충분히 이용해 먹을 수 있는데, 화산파에서 그걸 마다할 리 없지.”
“이번 일처럼 말이지요?”
“그렇다.”
“다른 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노해광은 도지곤의 우측에 앉아 있는 다소 우람한 체구의 백의인을 가리켰다.
“염종수(廉宗樹)라는 자다.”
정해는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군요. 예전에 장인어른께서 감숙에서 활동하실 때 다툼이 있었던 마의혈객(麻衣血客)이라는 사파 고수의 이름이었던 것 같은데…….”
“바로 보았다. 저자가 바로 마의혈객 염종수다.”
정해는 새삼스런 눈으로 갈종기를 바라보았다.
“화산파에서 사파의 고수도 포섭했다는 말입니까?”
“사파는 무슨. 수단이 잔인하고 손끝에 인정을 베풀지 않아서 그런 오해를 받기는 했지만, 그도 엄연히 화산파의 속가 출신 고수다.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그렇지.”
정해가 탄성을 터뜨렸다.
“화산파의 영역은 정말 넓고도 다양하군요.”
“화산파가 강호에 뿌리를 내린 지 수백 년이 흘렀다. 그동안 꾸준히 본산뿐 아니라 속가의 제자들을 배출했으니 그 수가 얼마나 되겠느냐? 개중 화산파의 속가 출신임을 숨기고 활동하는 자들이 얼마나 되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정해의 얼굴에 한 줄기 씁쓸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노해광이 그를 힐끔 쳐다보았다.
“부러운 게냐?”
“솔직히 조금 부럽긴 하군요. 본 파의 제자들은 몽땅 합쳐도 스무 명이 채 될까 말까 한데……. 본 파 출신의 속가 제자들은 없었습니까?”
노해광의 얼굴에도 잠시 착잡한 빛이 떠올랐다.
“왜 없었겠느냐? 다만 그걸 그들이 선뜻 시인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겠지.”
“지금은 본 파의 명성도 많이 회복되었으니 본 파를 찾아오는 자들이 나올 법도 한데 말입니다.”
정해가 여전히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듯하자 노해광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있을 때 본 산을 떠난 인물들이 십여 명쯤 된다. 그전 대(代)에는 훨씬 많은 자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떠났다고 하더구나. 그 일이 벌써 이십 년 전이니, 그들이 다시 돌아오기도 힘들뿐더러 설사 온다고 해도 그들을 선뜻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정해가 생각하기에도 한 번 종남파를 떠났던 인물이 다시 돌아온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정해가 종남파에 입문한 이후 종남파를 떠난 인물들이 몇 명 있었지만, 그들은 절대로 돌아올 가능성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설사 그들이 돌아온다고 해도 과연 다른 사람들이 선선히 용납할 지는 아무리 정해라 해도 자신할 수 없었다.
하물며 이십 년 혹은 그 이전의 일이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이십 년은 너무도 긴 세월이었다. 그동안 그들은 종남파와는 무관한 삶을 살았을 것인데, 이제 와서 그들이 다시 종남파로 돌아오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너무도 무망(無望)한 일일 것이다.
잠시 그들이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관중일관에서도 세 번째 고수가 등장했다. 이번에 나온 사람은 머리가 다소 부스스하고 얼굴이 유난히 검은 건장한 체구의 사십대 장한이었다.
그를 보자 정해가 기대에 찬 눈빛을 반짝였다.
“이제 정말 제대로 된 대결을 보겠군요.”
노해광이 피식 웃었다.
“만만치 않은 싸움이 되겠지.”
그 검은 얼굴의 장한은 독초웅(獨楚雄)이란 인물로, 장력패가 오늘의 비무를 위해 상당한 돈을 들여 초빙한 고수였다. 정해와 노해광이 그에 대해 상세하게 알고 있는 이유는 그 인물을 장력패에게 소개해 준 사람이 바로 노해광이었기 때문이다.
노해광은 화산파에서 은밀히 백인장을 지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장력패에게 흘렸고, 장력패는 그에 맞설 고수를 찾아줄 것을 노해광에게 부탁했다. 노해광이 비밀리에 수소문하여 장력패에게 소개해준 사람이 바로 독초웅과 학일명(鶴一明)으로, 그들은 각기 산동과 산서 지방에서 주로 활동하던 고수들이었다.
하나 두 사람 모두 의외로 명성은 그다지 크지 않았는데, 그것은 그들이 돈을 받고 은밀한 일을 주로 수행하는 청부업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대신에 실력만큼은 확실하여, 하태목과 염종수에 견주어도 추호의 손색이 없었다.
원래 이런 무관끼리의 비무에서 외부의 고수를 자기 무관의 인물인 것처럼 눈속임하여 비무자로 내세우는 경우는 비일비재했다. 그래서 아주 유명하거나 누가 보아도 무관 소속이 아님이 분명한 인물 외에는 대체로 서로 묵인(黙認)하는 것이 일종의 관행이었다.
노해광은 하태목과 독초웅의 대결은 백중지세로 예측했고, 염종수와 학일명의 싸움은 학일명이 우세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학일명이야말로 노해광이 데리고 있는 소혼묘랑 초희의 오빠인 초력의 변장이었기 때문이다. 초력의 무공은 노해광 자신도 선뜻 이긴다고 자신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수준이어서 아무리 염종수가 감숙성에서 명성을 날린 고수라 해도 상대하기 벅찰 게 분명했다.
독초웅이나 초력, 둘 중 한 사람만 승리해도 결국 승부는 오차전까지 갈 것이며, 그렇게 될 경우 어쩔 수 없이 두 무관의 주인인 장력패와 도지곤이 마지막 싸움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본신의 실력으로 정면대결을 하는 것이라면 도지곤은 절대로 장력패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노해광이 무공실력이 뛰어난 초력을 이번 일에 투입한 것은 화산파의 지원을 받은 백인장이 승리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서안의 오대전장 중 하나인 천무장이 화산파의 영향력 아래 놓이는 것을 막을 수 있을 터였다. 또한 함께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은 다른 수하들처럼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낼 수 없는 초력을 좀 더 지켜보려는 의도도 담겨 있었다.
노해광이 걱정하는 것은 오히려 전혀 다른 것에 있었다.
이번 비무에 세인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동안 화산파에서 방보당을 노리려 할 텐데, 아직 그런 기미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고 있었다. 서안 일대에는 이미 흑선방의 수하들이 거미줄처럼 잔뜩 깔려 있어서 아무리 사소한 움직임이라도 쉽게 파악할 수 있는데, 비무가 중반을 넘어서는 지금까지도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고 있는 것이다.
노해광이 눈살을 살짝 찡그리고 있자 정해가 슬쩍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런 음성으로 물었다.
“그런데 사숙께서 저에게 맡기시려는 일들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까?”
“그건 잠시 후에 말해주마. 그보다 과연 화산파에서 우리들이 의도한 대로 움직여줄지 걱정이 되는구나. 네 생각은 어떠냐?”
“아직까지 그들이 아무런 움직임이 없으니 사숙께서 불안하신 모양이군요. 하지만 결국 그들의 선택은 자명(自明)한 일 아니겠습니까?”
노해광의 얼굴은 여전히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렇긴 하다만, 왠지 일이 뜻대로 흘러가지 않을 것 같은 불길한 생각이 드는구나. 내가 너무 과민한 탓이겠지?”
정해도 그 점에 대해서는 무어라고 말하기가 어려웠다. 노해광과 정해는 상당히 심혈을 기울여 오늘 일을 준비했지만, 강호에서의 일이란 것이 늘 마음먹은 대로 풀리는 건 아니다. 오히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뜻밖의 방향으로 전개되는 경우가 허다했기에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는 조금도 마음을 늦출 수 없었다.
그들의 그런 우려를 증명이라도 하듯 그때 방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왔다.
들어온 자는 흑선방주인 최동의 수하 중 한 명인 마림(馬林)이었다. 눈치가 비상하고 발이 빨라서 최동이 연락책으로 주로 사용하는 인물이었다.
“무슨 일이냐?”
노해광이 묻자 마림은 재빨리 노해광의 앞으로 가서 머리를 조아렸다.
“방보당 주위에 일단의 무리들이 나타나서 주위를 배회하고 있습니다.”
노해광은 재차 물었다.
“화산파의 고수들이냐?”
“그걸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방주께서 그들을 어찌해야 할지 여쭈어 보라고 하셨습니다.”
노해광의 눈썹이 한 차례 꿈틀거렸다.
“확인할 수가 없다고?”
서안에 들어온 화산파 고수들의 용모파기는 이미 세세하게 파악하여 최동이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 중 화산파의 인물이 있다면 최동이 모를 리 없었다.
노해광의 가슴이 갑자기 마구 뛰기 시작했다. 조금 전부터 자신의 마음을 흔들리게 했던 불안감의 정체를 문득 깨달았던 것이다.
‘내가 너무 곡수를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곡수는 신산이라 불릴 만큼 두뇌가 비상하고 지모가 뛰어난 인물이어서 노해광도 그에 대한 경계심만큼은 계속 가지고 있었다. 하나 이번 일을 진행하면서 곡수의 대응이 자신의 예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내심으로 그에 대해 약간의 우월의식을 가지게 된 것도 사실이었다.
그것은 노해광이 유화상단과 수룡신군 황충을 상대하면서 계속적으로 승승장구해 왔기에 자신도 모르게 자신감이 팽배해지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의도한 모든 일들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졌기에 이번에 화산파를 상대하면서도 그들이 자신의 의도에서 벗어나지 않으리라는 막연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믿음이 얼마나 위험천만하고 허무한 것인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던 노해광은 안색이 변해 다급하게 물었다.
“곡수는 지금 어디 있느냐?”
마림은 노해광이 이토록 다급해하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기에 당혹한 얼굴로 대답했다.
“반 시진 전의 보고로는 공터의 반대편에 있는 천보루(天寶樓)의 삼층 누각에서 이번 비무를 지켜보고 있다고 했습니다.”
천보루는 노해광이 있는 건물에서 공터를 가로질러 대각선 방향에 있는 주루였다. 그곳에서는 공터가 한눈에 내려다보여서 아침 일찍부터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노해광은 그런 번잡함이 싫어서 다소 한적한 반대편 방향에 있는 이곳에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노해광이 즉시 마림에게 지시를 내렸다.
“지금 당장 곡수가 아직도 천보루에 있는지 확인해라. 만일 없다면 곡수가 현재 어디에 있는지를 최대한 빨리 알아보도록 해라.”
마림은 노해광의 안색만 보고도 그 일이 시급한 것인지를 알아차렸는지 즉시 머리를 조아리고는 황급히 밖으로 뛰어나갔다.
정해가 다소 긴장된 얼굴로 노해광에게 다가왔다.
“사숙께서는 곡수가 우리 의도와는 다르게 움직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십니까?”
노해광은 허공을 응시한 채 여러 차례 표정이 변해 있다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게 무엇입니까?”
“그들이 방보당을 얻었을 때 내게 줄 수 있는 피해는 약소한 정도에 불과하나, 만약 다른 곳을 얻을 수 있다면 내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는 것은 물론이고 장안 전체의 상권을 일거에 장악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노해광의 말에 무언가를 느낀 듯 정해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어졌다.
“손가전장 말씀이군요.”
노해광은 뜨거운 납덩이를 삼킨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노해광은 오늘 일에 대비해서 방보당 주위에 거의 모든 인력을 배치해 놓았다. 그러니 만약에라도 화산파가 방보당이 아닌 손가전장을 노리고 있다면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심각해지게 되는 것이다. 손가전장은 지리적으로 방보당과 반대편에 위치해 있었다. 손가전장에 문제가 생겼다고 해도 방보당에 배치된 인력을 다시 그곳에 투입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방보당에 대한 방비를 풀고 무조건 손가전장으로 달려갈 수도 없었다. 만에 하나 이런 일 자체가 곡수의 계략이라면, 손가전장으로 인원을 뺀 사이에 방보당은 그야말로 무주공산(無主空山)이 되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노해광은 허공을 응시한 채 속으로 중얼거렸다.
‘결국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말이로군. 방보당이냐, 손가전장이냐……. 내가 곡수라면 과연 어디를 선택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