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8권 열한기공(熱寒奇功)편 : 9화
제 290장 강호여정(江湖女情)
노방과의 재회는 무척이나 인상적인 것이었다.
노방은 처음에 사 년 만에 만난 진산월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마 왼쪽 뺨의 칼자국이 아니었다면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자신이 직접 손을 댄 왼쪽 뺨의 칼자국을 보고서야 노방은 눈앞의 이 고적한 분위기의 사나이가 사 년 전에 자신의 손으로 살려냈던 종남파의 젊은 장문인임을 간신히 알아차렸던 것이다.
표정의 변화가 거의 없어서 ‘철면’이라고 불리고 있는 노방에게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진산월은 노방을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그동안 잘 계셨습니까?”
한 문파의 장문인 이전에 생명의 은인을 만난 사람으로서 예의를 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방은 한동안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우두커니 진산월을 응시하다가 겨우 답례를 했다.
“진 장문인이셨구려. 몰라볼 뻔했소.”
“제 외모가 조금 달라졌습니다.”
단순히 외모만 달라진 것이 아니었다. 몸에서 풍겨 나오는 기세나 분위기도 예전과는 판이하게 변해서 사람 자체가 달라진 것 같았다. 눈빛 또한 전보다 한층 더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일전에 제 사제가 노 신의께 큰 도움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도 거듭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큰일은 아니었소. 낙 소협의 내공이 워낙 심후하여 내가 아니었더라도 회복되는 건 시기의 문제였을 것이오.”
“그렇더라도 제 사제가 아무런 후유증 없이 회복될 수 있었던 것은 노 신의의 은덕 때문이었습니다.”
노방은 진산월의 거듭된 사례에 다소 불편해하는 모습이었다. 상대는 단순한 일개 강호인이 아니라 당금 무림에서 가장 강력한 기세로 일어나고 있는 명문거파의 장문인이었고, 또한 무림인 누구나가 인정하는 강호제일의 검객이었다. 아무리 노방이라도 이런 사람의 인사를 마음 편히 받을 수는 없었다.
노방은 곧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잠시만 계시오. 우선은 청천의 상세를 살펴보아야겠소.”
노방이 유중악의 몸을 돌보기 위해 자리를 뜨자 진산월은 그제야 비로소 주위를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이곳은 무당산 입구에서 반나절 거리에 있는 작은 객잔이었다. 동중산과 만나기로 한 청연각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어서 진산월은 오후쯤에 그곳으로 움직일 생각이었다.
무심코 주위를 둘러보던 진산월의 시야에 문득 한 여인이 들어왔다. 그녀는 진산월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가 시선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며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홍조로 가득 뒤덮인 그녀의 얼굴은 목덜미까지 붉어져 있어 보는 사람이 무안함을 느낄 정도였다.
진산월은 그녀를 향해 성큼 다가갔다.
“노 소저, 오랜만에 뵙는 것 같소.”
여인은 그의 음성을 듣고는 아예 절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고개를 한없이 아래로 떨구었다.
“지, 진 장문인을 뵙습니다……. 잘 계셨는지요.”
그녀의 음성은 거의 기어들어가는 듯해서 알아듣기 힘들었으나 진산월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노 소저가 돌봐준 덕분에 건강한 몸으로 일어설 수 있었소. 그래서인지 그 뒤로는 단 한 번도 앓거나 아파서 누운 적이 없었소.”
여인은 노방의 딸인 노소연이었다.
과거 천애치수 단목초를 암습했을 때 치명적인 독상을 입었던 진산월은 그녀의 정성 어린 간호 덕에 예상보다 빠르게 몸을 회복할 수 있었다. 사 년의 세월은 어린 소녀였던 그녀를 성숙한 여인으로 변모시켰고, 자기 몸 하나 돌보지 못하고 폐인처럼 누워 있어야 했던 환자를 강호의 전설적인 존재로 바꾸어 놓았다.
노소연의 고개가 더욱 깊게 숙여졌다.
“그, 그건 제 덕분이 아니라 진 장문인께서 워낙 건강한 체질이셔서…….”
그녀는 자기 자신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 정도로 낮게 웅얼거리다가 그마저 맺지 못하고 입을 다물고 말았다.
옆에서 보고 있던 누산산이 도저히 참지 못하겠는지 그녀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답답해서 못 참겠네. 이리로 와서 지나온 얘기나 좀 해요. 일곱째 언니도 왔으니까 우리끼리 모처럼 수다나 떨자고요.”
노소연은 누산산의 손에 이끌려가면서도 숙여진 고개를 쳐들지 못하고 있었다. 진산월은 두 여인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자신도 모르게 살짝 미소 짓고 말았다.
“노 소저의 부끄러움 많은 성격은 여전한 것 같군.”
진산월은 혼자 슬며시 웃다가 누군가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정소소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다가 시선이 마주치자 그에게로 다가왔다.
“진 장문인의 웃는 모습은 정말 모처럼 보는군요. 그녀가 마음에 들었나요?”
그러고 보니 진산월은 정소소와 만난 적은 여러 번 있었지만 그녀 앞에서 웃은 기억은 좀처럼 나지 않았다.
진산월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별 생각 없이 대꾸했다.
“노 소저의 겉모습은 많이 성숙했는데, 성격은 예전과 달라진 것이 없어서 재미있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오. 그동안의 시간이 짧은 세월은 아니었으니 말이오.”
“그렇지요. 사 년은 정말 짧은 세월이 아니지요.”
그녀의 말속에는 무언가 여러 가지 복잡한 의미가 깃들어 있는 것 같았다. 진산월은 그녀의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 한동안 가만히 그녀를 응시했으나, 그녀의 표정은 차분히 가라앉아 있어 속마음이 어떠한지를 전혀 알아차릴 수 없었다.
“그런데 조금 전 위중설이란 자가 종남산에서 죽은 인물이라는 건 무슨 뜻인지 말해줄 수 있겠소?”
정소소는 그가 화제를 돌리자 알 듯 모를 듯한 가는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몇 달 전 서안에서 벌어진 취미사 혈겁 때, 그 일을 조사하던 우리는 조화심이 용의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그의 뒤를 추적한 적이 있었어요.”
그녀는 조용한 음성으로 당시의 일에 대해 설명을 시작했다.
그때 천봉팔선자 중 금교교는 이존휘에게서 조화심의 행적을 듣고 그와 함께 서십왕촌으로 조화심을 찾으러 갔다가 그곳에서 조화심과 공손도, 그리고 위중설의 습격을 받게 되었다. 뒤늦게 소식을 듣고 달려온 정소소와 두청청이 적시에 나타나준 덕분에 그들은 겨우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오히려 습격한 세 명을 몰아붙이게 되었다. 그때 두청청의 비도에 위중설은 목숨을 잃었고, 조화심과 공손도는 용케도 도망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공교롭게도 이번에는 무당산이 지척인 곳에서 다시 천봉선자들을 습격했다가 모두 싸늘한 시신이 되어 버린 것이다.
진산월은 묵묵히 그녀의 말을 듣고 있다가 의문이 일어나는 것을 물어보았다.
“당시에 위중설이 정말로 두 소저의 비도에 숨이 끊어진 것이 확실하오?”
“그때는 그렇게 믿고 있었어요. 하지만 잠시 후에 다시 서십왕촌에 가 보았을 때는 시신이 사라져서 그의 죽음을 완전히 확인할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멀쩡히 살아서 이곳에 나타난 것이구려.”
“당시에 조금 이상하게 생각하긴 했지만, 설마 위중설이 살아 있으리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한 일이었어요.”
“조금 전에 보니 정 소저는 복면인의 정체가 그자일 거라고 예상하고 있는 것 같았소.”
“그가 진 장문인에게 마지막으로 사용한 풍뢰질풍권(風雷疾風拳)은 경천신수 동방욱의 구대절학 중 하나로, 위중설이 가장 즐겨 쓰던 무공이에요. 그래서 그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지요.”
“단순히 그것뿐만은 아닌 것 같구려.”
정소소의 얼굴에 한 줄기 씁쓸한 빛이 떠올랐다.
“사실은 낙 소협의 일 때문에 여섯째 동생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한 가지 의혹을 품고 있었어요.”
이제 비로소 낙일방이 엄쌍쌍의 정표를 받고 약속장소에 나갔다가 함정에 빠진 사건에 대한 실마리가 풀리려 하고 있었다.
“엄 소저가 서신에 무어라고 했소?”
“여섯째는 낙 소협에게 정표를 받은 후 그 반지를 목걸이로 만들어 항상 목에 차고 있었어요. 그러다 우연히 둘째인 두청청이 그 목걸이를 보고 그녀에게 잠시 보여 달라고 부탁했다더군요. 여섯째는 별 생각 없이 그녀에게 목걸이를 맡겼는데, 미처 돌려받기도 전에 일곱째를 데리러 가야 할 일이 생겨 급히 떠나게 되었어요. 공교롭게도 그때 둘째도 일이 있어 밖으로 나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여섯째는 목걸이를 돌려받지 못하고 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고 했어요.”
“두 소저는 그에 대해 뭐라고 말했소?”
정소소는 무어라 형용하기 어려운 착잡한 표정이 되었다.
“둘째는 그 뒤로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어요. 어디에서도 그녀를 찾을 수 없더군요.”
그녀로서는 친자매처럼 가까이 지내던 두청청이 오래전부터 자신들을 속이고 여섯째의 정인마저 함정에 빠뜨리려 했다는 사실을 선뜻 용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두청청이 종남산에서 위중설을 죽인 것조차 꾸민 일이었다면 그녀의 배반은 이미 오래전부터 치밀하게 계획된 일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언제부터 천봉궁을 배신하고 신목령의 배반자인 조화심 등과 어울리게 되었는지 정소소는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대체 그녀가 뭐가 아쉬워서 오랫동안 몸담았던 천봉궁을 배신한단 말인가? 그리고 그녀와 조화심 등이 각자 속해 있던 집단을 배신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들을 사주한 자는 과연 누구이며, 그 자의 진정한 목적은 과연 무엇일까?
두청청의 배신을 짐작하게 되었을 때부터 이러한 의문들이 그녀의 머리를 계속 어지럽히고 있었다.
진산월은 복잡한 빛이 가득 담겨 있는 그녀의 얼굴을 묵묵히 보고 있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두 소저는 어떤 여인이었소?”
“별로 말이 없고 남에게 좀처럼 정을 주지 않는 차가운 성격이었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일은 충실히 해내는 당찬 여자였죠.”
“무공은 어느 분께 사사했소?”
“본 궁의 전대 장로 중 한 분이셨어요. 그분이 몇 년 전에 돌아가신 후로는 주로 비급을 보면서 혼자 수련하고는 했지요.”
“다른 선자들과의 사이는 어땠소?”
“대체로 무난했어요. 무공에 대한 호승심이 강해서 가끔 일곱째와 신경전을 벌이는 것 외에는 큰 문제가 없었어요.”
정소소는 별일 아닌 것처럼 말했으나, 진산월은 두청청의 문제가 무엇인지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한 마디로 두청청은 천봉궁 내에서 특별히 친하게 지내는 사람도 없었고, 오히려 자매들과 경쟁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태라면 그녀를 포섭할 수 있는 방법은 수십 가지나 될 것이다.
일전에 천봉팔선자 중의 넷째인 소봉 매향향은 남자에게 빠져 천봉궁주의 신물인 영롱비를 빼돌리고 자살한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두청청 또한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진산월은 천봉궁의 여인들이 너무 폐쇄적으로 지내다 보니 외부의 유혹에 약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걸 겉으로 밝힐 수는 없었다.
아무튼 두청청은 천봉궁을 배신하고 조화심 등과 함께 손을 잡은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들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자가 낙일방을 제거하기 위해 그녀를 이용한 것이다.
그때 낙일방을 습격한 자들이 서장의 고수들임을 떠올려 본다면 배후의 인물들은 서장의 세력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서장의 세력이 천봉궁과 신목령의 인물들을 다수 포섭했다는 것은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았다.
서장 무림과의 격돌이 코앞으로 다가온 지금, 진산월로서는 그들의 손길이 어디에까지 퍼져 있는지 걱정스런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진산월은 문득 낙일방이 서장의 습격을 당한 후 이정악을 만났을 때 그에게 들었던 말을 한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낙일방은 이정악이 자신에게 십이비성의 한 자리를 제안했으나, 종남파의 일에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던 낙일방은 그 자리에서 그 제안을 거절했다고 했다.
‘그때 이정악은 혁리공이 야율척의 제자 중 하나인 이공자라는 인물일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혹시 이번에 조화심 등이 엄 소저를 습격한 것은 혁리공의 지시가 아니었을까?’
낙일방을 습격한 것이 혁리공의 지시였다면, 혁리공이 곧 두청청으로 하여금 정표를 훔치게 사주한 인물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니 혁리공으로서는 그녀의 배신이 드러나는 상황을 막기 위해서라도 엄쌍쌍을 살인멸구할 당위성이 충분했다. 그래서 그것을 위해서 조화심과 공손도, 그리고 당사자인 위중설을 보낸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혁리공은 과연 그들이 진산월과 정소소의 손에 모두 허무하게 쓰러지리라는 것을 예측하지 못했을까?
‘머리가 좋은 인물이라면 엄 소저가 정 소저와 만나기로 한 지척에서 일을 꾸몄을 리가 없다. 조화심은 정 소저와 나의 등장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혁리공도 예측하지 못했을까?’
진산월은 그 점에 대해서는 반신반의하는 심정이었다.
만약 혁리공이 이러한 점을 조금이라도 예측했다면 그가 조화심 등을 이번 일에 투입한 것은 얼핏 말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하나 그것조차 그의 계획 중 하나였다면?
혁리공이 무언가 또 다른 것을 노리고 이번 일을 계획한 것이었다면 그의 진정한 의중은 과연 무엇일까?
진산월은 한동안 생각을 굴려 보았으나 지금으로서는 아무것도 확인할 수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조만간 혁리공이 자신을 향해 무언가 수를 써오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때가 혁리공의 진정한 정체를 밝혀내고, 그에게 이번 일의 대가를 치르게 하는 순간이 될 것이다.
그날 오후, 진산월은 동중산과 만나기로 약속했던 청연각으로 가기 위해 머물러 있던 객잔을 벗어났다. 그가 종남파 고수들을 만나기 위해 나간다고 하자 몇몇 사람이 관심을 보이며 따라오려고 했으나 진산월은 정중하게 그들의 청을 거절했다.
“자리가 잡히면 연락을 하겠소. 그때 정식으로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소.”
그의 말에 누산산을 비롯한 몇 사람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으나, 감히 그의 말을 거역하고 따라오려는 사람은 없었다. 그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하나에는 범접하기 어려운 위엄이 있어서 누구도 쉽게 흘려듣거나 거스르려 하지 않았다.
멀어지는 진산월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던 누산산이 그녀답지 않은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곡유유가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나이도 어린 게 웬 한숨이냐?”
“예전에는 그래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갈수록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이 되는 것 같아서요.”
“누가? 진 장문인이?”
누산산의 얼굴에는 씁쓸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사람이 너무 물러 보여서 저런 사람이 어떻게 한 문파를 이끌고 갈지 걱정이 될 정도였는데, 지금은 가까이 있어도 말 붙이기도 힘들 정도로 위엄 있고 냉정한 사람이 되었군요. 달라도 너무 달라져서 적응이 잘 안 되네요.”
“진 장문인이 예전에는 너무 물러 보였다고? 전혀 그럴 것 같지 않던데?”
“그런 사람이었어요. 너무 무르고 성격 좋은 사람……. 그래서 볼 때마다 꼭 강가에 내놓은 어린아이처럼 불안했었는데…….”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진 장문인이 어린아이처럼 불안했었다니 그게 강호제일의 검객에게 어울리는 소리냐? 어지간한 고수라도 그와 눈빛만 마주쳐도 꼼짝도 못할 텐데.”
곡유유가 쏘아붙였으나 누산산은 평소와는 달리 다소 시무룩한 표정으로 낮게 중얼거렸다.
“그런 시절이 있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믿지 못하겠지만…….”
곡유유는 그녀의 그런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눈을 반짝 빛냈다.
“너 혹시…….”
그녀가 무어라고 하기도 전에 누산산은 고개를 번쩍 쳐들고 손뼉을 쳤다.
“아, 여섯째 언니가 일어날 시간이 되었네. 지금쯤은 독상이 다 나았겠지?”
그녀가 휑하니 달려가 버리자 곡유유가 어이가 없다는 듯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계집애는 할 말이 없거나 곤란에 빠지면 꼭 저런 식으로 내빼고는 했는데, 점점 더 수상해지네. 큰언니,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무심코 뒤를 돌아보던 곡유유는 정소소의 얼굴을 보고는 흠칫거렸다. 항상 차분하고 평정을 잃지 않았던 정소소의 고운 얼굴에 수심 어린 복잡한 빛이 가득 떠올라 있었던 것이다.
그 빛은 이내 사라졌으나, 곡유유는 그녀의 그런 표정을 처음 보았기에 의아함과 짙은 호기심을 동시에 느꼈다.
‘그러고 보니 진 장문인을 대하는 큰언니의 모습도 평소와는 조금 달랐지. 대체 그동안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녀는 더 이상의 추측을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때 멀리서 하나의 화려한 향차가 다가오는 광경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네 마리의 백마가 이끄는 붉은 색 향차는 봉황 문양으로 뒤덮여 있어 호화스럽기 그지없었다.
그 향차를 본 곡유유는 자신도 모르게 짧은 환성을 내질렀다.
“공주님께서 오셨어요!”
☆ ☆ ☆
청연각은 무당산의 초입에 있는 상당히 규모가 큰 주루였다.
주루와 객잔을 겸하고 있어서 전면에는 삼층의 주루가 우뚝 서 있었고, 그 뒤로 크고 작은 별실로 이루어진 객잔이 늘어서 있었다.
진산월이 청연각에 도착했을 때는 마침 저녁 시간이어서인지 주루가 온통 손님들로 가득 들어차 있어 빈자리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진산월이 청연각의 입구에 서서 주루로 올라가야 할지 아니면 주루 뒤편의 객잔으로 가야 할지 잠시 망설이고 있을 때, 누군가가 뒤에서 말을 걸어왔다.
“들어가실 겁니까?”
진산월이 돌아보니 짙은 남색 건을 쓰고 남삼을 입은 청년이 그를 보고 서 있었다. 청년의 뒤에는 그와 일행인 듯 비슷한 복장을 한 서너 명의 인물들이 있었다.
진산월은 자신이 무심결에 입구를 막은 형상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옆으로 물러났다.
“미안하오.”
“괜찮습니다.”
청년은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주루 안으로 들어서더니 이내 주위를 둘러보고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제야 진산월이 입구에서 머뭇거린 이유를 알아차린 것 같았다. 남삼 청년은 뒤에 서 있던 일행들 중 검은 수염의 중년인에게 다가갔다.
“빈자리가 없군요. 위로 올라가시겠습니까? 아니면 다른 곳을 알아볼까요?”
“지금은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일 거다. 합석이라도 알아보려무나.”
“알겠습니다, 사숙.”
남삼 청년은 마침 근처를 지나는 점소이를 불렀다. 점소이는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이내 한 곳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그들의 기도가 하나같이 범상치 않고 태도가 단정한 것을 보면 명문정파의 제자들임이 분명했다. 그중에서도 검은 수염의 중년인은 전신에서 풍기는 기세가 날카롭고 예리해서 잘 벼린 보검을 보는 것 같았다. 진산월은 그 중년인의 남삼이 도인(道人)들이 입는 도포(道袍)에 가까운 것을 보고는 그들의 정체를 대충이나마 유추해 보았다.
‘남삼에 남건(藍巾)이라……. 혹시 청성파(靑城派)의 고수들이 아닐까?’
청성파는 도문(道門)에 가까웠지만, 제자들 중에는 도가(道家)와 속가(俗家)가 섞여 있어서 복장만으로 그들의 신분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았다. 다만 청성파의 제자들이 남색 의상을 즐겨 입는다는 소문이 있고, 그들의 전신에서 풍기는 기운이 도가 신공 특유의 청수하면서도 날카로운 기상을 담고 있어서 그렇게 짐작한 것이었다.
진산월은 청성파로 추측되는 고수들이 중앙의 커다란 원탁에 합석해서 앉는 것을 보고는 자신도 점소이를 불러 합석을 부탁했다.
“되도록이면 창가에 면한 자리를 잡아주게.”
“알겠습니다.”
점소이는 이내 그를 창가에 가까운 탁자로 안내했다. 그 탁자에는 두 명의 남녀가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점소이는 이미 그들에게 양해를 구했는지 진산월을 그들의 맞은편 자리에 앉게 했다.
진산월은 가벼운 요리와 술 한 병을 주문하고는 두 남녀를 향해 살짝 포권을 했다.
“합석을 허락해 주어서 고맙소.”
두 남녀 중 남자가 인사를 받았다.
“오늘 같은 날은 서로 조금씩 양보하는 게 당연한 일 아니겠소?”
남자는 진산월과 비슷한 나이로 보였는데, 유난히 짙은 눈썹에 남자답게 생긴 용모를 하고 있었다. 여인은 이십 대 초반으로 보였는데, 유난히 하얀 피부에 눈꼬리가 가늘어서 선하게 웃는 인상이었다.
진산월은 다소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오늘 무슨 특별한 행사라도 있는 모양이오.”
남자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보더니 이내 빙긋 미소 지었다.
“형장은 몰랐던 것 같구려. 주위를 둘러보시오. 오늘따라 유난히 사람이 많다고 생각지 않소?”
진산월은 저녁시간이라 그런 모양이라고 편하게 생각하고 있기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많기는 많은 것 같소.”
“더구나 이들 대부분이 무림인이란 말이오.”
그러고 보니 손님들 중 병장기를 휴대한 자들이 적지 않았다. 눈앞의 두 남녀도 각기 검 한 자루씩을 차고 있었다. 물론 진산월의 허리에도 검이 매달려 있었다.
처음에는 이들이 무당산의 집회에 참석하려는 자들로 생각했었는데, 남자의 표정을 보니 단순히 그것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이 일대의 주루는 이곳뿐 아니라 대부분이 무림인들로 가득 차 있을 거요. 그 이유가 무언지 아시오?”
“모르겠소. 오늘 이곳에 도착해서 전혀 사정을 모르니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리오.”
“그건 바로 종남파가 이곳에 오기 때문이오.”
뜻밖의 말에 진산월은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종남파?”
남자는 눈을 반짝이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형장도 놀랐을 거요. 바로 그 종남파요. 신검무적이 장문인으로 있는…….”
남자의 음성에는 묘한 열기가 느껴졌다.
“종남파의 고수들이 한수에서 장강십팔채의 수적들을 모두 도륙한 이야기는 형장도 들었을 거요. 그들이 이쪽으로 오고 있다고 하오. 아마 오늘쯤이면 그들이 이곳에 도착할 거요. 그래서 근처의 무림인들이 그들의 얼굴이라도 보기 위해 모두 모여든 거요.”
남자는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뛰는지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생각해 보시오. 젊은 층의 고수들 중 최고의 고수일 뿐 아니라 천하제일 미남자라는 옥면신권과 남궁세가의 최고수를 꺾은 신비한 무영검군, 지략이 하늘에 닿아 있다는 비천호리……, 그리고 무엇보다도 강호 무림의 제일검객인 신검무적을 직접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란 말이오. 그러니 사람들이 어찌 모여들지 않을 수 있겠소?”
“…….”
“더욱 중요한 게 뭔지 아시오?”
남자는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었다.
“이 청연각의 뒤쪽 객잔에 형산파의 고수들이 머무르고 있소. 그러니 만약 종남파에서 이쪽에 숙소를 잡는다면 참으로 볼만한 광경이 벌어지지 않겠소? 그 때문에 구대문파의 고수들도 상당수가 이 근처에 와 있다고 하오.”
진산월은 참으로 공교롭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종남파의 행적이 커다란 비밀은 아니지만 이토록 공개적으로 거론되어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게 될 줄은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게다가 그들과 만나기로 한 청연각에 형산파가 머물러 있다는 것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형산파와는 무당산에서 구대문파의 인물들이 모인 공개석상에서 만나려 했던 것이 당초의 계획이었다. 중인환시리에 정정당당하게 그들과 얽힌 숙원을 풀고 싶다는 것이 모든 종남파 문인들의 바람이었다.
그런데 그들과 같은 숙소에서 머무르게 된다면 어떠한 일이 벌어지게 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을 것이다.
종남파 고수들이 한수에서 장강십팔채의 습격을 받고 오히려 그들을 물리치고 장강십팔채의 총채주인 방산동을 죽인 일은 이미 정소소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 듣지 않아도 주위가 온통 그 일로 떠들썩해서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사람들은 장강십팔채가 이번에 당한 충격이 너무 커서 그들이 예전의 성세를 회복하려면 최소한 십 년은 걸릴 거라고 떠들어대고 있었다. 또한 악명이 자자했던 장강십팔채의 수적들이 몰살당한 것을 통쾌해하면서도 그들이 왜 장강에서 벗어나 멀리 이곳까지 와서 종남파를 습격했는지 의아해했다.
그에 비해 진산월과 복양수의 싸움은 전혀 소문이 나지 않았다.
워낙 비밀스럽고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대결인 데다 지켜본 사람도 많지 않아서 소문이 퍼지지 않은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으나, 마치 모든 시선이 종남파 고수들에게만 집중된 것 같은 느낌에 진산월은 약간의 의혹을 가지고 있었다. 종남파 고수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사람들 사이에 알려지고 그들의 행적이 고스란히 노출되는 지금의 상황이 단순한 우연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던 것이다.
만일 이 안에 누군가의 의도가 들어 있는 것이라면 그자는 대체 누구이며, 그자의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 궁금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진산월이 듣든 말든 남자는 흥분된 목소리로 떠들어댔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신검무적의 얼굴이라도 한 번 봤으면 여한이 없겠소. 신기에 달했다는 그의 검술을 보면 더욱 좋겠지만, 그건 기대도 하지 않고 먼발치에서라도 그를 보는 게 내 소원이오.”
진산월로서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신검무적이 그렇게도 대단한 인물이오?”
남자는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부릅떴다. 가뜩이나 부리부리한 눈이 더욱 커져서 말 그대로 호목(虎目)이 되었다.
“형장은 그럼 신검무적이 보고 싶지도 않단 말이오? 형장도 검을 차고 있는 걸 보니 검을 배운 사람인 모양인데, 당금 무림에서 검을 익힌 사람들 중 신검무적을 존경하고 그의 검술 한 자락이라도 보려고 하지 않는 자가 누가 있단 말이오?”
그의 목소리가 제법 컸기에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에게 향했다.
남자는 찔끔하여 다시 목소리를 낮추었다.
“아무튼 어디 가서 그런 생뚱맞은 소리는 하지 마시오. 다른 사람에게 맞아죽기 싫으면 말이오.”
진산월은 그의 격한 반응에 씁쓸한 웃음을 짓고 말았다.
“신검무적이 이토록 남의 존중을 받을 줄은 몰랐소.”
“존중뿐이겠소? 그가 걸어온 행적과 종남파가 밟아온 길을 보면 누구라도 흠모해 마지않을 거요. 심지어 신검무적의 뺨에 난 칼자국을 흉내 내어 얼굴에 일부러 칼자국을 새기고 다니는 자들도 있다고…….”
주절거리던 남자의 시선이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진산월의 왼쪽 뺨에 나 있는 칼자국을 향했다.
“어? 형장도…….”
그때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종남파다! 종남파의 고수들이 왔다!”
그 말에 주루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창밖으로 향했다.
멀리서 일단의 인물들이 주루 쪽으로 오고 있었다. 주루 안이 온통 그들을 보기 위해 소란스러워졌다. 강호 무림을 온통 뒤흔들고 있는 풍운의 종남파가 드디어 무당산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