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8권 열한기공(熱寒奇功)편 : 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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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28권 열한기공(熱寒奇功)편 : 4화


제 285 장 선상풍운(船上風雲)

계절은 점점 더워지고 있는데, 한수의 물살은 제법 차가웠다. 동중산은 그 물에 손을 담가보고는 이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물에 빠지는 일은 가급적 없어야겠군.”

옆에 있던 낙일방이 그 말을 들었는지 의아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물에 빠질 일이 뭐가 있겠어요?”

동중산은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매번 강을 건널 때마다 이런저런 일을 당했더니 강만 보면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게 되는군요.”

낙일방도 따라서 웃었으나 이내 정색을 했다.

“하지만 오늘은 왠지 조심해야 할 것 같군요. 장문사형이 안 계셔서 그런지 자꾸 불안한 생각이 가시질 않네요.”

“저도 이번에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죠?”

“장강십팔채의 방산동이 이대로 맥없이 물러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중인들의 시선이 모두 동중산에게 향했다. 동중산은 사람들이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음을 알고 조금 더 목소리를 높였다.

“한수를 건너면 바로 무당파의 영역입니다. 방산동이 만약 우리를 노리고 있다면 우리가 한수를 건널 때가 절호의 기회일 것입니다. 수공의 고수인 그로서는 절대적으로 유리한 상황이기 때문에 결코 그 기회를 놓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전흠이 퉁명스런 음성을 내뱉었다.

“제발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군. 깔끔하게 후환을 정리할 수 있을 테니 말이야.”

동중산은 전흠이 일전에 장강십팔채의 암습 때 상당히 악전고투했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때의 설욕을 하고자 하는 그의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가급적이면 별다른 일 없이 무사히 무당산에 도착했으면 하는 것이 동중산의 바람이었다.

낙일방의 말마따나 장문인인 진산월이 없기 때문에 더욱 그런 마음이 강한 것인지도 몰랐다. 진산월과 함께 떠난 낙일방이 곽자령을 무사히 구해온 것은 좋았으나, 그 과정 중에 부득이 진산월과 헤어졌음을 알고 종남파의 모든 사람들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것은 그만큼 진산월이 그들의 가슴속에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문득 동중산은 전흠 말고도 장강십팔채에 이를 갈고 있는 자가 한 명 더 있음을 떠올리고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손풍이 활활 타오르는 눈으로 이를 갈아붙이며 허공을 노려보고 있었다.

장강십팔채의 고수에게 한 대도 때리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기만 했던 손풍은 너무 억울하고 원통해서 그 뒤로 밤을 꼬박 새우며 무공연마에 매진해 왔다. 그 결과 어제 비로소 장괘장권구식을 모두 익히는 쾌거를 이룰 수 있었다.

장괘장권구식에 입문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이룩한 나름대로 놀라운 성과였다.

물론 그 안의 심오한 오의까지 터득한 것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형(形)만은 모두 익혀서 흉내라도 낼 수 있게 되었으니 손풍의 득의양양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정도로는 절대로 평범한 무림인조차 감당하지 못한다고 몇 번이나 말해도 손풍은 아랑곳하지 않고 복수의 날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동중산 또한 그동안 손풍이 얼마나 절치부심하여 전력을 기울여왔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그저 장강십팔채와 다시 부딪히는 일이 없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원래 그들은 며칠 더 제갈세가에 머물며 진산월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려 했으나, 자칫 그랬다가 일정이 꼬이면 무당산의 집회에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할지도 몰라서 아예 서둘러 길을 떠나기로 의견을 모았다. 어차피 진산월을 기다릴 바에는 제갈세가보다는 무당산이 더 낫다는 중론에 따른 것이다.

진산월이 빠졌음에도 제갈세가를 나선 그들의 숫자는 처음보다 오히려 늘어 있었다.

생사 여부조차 불투명했던 뇌일봉은 다행히 간신히 목숨은 구할 수 있었다. 문제는 유중악의 다른 친구들이었다.

곽자령은 부상이 심해 당연히 제갈세가에 머물러 있어야 했건만, 부득부득 그들을 따라가겠다며 길을 따라나섰다. 유중악의 생사만이라도 알 수 있을 때까지는 절대로 마음 편히 누워 있을 수 없다는 그를 아무도 제지할 수 없었다.

제갈도는 곽자령의 부상이 재발할 것을 염려해 자신도 동행하겠다고 나섰고, 그 바람에 제갈세가의 호위 몇 사람이 급히 가세했다. 게다가 흑삼객 임지홍 또한 기필코 유중악을 만나야 할 사정이 있다며 일행에 끼어들어 무당산으로 향하는 행렬의 숫자가 삽시간에 배로 불어나고 말았던 것이다.

그나마 길안내를 하겠다며 따라오려는 동천표를 떼어놓은 것이 유일한 성과라고 할 수 있었다. 동천표는 거듭된 부상으로 제대로 운신(運身)조차 하지 못하면서도 이 일대의 지리는 자신이 가장 정통하다며 억지로 몸을 움직이려다 다시 드러눕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종남파의 사람들은 유중악의 친구들이 하나같이 자신의 안위보다는 유중악을 위해서 몸을 사리지 않는 것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점잖게만 보였던 유중악의 친구들은 막상 일이 닥치자 누구보다 뜨거운 성정(性情)을 가진 열혈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점점 각박해지는 강호무림에서 좀처럼 보기 드문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제갈세가에서 무당산으로 가는 중간에 펼쳐진 벌판의 강변이었다. 탁 트인 벌판 한복판에 한수가 흐르고 있었고, 그 너머로 유난히 푸른 빛을 띠는 무당산이 환히 시야에 들어왔다.

날씨도 제법 좋아서 평상시였다면 강과 산이 어우러진 주위의 경치에 시선을 빼앗겼을 것이나, 지금은 모두 한수를 건널 생각에 마음이 급해져 있었다. 동중산의 말대로라면 한수를 건너는 일 자체가 결코 수월하지 않을 가능성이 농후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보다 먼저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고 돌아온 동중산이 일행의 우두머리격인 성락중에게 다가왔다.

“저 앞쪽에 제법 큰 나루터가 있습니다. 마침 작은 주막이 있기에 주막의 주인에게 물어보니 일각 후쯤에 강 건너편으로 출발하는 배가 있다고 합니다. 그 배를 타시겠습니까?”

“자네가 볼 때는 어찌했으면 좋겠나?”

“주막 주인의 말대로라면 배가 그리 작지 않아서 우리 일행이 모두 타기에 충분한 것 같습니다. 다른 손님이 몇 사람 있기는 하나 특별히 의심이 가는 인물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동중산이 에둘러 말했으나 그것은 곧 그 배를 타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성락중은 별다른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곳으로 가세.”

성락중은 그동안의 여정으로 동중산의 일처리가 무척이나 꼼꼼하고 빈틈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웬만한 일은 모두 그에게 일임하고 있었다. 조금 전에도 그 짧은 시간에 동중산은 나루터를 운행하는 배와 손님들에 대해 나름대로 세밀한 조사와 관찰을 한 모양이었다.

배분이 두 배나 높은 성락중이 동중산의 의견을 묻는 광경은 종남파 고수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낯설고 기이한 장면이었을 것이다. 제갈도를 비롯한 제갈세가의 사람들은 강호의 유구한 명문정파 중 하나인 종남파의 법도가 그리 깐깐하지 않다고 생각하며 얼마쯤 신기해하고 있었다.

원래 역사와 전통이 오랜 문파일수록 문규(門規)가 엄격하고 상명하복을 철저히 지킨다는 특성이 있었다. 특히 구대문파같이 명문정파로서의 자부심이 강한 문파들은 서열을 중시하고 하극상(下剋上)은 절대로 용인하지 않아서 지금처럼 배분이 차이 나는 아랫사람에게 의견을 묻는 경우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하나 종남파는 문도의 수가 그리 많지 않은 데다 워낙 어렵고 험한 시기에 생존을 최우선으로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어서 다른 문파에 비해 서열이나 배분을 크게 중시하지 않았다. 때문에 진산월이 ‘종남파에 법도는 없다. 어떤 일이 있어도 살아남는 것이 유일한 법도다’라고 말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당혹해했던 것이다.

얼마쯤 가니 과연 나루터가 모습을 보였다. 손님들이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작은 건물이 있고, 한쪽에는 <주(酒)>라고 쓰인 깃발이 내걸린 간이 주막도 있어서 제법 운치가 있어 보였다. 주변에 인가가 거의 없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제법 잘 갖추어진 나루터였다.

제갈도가 이 근처의 지리를 잘 아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양양에서 무당산으로 가는 길 중에서 이쪽이 제법 길이 잘 닦여 있어서 향화객(香火客)들이 많이 다니는 편이오. 나도 무당산을 갈 때 이 나루터를 몇 번 이용한 적이 있었소.”

다행히 오늘은 손님이 그리 많지 않아서 그들 일행을 제외하고는 여섯 사람에 불과했다. 그들 중 두 명은 등짐을 짊어진 상인들이었고, 두 명은 주름살이 가득하고 허리가 구부정한 늙은 부부였으며, 다른 두 명은 연인처럼 보이는 젊은 남녀였다.

그중에서도 젊은 두 남녀가 유난히 중인들의 시선을 끌었다. 그들은 찰싹 달라붙은 채 쉴 사이 없이 무언가를 속삭이고 있었는데, 가끔 나직하게 웃으며 서로를 바라보는 모습이 보는 사람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걸리게 만들었다.

손풍은 그 모습이 부러운지 연신 그들을 훔쳐보더니 아쉬운 입맛을 다셨다.

“좋을 때다. 나도 작년에는 저런 시절이 있었는데……. 화월루의 그녀들은 모두 잘 있겠지?”

옆에서 그의 중얼거림을 듣게 된 동중산은 흘러나오는 한숨을 억지로 눌러 참았다.

‘손 사제도 참 어지간하군. 전 사숙이라도 들으면 어쩌려고…….’

그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손풍은 입가에 피식피식 실없는 미소까지 지으며 주절거렸다.

“저 야들야들한 살결하며 풍만한 몸매까지 딱 화월루의 소앵(小鶯)이 생각나는구나. 얼굴이라도 보게 고개 좀 돌려보지. 옳지, 그렇게…….”

손풍의 말이 점점 도를 넘어서고 있다고 생각한 동중산이 황급히 그를 제지하려 했으나 그때 젊은 남녀 중 여인이 갑자기 고개를 홱 돌리며 손풍을 쏘아보는 것이었다. 그녀의 눈빛이 너무 날카로워서 천하의 손풍도 순간적으로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왜 그래? 아는 사람이라도 있어?”

여인의 앞에 있던 남자가 어리둥절하여 묻자 여인은 언제 그런 표정을 지었나 싶게 원래의 얼굴로 돌아오며 그를 향해 생글생글 웃어 보였다.

“아니에요. 어디서 날파리가 왱왱거리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아서요.”

그 말에 손풍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하나 동중산은 오히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저 거리에서 손 사제가 하는 말을 들었단 말인가?’

그녀와 손풍 사이의 거리는 오 장이 넘었고, 손풍의 음성 또한 중얼거림에 가까워서 같은 일행 중에도 제대로 들은 사람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여인의 모습을 보면 아무래도 손풍이 중얼거리는 말을 듣고 순간적으로 분기가 치밀어 오른 것 같았으니, 동중산으로서는 그녀의 경이적인 청력에 놀라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여인은 다시 남자를 향해 요염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내가 다른 남자에게 관심을 둘까 신경이 쓰이는 거지요?”

남자는 뚱한 표정으로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무슨 쓸데없는 말을 하는 거야? 내가 왜 그런 걸로 신경을 쓰겠어?”

“당신은 자기보다 잘생긴 남자만 보면 묘하게 긴장하는 버릇이 있어요. 지금도 코를 실룩거리고 있는데, 그게 바로 당신이 긴장할 때 나오는 습관이에요.”

남자는 신경질적으로 자신의 코를 잡았다.

“긴장하기는. 내 코가 어떻다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여인은 그런 그의 모습이 사랑스러운지 연신 얼굴에 미소를 매달았다.

“호호. 그렇게 코를 잡고 있으면 안 움직일 줄 알아요? 아무튼 긴장하지 말아요. 그간 잘생긴 남자들은 하도 보아서 나는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대체 여기에 내가 긴장할 만큼 잘생긴 자가 어디 있다고 그래?”

“시치미를 떼긴. 아까부터 당신이 자꾸 저쪽을 힐끔거리는 걸 내가 모르는 줄 알아요?”

그녀가 슬쩍 어느 한 방향을 향해 턱짓했으나 남자는 그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심통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몰라. 난 그런 적 없어.”

그들의 대화에 유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던 손풍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며 큰 소리로 물었다.

“나를 말하는 거요?”

여인은 이게 무슨 개소리냐는 듯 그를 흘겨보았다. 조금 살집이 있기는 했으나 선이 곱고 눈빛이 요염한 여인이 흘겨보는 시선은 묘한 매력을 느끼게 했다. 손풍의 얼굴에 자신도 모르게 웃음기가 감돌았다.

“방금 소저가 턱으로 나를 가리키지 않았소?”

동중산은 어처구니가 없어 그 입을 틀어막으려 했으나 이미 손풍의 음성은 중인들의 귀에 똑똑히 들린 후였다.

여인은 물론 남자도 아무 말 없이 멀거니 손풍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손풍은 한 차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보려면 힐끔 거리지 말고 똑바로 보시오. 원래 생긴 게 이러니 몇 번 본다고 닳지도 않을 테니 말이오.”

한동안 물끄러미 손풍을 쳐다보던 남자가 귀를 후비더니 심드렁하게 말했다.

“저자가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우리가 하는 말이 자기를 가리키는 줄 알았나 봐요.”

“무슨 말?”

“당신이 긴장할 만큼 잘생긴 남자가 여기 있다는 말 말이에요.”

“저자는 거울도 한 번 본 적이 없단 말인가? 어떻게 저런 낯짝을 가지고 그런 착각을 할 수가 있지?”

“그래서 내가 아까 날파리 한 마리가 왱왱거리고 있다고 했잖아요.”

“그게 저자를 말한 거였어? 어쩐지……. 난 또 웬 정신 나간 자가 우리를 보고 아는 척을 하나 했지.”

두 남녀의 말을 듣고 있던 손풍의 얼굴이 조금씩 붉어지더니 가관으로 변했다. 문득 자신의 바로 뒤에 낙일방이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제야 손풍은 자신이 단단히 착각했음을 알아차렸으나, 이미 망신살은 제대로 뻗친 후였다. 여기저기에서 킥킥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손풍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며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그나마 때마침 들려온 동중산의 음성이 그를 구원해 주었다.

“배가 오는군. 손 사제, 먼저 가서 자리를 잡아 놓게.”

동중산은 손풍이 무슨 엉뚱한 짓을 할지 몰라 그의 등을 반강제로 떠밀어 배가 오고 있는 곳으로 보내 버렸다. 손풍이 시뻘게진 얼굴로 씩씩거리며 간신히 자리를 떠나자 동중산은 두 남녀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두 남녀 또한 더 이상은 시비를 크게 만들고 싶지 않은지 가볍게 답례를 하고는 다시 자기들끼리 대화를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배가 도착하자 나루터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모였다. 종남파 일행과 다른 손님을 합쳐 이십 명이 넘는 인원이었으나 모두 태우고도 남을 정도로 배는 충분히 컸다.

배를 타고 온 손님들은 그리 많지 않아서 그들이 모두 내리자 바로 승선이 이루어졌다. 사공은 체구가 건장한 두 명의 장한들이었는데, 뱃삯을 치르면서 동중산은 슬쩍 그들의 손을 만져보았다.

굳은살이 배어 있기는 했으나, 전문적으로 무공을 익힌 무인(武人)들의 손은 아니었다. 검게 그을린 얼굴과 유난히 발달된 팔 근육, 그리고 배를 다루는 능숙한 솜씨로 보아 오랫동안 사공 일을 해온 자들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인원이 많은 종남파 고수들이 제일 먼저 자리를 잡았고, 부상이 심한 곽자령과 그를 치료하기 위한 제갈도, 그리고 여인들인 임영옥과 담옥교는 하나뿐인 배의 선실로 들어갔다. 뒤이어 각기 두 명씩 이루어진 세 쌍의 손님들이 배의 여기저기에 떨어져 앉았다. 공교롭게도 두 명의 젊은 남녀는 종남파 일행들에게서 그리 멀지 않은 뱃전에 앉아 있었는데, 남자의 팔을 꼬옥 끌어안은 채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손풍은 아예 그들 쪽으로는 시선도 돌리지 않고 뚱한 표정으로 한쪽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곧이어 사공의 출발하겠다는 소리와 함께 배가 강변을 떠났다. 동중산은 신중한 눈으로 사공과 다른 손님들의 위치를 재차 확인하고는 성락중에게 다가갔다.

“아직까지는 특별히 문제될 것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사숙조께서는 이상한 점을 찾으셨습니까?”

“나도 보지 못했네. 다만 저 젊은 여자는 상당한 무공을 지니고 있는 것 같군.”

성락중의 시선이 두 젊은 남녀 중 여인을 슬쩍 훑고 지나가자 동중산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제자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들에게 좀 더 주의를 기울이겠습니다.”

성락중이 담담하게 웃으며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매사에 신중한 것은 좋지만, 너무 지나치면 자신은 물론 주위 사람들도 피곤해지네. 자네뿐 아니라 나를 비롯한 모두들 조심하고 있으니 자네 혼자 모든 걸 떠안으려 하지 말게.”

동중산은 조금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장문인께서 자리에 안 계시니 제가 너무 긴장한 것 같습니다.”

“방산동이 수작을 부려 올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그가 무슨 수를 써오더라도 우리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역량이 있네. 자네 자신을 믿고, 본 파를 믿게. 본 파는 강하네.”

성락중의 음성 속에는 확고한 자신감이 강하게 깃들어 있었다.

동중산 또한 그 말을 듣자 마음 깊숙한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종남파는 강하다!

이 단순한 한 마디의 말을 입 밖으로 꺼내기 위해 그동안 얼마나 많은 땀과 눈물을 흘려왔던가? 다른 누구도 아닌 종남파의 문도 스스로가 이렇게 느끼게 되기까지 자신들이 겪어 와야 했던 그 많은 고난과 질곡의 세월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고통스런 시간을 견뎌온 지금에서야 비로소 어느 누가 들어도 떳떳하게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동중산은 외눈을 반짝이며 어느 때보다 힘찬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본 파는 강합니다. 장강십팔채가 아니라 다른 어떤 세력이 덤벼올지라도 충분히 물리칠 수 있을 겁니다. 반드시 그럴 것입니다.”

“나도 믿고 있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본 채 조용한 미소를 주고받았다.

배의 한편에서 우두커니 강물을 응시하고 있는 스무 살 손풍의 마음은 울적하기만 했다.

오늘따라 하늘은 왜 이렇게 청명하고 강물은 왜 이리도 맑고 깨끗한지. 그 푸른 강물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마음 한구석이 묘하게 시큰거렸다.

“제길. 이게 무슨 꼴이람…….”

서안에서 어깨에 힘주고 행세할 때는 느껴보지 못했던 소외감과 묘한 외로움이 온몸으로 퍼져가고 있었다. 서안의 거리가 좁다하고 활개치고 다니던 자신이 한낱 여인의 눈길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망신을 자초했으니 가슴속에서 씁쓸함과 분기가 동시에 솟구쳐 올랐다. 무언가 속이 확 풀릴 만한 일이라도 벌어졌으면 좋겠는데, 주위를 둘러보아도 그럴 기미는 전혀 보이지도 않았다.

“어떻게 이럴 때는 시비를 걸어오는 놈들도 없는지…….”

동중산이 들었으면 속이 터질 소리를 중얼거리며 강물을 멍하니 바라보던 손풍의 시선이 문득 한 곳으로 향했다. 밉살스러운 두 남녀 중 여인이 그를 보며 생글생글 웃고 있었던 것이다.

‘저 불여우가 왜 또 나를 쳐다보는 거지? 오냐, 좋다. 시비라면 언제든지 환영이다.’

손풍이 이를 박박 갈며 그녀를 잔뜩 쏘아보고 있을 때, 그녀의 음성이 들려왔다.

“저자는 참 심통스럽게도 생겼군요. 저자가 우리에게 앙심을 품고 시빗거리를 찾고 있을 것 같은데, 당신 생각은 어때요?”

분명 남자에게 하는 소리였으나, 이상하게도 손풍의 귀에는 너무도 선명하게 들리고 있었다.

남자는 뚱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뭐가 말이야?”

“저자가 우리에게 시비를 걸어올 거 같아요? 아니면 그냥 꾹 눌러 참고 있을 것 같아요?”

남자의 시선이 힐끗 손풍을 향했다. 손풍은 하도 어이가 없어서 화도 나지 않았다. 오히려 남자가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한 생각이 들어 가만히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만 있었다.

남자는 이내 심드렁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난 관심 없으니까 너무 사람 가지고 놀리지 마. 보아하니 문파의 막내제자쯤 되는 것 같은데, 선배 고수들 때문에 억지로 성질 죽이고 있는 게 뻔히 보이는데 불쌍하지도 않아?”

손풍의 얼굴에 묘한 빛이 떠올랐다. 남자의 말은 얼핏 자신을 위로하는 것 같아도 듣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약이 슬슬 오르며 덩달아 기분도 나빠졌던 것이다.

‘이 연놈들이 지금 나를 놀리나?’

손풍의 눈꼬리가 꿈틀거리며 콧김이 조금씩 거칠어질 때였다.

“손 사제, 사숙조께서 부르시네.”

어느새 다가왔는지 동중산이 그의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손풍은 성난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동중산은 그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외눈에 부드러운 빛을 띠며 그를 바라보았다.

“어서 가보게. 유 사제와 자네를 모두 부르신 걸 보니 중히 하실 말씀이 있으신 듯하네.”

손풍은 한 차례 숨을 크게 몰아쉬더니 말없이 몸을 돌려 성락중이 있는 곳으로 가버렸다. 참으로 버릇없는 행동이었으나, 동중산은 그를 탓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오히려 은근히 그를 자극한 두 남녀에게로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조금 전의 일은 마무리가 된 것으로 아는데, 내가 너무 속단한 것인가?”

동중산이 남자를 향해 조용한 음성으로 묻자 남자는 그를 슬쩍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분명히 끝난 일이오.”

“내 사제가 비록 성격이 급하고 과격한 면이 있지만, 무도한 인물은 아니네. 그러니 자네들이 먼저 그를 건드리지 않는다면 아무 일도 없을 것이네.”

동중산의 태도나 음성은 온유했으나, 그 속에는 분명한 경고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쓸데없는 시비가 벌어지는 것은 원치 않는 일이었으나 그렇다고 문파 제자가 남에게 농락당하는 것은 더욱 바라지 않는 일이었다.

남자는 성격이 깐깐해 보이는 인상이었는데, 의외로 동중산의 말에 정중한 태도로 사과를 하는 것이었다.

“내가 농이 지나쳐 귀 문파 제자의 심기를 어지럽힌 모양이오.”

“그런 말은 내가 아닌 당사자에게 하는 것이 더 좋았을 걸세.”

남자는 피식거리며 웃었다.

“그자는 왠지 놀려먹기 좋게 생겨서 말이오. 내가 사과를 한다고 해도 순순히 받아줄 것 같지도 않고.”

동중산은 남자의 얼굴을 뚫어지게 주시했다. 보면 볼수록 깐깐하고 각박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하나 깊게 가라앉아 있는 두 눈은 차갑고 냉정하게 빛나고 있어서 절대로 호락호락한 성격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인데, 통성명이나 하는 게 어떻겠나? 종남의 동중산일세.”

강호를 위진 시키고 있는 종남파의 이름을 들었으면서도 남자는 조금도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고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다.

“그 유명한 비천호리 동 대협이셨구려. 검은 안대를 보고 짐작은 했었지만, 뵙게 되어 반갑소. 나는 이정문이라는 사람이오.”

동중산의 외눈이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번뜩였다.

“자네가 바로 산수재 이정문이란 말이군.”

“내 이름을 들은 적이 있는 모양이구려.”

“들었지. 자네를 꼭 만나고 싶었네.”

이정문의 비쩍 마른 얼굴에 메마른 미소가 떠올랐다.

“좋은 일이었으면 하는데, 동 대협의 표정을 보니 별로 그런 것 같지는 않구려.”

확실히 동중산의 얼굴 표정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약간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정문!

종남파로서는 잊을 수 없는 이름이 아닌가?

종남파 제자들에게 절대적인 존재인 진산월의 얼굴에는 칼자국 하나가 선명히 나 있다. 진산월이 비록 스스로의 입으로 세세하게 밝힌 적은 없지만, 대다수의 종남파 제자들은 이정문과 관련된 일 때문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특히 당시의 사정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낙일방과 동중산에게는 확신에 가까운 것이었다.

단순히 부상과 칼자국 때문이 아니라 진산월은 그 일 이후 사람 자체가 달라졌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사고방식이나 행동이 많이 변해 버렸다. 강호의 무정함과 인심의 흉험함을 너무도 절실하게 깨달아버린 것이다. 그 후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생각해 보면 당시의 일이 진산월 개인은 물론이고 종남파 전체에 미친 여파는 실로 막대한 것이었다.

그 일의 당사자인 이정문을 이곳에서 만나게 될 줄은 동중산으로서도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당시 동중산과 낙일방 등이 뒤늦게 진산월이 치료를 받고 있던 보광사에 도착했을 때는 이정문은 이미 보광사를 떠난 후였다. 이제 적지 않은 세월이 흘러 그를 눈앞에서 보게 되자 동중산의 심중에는 자신도 모를 복잡한 감정이 휘몰아치고 지나갔다.

한동안 동중산은 여러 가지 빛이 담긴 눈으로 이정문을 응시하다가 낮게 가라앉은 음성을 내뱉었다.

“자네를 만나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참 많았지만, 지금은 한 가지만 묻고 싶군.”

“말씀 하시오.”

“자네가 이곳에 온 것은 우연인가, 아니면 의도한 것인가?”

이번에는 이정문이 입을 다문 채 동중산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정문의 시선은 무척 특이해서 보는 사람의 마음에 묘한 불안감을 심어주는 야릇한 구석이 있었다. 아마 동중산이 누구보다 냉정하고 강호 경험이 풍부한 인물이 아니었다면 그의 시선에 마음이 흔들리고 말았을 것이다.

갑자기 이정문은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종남파 고수들은 참으로 상대하기 까다로운 사람들이군. 예전에 진 장문인도 예리한 구석이 있어서 나를 깜짝깜짝 놀라게 했는데, 동 대협도 보통이 아니시오. 확실히 내가 이곳에 온 것은 뜻한 게 있기 때문이오.”

“그것이 무엇인가?”

“당신들을 만나기 위해서요.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진 장문인을 만나고 싶어서 왔소.”

동중산은 막연히 짐작하기는 했으나, 막상 그가 순순히 자신의 의도를 밝히자 절로 안색이 찌푸려졌다.

“장문인은 우리와 함께 안 계시네.”

“그건 나도 알고 있소. 하지만 당신들을 따라가면 조만간 진 장문인을 만나게 되지 않겠소?”

“본 파의 상황에 대해 제법 많은 걸 알고 있는 것 같군.”

“오해는 하지 마시오. 진 장문인과 종남파 고수들의 행동은 많은 무림인들의 주목을 받고 있어서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금세 강호에 소문이 퍼지게 되오. 당신들에 대한 정보는 굳이 당신들의 뒤를 캐거나 행적을 쫓지 않아도 그리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일이라는 뜻이오.”

동중산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냉엄한 음성으로 물었다.

“자네는 우리가 자네의 동행을 허락하리라고 보나?”

동중산은 이정문이 최소한 난처한 표정이라도 지을 줄 알았는데, 이정문은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그래서 한 가지 제안드릴 것이 있소.”

동중산은 솔직히 그의 제안이란 것을 듣고 싶지 않았다. 일단 그것을 들으면 반드시 승낙하게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하나 그가 거절의 말을 내뱉기도 전에 이정문이 재빨리 먼저 입을 열었다.

“이 한수를 무사히 건널 수 있게 도와드리겠소. 대신 내가 진 장문인을 만날 때까지 동행하는 것을 허락해 주셨으면 하오.”

동중산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때 누군가의 냉랭한 음성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그 제안을 거절한다면?”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돌아갔다. 낙일방의 준수한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때마침 불어오는 강바람을 맞으며 선상에 우뚝 서 있는 낙일방의 모습은 임풍옥수(臨風玉樹)라는 말에 너무도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하나 관옥처럼 준수한 그의 얼굴은 왠지 딱딱하게 굳어 있어 더할 나위 없이 차갑고 냉랭해 보였다.

낙일방이 나타나자 동중산은 말없이 고개를 조아리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이정문과 그의 옆에 바싹 붙어 있는 여인의 시선은 온통 낙일방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정문은 특히 낙일방의 그린 듯 수려한 얼굴과 당당한 체구, 그리고 활짝 펴진 어깨와 곧은 자세를 유심히 살펴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만 봐도 알겠군. 귀하가 바로 옥면신권 낙 소협이시구려. 나는 이정문이라 하오.”

눈을 별처럼 반짝이며 낙일방의 얼굴을 정신없이 쳐다보던 여인이 재빨리 그의 말을 이었다.

“내 이름은 육난음이라고 해요.”

평소의 낙일방은 좀처럼 예의를 잃지 않는 부드럽고 정중한 사람이었으나 지금의 그에게서는 거칠고 냉막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두 분의 이름은 그다지 듣고 싶지 않소. 본 파의 사람들은 두 분과 나눌 이야기가 없으니 이만 물러가 주었으면 하오.”

어지간한 사람이라도 이런 냉대를 받으면 얼굴이 붉어지거나 뒤도 안 보고 등을 돌렸을 텐데, 이정문은 오히려 눈을 빛내며 한결 카랑카랑해진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나도 환영받지 못한 자리에 굳이 머물러 있고 싶지는 않지만, 보다시피 이 좁은 배 안에서 어디로 물러난단 말이오?”

낙일방은 그의 능글맞은 말을 듣자 속에서 불끈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나 그는 이제 화가 나면 얼굴을 붉히고 성질부터 내는 철부지 소년이 아니었다. 적지 않은 강호 경험과 끊임없는 수련은 그를 노련한 한 사람의 강호인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는 화를 내지 않고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이정문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이자는 형인 이정악과는 전혀 다른 성격이군. 말로는 내가 이자를 당해낼 수 없을 것이다.’

이정문은 그 따가운 눈빛을 받으면서도 태연히 말을 내뱉었다.

“어차피 우리는 한배를 탄 사이요. 단순히 상황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의미 자체도 그렇소.”

“그건 무슨 뜻이오?”

이정문은 자신이 잡고 있는 배의 난간을 가볍게 두들겼다.

“이 배가 잘못된다면 곤란을 겪는 건 당신들만이 아니라는 말이오.”

그 말에 낙일방은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장강십팔채가 우리를 공격하리라고 생각하오?”

“그건 분명한 사실이오.”

이정문이 너무도 단정적으로 말하자 낙일방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그렇게 확신하는 거요?”

“그건 바로 그들의 수작이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이오.”

이정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배의 한쪽에서 짤막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윽!”

중인들이 돌아보니 배의 손님으로 올라와 있던 두 명의 상인이 각기 사공들을 한 사람씩 붙잡고 있었다. 낙일방은 그 상인들이 장강십팔채의 사주를 받은 자들이라고 생각하고 그들을 향해 몸을 날리려 했다. 그런데 오히려 두 상인들은 사공들을 제압한 채로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지 않은가?

“놀라지 마시오. 이자들은 내 수하들이오.”

이정문의 말에 막 솟구치려던 낙일방의 신형이 다시 제자리에 멈춰 섰다. 이정문은 낙일방이 한 차례 어깨가 들썩거리는 것만으로 신형을 안정시키는 광경을 보고 내심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력의 수발이 거의 절정에 달했군. 이제 겨우 약관에 불과한데 어찌 이리도 높은 경지에 오를 수 있었을까? 정말 신기하구나.’

선천적인 체질 때문에 무공은 그다지 높지 않아도 무공을 보는 안목만은 누구보다 뛰어난 이정문은 한눈에 낙일방의 내공이 젊은 층의 고수답지 않게 심후한 것을 알아차리고 경탄과 의혹의 마음이 일어났다.

두 명의 상인들이 제압당한 사공들을 한쪽에 두고 이정문을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다행히 공자의 지시를 어기지 않았습니다.”

“내 말대로였던가?”

“예, 사람들의 이목이 이곳에 집중된 사이에 노를 부수고 배 밖으로 달아나려던 참이었습니다.”

그 말에 낙일방은 문득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닌 게 아니라 배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이곳에 쏠려 있었다. 심지어 선실에 들어가 있던 임영옥과 담옥교 또한 어느새 밖으로 나와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쪽에 있던 두 명의 노부부는 이런 소란에 놀랐는지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와들와들 떨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실로 애처로워 보였다.

“어찌 된 일이오?”

“본 그대로요. 이 사공들은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기회를 봐서 노를 없앤 다음 배에서 도망치려 했소. 난 일부러 그 기회를 앞당겨 주었을 뿐이고.”

이정문이 계속 손풍을 자극한 것이 다소 의아스러웠는데, 이제 보니 일부러 소동을 일으켜서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들여 사공들의 흉계를 드러내게 하기 위함인 모양이었다.

“그 누군가가 장강십팔채란 말이오?”

“그거야 저들에게 물어보면 확실해지겠지.”

이정문이 손짓을 하자 상인들이 사공들을 끌고 왔다. 사공들은 검게 그을린 얼굴에 온통 두려운 빛을 띤 채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누가 보아도 순박한 뱃사공이 분명해서 낙일방은 순간적으로 이정문의 수하들이 엉뚱한 사람에게 누명을 씌운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이정문은 사공 한 사람 한 사람을 찬찬히 살펴보더니 그중 체구가 조금 더 큰 사공에게 물었다.

“조금 전 내가 한 말을 들었겠지?”

사공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소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정말입니다, 나리.”

“물론 그렇겠지. 당신이 장강십팔채와 종남파 사이의 복잡한 강호의 사정을 어찌 알겠소? 평생 배에서 노만 저었을 텐데.”

그 말에 사공의 가뜩이나 커다란 눈이 더욱 커졌다.

“예? 종남파라면 바로 그……?”

평생을 호북성 한구석에서 배만 몰던 사공도 종남파의 이름은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소. 그 유명한 신검무적이 장문인으로 있는 바로 그 종남파 말이오. 당신은 지금 종남파 사람들을 물에 빠뜨려 죽이려 한 거요.”

사공은 울상을 지으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아이고, 아닙니다. 전 다만 노를 없애고 배에서 몰래 빠져나갈 생각이었습니다. 누굴 해치려거나 위험에 빠뜨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믿어주십시오, 나리.”

“그래, 믿소. 당신들 같이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이 설마 수십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죽이려 했겠소? 그런데 생각해 보시오. 노가 없어지고 사공마저 사라진다면 이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어찌 되겠소?”

“그건…….”

“꼼짝없이 강 한복판에 갇혀버린 신세가 되고 말 거요. 그렇게 되면 당신들에게 이번 일을 사주한 자들이 우리를 어찌 대하리라고 생각하오? 그들이 돈 몇 푼 벌자고 이런 일을 꾸민 게 아니라는 건 당신도 알고 있지 않소?”

사공 두 사람은 아무 말도 못하고 서로를 바라본 채 얼굴만 붉히고 있었다.

“당신도 짐작하듯이 우리는 칼밥을 먹고 사는 무림인들이오. 무림인들이 자신을 해치려는 자들을 어찌 대하는지 들어본 적이 있소?”

사공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나리.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저희는 그저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가족들을 몰살시키겠다는 그들의 말에 어쩔 수 없이 따랐을 뿐입니다. 정말입니다.”

“믿는다니까. 당신들은 강압에 의해 어쩔 수 없었던 거요. 그저 운이 나빴을 뿐이지.”

그 말에 사공들의 얼굴에 일말의 기대감이 떠올랐다.

“맞습니다, 나리.”

“그러니 말해 보시오. 당신들을 위협한 건 어떤 자들이오?”

“모두 다섯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아침에 그들이 갑자기 집에 쳐들어와 가족들을 모두 잡고는 위협을 했습니다. 순순히 자신들의 말에 따르지 않으면 가족들을 산 채로 찢어죽이겠다고 말이지요.”

“장강십팔채 같은 수적들이나 할 수 있는 유치한 공갈이군. 하지만 당신들이 그대로 따르지 않았다면 그건 단순히 공갈로만 머물지 않았을 거요.”

“저희들도 살아온 눈치가 있는데 그걸 모르겠습니까? 그래서…….”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따르려 했단 말이겠지. 그런데 말이오. 당신들이 그대로 했다고 해서 그들이 과연 당신들 가족을 살려두고 순순히 물러날 것 같소?”

사공들의 눈에 불안한 빛이 가득 떠올랐다. 그들도 그 점이 못내 미심쩍었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그들은 무림인들이니 약속을 지키지 않겠습니까?”

“무림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조금이라도 안다면 그런 말을 못할 거요. 더구나 그들은 장강을 휩쓸고 다니는 수적들인데, 수적들이 약속을 지킨다는 말은 아직 들어본 적이 없소.”

“아이고, 그럼 어떻게 합니까?”

“나리, 제발 우리 가족을 살려주십시오.”

두 명의 사공이 번갈아가며 이정문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방법을 한 번 생각해 보겠소. 하지만 그자들이 이미 당신들 가족을 해쳤다면 나로서도 어쩔 수 없소.”

“설마 그렇게까지…….”

“살인멸구는 수적들이 가장 좋아하는 방식 중 하나요. 죽은 자는 쓸데없이 떠들지도 않고 복수를 하겠다며 성가시게 하지도 않으니 웬만하면 목부터 잘라놓고 보는 게 그들의 일하는 습성이지.”

“아이고, 이를 어째.”

“하지만 만에 하나 당신들이 일을 제대로 못하거나 우리에게 사정을 밝히고 투항하면 보복할 수단이 없어지니 아직까지는 참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나리…….”

사공들은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그저 이정문에게 머리만 조아리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방도를 알아볼 테니 우선 저쪽으로 가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으시오. 당신들도 한손 거들어야 할지 모르니 말이오.”

“이를 말씀입니까? 어떤 일이든 시켜만 주십시오. 가족들을 되찾는 일이라면 끓는 물속이라도 들어가겠습니다.”

“강 한복판에서 끓는 물이 어디 있단 말이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조용히 있다가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하시오.”

“나리…….”

“자꾸 시끄럽게 하면 이대로 당신들을 돌려보내겠소.”

그렇게 되면 그들은 물론이고 그들 가족이 어떻게 될지는 불문가지의 일이었다.

새파랗게 질린 사공들이 울먹거리며 한쪽으로 물러나는 광경을 지켜본 중인들은 그들을 어르고 달래는 이정문의 능수능란한 대응에 고개만 설레설레 흔들 뿐이었다.

이정문의 시선이 다시 낙일방에게로 향했다.

“어떻소?”

“사람을 다루는 솜씨에 감탄했소.”

“그게 아니라, 장강십팔채에서 단지 저런 미적지근한 수법 하나만 믿고 종남파에 덤벼들 거라고 생각하느냐는 말이오.”

“그럼 당신은 그들의 수법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거요?”

“그들이 이미 종남파와 정면 격돌을 했다가 커다란 낭패를 당했다고 들었소. 그러니 이번에는 나름대로 여러 가지 수를 써오지 않겠소?”

“다른 수라면?”

이정문의 메마른 얼굴에 살짝 일그러진 미소가 떠올랐다.

“공짜로 말해달라는 거요?”

그 말에 낙일방은 입을 다물었다.

“이미 한 번 힘을 쓴 것으로 맛보기는 해주었다고 생각하오. 이제 내 제안을 받아들일지 결정할 때가 된 것 같구려.”

낙일방은 자신이 말로는 그를 감당할 수 없음을 다시 한 번 절감했다. 예전 같으면 절대로 먼저 물러나지 않았을 것이나 이제는 낙일방도 자신이 나서야 할 때와 물러날 때를 알고 있었다.

“내 사질과 이야기해 보시오.”

낙일방이 동중산을 자신의 앞에 내세우자 이정문의 강퍅한 얼굴에 의외라는 빛이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문파의 결정을 자신의 아랫사람에게 넘기는 것은 여타 문파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종남파에서는 당연한 일처럼 처리하고 있었다. 더구나 이를 받아들이는 다른 사람들의 모습도 자연스러워서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님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이정문은 슬쩍 그 점을 찔러보기로 했다.

“동 대협이 이번 일을 결정할 수 있겠소?”

종남파에서 일대제자에 불과한 동중산에게 의사결정권이 있느냐는 의미의 물음이었다. 어찌 보면 동중산뿐 아니라 그에게 일을 넘기고 물러난 낙일방을 자극하는 말일 수도 있었다.

하나 낙일방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한 사람이 그의 말에 힘을 실어주었다.

“동중산의 결정이 곧 우리의 결정일세.”

선실에서 유소응과 손풍에게 수상에서 싸움이 벌어졌을 때의 행동방침을 가르쳐주고 있던 성락중이 어느새 다가왔는지 이정문을 조용한 눈길로 응시하고 있었다. 성락중은 현재 종남파 일행의 가장 웃어른이었다. 그까지 나서서 동중산에 대한 신임을 나타내자 이정문도 더 이상은 쓸데없는 토를 달지 않았다.

“무영검군 성 대협이시군요. 처음 뵙습니다. 이정문이라 합니다.”

“종남의 성락중일세. 상황이 이러니 자세한 인사는 다음에 나누도록 하세.”

성락중은 간단히 말하고 뒤로 물러났다. 자신은 관여하지 않을 테니 동중산과 일을 마무리 지으라는 의미였지만, 어찌 보면 그와는 별로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모습이었다.

이정문은 의미 모를 한숨을 내쉬며 동중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결국 돌고 돌아 다시 제자리로 온 셈이군. 어떻소? 내 제안을 받아들이겠소?”

동중산은 담담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맛보기는 말 그대로 맛보기일 뿐이오.”

“선금이라고 해두시오.”

“그것치곤 조금 적은 것 같소.”

이정문은 쓴 입맛을 다셨다.

“종남파 사람들이 까다롭다는 건 이미 각오하고 있었소. 그럼 선금을 조금 더 드리지.”

이정문은 갑자기 주위를 둘러보더니 이내 한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에 서로의 손을 꼬옥 잡은 채 앉아 있는 노부부의 모습이 들어왔다.

이정문은 빙글 웃으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두 분의 모습이 다정해서 너무 보기 좋군요. 두 분은 어디서 오셨습니까?”

노부부는 겁먹은 눈으로 서로를 마주 보더니 이윽고 노인이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우리는 여언(呂堰)에 사는 별 볼일 없는 늙은이들이라오.”

“어디까지 가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냉집(冷集)에 사는 딸아이 집에 가는 길이오.”

여언과 냉집은 한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작은 도시들이었다.

“그러시군요. 품에 안고 있는 항아리는 따님에게 드리려는 물건인 모양이지요?”

이정문이 노인이 꼬옥 안고 있는 어린어이 머리통만 한 항아리를 가리키자 두 노인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 그렇소. 딸아이에게 줄 두반장이 담겨 있소.”

노인은 억지로 대답했으나 누가 보기에도 노인의 얼굴은 애처로울 정도로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두반장이라. 나도 무척 좋아하는 양념이지요. 호북의 두반장은 사천보다 맵지 않아서 더욱 맛있다고 하던데 잠깐 맛을 보아도 되겠습니까?”

초면의 사람이 하기에는 무례한 질문이었으나 노인은 그걸 탓할 정신이 없어 보였다.

“안 되오. 이건 꽁꽁 밀봉한 것이라 일단 뜯으면 맛이 변질되어서…….”

이정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군요. 두반장은 향이 진해서 아무리 밀봉해도 가까이 가면 그 특유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데, 이 항아리에서는 전혀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는군요.”

이정문이 항아리 가까이에 코를 가져다대는 시늉을 하자 노인이 펄쩍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가까이 오지 마시오.”

이정문은 다시 몸을 똑바로 세우며 노인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주름살 가득한 노인의 얼굴에는 의미 모를 두려움과 당혹감이 짙게 배어 있었다. 노인은 이정문의 따가운 시선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조금 전에 내가 사공과 나누는 대화를 들었지요?”

노인은 부지불식간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 대화를 듣고 나니 기분이 어떠셨습니까?”

“기분이 어떻다니?”

“마치 내 자신이 당하는 일처럼 속이 뜨끔하지 않으셨습니까?”

“나, 나는…….”

노인은 당황하여 횡설수설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제야 자신의 언행이 무척이나 수상스럽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아차린 것이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건 결코 노인장을 흉보거나 탓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노인장에게 살길을 모색해 주려는 것입니다.”

“살길이라니…….”

“조금 전에 들으셨겠지만, 노인장에게 그 항아리를 건네준 자들은 결코 호인(好人)이 아닙니다. 장강 일대를 공포에 떨게 하는 무시무시한 수적들이지요. 노인장이 그들의 말대로 따른다고 해도 그들이 노인장의 가족들을 무사히 놔준다는 보장은 절대로 없다는 말입니다.”

노인과 노부인의 안색이 모두 시커멓게 변했다. 노인은 갑자기 악을 버럭 썼다.

“내 딸을 놔주고 차라리 날 죽여라! 이 악적(惡賊)들!”

이정문은 조금도 화내지 않고 오히려 혀를 찼다.

“저런. 그들이 잡고 있는 사람이 아까 말한 따님인 모양이군요. 정말 안타깝습니다.”

노인은 화를 내서 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애처로운 눈으로 이정문을 바라보았다.

“우, 우리가 어찌했으면 좋겠소?”

“그들이 노인장에게 무어라고 지시했습니까?”

노인은 머뭇거리다가 자신이 품에 안고 있는 항아리를 내려다보았다.

“배가 강 한복판에 도착하거나 사공이 배를 버리고 도망가면 이 항아리 뚜껑을 열어보라고 했소.”

“그리고는요?”

“그렇게만 해주면 딸아이를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고스란히 돌려보내겠다고 약속했소. 정말이오.”

“아까도 말했지만 그들은 결코 약속을 지키는 무리들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쩌면 좋소? 우리는 하라는 대로 다 따라 할 테니 제발 우리 딸을 살려주시오.”

“일단 그 항아리를 내게 주십시오.”

이정문이 손을 내밀자 노인은 몇 번이나 망설이다 항아리를 내밀었다.

이정문은 항아리를 가만히 살펴보았다. 항아리의 재질은 일반 항아리와 비슷한 투박한 도기였고, 뚜껑은 노인의 말대로 단단히 밀봉되어 있었다. 뚜껑 한가운데 수실이 달려 있었는데, 보아하니 이 수실을 잡아당기면 뚜껑이 열리는 구조인 듯했다. 이정문은 이 항아리의 용도를 대충 짐작할 수 있었으나, 항아리의 정체는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단순한 기름항아리인 줄 알았더니 조금 다르군. 필시 불을 일으키는 용도일 텐데……. 일전에 이와 같은 물건에 대한 말을 얼핏 들은 기억이 나는데 정확한 이름이 생각이 안 나는군.’

그때 한 사람이 그의 의문을 풀어주었다.

“그건 경경호(驚鯨壺)라는 물건이에요.”

“아! 그렇군.”

그제야 이정문은 희미했던 기억을 떠올리고는 짧은 탄성을 토해내더니 이내 소리가 들려온 곳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키가 훤칠한 미모의 여인이 우뚝 서 있었다.

그녀를 본 이정문의 눈이 어느 때보다 예리하게 번뜩였다.

“소저는 혹시 강남 담씨세가의 담옥교, 담 소저가 아니시오?”

“내가 바로 금릉 담가의 담옥교예요.”

그녀는 당당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한 점 거리낌이 없는 그 모습은 여인답지 않게 시원시원하면서도 독특한 매력을 풍기는 것이었다.

“이정문이오. 담 소저의 옥용을 이곳에서 보게 되니 정말 반갑소.”

“내가 종남파와 동행한다는 것은 강호에 소문이 제법 퍼졌을 텐데 이제 와서 아는 척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그녀가 제법 매몰차게 말했으나 이정문은 아랑곳하지 않고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다.

“강남도봉황을 직접 보는 것은 남자라면 누구나가 바라는 행운이오. 솔직히 소저와 어떤 식으로 인사를 나눠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고민이 해결되어 기뻤던 탓이니 이해해 주시오.”

그답지 않게 유들유들한 말에 담옥교도 더 이상은 트집을 잡지 않았다.

산수재 이정문은 정말 상대하기 까다로운 인물이었고, 눈 밖에 벗어나면 피곤하기 그지없어서 아무리 담옥교라도 그의 심기를 무작정 어지럽힐 수는 없었다.

“담 소저 덕분에 이 기물의 정체를 알게 되었구려. 이 기물은 무척 희귀해서 나도 얼핏 이름만 들었을 뿐인데, 소저는 어떻게 알고 계시오?”

“이건 원래 바다에서 고래를 잡을 때 쓰는 화탄의 일종이었어요. 그런데 얼마 전부터 장강십팔채의 수적들이 비밀리에 사용하기 시작해서 본 가에서도 경각심을 가지고 있던 터라 알게 되었어요.”

“그랬구려.”

“그 뚜껑 한가운데 튀어나온 수실을 잡아던지면 반경 이 장 이내는 온통 화염에 휩싸이니 조심하도록 해요.”

무심코 수실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이정문이 깜짝 놀라 급히 손을 놓았다.

“대단한 위력이구려.”

“서역에서 전래된 것을 장강십팔채에서 최근에 개량했다고 하더군요. 수적들이 다급한 상황에서 그걸 사용하는 바람에 침몰된 배가 적지 않아요.”

노인은 자신이 들고 있던 항아리의 정체를 알게 되자 소름이 오싹 끼쳤는지 늙은 아내를 꼬옥 끌어안은 채 덜덜 떨었다. 그들의 말대로 자신이 저 항아리의 뚜껑을 열었다면 그 즉시 자신과 아내의 몸은 불길에 휩싸여 한 줌의 검은 재로 변해버렸을 게 아닌가?

이정문은 경경호를 손에 든 채 동중산을 바라보았다.

“어떻소? 이 정도면 선금으로 충분한 것 같은데.”

자신도 미처 파악하지 못한 두 번의 위기를 이정문이 손쉽게 해결하자 동중산도 무작정 그의 동행을 뿌리칠 수만은 없었다.

“선금은 그 정도면 된 것 같네. 그럼 이제 잔금이 남았는데…….”

이정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말 한 치의 양보도 없구려. 곧 이어 장강십팔채의 진짜 공격이 시작될 거요. 그땐 이런 애들 장난 같은 수작이 아니라 자신들의 총력을 다한 제법 무서운 공격이 될 거요.”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배에서 가장 치명적인 위협이 될 수 있는 두 번의 상황을 이정문은 간단히 애들 같은 수작으로 치부해 버렸다. 그의 배포에 감탄하면서도 동중산은 그의 말 속에 숨은 뜻을 단숨에 파악해냈다.

“그 공격에 대한 대책이 있다는 말로 들리는군.”

이정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로서는 모처럼 보이는 밝은 웃음이었다.

“과연 동 대협은 말이 통하는 사람이오. 내게 그들에 대한 한 가지 대책이 있소. 잔금은 그것으로 치르는 것으로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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