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9권 절대암류(絶代暗流)편 : 1화
제 292장 백아절현(伯牙絶絃)
진산월의 시선이 빠르게 청삼 노인의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외관상으로는 여느 평범한 노인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하나 진산월은 노인의 유난히 긴 팔과 허리 뒤춤에 매여 겉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 작은 가죽 주머니가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
청삼 노인은 손에 잎이 주렁주렁 달린 버드나무 가지를 들고 있었는데, 그중 한 부분이 잘려 있는 것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아마도 조금 전에 날아온 나뭇가지를 떼어낸 자국 같았다.
“좋은 분위기를 깬 것 같아 미안하네. 하지만 기다리기가 너무 지루해서 말이지.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더 참을성이 없어지더군.”
용모와는 어울리지 않는 맑고 깨끗한 음성이었다. 목소리만 들으면 누구라도 중년인의 것이라고밖에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진산월은 노인의 주름진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가 뜨락 쪽으로 한 발 움직였다.
“노인장은 뉘신데 야심한 시각에 남의 숙소에 함부로 들어와 있는 것이오?”
“자네들에게 용무가 있어서 말이지.”
진산월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우리 두 사람에게 말이오?”
“그렇네. 자네와 자네의 여자. 아니, 모용 공자의 약혼녀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자네가 몸으로 가리려고 애쓰는 그 여자에게도 용무가 있지.”
진산월은 처음에는 청삼 노인이 자신을 노리고 찾아온 쾌의당의 천살령주가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자신 뿐 아니라 임영옥까지 목표로 두고 있다고 하자 불같은 의혹이 일어나는 것을 참기 힘들었다.
“노인장은 대체 누구요?”
“밤잠이 없고 걱정거리가 많은 늙은이라고 해두지. 그보다 말일세.”
청삼 노인의 두 눈이 유난히 투명한 빛으로 물들었다.
“자네의 검법이 당대 제일이라고 하기에 은근히 기대를 했는데, 오늘은 보기 힘들겠군. 아쉬워, 정말 아쉬운 일이야.”
진산월은 늘 용영검을 차고 다녔으나, 지금은 숙소에 머물러 있느라 검을 잠깐 풀어놓은 상태였다. 진산월도 그 점에 대해서 아쉽기는 마찬가지였다. 설마 깊은 야밤에 이런 일을 당하게 되리라고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청삼 노인은 자연스런 동작으로 손에 들고 있는 나뭇가지를 다시 하나 꺾었다.
“얼마 전에 자네가 복양 늙은이를 만났다더군. 그를 좋은 곳으로 보내줬다지?”
진산월은 청삼 노인이 거론하는 사람이 음양신마 복양유임을 알아차렸다.
“음양신마와는 어떤 사이요?”
“글쎄. 젊었을 적에는 필생의 원수와도 같은 경쟁 상대였고, 점차 나이를 먹어서는 꼴도 보기 싫은 미운 존재였지. 하지만 오랜 세월이 흘러 같이 늙어지니 어느덧 흉허물 없는 묵은 술 같은 관계가 되더군. 굳이 말하자면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 마음이 통하는 막역지우(莫逆之友)라고나 할까? 그는 나에게는 종자기(鍾子期)나 마찬가지였네.”
종자기는 춘추시대의 거문고의 명인(名人)인 백아(伯牙)의 둘도 없는 친구였다. 백아가 거문고를 타면 종자기는 그 소리를 듣고 백아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알아차렸다. 훗날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세상에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음을 슬퍼하며 거문고의 현을 끊고 더 이상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고 한다.
이른바 백아절현(伯牙絶絃)의 고사였다.
“음양신마의 복수를 위해서 온 것이오?”
진산월의 물음에 청삼 노인의 주름진 얼굴에 처음으로 미소 비슷한 것이 떠올랐다.
“복수라. 모처럼 들어보는 단어로군. 강호에 발을 들여 놓는다는 건 언제 누군가의 손에 목숨이 끊어져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각오가 되어 있다는 뜻일세. 그러니 복수가 무슨 의미가 있겠나?”
청삼 노인이 손을 움직이는 것은 보지 못했다. 다만 진산월은 서늘한 기운 한 가닥이 자신의 미간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을 뿐이다. 그는 반사적으로 옆으로 목을 틀었다.
무언가 차갑고 서늘한 것이 코끝을 스치듯 지나가는 것을 느끼고 진산월은 머리끝이 쭈뼛거렸다.
돌아보니 등 뒤의 벽에 나뭇가지 하나가 깊숙이 박혀 있었다. 조금 전 청삼 노인이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던 나뭇가지였다.
청삼 노인의 입가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자네는 듣던 것과는 달리 조금 둔하군. 그래서야 이 험난한 강호에서 어찌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겠나?”
말을 하면서 다시 청삼 노인은 가지 하나를 꺾고 있었다.
어찌 보면 어린 아이가 장난을 치는 것 같기도 했고, 어찌 보면 노련한 정원사가 나무를 손질하는 모습 같기도 했다. 하나 진산월의 눈에는 무서운 솜씨를 지닌 검객이 예리한 검을 뽑아드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분명 청삼 노인은 나뭇가지를 꺾어서 던진 것뿐인데, 전혀 그런 기척을 느낄 수가 없었다. 심지어 나뭇가지가 자신의 지척에 이르도록 그것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으니 진산월 자신도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영하 강변에서 금도무적 양천해와 생사의 격전을 벌인 후, 잠시 영문도 모르고 정신을 잃고 말았었다. 나중에야 진산월은 자신이 소수마후의 선녀호접표에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나, 설사 알았다고 해도 그녀의 공격을 막을 수 있을 지는 자신할 수 없었다. 그만큼 당시 그녀의 공격은 은밀하면서도 가공스럽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 다시 그녀에 비견될만한 암기술의 절정고수를 만나게 된 것이다.
더구나 수중에는 용영검도 없고, 옆에는 반드시 지켜야하는 임영옥이 있었다. 여러 가지로 너무나 불리한 상황이라 진산월로서도 잠시 아득한 기분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단순한 나뭇가지로도 이러한 위력을 발휘할진대, 청삼 노인이 제대로 된 암기를 사용한다면 과연 자신은 막을 수 있을 것인가? 만에 하나 자신이 그를 막지 못한다면 임영옥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리고 종남파는?
한순간의 암담함을 억누를 수 있었던 것은 오랫동안 수많은 시련을 극복하면서 형성된 불굴의 의지 때문이었다. 진산월은 물러서거나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성큼 뜨락 아래로 내려섰다.
그것을 본 청삼 노인의 무심한 눈에 살짝 이채가 떠올랐다.
“제대로 해볼 셈이로군. 그것도 좋지.”
이번에는 아예 어떤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단지 그때 임영옥의 음성만이 들려왔을 뿐이다.
“오른쪽이에요!”
진산월은 본능적으로 왼쪽으로 몸을 비틀었다가 그 탄력을 이용해 앞으로 달려 나갔다. 이대로 거리를 두어서는 도저히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굳이 뒤돌아보지 않아도 자신이 서 있던 공간을 지나 뒤쪽 바닥에 나뭇가지 하나가 깊숙이 틀어박힌 것을 알 수 있었다.
진산월은 단숨에 청삼 노인의 앞으로 다가가서 주먹을 휘두르려 했다. 하나 그가 채 반도 접근하기 전에 청삼 노인은 훌쩍 신형을 날려 뒤로 물러났다.
“오늘은 그냥 인사만 하려고 들른 것이니 너무 힘을 쓸 것 없네.”
청삼 노인의 음성은 여전히 청명했으나, 진산월에게는 조롱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나를 희롱하려는 것이오?”
청삼 노인은 의외로 진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럴 리 있나? 노부가 듣기로는 자네가 복양 늙은이의 시신을 얌전히 돌려보냈다고 하더군. 덕분에 복양 늙은이는 늙고 추한 몸이나마 제대로 된 안식을 누릴 수 있게 되었네. 그래서 한 번은 자네에게 기회를 주려고 한 것일세.”
“무슨 기회 말이오?”
“맛보기 할 기회라고 해두지.”
“이게 맛보기란 말이오?”
청삼 노인은 수중에 들고 있는 몇 가닥 남지 않은 나뭇가지를 바닥에 던져 버렸다.
“그럼 이런 것에 내 제대로 된 솜씨를 담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나? 다음에는 정말 각오하는 게 좋을 걸세.”
“언제 말이오?”
“기다리면 알게 될 걸세.”
청삼 노인은 알 듯 모를 듯한 말을 하며 몸을 돌렸다. 그러다 다시 돌아보며 빙그레 웃었다.
“자네의 여자 말일세. 기척을 알아차리는 솜씨가 자네보다 나은 것 같군. 그녀의 도움을 받아보지 그러나. 혹시 아는가? 노부의 공격을 한 번 정도는 피할 수 있을지…….”
그의 몸은 곧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진산월은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그가 사라진 곳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지금 그의 심정은 그 자신도 모를 정도로 세차게 요동치고 있었다. 이토록 심한 무력감을 느낀 것은 중봉의 석실을 나온 이후 처음이었다.
청삼 노인은 단지 세 번 손을 썼을 뿐이지만 그는 처음 두 번의 공격만 간신히 알아차렸을 뿐, 세 번째에는 공격을 인식조차 하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처음의 공격은 자신의 등장을 알리기 위해 일부러 기척을 흘린 것이 분명해 보였고, 두 번째는 전력을 다하지 않아서 기세도 훨씬 떨어진 다분히 형식적인 공격이었다.
세 번째가 비로소 제대로 된 공격이었는데, 진산월은 임영옥이 말해줄 때까지 상대의 공격이 자신의 어디를 노리고 날아들었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뻔히 눈앞에서 상대가 공격을 해왔는데도 그것을 간파하지 못했다는 것은 무림인으로서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진산월이 받은 충격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무공에 대한 나름대로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확신이 철저하게 깨어진 것이다.
사락사락……
옷자락 스치는 소리와 함께 한 가닥 그윽한 내음이 다가왔다. 그 내음을 맡자 진산월은 들끓었던 마음이 이내 조금씩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사형.”
그녀의 음성에는 짙은 수심이 담겨 있었다.
진산월은 그녀를 돌아보며 빙긋 웃었다.
“사매에게 못난 모습을 보였군.”
“사형…….”
“아무래도 이번에는 호된 적을 만난 것 같아.”
“사형, 음양신마와 싸운 적이 있어요?”
진산월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에. 유 대협을 구하러 가는 길에 그를 만났지.”
“왜 말을 안 했어요?”
“이미 지난 일이었는걸.”
임영옥은 지그시 진산월을 바라보았다.
“내가 걱정할까 봐 그랬지요?”
“조만간 상황을 봐서 말할 생각이었어. 그럴 기회가 없었을 뿐이지.”
“그래서…… 그를 이겼나요?”
“운이 좋았어. 그는 내 검만 경계하고 있다가 장(掌)에 당하고 말았지.”
“태인장을 쓰셨어요?”
“응. 검만으로는 도저히 승부가 날 것 같지 않았어.”
“사형에게는 검정중원이 있잖아요.”
“그건 당분간 쓰지 않을 생각이야.”
“왜요?”
“몇 군데 보충할 곳이 있거든. 미흡한 데가 계속 거슬려서 선뜻 사용할 마음이 생기지 않아.”
임영옥의 눈이 어느 때보다 영롱하게 반짝였다.
“그게 완성되면 정말 무적의 검초가 되겠군요.”
“그거야 모르지. 오늘 같은 일이 생기리라고는 조금 전까지도 전혀 예상치 못했잖아.”
임영옥은 그의 손을 꼬옥 움켜잡았다.
“사형은 반드시 극복할 수 있을 거예요.”
그 음성에 담긴 간절한 염원을 진산월은 너무도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래. 반드시 그렇게 될 거야.”
“그 노인의 정체가 뭘까요?”
“아까부터 생각해 보았는데, 한 사람밖에 떠오르지 않더군.”
“그게 누군데요?”
“천수나타 당각.”
진산월의 음성은 어느 때보다 담담했다. 하나 그 음성을 들은 임영옥의 표정은 삽시간에 창백하게 굳어졌다.
“무림구봉 중의 수봉 말인가요?”
“그래. 백건에 청삼은 사천 당문의 대표적인 복장이야. 당문이 비록 독과 암기로 명성을 날리고 있지만, 그 정도의 암기술을 지닌 자는 그들 중에서도 오직 한 사람뿐이지.”
천수나타 당각은 자타가 공인하는 무림 제일의 암기 고수였다. 그의 무공 수준을 천하제일이라고 하는 사람은 없지만, 적어도 암기술에 관한 한 그는 강호무쌍(江湖無雙)이었다. 더구나 그는 일대일의 대결에서는 아직까지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으며, 그와의 대결에서 살아난 사람도 없다고 알려져 있었다.
암기 무공 자체가 워낙 살상력이 강한 데다, 당각이 사용하는 암기의 위력이 너무나 강력해서 누구도 그의 손아래 살아남지 못했던 것이다.
청삼 노인이 당각이라면 그의 공격에 진산월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어려워했던 것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소리도 없고 기척도 없는 그의 공격을 임영옥이 알아차린 것이 더욱 놀라운 일일 것이다.
임영옥의 두 눈에 걱정스러운 빛이 가득 떠올랐다.
“당각이 정말 음양신마의 죽음 때문에 사형을 찾아온 것일까요?”
“단순히 그런 것 같지는 않군. 무언가 나에게 다른 목적이 있을 거야. 그리고 사매에게도…….”
“당각이 제게 목적이 있다면 그 이유는 오직 한 가지뿐일 거예요.”
임영옥은 손을 들어 자신의 풍성한 머리 한쪽에 꽂혀 있는 봉황 문양의 비녀를 뽑아들었다.
진산월은 한눈에 그것을 알아보았다.
“봉황금시.”
“그래요. 당각은 저와 일면식도 없을 뿐 아니라 어떠한 접점도 없는 사람이에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 봉황금시 외에는 그가 저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유를 떠올릴 수 없군요.”
봉황금시!
진산월을 비롯한 종남파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질긴 인연을 가진 물건이었다. 아니 그것은 차라리 악연(惡緣)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사 년 전에도 이 물건 때문에 많은 고초를 겪어야 했고, 얼마 전에도 신목령은 물론이고 흑갈방과 쾌의당의 공격을 받아야만 했다. 그런데 그녀의 말이 맞다면 이 물건 때문에 이제는 무림 최고의 암기 고수를 상대해야 하는 것이다.
전대의 천하제일미인인 백모란의 신물이며, 또한 천룡객 석동의 물건인 천룡궤를 열 수 있는 열쇠라고만 알려진 이 작은 비녀는 대체 어떤 비밀을 지니고 있단 말인가?
진산월은 그녀의 손 위에 놓여 있는 세 치 길이의 금빛 열쇠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이상한 일이로군.”
“왜요?”
“봉황금시의 용도는 천룡궤를 여는 열쇠일 뿐이야. 그런데 나는 그 천룡궤를 모용 대협에게 전해 주었지. 그렇다면 당각은 모용 대협에게서 천룡궤를 얻어낼 자신이 있는 건가?”
생각해 보면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천룡궤는 이미 진산월의 손을 거쳐 모용단죽에게 넘어간 상태였다. 이제 와서 굳이 봉황금시를 구해 보았자 모용단죽에게서 천룡궤를 얻지 못하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다.
아무리 당각이라 할지라도 모용단죽에게서 강제로 천룡궤를 빼앗을 수는 없을 터.
그렇다면 당각은 모용단죽의 부탁을 받고 천룡궤를 열기 위해 봉황금시를 노리는 것일까?
그렇더라도 의문은 사라지지 않는다. 만일 모용단죽이 천룡궤를 열기 위해서 봉황금시가 필요했다면 모용봉을 통해 부탁을 하면 되는 일 아닌가?
봉황금시는 모용봉이 청혼에 대한 증표로 임영옥에게 준 것이니, 그가 요구를 하면 임영옥이 돌려주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봉황금시는 임영옥에게는 단지 귀찮은 혹덩어리 외의 어떤 것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굳이 당각 같은 불가일세(不可一世)의 인물까지 나설 이유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임영옥은 봉황금시를 모용봉에게 돌려주려 했으나, 모용봉은 중추절 전에는 돌려받지 않겠다며 그것을 거절하기도 했었다.
진산월은 문득 모용봉이 임영옥의 구궁보 출행을 선뜻 승낙한 것이 자신이 모용단죽에게 천룡궤를 전해준 직후임을 상기해냈다. 쉽사리 임영옥을 돌려보낼 것 같지 않던 모용봉이 의외로 순순히 그녀를 데려가는 것을 승낙했을 뿐 아니라, 나중에는 오히려 빨리 떠나라며 등을 떠밀다시피 했다.
그것은 혹시 모용단죽이 봉황금시를 얻어 천룡궤를 열려는 것을 막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대체 모용봉은 무엇이 두려워 자신의 조부가 천룡궤를 여는 것을 막으려 한 것일까?
그의 말대로라면 천룡궤에는 석동이 남긴 것으로 보이는 세 번째 취와미인상이 있을 것이다. 혹시 모용봉이 진정으로 두려워한 것은 자신의 조부가 천룡궤 안의 취와미인상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니었을까? 모용단죽이 취와미인상을 얻게 되면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것일까?
숱한 의문이 진산월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봉황금시 때문에 벌어지는 일련의 일들은 천룡궤만큼이나 비밀스러운 것이었다. 두 가지 물건에 진산월과 임영옥이 모두 얽히게 된 것은 단순한 우연인가, 아니면 누군가의 교묘한 장난이란 말인가?
그녀의 손에 들린 봉황금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시선에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복잡한 빛이 담겨 있었다.
임영옥은 잠시 봉황금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가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며 그것을 다시 자신의 머리에 꽂았다.
“가끔은 이것을 없애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지금은 자연스레 흘러가는 대로 두고 싶군요. 만일 누군가에게 이것을 줘야 할 상황이라면 굳이 망설이거나 주저하지 않을 거예요.”
역설적이게도 그녀의 머리 위에 꽂힌 봉황금시는 그녀와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려 보였다.
임영옥의 시선이 다시 진산월에게로 향했다.
“이제 말해 봐요. 사형은 당각이 왜 사형을 노리고 있는지를 알고 있죠?”
“단지 짐작 가는 게 있을 뿐이야.”
“그게 무언지 말해줘요. 조금 전처럼 말 돌리지 말고.”
진산월은 이번에는 숨기지 않고 이정문에게 들은 말을 해주었다.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임영옥의 표정은 여전히 차분하고 침착했으나, 눈빛만큼은 어느 때보다 우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결국 쾌의당이란 말이군요. 사형은 그가 천살령주라고 생각하는 거죠?”
“이정문이 말한 모든 조건에 너무 들어맞아서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을 생각할 수가 없더군.”
임영옥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당각 같은 인물이 쾌의당에 속해 있다는 게 선뜻 믿어지지 않는군요. 그가 다른 사람의 지시를 받는 모습이 상상이 가지 않아요.”
“담로검 매장원이나 금도무적 양천해도 누군가의 밑에 있을 사람들은 아니었어.”
양천해의 이름이 나오자 임영옥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얼마 전에 눈앞에서 벌어졌던 무시무시한 싸움이 뇌리에 떠올랐던 것이다. 당시 느꼈던 두려움과 죽을 것 같은 긴장감은 결코 두 번 다시 맛보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때보다 더욱 무섭고 두려운 적과 마주치게 된 것이다. 특히 그와 진산월의 무공이 상성이 맞지 않는다는 것이 더욱 그녀를 걱정스럽게 했다.
무림의 싸움에서 무공의 상성은 무척이나 중요한 요소였다. 특히 진산월과 당각 같은 절정고수들 간의 대결에서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승패를 가름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기 때문에 무공의 상성이 더욱 중요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일정한 거리를 둔 채 작고 빠른 암기가 날아든다면 그것만큼 상대하기 까다로운 것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검이나 도 같은 병장기의 고수들은 암기 무공의 달인과는 싸우기를 꺼려했다.
진산월은 무림에 출도한 이후 강호의 고수들과는 크고 작은 싸움을 많이 벌였으나, 암기 고수와의 싸움은 그다지 많지 않은 편이었다. 더구나 당각 같은 일정 수준 이상의 암기 실력을 지닌 절정고수와는 싸워본 적이 전무했다.
그가 당각의 공격에 허무할 정도로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했던 것도 암기 무공의 고수와 싸워본 경험이 거의 없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팔을 휘두르거나 손을 움직여 암기를 던지는 것은 하수들의 방식이었다. 진정한 암기 고수는 발출하는 동작은 물론 그 순간까지도 정확히 파악하기가 힘든 법이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진산월의 뒤에 있던 임영옥이 당각의 공격 위치를 정확히 알아낸 것은 확실히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진산월은 그 점에 대해 나름대로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건 아마도 사매의 몸에 음기가 가득한 상태여서 온몸의 감각이 최고조에 달해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보거나 들은 것이 아니라 극도로 예민해진 감각으로 당각의 공격이 어느 방향으로 날아오는지를 느꼈을 뿐이었다. 음기가 가라앉고 몸이 정상으로 돌아온다면 그녀 또한 진산월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당각의 등장은 그들에게 실로 커다란 위협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당각은 왜 제대로 된 공격을 하지 않고 스스로 물러난 것일까요?”
조금 전의 상황으로 보아 당각이 전력을 기울였다면 진산월은 치명적인 상태에 빠졌을 가능성이 높았다. 당각이 쾌의당의 천살령주로서 진산월을 제거하기 위해서 온 것이라면 그런 좋은 기회를 놓친 것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당각은 인사차 온 것이라며 순순히 물러났을 뿐 아니라 진산월에게 충고까지 해주었다. 그야말로 진산월로서는 당혹감을 넘어 수치심을 느낄 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혹시 당각의 목표는 사형이 아닌 다른 사람인 게 아닐까요? 사형에게는 말 그대로 음양신마의 죽음을 묻기 위해서 들른 것이고…….”
그녀의 음성에는 은근한 기대감이 깔려 있었다.
하나 진산월은 그런 헛된 기대는 품고 있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맛보기 운운하는 말은 하지 않았겠지. 그리고 그가 쾌의당 소속이라면 언제가 되었든 반드시 나와 마주치게 되었을 거야. 단지 시기상의 문제일 뿐이지.”
“하지만…….”
진산월은 임영옥을 돌아보며 빙긋 웃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나는 그리 약한 사람이 아니야.”
물론 임영옥은 잘 알고 있었다. 예전부터 진산월은 누구보다 강인한 사람이었다. 별 볼일 없는 무공을 가지고 있을 때도 그는 승부에 강했으며, 무공이 고강해진 지금에 와서는 천하의 어느 누구와 싸워도 두려워하지 않는 인물이 되었다.
하나 그렇다고 그녀가 어찌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그 상대가 진산월과는 가장 상성이 맞지 않는 암기 무공의 최고수인 당각이니 말이다.
임영옥의 수심에 젖은 얼굴을 응시하며 진산월은 담담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당각이 순순히 물러난 것은 따로 노리는 것이 있어서일 거야.”
임영옥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무언가요?”
“그가 단순히 나 하나만을 목표로 했다면 오늘 손을 써왔을 거야.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단순히 나 하나만이 아닌 본 파의 몰락을 바라고 있다면?”
임영옥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사형의 말씀은…….”
“당각은 아마 좀 더 공개된 자리에서 나를 쓰러뜨리려고 할 거야. 그래야만 불길처럼 타오르고 있는 본 파의 기세를 꺾고 본 파의 부흥을 제지할 수 있을 테니 말이야.”
한동안 임영옥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토록 오랜 세월을 보내고 모진 고난을 겪어가며 여기까지 왔는데, 종남파의 앞길에 펼쳐진 가시밭길은 아직도 넓고 험하기만 했다.
한참 후에야 임영옥은 간신히 입을 열 수 있었다.
“그는 본 파와 아무런 원한관계도 없는데 그가 왜……?”
“청부 자체가 그런 것 일수도 있고, 쾌의당 내에서 정한 방침일 수도 있지. 본 파의 부흥을 바라지 않는 존재들은 아직도 강호에 많을 테니 말이야.”
“그건…… 본 파에는 너무나 가혹한 일이에요.”
진산월은 오히려 웃었다.
“어차피 각오했던 일이야. 군림천하의 꿈을 꾸었을 때부터 말이지.”
“사형…….”
“당각이 오늘 나를 찾아온 것은 자신의 무공이 내게 통하는지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였을 거야. 말 그대로 가벼운 맛보기에 불과했지만, 그는 오늘 일로 자신의 승리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을 가지게 되었겠지.”
“…….”
“그러니 조만간에 그는 어떤 식으로든 나에게 승부를 걸어올 거야. 그것도 공개된 자리에서. 그 자리에서 나를 꺾음으로써 종남파의 부흥이 실패했다는 것을 온 무림에 알리고 싶은 것이겠지.”
임영옥은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끼치는지 몸을 가늘게 떨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진산월의 손을 움켜잡았다. 그리고는 애틋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그녀의 눈은 수십 개의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사형은 자신 있나요?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정말 그를 상대할 자신이 있나요? 어떤 일이 있어도 꺾이지 않을 수 있나요?’
진산월은 그녀의 손을 마주 잡으며 그녀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나직하면서도 분명한 각오가 담긴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지지 않아. 그리고 본 파의 의지 또한 이 정도 일로는 결코 꺾이지 않을 거야.”
임영옥은 하염없이 그를 올려다보고 있더니 마침내 참지 못하고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 ☆ ☆
진산월의 예측대로 다음 날 오전에 한 장의 비무첩이 종남파가 머무르고 있는 청연각의 별실로 전해졌다.
<종남파 장문인 친전.
이틀 후 정오에 현악문(玄岳門) 앞에서 우내사마 중 일인인 음양신마를 꺾은 신검무적의 검법을 직접 겪어보고 싶소.
천수나타 당각.>
간단한 문구만 적힌 비무첩이었으나, 그 내용은 능히 천하를 송두리째 뒤흔들고도 남았다. 무당산 일대가 온통 그 비무첩으로 인해 요동치기 시작했고, 그 여파는 이내 강호 전역으로 무섭게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강호제일의 검객과 강호제일의 암기 고수가 정면으로 격돌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