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8권 열한기공(熱寒奇功)편 : 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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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28권 열한기공(熱寒奇功)편 : 3화


제 284 장 이아환아(以牙還牙)

유난히 쾌청한 오전이었다. 하늘은 끝없이 푸르렀고, 공기는 맑고 신선해서 절로 마음속까지 상쾌해지는 날씨였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서안의 거리는 어느 때보다 깔끔하고 생동감 있어 보였다.

노해광은 신선한 공기를 몇 차례나 깊숙이 들이마시고는 이내 만족스런 미소를 머금었다. 어떤 일이든지 능히 해치울 수 있는 자신감이 가득 생겨나는 것 같았다.

‘오늘은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이다. 나는 잘해낼 수 있을 것이다.’

노해광은 마음속으로 다짐이라도 하듯 몇 번이고 속으로 같은 말을 되뇌고는 힘찬 걸음을 내딛었다.

“나오셨습니까?”

방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가휘가 그를 향해 유난히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노해광은 듬직한 눈으로 자신의 오랜 수하인 그를 바라보았다.

“준비는?”

“완료되었습니다.”

“다들 어떠한가?”

“자기 위치를 잘 지키고 있습니다.”

“자네는 어떤가?”

가휘의 주름진 얼굴에 모처럼 미소가 떠올랐다.

“잠을 푹 자서 그런지 아주 상쾌합니다.”

“좋은 일이군.”

노해광은 그의 어깨를 툭 치고는 이내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산해루를 벗어나자 어느새 다가왔는지 최동의 수하인 마림이 슬쩍 옆으로 와서 머리를 조아렸다.

“방주께서 준비가 끝났다고 하십니다.”

노해광은 그의 말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태평스런 얼굴로 먼 산을 쳐다보며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그자들은?”

“아직 전혀 눈치 채지 못한 기색입니다.”

“내가 하선루로 들어가면 일을 시작하도록.”

“예.”

마림이 돌아가자 노해광은 가휘와 함께 서안의 거리를 걸어갔다. 그를 아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인사를 해왔고, 노해광은 밝은 얼굴로 답례를 했다. 산해루에서 하선루까지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지만 노해광은 일부러 길을 삥 돌아 서안의 대로를 절반쯤 가로지른 다음에야 하선루의 입구에 도착했다.

하선루의 장방인 주노육이 입구까지 나와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가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오셨습니까?”

노해광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른 분들은 진작 모두 오셨고, 조금 전 장력패, 장 대협께서 제일 마지막으로 도착하셨습니다.”

“장력패 엉덩이가 무겁긴 하지.”

노해광은 빙긋 웃으며 그의 곁을 지나 하선루 안으로 들어갔다.

하선루는 그동안 내부 공사를 새로 하느라 문을 닫고 있었다. 일전에 쾌의당의 살수들인 홍설사신 도중환과 소면염라 염조홍을 제거할 때 주루 안의 시설들이 일부 파손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마침 얼마 전에 공사가 모두 끝나서 새로운 개업식을 준비 중이었다.

오늘은 개업식 전날로, 노해광이 특별히 몇 사람의 지인들을 초대하여 점심 식사를 함께 할 예정이었다. 아직 점심이 되기에는 이른 시간이었으나 노해광의 예상대로 모든 손님들은 이미 도착하여 그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들도 눈이 있고 귀가 있다면 당금의 서안이 폭발 직전의 살벌하기 그지없는 상황임을 잘 알고 있을 테니 이번 노해광의 점심 초대가 단순히 밥 한 끼 먹자고 하는 것이 아님을 누구보다 절실히 깨닫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예정보다 이른 시간임에도 모두들 하선루로 달려왔을 터였다.

초대된 인물들 대부분은 서안에서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한 자들이었다. 그래서인지 오늘의 만남은 제법 은밀했음에도 알게 모르게 적지 않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노해광과 가휘가 하선루로 들어가는 광경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는 인물이 있었다. 하선루의 맞은편에 있는, 희빈루(喜賓樓)라는 평범한 이름의 주루 이층 창문가에 앉아 있는 청수한 인상의 화의 중년인이었다.

화의 중년인의 맞은편에는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준수한 백의 청년이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화의 중년인은 주노육의 정중한 안내를 받으며 하선루로 들어가고 있는 노해광의 뒷모습을 바라보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철면호의 위세가 대단하군. 언뜻 보기에도 장안의 제왕 같은 분위기 아닌가?”

백의 청년도 노해광의 뒷등을 슬쩍 바라보고는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제왕 치고는 너무 단출한 등장 같군요.”

“따르는 사람이 둘밖에 없어서? 하지만 저 안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자들을 생각해 보아라. 현재 장안의 어느 누가 그런 위세를 부릴 수 있겠느냐?”

“본 파의 장문인이시라면…….”

“그렇겠지. 하지만 장문인은 멀리 호북성에 계시고, 신검무적 또한 이곳에 없다. 현재 장안에 있는 어느 누구라 할지라도 서신 한 장만으로 저런 자들을 모두 불러 모을 수는 없을 것이다.”

화의 중년인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 부분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대응표국의 총국주인 일도풍뢰 단리정천, 쌍하보의 철혈수사(鐵血秀士) 국조린(鞠照麟), 철기보(鐵騎堡)의 철기은창(鐵騎銀槍) 하대경(夏大鯨), 만혼당(萬魂堂)의 십지수혼(十地收魂) 임풍(任豊), 관중일관의 노호공 장력패에 금륜장의 금륜군자 고소명까지……. 하나같이 장안 일대에서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거물들이지. 그들이 모두 철면호의 초대장을 받자 두말 않고 한 걸음에 달려왔다. 철면호는 정말 보통 인물이 아니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화의 중년인의 얼굴 표정은 여전히 담담하기만 했다. 하나 표정과는 달리 그의 내심은 사실 그다지 편안치 않았다.

그의 말마따나 지금 하선루에서 노해광을 기다리고 있는 인물들의 면면은 하나같이 화려하기 짝이 없었다.

대응표국은 한때 신검무적에게 표국의 고수들이 떼죽음당한 후 잠시 위기에 봉착하기도 했으나, 그 후로 착실히 힘을 회복해서 현재는 장안표국과 함께 서안 일대에서 가장 큰 표국이 되어 있었다. 서안 제일의 표국이었던 창룡표국이 국주인 공료의 죽음으로 몰락의 길을 걸어 문을 닫다시피 한 것과는 판이한 결과였다.

쌍하보는 초가보가 등장하기 전만 해도 금륜장과 함께 서안 일대에서 가장 세력이 강한 명문 중의 명문이었고, 철기보는 서안 제일의 마장(馬場)이었다. 만혼당은 시신을 매장하거나 장례의 의장을 다루는 강방(杠房) 전문 방파로서, 문도들의 무공 자체는 그다지 높지 않았으나 광범위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어서 누구도 그들을 무시하지 못했다.

관중일관 또한 백인장과의 비무에서 제일 마지막에 장력패가 도지곤을 꺾고 그야말로 서안 제일로 자리한 무관이었다.

관중일관과 백인장의 비무는 여러모로 장안 사람들에게 화제가 되었다. 그들의 승부는 여타 무관들 사이의 비무와는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유혈이 낭자했으며 처절하기 그지없었다. 화산파에서 은밀히 지원한 하태목과 노해광이 소개한 독초웅과의 비무는 그야말로 혈전(血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피가 난무했으며, 결국 하태목이 독초웅의 목을 베어버려 간신히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하나 하태목 또한 왼팔이 잘려 양패구상에 가까운 상처뿐인 승리였다.

염종수와 학일명의 싸움 또한 살벌하기는 마찬가지였으나, 초력이 변신한 학일명은 몇 군데 상처를 입기는 했어도 염종수의 가슴에 선명한 피구멍을 내어 나름대로 통쾌한 승리를 거두었다.

중인들의 이목은 온통 마지막 싸움인 장력패와 도지곤에게 향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 도지곤은 약삭빠르게도 불과 몇 초 만에 스스로 패배를 자인하고 물러나 많은 사람들을 허탈하게 만들었다. 덕분에 그는 비록 망신살이 뻗치고 장안 제일의 무관이라는 명성을 관중일관에 넘겨야 했으나, 스스로의 몸을 보호하여 재기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할 수 있었다.

하나 명성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은 그가 과연 다시 일어설 수 있을지는 지극히 회의적인 시각이 대부분이었다.

금륜장은 쌍하보와 함께 전통적인 서안의 명문세력이었고, 장주인 금륜군자 고소명은 한때 서안 제일의 고수로 명성이 자자한 인물이었다.

그들이 모두 이런 민감한 시기에 노해광의 초청에 기꺼이 응했다는 것은 노해광과 한배를 타기로 결심했다는 방증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점에서 화의 중년인은 새삼 자신과 노해광의 방식이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화의 중년인은 화산파의 집법인 신산 곡수였다.

곡수 자신이라면 설사 그들을 포섭했다 할지라도 이렇게 중인들의 이목이 쏠려 있는 상태에서 그들 모두를 불러 반공개적인 모임을 열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 중 일부는 상대편 세력에 동조하게 하여 반간계(反間計)를 펼치거나 결정적인 상황이 올 때까지 철저하게 숨겼을 것이다.

그런데 노해광은 비록 공개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으나 하선루의 재개업식을 명목으로 그들을 모두 불러들여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켜 버렸다. 덕분에 그들은 화산파와 종남파 사이에서 분명한 결단을 내려야 했으며, 일단 모임에 참석한 이상 노해광과 생사를 같이하는 수밖에는 다른 길이 없게 되었다.

곡수의 방식이 옳은지, 노해광의 방식이 옳은지는 나중에 결과로 판가름 날 것이다.

다만 곡수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대응표국의 합류였다. 그들은 종남파의 장문인인 신검무적에게 거의 대부분의 수뇌들이 몰살당해 하마터면 표국의 문을 닫을 뻔한 상황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도 국주인 단리정천은 자신이 가장 아끼는 손자를 신검무적의 제자로 보냈을 뿐 아니라 이번 모임에도 제일 먼저 참석하여 스스로 종남파의 우호세력임을 확연히 드러내 보였다.

한때는 화산파와 결맹 직전까지 갔던 상황임을 생각해 본다면 너무도 달라진 그들의 태도가 곡수는 쉽게 납득이 되지 않았다.

하나 대응표국의 변절은 놀라움은 있을지언정 큰 충격은 되지 않았다. 곡수를 진정으로 놀라게 하고 당혹케 만든 것은 금륜장의 가세였다.

금륜군자 고소명은 누가 뭐라 해도 서안 일대에서 가장 강한 고수 중 한 사람이었고, 그의 금륜장은 서안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 중 하나였다. 초가보의 몰락 이후에도 그들은 활동을 자제하고 은인자중하고 있었는데 돌연 노해광의 편에 모습을 드러내었으니, 은밀히 고소명을 포섭하기 위해 나름대로 공을 들이고 있던 곡수로서는 입맛이 쓸 수밖에 없었다.

“철면호가 그동안 꽁꽁 숨겨두었던 세력들을 한꺼번에 드러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곡수의 질문에 백의 청년, 두기춘은 신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일전에 방보당이 공격을 당한 후 무언가 반전의 기회를 꾀하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가 진정으로 노리는 것은 무엇일 것 같으냐?”

“그는 우리를 비롯한 세간의 이목이 이번 모임에 집중되리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래서 이번 기회를 결코 놓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곡수는 만족스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도 그렇다. 그렇다면 그가 취할 방법은 무엇이 있겠느냐?”

두기춘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조심스레 말했다.

“아마도 우리가 했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할 것 같습니다.”

곡수의 눈꼬리가 꿈틀거렸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일전에 철면호는 하마터면 방보당을 그대로 빼앗길 뻔했습니다. 그동안 모든 일에 승승장구해 왔던 철면호로서는 처음으로 낭패를 당한 셈이지요. 그러니 그로서는 자신이 당했던 방식 그대로 우리에게 되갚아주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흠. 그럴듯한 말이다. 그렇다면 그가 취할 방법은 우리의 세력 중 하나를 노리는 것이 되겠군.”

“그렇습니다.”

이번에는 곡수가 잠시 생각에 골몰했다.

“서안 일대에서 우리에게 동조하는 세력은 제법 있지만, 그중 무너진다면 우리가 타격을 받을 만한 곳은 모두 세 군데뿐이다. 유화상단, 종리세가, 그리고 적류문(赤流門)이지.”

화산파는 서안에서 오랫동안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해 왔지만 직접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맺은 곳은 의외로 그다지 많지 않았다. 서안 일대에서 자신들을 위협할 뚜렷한 세력이 없는 상태였기에 특정한 문파에 힘을 쏟을 당위성이 없었던 것이다.

하나 초가보가 득세하고, 뒤이어 종남파가 재기에 성공하자 화산파로서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셈이었다. 그나마 상당히 오랫동안 친분을 유지하던 유화상단과 종리세가가 서안의 상계(商界)에 확실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에 큰 어려움은 느끼지 않고 있었다.

하나 노해광이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던 흑선방을 수족으로 삼아 무섭게 세력을 확장하는 것을 본 화산파는 자신들도 쉽게 부릴 수 있는 문파가 필요함을 깨닫게 되었다. 자신들이 직접 나서기 어려운 사안들을 해결하거나 뒷골목의 정보를 수집하고 사람들을 부리는 지저분한 일을 해내는 자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바로 적류문이었다.

적류문은 문주인 혈음도(血飮刀) 마강(馬强)이 아홉 명의 형제들을 이끌고 세운 곳으로, 요즘 들어 서안 일대에서 가장 무섭게 성장하고 있는 흑도의 문파였다. 그들은 흑선방과 영역이 겹치지 않는 부분을 교묘하게 잠식해 들어가서 세력을 불리더니 화산파의 힘을 등에 업은 뒤로는 공공연하게 흑선방에도 시비를 걸어 대고 있었다.

얼마 전에 화산파에서 방보당을 습격할 때도 노해광의 이목을 가리고 화산파의 고수들을 철저히 숨겨준 곳이 바로 적류문이었다. 화산파에서도 처음에는 별다른 비중을 두지 않다가 막상 적류문의 도움을 받게 되자 모든 일이 무척이나 순조로워지는 것을 깨닫고 그들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고 있었다. 만에 하나 적류문이 망하게 된다면 화산파는 일시적으로나마 눈과 귀가 가려지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또한 유화상단과 종리세가는 모두 화산파와 직간접적으로 긴밀한 관계에 있는 집단들이어서 그들 중 어느 한 곳이 무너지기라도 하면 화산파로서는 자금이나 인력 관리면에서 많은 어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곡수는 노해광이 자신들을 공격한다면 이들 세 곳 중 하나일 거라고 예상했다. 그들 외에 다른 여러 문파들이 화산파의 세력에 속해 있기는 하지만 그다지 큰 비중은 두고 있지 않았다.

“너는 철면호가 세 곳 중 어디를 노릴 것이라고 보느냐?”

두기춘은 침착하게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철면호는 우리를 공격할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그에 따른 제약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첫째로 그는 공개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동원할 수 없습니다.”

곡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되면 반드시 우리 눈에 뜨일 것이고, 우리도 어렵지 않게 막을 수 있겠지.”

“그렇습니다. 둘째로 종남 본산의 인원들을 불러들일 수도 없습니다.”

곡수는 그 말에도 수긍을 했다.

“종남파의 인원들은 그리 많지 않고, 그들 모두는 철저히 우리의 감시 아래 있는 상태이지.”

“셋째로 철면호의 수하들은 비록 많지만 그들 중 진정으로 뛰어난 고수는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그게 바로 철면호의 가장 큰 약점이지. 고수의 수가 적으므로 정면대결로는 우리에게 승산이 없다는 걸 그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어느 곳을 공격하든 자신의 전력을 집중시켜야 합니다. 이런 여러 가지 점을 고려해 본다면 그가 공격할 수 있는 곳은 지극히 제한적입니다.”

“그래서 네 생각은?”

“저는 그가 적류문을 노릴 것이라고 봅니다.”

“역시 그렇겠지? 적류문이라면 고수의 수도 많지 않고, 자신이 수족처럼 부리는 흑선방으로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는 걸 철면호가 모를 리는 없다. 그런데도 철면호가 적류문을 노리리라고 보느냐?”

곡수가 날카롭게 반문했으나 두기춘은 침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유화상단은 철면호의 세력만으로 공격하기에는 너무 큽니다. 종남파 본산에서 지원을 해야 하는데, 아직 본 파의 본진이 나서지도 않았는데 그들이 먼저 나설 리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종리세가는?”

“종리세가에는 현재 매화사절과 두 분의 장로님이 머물고 계십니다. 그리고 철면호에게는 두 분 장로님을 상대할 만한 실력자가 없습니다.”

“흠.”

곡수는 잠시 심사숙고하는 모습이었다.

그도 두기춘의 의견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나 그의 예리한 직감은 철면호가 이대로 순순히 자신들의 생각에 따를 리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철면호라면 반드시 무언가 다른 방법을 꺼내들 것이다. 그걸 알아야만 그의 노림수를 꿰뚫어 볼 수 있다.’

곡수는 철면호가 쓸 수 있는 방법들을 여러 차례 분석해 보았다. 철면호의 세력은 이미 대부분이 상세하게 파악된 상태이기 때문에 그가 쓸 방법들을 검토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설사 철면호에게 숨겨둔 또 다른 세력이 있다고 해도 고수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약점은 사라지지 않는다.

만약 진짜 뛰어난 실력의 고수를 가지고 있다면 수룡신군 황충과의 대전 때 철면호가 쓰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그때 철면호는 정말 절체절명의 위기였기에 자신의 사력을 다해 맞서 싸웠고, 기적적으로 상대를 쓰러뜨릴 수 있었다. 철면호는 비록 건곤일척의 승부에서 이길 수 있었으나, 대신에 숨겨두었던 자신의 세력이 대부분 드러나고 말았던 것이다.

곡수는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그래도 그는 어떤 식으로든 종리세가를 이용하려 할 것이다.”

두기춘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성동격서(聲東擊西)나 조호이산(調虎離山)의 방식으로 이용한단 말입니까?”

“그렇다. 우리가 적류문에 신경을 쓰는 사이에 종리세가를 노릴 수도 있고, 그에 반응해서 우리가 종리세가를 지키기 위해 적류문을 방치하는 동안 적류문을 향해 총력을 집중시킬 수도 있지.”

“어찌 되었건 집법께서도 철면호의 최종 목적은 적류문이라고 생각하시는군요.”

“네 말대로 그가 가진 고수들로서는 그게 한계이니 말이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가 그들에게로 빠르게 다가왔다.

화산파의 연락책인 동개라는 일대제자였다.

“철면호의 세력으로 보이는 자들이 종리세가 근처에 나타났다고 합니다.”

“정확히 누가 왔느냐?”

“수가 그리 많지는 않으나 하나같이 상당한 실력을 지닌 고수들로 보인다고 합니다. 저도 급히 연락을 받고 달려온 길이라 그들의 면면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성동격서인가? 철면호답지 않게 너무 평범한 방식이로군.”

곡수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두기춘이 그의 말을 받았다.

“그만큼 철면호가 쓸 수 있는 방법이 한정되어 있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그렇길 바라야지.”

곡수가 떠날 움직임을 하지 않자 두기춘이 의아해서 물었다.

“가보지 않으실 셈입니까?”

“철면호가 이곳에 있는데 내가 어딜 가겠느냐? 궁금하면 너나 가보도록 해라.”

곡수는 철면호가 무슨 수를 쓰든 그가 자신의 시야 안에서 움직인다면 충분히 막을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적어도 오늘 하루는 철면호가 있는 곳에서 떠나지 않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두기춘은 잠시 망설이다가 자신도 그를 따라 계속 머물러 있기로 결심했다. 동개만이 분주한 몸놀림으로 다른 소식을 전하기 위해 황급히 주루를 벗어났다. 떠나기 전 동개는 힐끗 두기춘을 쳐다보았는데, 그 시선 속에는 자신은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는데 주루에 태연하게 앉아 있는 두기춘에 대한 불만이 담겨 있었다.

두기춘의 심정도 그다지 편하지는 않았다. 하나 자기가 가보았자 특별히 힘을 보탤 수도 없을뿐더러 공연히 다른 제자들의 눈치나 보게 될 것이 분명한지라 차라리 이곳에서 곡수와 함께 사태의 진행을 기다리는 것을 선택했다.

처음 입문했을 때부터 두기춘은 화산파의 일대제자 사이에서 물과 기름처럼 쉽게 어울리지 못했으며, 곡수에게 중용된 뒤로는 질시가 심해져서 친하게 지내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몇몇 여제자들만이 그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다른 제자들과는 더욱 소원해진 상태였다.

그나마 두기춘과 유일하게 친분이 있는 사람은 매화사절 중의 매향 송인혁이었다. 송인혁의 사부인 십지매화검객 선우정이 두기춘을 마음에 들어 해서 몇 번 가르침을 내려준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송인혁은 두기춘을 직속 사제로 대하고 있었는데, 담백하고 충후한 성품답게 타 문파 출신의 제자라고 차별을 두지 않아서 두기춘도 내심으로 그를 따르고 있었다.

곡수와 두기춘이 앉아 있는 장소는 하선루가 빤히 바라보이는 희빈루의 이층 창가였는데, 희빈루의 높이가 하선루보다 조금 높아서 하선루의 삼층까지도 훤히 들여다보였다. 희빈루의 창문에는 차양이 쳐 있어서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볼 수 없지만, 안에서는 밖을 훤히 내다볼 수 있어서 비밀리에 하선루를 살펴보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곳이었다.

공교롭게도 노해광이 모임을 가진 장소가 삼층이었다. 날이 제법 무더워서인지 창문이 반쯤 열려 있어서, 열린 창문 사이로 노해광을 비롯해 참석자들의 면면을 조금이나마 살펴볼 수 있었다.

곡수는 차양 사이로 보이는 모임의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는데, 눈빛이 유난히 반짝거리는 것으로 보아 무언가 생각에 골몰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다 두기춘을 돌아보며 재빠른 음성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군. 너는 종리세가로 가서 그쪽에 나타난 인물들이 누구누구인지 좀 더 정확하게 파악하고 오도록 해라.”

곡수는 노해광이 단순한 성동격서의 방법으로 종리세가를 건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으로는 불안한 생각이 드는 모양이었다.

적류문 쪽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화산파에서 비밀리에 불러들인 속가제자 출신의 고수들이 상당수 잠복해 있는 데다, 적류문 자체에서도 단단히 준비를 하고 있어서 어지간한 공격은 충분히 격퇴시킬 수 있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쪽으로 노해광의 공격이 시작되었다면 벌써 연락이 왔을 것이다.

이 희빈루에는 두기춘 외에도 화산파의 제자 칠팔 명이 주루의 이곳저곳에 퍼져 있었다. 그중 두 명은 바로 옆 탁자에서 언제든지 곡수의 지시를 따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곡수가 굳이 두기춘에게 지시를 내린 것은 그만큼 평상시 그의 일처리나 행동거지가 깔끔하고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두기춘이 주루를 벗어날 때까지도 곡수는 우두커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가슴 한구석에 도사리고 있는 희미한 불안감 때문인지 그의 안색은 평상시와 달리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 ☆ ☆

종리세가는 서안의 서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대대로 서안 일대에서 유력한 명문호족이었으며, 군부와 관부에 나름대로의 영역을 뿌리내려 상당히 탄탄한 세력을 구축했다. 자연스레 서안의 상계에 뛰어든 종리세가는 자체 전장(錢莊)과 상단을 가지고 있었고, 비단과 마시장, 미곡 등 여러 방면에 두루 진출해 있었다.

특히 그들은 혈족(血族)을 우선시하여 다른 어느 상가보다도 단단한 결속을 자랑했고, 단일 가문으로는 이씨세가를 제외하고는 서안의 어느 가문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종리세가의 총관인 종리염(鍾里廉)은 그런 종리세가의 전통을 다른 누구보다도 자랑스러워하는 인물이었다.

지금 종리염은 눈앞에 내밀어진 배첩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배첩이 형식에 어긋났거나 수준 미달의 인물이 보냈기 때문은 아니었다. 배첩의 내용은 정중했으며, 글자 하나하나에 힘이 담겨 있었다. 뿐만 아니라 배첩에 적힌 명호는 서안은 물론이고 천하의 어느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대단한 것이었다.

<대종남파(大終南派) 이십대 제자 하동원.>

이십대라면 당금 천하를 온통 뒤흔들고 있는 그 유명한 신검무적보다 한 배분이 높았다. 다시 말해서 이 배첩을 보낸 사람은 신검무적의 사숙인 것이다.

강호의 어느 누가 신검무적의 사숙을 무시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격하여 버선발로 달려 나갈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나 종리염은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곤란하군. 정말 곤란한 일이야.”

종리세가는 오래전부터 화산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었다. 최근에 화산파가 서안에 본격적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종리세가는 그들의 힘을 등에 업고 상단의 영향력을 높이는 데 치중하고 있었다. 심지어 화산파에서 손노태야를 압박하는 데 상당 부분 도움을 주기까지 하여 지금은 완전히 그들과 한배를 탄 형국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화산파와 종남파가 언제 격돌할지 모르는 흉흉한 분위기 속에서 종남파의 장문인인 신검무적의 사숙이란 자가 불쑥 찾아왔으니 이를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지 막막했던 것이다.

하동원이란 자는 그동안 전혀 안면도 없는 사이였고, 심지어는 이름조차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는 인물이었다. 더구나 지금 종리세가에는 화산파의 장로 두 사람과 적지 않은 수의 고수들이 머물러 있었다.

이런 민감한 시기에 대체 종남파의 고수가 무슨 일로 종리세가를 찾아온단 말인가?

종리염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하동원이란 자가 찾아온 이유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종리염의 시선이 배첩을 들고 온 경비무사에게로 향했다.

“몇 사람이나 왔다고?”

“모두 다섯 사람이었습니다.”

“애매한 숫자로군. 설마 시비를 걸러 온 것은 아닐 테고…….”

말을 해놓고도 혹시나 그런 일이 벌어질까봐 종리염은 공연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당당한 명문정파인 종남파의 고수들이 그런 무도한 일을 벌일 리도 없고, 설사 그런 일이 벌어진다 할지라도 화산파의 장로들이 있는 이상 충분히 그들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하나 그렇게 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종리세가가 입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들이 모두 종남파의 고수들이냐?”

경비무사는 머뭇거리다가 자신 없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한 두 사람은 종남파의 고수들임이 분명하지만, 그 외에는 확실치 않습니다.”

“확실치 않다니?”

“종남파의 고수라고 하기에는 인상착의가 소문으로 듣던 것과 전혀 다른 인물들도 있어서 속단할 수가 없습니다.”

종남파의 고수들은 그 수가 그리 많지 않아서 적어도 서안 일대에서는 그들 개개인의 신상내력이나 외모가 상당히 널리 퍼진 상태였다. 경비무사는 종리세가의 정문을 지키는 인물답게 제법 눈썰미가 뛰어난 편이어서, 그가 알아보지 못했다면 종남파의 고수가 아닌 자들도 섞여 있음이 분명했다.

“알았다. 일단 그들을 객청으로 안내해라.”

“알겠습니다.”

경비무사가 나가자 종리염은 자신도 자리에서 일어나 내실로 들어갔다. 이번 일은 혼자 고민해서는 안 되는 일임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린 것이다.

종리염의 보고를 받은 종리세가의 가주 종리단형(鍾里丹衡)은 즉시 화산파의 장로인 함천옹 연일환과 번천수 고성진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하동원이라고?”

연일환은 처음 듣는 이름인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성진을 바라보았다.

“자네는 종남파에 그런 이름의 고수가 있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나?”

고성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처음 듣는군.”

“신검무적의 사숙이라면 철면호 노해광 하나뿐이라고 알고 있는데 어디서 이런 뚱딴지같은 작자가 나타난 거지? 가만…….”

연일환은 무언가 생각이 난 듯 무릎을 쳤다.

“얼마 전에 종남파를 떠났던 철면호의 사제 한 사람이 종남파로 돌아왔다고 하더니 그자인 모양이군. 그래, 맞아. 하씨 성의 고수라고 했어.”

“그렇다면 신검무적의 사숙이란 게 틀린 말은 아니로군.”

“그런 셈이지.”

“그자가 이곳에는 왜 왔다고 생각하나?”

“그야 나도 모르지.”

연일환이 싱겁게 대꾸하자 고성진은 피식 웃었다.

“머리 굴리는 일은 자네가 좋아하는 취미이지 않나? 그 잘 돌아가는 머리 좀 굴려서 생각해 보게. 홀연히 나타난 신검무적의 사숙이 왕래도 없던 종리세가에 무슨 일로 찾아온 것일지 말일세.”

“둘 중의 하나일 테지.”

“둘 중의 하나라니?”

“사람들이 상단에 찾아오는 이유가 뭐겠나? 상행이나 금전적인 이유 때문이든지 아니면…….”

“아니면?”

연일환의 눈에 날카로운 빛이 번뜩이고 지나갔다.

“종리세가에 우리들이 머물러 있는 것을 알고 우리를 보러 온 것이겠지.”

“그럴듯하군. 둘 중 어느 것이라고 생각하나?”

“내가 무슨 점쟁이라도 되는 줄 아나? 다만 그가 정식으로 자신의 신분이 적힌 배첩을 내밀었다는 점은 주목해 볼 필요가 있네.”

고성진은 그의 말뜻을 알아들은 듯 즉시 말을 받았다.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종남파의 공무로 왔다는 말이로군.”

“그래. 종남파에서 종리세가에 돈을 빌리거나 상거래를 할 리는 없으니 우리를 찾아왔을 가능성이 높네.”

“신검무적의 사숙이 화산파의 장로를 만나러 온 것이라……. 만나줄 텐가?”

“피할 이유가 없지 않나? 소문으로 듣던 신검무적의 새로운 사숙이 어떤 자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말일세.”

“그렇다면 같이 나가보세. 어떤 간 큰 작자가 감히 우리를 만나러 왔는지 나도 보고 싶네.”

하동원의 첫인상은 다소 우스꽝스러웠다. 무인(武人)답지 않게 키는 작고 몸은 뚱뚱했으며, 눈을 가늘게 뜨고 실실 웃고 있어서 어딘가 모자란 사람처럼 보였다.

“하하. 강호에 명성이 대단한 함천옹과 번천수를 직접 보게 되다니 실로 금생의 영광이 아닐까 하오.”

얼굴이 일그러지도록 활짝 웃으며 연신 허리를 굽신거리는 하동원을 보고 연일환과 고성진은 어안이 벙벙한 모습이었다.

당당한 한 문파의 선배고수이며 장문인의 사숙인 자가 어찌 이리도 경망스럽단 말인가? 고고한 화산파의 기풍 속에서 평생을 살아왔던 그들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래도 인사를 하지 않을 수는 없어서 연일환은 살짝 포권을 했다.

“반갑소. 나는 연일환이라 하오.”

“고성진이오.”

두 사람의 인사에 하동원은 다시 몇 번이고 허리를 굽혔다.

“하동원이라 하오. 촌구석에서만 살다 온 무지렁이라 아는 것이 별로 없으니 실수를 하더라도 두 분이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 주셨으면 하오.”

그가 처음부터 너무 저자세로 일관하니 연일환은 오히려 경계하는 마음마저 들었다.

한쪽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종리단형과 종리염은 어처구니가 없는지 실소를 터뜨리는 모습이었다.

그때 하동원의 뒤에 서 있던 백의 청년이 앞으로 성큼 나섰다.

“종남파의 이십일대 제자인 정해가 두 분을 뵙습니다.”

정해라는 말에 연일환과 고성진의 얼굴에 호기심 어린 빛이 떠올랐다.

연일환은 정해의 유난히 맑게 빛나는 눈빛과 총명함이 가득한 얼굴을 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바로 신검무적이 애지중지한다는 궤령낭군이로군.”

“알아주시니 감사합니다.”

정해의 태도는 예의를 잃지 않으면서도 당당하기 그지없어서 하동원과는 판이했다. 우연인지 정해의 날카로운 시선은 슬쩍 종리단형과 종리염을 훑고 지나갔다. 그 눈빛을 받자 두 사람은 움찔하여 표정이 굳어졌다.

그제야 그들은 자신들이 방금 신검무적의 사숙을 비웃었다는 것을 늦게나마 깨달은 것이다. 아무리 그들이 서안의 상계에서 이름을 날리는 자들이라고 해도 종남파 장문인의 사숙을 함부로 조롱할 수는 없었다.

그들이 어색한 표정으로 몸을 굳히고 있자 연일환이 분위기를 반전하려는지 정해의 옆에 서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다른 분들도 모두 종남파의 고제(高弟)들이신가? 하나같이 기개가 헌앙해 보이는군.”

정해의 옆에는 모두 세 명의 청년들이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서 있었는데, 확실히 겉으로 보기에도 모두 비범한 인상들이었다. 제일 좌측의 인물은 이십 대 중반쯤 된 준수한 미남자였는데, 전신에서 칼날같이 예리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어서 연일환조차 감탄할 정도였다. 그의 옆에 있는 청년은 그보다 몇 살 어려 보였는데, 눈빛이 정명하고 태도가 단정해서 누구나 호감이 일어날 용모였다.

가장 우측의 인물은 삼십 전후의 흑의인으로, 눈빛이 차갑고 얼굴에 아무런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아서 냉막한 인상이었다.

좌측의 미남자가 한 발 앞으로 나오며 연일환을 향해 포권을 했다.

“장성에서 온 조일평이라 하오.”

그의 이름을 듣자 평온을 유지하고 있던 연일환과 고성진의 얼굴이 모두 굳어졌다.

“마검 조일평?”

“자네가 일검혈견휴라 불리는 조일평이란 말인가?”

두 사람의 놀란 음성에 조일평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리고 이쪽은 내 사제인 풍시헌이라 하오.”

풍시헌이 인사를 하는 모습을 보고도 연일환과 고성진의 시선은 조일평의 얼굴에서 떠나지 않았다. 조일평의 등장은 그만큼 그들에게 커다란 놀라움을 선사한 것이었다.

연일환은 조일평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다 불쑥 입을 열었다.

“듣기로는 자네가 얼마 전에 수룡신군 황충을 쓰러뜨렸다고 하더군.”

“운이 좋았소.”

“운이든 어쨌든 자네 정도의 나이에 그런 일을 해낸 것은 정말 대단한 업적일세. 그리고 그때 상당히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고 들었네.”

조일평의 대답은 똑같았다.

“운이 좋았소.”

연일환은 한동안 조일평의 안색을 살폈으나 어디에서도 부상당한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확실히 운이 좋았던 모양이군. 황충을 상대하고도 이토록 멀쩡한 걸 보면 말일세.”

시비를 거는 말투는 아니었으나 듣기에 따라서는 다분히 기분이 나쁠 수도 있는 말이었다. 하나 조일평은 묵묵히 고개만 끄덕이고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마치 자신은 오늘 일의 주재자가 아님을 나타내듯이 말이다.

연일환의 시선은 제일 우측에 서 있는 흑의인에게로 향했다. 하나 흑의인은 입을 굳게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설마 이 자는 화산파의 장로가 먼저 인사를 청해 오기를 기다리기라도 한단 말인가?

연일환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질 때, 시의적절하게 하동원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끼어들었다.

“하하. 그렇지 않아도 우리가 오늘 이곳에 온 것은 바로 이분 때문이었소.”

“그게 무슨 말이오?”

“얼마 전에 이분이 화산파의 인물과 사소한 문제가 발생해서 우리에게 중재를 요청했소. 나로서는 그의 청을 거절할 수 없어서 두 분이 머물러 있다는 말에 염치 불구하고 이곳까지 달려오게 된 거요.”

연일환은 영문을 몰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구려. 이자가 누구이기에 본 파의 제자와 문제가 발생했다는 거요? 그리고 왜 하필이면 귀하가 나서서 그 일을 중재하려는 거요?”

하동원은 뚱뚱한 얼굴에 느긋한 미소를 매달았다.

“한 가지씩 차근차근 설명해 주겠소. 어차피 남는 건 시간뿐이니 말이오.”

그의 천연덕스러운 말에 연일환은 그저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 ☆ ☆

진패(陳貝)는 심호흡을 했다.

‘침착하자. 단순한 일일 뿐이야.’

그는 떨리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마음속으로 뇌까렸다.

‘어렵지 않아. 늘 하는 일에 한 가지만 더하면 되는 거야. 그러면 이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

마침 자신을 본 말들이 투레질을 했다. 오랫동안 동고동락을 해온 말들을 보자 진패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부지게 바로잡을 수 있었다.

손에 흥건히 고여 있던 식은땀을 슬쩍 바지에 문질러 닦은 진패는 말의 갈기를 몇 차례 쓰다듬고는 마차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차를 몰아 얼마쯤 가니 화려하기 그지없는 거대한 대문이 나타났다. 하나 진패의 목적지는 그 대문이 아니었다. 대문 옆의 담벼락을 따라 조금 더 가자 그보다 작기는 하지만 마차가 지나가기에는 충분한 크기의 문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문을 두드리자 장검을 찬 무사가 문을 열고 나와서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진패는 활짝 열린 문으로 마차를 몰고 들어갔다. 이상하게도 그토록 떨리던 가슴이 평상시처럼 차분해졌다.

커다란 창고가 보이자 진패는 마차를 멈추고 마차 뒤에 실린 물건들을 조심스레 내리기 시작했다. 그가 내린 물건들은 술이 가득 담긴 항아리들이었다.

진패는 술을 나르는 술도가의 마부였던 것이다.

☆ ☆ ☆

“종리세가에 온 자가 철면호의 사제라고?”

두기춘의 보고를 받자 곡수는 자신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렇습니다. 스스로를 하동원이라고 밝힌 인물이 네 명의 고수들을 데리고 찾아왔다고 합니다.”

“하동원이라면 확실히 얼마 전부터 소문이 난 종남파의 새로운 고수이긴 하지. 그런데 그 자가 대체 무슨 일로 종리세가를 찾아온 것이냐?”

“같이 온 일행 중 금조명이란 자의 일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말에 곡수의 음성이 높아졌다.

“잠깐. 금조명이라고? 그자가 하동원과 동행했단 말이냐?”

“그자 외에도 궤령낭군과 마검 조일평, 그리고 그의 사제가 함께 왔다고 하더군요.”

좀처럼 냉정을 잃지 않던 곡수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금조명에 궤령낭군, 그리고 조일평? 정말 그들이 확실하더냐?”

“저는 직접 보지 못하고 총관인 종리염에게 들었습니다. 종리염의 말로는 확실하다고 하더군요. 연 장로님께서 직접 확인하셨다고 했습니다.”

곡수는 당혹스런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철면호가 비장의 수법으로 숨기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자들이 모두 종리세가에 나타났으니……. 혹시 철면호의 진정한 목표가 적류문이 아니라 종리세가인 것이 아닐까?’

곡수는 불안한 생각이 들어 순간적으로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으나 이내 심호흡을 하고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생각해 보자. 하동원이 혼자만의 생각으로 종리세가에 왔을 리는 없다. 필시 철면호가 보낸 것일 텐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을 굴리던 곡수는 문득 자신이 놓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황급히 물었다.

“하동원이 종리세가를 찾아온 것이 금조명의 일 때문이라고?”

“예. 얼마 전에 금조명이 본 파의 고수와 충돌한 적이 있었는데, 그에 대한 중재를 부탁해서 종리세가에 머물러 있는 장로님들을 방문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 헛소리를!”

곡수는 버럭 소리를 지르려다 간신히 억눌러 참았다.

금조명이 화산파의 고수와 충돌한 것은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 때문에 방태동을 제거하고 방보당을 흡수하려던 자신의 계획이 성사 직전에 실패하여 커다란 낭패를 당하지 않았는가?

매화사절 중의 한 명인 북문도는 당시의 싸움에서 패한 충격으로 아직도 유화상단의 후원에서 칩거를 하고 있었다.

그자의 정확한 정체를 파악하지 못해 언제고 정체를 알게 되면 반드시 복수하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제 발로 모습을 드러냈을 뿐 아니라 당시의 일을 중재해달라고 종남파를 찾아갔다니 곡수로서는 너무도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금조명은 노해광의 부하가 아니다. 북문도를 이길 때의 무공을 보면 매화사절 중의 누구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렇다면 역시 검마와 관련이 있는 자일까?’

곡수의 머릿속은 여러 가지 단상들 때문에 눈부신 속도로 돌아가고 있었다.

‘만약 그렇다면 검마의 자식이 무엇 때문에 종남파를 도와 본 파를 적대시한단 말인가? 더구나 일부러 종남파에 중재까지 부탁하다니 도무지 무슨 속셈인지 알 수가 없구나.’

곡수는 복잡하게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기 위해 불필요한 사안들은 한 가지씩 빼놓기로 결심했다.

‘일단 불안요소로 생각했던 금조명과 마검 조일평, 그리고 하동원이 모두 종리세가에 모여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다행스런 일일 수도 있다. 그들이 설사 그곳에서 무슨 수작을 부리려 할지라도 두 분 장로님과 매화사절의 세 사람이 버티고 있는 이상 종리세가를 어쩔 수는 없을 것이다.’

연일환이 금조명을 상대하고 고성진이 조일평을 막는다면, 하동원과 궤령낭군은 매화삼절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하동원이 신검무적의 사숙이라고 해도 강호에 전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무공은 그다지 뛰어난 인물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만약 그들이 종리세가를 공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 때문에 종리세가를 찾아갔느냐 하는 것이었다.

곡수는 처음부터 중재 운운하는 말 따위는 추호도 믿지 않았다. 그런 한가한 일을 하기에 지금은 너무도 긴박하고 위태로운 시기였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곡수는 급히 물었다.

“적류문은 어찌 되었느냐? 그쪽으로는 아무 움직임도 없었느냐?”

두기춘이 무어라 대답하려 할 때 마침 동개가 황급히 이층으로 올라왔다.

“마침내 적류문에서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자세히 말해 보거라. 어떻게 된 상황이냐?”

“흑선방의 무리들이 연막탄을 던져 일대를 혼란하게 한 사이 노해광의 부하들이 적류문을 습격했습니다. 초희와 강표, 마정기를 비롯한 노해광의 수하 대부분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렇다면 하동원과 조일평 등이 종리세가로 간 것은 본 파의 다른 고수들이 적류문을 지원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란 말인가?”

곡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다가 다시 물었다.

“상황은 어떠하냐?”

“처음에 흑선방의 습격이 워낙 교묘하여 잠복해 있던 속가들의 피해가 예상보다 커졌습니다. 하지만 적류문에서 준비를 잘한 덕분에 전황은 팽팽한 편입니다.”

“만약 더 이상의 지원이 오지 않는다면 어찌 될 것 같으냐?”

동개는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으나 이내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양쪽 다 지원이 오지 않는다면 결국 양패구상일 뿐입니다. 상당히 많은 인원들이 죽을 겁니다.”

“그래도 어쨌든 막기는 하겠지?”

“그렇습니다. 철면호 쪽도 피해가 막심할 테니 말입니다.”

곡수는 아직도 무언가 미진함을 느끼는 모습이었다.

“철면호가 이 정도도 예측하지 못했을 리는 없을 텐데……. 단순히 본 파의 개입을 막기 위해서 자신이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패들을 모두 종리세가로 보낸다? 철면호답지 않은 어설픈 수 아닌가?”

곡수의 시선이 무심결에 길 건너편에 있는 하선루의 삼층으로 향했다. 반쯤 열린 창문 사이로 유유자적하게 술을 마시고 있는 철면호의 모습이 보였다.

곡수는 활짝 웃고 있는 철면호의 얼굴이 마치 자신을 비웃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가 노리는 수가 반드시 더 있을 것이다. 철면호라면 반드시 그러할 것이다. 그게 무언지 알아야 한다.’

바로 그때 누군가가 이층으로 뛰어 들어왔다. 어찌나 다급했는지 그는 계단을 통하지도 않고 창문을 통해 들어왔다.

들어온 사람은 백의 무복을 입은 화산파의 제자였다. 곡수는 그가 유화상단에 머물러 있는 화산파의 일대제자 천개방임을 알고 안색이 대변했다.

“큰일 났습니다.”

평소에는 침착하기 그지없던 천개방의 얼굴은 다급함으로 가득 차서 다른 사람 같았다.

“무슨 일이냐?”

“유화상단에 불이 났습니다.”

“불이라니?”

“유화상단 뒤쪽 주방의 술창고에서 큰 불이 나서 삽시간에 상단 전체로 퍼지고 있습니다.”

뜻밖의 말에 곡수는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곡수뿐 아니라 두기춘과 동개도 당황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유화상단은 고수들의 수도 많을 뿐 아니라 화산파의 제자들이 휴식을 취하기 위해 상당수가 머물러 있는 곳이었다. 그 정도의 인원이라면 어떠한 침입이라도 능히 격퇴할 수 있기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그곳에서 큰 불이 났다면 자칫 그들 대부분이 위험할 수도 있었다.

“대체 어떻게 술창고에서 불이 났단 말이냐? 그리고 그 정도의 불이라면 유화상단의 능력으로 충분히 진압할 수도 있지 않느냐?”

“마치 술창고에 화탄이 터진 것처럼 강력한 폭발이 있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누군가가 화약을 뿌려놓은 듯 순식간에 불이 주방을 넘어 사방으로 번져나가는 바람에 유화상단의 인원만으로는 도저히 진화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계획적인 방화(放火)란 말이군.”

중얼거리던 곡수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다시 하선루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 공교롭게도 술잔을 든 채 창문 너머를 보고 있던 노해광의 시선이 그와 마주쳤다. 희빈루의 창문을 가리고 있던 차양이 조금 전 천개방이 뛰어 들어오면서 떨어져 나가는 바람에 희빈루 안이 그대로 들여다보인 탓이었다. 노해광은 화들짝 놀란 듯 황급히 고개를 돌렸으나, 곡수는 분명히 볼 수 있었다. 고개를 돌리기 전 노해광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감돌고 있는 것을.

‘유화상단의 불은 철면호의 수작이다!’

곡수의 마음속에 한 가지 확신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때 곡수는 자신과 시선이 마주치자 당황하여 고개를 돌린 노해광의 모습에서 한 가지 이상한 점을 찾아냈다. 누구보다 성격이 담대하고 배짱이 좋은 노해광이 단순히 시선이 마주친 것만으로 그렇게 놀라는 것은 전혀 그답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노해광은 술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중요한 일을 앞두고는 입에도 대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었다.

몇 가지의 상념이 곡수의 머릿속을 번갯불처럼 질주했다.

노해광은 오늘따라 유난히 서안의 거리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니며 긴 시간 동안 상인들의 인사를 받고 다녔다.

노해광이라면 하선루 건너편의 희빈루가 화산파에 이미 장악된 것을 알고 있을 텐데도 그는 태연히 하선루에서 중요한 모임을 개최했다. 그리고 모임을 하면서 일부러 보란 듯이 창문을 반쯤 열어놓고 있었다. 그런 중요한 모임이라면 전혀 안을 들여다볼 수 없는 비밀스런 장소에서 하는 것이 당연한데도 말이다.

그리고 노해광의 부하 중에는 누구보다도 변장에 능한 인물이 있다.

곡수는 얼굴을 붉히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천면묘객 하응……!”

하동원이 숨겨두었던 고수들을 잔뜩 데리고 종리세가로 간 것도, 노해광의 부하들이 모두 적류문과의 싸움에 투입된 것도 진정한 목표를 가리기 위함이었다.

노해광의 목표는 처음부터 유화상단이었다. 노해광은 하응을 자신으로 분장시켜 곡수의 이목을 끈 후 자신은 비밀리에 유화상단을 화마(火魔)에 휩싸이게 한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곡수는 종리세가와 적류문 중에서 노해광이 어느 곳을 노리는지에만 골몰해 있었다. 만약 유화상단이 이대로 무너진다면 종리세가나 적류문의 멸문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커다란 충격이 화산파에 가해질 것이다.

그때 천개방의 급한 목소리가 생각에 잠긴 곡수를 일깨웠다.

“빨리 가보셔야 합니다. 유화상단의 후원에는 북문도 사형과 해정설 장로께서 머물러 계시는데, 그분들의 거처 쪽으로 불길이 번지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듣자 곡수는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가자!”

이대로 노해광의 노림수에 당한 것을 후회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늦기 전에 피해를 최소화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더구나 북문도와 해정설은 화산파에서도 중요한 인물들이므로 그들 중 누구도 희생되어서는 안 되었다.

곡수를 필두로 두기춘과 동개 등 화산파의 고수들이 천개방의 뒤를 따라 전력을 다해 유화상단으로 달려갔다.

“이쪽으로.”

천개방은 유화상단의 정문이 아닌 다른 길로 안내했다.

“정문 쪽은 지금 불을 피하는 사람들과 끄려는 사람들로 혼잡해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이쪽으로 가시면 후원으로 바로 갈 수 있습니다.”

천개방의 설명에 곡수는 대답할 정신도 없는지 고개만 간단하게 끄덕거렸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유화상단의 거대한 장원이 검은 연기에 휩싸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불길이 얼마나 거대하던지 매캐한 연기와 후끈한 열기가 백여 장 밖에서도 선명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천개방은 근처의 지리에 익숙한 듯 복잡한 서안의 골목을 이리저리 달려갔다. 질풍처럼 달려가는 그 속도에 못 이긴 화산파의 제자들이 하나둘씩 떨어져 나가고, 곡수를 비롯한 서너 명의 일대제자들만이 그의 뒤를 따라 유화상단의 뒷골목을 달려 나갔다.

얼마쯤 갔을까? 불길이 한결 거세게 느껴지는 커다란 담벼락을 막 돌았을 때, 갑자기 굉음과 함께 양쪽 담벼락이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콰앙!

“앗?”

부서진 돌조각과 자욱한 먼지와 함께 후끈한 열기가 강력하게 다가왔다.

담벼락이 무너진 공간은 거의 십여 장에 달했다. 덕분에 곡수의 뒤에서 쫓아오던 두기춘을 비롯한 동개와 일대제자들은 무너진 담벼락의 잔해로 인해 곡수와 완전히 분리되고 말았다.

“콜록.”

연기와 먼지로 앞을 제대로 분간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곡수는 소맷자락으로 입과 코를 막으며 자신의 앞에서 달려가던 천개방의 행방을 찾았다.

멀지 않은 곳에 천개방의 모습이 보이자 곡수는 그쪽으로 신형을 날렸다. 막 그가 천개방에게로 다가가는 순간, 천개방이 갑자기 그 자리에 넙죽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가 방금 서 있던 공간에서 하나의 붉은 뇌전이 튀어나왔다.

그것은 그야말로 너무도 갑작스럽고 예상치 못한 일이어서 곡수로서는 피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팟!

“크윽!”

곡수의 입에서 답답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가슴을 작렬하는 듯한 통증에 눈을 부릅뜬 곡수는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붉은 빛이 감도는 하나의 창이 그의 심장을 정확히 관통해 있었다.

곡수의 시선이 천천히 올라가 그 창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날렵한 체구에 유난히 눈빛이 형형한 중년인이었다. 그 중년인을 보자 곡수는 한 사람의 이름이 떠올랐다.

“당…… 당신은 초가보주의 수신대장이었던…….”

중년인은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바로 우문화룡이오.”

“당신이 어떻게…….”

곡수는 무언가를 물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누구보다 총명한 그의 머리로 지금의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를 모를 리 없었다.

“그렇군. 모든 건 철면호의 솜씨로군.”

우문화룡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곡수의 얼굴이 다시 한쪽으로 움직였다. 바닥에 넙죽 주저앉아 있던 천개방이 빙글거리며 일어났다.

“너, 너는 천개방이 아니구나…….”

천개방은 피식 웃으며 슬쩍 얼굴을 매만졌다. 천개방의 얼굴이 사라지며 평범한 인상의 장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하응이라 하오, 곡 나으리.”

“네가 하응이라고? 그렇다면…….”

그제야 곡수는 오늘 일의 진상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철면호의 목적은 애초부터 유화상단이나 종리세가가 아니었다. 그들을 물리쳐봤자 어차피 그들은 화산파의 수족들에 불과할 뿐이었다.

노해광은 화산파와의 정면대결이 머지않았음을 깨닫고 화산파에 가장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부분을 물색했다. 그리고 마침내 한 가지 방안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것은 팔다리가 아닌 머리를 직접 노리는 것이었다. 수족들을 상대해봤자 심신만 고달플 뿐이지만, 만약 머리를 잡을 수 있다면 몸통을 무찌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대상이 바로 신산 곡수였다.

노해광은 곡수의 시선이 계속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음을 최대한 이용하여 그의 마음속에 의구심을 불러일으켰고, 곡수는 그의 의도대로 진짜 노해광을 하응의 분신으로 의심했습니다.

그 바람에 하응의 존재를 머릿속에서 지웠고, 천개방이 자신을 유인할 때도 추호도 그를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변장에 능한 하응의 존재 때문에 때맞춰 나타난 천개방의 정체에 대해 한 번쯤은 의혹의 눈길을 보냈을 것입니다.

천개방으로 변한 하응은 곡수를 함정으로 유인하여 화산파 제자들과 격리시켜 마침내 우문화룡으로 하여금 완벽한 기회를 잡게 한 것입니다.

유화상단의 술창고에 접근할 수 있는 마부를 포섭하여 독주와 기름으로 화재를 일으킨 것도 작전의 중요한 한 부분이었습니다.

유화상단 대부분이 화재로 인한 검은 연기로 뒤덮였지만, 알고 보면 화재 자체는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단지 특수한 기름이 섞여 있어서 시커먼 연기와 뜨거운 열기가 보통 때의 화재보다 한층 더 심했을 뿐이었습니다.

그 바람에 곡수를 비롯한 화산파의 제자들 모두 유화상단이 온통 화마에 휩싸여 있다는 하응의 말을 철석같이 믿게 되었고, 함정 속으로 뛰어들게 된 것입니다.

만약 적류문이 정상적으로 활동했다면 노해광의 이런 움직임을 알아볼지도 몰랐으나, 그들은 흑선방의 습격에 대비하느라 잠시 모든 활동을 멈추었기에 전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노해광이 하동원을 종리세가로 보낸 것은 그곳에 있는 화산파의 고수들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고, 적류문으로 흑선방과 자신의 모든 수하들을 보낸 것은 그들의 눈과 귀를 가리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그 모든 일들은 사전에 치밀한 계획하에 준비된 것으로, 그중 단 한 가지라도 어긋났다면 오늘 일은 실패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하나 노해광의 계획은 완벽히 이루어졌고, 곡수는 결국 차가운 시신이 되어 서안의 뒷골목에서 쓰러져야만 했습니다.

이제 노해광은 자신의 의도대로 화산파의 머리를 베어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화산파와 종남파의 치열한 대결이 점차 종국으로 치닫고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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