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8권 열한기공(熱寒奇功)편 : 1화
제 282장 검마쟁투(劍魔爭鬪)
주위는 조용했다.
바람도 불어오지 않았고, 가끔씩 들려오는 새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나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사람들의 거친 숨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진산월이 나타날 때부터 장내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그에게 집중되었다. 심지어는 부상이 심해 아직도 입가에 피를 흘리고 있는 희인몽조차도 진산월을 응시한 채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들이 진산월의 정체를 한눈에 알아보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 이유는 복양수에게 있었다. 좌중을 질식시킬 듯 압도적인 기세를 뿜어내고 있던 복양수가 모든 신경을 그에게 집중한 채 미동도 않고 있었다. 그에 따라 장내의 분위기가 판이해진 것을 그들 모두 직감적으로 알아차린 것이다.
복양수는 무림의 절대적인 존재였고, 무공은 물론이고 그 명성이나 강호에서의 위치가 최고에 도달해 있는 사람이었다. 자연히 그의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광대했고, 아무리 대단한 고수라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심지어 무림구봉 중의 일인인 유중악을 상대할 때도 복양수는 자신의 승리에 대한 확고한 자신이 있었고, 그것이 자만이 아니었음을 결과로 입증해 보였다.
그런 복양수가 한 사람의 등장에 모든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모습은 낯설기 짝이 없을 뿐 아니라 기이한 느낌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교리와 함께 숨을 죽이고 장내의 광경을 지켜보던 귀호 또한 복양수의 그런 모습은 처음 보는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설마 천하의 음양신마가 지금 긴장하고 있단 말인가?’
눈으로 보고도 쉽게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진산월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장내에 들어섰다. 그의 등장에 처음으로 반응을 보인 사람은 곽산쌍려 여씨 부부였다. 특히 여불회는 죽음을 각오하고 비장한 결의를 다지던 중에 그를 발견하자 처음에는 놀라고 당혹스러워했다가 마침내는 맥이 탁 풀린 듯한 모습이었다. 여불회의 아내인 기아향은 그보다 더해서 다리가 후들거리는지 남편의 팔을 꼭 잡고 나서야 겨우 휘청거리는 몸을 가눌 수 있었다.
여불회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떨리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진 장문인…….”
그 음성 속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진산월은 여불회와 시선이 마주치자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여 대협. 오랜만이오.”
여불회는 무언가 억눌린 사람처럼 얼굴을 붉히고 있다가 간신히 그의 말을 받았다.
“이런 곳에서 진 장문인을 다시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소.”
“여기 오기까지 제법 복잡한 일이 있었소. 여 대협께서도 그동안 적지 않은 일을 겪으신 모양이구려.”
여불회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으나 그것은 누가 보기에도 억지로 지어보이는 고소(苦笑)였다. 그는 무어라고 말을 하려고 입을 열려다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고 말았다.
사실 그와 진산월은 특별한 친분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단지 모산도의 추한산장에서 한 번 만났을 뿐이었다. 게다가 지금까지의 상황을 시시콜콜하게 설명할 수도 없었으니,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진산월은 여불회의 옆에 바짝 붙어 있는 기아향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찬찬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장내에서 그와 인사라도 나누었던 사람은 곽산쌍려 여씨 부부뿐이었고, 얼굴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은 유중악 정도였다. 그 외의 여인들과 장한들은 모두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었고, 오늘 이 자리에 오기 전에는 존재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던 철저한 타인들이었다.
진산월의 시선은 마지막으로 복양수를 향했다. 복양수는 그때까지도 그 자리에 석상처럼 우뚝 선 채 기광이 번뜩이는 눈으로 진산월을 응시하고 있었다.
잠시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바라본 채 묵묵히 서 있었다. 단지 시선을 마주쳤을 뿐인데도 진산월은 좀처럼 경험하지 못했던 무거운 중압감을 느껴야 했다. 그들을 지켜보는 중인들 또한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에 빠져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복양수가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요즘 강호에 좀처럼 보기 드문 절세의 검객이 나타났다고 하더군. 강호의 소문이란 왕왕 과장되는 경우가 많아서 그리 믿지는 않았는데, 얼마 전에 금도무적 양천해마저 그의 손에 꺾였다는 말을 듣고 몹시 놀란 적이 있었지. 양천해의 구절마도는 노부도 얼마쯤 껄끄럽게 생각했던 무공이었으니 말이야. 자네를 보니 문득 그에 대한 소문이 떠오르는군. 자네는 혹시 요즘 강호를 떠들썩하게 한다는 그 신검무적이 아닌가?”
진산월은 그를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제가 바로 진 모입니다, 복양 대협.”
“노부가 누구인지 알고 있나?”
“그렇습니다.”
복양수의 강호 배분은 정말 높아서 진산월의 사조인 천치검 하원지보다도 반 배(輩)가 높았다. 그러니 아무리 진산월이 일파의 존주(尊主)라고 해도 그에게 존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복양수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자네는 진즉부터 이 근처에서 장내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로군.”
진산월은 부인하지 않았다.
“덕분에 좋은 구경을 했습니다.”
복양수는 빙긋 웃었다.
“노부가 누구인지 알면서도 이 자리에 나타난 걸 보니 노부의 앞을 막아설 자신이 있는 게로군.”
“저는 다만 제가 해야 할 일을 하기로 마음먹은 것뿐입니다.”
“해야 할 일이라…….”
복양수의 주름진 시선이 잠시 유중악을 향했다.
“자네와 유중악 사이가 그 정도로 친밀한 줄은 몰랐군.”
“솔직히 유 대협과는 아직 제대로 된 인사 한 번 나눠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를 위해 노부의 앞을 가로막으려 한단 말인가?”
“유 대협과 저 사이의 친분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 중요한가?”
“이미 저는 유 대협을 위해 힘을 쓰기로 결심했고, 유 대협의 안위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해볼 마음을 먹었다는 겁니다.”
복양수는 한동안 물끄러미 진산월을 바라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지. 일단 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친분이니 인연이니 하는 것 따위는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일이지. 자네의 사고방식이 마음에 들었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노부도 유중악이 싫진 않네. 오히려 담대한 배포와 남자다운 기상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서 다른 자리에서 만났다면 기꺼이 술을 나누어 마시는 사이가 되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강호의 일이 어디 자기 마음대로 되던가?”
“복양 대협 같은 분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복양수의 시선이 잠시 허공을 응시했다.
“예전에는 노부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지. 강호에서 내가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없는 일 같은 건 없다고 말이지. 하지만 그건 나의 착각이었네. 자네도 언젠가는 내 말을 이해할 날이 있을 걸세.”
진산월은 지금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또한 자신의 의사와는 전혀 동떨어진 일을 해야만 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었다.
주위의 기대나 한 문파를 이끄는 우두머리라는 위치, 그 외의 크고 작은 이유들이 수시로 그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강호를 살아가는 강호인으로서의 숙명과도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복양수는 뒷짐을 풀고 양손을 자연스레 늘어뜨렸다.
“자네의 의사는 확고한 것 같군. 노부 또한 여기까지 와서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 우리 사이에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을 것 같네.”
진산월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는 복양수에 대한 소문은 오랫동안 들어왔으나 그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오늘 이 자리에 오기 직전만 해도 설마 이 호북성의 외딴 구석에서 강호의 전설과도 같은 우내사마의 한 사람을 만나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단순히 선사의 몇 안 되는 벗인 뇌일봉과 곽자령을 구하려고 나선 일이 예상치 못했던 절대고수와의 싸움으로 번지게 되었으니 그로서는 조금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나 그렇다고 유중악을 앞에 두고 물러설 수는 없었다. 복양수의 말대로 그가 복양수 앞에 나타난 것은 그와의 충돌을 각오했다는 뜻이었으며, 어떠한 일이 있어도 유중악을 두고 물러서지 않겠다는 마음속의 다짐을 나타낸 것이기도 했다.
오히려 복양수와의 결전을 코앞에 둔 지금, 그의 마음은 두려움보다는 묘한 설렘과 흥분으로 들끓고 있었다. 유중악을 일패도지시킨 명실상부한 당금 무림의 최정상고수인 음양신마 복양수의 무공은 과연 어떠한 수준일까? 자신의 검법으로 그의 가공할 음양장력을 상대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그를 넘어선다면 어떠한 일이 벌어질 것인가?
여러 가지 복잡한 상념들이 순식간에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진산월은 자신도 무림인으로서의 강렬한 투쟁심을 가지고 있음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일면식도 없는 유중악을 위해서 복양수의 앞에 나설 결심을 하게 된 순간부터 이미 그는 마음속으로 복양수와의 결전을 간절하게 바라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진산월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용영검이 소리도 없이 검집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장내의 누구도 진산월이 용영검을 검집에서 뽑는 장면을 제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은 마치 용영검이 제멋대로 살아서 움직이는 듯한 착각이 들게 하는 광경이었다.
복양수의 입에서 낮고 굵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어검(馭劍)의 경지가 절정에 다다랐군. 하지만 그것만으로 승부가 판가름 나는 것은 아니지.”
음성이 채 끝나기도 전에 복양수의 신형은 어느새 공간을 압축하여 진산월의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까지와 마찬가지로 사전에 어떤 예고나 기척도 없이 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소리도 없었다. 단지 진산월이 볼 수 있는 것은 활짝 펼쳐진 커다란 손바닥 하나가 자신의 얼굴을 뒤덮을 듯 무서운 기세로 다가오고 있는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그것은 막연히 진산월이 예상하고 있던 복양수의 동작을 훨씬 능가하는 무섭도록 빠르고 과격한 움직임이었다.
복양수가 펼친 것은 음양무궁보 중의 일섬무궁(一閃無窮)에 이은 음양건곤수의 절초인 압전음양(壓電陰陽)으로, 그가 가진 무공들 중에서도 가장 빠르고 파괴적인 수법이었다. 상상도 못한 속도로 다가와 단숨에 상대를 격살하는 이 가공할 살초(殺招)에 그동안 얼마나 많은 고수들이 제대로 손 한 번 써보지 못하고 허무하게 목숨을 잃었는지 모른다.
진산월 또한 순간적으로 아찔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상대의 무공이 높고 낮다는 차원이 아니라 절대적인 빠름과 압도적인 위력을 코앞에서 마주한 인간으로서의 자연적인 반응이었다.
떨림도 잠시, 진산월은 피하지 않고 수중의 용영검을 휘둘러 복양수의 음양수 장공에 정면으로 맞섰다. 용영검이 어떠한 변화도 없이 곧장 복양수의 손바닥 한가운데를 찔러 들어갔다. 그것은 마치 자신을 짓눌러오는 거대한 방벽에 대항하는 미약한 몸부림 같았다.
하나 그 순간, 그토록 무서운 기세로 진산월을 압박해 들어오던 복양수의 손바닥이 한 차례 흔들리더니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뒤이어 세찬 경풍이 한바탕 몰아치며 주위를 휩쓸고 지나갔다.
휘이이……
진산월의 옷자락이 금시라도 찢어질 듯 세차게 펄럭이고, 바람에 휩쓸린 흙먼지가 하늘 위로 솟구쳤다가 사라지는 광경은 인상적이다 못해 경이로워 보였다. 단순히 복양수가 몸을 날려 손을 뻗었다가 거두어들였을 뿐인데 마치 거센 회오리바람이 한바탕 불어닥친 것 같은 강력한 여파가 몰아쳤던 것이다.
그 회오리의 한복판에 서 있는 진산월의 얼굴은 여전히 담담했으나, 검을 내뻗었던 그의 손은 가느다란 떨림을 일으키고 있었다.
조금 전의 상황은 겉으로 드러난 것과는 달리 상당히 위태로웠었다. 하마터면 진산월은 용영검을 손에서 놓칠 뻔했던 것이다. 그만큼 복양수의 손바닥에서 흘러나온 힘은 가공스러웠다.
복양수 또한 처음의 위치에 우뚝 선 채 묵묵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군살이 가득 박인 그의 두툼한 손바닥에는 어떠한 상처나 혈흔도 보이지 않았다. 하나 복양수는 무거운 표정으로 한 차례 손을 힘주어 주먹 쥐었다가 다시 풀었다.
비록 상처는 입지 않았으나 진산월의 용영검에 실린 검기가 너무 날카로워서 하마터면 손바닥을 감싸고 있던 음양대진력의 기운이 뚫릴 뻔했던 것이다. 그가 손을 거두어들이는 동작이 조금만 느렸더라도 용영검에 손바닥을 그대로 꿰뚫려버렸을지도 몰랐다. 지금도 은은한 통증이 손바닥에서 전해져오고 있었다.
단 한 번의 짧은 격돌이었으나 진산월은 진산월대로, 복양수는 복양수대로 상대의 실력이 결코 만만치 않음을 다시 한 번 절감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진산월이 선공(先攻)을 했다. 용영검이 특유의 우윳빛 검광을 뿌리며 복양수의 앞가슴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어떠한 소리도 없이 차갑고 새하얀 검광 수십 개가 맹렬한 기세로 사방을 가득 메우다시피 하며 날아들고 있는 광경은 보는 이를 섬뜩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 검광의 한복판에 서 있는 복양수의 몸은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검광에 가려진 복양수의 양 손이 움직인다 싶은 순간, 검광 속에서 가공할 경력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파파파파팡!
검광과 경력이 마주치며 거대한 북을 치는 듯한 굉음이 연거푸 터져 나왔다. 폭죽처럼 피어오르는 새하얀 검광과 무시무시한 경기가 사방을 온통 폐허로 만들어버릴 듯했다.
순식간에 십여 초가 흘러가고 대여섯 번의 치열한 공방(攻防)이 이루어졌다. 진산월은 처음부터 유운검법의 절초들을 펼쳐냈고, 복양수 또한 자신의 성명절학인 음양건곤수의 초식들로 맞서갔다.
진산월의 유운검법에 대한 경지는 그야말로 극에 달해 있어 그의 용영검이 움직일 때마다 구름 같은 검기가 피어올라 복양수의 전신을 뒤덮어 버릴 것 같았다. 그때마다 복양수는 음양무궁보를 밟으며 검과 검이 움직이는 그 짧은 공간 속을 헤치고 들어가 음양건곤수의 절학들을 뿌려댔다.
그의 두툼한 손이 움직일 때마다 천근 거석도 박살내 버릴 듯한 막강한 경기가 폭풍처럼 일어났다. 진산월은 보법의 움직임을 최대한 자제한 채 유운검법의 검기만으로 복양수의 음양건곤수 경력을 흐트러뜨렸으나, 복양수의 빠르고 현묘한 보법 때문에 좀처럼 그의 몸을 검세 속에 가두어두지 못하고 있었다.
복양수 또한 조금이라도 자신의 동작이 늦어지거나 빈틈을 보이면 진산월의 엄밀한 검세에서 빠져나오기 힘들다는 걸 알고 있기에 끊임없이 몸을 이동시키며 음양대진력의 막강한 기운으로 진산월을 압박해 들어갔다.
한 치의 여유나 방심도 허락지 않는 살벌한 순간이 계속되었다. 다시 이십여 초가 흐르자 두 사람의 이마에서는 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고, 옷의 여기저기가 갈라지거나 찢어져 맨살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그럴수록 싸움에 대한 집중력은 최고조에 이르러, 그들의 두 눈에서 흘러나오는 횃불 같은 신광에서 뜨거운 열기마저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중인들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엄청난 검기와 경기의 폭풍에 망연자실한 표정들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당금 무림에서도 내로라하는 고수들이었고 개중에는 평생을 강호의 도산검림을 헤치며 살아온 자들도 있었지만, 그들 중 누구도 이와 같은 엄청난 싸움을 직접 목격한 사람은 없었다.
그 무시무시한 격돌의 한가운데 자신이 들어가 있다고 상상해 보면 절로 모골이 송연해지고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릴 정도였다. 적어도 인간의 몸으로는 저 가공할 소용돌이 속에서 단 한 순간도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신검(神劍)대 신마(神魔)!
가히 당금 무림의 최정상에 있는 절세고수들의 대결다운 엄청난 싸움이었다.
그들이 눈도 깜박이지 않고 정신없이 구경하는 와중에도 장내의 격전은 더욱 치열해져서 부서진 돌조각의 파편들과 세찬 경기의 다발들이 그들을 위협할 정도가 되었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은 황급히 오 장 밖으로 물러나야만 했다.
여불회는 어느새 바닥에 누워 있던 유중악의 몸을 조심스레 안아든 채 아내인 기아향과 함께 멀찌감치 물러나 있었다. 그러다 무언가에 억눌린 사람처럼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건 정말 너무나 굉장하군. 살아생전에 이런 싸움을 보게 될 줄이야……. 우린 정말 운이 좋은 거야, 그렇지 않나?”
그의 품에 안겨 있던 유중악은 힘없이 웃었다.
“글쎄. 난 잘 보이지도 않아서 무어라 할 말이 없네…….”
그의 음성은 미약하기 그지없어서 여불회는 싸움 구경에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그를 슬쩍 내려 보았다. 유중악의 안색은 여전히 파리했고 입술은 창백해서 혈색조차 거의 보이지 않았으나, 다행히 숨결은 조금 전보다 약간 안정된 것 같았다.
여불회의 얼굴에 안타까운 빛이 떠올랐다.
“정말 아쉽군. 우리는 지금 강호의 전설로 남게 될 순간을 지척에서 보고 있는 것일세. 자네도 꼭 이 광경을 보았어야 했는데…….”
여불회의 아쉬움에 가득 찬 말을 듣자 유중악은 이를 악물고 흐릿한 눈으로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곳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하나 공력이 거의 손실되고 기력이 바닥난 그의 눈으로는 아무리 애를 써보아도 장내의 상황을 정확히 볼 수가 없었다. 그저 눈앞의 저 공간에서 무언가 가공할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간신히 알아차릴 수 있을 뿐이었다.
유중악은 차라리 지그시 눈을 감았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느낄 수는 있었다. 거대한 힘과 힘이 몇 번이고 무섭게 충돌하며 일으키는 격렬한 파동이 공기를 타고 피부에 생생하게 와 닿고 있는 것이다.
한동안 그 공기의 여파를 조용히 음미하고 있던 유중악이 혼잣말처럼 나직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두 사람의 기운은 너무도 판이하여 쉽게 구분이 가는군. 신검무적의 검은 더할 수 없이 예리하면서도 변화가 무쌍하네. 그에 비해 음양신마의 움직임은 한없이 표홀한 듯하면서도 무겁고 장중하군.”
여불회는 그의 그런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그의 어깨를 살며시 두드렸다.
“자네의 말대로 일세. 정확한 건 나도 알 수가 없지만, 한눈에 보기에도 신검무적의 검은 정말 날카롭고, 음양신마의 손은 무섭도록 무겁네. 두 사람 중 누가 우세한지, 이 싸움의 결말이 어떻게 날지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다네.”
여불회의 입에서 감탄인지 탄식인지 모를 음성이 흘러나왔다.
“음양신마야 워낙 오래전부터 강호를 주름잡던 인물이었으니 그렇다 쳐도, 종남파의 저 젊은 장문인의 검법이 저토록 놀라울 줄은 정말 몰랐네. 추한산장에서 보았을 때는 단지 솜씨 좋고 전도가 양양한 수준급의 검객으로만 생각했었는데, 이제 보니 그는 이미 검으로는 최고봉의 경지에 올라 있었군. 신검무적이 당대제일의 검객이라는 강호의 소문은 잘못된 게 아니었어.”
유중악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단순히 여불회의 말에 동의를 하는 것인지, 아니면 눈으로는 제대로 볼 수 없는 절세고수들의 경천동지할 격전을 마음속으로 좀 더 생생하게 그려보고 있는 것인지 분명치 않았다.
여불회 또한 더 이상의 말은 생략한 채 조용히 장내의 격전에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진산월과 복양수의 싸움은 이미 절정에 달해 있는 상태였다. 그들의 온몸은 이미 땀으로 흠뻑 젖어 물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 같았고, 입과 코에서는 연신 거친 숨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의 눈빛은 추호도 흔들리지 않았고, 몸을 움직이는 속도도 전혀 느려지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의 공격은 점점 더 날카로워졌고, 상대의 숨통을 끊기 위해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위험천만한 수법을 서슴지 않고 사용했다.
지금도 진산월은 복양수의 양 손이 휘둘러지는 사이를 억지로 뚫고 들어가며 용영검을 위에서 아래로 세차게 내려 그었다. 그 바람에 왼쪽 어깨가 음양수의 공력에 스쳐 피부가 시커멓게 죽었으나 진산월은 눈썹 하나 찡그리지 않았다.
쫘아악!
마치 수십 겹의 비단폭이 찢어지는 듯한 음향과 함께 시퍼런 검기가 복양수의 몸을 양단할 듯 엄청난 기세로 쏘아져갔다. 유운검법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초식 중 하나인 유운단악이었다.
복양수는 무표정한 얼굴로 앞으로 내뻗었던 양 손을 세차게 흔들었다. 그의 두 손이 어찌나 빠르게 움직이는지 그의 상반신이 온통 손그림자에 가려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음양건곤수중의 음양난교(陰陽亂交)라는 수법이었다.
산악조차 갈라버리는 유운단악의 검기가 철벽처럼 드리워진 음양수의 공력에 가로막혀 살짝 방향이 틀어졌다.
쾅!
검기는 복양수의 바로 옆을 스치고 지나가며 바닥에 커다란 구덩이를 만들어냈다. 실로 무시무시한 위력이 아닐 수 없었다. 하나 그 바람에 진산월의 오른쪽에 약간의 허점이 생겨났다.
복양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전력을 기울여 진산월의 우측으로 바짝 다가서며 음양건곤수 중의 절초들인 음양노호(陰陽怒號), 양봉음위(陽奉陰違), 음유양란(陰幽陽爛)의 초식들을 폭포수처럼 퍼부어댔다. 그 기세가 어찌나 맹렬했던지 진산월은 순간적으로 수백 개의 커다란 바윗덩어리들이 자신을 향해 쏟아져 내리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진산월은 최고의 수비초식인 운무중첩을 펼쳐 복양수의 공세에 맞서갔다. 구름처럼 일어난 검기는 무서운 속도로 복양수가 겹겹이 펼쳐낸 수영(手影)들을 하나둘씩 파훼해 갔다.
파파파파!
수영이 검기에 부딪혀 사그라질 때마다 격렬한 파공음과 함께 세찬 경기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것만 보아도 수영 하나하나에 담긴 힘이 얼마나 가공스러운지 여실히 알 수 있었다.
하나 그 짧은 순간에 복양수가 펼친 공세가 어찌나 맹렬했던지 운무중첩이 거의 끝나가는데도 수영은 아직도 절반 가까이 남아 있었다.
파아아……
마침내 운무중첩의 검기가 수영 하나를 파쇄하며 사라지자 진산월은 어쩔 수 없이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유운경변과 유운축월의 초식들을 전개해냈다. 초식과 초식이 이어지는 순간은 거의 구분할 수도 없이 짧았지만, 노도처럼 밀려들어오는 수영 때문에 새로운 초식을 펼치며 뒤로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수공의 고수를 상대하면서 뒤로 물러선다는 것은 상대에게 전진할 공간을 줄 뿐 아니라, 서로간의 간격을 상대가 임의로 조정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복양수로서는 진산월과의 격전에서 처음으로 잡은 실낱같은 승기라고 할 수 있었다. 복양수의 두 눈이 무섭게 번뜩이며 그의 몸이 유령처럼 허공을 유영하여 진산월의 곁으로 바짝 다가섰다. 그와 함께 활짝 펼쳐진 양 손이 괴이하게 흔들리며 지금까지와는 다른 부드러운 경기가 밀려왔다.
그런데 그 경기에 닿는 순간 용영검의 검기가 급속도로 힘을 잃고 사그라졌다. 동시에 진산월의 낯빛 또한 살짝 가라앉았다.
한없이 부드러워 보이는 그 경력 속에는 실로 형용 못할 가공할 파쇄의 기운이 담겨 있었다. 천신만고 끝에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마침내 복양수가 아껴두었던 음양건곤수의 가장 강력한 수법인 혈화염구주(血花染九州)를 펼친 것이다.
혈화염구주는 음양건곤수의 삼대절초인 음양화명(陰陽和鳴)과 음양생화(陰陽生花), 음화적혈(陰花摘血)을 연환 하는 수법으로, 복양수조차도 만들어 놓고 평생 단 세 번만을 펼쳤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그는 우내사마의 일인이 되었다.
조금 전에 펼쳐진 부드러운 기운이 바로 음양화명이었다. 음기와 양기로 이루어진 음양대진력의 기운을 하나로 합일(合一)하여 가장 정순한 상태로 뿜어낸 것이 바로 음양화명이었다. 겉으로는 산들바람처럼 나약해 보였지만, 금석이라도 가루로 만들어 버리는 가공할 위력이 담긴 절초였다.
그 효과는 확실하여 진산월의 반격이 맥없이 봉쇄되고 말았다.
복양수는 진지한 얼굴로 천천히 왼손을 앞으로 내뻗었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한 송이 꽃과 같은 모양의 강기가 만들어졌다. 이것이 바로 혈화염구주의 두 번째인 음양생화였다.
앙증맞도록 귀여운 그 꽃 한 송이에 얼마나 가공할 위력이 담겨 있을지는 그 초식을 직접 맞게 될 진산월 외에는 누구도 짐작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진산월은 흔들리는 몸을 바로 세우며 용영검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러자 무려 열여섯 개의 검광이 피어올랐다. 복양수가 발출한 꽃송이가 진산월의 코앞으로 닥친 순간, 열여섯 개의 검광이 하나로 합쳐지더니 꽃송이와 정면으로 격돌했다. 마침내 진산월이 유운검법 중의 가장 무서운 초식인 유운검봉을 펼친 것이다. 이번에 그가 발출한 유운검봉은 무려 십육봉이나 되었다.
꽝!
천지가 개벽하는 듯한 엄청난 굉음이 터져 나오며 세찬 경기가 반경 십 장 이내를 폐허로 만들어 버렸다. 그 충돌의 여파가 어찌나 강력했던지 주위에 있던 중인들이 대경실색하여 허겁지겁 다시 다섯 장이나 더 물러나야만 했다.
땅거죽이 송두리째 뒤집히고 거센 흙먼지가 사방을 자욱하게 뒤덮었다. 단순히 검광과 수영이 부딪혔다고는 믿기지 않는 놀라운 광경이었다. 그 격돌의 여파로 거센 폭포수 같았던 검광은 힘을 잃고 사라져갔고, 복양수가 발출한 꽃송이 또한 산산이 부서져 하나의 작은 꽃잎 모양만 남겨 놓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손가락 마디만큼 남아 있는 꽃잎 모양의 강기는 여전히 흙먼지를 뚫고 진산월에게로 날아가고 있었다. 금시라도 바닥에 떨어질 듯 흔들리면서도 계속 자신에게 다가오는 꽃잎을 본 진산월의 표정이 어느 때보다 무겁게 굳어 있었다.
그 꽃잎이 조금 전의 꽃송이보다 더욱 강력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린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 꽃잎이야말로 혈화염구주를 완성하는 최후의 초식인 음화적혈이었던 것이다.
치열한 난전 속에 마침내 피어난 작은 음화(陰花)! 그것이야말로 평생을 무림의 최정상 고수로 군림해온 복양수가 만들어낸 음양건곤수의 최정화였다.
복양수는 자신이 만들어낸 음화가 진산월의 가슴을 피로 적실 것을 추호도 의심치 않았다. 음화의 기운이 이미 진산월의 가슴에 거의 도달해 있기에 피하거나 검으로 막을 수 없는 상황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절체절명의 순간, 진산월의 왼손이 미끄러지듯 가슴 쪽으로 움직이더니 앞으로 쭈욱 내뻗어졌다. 그와 함께 그의 손에서 미증유의 거력이 쏟아져 나왔다.
…………
차라리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너무도 큰 음향에 중인들의 청력이 순간적으로 마비된 것이다. 하나 다음 순간 압축되었던 공기가 폭발하는 듯 공간이 일렁이며 거대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콰아아아앙!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양 손을 내밀고 있던 복양수의 신형이 삼 장이나 뒤로 주르르 밀려났다. 그의 양 손은 실핏줄이 모두 터져 너덜너덜해졌고, 입과 코로 시커먼 핏물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복양수가 두 눈을 부릅뜬 채 피투성이로 변한 양 손을 들어 올리려 할 때, 한 줄기 검광이 빛살처럼 허공을 날아 그의 가슴을 그대로 꿰뚫어 버렸다. 그 검광이 날아드는 속도와 기세는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가공스러운 것이었다.
“흡!”
신음인지 비명인지 모를 짤막한 음성과 함께 복양수의 몸이 석상처럼 그 자리에 굳어졌다.
자욱한 흙먼지가 걷히며 장내의 광경이 서서히 드러났다.
중인들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들처럼 두 눈을 크게 뜬 채 앞으로 조금씩 다가갔다.
복양수는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머리와 어깨가 온통 흙먼지로 뒤덮이고 단정히 묶었던 백발이 반쯤 풀어헤쳐졌으나 그는 여전히 천신(天神)과도 같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의 고개가 천천히 숙여지며 자신의 앞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살짝 베어진 앞가슴에 가는 혈선(血線)이 생겨났다. 그 혈선은 점차로 진해지더니 이내 시뻘건 핏물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복양수는 다시 고개를 들어 전면을 바라보았다. 언제 거두어 들였는지 진산월은 수중의 용영검을 검집에 넣은 채 조용히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백짓장처럼 창백했고 입가에는 한 줄기 혈흔마저 내비치고 있었으나, 눈빛만큼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담담하면서도 맑고 청명했다.
복양수는 한동안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하더니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조금 전의 장공(掌功)도 종남의 무공인가?”
진산월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태인장이라는 것입니다.”
“태인장이라……. 들어 본 기억이 있군. 한때 천하에서 가장 강력한 장공 중 하나라고 했던가? 이미 오래전에 절전(絶傳)된 것으로 알았는데, 용케도 복원했군.”
“운이 좋았습니다.”
“운도 실력이지. 마지막 초식도 훌륭했네.”
진산월은 살짝 고개만 숙인 채 대답하지 않았다.
마지막에 그가 복양수의 가슴을 가른 초식은 낙하구구검의 최절초인 자하천래(紫霞天來)였다. 유운검법을 주로 사용하던 그로서는 모처럼 펼친 수법이었으며, 그 위력은 왜 삼락검이 종남파의 최고검법이라고 불렸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철탑처럼 서 있던 복양수의 신형이 한 차례 흔들렸다. 그럼에도 복양수는 여전히 몸을 우뚝 세운 채 평상시의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조금 전의 기회도 자네가 일부러 유인한 것 같군. 노부는 자네에게 접근한 순간 결정적인 승기를 잡았다고 확신했는데, 사실은 이토록 무서운 노림수를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야. 그렇지 않나?”
진산월은 그 말에도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하나 그것은 일종의 시인이나 마찬가지였다.
조금 전의 처절한 싸움은 두 사람 모두에게 무척이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더구나 진산월의 검세에 빠지지 않기 위해 처음부터 음양무궁보를 펼치며 끊임없이 움직여야 했던 복양수는 체력적으로 더욱 힘이 들었다.
그래서 진산월이 허점을 보인 순간, 평상시의 냉정함을 잃어버리고 건곤일척의 승부를 걸어온 것이다. 접근전에서 절대적인 자신을 가지고 있던 복양수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 결과는 그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복양수의 몸이 세차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무튼 좋은 승부였네. 내가 조금만 더 젊었어도 좀 더 멋진 싸움을 할 수 있었을 텐데……. 머지않아 자네에게 어울리는 상대를 만날 수 있을 걸세.”
그 말을 끝으로 복양수는 눈을 감았다.
쿵!
그의 몸이 쓰러지는 소리가 장내를 뒤흔들었다.
진산월은 싸늘히 식어가는 복양수의 몸을 묵묵히 응시했다. 태인장에 이은 자하천래의 일식으로 진산월은 유운검법에 치중해 왔던 지금까지의 방식에서 진일보했음을 스스로에게 증명해 보였다.
하나 그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태인장의 위력을 확인한 것은 큰 수확이었지만, 복양수의 마지막 말이 유독 마음에 걸렸다.
복양수가 말한 자신에게 어울리는 상대는 과연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복양수 같은 사람에게 마음 내키지 않는 일을 하게끔 만드는 인물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그리고 만일 그 두 사람이 같은 인물이라면 자신이 과연 그를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진산월이 여러 가지 복잡한 상념에 잠겨 있을 때, 누군가가 그에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