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7권 호한위난(豪漢危難)편 : 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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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27권 호한위난(豪漢危難)편 : 4화


제 275장 신창마수(神槍魔手)

구름이 낮게 깔린 흐린 날이었다. 해는 두툼한 구름에 가려 있었고, 금시라도 빗방울이 뿌릴 듯 하늘은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대홍산(大洪山)을 넘어가는 삼리강(三里崗)의 고갯마루는 유난히 높고 험해서 정상 인근을 지나는 사람들은 고개 근처에 위치한 주점에서 잠시 지친 몸을 쉬곤 했다. 하나 오늘은 날씨가 흐린 탓인지 고개를 넘어가는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다각다각……

때마침 가벼운 말발굽 소리와 함께 대여섯 필의 말이 고개 정상에 나타났다. 뽀얀 먼지를 뒤집어쓴 인물들의 선두에서 말을 달리던 장한이 정상 부근에 있는 작은 주점을 발견하고는 반색을 했다.

“저곳에서 잠시 목이나 축이도록 합시다.”

일행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점으로 향했다. 주점은 그리 크지 않았고, 특별한 간판도 없이 <주(酒)>라고 쓰인 붉은 깃발 하나만 달랑 내걸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어서 의자에 앉아 졸고 있던 주인이 갑자기 나타난 일단의 사람들에 놀라 퍼뜩 자리에서 일어나 허겁지겁 그들을 안내했다.

“어서 오십시오.”

주점 앞 나무에 말을 묶고 주점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여섯 명이나 되었다. 모두 남자들이었고, 사십 대에서 오십 대로 보였다. 대부분이 수중에 병장기를 휴대한 것으로 보아 강호의 무림인들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주점 안은 달랑 네 개의 탁자만이 단출하게 놓여 있어서 주인은 서둘러 두 개의 탁자를 붙여서 그들을 앉게 했다.

“무얼 드시겠습니까?”

주인이 묻자 여섯 명 중 가장 먼저 들어왔던 호리호리한 체구에 유난히 커다란 눈을 가진 장한이 짤막하게 말했다.

“죽엽청 두 병과 간단한 요깃거리를 적당히 내오게.”

주문을 받은 주인이 주방 쪽으로 사라지자 그들은 옷에 묻은 먼지를 털고 각자 자리를 잡았다.

“오늘은 날이 너무 흐리군. 비라도 올 것 같은데, 삼리강을 넘기 전에 쉴 걸 그랬나?”

일행들 중 체구가 건장하고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오십 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홍포 중노인이 인상을 찌푸리며 투덜대자 음식을 주문했던 커다란 눈의 장한이 고개를 저었다.

“비가 오고 나면 계곡물이 불어서 일정을 며칠이나 지체할지 모릅니다. 차라리 비가 오기 전에 빨리 삼리강을 넘어 장가집(張家集)으로 가서 쉬는 게 훨씬 더 낫습니다, 뇌 대협.”

“그런가? 하긴 이쪽 지리야 자네가 훨씬 잘 알고 있을 테니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

홍포 중노인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비쩍 마른 얼굴에 유난히 강퍅한 인상의 중년인이 피식 웃었다.

“소표(小飄)는 평생을 호북성에서만 살아서 이 일대 지리는 눈을 감고도 훤히 알 수 있을 만큼 정통하네. 그러니 길 안내는 그에게 맡겨두고 우리는 느긋하게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걸세.”

홍포 중노인은 계면쩍은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그거야 나도 알고 있지. 하루라도 빨리 일을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마음이 급해졌던 모양일세.”

강퍅한 인상의 중년인이 정색을 했다.

“이번 일은 서두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닐세. 자칫 한 번이라도 삐끗했다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될지 모르니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하네.”

“그렇다고 너무 지체했다가 시일을 놓친다면 말짱 공염불이 아닌가?”

“아직은 충분한 시간이 있네. 그러니 너무 초조해하지 말게.”

홍포 중노인은 한 차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자네 말대로 침착해야 하는데, 당최 마음이 가라앉지가 않는군. 내가 너무 소심해진 건가?”

“너무 걱정하지 말게. 우리는 분명 옳은 길을 가고 있는 걸세. 그걸 믿게.”

홍포 중노인은 물끄러미 그를 보고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믿네. 그러니 자네를 따라나선 것이지.”

그때 지금까지 아무 말 없이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준수한 얼굴의 백의 중년인이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뇌 대협께서 불초한 이 사람을 믿고 따라와 주신 것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리오. 하지만 그 때문에 뇌 대협의 영명(榮名)에 누(累)가 되지 않을까 심히 우려되는구려.”

“누라니 당치 않소. 나야말로 유 대협을 위해서 작은 힘이나마 보탤 수 있어서 정말 기쁘기 한량이 없소.”

이들은 구궁보를 떠난 유중악과 그의 일행들이었다.

홍포 중노인은 진산수 뇌일봉이었고, 그의 맞은편에 앉은 강퍅한 인상의 중년인은 그의 가장 친한 친우인 팔비신살 곽자령이었다.

길 안내를 맡았던 커다란 눈의 중년인은 여뢰관이(如雷貫耳) 동천표(董天飄)라는 인물로, 호북성에서 상당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이름난 고수였다. 그 옆에 앉은 흑색 유삼의 중년인은 흑삼객 임지홍이었고, 지금까지 아무 말 없이 한쪽에 조용히 있는 갈포인은 태행독객(太行獨客) 무종휘(武宗輝)였다. 무종휘는 태행산(太行山) 일대에서는 최고의 고수로 손꼽히는 인물로, 특히 쌍도(雙刀)를 잘 사용하기로 명성이 높았다. 이들 중 진산수 뇌일봉과 흑삼객 임지홍을 제외한 세 명의 인물들은 유중악의 오랜 친우들로, 모두 한 지방의 패주(覇主)와도 같은 절대적인 명성을 쌓은 고수들이었다.

구궁보를 도망치듯 빠져나온 그들은 곧장 장강을 건넌 다음 육로를 이용해 이곳까지 쉬지 않고 말을 달려왔다. 때문에 고강한 무공을 지닌 그들이라도 어느 정도의 피로를 느끼고 있었다. 육체적으로는 누구보다도 강인한 그들이었으나, 구궁보에서 벌어진 일로 적지 않은 마음의 충격을 입은 데다 쉬지 않고 계속되는 여정에 정신적으로는 상당한 중압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 여정의 끝이 어떻게 될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한동안 장내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때마침 주방에서 주인이 주문한 요리들을 가지고 나오지 않았다면 분위기는 한층 더 무겁게 가라앉았을 것이다.

요리와 술이 나오자 뇌일봉이 무거운 분위기를 깨려는지 짐짓 호탕하게 건배를 제의했다.

“앞으로의 일이 어떻든 나 뇌 모(某)는 여러분들과 알게 된 것을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하고 있소. 앞으로의 일이 순탄하기를 빌며, 모쪼록 우리의 만남이 좋은 결실을 맺게 되길 기원하겠소.”

뇌일봉이 먼저 술을 마시자 모든 사람들이 그와 함께 술잔을 들이켰다.

몇 순배의 술이 돌며 장내의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지자 뇌일봉이 동천표를 향해 물었다.

“앞으로의 일정은 어떻게 되는가?”

자신들이 가야할 최종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알고 있었지만 중간의 여정은 전적으로 동천표가 책임지기로 했으므로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천표는 안주를 한 점 집어 먹은 후 입을 열었다.

“삼리강을 지나면 장가집에서 하룻밤을 기거한 후 한수(漢水)를 건너 의성(宜城)으로 갈 것입니다. 그곳에서 관도를 따라 양양(襄陽)까지 가게 되면 목적지가 지척입니다.”

“의성까지만 가면 일단 길이 순탄해지겠군.”

뇌일봉은 거듭된 산행에 조금 지쳐있는지라 관도를 따라 이동한다는 말에 반색을 했다.

사실 그는 오랜 동안의 투병생활로 아직 채 몸이 완전한 상태가 아니었다. 그동안 종남파와 함께 움직일 때는 여정이 넉넉해서 피곤한 줄을 몰랐는데, 구궁보를 떠난 이후에는 상당한 강행군을 해온 탓에 몸의 여기저기가 이상을 호소하고 있었다.

곽자령이 뇌일봉을 보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철골(鐵骨)로 이름 높았던 자네도 어느덧 뼈마디가 노곤노곤해진 것 같군. 의성에 가면 며칠 푹 쉬었다가 움직일 생각이니 그때까지만 참게.”

뇌일봉이 씁쓸한 표정으로 그의 말을 받았다.

“아무래도 나도 나이를 먹긴 먹은 모양일세. 강호가 좁다 하고 뛰어다닐 때가 엊그제 같았는데, 며칠 말을 달렸다고 허리뼈가 죽는 소리를 내는군.”

“혼자 늙어가는 사람처럼 말하는군.”

곽자령이 그와 가벼운 농을 주고받고 있을 때, 주루 안으로 몇 명의 사람이 들어왔다.

이번에 들어온 사람들은 모두 네 명이었는데, 하나같이 흑립(黑笠)을 깊게 눌러쓰고 검은 색 피풍의를 걸치고 있었다. 피풍의 아래 드러난 의복들도 검은 색이었고, 심지어 신발도 검은 색 흑단화였다. 전신이 온통 검은 색 일색이어서 언뜻 보기에도 괴기스러웠다.

그들이 들어오자 담소를 나누고 있던 유중악 일행들은 모두 입을 다문 채 그들을 주시했다. 일견하기에도 그들에게서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던 것이다.

네 명의 흑포인은 주루 한쪽에 있는 탁자에 가서 앉았다. 곧 주인이 그들에게 다가가 주문을 받고 이내 주방 안으로 사라졌다.

흑포인들은 여전히 흑립을 벗지 않고 말없이 앉아 있었고, 그에 따라 주루 안의 분위기도 차츰 어색하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그때 다시 주루 안으로 네 명의 인물들이 들어왔다. 이번에 들어온 사람들은 조금 전의 흑의인들과는 반대로 모두 하얀 색 의복을 걸치고 있었다. 머리에는 백색 망사가 달리고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있었고 소맷자락이 넓은 백포를 입고 있었는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하얀 색 일색이라 흡사 백색 물감을 뒤집어쓴 것 같은 모습이었다.

네 명의 백포인들은 흑포인들과 반대편 탁자에 앉았다. 공교롭게도 그들이 앉은 위치는 유중악 일행을 둘러싼 형태여서 유중악 일행이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어느 쪽으로든 그들 앞을 지나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잠시 장내에 괴이한 침묵이 감돌았다. 여덟 명의 흑포인과 백포인들은 벙어리처럼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고, 유중악 일행 또한 말없이 그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하나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것 같은 정적 속에는 사소한 일로도 커다란 폭발이 일어날 듯한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그 무거운 정적을 깬 사람은 뜻밖에도 유중악이었다.

유중악은 술병을 들어 뇌일봉을 향해 술을 따랐다.

“뇌 대협을 알게 된 것이 칠팔 년은 족히 지난 것 같구려.”

뇌일봉은 그의 잔을 받으면서도 이런 상태에서 그와 왜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하는지 몰라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그렇소. 금릉(金陵)에서 처음 자령의 소개로 유 대협을 만난 일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팔 년이나 흘렀구려.”

“그동안 뇌 대협과는 서너 번의 술자리를 가졌음에도 아직 허심탄회하게 말할 기회를 가지지 못했으니, 모두 이 사람의 불찰이오.”

“별 말씀을 다하시오. 나는 유 대협을 알게 된 것을 강호에 몸을 담은 후 가장 운이 좋았던 일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소.”

유중악은 준수한 얼굴에 엷은 미소를 지었다. 보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면서도 무언가 믿음직한 느낌을 주는 미소였다.

“뇌 대협이 나를 그렇게 생각해 준다니 고맙소. 사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나는 진작부터 뇌 대협을 나의 친구로 생각하고 있었소.”

뇌일봉은 가슴이 격탕되는지 가뜩이나 붉은 얼굴이 홍시처럼 시뻘겋게 변했다.

“나도 그렇소.”

“뇌 대협이 나를 믿고 따라와 준 것에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끼고 있소.”

“나를 친구로 생각한다면 굳이 그런 말은 할 필요가 없소.”

“나도 알고 있소. 하지만 더 늦기 전에 뇌 대협에게 꼭 한 번쯤은 내 마음을 밝히고 싶었소.”

뇌일봉은 감동으로 가슴이 뜨거워지는 와중에도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더 늦기 전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오?”

유중악은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따뜻한 눈으로 그를 보더니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친구들도 무언가를 느낀 듯 일제히 그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한 사람, 한 사람과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유중악은 조용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곽자령과 동천표, 무종휘도 그를 따라 밝게 웃었다. 한 점의 구김살이 없는 밝고 환한 웃음이었다.

유중악의 시선은 제일 마지막으로 임지홍에게로 향했다.

임지홍도 웃고 있었지만, 그의 얼굴은 잔뜩 구겨져서 울음과도 같아 보였다.

“유 대협…….”

유중악은 부드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자네는 나에게 미안해할 필요 없네. 이건 모두 내가 원해서 한 일일세.”

임지홍은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그를 응시하며 무어라고 입을 열려 했다.

“유 대협. 나는…….”

“알고 있네. 나는 후회하지 않으니, 자네도 후회하지 말게.”

임지홍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중악은 천천히 주루의 입구로 시선을 돌렸다.

한 사람이 느릿느릿 주루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한쪽은 검고 한쪽은 흰 음양포(陰陽袍)를 입은 노인이었다. 노인의 머리는 잡털 하나 없는 눈부신 백발이었고, 얼굴은 대춧빛으로 붉었다. 전체적으로 준수하고 당당한 외모였으나, 충후하기보다는 왠지 사이한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백발노인의 눈동자 때문이었다. 오른쪽의 눈동자는 유난히 검은 동자가 많았고, 반면에 왼쪽 눈은 흰자위가 대부분이었다. 흑과 백의 경계가 분명한 그 눈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묘한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

백발노인은 당당한 걸음으로 주루 안으로 들어오더니 이내 유중악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노부가 누구인지 알아본 모양이군.”

유중악은 고개를 끄덕였다.

“흑백상문신(黑白喪門神)들이 나타날 때부터 당신이 왔으리라고 짐작했소.”

백발노인의 대춧빛 얼굴에 한 줄기 흥겨움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노부가 왜 이곳에 왔는지도 알고 있겠군?”

유중악은 담담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짐작은 하고 있었소. 누군가가 올지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설마 당신일 줄을 몰랐을 뿐이오.”

“그래서 세상일이란 재미있는 걸세. 왕왕 예상을 벗어난 일이 벌어지니 말이야.”

백발노인은 강호의 절대고수인 유중악을 아랫사람 대하듯 대했다. 하나 유중악 본인은 물론이고 장내의 누구도 그 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유중악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확실히 재미있는 일이오. 당신 같은 사람도 남에게 부림을 당한다는 걸 누가 예상이나 했겠소?”

백발노인은 유중악의 비아냥거림이 섞인 말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노부를 부릴 수 있는 사람은 없네. 노부는 그저 부탁을 받았을 뿐일세.”

“단순히 부탁 때문이란 말이오?”

“거절할 수 없는 부탁이라고 해두지.”

“그 부탁이란 게 정확히 뭔지 알 수 있겠소?”

“자네도 충분히 짐작하고 있지 않은가?”

“좀 더 분명하게 알고 싶을 뿐이오.”

이번에는 백발노인이 빙긋 웃었다.

“알고 싶다면 말해주지. 더 이상 자네들이 자신의 옷자락을 들춰보지 못하게 해달라더군. 성가시다고 말이야.”

“재미있는 표현이군. 당신은 자신이 있소?”

“쉽지는 않겠지. 하지만 어려운 일도 아닐세.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나?”

“글쎄. 당신의 말대로 되길 바라겠소. 하지만 조금 전에 당신도 말했다시피 강호에서의 일이란 왕왕 예상을 빗나가기 마련이오.”

백발노인의 붉은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하지만 오늘은 아닐세.”

백발노인이 어떠한 몸짓도 하지 않았는데 탁자에 앉아 있던 네 명의 흑포인과 네 명의 백포인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유중악 일행을 에워쌌다. 그들의 동작은 그야말로 일사불란하면서도 쾌속하기 그지없어서 눈앞에 무언가 검고 하얀 것이 어른거린다 싶은 순간에 그들은 유중악 일행의 팔방(八方)을 정확하게 포위해 버렸다. 그 속도와 방위의 정확함은 보는 이의 모골을 송연하게 할 정도였다.

유중악 일행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발노인은 그들이 대항할 자세를 갖추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더니 유중악을 향해 느릿느릿 걸어왔다.

“그럼 이제 자네의 그 소문난 신창 솜씨를 보도록 하지.”

백발노인, 강호의 모든 무림인들이 이름만 들어도 공포에 질린다는 우내사마의 일인인 음양신마(陰陽神魔) 복양수(僕陽壽)는 유중악을 향해 손을 내뻗기 시작했다.

유중악의 나이는 올해 마흔일곱. 고향은 강서성(江西省) 봉강(鳳崗)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는 신동(神童)으로 명성이 자자했으며, 관옥(冠玉) 같은 얼굴에 인물됨이 비범해서 주위의 칭찬이 끊이지 않았다. 천하제일신창으로 널리 알려졌던 절세의 고수 조화신창 감화는 그에 대한 소문을 듣고 노구를 이끌고 직접 봉강까지 내려가 그를 면담했으며, 그 자리에서 그를 자신의 제자로 받아들였다. 그때 감화는 육십이 훌쩍 넘었고, 유중악의 나이 불과 열두 살이었다.

십여 년 후에 감화는 성장한 유중악을 흐뭇한 눈으로 바라본 후 숨을 거두었고, 유중악은 한 자루 창을 들고 강호로 뛰어들었다. 그로부터 그에 대한 무수한 전설 같은 이야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그의 창법은 사부인 감화를 뛰어넘는다고 알려졌고, 성품은 푸른 하늘처럼 고고하면서도 담백해서 누구라도 그를 직접 보게 되면 앞을 다투어 친구로 사귀고 싶어 할 정도였다. 그가 강남 지방을 무인지경처럼 휩쓸고 다니던 혈륜방(血輪幇)을 단신으로 무너뜨렸을 때부터 사람들은 그를 ‘창의 최고봉’이라고 불렀으며, 이내 무림구봉 중의 일인으로 꼽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그에 대한 사람들의 칭송이 끊이지 않아서 그는 누구나가 인정하는 무림 최고의 기남아(奇男兒)가 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추호도 오만하지 않았고, 모든 사람을 공정하게 대했다. 그를 지칭하는 ‘신창조화 의기천추’라는 말은 그의 별호인 환상제일창보다 더욱 널리 알려졌으며, 그의 명성을 불후의 것으로 만들어 주었다.

하나 그 찬란했던 명성도 구궁보에서 벌어진 일로 흐려지기 시작했으니, 많은 무림인들은 이를 자기 일처럼 아쉬워했다.

이제 유중악은 무림 출도 후 최고의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그는 지금까지 서른일곱 번을 싸웠고, 그중 단 한 번도 자신의 전력을 모두 드러낸 적이 없었다.

하나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그가 상대하려는 복양수는 무림인들이 무림구봉보다 오히려 한 단계 위로 평가하는 우내사마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오랫동안 강호무림에 전설적인 존재로 군림해온 희대의 마인(魔人)이었다. 유중악이 감화의 제자가 되기 전부터 복양수의 이름은 강호를 진동하고 있었으니 성격이 담대하고 철담협골로 이름 높은 유중악이라도 절로 긴장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 속마음이야 어떻든 겉으로 드러난 유중악의 얼굴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고, 태도 또한 한 점의 흐트러짐이 없이 진중(鎭重)했다.

주루 안이 금시라도 터질 듯한 팽팽한 긴장감에 휩싸인 가운데 돌연 싸움이 시작되었다.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여덟 명의 흑백상문신이 좌우로 갈라지며 유중악의 친우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흑백상문신은 복양수가 직접 키운 고수들로, 개개인이 강호의 어떤 절정 고수에도 못지않은 무서운 실력의 소유자들이었다. 그런 고수 여덟 명이 일제히 달려들었으니 아무리 유중악의 친우들이 한 지방을 주름잡는 무인들이라고 해도 승산을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삽시간에 장내는 세찬 경풍과 도성(刀聲), 거친 숨소리로 가득 차 버렸다.

유중악은 자신의 바로 옆에서 치열한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전혀 시선을 주지 않고 담담한 눈으로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복양수를 응시하고 있었다. 하나 조금만 안목이 있는 자라면 이미 유중악과 복양수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싸움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유중악과 복양수 사이에 있던 탁자와 의자들이 세차게 뒤흔들리더니 이내 먼지로 화해 사라져 버렸다. 그 모습은 기괴하면서도 보는 이의 마음을 섬뜩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복양수가 유중악의 삼 장 앞까지 다가왔을 때, 유중악은 오른손을 늘어뜨려 허리춤을 매만졌다.

그의 허리에 매어져 있던 옥색 허리띠가 풀려나오며 그의 손에 쥐어졌다. 길이가 네 자를 갓 넘은 허리띠는 무슨 재질로 만들어졌는지 그의 손에 쥐어지는 순간 빳빳하게 일어나며 길쭉한 봉의 형태가 되었다. 그가 허리띠의 가운데 부분을 만지자 봉의 양쪽 끝에서 예리한 창날이 튀어나왔다.

이것이 바로 유중악을 무림구봉 중의 하나로 불리게 한 그의 독문병기 여의신창(如意神槍)이었다.

여의신창의 길이는 네 자 다섯 치. 여타의 창보다 훨씬 짧아서 창이라기보다는 단봉(短棒)과 비슷한 길이였으나, 대신에 특수한 재질로 만들어져서 평상시에는 허리띠로 사용해도 될 만큼 유연하면서도 신축성이 좋았다. 하나 일단 내공을 주입하게 되면 강철보다 단단해져서 가히 신병(神兵)이라 해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신묘한 병기였다.

여의신창을 든 유중악의 모습은 하나의 거대한 봉우리를 연상케 했다. 다섯 자에도 못 미치는 짧고 가느다란 단창을 들고 있음에도 누구도 범접하기 어려운 가공할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복양수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유중악을 향해 달려들었다. 정파인이었다면 강호에서의 명성이나 연륜으로 보아 까마득한 후배뻘인 유중악에게 선수를 양보했을 텐데, 복양수는 그런 점에서 추호의 아량이나 자비가 없는 인물이었다.

유중악과 복양수 사이의 공간은 그들이 내뿜는 무형의 기세로 가득 차 있어서 어지간한 고수라도 그 안에 들어서면 전신의 혈맥이 터져나가고 말 것이다. 하나 복양수의 손은 너무도 수월하게 공간을 뚫고 들어가 유중악의 가슴 쪽으로 날아들었다.

유중악은 옆으로 반 보 움직이며 수중의 여의신창을 살짝 흔들었다.

우웅…….

마치 벌떼가 우는 듯한 음향과 함께 수백 개의 은광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마치 백색 방패가 가슴을 보호하는 듯한 형상이었다. 그것이 여의신창의 창날이 움직여 만들어진 것임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팍!

복양수의 손이 창날로 이루어진 은색의 방패와 마주치며 아주 작은 소리가 났다. 하나 그 여파는 결코 작지 않았다. 유중악이 만들어낸 백색 방패의 가운데가 뻥 뚫려 버린 것이다. 그 사이로 유중악의 앞가슴이 훤히 드러났다.

그런데 복양수는 앞으로 달려들기는커녕 오히려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 순간,

쾌액!

한 가닥 섬광이 눈부신 속도로 그의 코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무심결에 계속 앞으로 다가섰다가는 영문도 모르고 그 섬광에 목을 꿰뚫리고 말았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조화십이창법 중의 섬전일순(閃電一楯)이라는 초식이었다. 창을 빠르게 움직여 창날만으로 방패를 만들어 상대의 공격을 막고, 그 방패에 상대의 공격이 격중 되는 순간에 반대편 창날로 상대의 목을 노리는 무시무시한 수법이었다. 그야말로 공수(攻守)가 완벽하게 결합된 그 수법에 허무하게 당한 고수들이 적지 않았다.

복양수는 언제 물러섰느냐 싶게 섬광이 사라지자마자 재차 달려들었다.

모든 무림인들이 두려워하는 그의 성명절기는 음양무궁보(陰陽無窮步)와 음양건곤수(陰陽乾坤手)였다. 신묘하기 이를 데 없는 음양무궁보로 상대에게 접근하여 가공할 음양건곤수로 격살시키는 것이 가장 널리 알려진 음양신마 복양수의 독보적인 살인수법이었다. 지금도 복양수의 물러섰다가 다가서는 동작이 어찌나 빠르고 민첩했던지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그냥 처음부터 곧장 달려드는 것으로 알았을 것이다.

저돌적이라 할 만큼 맹렬한 복양수의 돌진에도 유중악은 추호도 당황하지 않고 여의신창을 위아래로 바꿔 잡았다. 겨우 반 바퀴 회전시킨 것에 불과했지만 두 가닥의 섬광이 복양수의 미간과 아랫배를 향해 튀어나왔다. 마치 두 개의 뇌전이 방출되는 것 같았다.

복양수의 어깨가 한 차례 흔들렸다. 그러자 그의 신형이 돌연 옆으로 길쭉해지며 유중악이 발출한 두 개의 섬광이 허공을 가르고 지나갔다. 이것이 바로 음양무궁보 중의 절기인 양봉음위(陽奉陰違)였다. 머리를 가슴 쪽으로 숙이고 다리를 허리 위까지 올려 상대의 공격을 피하면서도 전혀 속도가 줄지 않는 것이 양봉음위의 놀라운 점이었다.

과연 복양수의 신형은 순식간에 유중악의 코앞에 도달했고 그 순간에 활짝 벌려진 그의 손은 어느새 유중악의 앞가슴을 가격하고 있었다.

막 그의 손이 유중악의 가슴을 뭉개 버리려는 찰나, 유중악의 신형이 허물어지듯 그 자리에서 움푹 꺼져 버렸다.

복양수의 손이 헛되이 허공을 움켜쥠과 동시에 바닥에서 폭죽처럼 섬광이 피어올랐다. 복양수는 그대로 뒤로 벌렁 넘어지더니 이내 다시 신형을 회전시켜 옆으로 물러섰다.

파파팍!

그가 움직일 때마다 그가 지나쳤던 자리가 움푹움푹 파여 들어갔다.

순식간에 두 사람은 질풍노도 같은 십여 초를 주고받았다.

그들의 공세가 어찌나 강력하고 매서웠던지 작은 주루는 이미 풍비박산난 지 오래였고, 그들 주위에서 싸우던 흑백상문신과 유중악의 친우들도 모두 멀리 떨어진 곳으로 전권(戰圈)을 이동해야만 했다.

십여 초의 짧은 공방이 지나간 후, 앞으로 득달같이 달려들며 복양수는 양손으로 위와 아래를 가리켰다.

그가 쳐든 양손 사이에 기이한 기운이 어른거리더니 이내 폭발하듯 유중악의 전신으로 휘몰아쳐갔다. 음양건곤수 중의 획분음양(劃分陰陽)이라는 무서운 수법이었다. 그에 맞서 유중악은 손에 든 여의신창을 서너 차례 흔들었다. 여의신창의 끝이 하늘하늘거리더니 이내 수십 개의 창영(槍影)을 만들어냈다. 그 창영들은 봄날에 휘날리는 꽃송이처럼 복양수를 향해 자욱하게 날아갔다.

파파파팡!

폭죽이 터지듯 엄청난 굉음과 함께 세찬 경풍이 주위 사방을 휩쓸고 지나갔다. 한바탕 거센 폭풍이 휘몰아친 것 같은 소란함이 가시며 장내의 광경이 드러났다.

복양수는 여전히 양손을 내민 자세로 우뚝 서 있었고, 유중악 또한 여의신창을 한 손으로 든 채 복양수를 겨누고 있었다.

문득 복양수가 자신의 옆구리를 슬쩍 내려다보았다. 검고 흰 그의 음양포 한 구석에 손가락 하나가 들락거릴 만한 크기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복양수는 히죽 웃었다.

“내 음양포가 찢긴 건 정말 오랜만이군. 재미있어. 정말 재미있는 일이야.”

유중악은 그의 말에는 아무 대꾸도 없이 여의신창을 들고 있는 자신의 오른팔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오른쪽 소매는 갈가리 찢겨 맨살이 팔뚝까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건장한 팔뚝은 조금의 상처도 없이 매끈했으나 유중악의 두 눈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토록 주의했음에도 결국 복양수에게 접근을 허용해 소맷자락이 갈가리 뜯겨지고 말았던 것이다.

문득 유중악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친우들은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었다. 무공이 고강한 곽자령과 동천표, 무종휘는 각기 두 명의 상문신들을 맞아 그런대로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었지만, 오랜 부상에서 회복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뇌일봉과 상대적으로 그들보다 무공이 떨어지는 임지홍은 각기 한 명의 상문신을 상대하면서도 일방적으로 몰리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임지홍은 당장이라도 피를 뿌리며 쓰러질 것만 같은 위험천만한 상황의 연속이었다.

유중악은 한동안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문득 허공을 올려보았다.

주루는 기둥조차 남아 있지 않아서 잔뜩 어두워진 하늘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마침 빗방울 하나가 그의 얼굴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것을 신호탄으로 삼기라도 한 듯 한두 방울씩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런 날에는 따뜻한 술을 마셔야 하는데…….”

그가 조용히 중얼거릴 때, 그의 귓전으로 복양수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제 슬슬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까?”

유중악은 천천히 고개를 떨구어 복양수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바라던 바요.”

그는 수중의 여의신창을 힘껏 움켜잡았다. 그리고는 처음으로 복양수를 향해 먼저 몸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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