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7권 호한위난(豪漢危難)편 : 5화
제 276 장 출기불의(出機不意)
서안의 북문에서 동쪽으로 조금 치우친 곳에 한 채의 고색창연한 건물이 서 있었다.
이층으로 된 그 건물은 정면으로 나 있는 정문 외에는 별다른 출입구가 없었고, 외곽으로 창문조차 나있지 않아서 다소 음침해 보였다. 하나 의외로 정문으로 들락거리는 사람들은 제법 많은 편이었다.
정문 위에 <손가전장(孫家錢莊)>이라고 쓰인 작은 현판이 없다면 누구도 이곳이 서안은 물론이고 섬서성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많은 금전거래가 오가는 서안 최대의 전장(錢莊)임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손노태야가 손가전장을 세운 것은 그의 나이 마흔두 살 때였다. 그로부터 이십여 년이 흐른 지금 손가전장은 단일 전장으로는 강북 전체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거대한 전장이 되었고, 손노태야는 자타가 공인하는 서안 최고의 거부가 되었다.
손노태야는 손가전장 외에도 열 개의 미곡상과 세 개의 보석상 등 수십 개의 점포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가 가장 애착을 가지는 곳은 이 손가전장이었다. 분점도 없이 달랑 본점 하나뿐인 건물이었으나, 손가전장은 손노태야에게 다른 모든 점포를 합친 것에 못지않은 수익을 올려주는 보물단지였다. 그래서인지 손가전장이 손노태야의 거처인 손가장에서 제법 멀리 떨어져 있었음에도 손노태야는 지금도 이삼일에 한 번씩은 꼭 손가전장을 직접 찾아가 그동안의 거래내역을 보고 받았다.
손가전장의 책임자는 장태(張泰)라는 인물인데, 손노태야가 처음 손가전장을 세울 때부터 그를 따랐던 가장 오래된 측근 중 한 사람이었다.
지금 장태는 눈을 살짝 찌푸린 채 한 장의 서신을 읽고 있었다.
“흠…….”
서신을 내려놓은 장태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장태의 나이는 쉰다섯. 이십 대의 젊은 나이에 손노태야의 밑에 들어와 그 후로 삼십 년 가까운 세월 동안 전장업에만 몸을 담아왔다. 재빠른 상황판단과 우직하리만치 충실한 일처리로 손노태야의 신임을 얻어 손노태야의 많은 사업체 중 가장 핵심 점포인 손가전장의 책임자로 앉게 된 것이 벌써 팔 년 전이었다.
이삼일에 한 번씩 손노태야에게 상황보고를 하기는 했으나, 대부분의 일을 모두 자신의 직권으로 처리할 수 있을 정도로 장태는 막강한 실권을 쥐고 있었다. 이제는 제법 거물답게 후덕해진 몸집에 늘 입가에 여유 있는 미소를 잃지 않았는데, 지금 서신을 읽고 난 장태의 표정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장태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옆에 있는 줄을 잡아당겼다.
곧이어 장한 하나가 나타나 그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부르셨습니까?”
“잠시 후에 종리상단(鍾里商團)에서 몇 사람이 나를 찾아올 것이다. 귀한 분들이니 이쪽으로 정중하게 모셔오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그리고 가일(賈一)을 불러와라.”
“예.”
장한은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조용히 방을 벗어났다.
장한이 나간 후 장태는 허공을 응시한 채 깊은 상념에 빠진 모습이었다. 간혹 고개를 갸웃거리거나 눈썹을 찡그리는 것이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때 문이 소리도 없이 열리며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비쩍 마른 체구에 눈빛이 차가운 회의인이었다.
“무슨 일이오?”
회의인은 손가전장의 총지배인인 장태를 앞에 두고도 전혀 공손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하나 장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그를 힐끔 쳐다보더니 불쑥 입을 열었다.
“자네 형제들이 밥값을 할 때가 왔네.”
회의인의 눈에 한 줄기 신광이 번뜩이고 지나갔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그렇지 않아도 비싼 임금을 받으면서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는 것이 다소 불편했었소.”
“조금 있다가 종리후(鍾里侯)가 오기로 했네.”
“종리상단의 그 종리후 말이오?”
“그렇다네.”
“그가 왜 이곳에 온단 말이오?”
“본 전장과 거래를 하고 싶다더군.”
회의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종리상단은 서안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커다란 상단이었다. 종리 성을 가진 혈족들이 모여 만든 상단이었는데, 결속력이 강하고 서안 일대에 확고한 뿌리를 내리고 있어서 누구도 그들을 무시하지 못했다.
“내가 듣기로는 종리상단은 자체 전장을 가지고 있어서 다른 전장과는 일체의 금전거래를 하지 않는다고 하던데,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거요?”
“그렇지 않네. 확실히 지금까지 그들은 다른 어느 전장과도 금전거래를 한 적이 없었네. 그런데 이번에는 사정이 달라졌네. 그들은 올봄부터 서역의 상행(商行) 개척에 대규모 신규투자를 시작했는데, 공교롭게도 그 후에 비단 파동이 생기는 바람에 일시적으로 자금이 경색된 모양일세. 그래서 약간의 도움을 받았으면 하는 것 같더군.”
비단 파동은 유화상단과 손노태야의 다툼으로 시작된 일련의 사태를 말하는 것으로, 그 결과 유화상단의 둘째인 유길상의 취선방이 몰락하고 노해광의 만화원이 새롭게 등장하여 그 자리를 대체해서 서안의 상계(商界)를 놀라게 했다.
회의인은 여전히 의문이 가시지 않는 얼굴이었다. 손노태야 때문에 벌어진 사건으로 생긴 어려움을 손노태야가 소유한 전장에 손을 빌려 타개한다는 것은 자존심 강하기로 유명한 종리상단답지 않은 일이었다.
“그 말을 믿소?”
“그래서 자네들의 도움이 필요하네.”
장태의 말은 다소 뜬금없었으나 회의인은 단번에 그 속에 숨은 뜻을 알아차렸다.
“그들의 진정한 속셈이 무엇인지 알아봐 달라는 거요?”
장태는 여전히 신중한 모습이었다.
“종리후는 종리상단의 첫째로, 상단의 재무를 총괄하는 인물일세. 그가 직접 나섰으니 허언은 아니겠지만 왠지 예감이 좋지 않네.”
장태는 흔히 말하는 촉이 좋은 인물이었다. 그러한 예민한 감각 때문에 커다란 손실을 피해간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어떻게 예감이 좋지 않다는 거요?”
“시기가 좋지 않네. 자네도 알다시피 지금 장안 일대는 겉으로는 조용해도 금시라도 터질 것 같은 일촉즉발의 폭발성을 내재하고 있네. 특히 화산파가 무언가 큰일을 벌일 거라는 소문 때문에 모두들 몸을 사리고 있는 판국일세. 이러한 예민한 시기에 이제까지 별로 왕래도 없던 종리상단이 우리에게 손을 내민다는 게 너무 공교롭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일세.”
“그러면 거절하면 될 게 아니오?”
“그렇게 되면 그들과는 완전히 척을 지게 되네. 종리가(鍾里家)는 집요한 구석이 있어서 적으로 돌리기에는 껄끄러운 존재들이지. 게다가 만에 하나라도 그들의 제안이 사실이라면 우리에게는 커다란 기회가 될 수도 있네. 그러니 섣불리 결정할 수 없는 일일세.”
“우리가 어떻게 해주면 좋겠소?”
“우선 종리상단의 자금 사정이 정말 어려운지 파악해주게. 그리고 요즘 종리상단에 주로 출입하는 자들이 어떤 인물들인지도 알아봐야 하네.”
회의인은 별로 깊게 생각하지도 않고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소. 그 외에 다른 일은 없소?”
장태는 골똘히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잠시 후에 종리후가 올 때 그와 동행하는 자들에게 주의를 기울여 주게.”
회의인은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설마 종리후가 이곳에서 무슨 수작을 부리려 한다고 생각하는 거요?”
장태는 한숨을 내쉬었다.
“매사에 불여튼튼하자는 게 내 신조일세. 게다가 오늘은 태야(太爺)께서 오시는 날이니, 아무리 사소한 위험이라도 배제하는 게 좋지 않겠나?”
회의인은 장태가 너무 신중하다고 생각했다. 하나 이러한 신중함이 손노태야로 하여금 자신의 가장 핵심사업체인 손가전장을 그에게 맡긴 가장 큰 이유였다.
회의인은 자신의 가슴을 가볍게 두들겼다.
“우리 형제에게 맡겨 주시오. 종리후가 누구를 대동해 오든 이곳에서 추호도 엉뚱한 일을 벌이지 못하게 하겠소.”
“믿고 있겠네.”
종리후가 손가전장에 온 것은 그로부터 반 시진 후였다. 종리후의 일행은 모두 다섯 명이었는데, 종리후 외에 다른 네 사람은 이십 대 후반의 청년 두 사람과 나이가 지긋한 두 명의 노인들이었다. 청년들은 하나같이 눈빛이 정명(精明)하고 인물이 준수해서 한눈에 보기에도 비범한 모습들이었고, 노인들은 평범한 인상이었다.
“어서 오시오. 오랜만에 보는 것 같소.”
장태가 반갑게 그들을 맞았다.
종리후가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손노태야의 생신 때 뵙고 처음이군요. 별래무양 하셨습니까?”
종리후의 나이는 사십 대 중반으로, 장태보다 열 살쯤 적었다. 그래서인지 장태를 대하는 종리후의 태도는 깍듯하기 그지없었다.
“나야 항상 잘 먹고 잘 지내고 있소. 그런데 같이 오신 분들은 어떤 분들이시오? 모두 처음 뵙는 것 같소만…….”
“이 두 사람은 제 조카들이고, 이쪽 두 사람은 저희 상단에서 회계 업무를 보는 분들입니다. 인사 올리게. 손가전장의 총지배인이신 장태, 장 대인일세.”
종리후의 말에 두 명의 청년이 살짝 허리를 숙였다.
“종리광(鍾里廣)입니다.”
“종리혁(鍾里爀)이라 합니다.”
그들이 건성으로 인사를 하는 듯한 모습에 장태는 내심 눈살이 찌푸려졌으나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고 빙그레 미소 지었다.
“반갑네. 외모가 출중한 두 사람을 보니 내 눈이 밝아지는 것 같군.”
종리후 일행이 모두 자리에 앉자 다과가 나온 후에 바로 회담이 진행되었다.
종리후는 종리상단이 비단 파동으로 인해 일시적인 자금 압박을 받고 있으며, 삼 개월을 기한으로 십만 냥을 융통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담보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네 곳의 땅문서를 제공한다고 했다.
종리후의 공식적인 제의를 받은 장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십만 냥이 비록 큰돈이긴 하지만, 종리상단의 명성을 생각해보면 오히려 적다고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삼 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은 더욱 매력이 있었다. 담보로 제공하겠다는 네 곳의 땅도 장태가 파악하기로는 적게 잡아도 십오만 냥은 훌쩍 넘으니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이리저리 따져 보아도 전혀 손해날 것이 없었다. 그래서 장태는 오히려 마음 한 구석에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모든 조건이 너무 좋은 것이다.
이런 조건이라면 손가전장이 아닌 다른 어떤 곳이라도 쌍수를 들고 환영할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종리후는 굳이 자신들이 자금경색을 겪게 한 비단 파동의 원인제공자 격인 손가전장을 찾아온 것이다.
장태는 신중한 표정으로 물었다.
“조건은 합당한 것 같네. 그런데 자네가 굳이 본 전장과 거래하려는 이유를 알 수 있겠나?”
종리후는 눈을 반짝이며 장태의 후덕해 보이는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게 궁금하십니까?”
장태는 순순히 대답했다.
“처음 자네의 서신을 봤을 때부터 그런 의문이 들었네. 장안에 커다란 전장이 많은데, 왜 자네가 굳이 우리와 거래를 하려는지 말일세. 특히 자네는 화대부인과 상당한 친분관계에 있다고 알고 있는데, 만방루를 이용하지 않고 내게 온 것이 선뜻 이해가 되지 않네.”
지나치게 솔직한 장태의 말에 종리후의 눈이 어느 때보다 예리하게 빛났다.
“정말 이유를 알고 싶으십니까?”
장태는 종리후의 빛나는 눈을 보자 마음 한 구석이 더욱 껄끄러워졌으나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싶네.”
“그 대답은 내가 해야겠군.”
지금까지 아무 말 없이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두 명의 노인 중 체구가 왜소한 노인이 불쑥 입을 열었다.
장태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로 향했다. 그 노인의 얼굴은 너무나 평범해서 돌아서면 바로 잊어버릴 것 같았다. 그럼에도 장태는 노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유는 단순하네. 이곳을 이용하면 쓸데없는 지출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지.”
노인의 음성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그 음성을 듣자 장태는 무언지 모를 무거운 기운에 전신이 짓눌리는 듯한 기이한 중압감을 느꼈다. 장태는 헛기침을 하며 자연스럽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험. 노인장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겠소.”
노인은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정말 이해하지 못하겠나?”
노인의 하대에 장태는 표정이 살짝 굳어지더니 이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에 노인장의 함자를 소개받지 못했구려.”
“내 이름은 연일환(淵一煥)이라고 하네.”
“이제 보니 연 노인이셨…….”
무심결에 그의 말을 받던 장태의 얼굴에 한 줄기 괴이한 표정이 떠올랐다.
“함천옹(含天翁) 연일환……?”
노인은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노부의 이름을 들어본 모양이군.”
장태는 두 눈을 크게 떴다. 무언가를 느낀 듯 그는 연일환의 옆에 앉아 있는 훤칠한 키의 노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훤칠한 키의 노인은 짤막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고성진(雇星震)이라는 별 볼일 없는 늙은이일세.”
“번천수(飜天叟)…….”
“바로 날세.”
장태의 얼굴이 무겁게 굳어졌다.
장태는 소리 없는 전쟁터라고 알려진 서안의 전장업계에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어지간한 일로는 쉽게 놀라지도 않았고,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지도 않았으나 지금은 가슴 한 구석이 세차게 뛰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함천옹 연일환과 번천수 고성진.
이들은 바로 화산파의 십대장로 중 두 사람이었던 것이다. 작고 왜소한 체구로는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엄청난 내공을 지니고 있어서 가히 하늘도 품을 수 있다는 함천옹 연일환과 수공(手功)으로는 능히 화산파 제일의 고수라는 번천수 고성진은 세상에 둘도 없는 절친한 사이여서 늘 함께 붙어 다니는 것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종리후의 일행에 화산파의 십대장로 중 두 사람이 동행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장태의 머릿속이 무섭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한동안 복잡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던 장태는 이윽고 마음을 가라앉힌 듯 가는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강호에 명망이 높은 두 분이 오신 것을 모르고 결례를 범했으니 내 잘못이 큰 것 같소.”
그의 말은 언뜻 듣기에는 대접이 소홀한 것에 대한 사과 같았으나, 그 속에는 강호의 명숙인 두 사람이 신분을 속이고 이곳에 숨어 들어온 것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었다.
고성진은 살짝 눈살을 찌푸린 채 아무 말이 없는 반면에, 연일환은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 같은 늙은이들의 허명(虛名)이야 무어 그리 중요하겠나? 보다 큰 뜻을 위해서라면 이깟 허명쯤은 언제든지 집어던질 수 있지.”
장태는 처음으로 연일환을 똑바로 응시했다.
“연 대협이 말씀하신 큰 뜻이란 게 무엇인지 알 수 있겠소?”
연일환의 대답은 망설임이 없었다.
“본 파가 바로 서는 것일세.”
“그걸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용납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요?”
장태의 음성에는 준엄한 추궁이 담겨 있었으나, 연일환은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나에게는 그게 곧 대의(大義)일세. 자네가 돈 버는 걸 대의로 생각하듯 말일세.”
장태는 치졸한 변명이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감히 연일환의 앞에서 그런 말을 내뱉을 수는 없었다. 연일환과 고성진은 화산파에서 단 열 명뿐인 장로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뛰어난 고수들이었다. 그들은 지위나 명성이 높을 뿐 아니라 좀처럼 화산파 바깥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서 평상시라면 장태도 그들과 이렇게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 걸 영광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장태는 다시 머리를 쓸어 넘기며 씁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두 분이 본 장까지 어려운 걸음을 한 건 본 장에 다른 목적이 있어서겠지요?”
“바로 보았네.”
연일환이 망설이거나 말을 돌리지 않고 직접적으로 수긍을 하자 장태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겠소?”
“자네가 예상하고 있는 그것이라고 해두지.”
연일환의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모습에 장태는 더 이상 물을 수가 없었다. 입을 열기만 해도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 그대로 닥칠 것만 같아 불안했던 것이다. 어느 문파보다도 당당하기로 이름 높은 화산파에서 고고하고 자존심 강하기로 유명한 장로들까지 동원하여 이토록 노골적으로 손을 써 오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장태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슬쩍 입구 쪽을 향했다. 하나 아무도 들어서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 연일환이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기다리는 사람이라도 있나?”
장태는 무심결에 고개를 저었다.
“자네가 기다리는 자들은 오지 않을 걸세.”
장태의 낯빛이 약간 창백하게 굳어졌다.
그때 문이 소리도 없이 열리며 짙은 남의와 청의를 입은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남의인은 체구가 건장하고 유난히 짙은 눈썹에 우뚝한 코를 지닌 호쾌하게 생긴 청년이었고, 반면에 청의인은 다소 호리호리한 몸매에 여인처럼 피부가 곱고 입술이 붉은 준수한 미남자였다. 두 사람 모두 나이는 이십 대 후반에서 삼십 대 초반으로 보였는데, 눈빛이 서늘하고 차가운 인상이어서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인물들 같았다.
그들은 연일환의 앞으로 다가와서 살짝 머리를 숙였다.
“정리되었습니다.”
연일환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네.”
장태는 그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흠. 이들도 화산파에서 내려온 분들이시오?”
“그러네.”
“밖에 있는 사람들은 어찌 되었소?”
남의인이 연일환 대신 입을 열었다.
“손가전장의 식솔들이라면 걱정하지 마시오. 그들이 자신의 방에서 조용히만 있는다면 아무런 해도 입지 않을 거요.”
장태는 다시 물었다.
“회의인 몇 사람이 있을 텐데…….”
이번에는 청의인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아쉽게도 그들은 손가전장의 식솔들이 아니더군. 강호의 예에 따라서 대접해 주었소.”
장태의 눈썹이 살짝 찡그려졌다.
장태가 말한 회의인들은 가일과 그의 의형제들이었다. 장태가 머리를 쓸어 넘기는 동작은 가일과 사전에 약속한 것으로, 방문자가 좋지 않은 뜻을 품고 왔으니 안으로 들어와서 그들을 제압하라는 은밀한 신호였다.
가일을 비롯한 여섯 명은 손가장의 청명숙에서 기거하던 빈객들로, 하나같이 상당한 실력을 지닌 강호의 고수들이었다. 장태는 청명숙의 빈객들 중에서 뜻이 맞고 실력이 검증된 가일과 그의 형제들을 손노태야에게 특별히 부탁하여 자신의 곁에 두었는데, 지금까지 그들은 단 한 번도 장태의 기대를 실망시킨 적이 없었다.
그런데 몇 번이나 머리를 쓸어 넘겼음에도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불안했는데, 이제 보니 이미 남의인과 청의인에 의해 제압당한 모양이었다. 그들이 모두 쓰러졌는데도 밖에서 큰 소리 한 번 나지 않은 것은 이들 두 사람의 무공이 그들을 압도했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장태는 가일의 실력이 결코 호락호락한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기에 이들 두 사람의 정체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네들의 명호를 알 수 있겠나?”
청의인이 준수한 얼굴에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는 조평보(曹平寶)라 하고, 내 사제는 국익경(鞠益慶)이오.”
그들의 이름을 듣는 순간, 장태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나직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매풍(梅風)과 매영(梅影)! 자네들은 매화사절이었군.”
청의인, 조평보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그렇소.”
그제야 장태는 가일 형제가 제대로 된 대항도 해보지 못하고 기척도 없이 그들의 손에 당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화산파의 일대제자들은 적지 않은 수를 자랑했지만, 그들 중 특히 네 사람이 세인들의 입에 제일 많이 오르내렸다.
그들은 하나같이 당대에 보기 드문 미남자들이었고, 무공에 관한 한 천부적인 재질을 지니고 있어 화산파에서도 가장 촉망받는 인재들이었다. 그들은 개개인의 성격과 기질에 따라 각기 매풍, 매영, 매향(梅香), 매절(梅節)이라는 외호가 붙었는데, 많은 사람들은 그들 네 사람을 일컬어 매화사절이라 불렀다. 조평보가 바로 매화사절 중의 매풍이었고, 국익경이 매영이었다.
두 명의 장로에 이어 매화사절 중의 두 사람이 나타나자 장태도 더 이상 냉정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더구나 조평보와 국익경의 말투와 행동으로 보아 이미 전장의 대부분이 그들의 손에 장악된 것이 분명해 보였다.
‘이들 두 사람만은 아닐 테고, 오늘 이곳에 화산파의 고수들이 몇 명이나 왔단 말인가?’
손가전장의 전체 인원은 백 명이 넘었다. 아무리 조평보와 국익경이 뛰어난 고수들이라고 해도 그들만으로 손가전장을 단시간 내에 장악할 수는 없었다. 이들 외에 적게 잡아도 이십 명에 가까운 인원이 투입되었을 것이다.
최근 몇 년간 이토록 많은 화산파 고수들이 내려왔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기에 장태는 화산파가 이번 일에 얼마나 관심을 기울였는지를 새삼 절감할 수 있었다.
장태는 무거운 표정으로 연일환을 바라보았다.
“당당한 화산파에서 이토록 무도(無道)한 일을 벌일 줄은 미처 몰랐소.”
장태의 비난 섞인 말에도 연일환은 별반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말했지 않나? 대의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말일세.”
“나를 사로잡고 건물을 장악했다고 해서 본 전장을 수중에 넣었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오.”
“물론 알고 있네. 거래장부와 손노태야가 없으면 손가전장은 껍데기에 불과할 뿐이지.”
장태의 눈꼬리가 꿈틀거렸다.
“그런데도 이런 일을 벌였단 말이오?”
“조금만 기다리면 끝날 일이네.”
장태가 무어라고 입을 열려는 순간, 누군가가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하얀 무복을 걸친 젊은이였다.
그 젊은이는 연일환의 앞으로 다가와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가 왔습니다.”
그 말을 듣자 장태의 가슴은 덜컥 내려앉았다. 오늘은 바로 손노태야가 결산보고를 받으러 손가전장으로 오는 날이었다.
그리고 이들도 그것을 알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아니, 어쩌면 그것을 알고 오늘 이런 일을 벌인 건지도 몰랐다. 일부러라도 떠올리지 않으려고 했던 가장 우려할 만한 최악의 상황이 마침내 도래한 것이다.
손노태야는 살짝 눈썹을 찌푸린 채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무언가 못마땅한 일이 있을 때 습관적으로 짓는 표정이었다.
맹효(孟曉)가 그의 그런 신색을 알아차렸는지 조심스런 음성으로 물었다.
“마음에 안 드는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맹효는 손노태야의 오래된 측근이면서 또한 회계업무를 관장하고 있기에 전장에 올 때면 늘 지근거리에서 손노태야를 수행하는 인물이었다.
“아직 일과가 끝날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점원들 모습이 보이지 않는군.”
손노태야의 퉁명스런 말에 맹효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안색이 조금 변했다. 손노태야의 말마따나 손님을 맞고 안내해야 할 점원들이 모두 어디로 갔는지 전장 안이 썰렁한 느낌이 들었다. 오직 몇몇 손님들만이 주위를 서성이고 있을 뿐이었다.
맹효가 슬쩍 고갯짓을 하자 뒤에 있던 네 명의 호위무사들 중 두 사람이 재빨리 앞으로 나섰고, 다른 두 사람은 뒤쪽의 퇴로를 확보하려 했다.
하나 어느새 그들의 사방은 봉쇄되어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손님처럼 보였던 자들이 교묘하게 그들이 움직일 수 있는 모든 방위를 철저하게 막아서고 있는 것이다. 삽시간에 조용했던 실내가 팽팽한 긴장감에 휩싸여 버렸다.
“웬 놈들이냐?”
맹효가 버럭 소리를 질렀으나 그들을 에워싸고 있는 자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이분이 누구인 줄 알고 앞길을 막는 것이냐? 냉큼 비키지 못하겠느냐?”
맹효가 고함을 치듯 말하자 그들 중 한 사람이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큰 소리를 내봤자 이곳에 올 사람은 아무도 없소. 그러니 공연히 심력을 낭비하지 마시오.”
그는 용모가 제법 단정하고 눈빛이 맑은 삼십 대 초반의 장한이었다.
맹효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이곳에 올 사람이 없다는 게 무슨 뜻이냐?”
“말 그대로요. 일부러 고함을 질러봤자 당신의 목만 아프고 힘만 빠질 뿐이오. 그보다 나는 손노태야를 뵈어야할 일이 있으니 비켜주시겠소?”
맹효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 사실 맹효가 목청껏 소리를 지른 것은 손가전장 안의 무사들을 부르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하나 상대는 이미 그의 속마음을 훤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손가전장의 무사들은 이미 그들에게 제압당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설마 손가전장 안에서 손노태야를 위태롭게 하는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기에 맹효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때 손노태야가 맹효를 물러서게 한 후 앞으로 나섰다.
“나를 보고 싶다고?”
장한은 손노태야를 향해 살짝 웃어 보였다.
“그렇습니다.”
손노태야의 주름진 시선이 장한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아무런 빛도 담겨 있지 않은 탁한 시선이었으나, 그래서 더욱 사람들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눈이었다. 손노태야가 이런 시선으로 바라볼 때면 대개의 사람들은 안절부절못하거나 시선을 피하고는 했다.
하나 장한은 오히려 빙긋 웃으며 그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장한의 눈빛은 손노태야의 눈과는 달리 티 없이 맑고 담백했다.
손노태야는 한동안 물끄러미 장한을 보고 있다가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눈빛이 정명(精明)한 젊은이로군. 내게 용무가 있다면 먼저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는 게 순리 아니겠나?”
장한은 그를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저는 송인혁(宋仁赫)이라 합니다.”
손노태야는 그의 이름을 가만히 곰씹어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는 화산에서 내려왔군.”
“그렇습니다.”
송인혁은 화산파가 자랑하는 매화사절 중의 매향(梅香)이었다.
알려지기로 그는 어려서부터 일대기재로 이름이 높았고, 화산파에 입문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수석장로인 십지매화검객(十枝梅花劍客) 선우정(鮮于庭)의 눈에 띄어 그의 고제가 되었다고 한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그와 매절 북문도(北門都) 중 한 사람이 매화사절 중의 최고수일 거라고 말하곤 했다. 나이도 다른 매화사절보다 몇 살 많은 편인 데다 성격도 침착해서 은연중에 매화사절의 우두머리 역할을 하고 있었다.
“무슨 용무이기에 화산파의 제자들이 연락도 없이 내 전장을 쳐들어왔나?”
송인혁은 담담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쳐들어오다니 당치 않습니다. 우리는 그저 다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손노태야와 조용한 대화를 나누고 싶었을 뿐입니다.”
“이게 화산파가 대화하는 방식이란 말인가?”
손노태야는 주위를 둘러싼 고수들을 슬쩍 돌아보며 비꼬는 말을 던졌으나 송인혁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상황에 따라 대처하는 방식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 그 용무란 게 대체 뭔가?”
“이곳은 긴 대화를 나누기에 적합하지 않은 것 같군요. 안으로 드시지요. 조용한 자리를 마련해 두었습니다.”
송인혁은 안쪽을 가리키며 몸을 돌렸다. 이곳이 마치 자신들의 거처라도 되는 양 한 치의 망설임이나 주저함도 없이 손노태야를 안내하는 모습에 맹효가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그의 뒤통수를 노려보았으나, 손노태야는 무심한 얼굴로 묵묵히 그의 뒤를 따라 걸음을 움직였다.
맹효와 네 명의 호위무사가 그 뒤를 따르려 하자 화산파의 고수들이 그들을 막아섰다.
“다른 사람들은 이곳에 가만히 계시면 되오.”
맹효와 호위무사들이 반발하려 했으나, 손노태야가 그들을 제지했다.
“자네들은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게.”
“하지만…….”
맹효는 무어라고 말을 하려다 손노태야의 시선을 받고는 입을 다물었다.
송인혁은 손노태야가 그러리라는 것을 짐작이라도 했다는 양 빙긋 웃으며 손노태야를 내실로 안내했다.
내실은 손가전장의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었다. 이 내실은 원래 손노태야가 손가전장에 왔을 때 머무르는 곳으로, 평상시에는 장태를 제외한 전장의 누구도 함부로 출입할 수 없도록 철저하게 통제되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내실에 도착할 때까지 그들을 막아서거나 제지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것은 이미 손가전장의 모든 곳이 화산파 고수들의 손에 완전히 장악당했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손가전장에서 일하는 점원들을 제외한 호위 무사들의 수는 삼십 명이 훨씬 넘었다. 개중에는 손노태야가 특별히 선발해서 보낸 손가장의 빈객들도 상당수 있었다. 그런데 그들 모두가 손가장에 공격을 받고 있다는 연락도 보내지 못하고 모조리 제압당해 버린 모양이었다.
손노태야가 송인혁의 뒤를 따라 내실로 들어서자 화산파 고수들에 둘러싸여 있던 장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태야…….”
손노태야는 그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가 중앙의 의자에 가서 앉았다. 너무도 태연하고 자연스러운 동작이어서 장태에게 보고를 받기 위해 이 방에 들어왔던 평상시의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손노태야는 자리에 앉은 다음에야 비로소 주위의 인물들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젊은 조평보와 국익경을 가볍게 훑고 지나가던 손노태야의 시선이 연일환과 고성진의 얼굴에 머물렀다.
손노태야는 비록 연일환과 고성진을 직접 만난 적은 없었지만 그들의 연배와 주위의 분위기를 파악하고는 이내 그들의 신분을 짐작할 수 있었다.
“화산파의 장로들께서 귀한 걸음을 하셨구려.”
고성진은 여전히 입을 굳게 다문 채 딱딱한 표정인 반면에 연일환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매달았다.
“이런 자리에서 보게 되어 아쉽구려. 나는 연일환이라 하고, 이쪽은 고성진이라 하오.”
손노태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의 고매한 명성은 익히 들었소.”
아무리 손노태야라고 해도 강호 최고의 명문정파 중 하나인 화산파의 장로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이런 자리만 아니었다면 손노태야도 보다 기꺼운 마음으로 그들을 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손노태야께서는 말을 돌려 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들었소.”
“그런 편이오.”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우리가 이곳에 온 건 손노태야와 한 가지 거래를 하기 위해서요.”
손노태야는 물끄러미 그를 보다가 주위를 한 차례 둘러보았다. 이런 분위기에서 거래라는 말이 어울리느냐는 의미를 담은 무언의 행동이었다.
“일단 들어봅시다. 무슨 거래를 하려는 거요?”
“본 파는 이번에 전장에 대규모 투자를 하려 하오. 그 일에 손노태야의 힘을 빌리고 싶소.”
“어떻게 힘을 빌려달라는 거요?”
“거래처를 소개받고 싶소.”
아주 단순한 말이었으나, 듣고 있던 장태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전장의 가장 중요한 일이 바로 거래처 관리였다. 자기가 거래하고 있는 거래처를 남에게 소개한다는 것은 곧 거래처를 넘겨준다는 것과 마찬가지의 의미였다. 그러니 거래처를 소개해 달라는 것은 곧 전장을 넘겨달라는 것과 별반 차이 없는 말인 셈이었다.
너무도 노골적이고 어처구니없는 말을 들어서인지 손노태야는 한동안 아무런 대답 없이 묵묵히 앉아 있었다. 연일환도 그를 윽박지르거나 대답을 재촉하지 않고 조용히 그를 지켜보기만 했다.
한참 후에야 손노태야는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나는 거래란 공정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공정한 거래가 될 거요.”
“어떻게 말이오?”
“손노태야가 우리에게 거래처를 소개해 준다면, 첫째로 손노태야는 가장 든든한 보호자를 얻게 될 거요.”
“나는 지금도 충분히 보호받고 있소.”
연일환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랬다면 이런 자리도 마련되지 않았을 거요.”
그 말에 손노태야는 입을 다물었다.
연일환은 나직한 음성으로 말을 계속했다.
“안전하다는 건 상대적인 거요. 지금까지는 충분히 자신을 보호할 수 있었겠지만, 앞으로의 상황은 많이 달라질 거요. 그래서 손노태야에게는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오.”
단정적인 듯한 말이었으나 손노태야는 굳이 부인하지 않았다.
확실히 지금까지 손노태야가 상대했던 자들과 화산파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화산파가 일단 손을 써온 이상, 그들의 적이 되든지 손을 잡든지 둘 중 한 가지 길밖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미 손가전장이 화산파에 장악당하고 자신의 몸이 억류되었으니 어느 길을 선택해야 할지는 너무도 자명한 일이었다. 손노태야로서는 그저 화산파가 이토록 과감하고 신속하게 손을 써올 것이라고 미처 예상치 못했던 자신의 실책을 탓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것이 첫째라면 둘째도 있겠구려.”
연일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둘째로 손노태야는 업종을 다양화할 수 있소.”
손노태야의 눈썹이 슬쩍 치켜 올라갔다.
“그게 무슨 뜻이오?”
“우리는 손노태야가 포목점을 차리도록 도와줄 수 있소.”
포목점이란 말에 손노태야의 뇌리에 노해광의 만화원이 떠올랐다.
“포목점 하나와 전장을 바꾸자는 말이오?”
“하나가 아니오. 우리는 장안 일대의 포목과 비단 판매에 손노태야가 쉽게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돕겠소.”
포목과 비단은 유화상단의 가장 큰 주업종이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만화원이 제법 큰 성세를 누리고 있었다. 연일환의 말은 손가전장을 순순히 넘긴다면 유화상단 대신에 손노태야를 지원할 수도 있으며, 때에 따라서는 만화원을 통째로 넘겨줄 수도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손노태야는 머리가 복잡한 듯 잠시 관자놀이를 양손으로 어루만졌다.
전장을 주고 포목과 비단을 얻는 것에 대한 손익을 계산하는 것 같았다. 하나 사실은 계산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자신이 평생을 몸담아 왔고 확고한 뿌리를 내린 전장업이었다. 아무리 화산파가 지원한다고 해도 새로운 업종에 뛰어드는 것이 달가울 리 없었다.
문제는 손노태야가 그들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화산파가 실질적으로 손가전장을 장악한 상태에서 이런 제의를 하는 것은 외부의 시선을 의식하기 때문이었다. 손노태야에게 형식적으로나마 사업체를 인수받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대외적으로 큰 차이가 있었다. 지금 연일환이 제시한 것은 승낙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제안이 아니라 무조건 들어야만 하는 강압이나 마찬가지였다.
“셋째도 있소?”
한참 후에 손노태야가 묻자 연일환은 빙긋 미소 지었다. 손노태야가 마음을 결정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렇소. 손노태야가 우리의 뜻에 따라준다면 본 파가 새롭게 투자할 전장의 일정 지분을 약속하겠소.”
“지분이라…….”
손노태야의 주름진 눈이 한동안 허공을 가만히 응시했다. 화산파에서 전장의 지분을 그에게 주겠다는 것은 손가전장을 넘겨받는 대신에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하겠다는 의미였다. 손노태야의 반발을 최소화하고, 주위의 따가운 시선도 피하려는 의도가 담겨있는 발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새로운 전장의 지분 사 할을 보장하겠소. 본 파가 투자하는 금액이 적지 않은 만큼 손노태야가 이번 일로 금전적인 손해를 입는 일은 별로 없을 거요.”
참으로 묘한 의미를 담은 말이었다. 자신이 평생을 바쳐온 사업을 송두리째 남에게 넘겨주게 생겼는데 금전적인 손익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리고 아무리 손가전장에 화산파의 대규모 투자가 가세하여 자본이 늘어난다고 해도 사 할의 지분만으로 손실이 보존될 리도 없었다.
이것은 말 그대로 화산파가 결코 강제적으로 이득을 취하거나 남의 것을 빼앗지 않았음을 보여주기 위한 형식적인 행동일 뿐이었다. 육 할의 지분을 가진 화산파에게 손노태야의 사 할 지분은 그저 대외적인 방패막이에 불과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연일환 자신도 이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손노태야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묵묵히 앉아 있는데도 연일환은 더 이상 그에게 이런저런 재촉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손노태야가 어떤 선택을 할지는 정해져 있었다. 다만 손노태야로서도 스스로의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연일환은 기꺼이 그 시간을 기다려 줄 수 있는 아량이 있었다. 그 시간이 너무 길지만 않다면 말이다.
그때 다시 문이 열리며 하얀 무복의 젊은이가 급히 안으로 들어왔다. 젊은이는 화산파의 일대제자로, 동개(童開)라는 인물이었다. 눈치가 빠르고 행동이 민첩해서 연일환이 외부의 일에 대한 연락책으로 삼고 있었다.
“잠깐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냐?”
동개의 얼굴에는 한 줄기 당혹감이 떠올라 있었다.
“철면호가 찾아왔습니다.”
철면호 노해광이 뒤늦게 손가전장 내에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고 황급히 찾아온 모양이었다. 충분히 예상가능한 일이었으며 그에 대한 대책도 사전에 지시해 둔 상태였다.
“그를 돌려보내면 되지 않느냐?”
아무리 노해광이 서안 일대에서 대단한 위세를 떨치고 있다고 해도 강제로 손가전장을 침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상관이 없는데, 동행한 자들이 문제입니다.”
“그게 누구냐?”
“장안부(長安府)의 관원(官員)들입니다.”
연일환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철면호가 관원들을 데리고 왔다고?”
“급히 손노태야를 만나야 할 일이 있다며 돌아가지 않고 있습니다. 힘으로 그를 막았다가는 관원들 때문에 문제가 발생할 것 같아 장로님의 지시를 받고자 합니다.”
연일환은 슬쩍 손노태야를 살펴보았다. 손노태야는 여전히 허공을 응시한 채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모습이었다.
연일환은 송인혁을 불러 무어라고 지시를 했다.
송인혁이 동개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오자 과연 화산파 제자들이 일단의 무리들과 팽팽하게 대치해 있었다. 송인혁은 일견하는 것만으로도 그 무리들의 실력이 만만치 않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철면호 노해광이 누구인지는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검은 수염을 기르고 당당한 체구를 자랑하는 중년인이 중앙에 우뚝 서 있었는데, 무언가 복잡한 상념에 잠겨 있는 듯한 얼굴 표정이 이채로웠다.
그의 양옆에는 다소 뚱뚱한 체구의 중년인과 관복을 입은 젊은 관인(官人)이 나란히 서 있었다. 송인혁의 시선이 노해광으로 짐작되는 중앙의 중년인을 거쳐 빠르게 그들 두 사람을 훑고 지나갔다. 뚱뚱한 체구의 중년인은 얼마 전부터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노해광의 사제가 분명해 보였다.
문제는 젊은 관인이었다. 유난히 하얀 얼굴에 칼날처럼 호리호리한 체구를 한 그 관인은 무언가 못마땅한 일을 본 사람처럼 날카로운 눈으로 자신들의 앞을 막아선 화산파 고수들을 쏘아보고 있었다.
그 젊은 관인의 뒤에는 네 명의 관인들이 호위하듯 그를 에워싸고 있었는데, 그것만 보아도 그 젊은 관인이 상당히 높은 고위직 관리임을 알 수 있었다.
송인혁이 나타나자 중앙의 중년인이 그를 보더니 빙긋 웃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야릇한 웃음이었다.
“반갑네. 나는 노해광이라는 사람일세.”
짐작대로 그 중년인이 바로 서안 일대에서 최고의 실력자 중 한 사람으로 부각되고 있는 철면호 노해광이었다. 송인혁은 비록 노해광을 직접 만난 적은 없었지만 최근 들어 여러 가지 소문을 들어왔기 때문에 그에 대한 흥미가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송가입니다.”
송인혁은 정확한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그것은 공개적으로 자신들이 화산파의 고수들임을 알리지 않으려는 의도에서였다. 물론 노해광이야 충분히 짐작하고 있겠으나, 단순히 짐작하는 것과 사실로 밝혀지는 것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손가전장에 온 화산파 제자들은 모두 화산파 특유의 매화문양이 수놓아진 무복이 아닌 평상복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노해광도 굳이 그의 정체를 추궁하지 않았다.
“손노태야께서 조금 전에 이곳으로 오셨다는 말을 들었네. 그분을 뵈려 하는데, 안내해 줄 수 있겠나?”
노해광이 점잖게 말하자 송인혁의 입가에 살짝 쓴웃음이 스치고 지나갔다.
단순히 손노태야를 만나러 왔다고 하면 핑계를 대어 거절하려 했는데, 이미 이곳에 손노태야가 있음을 단정하고 말을 꺼내니 부인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자신들의 신분을 뻔히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손가전장의 점원을 대하듯 하는 그의 뻔뻔한 모습에 내심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태야께서는 지금 전장의 중요한 업무를 보는지라 외인을 만나기 힘든 상황이십니다. 나중에 직접 손가장으로 찾아가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송인혁이 짐짓 완곡하게 거절의사를 밝혔으나, 노해광은 오히려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태야께서 하시려는 중요한 업무가 바로 이 사람과의 일일세. 태야께서 기다리고 계실 테니 어서 들어가세.”
송인혁은 그의 넉살좋은 말에 어이가 없었다. 그렇다고 순순히 노해광을 손노태야에게 데리고 갈 수는 없어서 막 앞으로 걸어 나오려는 그의 앞을 슬쩍 막아섰다.
“태야의 허락 없이 내실로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그와 함께 화산파의 제자들이 일제히 노해광 일행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때 지금까지 말없이 그들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젊은 관인이 냉랭한 음성을 내뱉었다.
“손노태야를 만나는 일은 장안부의 공무(公務)이니 누구도 방해할 수 없네.”
그의 음성에는 추상과 같은 기운이 어려 있었고, 태도는 위엄이 넘쳐서 단순한 관리 같지가 않았다.
송인혁도 그를 소홀히 대할 수는 없어 정중하게 물었다.
“장안부의 어느 귀인이신지요?”
“나는 장안부의 동지(同知)인 강염일세.”
송인혁은 낭패스런 심정을 간신히 억눌러야만 했다.
강염은 장안지부의 이인자로, 정오품의 고위 관리였다. 게다가 그는 옥안빙심이라고 불릴 정도로 냉정하고 일처리가 분명한 위인이어서 결코 쉽게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가뜩이나 다수의 관인이 노해광과 동행하여 불편했는데, 그들 중 한 사람이 장안부의 최고 관리였으니 송인혁으로서는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과연 철면호의 재주가 놀랍구나. 이렇게 빠른 시간 내에 강염까지 불러내다니…….’
아무리 화산파의 위세가 대단하다고 해도 동지인 강염 같은 고위 관리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이제 보니 강 대인이셨군요. 그런데 공무라 함은 무얼 말씀하시는 건지요?”
강염은 유난히 하얀 얼굴에 차가운 빛을 가득 띄웠다.
“지부의 일을 일반인에게 밝힐 수는 없네. 그보다 아직도 내 앞을 막아설 셈인가?”
강염이 단호하게 말을 하면서도 송인혁에게 무조건 하대를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미 그의 신분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강염으로서도 무조건 화산파와 척을 지는 것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어서 최대한 양보를 하고 있는 것이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이었으나, 관과 무림 사이에서는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기도 했다. 서로가 일정한 선을 넘지 않는다면 모른 척하고 묵인해주는 것이 통상적인 관례였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송인혁도 더 이상은 그를 제지할 수가 없었다. 결국 송인혁은 내실로 밀고 들어오는 그들을 안내하는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내실로 들어선 노해광은 빠른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고는 이내 안도하는 표정이 되었다.
손노태야는 여전히 중앙의 의자에 앉아 있었고, 그 앞에 두 명의 노인과 두 명의 청년들이 있었다. 노해광이 안도한 것은 그들 사이의 탁자에 어떠한 서류도 놓여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아직 서류에 서명을 하지 않았다면 화산파는 손가전장을 접수하지 못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쪽에 엉거주춤하게 서 있던 장태의 얼굴이 자신을 발견하고 활짝 펴진 것이 그런 심증을 더욱 확실하게 만들었다.
노해광은 먼저 손노태야의 앞으로 가서 그의 얼굴 표정을 찬찬히 살폈다.
“요즘 통 뵙기가 힘들군요. 강녕하셨습니까?”
노해광이 며칠 전에 봐놓고도 천연덕스럽게 인사를 하자 손노태야가 힐끔 그를 쳐다보더니 퉁명스런 음성을 내뱉었다.
“나야 항상 잘 있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여기까지 왔나?”
노해광의 귀에는 왜 좀 더 빨리 오지 않았느냐는 꾸중으로 들렸다.
노해광은 습관적으로 턱에 난 수염을 쓰다듬었다.
“강 대인께서 일전에 말씀하신 투자 건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알고 싶다고 하시는군요.”
강염이 때맞춰 앞으로 나섰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태야.”
“강 대인께서 오신 줄도 모르고 이곳에 미적거리고 있었구려. 어서 이쪽에 앉으시오.”
강염은 손노태야의 앞에 있는 의자에 가서 점잖게 앉은 후 손노태야의 앞에 있는 두 명의 노인들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쪽 분들은…….”
손노태야가 무어라고 하기도 전에 연일환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말씀만 듣던 장안부의 동지 대인을 뵙게 되어 반갑소. 나는 화산파의 연일환이라 하오.”
“나는 고성진이오.”
두 사람이 스스럼없이 자신들의 이름을 밝히자 강염이 짐짓 놀란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이제 보니 화산파의 고인들이시구려. 이곳에는 무슨 일이시오?”
연일환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본 파에서 이번에 대규모 투자를 계획하고 있어서 그에 대한 조언을 구하고자 손노태야를 찾아오게 되었소이다.”
“그러셨구려. 상담은 잘 하셨소?”
“결정된 사항은 없지만, 앞으로의 일에 대한 많은 도움을 받았소.”
연일환과 고성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용무는 끝났으니 강 대인께서 일을 보실 수 있도록 이만 가야겠소.”
강염은 형식적으로라도 그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고맙소. 다음에 시간이 나시면 장안부에 들러주시오. 두 분과 제대로 된 인사를 나누고 싶구려.”
연일환은 빙긋 웃었다.
“기회가 닿는다면 꼭 들르도록 하겠소.”
이어 연일환과 고성진을 비롯한 화산파의 제자들은 조용히 내실을 벗어났다.
노해광이 자신을 따라온 최동에게 슬쩍 눈짓을 하자 최동이 부하들을 데리고 손가전장 안의 여기저기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화산파에서 무슨 수작을 부리거나 사람을 남겨 놓았을지 몰라 그에 대한 확인 작업을 하려는 것이다.
화산파 고수들이 생각 외로 순순히 물러나자 강염은 노해광을 돌아보았다.
“내 일은 여기까지인 것 같소.”
노해광은 그를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강 대인의 도움은 잊지 않겠습니다.”
“나야말로 큰 싸움을 막을 수 있어서 다행이오. 장안에서 가장 큰 세력들이 다투기라도 한다면 자칫 장안부로서도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말이오.”
노해광은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자신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라 그저 웃고 말았다.
곧이어 강염마저 자리를 뜨자 손노태야가 불쑥 물었다.
“강 대인에게 무엇을 주기로 했나?”
강염이 별 친분도 없는 손노태야를 위해서 일부러 이곳까지 왔을 리는 없었다. 그렇다고 노해광과 강염 사이에 특별한 교분이 있다는 말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노해광이 무언가 대가를 주기로 하고 강염에게 부탁을 한 것이 분명했다.
노해광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앞으로 삼 년 동안 장안부에서 사용하는 모든 물품을 절반 가격에 제공해 주기로 했소.”
손노태야가 눈살을 찌푸렸다.
“손해가 막심하겠군.”
“어쩔 수 없었소. 화산파가 장악하고 있는 이곳으로 들어오려면 관(官)의 힘을 빌리는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오. 그리고 그 정도 손해쯤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소.”
“그 손해는 내가 충당해 주겠네.”
“절반만 받겠소.”
손노태야를 구하기 위해서 발생한 손해였지만, 이번 일에 관한 한 공동 대응을 하기로 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피해도 절반씩 부담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 노해광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손노태야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모두 낼 걸세.”
노해광은 슬쩍 손노태야의 눈치를 살폈다.
“반은 내가 부담하는 게 맞는 일 같소만.”
계산이 정확하기로 유명한 손노태야답지 않게 그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자네는 그저 물품에 대한 목록만 내게 보내주게.”
노해광은 손노태야를 빤히 쳐다보았다.
“전장에 피해는 없었소?”
“가씨 형제들이 조금 다친 것을 제외하고는 없었네.”
“그렇다면…….”
노해광의 시선은 집요하게 손노태야의 두 눈을 응시했다. 손노태야는 계속 그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노해광은 표정이 굳어지더니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그들과 무엇을 약속했소?”
손노태야는 그제야 천천히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평상시와 다름없는 탁하고 흐릿한 시선이었다.
“종남파와 화산파 사이의 일에 중립을 지켜주기로 했네.”
노해광은 자신의 예상이 맞았음을 깨닫고 표정이 무거워졌다.
손가전장은 이번 일로 인명손실이나 금전적인 피해를 전혀 입지 않았다. 노해광이 때맞춰 강염을 대동하고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손노태야와 화산파 사이에 깊은 원한도 없으니 그들이 손을 잡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연일환이 순순히 물러난 것도 손가전장을 장악하려는 애초의 목적은 실패했지만 종남파와 손가전장 사이를 떼어놓았으니 차선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기 때문이었다.
손노태야는 딱딱하게 굳어진 노해광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청명숙의 빈객 열두 명이 오늘 청명숙을 떠난다고 하더군. 오늘 이후 화산파와의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자네를 비롯한 종남파의 누구도 본 장에 오지 않았으면 하네.”
그것은 손노태야의 마지막 배려였다. 청명숙의 빈객 열두 명을 지원해주겠다는 의미였다. 그래도 노해광의 얼굴은 여전히 풀어지지 않았다.
손노태야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나?”
“연일환은 너무 순순히 물러났소.”
“그들로서도 관과 맞설 수는 없었겠지.”
“그리고 이번 일의 주재자인 신산 곡수는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소.”
“그가 왔다면 이번 일을 화산파가 저질렀음을 공개적으로 드러낸 격이 되고 말았겠지. 그래서 일부러 화산파에서 잘 나오지도 않던 장로들을 보낸 것이 아니겠나?”
“매화사절은 항상 함께 다닌다는데, 이곳에는 단지 세 사람만이 왔소.”
“한 사람은 급한 사정이 생겼겠지.”
노해광이 넋두리처럼 중얼거리고 손노태야가 그에 대한 대답을 하는 상황이 한동안 벌어졌다.
“내가 손가전장에 일이 발생한 것을 알게 된 것은 입구를 지키고 있던 전장의 무사들이 모두 사라지고 처음 보는 낯선 인물들이 그곳을 지키고 있다는 부하들의 보고를 받았기 때문이오.”
“전장의 모든 점원과 무사들을 화산파 고수들이 제압했다고 하더군.”
“화산파에서 정녕 비밀리에 이곳을 장악하려 했다면 입구에 있는 무사들을 건드리지 않거나 아예 포섭하여 밖에서 눈치 채지 못하게 했을 거요.”
“본 전장의 무사들을 쉽게 회유할 수는 없었을 걸세.”
“부하들의 보고를 받은 나는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고수들을 데리고 이곳으로 올 수밖에 없었소.”
“그거야 당연한 일 아닌가? 자네가 조금만 늦었어도 나로서는 커다란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네.”
“아무리 화산파라고 해도 이렇게 강압적인 방법으로 손가전장을 통째로 집어삼킬 수는 없다는 걸 알고 있을 거요. 아마 잘해야 손노태야에게 어느 정도의 양보를 받는 것에 불과했겠지. 오히려 그에 대한 거부감이 장안 전체에 퍼지게 되었을 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과감하게 일을 저질렀고, 상황이 여의치 않자 너무도 맥없이 물러나고 말았소.”
그제야 손노태야의 얼굴 표정이 조금 바뀌었다.
“자네는 그들의 진정한 목적이 본 전장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
노해광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바로 그렇소. 그들의 목표는 이곳이 아니었소.”
노해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때마침 보고를 위해 안으로 들어오던 최동을 향해 소리쳤다.
“방보당으로 가자!”
손노태야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달려 나가는 노해광의 얼굴은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이미 때가 늦었음을 절감하는 표정이었다.
황급히 손가전장을 벗어나 방보당으로 달려온 노해광이 본 것은 대문이 박살난 방보당의 처참한 모습이었다. 군데군데 피가 뿌려져 있고, 몇 구의 시신이 누워 있는 모습이 얼핏 보이기도 했다. 그들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끝까지 방보당을 지키고 있던 흑선방의 수하들이었다.
“방태동은…….”
노해광은 이를 악물며 방보당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 뒤를 하동원과 정해, 최동이 황급히 따라갔다.
쾅!
내실의 문을 박살내다시피 하며 안으로 들어간 노해광이 무엇을 보았는지 신형을 우뚝 멈추었다. 뒤따라 들어오던 정해가 재빨리 몸을 멈추지 않았으면 노해광의 뒷등에 얼굴을 처박고 말았을 것이다.
내실의 중앙에는 방태동이 누군가와 담소를 나누고 있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부서진 방문과 노해광을 번갈아가며 바라보고 있었다.
“자네…… 무사했군.”
노해광은 간신히 그 말만을 내뱉을 수 있었다.
방태동은 이내 표정을 풀고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네만 믿고 있다가 이번에 아주 호되게 당할 뻔했지.”
노해광은 방태동이 무사한 것이 믿어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화산파에서 누가 왔었나?”
“신산 곡수가 매화사절 중의 한 사람을 이끌고 직접 왔더군.”
“그런데도 어떻게…….”
“어떻게 무사할 수 있었느냐고? 때마침 이 사람이 나타나 나를 구해주었네. 북문도가 이 사람에게 패하자 곡수는 꼬리를 말고 도망치고 말았지.”
노해광의 시선이 방태동의 앞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로 향했다.
담담한 얼굴로 그의 시선을 마주한 그 사람을 보자 노해광의 입에서 도저히 억누를 수 없는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으음…….”
뜻밖에도 그 사람은 일전에 하선루의 이층에서 보았던 금조명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