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9권 절대암류(絶代暗流)편 : 10화
제 301 장 흑수백수(黑手白手)
마림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한 사내가 그의 뒤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걷고 있다가 마림의 시선을 눈치 챘는지 근처 가게 쪽으로 슬쩍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마림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아예 몸을 숨기지도 않는군.’
마림이 누군가가 자신의 뒤를 쫓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어제 오전이었다.
원래 마림은 흑선방주인 최동의 은밀한 일을 해주는 은월당(隱月堂)의 책임자였다. 하는 일들이 워낙 기밀을 요하는 것이다 보니 마림은 주위의 시선에 무척 민감한 편이었다.
그래서 누군가가 자신의 뒤를 밟기 시작한 지 일각도 되지 않아 자신이 추적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처음에는 적류문의 졸개가 자신을 미행하는 줄 알았다. 적류문은 화산파의 끄나풀이 된 후 사사건건 흑선방과 충돌하고 있으며, 얼마 전에는 실제로 양 파간의 고수들이 치열한 혈전을 벌인 적도 있었다.
하나 마림은 이내 자신을 쫓는 자들이 적류문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미행하는 자들의 솜씨가 어설프고 동작이 지나치게 투박했던 것이다. 적류문은 무공 실력은 조금 떨어질지 몰라도 미행이나 협잡을 하는 수법은 상당히 뛰어난 자들이어서 이렇게 쉽게 자신의 눈에 뜨일 리가 없었다.
문제는 마림을 쫓는 자들도 자신들의 미행이 서툴러서 마림에게 발각당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하다는 것이었다. 애초부터 그들은 자신들이 쫓고 있다는 것을 숨길 의도가 별로 없어 보였다.
그것은 둘 중의 하나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정말 어설픈 뜨내기들 이거나 무공 실력에 상당한 자신감을 가진 자들이라는 말이었다.
마림을 걱정스럽게 하는 것은 아무리 보아도 그들이 후자에 가까운 자들 같았기 때문이다. 미행하는 솜씨는 상당히 서투르고 어설펐으나, 몸의 움직임 자체는 깔끔했고 행동거지도 반듯해서 제대로 된 문파에서 체계적인 무공을 익힌 자들임이 분명해 보였다.
미행을 하는 자들은 모두 세 명인데, 두 시진마다 한 번씩 교대를 하는 것 같았다. 다시 말해서 마림이 숙소로 들어가는 시간을 제외한 아침부터 저녁까지의 대부분의 시간을 그들 중 한 사람이 따라다니고 있는 것이다.
미행이라는 것은 하는 사람도 쉽지 않지만, 미행을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도 상당히 불편하고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더구나 이번처럼 거의 반공개적으로 누군가가 하루 종일 뒤따르고 있다면 무척이나 짜증스럽고 갑갑한 심정이 될 것이다.
하나 마림은 그보다는 오히려 약간 불안한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들의 소속이 어디인지 짐작이 되었기 때문이다.
명문정파 특유의 절제된 모습과 미행이 발각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당당함,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최근에 벌인 일을 고려해 본다면 그들의 정체는 그리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화산파로구나. 아마 이삼 대 제자들쯤 되는 것 같은데, 무척이나 까다롭게 됐군.’
화산파 제자라면 무공 실력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자신이 당해낼 수 없었다. 더구나 저렇게 적당한 거리를 두고, 볼 테면 보라는 식으로 느긋하게 쫓고 있는 것은 일부러 시비를 걸어오라는 의도도 담겨 있을 것이다.
‘아니, 단순히 그런 것 같지는 않군. 저들은 지금 나를 압박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는 것일까?’
마림은 그들이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몇 가지 추측이 뇌리에 떠올랐다.
첫째, 이자들은 단순히 자신의 행적을 파악하기 위해 미행하는 것이 아니다. 이자들의 목적은 전혀 다른 것에 있으며, 그것은 아마도 상당히 치밀한 계획이 수반된 복잡하고 고차원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둘째, 이자들이 화산파의 제자들이고 얼마 전에 있던 신산 곡수의 변사에 대한 단서를 잡기 위해 자신을 압박하는 것이라면 단순히 자신을 미행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될 것이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그들이 어떤 식으로든 본격적으로 자신을 향해 손을 써오리라는 뜻이었다.
셋째, 자신이 만약 이자들의 미행을 뿌리치고 잠적해 버린다면 이자들의 다음 목표는 흑선방의 다른 누군가가 될 것이며, 그 대상은 방주인 최동일 가능성이 높았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마림은 입가에 냉소를 머금었다.
이자들이 정말 자신을 미행해 최동을 끌어내려 하는 것이라면 그건 철저하게 잘못된 생각이었다. 설사 자신의 목이 잘려나간다 할지라도 최동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을 것이며, 결코 숨겨진 거처에서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 또한 그쯤은 언제라도 각오가 되어 있었다.
흑선방이 서안의 흑도를 석권하고 오늘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어떠한 아수라장을 헤쳐 왔는지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자라면 단순히 사람 몇 명 죽이거나 위협하는 것으로는 흑선방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마림은 그런 흑선방이 처음 탄생될 때부터 최동과 함께해 온 인물이었다.
겉보기에는 호리호리하고 항상 인상 좋은 웃음을 짓고 있어서 유약해 보이지만, 그의 오랜 친구들은 그를 칠점사(七點蛇)라고 불렀다. 독사 중에서도 가장 독성이 강한 칠점사만큼이나 지독한 면이 있는 사람이 바로 마림이었다.
마림은 우선 한 가지를 확인해야 했다.
자신을 미행하고 있는 자들이 진짜로 화산파의 제자들인지를 먼저 분명히 알아야 했다. 그래야만 다음 대책을 세울 수 있다.
다행히 어제 처음 자신에게 미행이 붙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부터 마림은 한 가지 준비해둔 것이 있었다. 마침 그가 준비해둔 일이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마림의 뒤를 멀찌감치 뒤쫓던 장한에게 누군가 부딪혀 왔다. 열 살 남짓 되는 꼬맹이 하나가 친구들을 따라 달음박질을 하다가 중심을 잃고 장한이 있는 쪽으로 넘어진 것이다. 장한은 무의식중에 손을 내밀어 꼬마를 잡았다. 덕분에 꼬마는 바닥에 나뒹굴지 않고 장한의 품에 안기는 형상이 되었다.
“고맙습니다.”
꼬마는 장한을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다시 친구들이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마림은 뒤쪽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전면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느긋한 자세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얼마쯤 가니 오늘의 목표인 옷가게가 나왔다.
이곳에서 마림은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다. 그냥 옷만 한 벌 사가지고 나오거나, 아니면 의복을 맞추기 위해 내실로 들어가는 것이다. 물론 내실로 들어간 마림이 밖으로 나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 안에서 완벽하게 잠적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대가로 옷가게는 발각이 나겠지만, 이 옷가게는 이럴 때를 대비해서 언제든지 한 번 쓰고 버릴 수 있는 일회용 거점 중 하나에 불과했다.
마림이 옷가게로 들어서자 점원이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찾으시는 옷이 있습니까?”
“날이 점점 더워져서 여름 옷 한 벌을 사려 하네. 내 체형에 맞을 만한 것이 있는가?”
점원은 마림의 전신을 살피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어제 새로 들어온 옷들 중 손님에게 딱 맞을 만한 게 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점원이 안으로 옷을 가지러 들어가자 마림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화산파로군.’
자신을 미행한 인물이 화산파 고수가 아니었다면 점원은 체형에 맞는 옷이 없다며 치수를 재겠다고 마림을 내실로 안내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마림은 완벽하게 모습을 감추어 버렸을 것이다.
조금 전에 마림의 뒤를 미행하던 장한에게 부딪힌 아이는 흑선방에서 관리하는 소매치기 중 하나였다. 화산파의 제자들은 평상시에는 소맷자락에 매화 문양이 새겨진 옷을 주로 입고 있었지만, 자신들의 신분을 감출 때는 평복을 입었다. 대신 매화 문양이 새겨진 손수건을 꼭 소지하고 다녔는데, 아이는 그 손수건을 노리고 장한에게 접근했던 것이다.
아이가 장한의 품에서 손수건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장한은 화산파의 제자가 아니므로 마림은 옷가게에서 종적을 감춘 다음 반대로 장한과 그의 일당들을 역추적하여 그들의 꼬리를 잡을 계획이었다.
하나 아이는 장한의 품에서 매화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진 작은 손수건 하나를 훔쳐냈다. 상대가 화산파임이 분명해진 이상 그들을 대하는 마림의 방책도 달라져야 했다. 화산파는 단순한 뜨내기 집단이 아니므로 무작정 잠적했다가는 오히려 엉뚱한 여파를 맞게 될지도 몰랐다. 더욱 신중하고 치밀한 대책이 필요했다.
점원은 이내 안에서 몇 벌의 옷을 가지고 나왔다.
“재질이 가벼운 데다 땀 흡수도 잘되고 바람도 잘 통해서 요즘 인기가 있는 제품입니다. 색상이 여러 개가 있으니 손님 취향에 맞는 걸로 고르시면 됩니다.”
황색과 갈색, 청색 그리고 검은 색의 네 가지 옷들 중 마림은 갈색 옷을 골랐다.
“이 색이 마음에 드는군. 이걸로 해주게.”
마림이 계산을 마치고 구입한 옷을 가지고 나가자 점원은 이내 나머지 옷들을 가지고 내실로 들어갔다.
내실에는 옷가게의 주인인 장노삼(張老三)이 초조한 표정으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주가 무슨 색을 골랐느냐?”
“갈의입니다.”
장노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역시 그렇군. 당주는 어쩌면 최악의 상황도 각오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어서 방주께 연락하고 형제들을 불러라.”
네 가지 색의 옷은 각기 다른 네 가지 방책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마림은 그중에서 가장 강력한 방법을 선택했다. 지금 상황에서 그것은 가장 효과적일 수 있지만, 반면에 그만큼 위험천만한 방식이기도 했다.
옷가게를 나온 마림은 마음이 흥겨워졌는지 나직한 콧노래를 부르며 경쾌한 걸음으로 거리를 활보했다. 이미 대책을 결정했으므로 거리낄 것이 없었다. 그 결과 설혹 목숨을 잃게 될지라도 자신이 선택한 이상 후회나 미련 따위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화산파를 상대로 끌려가지 않고 상황을 주도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속에서 불같은 투지가 일어나고 있었다.
‘화산파라 이거지. 우리 흑선방이 지옥의 수라장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똑똑히 보여주지.’
마림은 상가 지역을 지나 한적한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여기부터는 서안 뒷골목 특유의 복잡한 미로가 시작되기 때문에 미행을 하는 데 제약이 많았다. 자칫하면 앞에서 걷고 있는 사람의 종적을 놓치기 십상이기 때문이었다.
마림은 그들이 행동을 개시하려면 이쯤에서 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리고 그의 예상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마림이 골목으로 들어서서 채 열 걸음도 걷기 전에 그의 앞에 불쑥 한 사람이 나타났던 것이다.
짙은 눈썹에 날카로운 인상을 지닌 청년이었다. 마림은 한눈에 그가 어제 오전에 처음으로 자신을 미행했던 청년임을 알아보았다.
청년은 그의 앞을 막아서더니 아무 말 없이 그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마림은 의아한 생각이 들어 불쑥 물었다.
“무얼 그리 보고 있는 건가?”
청년은 퉁명스런 음성으로 대꾸했다.
“멍청한 건지, 아니면 배짱이 좋은 건지 구분이 가지 않아서.”
마림은 그의 말뜻을 알아차렸으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살짝 역정을 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그런 걸 묻는 건 너무 무례한 일 아닌가?”
“정말 무례한 게 뭔지 모르는군.”
“뭔가?”
“이제 보여줄 참이야. 일단 맞고 시작하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마림은 턱에 강한 충격을 느끼고 바닥에 쓰러졌다. 마림도 흑도에서 오래 굴렀던 인물이라 나름대로 자신의 실력에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자신이 어떻게 바닥에 나뒹굴게 되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바닥에 몸이 닿기도 전에 다시 옆구리에 강력한 충격이 전해졌다. 이번에는 마림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채 바닥에 쓰러지기도 전에 청년이 발길질을 했다는 것을.
그 발길질의 위력이 어찌나 강했던지 마림의 옆구리 갈비뼈는 모조리 부서지고 말았다.
마림은 불길 위에 올라온 새우처럼 몸을 구부리다가 다시 몸을 쭉 폈다. 견딜 만해서가 아니었다. 발에서 참을 수 없는 통증이 느껴졌기에 자신도 모르게 그런 자세를 취하게 된 것이다.
쓰러진 그의 발을 청년이 짓밟고 있었다. 마림의 발목뼈는 수수깡처럼 분질러지고 말았다.
한동안 마림은 정신없이 두들겨 맞았다. 단순히 주먹을 내뻗거나 발길질을 하는 것뿐인데도 그때마다 몸속의 뼈는 쉽게 부러져 나갔고, 마림은 지독한 통증에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반격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공격이 보여야 피하든 말든 할 텐데, 청년의 손놀림은 마림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하나 마림은 단 한 마디도 신음을 내지르거나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온몸을 벌레처럼 짓밟히고 있으면서도 마림은 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를 죽이지는 않을 모양이군.’
마림은 청년의 손속이 잔혹하기는 했으나 자신의 생명과 관련된 부분은 교묘하게 피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머리나 목, 가슴 같은 치명적인 부위는 건드리지 않는 것이다.
한동안 마림의 몸을 사정없이 두들겨 패던 청년이 갑자기 손을 멈추었다.
그때 이미 마림의 몸은 넝마조각과 다름이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변해 있었다.
청년은 손을 내밀어 마림의 목을 움켜잡고 그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마림은 입가로 시커먼 핏물을 꾸역꾸역 토해내면서도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피가 묻어 시뻘게진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저, 젊은 친구가 솜씨가 좋군. 남을 많이 때려본 모양이야……. 이름이 뭔가, 젊은 친구?”
청년은 그의 눈을 가만히 보고 있더니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내 이름은 장표다. 복수라도 할 생각이라면 깨끗이 포기하는 게 마음 편할 거다. 배짱이 마음에 들어 해주는 말이니 새겨듣는 게 좋을 거야.”
마림은 꺼져가는 눈으로 그를 보면서도 계속 웃고 있었다.
“보, 복수는 숙명이지. 거기에 이자가 붙을 거야…….”
청년, 장표는 아무런 대꾸 없이 다른 손으로 마림의 관자놀이를 가격했다.
마림은 그대로 정신을 잃어 버렸다.
“흑선방의 무리는 확실히 여타의 흑도 무리들과는 조금 다른 것 같군. 그래봤자 어차피 하루살이에 불과한 존재들이지만.”
장표는 축 늘어진 마림의 몸을 가볍게 옆구리에 낀 채로 신형을 날려 이내 골목 안으로 사라졌다.
☆ ☆ ☆
일단의 무리들이 서안의 뒷골목을 질주하고 있었다.
“빨리빨리.”
그들은 빠른 속도로 달리면서도 무엇이 그리도 급한지 연신 서로를 재촉하고 있었다.
정신없이 복잡한 서안의 뒷골목을 달려가는 무리들 중 선두에 선 자는 다소 뚱뚱한 체구에 둥그런 얼굴을 가진 중년인이었다.
그의 이름은 하복(河福). 하복은 인간성 좋고 늘 웃는 인상이라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를 좋아했다. 서안 남문대로의 거리에서 제법 커다란 음식점을 하는 하복은 주위의 평판도 좋았고 인복도 제법 있어서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명절 때면 주변의 가난한 노인들과 어린아이들을 초대해서 잔치도 베풀어 주었고, 한겨울에 떠돌이 거지들이 배고픔과 추위에 떨고 있을 때면 따뜻한 국물이라도 한 그릇 먹여서 몸을 녹일 수 있게 했다.
그때마다 하복의 얼굴에는 보기만 해도 흐뭇해지는 환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소안가(笑顔哥)라고 불렀다.
그런데 늘 미소가 떠나지 않던 소안가 하복의 얼굴이 지금은 잔뜩 굳어진 채 차가운 빛을 띠고 있어서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큰일이군. 벌써 두 군데나 허탕 치고 말았으니. 더 늦기 전에 당주의 행방을 찾아야 하는데, 아무래도 너무 늦은 게 아닌지 불안하구나.’
남문대로 일대에서 평판이 좋은 하복이 서안의 흑도 세력을 장악하고 있는 흑선방의 은월당 부책임자라는 것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지금 하복을 뒤따르고 있는 인물들은 모두 은월당 소속이었다. 그들이 찾고 있는 것은 은월당의 당주인 마림의 행방이었다.
마림은 옷가게를 나간 후 곧바로 실종되었으며, 그 뒤로 전혀 행방을 알 수 없었다. 다만 그가 들어간 곳으로 추정되는 골목 어귀에서 그가 옷가게에서 사가지고 간 갈의만이 발견되었을 뿐이었다.
처음에 은월당의 고수들은 마림의 행방을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마림이 갈의를 건네받을 때 그 속에 작은 주머니 하나를 같이 전달받았는데, 주머니에는 향설목(香舌木) 조각이 들어 있었다. 향설목은 천리향(千里香) 같은 기물은 아니었으나, 특이한 향내를 풍기고 있어서 훈련받은 동물이라면 십 리 밖에서도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마림이 네 종류의 옷 중에서 선택한 갈의는 ‘호굴잠입(虎窟潛入)’을 뜻하는 것이었다. 스스로 상대에게 사로잡혀 그들의 소굴을 알아내어 역공을 취하는 방식이었다.
상당히 효과적이지만 그만큼 당사자에게는 위험이 닥치는 방법이어서 실제로는 그리 자주 사용되지 않았다. 과거에 이 방식을 선택했다가 상대에게 너무 심한 고문을 당해 죽은 자들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
마림은 갈의 속에 있는 주머니를 은밀히 보관한 후 화산파의 고수들이 자신을 공격할 만한 곳으로 일부러 걸어 들어갔다. 그의 예상은 그대로 적중해서 그는 그곳에서 화산파 고수에게 잡혀가는 몸이 되고 말았다.
문제는 그다음에 일어났다.
은월당 고수들이 마림의 몸에 있는 향설목의 냄새를 쫓아 처음 도착한 곳은 갈의가 발견된 곳에서 백여 장 떨어진 어느 허름한 가옥이었다. 하나 은월당의 고수들이 조심스레 접근했을 때, 가옥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은월당 고수들은 가옥의 먼지 한 톨까지 샅샅이 조사한 다음에야 그 가옥에 몇 명이 머물러 있다가 떠나갔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마림이라는 것은 불문가지였다.
그들은 결국 부당주인 하복에게 연락을 했고, 하복은 직접 추적에 나섰다. 그사이에 시간이 상당히 경과하여 향설목의 내음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서 무척이나 어려움을 겪었으나, 다행히 세 마리의 개들 중 가장 후각이 발달한 한 마리가 희미한 내음을 쫓아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들이 냄새를 따라 두 번째로 도착한 장소는 동문대로 끝 쪽에 있는 작은 창고였는데, 그것은 서안을 거의 반이나 가로지르는 먼 거리여서 누구나가 불안한 생각을 감추지 못했다. 이토록 멀리까지 사람을 끌고 가는 경우란 좀처럼 없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더욱 신중하게 접근을 했다. 만약 그 창고 안에 화산파의 고수들이 잠복해 있거나, 창고 자체가 함정이라면 오히려 치명적인 상황에 빠질지도 모르기 때문에 희생을 각오한 자원자 두 명이 목숨을 내걸고 수색에 나섰다.
그리고 그들이 발견한 것은 비어 있는 창고 안에 널려 있는 피 묻은 의복 한 벌뿐이었다.
그 의복이 마림이 마지막에 입었던 것임을 알아낸 은월당 고수들은 허탈함을 감출 수 없었다. 옷이 벗겨진 이상 향설목의 냄새를 따라 추적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하복만이 아직 포기하지 않았을 뿐이다.
“당주의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들이 굳이 시신을 가지고 갔을 리는 없으니 아직 당주는 살아 있음이 분명하다. 백주 대낮에 알몸의 중년인을 끌고 가지는 못했을 테니 필시 이 근처에서 옷을 샀을 것이다. 옷가게를 뒤져라.”
수하들은 이내 하나의 옷가게에서 얼마 전에 마림의 체형을 가진 자가 입을 만한 옷을 팔았음을 알아냈다.
“옷을 구입한 자는?”
“송림당(松林堂)의 주인이라고 합니다.”
“송림당은 뭐 하는 곳이냐?”
동문대로 일대의 지리에 밝은 부하 하나가 재빨리 대답했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골목에 있는 작은 약방(藥房)입니다.”
“어서 가보자.”
하복은 그를 앞세워 송림당으로 향했다.
송림당은 동문대로의 후미진 골목 안에 있는 작고 오래된 약방으로, 뒷골목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싼 값에 약을 팔아서 이 일대에서는 제법 유명한 곳이었다. 약방 주인이 약간의 의술도 알고 있어서 급한 경우에는 사람을 고치기도 해서 주위의 신망도 상당히 두터운 편이었다.
송림당으로 향하는 골목을 달려가는 하복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그곳에서도 당주의 흔적을 찾지 못하면 가망이 없는데……. 어쩌자고 당주는 그런 위험천만한 계획을 결정한 것일까?’
마림의 마음을 짐작 못 하는 것은 아니었다. 마림으로서는 어떻게든 화산파의 꼬리를 잡고 흔들어서 흑선방이 결코 호락호락한 곳이 아님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하나 상대는 다름 아닌 화산파였다. 지금까지 자신들이 상대했던 흑도방파들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지금까지의 방식을 고집한 것은 너무 무리한 일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하복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저 모퉁이를 돌아가면 바로 송림당이 보입니다.”
“이번에는 내가 직접 확인해 보겠다.”
“위험합니다, 부당주.”
“아니다. 벌써 상당한 시간이 경과되어서 우리의 행적은 이미 노출된 상태다. 그들이 우리를 해치우려고 했으면 동문대로에 들어섰을 때부터 손을 썼을 것이다.”
하복은 주저하지 않고 송림당으로 들어섰다.
송림당에는 늙은 주인이 꾸벅꾸벅 졸고 있다가 불쑥 들어온 하복을 보고는 퍼뜩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무슨 일이오?”
하복은 아무 대답도 없이 송림당 안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워낙 작고 보잘것없는 약방이어서 오래 둘러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늙은 주인은 하복과 그의 뒤에 늘어선 장한들을 쳐다보더니 조심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찾고 있는 게 있소?”
하복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늙은 주인은 다시 물었다.
“혹시 그게 사람이오?”
하복이 다시 고개를 끄덕이자 늙은 주인은 한숨을 내쉬며 내실 쪽을 가리켰다.
“당신들이 찾는 사람은 안에 있을 거요.”
하복이 눈짓을 하자 수하 두 사람이 재빨리 내실로 들어갔다. 이내 그들 중 한 사람이 다시 나오더니 하복을 향해 빠르게 말했다.
“당주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말해라.”
장한은 다시 망설이더니 신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직접 보시는 게 더 빠를 것 같습니다.”
하복은 수하 서너 명을 남겨 늙은 주인을 지켜보게 하고 내실로 들어갔다.
어두운 내실은 한쪽에 작은 창문만 없었다면 창고라고 믿을 정도로 작고 협소했다. 내실의 한쪽에 한약 재료들이 쌓여 있는 걸 보면 실제로 창고 역할도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구석의 작은 침상에 한 사람이 누워 있었다. 그를 바라본 하복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무거운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당주…….”
누워 있는 사람은 분명 마림이었다. 마림은 그의 음성을 듣지 못했는지 멍하니 허공을 응시한 채 웃고 있었다. 입가로 흘러내리는 침이 가슴의 옷자락을 흠뻑 적시고 있음에도 마림은 여전히 미소를 그치지 않고 있었다.
마치 혼백이 빠져나간 듯 텅 빈 동공으로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웃고 있는 마림의 모습은 영락없는 백치(白痴)였다.
하복은 단숨에 그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다시 내실을 벗어났다.
늙은 주인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소안가라는 별호에 어울리지 않는 살벌한 것이었다.
“이 사람이 어떻게 여기에 있는지 말해줘야겠소.”
늙은 주인은 그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이 두려운지 시선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급히 말했다.
“얼마 전에 어떤 사람이 벌거벗은 그를 데리고 왔소. 옷을 입혀서 잠시 데리고 있으면 누군가가 찾으러 올 거라고 말하고는 훌쩍 떠나 버렸소.”
“그가 누구요?”
“평범하게 생긴 젊은이였소.”
“인상을 자세히 말해보시오.”
“눈빛이 너무 날카로워서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었소. 마치 지금 당신처럼 말이오.”
“아무 거라도 그에 대해 떠오르는 걸 말해주면 되오.”
“눈썹이 짙다는 것 외에는…….”
하복은 늙은 주인의 표정을 보고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때 수하 한 사람이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어서 가보셔야겠습니다. 급한 일이 생겼습니다.”
수하의 다급함이 가득 담긴 얼굴을 본 하복은 그에게 묻지도 않고 늙은 주인에게 은화가 든 주머니를 던지고는 몸을 돌렸다.
“당주를 잘 모셔라. 돌아간다.”
흑선방의 비밀 총타는 오늘따라 무거운 침묵이 깔려 있었다.
한 사람이 약간은 갈라진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벌써 피해를 입은 곳이 모두 다섯 군데입니다. 그중 세 곳은 아직까지 외부의 누구에게도 공개하지 않은 은밀한 곳이었습니다.”
장내에는 제법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모두들 말없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도박장인 만운도장(滿運賭場)과 기루인 천방루(千芳樓)는 본 방에서 운영하고 있다는 게 어느 정도 알려져 있으니 그렇다 쳐도, 서점인 일서각(一書閣)과 골동품점인 고보당(古寶堂), 그리고 잡화점인 천하동(天下同)은 본 방의 수뇌들 외에는 아직 아무도 우리와 연관되었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 말은 우리의 가장 큰 기밀 중 상당수가 누설되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말을 하는 사람은 흑선방의 정보를 총괄하고 있는 백이당(百耳堂)의 책임자인 고송(高宋)이었다.
누구도 그의 말에 대꾸하거나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지만, 고송은 재차 말을 이었다.
“본 방의 가장 큰 자금원 일곱 곳 중에서 다섯 곳이 무너지고 지금 남아 있는 곳은 단 두 곳뿐입니다. 저의 예측이지만, 그 두 곳도 지금쯤은 변을 당했으리라 생각합니다. 결국 우리가 서안에 들어와서 세운 모든 것이 일거에 사라진 것입니다.”
암담할 정도로 냉정한 분석을 내린 고송은 한쪽에 누워 있는 마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마림은 아직까지도 침을 질질 흘리며 동공이 풀린 얼굴로 멍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기밀의 누설처는 마 당주로 파악됩니다. 마 당주의 실종 이후에 일련의 일들이 벌어진 것으로 보아 그들이 마 당주의 입을 열게 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어떤 수법을 썼는지는 모르지만 말입니다.”
그때 처음으로 마림의 옆에 앉아 있던 반백의 노인이 입을 열었다.
“그들이 사용한 수법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짐작 가는 게 있네.”
그 노인은 약방과 의술을 담당하고 있는 약선당(藥鮮堂)의 책임자인 단종(端鐘)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단종에게 향했다.
“강호의 무공 중 사람의 뇌호혈을 자극하여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것이 있네. 미심공(迷心功)의 일종인데, 그중에서도 상승(上乘)의 무공들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머릿속에 있는 내용들을 발설하게 만드는 효능이 있다고 하네.”
고송이 물었다.
“화산파에도 그런 무공이 있소?”
“있지. 그것도 아주 뛰어난 놈으로.”
“그게 무엇이오?”
“명령수(冥靈手)라는 것일세. 이런 종류의 무공들 중에는 천하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탁월한 것일세.”
“마 당주가 저런 꼴이 된 이유는 뭐요?”
“이런 종류의 무공들은 그 위력이 뛰어날수록 후유증도 심하게 되네. 최고 수준의 명령수에 당하면 아무리 심지가 굳은 자라도 모든 비밀을 토설하게 되고, 그 후에는 저렇게 백치가 되어 버리지. 머리에 가해지는 압력을 뇌가 견딜 수 없으니 말일세.”
“무서운 무공이군.”
“악독한 무공이지.”
“그런 악독한 무공을 화산파에서 익히고 있단 말이오?”
“그들은 무림인이 아닌 줄 아나? 더한 것도 가지고 있을지 모르지.”
그런 화산파를 상대로 흑선방은 가지고 있는 모든 자금원을 잃어버렸다. 어떻게 복구할 수도, 되찾을 수도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파괴되어 버린 것이다.
이번에 화산파의 급습은 그들에 대한 방비를 늦추지 않고 있던 흑선방으로서도 속수무책이라고 할 만큼 비밀스럽고 빠르게 진행되었다. 흑선방에서 마림의 행방을 찾기 위해 이목을 집중하는 동안, 그들의 알토란같은 가게들이 모두 불이 나서 한 줌의 잿더미로 변해 버렸다. 가게를 운영하던 책임자들이 시신으로 발견되고, 모든 중요한 거래장부와 보관하고 있던 금은보화들이 화마(火魔)에 사라졌다.
그 불을 지른 재료는 다름 아닌 역청이었다. 그것만 보아도 이번 일의 배후가 어디이며 무엇 때문에 그런 일을 했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에 대한 복수가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철저하게 흑선방의 세력만을 노렸으며, 이번 일을 흑선방과 화산파 사이의 일로 국한시켜 버렸다. 종남파나 노해광이 끼어들 여지를 사전에 없애 버린 것이다.
하나 만약에 이번 일로 흑선방이 사라지게 된다면 그 후에 그들의 칼날이 어디로 향할지는 삼척동자라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노해광의 두뇌가 비상하고 종남파의 기세가 대단해도 눈과 귀가 모두 잘려나간 상태로 화산파와 싸워 이길 수는 없었다.
이곳에 모인 자들은 흑선방의 핵심적인 일을 맡고 있는 수뇌들이었다. 자신들의 핵심 수뇌 한 사람이 백치가 되고, 수없이 많은 피와 땀을 흘려가며 세운 토대들이 송두리째 무너졌음을 알게 된 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침울하기 그지없었다. 하나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울분을 토하거나 좌절에 빠진 표정을 짓는 자가 없었다.
이런 일로 굴복하기에는 그동안 흑선방이 걸어온 세월이 너무도 험하고 거친 피와 죽음을 동반한 시간들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약속이나 한 듯이 한 곳으로 향했다.
방주인 최동이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때, 지금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묵묵히 상황을 지켜보기만 하던 최동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그래서 더욱 섬뜩하게 들렸다.
“백도의 수법은 잘 봤다. 이제는 흑도의 수법을 보여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