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9권 절대암류(絶代暗流)편 : 2화
제 293장 철혈매화(鐵血梅花)
종남산의 여름은 우거진 신록과 함께 찾아온다. 푸르게 물든 수림은 청명한 하늘과 어우러져 한층 더 짙은 녹음을 형성하고 있었다.
쪼로롱!
때마침 울어대는 산새의 울음소리가 주위의 정적을 깨버렸다.
노해광은 처처히 늘어진 처마 사이로 보이는 푸른 하늘을 잠시 올려보고 있다가 산문 안으로 발을 들여 놓았다.
“오셨습니까?”
미리 연락을 받고 기다리고 있던 소지산이 정중하게 인사를 해왔다. 언제 보아도 믿음직한 그의 모습에 노해광은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바쁜데 뭐하러 일부러 나왔느냐?”
“조용한 본산에 바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저보다 사숙께서 배나 더 바쁘셨을 텐데요.”
소지산의 말투는 다소 느린 편이었으나, 그래서인지 노해광에게는 목소리마저 듬직하게 느껴졌다.
“네가 본산을 지켜주고 있으니 내가 마음 편하게 밖에서 활동할 수 있는 것이지. 아무튼 반갑구나. 사숙께서는 잘 계시느냐?”
“마침 제갈 노인에게 진료를 받고 계십니다.”
노해광이 흠칫 놀라 급히 물었다.
“무슨 일이냐? 사숙께서 편찮은 곳이라도 있으신 게냐?”
“그동안 열흘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진료를 받았는데, 제갈 노인 말씀으로는 아마도 이번이 마지막 진료일 거라고 하시더군요.”
“왜? 사숙께 무슨 문제라도?”
평소에는 냉정하고 담대해 보였던 노해광이 조바심을 내자 소지산의 무뚝뚝한 얼굴에 살짝 미소가 걸렸다.
“그게 아니라 사숙조께서 완전히 회복하셔서 더 이상의 진료는 필요 없다고 하시더군요. 오늘 마지막으로 최종 점검을 하고 앞으로는 사숙조께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그제야 노해광의 얼굴에 환한 빛이 떠올랐다.
전풍개는 초가보와의 싸움 당시 입은 부상이 완치되지 않아 상당히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제갈외조차 전풍개의 나이로 보아 그가 예전의 무공을 되찾는 것은 어려울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몇 달 만에 제갈외가 인정할 정도로 완전하게 회복했다니 어찌 놀랍지 않겠는가?
“오! 모처럼 듣게 되는 반가운 소식이구나. 어서 사숙께 가보도록 하자.”
노해광은 소지산의 대답도 듣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노해광과 소지산이 전풍개의 숙소로 갔을 때는 이미 진료가 끝났는지 전풍개는 제갈외와 함께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노해광은 급히 전풍개의 앞으로 가서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사숙, 그동안 별일 없으셨습니까?”
전풍개는 특유의 냉엄한 눈으로 노해광을 힐끔 쳐다보았다.
“본산에만 처박혀 있는 노부에게 무슨 일이 있겠느냐? 그보다 너는 요즘 재미가 좋은 모양이구나.”
그 음성에 은은한 노기가 실려 있음을 알아차린 노해광이 더욱 머리를 깊게 숙였다.
“자주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몇 가지 일로 분주해서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일을 한 것이냐?”
노해광은 전풍개의 반응이 너무 냉랭해서 절로 긴장하는 마음이 일었다.
“예? 무슨 말씀이신지…….”
“화산파의 집법을 죽인 건 네가 한 짓이지?”
의표를 찔린 노해광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전풍개는 성난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당당한 명문정파의 제자로서 술수를 부려 타파의 고수를 제거하다니……. 아직도 흑도 무리들과 어울려 다니던 습성을 버리지 못한 것이냐?”
“사숙.”
“사람의 목숨은 한 번 죽으면 다시 되돌릴 수 없다. 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무조건 살수를 펼쳐서야 강호의 흑도들과 다를 게 어디 있겠느냐?”
노해광은 굳이 그의 말에 변명을 하지 않고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사숙께 심려를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서안 일대에서 가장 큰 위세를 자랑하고 있는 최고의 실력가라고는 볼 수 없는 공손한 모습이었다. 전풍개는 한동안 못마땅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으나, 노해광이 허리를 숙인 채 일어서지 않고 있자 버럭 소리를 질렀다.
“허리를 펴라. 종남파 장문인의 사숙이란 자가 함부로 허리를 굽혀서야 되겠느냐?”
그제야 비로소 노해광은 몸을 똑바로 일으켜 세웠다.
“사숙께 사죄를 올리는 마당에 그보다 더한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말은 잘하는구나. 이제 말해 보아라. 대체 왜 그런 무도한 일을 저질렀느냐?”
“강호의 법칙에 따랐을 뿐입니다.”
의외로 담담한 노해광의 말에 전풍개의 눈꼬리가 사납게 꿈틀거렸다.
“강호의 법칙?”
“눈에는 눈, 이에는 이(以眼環眼 以牙環牙). 그들이 먼저 저를 도발해 왔으므로 저로서는 응대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네게 살수를 써왔단 말이냐?”
“그보다 더욱 나쁜 것이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그들은 저의 주거래 전장을 빼앗으려 했습니다. 제 목줄을 죄려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목줄 끝에는 본 파의 목도 함께 걸려 있었지요.”
노해광의 주거래 전장인 방보당은 종남파의 주거래 전장이기도 했다. 만약 방보당을 화산파에 빼앗겼다면 종남파 또한 위태로워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전풍개의 음성이 날카로워졌다.
“화산파에서 정말 그런 짓을 했단 말이냐?”
“그들은 그 일에 매화사절과 두 명의 장로까지 투입했습니다. 제 거래전장이 무사했던 것은 정말 운이 좋아서였습니다.”
“그 일을 주도한 자가 화산파의 집법이었던 모양이구나.”
“예. 그를 제거하지 않고서는 그들의 위협에서 온전히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다시 수작을 부려온다면 그때도 운이 좋을지는 장담할 수 없으니 말입니다.”
노해광을 바라보는 전풍개의 표정이 비로소 누그러졌다.
“용케도 일을 잘 수습했구나. 하지만 화산파에서 순순히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곡수는 비록 화산파의 집법이기는 하지만, 본 산의 제자는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곡수는 화산파 본산의 제자가 아니라 신풍수사 갈수독의 제자입니다.”
전풍개는 곡수에 대해 이름만 들었지 자세히 몰랐던 듯 눈을 살짝 치켜떴다.
“그런데 그런 자가 어떻게 화산파의 집법이란 자리에 오를 수 있었느냐?”
화산파 같은 명문정파에서 집법이란 중요한 자리에 외부인을 앉혔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신풍수사 갈수독은 화산파의 전대 장문인이었던 사마원과 절친한 사이였습니다. 곡수가 어렸을 때 갈수독이 죽자, 혼자가 된 곡수가 안쓰러워서 사마원이 화산파에 데려와 일을 시켰고, 그가 의외로 일을 잘하자 점점 중책을 맡겨서 나중에는 집법의 자리까지 오르게 된 것입니다.”
“흠. 화산파에서 그에 대한 신임이 대단했겠구나. 그렇다면 더욱 화산파에서도 어떤 식으로든 그자의 복수를 하려 할 텐데…….”
“저는 이번 일에 증거를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들로서는 곡수의 죽음에 대해 제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지언정 확신은 할 수 없을 것입니다.”
“……!”
“또한 곡수가 아무리 집법이라고 해도 본산의 제자가 아닌 이상 단순한 의심만으로 본 파를 적대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전풍개는 새삼스런 눈으로 노해광을 바라보았다.
“그런 것까지 예상하고 그런 일을 저지른 것이냐?”
“본 파에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여러 차례 숙고를 거듭했습니다. 곡수의 죽음은 화산파에게는 커다란 충격이겠지만, 그 일로 본 파와 정면충돌까지 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너에게는 얼마든지 위해를 가할 수 있겠지. 확증이 없어도 심증만으로 능히 그럴 수 있는 게 화산파다.”
“그 정도는 이미 각오하고 있는 일입니다.”
“너 혼자에게만 무거운 짐을 지울 수는 없다. 이미 화산파에서 이번 일에 장로들까지 내보냈다면 그들이 본 파와 정면으로 부딪히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그 점에 대해서는 노해광도 같은 생각이었다. 하나 이제 겨우 몸을 회복한 늙은 사숙에게 또 다른 걱정거리를 넘겨주고 싶지 않았기에 그는 짐짓 환하게 웃으며 자신 있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들이 어떤 식의 대응을 해오던 충분히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들도 본 파와 막다른 길까지 가는 것은 바라지 않을 테니 사숙께서 우려하시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전풍개는 묵묵히 그를 응시하고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알아듣기 힘든 나직한 음성으로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네 말대로 된다면 더 바랄 게 없겠지. 하지만 세상일이란 왕왕 뜻대로 되지 않는 법이니…….”
전풍개를 만나고 난 다음 노해광은 소지산과 자리를 마주했다.
“제갈 신의께 들으니 사숙께서 예전 실력을 완전히 되찾았다고 하더구나. 제갈 신의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라며 놀라워하시는 것 같았다.”
“사숙조께서 그동안 얼마나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셨는지 지켜보는 제가 다 조마조마할 정도였습니다. 이제는 여유를 가지셔도 될 텐데 전혀 그런 기미를 보이시지 않아 조금 걱정스럽습니다.”
“자신의 몸은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신 분이니 무리가 갈 정도의 수련은 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네가 잘 지켜보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노해광이 문득 눈을 빛내며 소지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얼마 전에 두기춘이란 자를 보게 되었다. 무척이나 재기발랄하고 뛰어난 인재 같더구나.”
두기춘의 말이 나오자 무표정했던 소지산의 얼굴에 표정 비슷한 것이 떠올랐다.
“듣기로는 그가 본 파의 제자였을 때 너와 가장 친했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이냐?”
소지산은 굳이 부인하지 않았다.
“예.”
“그에 대해 너에게 몇 가지 물어볼 게 있구나.”
“말씀하십시오.”
“그는 어떤 녀석이냐?”
소지산은 잠시 생각을 가다듬더니 특유의 느리고 완만한 어조로 말했다.
“성격을 물으시는 거라면 꼼꼼하고 치밀한 편입니다. 속마음을 남에게 잘 이야기하지 않고 힘든 일도 내색을 하지 않아서 가끔 쓸데없는 오해를 사기도 하지요.”
“소심한 구석이 있다는 말이로구나.”
“저는 소심하기보다는 생각이 깊어서 그렇다고 봅니다. 한 가지 일을 해도 몇 번이나 앞뒤로 검토를 하기 때문에 실수를 거의 하지 않는 편입니다. 몇몇 사람들은 그 점을 탓하기도 했지만, 그건 그만의 특성이어서 쉽게 변하지 않을 겁니다.”
“가족 상황은?”
“홀어머니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본 파로 들어왔습니다.”
“흠.”
노해광은 그에게 몇 가지 더 묻고는 이내 깊은 생각에 잠겼다.
소지산은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에 대해서는 왜 알고 싶으신 겁니까?”
“곡수가 죽은 후 누가 화산파의 머리 역할을 할까 고민해 보았다.”
“기춘이 그 역할을 맡게 되리라고 보십니까?”
“본 파 출신이라는 낙인이 있으니 공개적으로는 그렇게 될 수가 없겠지. 아직 나이도 어린 편이고. 하지만 누가 그 역할을 맡든 두기춘을 가까이에 두고 중용(重用)할 가능성이 많다는 게 내 생각이다.”
소지산은 살짝 눈을 크게 떴는데, 그것은 그가 무척이나 놀랐을 때 나타나는 모습이었다.
“기춘의 위치가 벌써 그렇게 되었습니까?”
“나라도 옆에 두고 싶을 정도였으니 눈이 있는 자라면 그냥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수뇌부에 드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왜 그렇습니까?”
“한 번 배신한 자는 언제 다시 배신할지 모르기 때문이지. 너 같으면 어려울 때 함께했던 동료의 등에 칼을 꽂고 돌아온 자에게 문파의 사활을 맡길 수 있겠느냐?”
소지산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노해광은 눈살을 찡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말도 없이 본 파를 떠난 것도 문제지만 장문인에게 돌아가야 할 영약까지 빼돌린 것은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중죄다. 본 파의 법도를 위해서도 그를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다.”
“…….”
“화산파에서도 이용할 수 있는 대로 이용하고는 효용가치가 떨어졌다 싶으면 두 번 다시 기회를 주지 않을 것이니, 그의 말로는 누구보다 비참할 것이다.”
소지산은 아무 말이 없었으나, 그의 표정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별로 말이 없고 특별히 친하게 지내는 자가 없었던 소지산에게 두기춘은 그나마 유일하게 말을 나눌 수 있는 상대였다. 두기춘 또한 약삭빠르다거나 소심하다는 남들의 평가 때문에 쉽게 마음을 여는 사람이 없다가 소지산과 어울린 다음에야 비로소 허심탄회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생기게 되었다.
두 사람의 성격상 특별히 둘만 친하게 지내거나 함께 어울려 다닌 적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다른 사형제들에 비하면 속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존재들이었다.
그래서 두기춘이 만년삼정을 훔쳐서 달아났을 때 누구보다 놀란 사람도 소지산이었고, 두기춘이 화산파의 제자들과 함께 쳐들어와서 매상을 때려눕혔을 때 가장 분노한 사람도 소지산이었다.
그런데 이제 노해광의 입으로 두기춘의 미래에 대한 불길한 예상을 듣게 되자 소지산은 가슴이 답답해지고 전신에서 맥이 탁 풀리는 것 같은 허탈함을 느꼈다.
“생각할수록 정말 한심한 놈이다. 그놈은 자신이 만년삼정을 먹어 고수가 되면 강호에서 마음껏 행세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겠지만, 본거지를 등진 승냥이는 사냥꾼에게 가죽이 벗겨지거나 남들의 구경거리가 될 뿐이다.”
노해광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소지산이 돌연 무뚝뚝한 음성으로 말했다.
“두기춘은 효자(孝子)였습니다.”
노해광의 시선이 소지산에게로 향했다.
소지산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침침했고, 음성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병든 자신의 어머니가 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자 한겨울에 삼 일 동안이나 야산을 돌아다니며 고기를 구해온 놈입니다. 그 때문에 그 녀석은 왼쪽 발가락 두 개를 동상(凍傷)으로 잃었지요. 사숙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효자 중에 정말 못된 놈은 없다는 걸.”
“…….”
“없어진 발가락 때문에 두기춘은 상승 무공을 익히는 데 치명적인 제약이 있지요. 그가 만년삼정을 탐했던 것도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자신이 고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노해광은 한동안 무거운 눈으로 소지산을 응시하고 있다가 한결 차분해진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네 말대로 효자 중에 나쁜 놈은 없지. 나는 그렇게 발가락을 잃어서라도 모시고 싶은 부모가 없었다는 게 늘 아쉬웠었다.”
“부모님이 계셨다면 사숙께서도 누구 못지않은 효자이셨을 겁니다.”
“그래도 그를 용서할 수는 없다.”
“저도 그를 용서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가 사숙께서 생각하신 것만큼 못돼먹은 놈은 아니라는 걸 말씀드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이래서 강호의 일이 어렵지. 사람마다 사정이 있는 법이고, 그 사정을 봐주다 보면 무슨 일이든 마음먹은 대로 할 수가 없게 된다. 그럴 때 내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아느냐?”
소지산은 그에게 묻는 시선을 보냈다.
노해광은 그를 마주보며 웃었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진중하고 무거움이 느껴지는 미소였다.
“각자의 사정은 가슴 깊숙한 곳에 담아두고, 오직 머리로만 생각하고 판단한다. 그래서 분명히 말하는데, 내가 본 그의 미래는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 점에 대해서는 소지산도 더 이상 무어라고 할 말이 없었다.
노해광은 지그시 그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품에 손을 넣어 한 가지 물건을 꺼내들었다.
“어두운 이야기는 그만 하자. 오늘 너를 보려고 한 건 너에게 한 가지 전해줄 물건이 있기 때문이다.”
그의 품속에서 나온 물건은 작은 옥함이었다. 노해광은 신중한 손길로 그 옥함의 뚜껑을 열었다.
“이건 내가 칠팔 년 전에 우연히 기련산(祁連山)을 지날 때 구한 것으로, 천지유불란이라 한다.”
☆ ☆ ☆
두기춘은 요새 천국과 지옥을 번갈아 오가는 심정이었다.
오후의 햇살이 따사롭게 내리쬘 때, 두기춘은 천국을 걷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나삼을 곱게 차려 입은 여인이 다소곳한 걸음으로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이십 대 중반쯤 되는 여인은 비록 절세의 미녀는 아니었으나, 이목구비가 단정하고 피부가 고와서 누구나가 호감을 느낄 만한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특히 유난히 반짝이는 두 눈에서 흘러나오는 영롱한 눈빛은 어떠한 남자라도 혹할 만큼 매력적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양소선. 서안 최고의 기루인 화월루의 재정을 담당하고 있으며, 올해 나이는 불과 스물네 살이었다.
두기춘이 양소선과 정식으로 사귀기 시작한 것은 불과 며칠 전이었다. 그동안 그는 그녀와 세 번의 만남을 가졌으며, 그때마다 그녀의 지적인 모습과 여인다운 섬세한 마음씨에 점차 매료되어 갔다.
그녀 또한 다정하면서도 예의를 잃지 않는 그의 행동거지와 꾸밈없는 미소, 그리고 수려한 얼굴과 기품 있는 태도를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두 사람은 특별한 일이 없는 날이면 점심을 같이 하기로 약조했고, 오늘도 어김없이 식사를 하기 위해 주루로 향하고 있었다. 화월루에는 물론 기루뿐 아니라 주루도 있기는 했으나, 그곳에서 개인적인 만남을 가질 수는 없기에 두 사람은 화월루에서 조금 떨어진 영화루(榮華樓)라는 작고 아담한 주루를 자주 이용하고는 했다.
그곳은 번화가의 뒤쪽에 있어서 주위가 조용할 뿐 아니라 음식이 담백하고 정갈해서 연인들이 즐겨 찾는 곳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층에서 바라보는 경치도 제법 뛰어나서 두 사람 모두 마음에 들어 했다.
오늘은 다행히 이층의 창가에 자리 하나가 남아 있어서 두 사람은 기꺼운 마음으로 그곳으로 향했다. 이층에서 바라보는 하늘은 유난히 창연했고, 공기는 따뜻했으며, 분위기는 더할 수 없이 흥겨웠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본 채 조용히 웃었다. 특별한 말을 하지 않고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즐거워지며 절로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던 것이다.
하나 그들이 채 식사를 주문하기도 전에 누군가가 그들을 불렀다. 그리고 두기춘은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듯한 기분을 맛보아야만 했다.
“역시 이곳에 있었군.”
불쑥 나타난 사람은 백의를 입은 차가운 인상의 사내였다. 그는 다름 아닌 화산파의 일대제자인 동개였다. 동개는 냉랭한 눈으로 두기춘과 양소선을 쳐다보더니 이내 싸늘한 음성을 내뱉었다.
“호출이 떨어졌다. 나와 함께 가야겠다.”
두기춘의 표정이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살짝 굳어졌다. 어느새 세 명의 화산파 제자가 나타나 자신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마치 그가 도망가지 못하게 포위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곡수가 갑작스럽게 살해된 후 화산파 내에서 두기춘의 위치는 아주 애매해졌다. 곡수가 그를 중용하는 것을 내심 못마땅해했던 화산파의 제자들은 곡수의 죽음이 마치 그의 잘못이라도 되는 양 그를 추궁했으며, 알게 모르게 그를 따돌리고 있었다.
양소선을 만날 때마다 입가에 미소를 잃지 않던 두기춘이었으나, 숙소로 돌아가서는 그야말로 가시방석에 앉은 것 같은 위태롭고 불편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두기춘은 언제고 자신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가 거두어질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으나, 지금 상황을 보니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이 압송되는 듯한 분위기였다.
양소선 또한 무언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꼈는지 불안한 눈으로 두기춘을 바라보았다.
“가가, 이분들은…….”
두기춘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밝게 웃어 보였다.
“선매, 이분은 본 파의 사형이시오. 본 파의 어른께서 급히 나를 찾으시는 모양이오.”
그제야 양소선은 안심한 듯 표정이 풀어지며 그를 따라 살짝 웃었다.
“그러면 어서 가보셔야지요.”
“미안하오, 선매. 아무래도 오늘의 약속은 지키지 못할 것 같소. 대신 다음에는 오늘 못한 것까지 배로 보답하리다.”
“기대하고 있겠어요.”
양소선이 어서 가라는 듯 그를 떠밀다시피 해서 두기춘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동개를 따라 영화루를 나오고 말았다.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는 양소선의 얼굴에는 조금 전에 떠올랐던 미소가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다.
이층의 창문에서 내려 보는 그녀의 눈에는 동개와 두기춘의 주위를 에워싸듯 걷고 있는 세 명의 화산파 제자들의 모습이 일목요연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가가의 신상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 같구나.”
두기춘의 앞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으나, 그녀는 왠지 모를 불안함에 걱정스런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동개는 말없이 자신의 옆을 따라오고 있는 두기춘을 힐끔 노려보았다.
“집법께서 그렇게 비명에 가신 후 모두들 비분강개하고 있는데, 너는 팔자 좋게 여인과 사랑 놀음을 하고 있구나.”
두기춘은 무어라 할 말이 없어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동개는 그 모습이 더욱 얄미운지 얼음장을 씌운 것처럼 얼굴에 냉랭한 빛을 가득 떠올렸다.
“너에 대해 여러 가지 좋지 않은 말들이 오가는 것을 너도 알고 있을 것이다. 모든 일은 잠시 후에 명명백백하게 가려질 테니 혹시라도 엉뚱한 마음을 먹고 있다면 각오하도록 해라.”
두기춘은 문득 궁금한 생각이 들어 불쑥 물었다.
“저를 호출한 분이 누구십니까?”
“잠시 후면 알게 될 거다. 너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분이니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는 게 좋을 거다.”
동개의 자신에 찬 말에 두기춘은 오히려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화산에서 누가 내려왔든 자신의 처지가 별로 변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에 반쯤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된 것이다.
동개가 두기춘을 데려간 곳은 희빈루의 내실이었다. 동개와 두기춘을 호위하듯 따라왔던 세 명의 이대제자들은 물러가고 동개는 두기춘만을 데리고 내실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여러 명의 일대제자들이 질서정연하게 앉아서 두기춘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가장 앞에는 두기춘이 처음 보는 중년의 백의인이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백의 중년인을 본 순간 두기춘은 무언지 모를 섬뜩함을 느끼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백의 중년인의 이목구비는 상당히 뛰어난 편이었으나, 그에 대한 첫인상은 준수하다기보다는 강철로 만든 인간을 보는 듯 냉정하고 차갑다는 것이었다. 특히 무심하게 가라앉아 있는 두 눈은 마치 예리한 두 개의 칼날과도 같아서 마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떨릴 지경이었다.
백의 중년인은 그런 서늘한 시선으로 두기춘의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유난히 얇은 입술을 살짝 열었다. 그리고 눈빛만큼이나 무심하고 싸늘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네가 두기춘이냐?”
두기춘은 그가 화산파의 본산에서 내려온 곡수의 후임자임을 알아차리고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제가 두기춘입니다. 제가 아직 본 파의 사정에 어두워 존장의 함자를 모르고 있습니다.”
“나를 모르는 자들은 너 하나뿐이 아니니 신경 쓸 것 없다. 너에 대한 곡 집법의 신임이 두터워서 언제나 너를 곁에 두고 있었다고 하더구나.”
“그분께 과도한 은혜를 받았사오나 그분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죄인일 뿐입니다.”
“그거야 차차 알아보면 될 일이지. 곡 집법이 변을 당했을 때 너도 그 자리에 있었다고 들었다.”
“예.”
“당시의 상황을 당사자의 입으로 듣고 싶다. 자세히 말해 보거라.”
두기춘은 자신이 알고 있는 한 최대한 상세하게 당시의 일을 말해 주었다. 곡수가 노해광의 반격을 염려해 하루 종일 노해광을 감시한 일부터 천개방의 갑작스런 보고로 황급히 유화상단으로 달려간 일, 그리고 후원으로 가기 위해 유화상단의 뒤편에 있는 골목길을 달려가다 갑자기 양쪽의 벽이 무너지는 바람에 곡수와 천개방의 종적을 잠깐 놓쳤고, 먼지가 가라앉은 다음에 가보았을 때는 이미 곡수가 싸늘한 시신이 되어 있었고 천개방은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는 일까지 자신이 듣고 본 것을 그대로 이야기했다.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철저히 배제한 채 사실적인 부분만을 진술하는 그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백의 중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곡 집법이 너를 가까이 둔 이유를 알겠다. 두뇌가 명석하고 말에 논리가 정연하니, 수십 개의 보고서를 읽는 것보다 너 한 사람에게 듣는 것이 당시의 상황을 더 쉽게 이해하게 하는구나.”
“제가 현장에 있어서 남들보다 좀 더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었기에 그리된 것뿐입니다.”
“나는 불필요한 공치사는 하지 않는다. 그러니 너도 나와 말을 할 때는 쓸데없는 사례 따위는 하지 마라.”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백의 중년인의 냉정한 말에 두기춘은 순순히 머리를 조아렸다.
“명심하겠습니다.”
상대에 따라 대응 방법을 달리 하는 것도 두기춘이 가진 장점 중 하나였다. 백의 중년인도 그것을 알아차렸는지 눈빛이 잠깐 번뜩이더니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곡 집법을 유인한 천개방이 가짜임은 이내 밝혀졌다. 진짜 천개방은 그때 주방에서 차려준 음식을 잘못 먹고 배탈이 나서 유화상단의 후원에 있는 객방에 누워서 꼼짝도 못하고 있었지. 참으로 공교로운 일 아니냐?”
여러 가지 의미를 담은 듯한 그의 말에 두기춘은 아무런 대꾸 없이 머리만 조아렸다.
“곡 집법을 살해한 흉수는 단 한 번의 공격으로 그의 가슴에 선명한 구멍을 뚫어 놓았다. 흉기는 창(槍) 종류로 보이는데, 너도 알다시피 종남파에는 창을 쓰는 자가 없다.”
백의 중년인은 두기춘의 대답을 기대하지도 않은 듯 계속 혼잣말처럼 말을 이었다.
“곡 집법을 살해한 흉수가 누구건 그 배후에 대해서는 모두들 의심 가는 인물이 있을 것이다. 하나 강호에는 심증(心證)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종류의 일들이 있다. 거대한 세력을 배후에 두거나 뛰어난 실력을 지닌 자들을 상대하는 일들이 그것이지. 그런데 이번 일은 그 두 가지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 그러니 우리는 반드시 확실한 물증(物證)을 잡아야만 한다.”
그의 음성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실내의 구석구석까지 아주 생생하게 들렸다. 그래서인지 적지 않은 사람들이 들어와 있는 내실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고, 나직하면서도 서늘한 그의 음성만이 잔잔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곡 집법을 살해한 자들은 아주 치밀한 계획 하에 움직인 것이 분명하다. 본 파에서는 며칠 동안 장안 일대를 이 잡듯이 뒤졌으나 어떠한 직접적인 증거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생각의 방향을 조금 바꾸기로 했지.”
백의 중년인은 자신의 앞에 있는 탁자 위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본 파가 주력해서 쫓고 있던 자들은 곡 집법을 살해한 흉수와 유화상단에 불을 저지른 마부, 그리고 본 파 제자로 변장한 가짜 천개방이다. 하나 그들에게 추적이 집중된다는 것을 흉수의 배후에 있는 자가 모를 리 없다. 그러니 그에 대한 대비는 철저히 해두었을 것이다. 하지만 물건은 어떨까?”
두기춘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백의 중년인의 입에 고정되었다.
“예를 들어보면 진패라는 술도가의 마부는 완전히 종적을 감추었지만, 그가 유화상단에 불을 지를 때 사용했던 물건은 지금도 남아 있다. 그건 역청이란 것인데, 그 때문에 불길이 잘 잡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불길에 비해 연기와 열이 많이 나서 주방의 창고 몇 개가 탄 것을 사람들이 큰 화재로 잘못 인식하게 된 것이다.”
“역청?”
처음 듣는 이름에 사람들이 어리둥절했으나 백의 중년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주로 바다를 항해하는 배의 밑창에 바르는 것이라 해안가에서도 배를 만드는 곳이 아니면 본 사람이 없고, 하물며 무림인 대부분은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튼 진패는 역청을 이용해 불을 질렀는데, 그 역청은 장안 일대에서는 구할 수 있는 곳이 없다. 단 한 곳을 제외하고는 말이지.”
이제는 모두 홀린 사람처럼 백의 중년인의 말에 모든 신경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기름을 취급하는 선유당(鮮油堂)에서 가끔 역청을 취급할 때가 있다. 어떤 물건에 방수를 하거나 질 좋은 관(棺)을 만들 때 벌레의 침입을 막기 위해 주로 구입한다고 하더군. 그래서 나는 사람 하나를 선유당에 보냈다. 장표(張表)!”
백의 중년인이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자 뒤에 있던 일대제자 중 한 사람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부르셨습니까?”
“네가 조사한 것을 말해 보거라.”
장표는 눈썹이 유달리 짙고 인상이 날카로운 청년이었다. 그는 즉시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는 낭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선유당의 주인은 자신들이 얼마 전에 상당한 양의 역청을 팔았다는 것을 시인했습니다. 그 역청을 사간 자들은 모두 세 사람인데, 한 사람은 말의 안장에 칠하기 위해, 또 한 사람은 수조(水槽)를 만들기 위해, 마지막 사람은 특제 관을 만들기 위해 구입했다고 합니다.”
“그들이 실제로 그것을 사용했는지를 확인해 보았느냐?”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느냐?”
“그들이 모두 무림문파에 속해 있는 인물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확인을 위해서는 그들 문파의 협조를 구해야 하는데, 그것은 제 능력 밖의 일이었습니다.”
“어느 문파의 사람들이냐?”
“말의 안장에 칠하기 위해 사갔다는 자는 철기보의 총관이었고, 수조를 만들기 위해 구입했다는 자는 쌍하보의 주방장이었습니다. 그리고 관을 만들려는 자는 만혼당의 수석인부였습니다.”
그제야 사람들은 백의 중년인이 굳이 역청에 대한 말을 꺼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철기보와 쌍하보, 만혼당은 모두 곡수가 살해당한 날에 노해광이 주최한 모임에 참석한 문파들이었던 것이다.
“수고했다. 들어가 보아라.”
“예.”
장표가 자리로 돌아가자 백의 중년인은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그 세 문파에 은밀히 사람을 풀어 실제로 그들이 역청을 사용했는지를 조사했다. 도일상(屠一象).”
백의 중년인은 다시 일대제자 한 사람을 불렀다. 이번에 나온 사람은 평범한 용모에 눈빛이 탁하고 체구가 작은 인물이었다.
“저는 먼저 철기보에서 마구(馬具)를 만드는 가죽공방을 찾아갔습니다. 그곳의 담당자는 지난 한 달간 철기보에서 어떠한 마구도 주문한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쌍하보의 주방에서 일하는 요리사에게 물어도 쌍하보의 주방에서는 최근에 수조를 만들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만혼당은…….”
도일상은 잠깐 말문을 멈추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달에 모두 열다섯 개의 관을 만들었지만, 그 관들 중 역청을 사용하는 특수한 관은 없었다고 합니다. 이 역시 만혼당의 제자에게 직접 확인한 사실입니다.”
백의 중년인은 잘 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두기춘에게 시선을 돌렸다.
“너는 그들이 구입한 역청을 어떻게 했다고 생각하느냐?”
두기춘은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자가 감히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네 의견을 말하면 된다.”
“제자는 그들이 역청을 다른 곳으로 넘겼을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그 다른 곳이란?”
두기춘은 다시 한 차례 주저했다.
백의 중년인은 투명한 칼날 같은 눈으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자를 싫어한다. 역청이 어디로 갔을 것 같으냐?”
두기춘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철면호에게 전해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철면호는 그것을 진패에게 주었겠지.”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진패는 그것을 이용해 유화상단에 불을 질렀고…….”
“그 혼란의 와중에 집법께서 암수에 당하신 것입니다.”
백의 중년인은 한동안 두기춘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이윽고 빙긋 웃었다.
“네 말은 그럴듯하다. 하나 이것도 모두 추측에 불과할 뿐, 직접적인 물증은 되지 못한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나는 보다 확실한 물증을 잡기 위해 다시 사람들을 풀었다.”
그가 슬쩍 고갯짓을 하자 내실 한쪽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제야 비로소 두기춘은 다른 방에 몇 명의 인물들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모두 세 명이었는데, 하나같이 적지 않은 고초를 겪은 듯 낭패스런 몰골이었다.
“저자들이 바로 선유당에서 역청을 구입한 철기보와 쌍하보, 만혼당의 인물들이다. 나는 그들의 입에서 직접 역청이 철면호에게 흘러간 경위를 들을 수 있었지.”
백의 중년인은 그들 중 가장 좌측의 인물에게 물었다.
“너는 역청을 누구에게 주었느냐?”
그 사람은 백의 중년인의 얼굴도 제대로 마주보지 못하고 머리를 숙였다.
“흐, 흑선방의 마림이란 자입니다.”
“너는?”
백의 중년인의 시선이 그 옆의 인물에게 향하자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저도 마림이란 자에게 역청을 건네주었습니다.”
백의 중년인이 마지막 인물을 쳐다보자 묻지도 않았는데 대답부터 들려왔다.
“저도 역시 마림에게 주었습니다.”
“그렇군. 마림이란 자는 누구지?”
그 대답은 두기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흑선방주 최동의 수하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최동에게 직접 역청의 행방을 물어보면 되겠군?”
“그건…….”
두기춘은 차마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했다.
최동을 건드리는 것은 곧 노해광과 정면으로 부딪치겠다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백의 중년인은 다시 웃었다. 얼음장처럼 차갑고 냉정한 미소였으나 웃음은 웃음이었다.
“종남파와의 격돌도 두려워하지 않는 마당에 흑선방을 상대하는 데 꺼려할 필요가 있겠느냐?”
“그 말씀은?”
“심증이니 물증이니 하는 것은 모두 약자의 변명일 뿐이다. 진정한 강자라면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그대로 수행하면 되는 것이다.”
두기춘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음을 느끼고 절로 표정이 굳어졌다.
백의 중년인은 그런 그를 보고 웃더니 이내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종남파와의 질긴 악연도 끊을 때가 되었다. 이십 년 전에 내가 말한 대로 했더라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제 잘못된 것을 알았으니 늦었더라도 제대로 된 해결책을 찾아야하지 않겠느냐?”
그 말을 듣자 비로소 두기춘은 백의 중년인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이십여 년 전, 기산취악이 일어난 후에 이 기회에 종남파를 멸문시켜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다 당시 장문인이었던 사마원에 의해 무기한 폐관을 명받았던 화산파의 일대괴인이 떠올랐던 것이다.
무공에 관한 한 최고의 자질을 가졌으면서도 누구보다 차가운 심성에 손속이 악랄해서 화산파 내에서조차 경원받아야만 했던 일대기재!
당금의 화산파 장문인인 용진산이 가장 두려워하면서도 은연중에 가장 믿고 의지하는 인물!
한때는 ‘철혈(鐵血)의 매화(梅花)’라고 불렸던 철심혈수(鐵心血手) 검단현(劍斷絃)이 드디어 강호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