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8권 열한기공(熱寒奇功)편 : 10화
제 291장 일석이조(一石二鳥)
이정문은 어렸을 때부터 주변에서 천재로 이름이 높았다. 하나 무공 방면으로는 영 소질이 없었다. 나중에야 이정문은 자신이 특이 체질을 지니고 있어서 내공을 제대로 모을 수 없는 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단전을 만들어도 진기가 잘 모이지 않을 뿐 아니라, 그나마 모았던 기운도 얼마 후면 맥없이 흩어져 버려 일정 수준 이상의 내공을 쌓을 수가 없었다.
그가 사람들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 것은 무공에 대한 욕심을 깨끗이 털어버린 직후였다. 힘이 전부인 강호에서 변변치 않은 무공을 지닌 자신의 존재감을 확실히 할 수 있는 길은 사람의 마음을 잘 알고 그것을 이용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의 예상은 적중하여 그는 강호에 모습을 드러낸 이후 단 한 번도 남에게 무시를 당하거나 자신이 마음먹은 일을 이루지 못한 적이 없었다.
사람의 심리를 바탕으로 한 치밀한 계획을 짜서 그것을 완벽하게 이루어 냈을 때마다 이정문은 자신이 살아 있다는 생생한 느낌을 받고는 했다.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소중하고 짜릿한 기쁨을 주는 순간이었다.
그가 세운 계획 중 가장 공을 들이고 많은 심력을 소모한 것은 사 년 전의 천애치수 단목초 암살 건(件)이었다. 단목초는 서장무림 제일의 지략가로, 서장이 중원을 침공하는 모든 작전을 통솔하는 가장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당시 이정문은 오랜 추적 끝에 단목초가 가장 아끼는 제자인 상관욱을 제거하고 그의 시신을 이용해 단목초를 암살하는 데 성공했다.
그것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운 커다란 업적으로, 그로 인해 야율척은 중원에 대한 본격적인 침공을 몇 년이나 뒤로 미루어야만 했다.
그때 이정문이 세운 계획은 복잡하면서도 정교하기 이를 데 없었으며, 톱니바퀴처럼 단 한 곳도 어긋남이 없이 완벽하게 실행되었다. 하나 그 계획은 한 사람의 희생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이정문은 그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해 나름대로 방법을 강구했으나, 간신히 희생자를 살려냈을 뿐이었다. 희생자는 몸과 마음에 영구히 남을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말았다.
그리고 사 년이 지난 지금, 이정문은 당시 자신의 계획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희생되어야 했던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누구보다 냉정하고 인간의 마음에 대해 훤히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이정문이었으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마음속에 이상한 떨림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지금 두려운 건가, 아니면 설레는 건가?’
이정문은 속으로 반문해 보았다. 둘 모두일 수도 있고, 전혀 다른 무엇일 수도 있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지금의 이 두근거림이 그에게는 결코 익숙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누군가를 만나는 것이 이토록 힘들고 어렵게 느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당시의 일에 대한 후회나 미련 따위는 전혀 없었다. 그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었으며,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불가능에 가까운 계획을 완벽하게 이루어냈을 뿐이다. 그에 대한 성취감과 강렬한 쾌감은 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을 정도였다.
희생자에 대한 배려에도 최선의 공을 들였고, 실제로 그 때문에 그의 목숨을 살려내기도 했다. 그런데도 왜 이토록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지 이정문은 자기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이곳은 청연각 뒤편의 별실에 있는 작은 방이었다.
늦은 오후에 청연각에 도착한 종남파의 고수들은 자신들을 보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로 인해 한 차례 홍역을 치르기는 했으나 별실 하나를 통째로 빌려 여장을 풀었다.
몰려든 사람들이 물러나고 주위가 조용해졌을 때, 진산월이 조용히 별실로 찾아왔다. 동중산으로부터 진산월이 도착했다는 말을 들은 이정문은 그와의 만남을 청했으며, 동중산은 이 방에 그를 남겨 놓고 진산월에게 말을 전하기 위해 나가 버렸다. 그리고는 초조한 기다림의 시간이 시작된 것이다.
육난음이라도 불러 같이 올 것을 그랬다는 후회가 잠깐 들기도 했으나, 이정문은 이내 마음을 가다듬었다.
‘어차피 한 번은 마주쳐야 할 일이다. 내가 뿌린 일이니 내가 거두어야 마땅하다.’
그가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을 때, 소리도 없이 문이 열렸다. 그리고 한 사람이 천천히 안으로 들어왔다.
이정문은 한 차례 심호흡을 하고는 그 사람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뒤통수를 강타당한 듯한 충격을 받아야 했다.
진산월은 그의 앞에 있는 의자로 가서 앉았다. 그리고는 담담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오랜만이오.”
이정문은 그때까지도 마음속의 흔들림을 억제하지 못했는지 눈빛이 흐려져 있었다. 하나 이내 그는 평소의 모습을 회복했다.
이정문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진산월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의 움푹 파인 왼쪽 뺨의 칼자국과 짧은 수염이 나 있는 홀쭉한 뺨, 그리고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깊게 가라앉은 눈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더니 이윽고 알 듯 모를 듯한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소문은 들었지만 진 장문인이 이토록 많이 달라졌을 줄은 미처 몰랐소. 그동안 잘 지냈느냐고 묻는 것이 무의미해 보이는구려.”
진산월은 무심한 눈으로 이정문을 바라보고 있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달라진 것은 없소. 당신이 예전과 그대로인 것처럼 나도 마찬가지요.”
이정문은 뭐라고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짧은 말이었지만 그 속에 담긴 여러 가지 복잡한 의미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진산월의 말은 단순히 인간의 본성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는가? 아니면 그때 자신에게 가지고 있었을 서운함과 원망을 지금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는 말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그때처럼 지금도 자신을 이용하기 위해서 찾아온 것이 아니냐고 묻는 것일까?
어찌 되었건 사 년 만에 다시 만난 진산월은 여전히 상대하기 까다로운 사람이었고, 그에 더해 어떤 위압감과 진한 무게감을 여실히 느낄 수 있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이정문은 그와 짧은 한 마디를 주고받으면서 그런 점을 더욱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사람을 상대하는 데는 누구보다도 자신 있는 이정문이었으나 한동안은 쉽게 말문을 열지 못했다. 진산월 또한 별다른 말이 없으니 장내에는 약간은 어색하고 약간은 경직된 침묵이 감돌았다.
그 침묵을 깬 사람은 의외로 진산월이었다.
“당신이 나를 찾아왔다는 말을 듣고 다소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었소. 당신은 정말 필요한 용무가 아니면 누구를 먼저 찾아올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오. 그러니 이제 말해보시오. 나를 찾아온 이유가 뭐요?”
진산월이 노골적일 정도로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이정문은 오히려 대답하기가 편해졌다.
“진 장문인이 내 성격을 이토록 잘 파악하고 있을 줄은 몰랐소. 확실히 내가 진 장문인을 찾아온 것은 진 장문인에게 꼭 알려야 할 소식이 있기 때문이었소.”
“그것이 뭐요?”
이정문은 마음의 평정을 완전히 되찾았는지 평상시처럼 기지가 번뜩이는 눈을 빛냈다.
“진 장문인은 혹시 쾌의당에 일곱 명의 용왕 말고 두 명의 영주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오?”
진산월은 예전에 손검당으로부터 그에 대해 들은 적이 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소.”
“그럼 말하기 쉽겠구려. 그 두 명의 영주는 각기 천살령주(天殺令主)와 천기령주(天機令主)라고 하는데, 천살령주는 살인청부를 담당하고 천기령주는 정보와 인력관리를 맡고 있소.”
두 명의 영주가 있다는 것만 알 뿐, 그 외의 것은 전혀 모르고 있었기에 이정문의 말이 새롭기는 했으나 그가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는 아직 알 수가 없었다. 이정문의 다음 말이 비로소 그 의문을 해소시켜 주었다.
“그들 중 천살령주가 이쪽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소식이 있소.”
단순히 천살령주가 이쪽으로 온다고 해서 이정문이 진산월을 찾아왔을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당신은 천살령주가 나를 노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요?”
이정문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여러 가지 정황을 종합해 볼 때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보고 있소.”
“여러 가지 정황이란 어떤 걸 말하는 거요?”
“진 장문인과 쾌의당과의 관계, 진 장문인과 종남파의 현실, 그리고 당금 강호의 정세와 앞으로의 판국에 대한 예상……. 그 외 몇 가지 상황들을 복합적으로 검토해 보고 내린 결론이오.”
진산월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물었다.
“천살령주가 내게 위협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요?”
“진 장문인의 무공에 대해서는 나도 어느 정도 알고 있소. 순수한 무공만으로 진 장문인을 위태롭게 할 수 있는 자는 거의 없을 거요. 하지만 강호는 워낙 넓고 다채로워서, 무공만으로 모든 승부가 결정되는 것은 아니오.”
이정문은 진산월이 천살령주를 가볍게 볼 것이 염려되었는지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진 장문인에 대해 누구보다도 상세하게 파악하고 있을 쾌의당에서 확신도 없이 천살령주를 보내지는 않았을 거요.”
진산월도 자신이 절대무적의 고수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무공에 관해서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것은 그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나 그렇다고 무림구봉 중의 도봉을 꺾고 우내사마 중의 한 사람마저 물리친 자신을 상대할 만한 고수가 흔하다고도 생각할 수 없었다.
“천살령주는 어떤 인물이오?”
“나도 그의 정확한 신분이나 정체는 모르오. 아마 쾌의당에서도 몇몇 용왕들과 당주를 제외하고는 알지 못할 거요. 다만 한 가지 들은 말이 있는데…….”
이정문의 음성이 평소의 그답지 않게 심각해졌다.
“천살령주는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누구라도 죽일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하오. 설사 그 상대가 무공의 신(神)이라고 할지라도 말이오.”
진산월의 마음도 그에 따라 무거워졌다.
이정문은 이런 일에 허언을 하거나 과장을 내뱉는 위인이 아니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치밀하고 섬세한 성격의 소유자이며, 일에 관한 한 비정할 정도로 철두철미한 인물이었다.
천살령주의 능력이 이정문이 말한 대로 절대적인 것이라면 진산월로서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구라도 죽일 수 있는 능력이란 과연 어떤 것이란 말인가?
“천살령주가 그토록 무서운 인물이라면 왜 쾌의당에서 진작 그를 보내지 않았소?”
“굳이 그가 나오지 않아도 충분히 사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을 거요. 그리고 천살령주는 살인 청부를 받아야만 움직일 수 있다고 들었소.”
“그 말은 누군가가 나에 대한 살인청부를 했다는 뜻이오?”
“나는 그렇게 보고 있소. 진 장문인에 대한 살인 청부가 있고, 그걸 완수하기 위해서 천살령주가 움직인 것이라고. 그래서 진 장문인에게 오지 않을 수 없었소.”
자신에 대한 살인청부가 있다는 말은 그다지 충격적이거나 당혹스럽지 않았다. 무림에서 그의 죽음을 원하는 자는 적지 않을 것이며, 그들 중 어느 쪽에서든 살인청부를 했다고 해서 놀랄 일도 아니었다.
“당신이 나를 그토록 생각하는 줄은 몰랐소.”
“진 장문인은 당금 강호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앞으로 서장 무림과의 대결에서도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될 사람이오. 그러니 나로서는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소.”
“서장 무림이라. 당신은 내가 그들과의 대결에 나설 것이라고 생각하오?”
이정문은 진지한 표정으로 진산월을 바라보았다.
“그건 생각이 아니라 확신이오. 진 장문인은 그들과의 대결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게 될 거요. 진 장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말이오.”
진산월은 굳이 그의 말을 부인하지 않았다. 이미 그들과는 여러 차례 크고 작은 싸움을 벌였으며, 둘 중 한쪽이 완전히 무너질 때까지는 그 싸움이 끝나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쾌의당과 서장 무림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거요?”
“사안에 따라 서로 협력하기도 하고 때로는 경쟁하거나 반목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소. 하나 진 장문인에 관한 일이라면 그들이 서로 손을 맞잡고 있다고 보는 게 좋을 거요.”
진산월은 한동안 깊은 상념에 잠겨 있었다.
이번 무당산의 회합은 종남파의 명예 회복을 위한 실로 중대한 자리였다. 이미 무대도 갖추어지고 분위기도 무르익고 있었다. 만에 하나 이번 기회를 놓친다면 그야말로 천추의 한(恨)이 될 것이다.
진산월로서는 그것을 위협하는 어떠한 변수도 원하지 않았다. 그런데 상황은 그의 기대대로 흘러가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산 넘어 산이라고 종남파의 앞에는 왜 이토록 험난한 일만 펼쳐지는지 한숨이 흘러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 진산월은 이내 마음을 가다듬었다.
‘어차피 가야 할 길은 분명하게 정해져 있다. 그러니 그 앞에 어떠한 함정과 어려움이 놓여 있을지라도 뚫고 지나가는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진산월은 번뜩이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한 후 이내 이정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당신은 돌 하나로 두 마리 새를 사냥하는 걸 좋아하지. 천살령주가 나를 위협한다는 건 비록 중요한 안건이기는 하지만 그걸 알려주기 위해 당신이 직접 나를 찾아올 필요는 없었소. 이제 당신이 왜 나를 찾아왔는지 그 진짜 목적을 밝히는 게 어떻소?”
이정문은 한 방 먹은 사람처럼 입을 살짝 벌리고 있더니 이내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정말 진 장문인은 상대하기 힘든 사람이구려. 내 속을 이미 훤히 꿰뚫어보고 있으니 진 장문인과 이야기하다 보면 가끔씩 섬뜩해질 때가 있소.”
“당신이 내 입장이 되어도 마찬가지일 거요.”
이정문은 고개를 흔들었다.
“후우.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무엇을 숨기겠소? 진 장문인에게 한 가지 도움을 청할 일이 있소.”
“또 누군가를 살해하는 일이라면 사양하겠소.”
“그게 아니오. 이 일은 진 장문인에게도 큰 도움이 될 거요. 서장의 야율척에게 세 명의 제자가 있다는 건 알고 있을 거요. 그중 둘째 제자가 이 근처에 와 있소. 그를 잡는 걸 도와주시오.”
진산월이 이정문과 헤어진 것은 제법 어둠이 깊어진 늦은 밤이었다.
이정문과의 대화는 여러모로 신경을 쓸 일이 많았고, 때문에 진산월은 적지 않은 피곤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다 보니 정신적인 피로감이 상당했던 것이다.
방을 나온 진산월이 문득 밤하늘을 올려다보니 한쪽 구석에 일점편월(一點片月)이 박혀 있었다. 그래서인지 주위는 더욱 어두워 보였고, 흐릿한 달빛 아래 내비치는 세상은 왠지 음울하고 쓸쓸하게 느껴졌다.
진산월은 한동안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조각달을 올려보았다. 훅 불면 꺼져버릴 듯한 조각달은 한없이 위태로운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유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이대로 사라져 어딘가로 훌훌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진산월이 말 못할 감상에 빠져 멍하니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그윽한 향기와 함께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돌아보지 않아도 진산월은 다가온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사라옥정향의 향기는 오직 한 사람에게서만 맡을 수 있으니까.
“피곤해 보여요.”
그녀의 음성은 향기만큼이나 은은하고 부드러웠다. 진산월은 말없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희미한 월광 아래 드러난 그녀의 얼굴은 짙은 음영(陰影)이 드리워져 있어 마치 현실이 아닌 환상 속의 여인을 보는 것 같았다. 손으로 잡으려고 만지면 금시라도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 기분에 진산월은 그녀를 향해 내밀었던 손을 자신도 모르게 거두어들였다.
“왜 아직까지 자지 않고?”
“사형이 오지 않았는데 어떻게 잠이 들 수 있겠어요?”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임영옥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산월은 그녀를 보며 조용히 웃었다.
“그래도 나를 신경 써 주는 사람은 사매밖에 없는 것 같군.”
임영옥은 진산월의 옆에 와서 그가 보고 있던 밤하늘을 올려보았다. 진산월도 그녀를 따라 고개를 움직였다. 한동안 두 남녀는 나란히 선 채 작은 편월과 검은 하늘, 그리고 그 사이로 흘러가는 흐릿한 구름을 바라보았다.
조용한 밤이었고, 공기는 따스했으며, 분위기는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러웠다.
진산월은 하늘을 올려본 채 혼잣말처럼 나직한 음성으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동중산에게 들으니 사매가 방산동을 물리치고 전흠을 구했다고 하더군. 몸 상태는 괜찮은 거야?”
“괜찮아요.”
진산월은 오른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다. 그녀는 멈칫거리며 무심결에 손을 뒤로 빼려 했다. 진산월은 담담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손을 줘, 사매.”
그녀는 여전히 손을 뺀 자세로 있었다. 진산월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의 두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의 눈에 비친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고, 표현하기 힘든 우아함과 고적함을 담고 있었다. 그녀의 긴 속눈썹이 가늘게 떨리며 자신을 바라보았을 때, 진산월은 그녀의 눈동자에서 말로 표현 못할 진한 슬픔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순간 진산월은 이상한 격동에 사로잡혀 이대로 몸을 돌려 어딘가로 떠나고 싶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게 될 말을 전혀 들을 수 없는 아주 먼 곳으로 가고 싶었다.
갈증과도 같은 순간이 지나자 진산월은 다시 손을 내밀었고, 이번에는 그녀도 피하지 않았다.
그녀의 고운 손을 움켜잡은 진산월의 눈빛이 한층 더 침침하게 가라앉았다.
“손이 너무 차군. 이래서 전에도 내 손을 피했던 건가?”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진산월의 표정은 왠지 음울해 보였다.
“체내에 음기가 가득해서 살아 있는 사람 같지가 않아. 일전에 정 소저에게 듣기로는 사매가 구궁보의 천양신공을 익혀서 괜찮아졌다고 했는데, 그녀가 내게 거짓말을 했던 건가?”
임영옥은 고개를 저었다.
“제 몸은 괜찮아요. 무공만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녀의 마지막 말은 너무 나직해서 진산월도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조금 전부터 사매의 몸에서 음기가 느껴진 거로군. 이번에 전흠을 구하면서 무리를 한 건가?”
“무리하지 않았어요.”
“그럼 무공을 사용하기만 하면 이런 몸이 된단 말이야?”
임영옥의 고개가 거의 알아차리기 힘들 만큼 살짝 끄덕여졌다.
진산월은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억지로 눌러 삼키며 무거운 음성으로 물었다.
“왜 이렇게 된 거지? 천양신공으로도 구음향의 음기를 없애지 못한 건가?”
“그건 아니에요. 구음향의 음기는 완전하게 치료가 되었어요.”
“그런데 왜?”
“다만 제가 태음신맥이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 거예요.”
“천양신공이 오히려 태음신맥의 음맥을 자극한 건가?”
“비슷해요. 처음 천양신공을 배울 때는 괜찮았는데, 천양신공이 일정 수준에 이르자 체내의 구대음맥(九大陰脈)이 요동을 치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이내 전신이 모두 음기로 가득 차게 되었어요.”
진산월은 묵묵히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 하나 그녀의 손을 움켜잡은 그의 오른손은 자신도 모르게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천양신공의 운행을 중지해 보았지만 일단 발동된 음기는 없어지지 않았어요. 오히려 음기가 점점 강해져서 천양신공을 계속 익히지 않을 수 없게 되었어요. 천양신공의 양강진기만이 그나마 몸속에 솟구치는 음기를 억제할 수 있기 때문이죠.”
천양신공 때문에 격발된 음기를 다스리기 위해 다시 천양신공을 익히고, 그 경지가 높아질수록 음기 또한 그에 맞서 강해지고, 그 음기를 억제하기 위해 다시 또 천양신공을 익혀야 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대체 왜 이런 일이 생긴 거지? 내가 알기로는 천양신공을 익히면 태음신맥의 음기를 다스려 음맥과 양맥을 서로 통하게 할 수 있다고 했는데…….”
“모용 공자도 태음신맥의 음기가 발동되기 전이었다면 천양신공으로 충분히 태음신맥의 음기를 제어할 수 있었을 거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일단 태음신맥의 음기가 제멋대로 날뛰고 있는 상태에서 천양신공을 익히게 되니 태음신맥의 음기가 천양신공의 양기를 자신을 침입한 적으로 인식해서 끝없이 공격하기 때문이라고 했어요.”
“그는 그 정도도 예상하지 못했단 말인가?”
“구궁보에서도 태음신맥을 타고난 사람이 없어서 일이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모용 공자는 물론이고 구궁보의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어요. 그들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지금은 천양신공과 태음신맥이 서로 상대를 끊임없이 자극하고 있는 상황이라 도저히 어느 한쪽을 멈출 수가 없다고 하더군요.”
진산월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멈추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천양신공이 강해지면 치미는 양기 때문에 심맥이 말라버리게 되고, 반대로 태음신맥이 강해지면 음기로 맥이 모두 굳어지게 된다고 했어요.”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앞에 비참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하는 그녀의 표정은 너무도 담담해서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오히려 듣고 있는 진산월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진산월은 무언가에 억눌린 사람처럼 힘겨운 음성으로 물었다.
“다른 방법은……?”
“만일 천양신공이 절정에 이르면 태음신맥을 완벽하게 제어하는 게 가능할지도 몰라요. 아니면 태음신맥의 음기를 다스릴 음한기공을 같이 익히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겠지요.”
천양신공은 검성 모용단죽조차도 중년에 이르도록 대성에 이르지 못했다고 알려진 천하무쌍의 절학이었다. 임영옥이 아무리 무공의 천재라고 해도 그런 일이 쉽게 이루어질 것 같지 않았다.
더구나 천양신공 같은 양강무공을 익히고 있는 상태에서 또 다른 음한무공을 익히는 게 가능할지도 의심스러웠다. 게다가 태음신맥 정도의 음기를 다스릴 수 있는 음한기공을 대체 어디에서 구한단 말인가?
그래도 한 가닥 가능성이 있다는 말에 진산월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아무리 오랜 시일이 걸려도 이룰 수만 있다면 희망은 존재하는 것이다.
평상시의 진산월이었다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그녀의 막연한 말이 단지 그녀의 바람일 뿐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을지도 몰랐다. 하나 그녀의 말이 준 충격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던 그로서는 평소의 냉정함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아니면, 그렇게라도 그녀의 회생에 대한 희망을 이어가고 싶었던 것일까?
두 남녀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어찌 된 일인지 날은 더욱 어두워진 것 같았고, 조금 전의 따스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무언지 모를 스산함에 그녀의 몸이 가늘게 떨릴 때, 하나의 손이 다가와 그녀를 꼬옥 끌어안았다. 그녀는 말없이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의 몸은 얼음장처럼 차가웠으나, 진산월은 그녀를 품에 안은 채 삼단 같은 머릿결을 쓰다듬었다.
“무언가 길이 있을 거야. 우리 함께 그 길을 찾아보자.”
그녀는 아무 말이 없었으나, 진산월은 가슴의 떨림으로 그녀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한 가지만 약속해줘.”
그녀는 살짝 고개를 쳐들었다.
진산월은 자신을 올려보는 그녀의 고운 얼굴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소곤거렸다.
“앞으로는 무슨 일이 생기면 나에게 가장 먼저 말해 줘. 사매에 대한 이야기를 다른 사람을 통해서 듣고 싶지 않아.”
그녀의 짙은 음영이 드리워진 속눈썹에 미묘한 떨림이 일어났다. 그녀는 창백한 입술을 살짝 열어 뜨거운 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할게요.”
“태음신맥을 다스릴 만한 음한기공은 내가 꼭 찾아줄게.”
그렇게 말하는 진산월의 뇌리에는 남해 청조각이 떠오르고 있었다. 자신을 치료하고 성락중의 현청건곤강기를 완성시킨 남해 청조각의 신공이라면 그녀의 태음신맥을 다스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임영옥은 믿음직한 눈으로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알았어요.”
“무공만 사용하지 않으면 움직이는 데는 지장이 없는 건가?”
“얼마 전에 천양신공이 오성(五成)의 경지를 지난 후에는 전력을 기울이지만 않으면 무공을 펼쳐도 크게 문제는 없어요.”
진산월은 짐짓 눈을 크게 떴다.
“벌써 오성이야? 그렇다면 절정에 이르는 것도 몇 년 걸리지 않겠군.”
오성에 이르는 것과 대성에 도달하는 것이 전혀 차원이 다른 문제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진산월이 이렇게 말하자 임영옥은 살짝 미소 지었다.
“거짓말쟁이. 하지만 사형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도록 할게요.”
그녀의 속삭이는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워서 진산월은 절로 가슴이 뜨거워졌다.
“사매…….”
진산월의 얼굴이 천천히 다가오자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사르르 눈을 감았다. 주위는 여전히 어두웠으나 두 남녀는 더 이상 스산함을 느끼지 않았다.
막 그녀의 창백한 입술을 향하던 진산월의 입술이 멈추어지며, 그녀를 안은 상태로 몸이 빠르게 회전했다.
소리도 없었다. 무언가 희끗한 것이 조금 전 그가 그녀를 안고 서 있던 자리에 날아와 틀어박혔다.
진산월은 바닥에 거의 반쯤 박혀 있는 그 물건이 하나의 평범한 나뭇가지임을 알아보고 표정이 무겁게 굳어졌다.
볼품없는 나뭇가지를 자신도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던진다는 것은 놀랍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그 나뭇가지가 바닥을 뚫고 깊이 박힐 정도의 막강한 기세를 담고 있는데도 전혀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는 것은 놀라움을 넘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대체 누가 이와 같은 가공할 암기술을 발휘할 수 있단 말인가?
어느새 떨어진 진산월과 임영옥이 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별실의 마당 한쪽에 있는 나무 그늘 속에서 한 사람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이마에 백건을 쓰고 짙은 청삼을 입은 노인이었다.
<29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