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8권 열한기공(熱寒奇功)편 : 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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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28권 열한기공(熱寒奇功)편 : 2화


제 283 장 진상파악(眞相把握)

“정말 대단한 싸움이었소. 오늘 비로소 하늘 밖에 하늘이 있다는 말이 어떤 것인지 실감할 수 있었소.”

다가온 사람은 유중악을 안고 있는 여불회였다. 여불회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었으며, 진심으로 탄복한 듯한 표정이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진 장문인은 이제 강호의 전설이 될 거요. 아니, 이미 전설은 시작되었다고 봐야겠구려.”

여불회가 흥분과 격동이 역력한 얼굴로 두서없이 떠들자 그의 옆에 조용히 서 있던 기아향이 팔로 슬쩍 그를 건드려 입을 다물게 한 후 진산월을 향해 다소곳하게 인사를 했다.

“진 장문인 덕분에 우리 부부는 질긴 목숨을 이어나갈 수 있게 되었어요.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진산월은 살짝 고개를 숙여 답례를 하고는 이내 여불회의 품에 안겨 있는 유중악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유 대협은 어떠시오?”

그 말을 들었는지 그때까지도 눈을 감고 있던 유중악이 천천히 눈을 떴다. 흐릿했던 안광이 조금 밝아지며 눈동자에 또렷한 상이 맺히기 시작했다.

“아직은 견딜 만하오.”

유중악의 음성은 여전히 미약했으나, 진산월은 그의 호흡이 조금 전보다는 한결 안정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천만다행이오. 늦게나마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소. 종남의 진산월이라 하오.”

진산월이 포권을 하자 유중악의 파리한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몸이 이런 상태라서 제대로 인사를 드릴 수도 없구려. 봉강의 유중악이오.”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니 유 대협은 마음 쓰실 필요 없소. 그보다 저간의 사정을 들을 수 있겠소?”

“나야말로 진 장문인께서 어떻게 이곳에 오시게 되었는지 그 연유가 몹시도 궁금하오.”

솔직히 진산월은 당장에라도 선사의 친우인 곽자령의 행방과 안위부터 묻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의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는 유중악을 다그칠 수 없어서 간략하게 자신이 이곳에 오게 된 경위를 말해 주었다.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유중악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진 장문인이 제갈세가를 방문한 게 우리로서는 천운(天運)이었구려. 그런데 혹시 이곳까지 오면서 내 일행을 만나지 않으셨소? 특히 태행독객 무종휘와 진산수 뇌 대협을 말이오.”

진산월은 유중악이 충격을 받을 것을 저어하여 잠시 망설였으나 어차피 그가 알게 될 일인지라 자신이 그들 두 사람을 발견한 것을 말해주었다. 무종휘의 죽음을 전해들은 유중악의 낯빛은 보는 사람이 안타까움을 느낄 만큼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두 사람의 상세가 너무 심해서 부득이 그들을 남겨두고 떠나야 했는데, 결국 그렇게 되었군. 나 때문에 종휘가 한창의 나이에 비명횡사하고 말았으니 이 죄스러움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나직한 유중악의 독백에 담긴 비통함이 너무도 절절하여 한쪽에 있던 기아향이 몰래 눈시울을 적셨다. 한동안 공허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던 유중악이 다시 진산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뇌 대협이라도 살아계시다니 천만다행한 일이오. 다른 사람의 행방은 혹시 알지 못하시오?”

유중악이 오히려 자신에게 곽자령의 행방을 묻자 진산월은 속으로 한숨을 흘렸다. 불길한 예측대로 유중악과 곽자령은 뿔뿔이 헤어져 상대의 안위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진산월로서는 다분히 기대감이 섞인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유 대협 일행의 행적을 쫓다가 흔적이 두 군데로 갈라져서 다른 한쪽은 내 사제인 낙일방이 맡게 되었소. 아마 특별한 일이 없다면 그가 다른 분들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오.”

유중악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낙일방이라면 옥면신권이란 별호로 요즘 혁혁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종남파의 젊은 고수 아니오? 옥면신권이라면 그들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거요.”

“다만 그들이 너무 늦게 만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오.”

“그들은 옥면신권을 만날 때까지 버텨낼 수 있을 거요.”

유중악은 자신의 친우들에 대해 나름대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가장 무서운 복양수와 흑백상문신이 모두 자신을 뒤쫓고 있는 이상, 강북녹림맹의 추적에 그들이 맥없이 당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만 걱정스러운 것은 그들 모두 적지 않은 부상을 입은 상태여서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이었으나, 지금으로서는 그저 그들의 높은 무공과 오랜 강호 경험으로 다져진 무인으로서의 강인함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진산월로서도 모쪼록 유중악의 기대가 이루어지길 바라고 있었다. 만에 하나 곽자령이 변(變)을 당하게 된다면 이제까지의 모든 수고가 헛고생이 될 뿐 아니라 돌아가신 선사를 뵐 면목이 없을 것이다.

유중악이 다시 무어라고 입을 열려할 때 진산월은 차분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더 이상의 자세한 사정은 나중에 나누도록 합시다. 우선은 장내를 정리하는 게 순서일 듯하오.”

진산월의 시선이 한쪽에 우두커니 서 있는 흑백상문신에게로 향했다.

그들은 복양수의 죽음이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지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그 자리에 석상처럼 미동도 않고 서 있었다. 그러다 진산월이 자신들을 쳐다보자 서로 시선을 주고받더니 그중 백포인 한 사람이 진산월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진산월을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나는 흑백상문신의 수좌(首座)격인 단우목(段宇穆)이라 하오. 진 장문인께 한 가지 부탁 말씀을 드리려 하오.”

그의 태도가 예상보다 정중했기에 진산월도 그를 강호의 고수로서 대접해 주었다.

“말씀하시오.”

“존주(尊主)의 시신을 그분이 평소에 머무르시던 거처로 모셔가고 싶소. 진 장문인께서 양해해 주셨으면 하오.”

진산월이 비록 복양수와 치열한 격전을 벌여 그를 쓰러뜨렸으나, 흑백상문신과는 아무런 은원관계도 없는 사이였다. 만에 하나 그들이 자신을 공격한다면 어쩔 수 없이 손을 썼을 것이나, 그들이 먼저 예를 갖추어 복양수의 시신을 거두어 물러가려는 의사를 밝히니 진산월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복양 대협의 영면을 위한 일이라면 기꺼이 그렇게 하시오.”

“진 장문인의 배려에 감사드리오.”

여덟 명의 흑백상문신은 차례로 진산월에게 인사를 하고는 곧 복양수의 시신을 조심스레 들고 장내를 떠나갔다. 그들 중 누구도 진산월에게 원한 맺힌 시선을 주거나 분기를 터뜨리는 사람은 없었다.

괴이할 정도로 조용하고 차분한 움직임으로 장내를 떠나는 그들의 뒷모습은 중인들의 가슴에 묘한 적막감을 불러일으켰다. 강호의 전설 하나가 사라지는 광경을 직접 눈으로 보는 기분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복잡 미묘한 것이었다.

흑백상문신이 떠난 후 장내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유중악과 곽산쌍려, 능자하, 그리고 경요궁의 무리들뿐이었다. 진산월의 시선은 그들 중 경요궁의 고수들에게로 향했다.

희인몽은 네 명의 백의인들에게 에워싸여 바닥에 정좌한 채 운공조식을 하고 있었고, 단후명은 무언가 깊은 상념에 잠겨 있다가 진산월의 시선을 느꼈는지 그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대 종남파의 장문인인 신검무적을 뵙니다. 저는 경요궁에서 총관을 맡고 있는 단후명이라 합니다. 이번에 큰 은혜를 입게 된 것에 감사드립니다.”

단후명이 종담을 대할 때와는 달리 정중하게 인사를 하자 진산월도 그에 답례했다.

“진산월이오. 단 총관을 만나게 되어 반갑소. 좌 부인의 상세는 어떠시오?”

“음양수에 일장(一掌)을 맞아 기혈이 억류되고 심맥이 크게 흔들렸으나, 때마침 몸을 보호하는 호신의(護身衣)를 입고 계셔서 진기를 운용하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으신 듯합니다.”

이번 여정이 험악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희인몽이 움직이기 번거롭고 거추장스러운 궁장을 입고 있어서 다소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궁장 안에 특수한 갑옷 같은 것을 착용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겉으로는 별로 표시가 나지 않고 몸매의 굴곡마저 드러나는 것으로 보아 경요궁의 보물 중 하나로 알려진 옥루잠의(玉樓蠶衣)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옥루잠의는 무게가 가벼울 뿐 아니라 수화불침(水火不侵)에 도검은 물론이고 어지간한 강기의 침투마저 막는 효과가 있는 기물 중의 기물이었다.

“다행한 일이오. 음양신마의 음양수에 격중 되면 공력을 제대로 끌어올릴 수 없다고 해서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었소.”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산월은 단후명을 가만히 응시하더니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단 총관은 비류문의 제자라고 들었소.”

“그렇습니다.”

“조금 전에 얼핏 보니 과연 소문으로 듣던 대로 무척이나 영활하면서도 날카로운 무공이었소. 특히 장법과 권법의 변화가 절묘하던데, 그 무공들의 이름을 알 수 있겠소?”

단후명의 몸이 잠시 움찔거렸다.

“본 문의 무공을 그렇게 평가해 주시니 고맙긴 하지만, 진 장문인 같은 분께 내세울 만한 것은 못 됩니다.”

“아니오. 장법과 보법의 신묘함이 상당히 뛰어나고, 특히 단 총관이 후반부에 사용한 권법은 한없는 표홀함 속에 번뜩이는 예리함을 담고 있어서 무척 흥미로웠소.”

이번에는 단후명이 진산월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본 문의 장법은 청류장이라 하고, 보법은 표류보입니다. 그리고 제가 사용한 권법은 명류권이라 합니다.”

“청류와 명류라……. 좋은 이름이오.”

“감사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입을 다물었다. 진산월도 더 이상은 단후명의 무공에 대해 묻지 않았고, 단후명도 진산월이 왜 자신의 무공에 관심을 가지는지에 대해 의아함을 표시하지 않았다.

그들이 갑자기 대화를 중단하자 옆에 있던 여불회가 다소 이상한 눈으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여불회는 단후명이 진산월에게 필요 이상으로 공손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조금은 기이하게 생각되었던 참이었다.

무림에 알려진 단후명의 성격은 매사에 빈틈이 없으면서도 칼날같이 날카롭고 잔인한 면이 있어서 상대하기 까다롭다는 것이었다. 오죽했으면 색명수사라는 별호가 붙었겠는가?

그런데 진산월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정중하면서도 예의를 잃지 않는 것이어서 강호에 알려진 색명수사답지 않았다. 진산월 덕분에 목숨을 구원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특별히 이상할 것도 없으나, 여불회로서는 다소 신기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때마침 희인몽이 운공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단후명이 황급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어떠십니까?”

희인몽의 안색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음양신마의 음양수는 정말 무섭군요. 살짝 비껴 맞았음에도 내 금강선정신공과 옥루잠의를 뚫고 들어와 심맥에 침투했어요. 세 번이나 대주천을 했는데도 음양수의 기운을 완벽히 몰아낼 수가 없었어요. 아무래도 며칠 정양(靜養)을 해야 겨우 완치가 될 것 같군요.”

단후명은 유중악에 비하면 그나마 다행한 일이라고 말할 뻔한 것을 간신히 억눌렀다. 대신에 그는 그녀에게 가마에 오를 것을 권했다.

“그렇다면 늦기 전에 이만 돌아가도록 하지요. 한시라도 빨리 음양수의 기운을 완전히 몰아내야 비로소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희인몽이 슬쩍 고개를 돌려 유중악 쪽을 바라보았다. 유중악은 여전히 여불회의 품에 안겨 있었는데, 무림제일의 기남아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초췌한 모습이었다.

유중악을 응시하는 희인몽의 봉목에 잠시 아련한 빛이 감돌았다. 좌일군과 혼인을 한 후 그에 대한 마음은 완전히 접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가 위급하다는 소문을 듣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궁을 떠나 이곳까지 달려오고야 말았다.

대궁주인 육천기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을 볼 낯도 서지 않는 일이었다. 그녀 자신도 지금 자신의 심정을 제대로 표현할 수가 없을 만큼 복잡한 상태였다.

이제 막상 유중악을 다시 보게 되었으나 그녀는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때 우연인지 지금까지 한쪽에 말없이 서 있던 능자하가 유중악의 곁으로 조용히 다가섰다. 그 광경을 보는 희인몽의 눈빛이 몇 차례나 흔들리고 있었다.

“후우……. 정리(情理)란 참으로 요물과도 같은 것이구나.”

허공을 향해 뜻 모를 한숨을 내쉬던 그녀는 쓸쓸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그녀의 시선에 진산월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녀는 그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 보니 진 장문인께 제대로 인사도 못 드렸군요. 나는 경요궁의 희인몽이라고 해요.”

“종남파의 진산월이오.”

“오늘 진 장문인께 입은 은혜는 잊지 않겠어요. 몸이 불편하여 이대로 떠나는 것을 용서해주세요.”

“은혜라니 당치 않소. 그보다 떠나시기 전에 좌 부인께 한 가지 여쭐 것이 있소.”

“무엇이든 말씀하세요. 내가 알고 있는 것이라면 기꺼이 말씀드리겠어요.”

진산월은 그녀를 향해 전음으로 한 가지를 물었다.

줄곧 무겁게 굳어 있던 그녀의 눈이 크게 뜨여지며 놀람에 찬 눈빛이 흘러나왔다.

“그걸 어찌…….”

그녀는 경악 어린 눈으로 진산월을 쳐다본 채 무어라고 소리치려 했다. 그때 진산월의 조용한 음성이 그녀의 귓전에 들려왔다.

“그런지 아닌지만 말씀해 주시면 되오.”

희인몽의 안색이 몇 차례나 변했다. 그동안에도 진산월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녀가 마음의 안정을 되찾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그녀는 겨우 흔들리는 마음을 가라앉혔는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진 장문인께서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진 장문인의 말씀이 옳아요.”

진산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사실대로 말씀해주신 것에 감사드리오.”

희인몽은 한동안 기이한 눈으로 진산월을 응시하더니 이윽고 평상시의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진 장문인이 그걸 물은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하나밖에는 없는데, 그 이상은 나로서도 감히 상상할 수 없군요. 내가 공연한 말을 해서 평지풍파를 일으키게 된 건 아닐까 걱정이 됩니다.”

“진실이라면 언젠가는 알려지게 되지 않겠소? 좌 부인께서 걱정하시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요.”

희인몽은 복잡한 빛이 담긴 얼굴로 씁쓸하게 웃었다.

“그렇게 되길 바라겠어요. 나는 이만 돌아가야겠습니다.”

“하루속히 쾌유하시길 바라겠소.”

희인몽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는 가마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올 때와 마찬가지로 단후명과 네 명의 백의인과 함께 홀연히 떠나버렸다.

그동안에도 의식적인지 그녀는 단 한 번도 유중악에게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유중악 또한 그녀 쪽으로는 시선을 주지 않았다.

얼핏 한없이 매정해 보였으나, 그것은 지극히 유중악다운 모습이었다. 맺어지지 못할 인연에 미련을 두지 않으며, 떠나는 사람을 잡지 않는 것은 유중악의 오랜 신념이자 행동철학이었다.

그녀와 그는 이미 너무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이제 와서 서로 마주 보며 대화를 나눈들 감정의 오랜 잔재만이 남게 될 뿐이었다. 아쉬움은 마음속으로 삼키고 미련을 두지 않는 것이 쓸모없는 감정의 굴레에 빠지지 않는 길일 것이다.

다만 그로서는 그녀가 앞으로 행복하길 바랄 뿐이었다.

경요궁의 인물들마저 떠난 장내에는 휑한 공기가 감돌았다.

남아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약속이나 한 듯이 한 사람에게로 향했다. 유중악의 옆에 다소곳하게 서 있던 능자하가 그 시선에 반응하듯 갑자기 입을 열었다.

“나는 이 사람과 몇 마디 이야기만 하고 떠나겠어요.”

과거의 연인들이 대화를 나누겠다는데 누가 제지할 수 있겠는가?

여불회는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유중악을 내려다보며 신중한 음성으로 물었다.

“괜찮겠나?”

유중악이 고개를 끄덕이자 여불회는 유중악을 조심스레 바닥에 내려놓고 기아향과 함께 진산월이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여불회는 멋쩍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진 장문인이 마무리까지 깔끔하게 해준 덕분에 일이 편하게 되었구려. 그렇지 않아도 좌 부인을 어찌 대해야 하나 은근히 걱정스러웠는데…….”

여불회의 시선이 유중악과 능자하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두 남녀는 낮은 음성으로 무어라고 소곤거리고 있었는데, 두 사람 모두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어서 그들이 무슨 대화를 하고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들을 바라보는 여불회의 얼굴에 한 줄기 아련한 빛이 떠올랐다.

“몇 년 전만 해도 저들 두 사람은 누구나가 부러워하는 최고의 한 쌍이었소. 나를 비롯한 친구들은 청천이 이제야 비로소 어울리는 짝을 만났다며 모두 기뻐했었지.”

진산월은 조용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여불회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우리는 당연히 그들이 백년해로할 줄 알았소. 두 사람은 성격적으로도 잘 맞았고 서로를 무척이나 아끼고 사랑했기 때문에 나는 조만간에 그들이 정식으로 혼인하리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소. 그런 그들이 찬바람이 불던 어느 날, 그토록 냉정하게 갈라서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상상치 못했소.”

“그들이 왜 헤어졌는지 아시오?”

“예전에 누군가가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청천은 그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소. 우리는 그의 의견을 존중해주는 의미에서 더 이상 자세한 것은 묻지 않았지만, 모두들 마음속으로는 무척이나 의아해하고 있었소. 하긴, 남녀 사이의 일을 누가 알 수 있겠소?”

“조금 전의 상황을 보니 두 분은 사전에 그녀와 어떤 교감이 있었던 듯한데, 어찌 된 일이었소?”

“사실 우리 부부는 그녀가 청천을 안고 동굴 속으로 막 들어갔을 때 이곳에 도착했었소. 그때 마침 강북녹림맹의 고수들이 나타나는 바람에 잠시 몸을 숨기고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청천을 동굴에 두고 다시 밖으로 나온 그녀는 이미 우리의 존재를 알고 있었는지 전음을 보내왔소.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을 동안 동굴에서 청천을 데리고 나오라고 말이오.”

여불회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우리 딴에는 신중을 기해서 완벽하게 남들의 이목을 속였다고 생각했는데, 진 장문인이 아니었으면 망신은 망신대로 당하고 봉변은 봉변대로 당할 뻔했소. 휴……. 생각만 해도 아찔해지는구려.”

그때 능자하와 유중악이 대화를 나누고 있던 곳에서 유중악의 성난 외침이 들려왔다.

“당신……!”

여불회가 깜짝 놀라 돌아보니 능자하가 유중악의 혈도를 제압하고 그의 입에 강제로 무언가를 먹이고 있었다. 유중악은 뿌리치려 했으나 마혈이 제압당해 꼼짝도 못하고 얼굴만 붉히고 있었다.

“능 소저! 대체 무슨 짓을……!”

여불회가 발연대로하여 버럭 소리 지르며 그녀에게 달려들려 했으나, 그때 이미 그녀는 훌쩍 신형을 날려 장내를 떠나고 말았다. 그녀의 신법이 어찌나 빠르고 표홀했던지 여불회가 유중악의 앞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숲속 저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다.

여불회는 황급히 유중악에게 다가가 제압당했던 혈도부터 풀어주었다.

“후우!”

유중악이 한숨을 내쉬자 여불회는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자네 괜찮나? 그녀가 대체 자네에게 무슨 짓을 한 건가?”

유중악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아닐세.”

“그런 게 아니라니?”

그때 어느새 다가온 기아향이 여불회의 옆구리를 툭 찔렀다.

“코는 뒀다 뭐해요? 냄새만 맡아봐도 무슨 일인지 알겠는데.”

“어?”

여불회는 코를 킁킁거리다 이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깊게 마시지 않아도 은은한 약향(藥香)을 맡을 수 있었다. 여불회가 흥분하지만 않았어도 장내에 약향이 퍼져 있다는 걸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제야 여불회는 능자하가 유중악에게 무언가 영약을 먹이고 떠났음을 깨닫고 어색하게 웃었다.

“하긴. 그녀가 자네에게 해가 되는 짓을 했을 리가 없지. 그녀가 약을 준다면 순순히 받아먹을 것이지 왜 소리를 질러서 사람을 놀라게 하나?”

여불회가 오히려 유중악을 타박하자 기아향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그를 흘겨보았다.

“이이는 꼭 할 말 없으면 다른 사람 핑계를 대더라. 그보다 약향이 은은하면서도 그 향기가 오래가는 것을 보니 보통 영약이 아닌 모양이군요. 상태는 어떠세요?”

유중악의 얼굴은 일견 착잡해 보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언가 아쉬움의 빛이 담겨 있었다.

“아직 운기를 해보지 않아 알 수 없소.”

어찌 보면 다소 퉁명스럽기조차 한 대꾸였으나, 여불회는 오히려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사문에 내상(內傷)에 특효인 영약이 있다더군. 귀원신단(歸元神丹)이라고 했던가? 만약 그녀가 자네에게 먹인 것이 귀원신단이라면 아무리 음양신마의 음양수가 악독하다고 해도 진기를 움직이는 것은 어렵지 않을 걸세. 나머지는 노방을 찾아가면 되는 일이고.”

유중악의 음성은 여전히 무뚝뚝했다.

“아직은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네.”

여불회는 싱겁게 히죽 웃기만 했다.

유중악이 자신에게 가까운 사람일수록 신세를 지거나 폐를 끼치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헤어진 과거의 연인에게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그로서는 무척이나 자존심 상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었을 것이다.

하나 유중악의 부상이 너무 심해서 노방에게 데려기 전에 그의 상처가 악화되면 어쩌나하고 노심초사했던 여불회로서는 마음속의 큰 짐을 던 듯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아무튼 더 늦기 전에 노방에게 가세. 듣기로는 노방은 무당파에서 열리는 집회에 초대받아서 무당산에 가 있다고 하더군. 마침 이곳에서 무당산까지는 그리 멀지 않으니 서두르면 오늘 저녁에 노방의 멋대가리 없이 딱딱한 얼굴을 볼 수 있을 걸세.”

여유를 되찾자 여불회의 음성에는 평상시와 같은 흥겨움이 묻어나고 있었다.

원래 여불회와 기아향 부부는 강호에서도 금슬이 좋기로 유명할 뿐 아니라 누구보다도 쾌활하고 해학이 넘치는 사람들이었다. 절친한 벗인 유중악이 위기에 처하는 일만 없었다면 진산월은 진작 무림의 어느 누구보다도 유쾌한 그들 부부의 진면목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여불회는 문득 생각난 듯 진산월을 돌아보았다.

“참, 진 장문인의 차후 여정이 궁금하구려. 무당산의 집회에 가실 예정이라면 우리와 동행하는 것은 어떻겠소?”

진산월은 그렇지 않아도 유중악과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생각이 있었기에 별다른 고민 없이 그의 요청을 승낙했다. 아직 강북녹림맹의 추격이 완전히 끝났다는 확신도 없는 상태에서 그들만을 두고 떠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위치상으로 제갈세가에 들르기에는 너무 먼 길을 돌아가는 셈이라 이대로 무당산으로 향하는 것이 훨씬 나았던 것이다.

“그렇게 하겠소.”

진산월이 선뜻 고개를 끄덕이자 여불회는 물론이고 기아향의 얼굴도 활짝 펴졌다. 그들 부부 또한 은근히 진산월이 훌쩍 가버리면 어쩌나 하는 불안한 생각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절로 마음이 가벼워진 여불회는 한층 밝아진 얼굴로 힘찬 음성을 내뱉었다.

“그럼 조금이라도 서두르도록 합시다. 청천도 좀 더 조용한 곳으로 가서 운공을 하는 것이 나을 테니 말이오.”

여불회는 조금 전처럼 유중악을 조심스럽게 업고는 앞장서서 걸음을 옮겼다.

진산월은 조용한 눈으로 한 차례 주위를 둘러보고는 앞서서 걸어가는 그들 부부의 뒤를 말없이 따라갔다.

그들의 신형이 모두 사라지자 장내에 다시 두 개의 인영이 나타났다. 그들은 다름 아닌 지금까지 한쪽에서 은밀하게 사태를 지켜보았던 귀호와 교리였다.

귀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검무적이 떠나기 전에 얼핏 그의 시선이 우리 쪽을 향했던 것 같은데, 설마 우리가 숨어 있는 것을 알아차린 건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군. 우리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을 때 눈빛이 유난히 날카롭게 번뜩였으니 말일세.”

“그런데 왜 그냥 순순히 가버린 것일까?”

“아마 유중악의 부상 때문에 더 이상의 문제가 일어나는 걸 원치 않았던 게 아닐까 싶네.”

귀호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군. 어쩌면 자네의 무공이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알아차리고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모른 척한 걸 수도 있지. 음, 다시 생각해 보니 그게 맞는 것 같네.”

귀호는 짐짓 농담 삼아 말했으나 의외로 교리의 얼굴은 약간 경직되어 있었다. 사실 그는 진산월이 태인장으로 복양수의 혈화염구주를 격파했을 때 순간적으로 놀라서 자신도 모르게 살짝 기세를 일으켰는데, 그때 진산월이 자신의 기세를 파악한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그렇다면 진산월이 유중악과 좀 더 세세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고 서둘러 그들과 함께 장내를 떠난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되는 일이었다.

귀호는 생각에 잠겨 있는 교리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더니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신검무적이 음양신마마저 꺾을 줄은 몰랐네. 음양신마의 음양수 공력은 정말 무서워서 당금 무림에서는 모용 대협이나 일령삼성 외에는 적수가 없을 줄 알았는데, 한낱 이십 대 젊은이의 검에 쓰러지다니 정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일일세.”

교리는 여전히 무언가 깊은 상념에 잠겨 있는지 귀호의 말에 별다른 대꾸가 없었다.

“지금까지 젊은 층의 최고수는 누구나가 모용 공자를 첫손에 꼽았는데, 이제는 생각을 좀 달리해야 할 것 같군. 더구나 소문이 무성했던 그 검정중원이라는 초식을 사용하지도 않고 음양신마를 쓰러뜨렸으니 정말 대단한 일 아닌가?”

“대단한 일이지.”

교리가 유난히 낮은 목소리로 대꾸하자 귀호가 반문했다.

“응? 신검무적이 음양신마를 이긴 것 말인가?”

“아니. 자신의 최고 절초를 사용하지도 않고 음양신마를 쓰러뜨린 것 말일세.”

교리의 음성은 여전히 나직했으나, 두 눈은 어느 때보다 예리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가 검정중원이라는 초식을 펼친 건 모두 두 번으로 알고 있네. 서안에서 화산파의 매장원을 꺾을 때 처음 펼쳤고, 이어서 무림구봉 중의 금도무적 양천해와 싸울 때도 그 초식으로 양천해를 쓰러뜨렸지.”

“잘도 알고 있군.”

“자네가 몇 번이나 입버릇처럼 말하지 않았나? 내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말일세.”

“아무튼 그래서?”

“그런데 양천해보다 더 뛰어난 고수로 알려진 음양신마에게는 그 초식을 사용하지도 않고 이겨 버렸네. 이게 무얼 뜻하는 일인지 알겠나?”

교리의 물음에 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검무적의 무공이 양천해와 싸울 때보다 한 단계 더 발전했다는 것이지.”

“바로 그렇다네. 신검무적이 양천해와 싸운 것이 불과 한두 달 전의 일일세. 그런데 그 사이에 신검무적은 자신이 가진 최고의 절초를 내보이지 않고도 음양신마 같은 절대고수를 꺾을 만큼 성장한 것일세. 일반적으로 무공이 낮을 때보다 무공이 높아질수록 발전 속도가 현격하게 느려진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정말 믿기지 않는 일이지.”

“확실히 그런 것 같군. 이런 식이라면 몇 년 내로 모용 대협에 필적할 만한 고수가 될지도 모르겠는걸.”

“그건 누구도 장담할 수 없지.”

“그렇지. 신검무적의 무공이 앞으로도 이런 속도로 발전한다는 보장은 없으니까 말일세.”

“아니면 이미 그런 경지에 도달해 있는지도 모르고.”

귀호는 눈을 살짝 치켜뜨고 교리를 쳐다보았다. 교리의 얼굴에는 별반 표정이 떠올라 있지 않아 그의 의중을 전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귀호는 다시 싱겁게 히죽 웃었다.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런데 자네는 두 가지 경우 중 후자에 더 비중을 두는 것 같군.”

“신검무적의 무서운 점은 그가 단순히 무공만 뛰어난 고수가 아니라는 점일세. 자네도 보았지 않나? 조금 전에도 결정적인 순간에 일부러 허점을 드러내 음양신마를 유인하여 그를 물리치는 것을 말일세.”

“그래. 아주 인상적인 장면이었네. 음양신마같이 노련한 인물이 그런 수에 당할 줄은 정말 몰랐네.”

“그만큼 그 당시에 음양신마가 그에게 두려움을 느꼈다는 방증일세. 그런 처절한 싸움의 와중에도 상대의 심리상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것을 이용해 교묘한 함정을 판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심기가 아닐 수 없네.”

“자네는 모르겠지만 신검무적의 예전 별호가 삼절무적이었네. 언변과 배짱, 그리고 심기가 뛰어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지.”

“삼절무적이라……. 과연 그럴듯하군. 그런 심기의 소유자가 저런 무공을 지니고 있으니, 그가 자만하지만 않는다면 능히 모용 대협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걸세.”

“신검무적이 자만하거나 방심하는 모습은 상상이 되지 않는걸.”

“그렇지. 아무튼 그 덕분에 음양신마는 하나뿐인 목숨을 잃게 되었고, 우리는 신검무적의 최고 절초를 구경할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되었지.”

귀호가 빙긋 웃으며 교리를 빤히 바라보았다.

“자네는 그 검정중원이라는 무공을 보지 못한 게 어지간히 아쉬운 모양이군.”

교리는 입맛을 다셨다.

“두 번이나 볼 기회를 놓쳐서 이번에는 틀림없이 견식할 수 있겠거니 생각했는데 어찌 그렇지 않겠나? 하지만 조만간 기회가 있겠지.”

“언제 말인가?”

교리의 눈은 강 건너 멀리 보이는 푸른 산으로 향했다. 귀호의 시선도 그를 따라 움직였다. 유난히 녹음 짙은 산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무당산…….”

귀호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나직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교리는 담담한 눈으로 무당산을 바라보며 조용한 음성을 내뱉었다.

“무당산의 집회에서 종남파는 반드시 형산파와 격돌하게 될 걸세. 그때라면 신검무적 또한 오늘 숨겨 두었던 자신의 최고 절초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을 걸세.”

☆ ☆ ☆

아주 깔끔한 방이었다. 사방의 벽은 흰 색의 벽지로 발라져 있었고, 중앙의 탁자 외에는 별다른 가구도 보이지 않았다. 한쪽에 나 있는 창문에 걸쳐진 주렴 말고는 특별한 장식이나 시설이 없어서 허전함을 느낄 정도였다.

그럼에도 방에 들어온 사람의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은 방의 가운데 있는 탁자 위에 놓인 찻잔에서 피어오르는 한 줄기 다향 때문일 것이다.

그 다향을 맡으며 편안한 자세로 앉아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머리는 단정하게 뒤로 빗어 넘겼고, 잘 손질된 수염을 기르고 있어 더할 나위 없이 정갈하고 청수해 보였다. 눈빛은 맑고 정명(精明)했으며, 이목구비는 수려해서 절로 호감이 가는 인상이었다.

실제 나이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겉으로 드러난 용모는 사십 대 중반쯤으로 보였다. 짙은 청삼을 입은 중년인은 찻잔을 들고 다향을 음미하며 무언가 깊은 상념에 잠겨 있는 듯했다. 허공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는 그의 눈빛이 가끔씩 빛날 때마다 영롱하면서도 예리한 광망이 번뜩이고 지나갔다.

그때 문이 소리도 없이 열리며 한 사람이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기척도 없이 무례하게 방으로 들어온 그 사람은 느긋한 자세로 차를 마시고 있는 청삼 중년인을 보고는 퉁명스런 음성을 내뱉었다.

“팔자도 좋으시구려. 일이 엉망진창으로 꼬였는데, 혼자서만 신선놀음을 하고 있는 거요?”

들어온 사람은 삼십 대 후반의 거한이었다.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온통 검은 색 일색의 무복을 입고 있었는데, 얼굴이 온통 거친 수염으로 뒤덮여 있는 데다 눈알마저 검은자위로 번들거리고 있어 마음이 약한 사람은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정도로 무서운 인상이었다. 게다가 짙은 눈썹 아래 자리하고 있는 두 눈에서는 연신 괴이한 눈빛이 흘러나오고 있어 더할 나위 없이 흉흉해 보였다.

흑의 사내의 거친 음성에도 청삼 중년인은 처음의 자세를 그대로 유지한 채 찻잔에 든 차를 천천히 들이켰다. 그리고는 이내 만족스런 한숨을 내쉬는 것이었다.

“이 용정(龍井)은 확실히 이른 아침에 마시는 게 제일 좋군. 신선한 아침 공기와 담백한 향기가 정말 잘 어울린단 말이야.”

흑의 사내는 무언가 불만에 가득 찬 표정이었으나, 심한 말은 내뱉지 못하고 청삼 중년인의 맞은편 의자에 가서 털썩 앉았다.

그가 앉은 의자가 금시라도 부서질 듯 요란하게 삐걱 소리를 냈다.

청삼 중년인의 시선이 느릿느릿 그에게로 향했다.

“어젯밤에 먼 길을 달려왔으면 좀 더 푹 쉴 일이지, 뭐가 그리 못마땅해서 아침부터 내 방에 찾아와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가?”

흑의 사내의 번들거리는 눈이 청삼 중년인의 얼굴에 못 박히듯 고정되었다. 벌건 핏발이 서린 그 눈은 어지간히 담력이 있는 사람이라도 가슴 한구석이 섬뜩해질 것 같은데, 청삼 중년인은 전혀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입가에 엷은 미소마저 머금고 있어서 방금 마신 차의 여운을 즐기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내 일은 꼬일 대로 꼬여 버렸고, 당신 일도 엉망으로 헝클어졌다고 들었소. 아까운 부하들만 잔뜩 잃어버리고 얻은 건 아무것도 없어서 나는 지금 속에서 천불이 나고 있는데, 당신은 화도 나지 않는단 말이오?”

“신검무적을 상대하면서 그 정도 희생도 각오하지 않았단 말인가?”

흑의 사내의 인상이 살짝 일그러졌다. 가뜩이나 험상궂은 용모에 비늘과도 같은 돌기가 잔뜩 돋은 그의 얼굴이 찌푸려지자 그야말로 흉신악살을 보는 것 같았다.

“어느 정도 피해를 입으리라는 건 예상했지. 하지만 절반에 가까운 놈들이 돌아오지 못했는데 상대편은 죽거나 심하게 다친 놈도 하나 없으니 정말 어이없는 일 아니오? 신검무적을 죽이라는 것도 아니고, 여자에게서 물건 하나만 빼오면 되는 일인데 그것도 하나 못하고 쫓기듯 도망쳐 왔으니 기분 같아서는 돌아온 놈들을 모두 찢어죽이고 싶었소.”

청삼 중년인이 처음으로 그 말에 관심 어린 빛을 떠올렸다.

“내가 알기로 이번 행사에는 자네가 아끼는 혈염조의 고수들도 다수가 포함되었다고 하던데, 종남파의 고수들을 하나도 해치우지 못했단 말인가?”

“그래서 내가 더 화를 내고 있는 게 아니오? 분기를 다스리느라 지난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소.”

“종남파 고수들이 모두 신검무적 같은 수준의 고수들은 아닐 텐데 왜 그렇게 된 건가?”

흑의 사내는 눈살을 잔뜩 찡그렸다.

“그런데 아니었소. 돌아온 놈들의 말을 들으니 신검무적을 제외하고도 대부분의 종남파 놈들이 하나같이 무시하기 힘든 실력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구려.”

청삼 중년인의 눈빛이 한층 더 깊어졌다.

“종남파에 고수들이 그렇게 많아졌단 말이지?”

“정말 희한한 일 아니오? 사부가 종남파의 노해광인지 뭔지 하는 놈의 암계에 당해 쓰러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방심하다 그런 꼴을 당했으리라고 생각했었는데, 신검무적에 이어 고수들이 줄지어 등장하고 있으니 다 망해가던 종남파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모르겠소.”

“어제 자네에게 짤막하게 듣기는 했지만, 정확한 상황은 모르고 있었네. 종남파와 부딪혔던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해보게.”

“일없소. 정 궁금하면 당신이 그 무거운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직접 알아보든지 하시오.”

흑의 사내가 퉁명스럽게 쏘아붙이자 청삼 중년인은 빤히 그를 쳐다보더니 이내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하지. 자네 말대로 이제 슬슬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일 생각을 하고 있으니 말일세.”

이번에는 흑의 사내가 특유의 번들거리는 눈으로 청삼 중년인을 똑바로 응시하며 물었다.

“조금 전에 들으니 당신 일도 음양신마가 나타나면서 엉망이 되었다고 하던데, 그 얘기나 해보시오. 결국 유중악은 음양신마의 손에 끝장이 난 거요?”

청삼 중년인의 얼굴에 묘한 빛이 떠올랐다.

“나도 당연히 그렇게 될 줄 알았지. 음양신마는 일단 모습을 드러낸 이상 유중악을 해치우기 전에는 물러설 사람이 아니거든.”

“그런데 그렇지 않다는 말로 들리는구려.”

“그곳에 한 사람이 나타났네.”

흑의 사내는 피식 웃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음양신마의 손에서 유중악을 구출해내기라도 했다는 말이오?”

흑의 사내는 비꼬는 의미로 말했는데, 의외로 청삼 중년인은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렇네.”

흑의 사내의 험상궂은 얼굴에 처음으로 당혹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그게 정말이오?”

“내가 이런 일에는 농담을 하지 않는 성격이란 걸 모르나?”

“대체 누구요? 그 대단한 작자가?”

“한 번 맞혀보게.”

“그걸 내가 어떻게……. 혹시 신검무적?”

고개를 휘휘 내젓던 흑의 사내가 무언가를 느낀 듯 경직된 음성을 내뱉자 청삼 중년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흑의 사내의 두 눈에서 섬뜩한 광망이 이글거렸다.

“신검무적이 음양신마 앞에 나타났다고? 그래서 어떻게 되었소?”

“호랑이 두 마리가 한 곳에서 마주쳤으니 어찌 되었겠나?”

“답답하게 말 돌리지 말고 결론만 말해 보시오. 두 사람이 싸웠소? 승패는?”

“흑백상문신이 음양신마의 시신을 운구해서 돌아갔다더군. 현장 근처에서 잠복해 있던 맹의 순찰사자가 직접 눈으로 확인한 일일세.”

흑의 사내의 입이 반쯤 벌어졌다.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그의 부릅떠진 눈과 일그러진 얼굴에는 여러 가지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한동안 장내에는 죽음과도 같이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흑의 사내는 몇 차례나 표정이 변하면서 허공을 쏘아보고 있었고, 청삼 중년인 또한 묵묵히 상념에 잠겨 있는 모습이었다.

한참 후에야 흑의 사내는 평상시의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유중악은 신검무적이 데리고 갔겠군.”

“그렇다고 하더군.”

“당신은 이제 어쩔 생각이오? 나도 그렇지만 당신도 반드시 유중악을 손에 넣어야 하지 않소?”

“그래서 생각 중일세.”

“느긋하게 차나 마시면서 말이오?”

“이런 일일수록 신중하게 처리해야지. 그리고 생각을 정리하는 데는 차 한 잔이 최고일세.”

“당신은 그게 가장 문제요. 강호에서는 생각보다는 행동이 더 필요한 법이오. 그런데 당신은 매사에 너무 신중하게 생각만 하고 있으니 그러다가 정작 중요할 때에는 시기를 놓치게 될 거요. 용왕이 산 속에 웅크리고만 있어서야 어느 누가 무서워하겠소?”

청삼 중년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입조심하게.”

“어차피 이곳에는 우리 둘밖에 없는데 더 이상 어떻게 조심하란 소리요?”

청삼 중년인의 물처럼 투명한 시선이 흑의 사내의 두 눈을 똑바로 주시했다. 그 눈빛을 받은 흑의 사내는 한 차례 어깨를 으쓱거렸다.

“알았소. 조심할 테니 제발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시오. 당신의 정심안(淨心眼)은 내 흡룡공과 상극이라 자꾸 진기가 흔들린단 말이오.”

“자네의 입은 언제고 칼날이 되어 자네에게 돌아올 걸세.”

“그런 칼날쯤이야 기꺼이 감당할 수 있지. 그나저나 정말 어쩔 셈이오? 이대로 유중악에게서 손을 뗄 생각이오? 아니면……”

“아니면?”

흑의 사내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내걸렸다.

“신검무적에게도 손을 쓸 거요? 만약 후자라면 기꺼이 한 손을 거들어줄 의향이 있소만.”

“생각 중이라고 하지 않았나?”

“너무 오래 생각하지는 마시오. 이대로 하루만 더 시간이 지나버리면 상대해야 할 자는 신검무적 하나만이 아니게 될 테니 말이오.”

“자네가 방해하지만 않았다면 이미 결정했을지도 모르지.”

“혹시 상대가 종남파라서 과거의 인연 때문에 망설이는 거라면…….”

청삼 중년인의 전신에서 칼날같이 예리한 기세가 뿜어 나왔다.

“정말 입을 함부로 놀린 대가를 받고 싶은 건가?”

흑의 사내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게 아니라면 내 말에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도 없지 않소? 알았소, 난 이만 물러나 있을 테니 결정되면 알려 주시오.”

청삼 중년인이 여전히 기세를 죽이지 않자 흑의 사내는 찔끔하여 몸을 돌렸다. 막 방을 벗어나려던 흑의 사내가 여전히 몸을 돌린 채로 평소와는 달리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난 오늘 안으로 이번 일을 마무리 지을 거요. 그들이 한수를 넘어 무당파로 들어간다면 나에게는 더 이상의 기회가 없을 테니 말이오. 그리고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일 거요.”

그 말을 끝으로 흑의 사내는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청삼 중년인은 그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청수하고 고요한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한동안 묵묵히 허공을 응시하고 있던 청삼 중년인은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결국 한 번은 부딪혀야 하는 일이었지. 어쩌면 예상보다 너무 늦은 건지도 모르고.”

강북녹림맹의 총표파자이며 천교자 방산동과 함께 강산쌍패로 불리는 십절산군 사여명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든 정말 기대가 되는구나. 신검무적……. 자네는 과연 어떤 인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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