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9권 절대암류(絶代暗流)편 : 3화
제 294장 무음무적(無音無跡)
손풍은 요새 무공을 익히는 재미에 흠뻑 빠져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장괘장권구식을 처음 익힐 때만 해도 지겹기만 하고 영 흥미를 못 느꼈었는데, 막상 초식의 형을 모두 배우게 되자 그 초식들을 사용하는 방식에서 묘한 재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똑같은 초식이라도 언제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판이한 위력을 나타내게 된다. 그가 그것을 절실히 깨달은 것은 한수의 배 위에서 자신이 악전고투하던 장강십팔채의 고수를 낙일방이 같은 장괘장권구식만을 사용해 간단히 무찔러 버렸을 때였다.
그때 손풍은 지금껏 느껴보지 못했던 통쾌함과 어떤 짜릿한 감흥을 맛볼 수 있었다.
종남파에서도 가장 기초적인 입문무공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장괘장권구식에 그와 같은 오묘한 위력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 했던 손풍이었다. 일단 그 맛을 알게 되자 손풍은 미친 사람처럼 장괘장권구식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래서 아침에 눈을 뜰 때부터 밤에 잠이 들 때까지 그는 남들의 눈을 피해 구슬땀을 흘리며 장괘장권구식을 연마했다. 익히면 익힐수록 장괘장권구식의 묘용을 하나둘씩 알게 되는 재미에 힘든 줄도 몰랐다.
오늘도 손풍은 아침 식사를 마친 후부터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질 때까지 후원의 한쪽에서 열심히 장괘장권구식을 수련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그 좋아하는 점심도 거의 건너뛰다시피 해서 동중산마저 놀랄 정도였다.
며칠 전에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두들겨 맞은 사람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열정적인 모습이었다. 신기하게도 그토록 퉁퉁 부어올랐던 얼굴은 하루 만에 부기가 싹 빠졌고, 금이 갔던 갈비뼈도 아물어져서 이틀도 되지 않아 평상시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나아 버렸다. 십이경맥이 타통되어 체내에 있는 엄청난 양의 진기가 몸속을 마구 치달려준 덕분이었으나, 손풍은 그저 그러려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지금 그가 집중적으로 연습하고 있는 초식은 단봉조양으로, 낙일방이 장강십팔채의 수적을 해치울 때 마지막으로 사용한 수법이었다. 그때 낙일방의 모습이 어찌나 멋져 보였던지 손풍은 오랫동안 그 순간을 잊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렇게 했었지, 아마?”
손풍은 왼발을 반 보쯤 앞으로 이동하며 오른손을 옆으로 살짝 꺾어서 허공의 한 점을 후려쳤다. 하나 이내 마음에 들지 않는지 고개를 저으며 다시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아니야. 이거보다 훨씬 더 매끄럽고 날카로웠던 것 같은데……. 분명히 알고 있는 동작인데, 왜 그때 낙 사숙 같은 멋있는 자세가 안 나오는 거지?”
손풍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자신의 오른팔을 바라보고 있을 때,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만하면 괜찮은 자세다.”
손풍이 돌아보니 뜻밖에도 진산월이 뒷짐을 진 채 자신을 바라보고 서 있는 게 아닌가? 손풍은 황급히 그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나오셨습니까, 장문인.”
“그래. 요즘 들어 수련에 열중하고 있다더니 이제는 제법 자세가 갖춰지기 시작하는구나.”
손풍은 정말 모처럼 진산월에게 칭찬을 받자 마음 한편으로는 기쁘면서도 쑥스러운 생각에 머리를 긁적거렸다.
“아직 멀었습니다. 그런데 제 자세가 괜찮은 겁니까?”
“배운 기간을 생각해 보면 나쁘지 않다.”
“그런데 일전에 봤던 낙 사숙의 모습과는 왠지 많이 다른 것 같아서…….”
“언제 말이냐?”
손풍은 무심결에 아무 생각 없이 대답했다.
“일전에 한수의 나룻배에서 장강십팔채의 수적과 싸울 때 낙 사숙께서 도와주셨는데, 그때 그분이 장괘장권구식으로 수적을 물리친 모습이 너무 인상적이었습니다. 저도 흉내라도 내보려고 며칠째 연습했지만 그때 낙 사숙께서 보여주신 모습이 영 나오지 않는 것 같아 고민 중입니다.”
진산월의 눈에 엄격한 빛이 떠올랐다.
“나와 한 약조를 어기고 수적들과 싸웠단 말이냐? 그래서 일방이 너를 도와준 것이고?”
그제야 ‘면벽 일 년’의 약속이 생각난 손풍이 안색이 노랗게 변했다.
“아니 그게…… 제가 장괘장권구식을 모두 익힌 다음이라 동 사형께서도 승낙을 하셨고…… 그래서 만만해 보이는 놈을 골라 덤볐는데 이상하게도 그놈이 생긴 것과 다르게 상당한 고수여서…….”
손풍이 어쩔 줄을 몰라 횡설수설하자 진산월이 의외인 듯 반문했다.
“장괘장권구식을 모두 익혔단 말이지?”
“예. 자세만 겨우…….”
“어디 한번 펼쳐 보거라.”
진산월의 말에 손풍은 움찔하다가 이내 마음을 다부지게 먹고 장괘장권구식의 기수식을 취했다.
“그럼 부족한 모습이지만 장문인께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진산월이 고개를 끄덕이자 한 차례 심호흡을 한 손풍은 이내 장괘장권구식의 첫 초식인 금강서벽부터 펼치기 시작했다. 평소와는 달리 진지한 표정으로 한 초식 한 초식을 시전하는 손풍의 모습에 얼핏 진산월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그려졌다. 태어나면서부터 줄곧 무공과는 아예 담을 쌓고 살았던 손풍이었는데, 이제는 제법 얼치기 무인(武人) 같은 냄새가 나는 것이다.
손풍은 금강서벽에 이어 낙성연적과 삼환투일, 영양괘각의 초식들을 하나씩 신중하게 펼쳤다. 조용한 후원의 한편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장괘장권구식을 시전하는 손풍과 뒷짐을 진 채 묵묵히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진산월의 모습은 몹시 대조적이었으나, 한편으로는 무척이나 어울리는 광경이기도 했다.
손풍은 정말 열심히 초식 하나하나를 정성을 다해 펼쳤다. 처음에는 장문인 앞이라서 긴장도 되었으나, 일단 시작한 뒤에는 초식을 운용하는 재미에 빠져 옆에 사람이 있는 것도 모를 정도였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은 마지막 초식인 단봉조양까지 모두 시전을 끝낸 상태였다.
엉거주춤하게 손을 거두어들인 손풍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떻습니까?”
진산월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하면 적어도 형(形)만큼은 그럭저럭 익힌 것 같구나.”
손풍의 입이 헤벌쭉하게 벌어졌다. 하나 그는 이내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왜 낙 사숙이 펼쳤던 자세가 안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직은 시기상조다.”
“예?”
“지금 네 실력으로 일방이 펼치는 모습을 흉내라도 내는 건 불가능하다.”
손풍의 얼굴이 실망감으로 물들었다.
“역시 그렇겠죠? 저 같은 놈은 낙 사숙의 발끝에도 따라갈 수 없으니.”
진산월은 시무룩해진 손풍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다가 조용한 음성을 내뱉었다.
“서예를 배운 적이 있느냐?”
뜻밖의 물음에 손풍은 약간 어리둥절해졌으나 이내 대답했다.
“예. 어렸을 적에 아버님의 강요로 몇 년 배운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해하기 쉽겠구나. 서예로 말하면 너는 이제 겨우 막 천자문을 배운 상태다. 그런 너의 글씨가 오랫동안 서예를 익힌 대가(大家)의 글씨와 같을 수 있겠느냐?”
“그건…….”
“똑같은 글씨를 써도 이제 겨우 서예에 발을 들여놓은 자와 오랫동안 글을 써온 대가의 글씨가 같을 리 없다. 무공도 마찬가지다. 같은 초식을 익혔어도 오랫동안 수련을 해온 고수와 이제 겨우 입문한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은 풋내기의 동작이 같을 수는 없지.”
“……!”
“일방은 장괘장권구식을 십 년 가까이 익혀왔다. 네가 펼쳤던 단봉조양만 해도 그는 수천, 수만 번을 연습했을 것이다. 그런데 네가 이제 겨우 한 달 배운 것으로 그와 비슷한 자세를 펼칠 수 있다면 일방이 지내온 세월이 너무 억울하지 않겠느냐?”
손풍은 멍하니 그의 말을 듣고 있다가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제가 생각이 모자랐습니다.”
“네게 부족한 건 오직 시간뿐이다. 계속 지금처럼 정진한다면 어느 순간에 일방 못지않은 자세로 장괘장권구식을 펼치는 네 자신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장문인.”
“그래.”
진산월은 허리를 숙인 손풍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그러자 손풍은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장문인의 손이 닿은 어깨 부분에서 따뜻한 열기가 전해져 온몸으로 퍼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용기백배한 손풍은 고개를 번쩍 쳐들고 진산월을 올려보았다.
“후원으로 저를 찾아오신 걸 보니 제게 시키실 일이 있으신 것 같군요. 무엇이든 말씀만 하십시오. 기꺼이 분부를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갑자기 열정적으로 변한 손풍의 모습이 우스웠는지 진산월의 왼쪽 뺨에 있는 칼자국이 미묘하게 꿈틀거렸다. 알아차리기 힘들 만큼 미약한 웃음이었으나, 손풍은 그 웃음을 보자 마음이 즐거워졌다.
“손풍.”
“예, 장문인!”
“잠시 후에 이곳에서 만날 사람이 있다. 그들 외에는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해라.”
“알겠습니다.”
손풍은 신이 나서 대답한 후 절도 있는 동작으로 몸을 돌려 후원 입구로 씩씩하게 걸어갔다. 후원에 있는 작은 월동문을 막 지난 다음에야 손풍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그런데 장문인이 만나려는 사람이 누구지?”
그걸 물어보려고 다시 들어가려니 왠지 내키지 않아서 망설이고 있던 손풍은 멀지 않은 곳에서 두 남녀가 걸어오는 것을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어? 저들은…….”
사이좋게 팔짱을 끼고 다가오고 있는 두 남녀는 다름 아닌 이정문과 육난음이었다.
‘오냐, 잘 만났다.’
손풍은 재빨리 월동문 앞을 막아섰다.
“이곳은 들어갈 수 없으니 돌아가시오.”
이정문은 가만히 있는데 육난음이 고운 아미를 치켜뜨며 그를 쏘아보았다.
“지금 우리에게 시비를 거는 거예요?”
손풍의 얼굴에 심술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누가 누구에게 할 소리인지 모르겠군. 장문인께서 아무도 출입하지 못하게 하셨으니, 곱게 말로 할 때 얼른 돌아가는 게 좋을 거요.”
육난음의 눈매가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이건 아무리 봐도 시비를 거는 말투 같은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요?”
육난음이 돌아보자 이정문은 뚱한 표정으로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막내 제자가 장문인 말을 잘못 알아듣고 나름대로 열심히 하려는 모양인데, 좋게 봐주자고.”
손풍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이정문의 말은 얼핏 자기를 생각해주는 것 같아도 묘하게도 들을 때마다 기분이 나빠졌던 것이다.
“장문인 말씀을 잘못 알아듣다니 그게 무슨 개소리…….”
손풍이 버럭 소리를 지르려 할 때, 그의 귓전으로 진산월의 전음성이 들려왔다.
“손풍, 내가 기다리는 자들이니 안으로 들어오게 해라.”
그제야 손풍은 진산월이 후원에서 만나려는 자들이 이들임을 알아차리고 얼굴이 붉어졌다. 매번 이들과 얽히면 실수를 하거나 창피를 당하는 일이 생기니 속도 상하고 약도 올랐던 것이다.
육난음은 씩씩거리는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갑자기 생글생글 웃었다.
“잘하면 주먹이라도 휘두를 것 같은데, 오늘은 종남파 막내 제자분의 솜씨를 볼 수 있으려나?”
손풍의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며 코에서 거친 숨이 흘러나왔다. 하나 손풍은 억지로 숨을 고르며 분기를 가라앉혔다. 모처럼 장문인에게 칭찬까지 받은 좋은 날을 망쳐버릴 수는 없다는 생각에 솟구치는 화를 필사적으로 눌러 참은 것이다.
손풍은 아무 말 없이 월동문 옆으로 비켜섰다.
육난음이 다시 무어라고 그를 놀리려 했으나 그때 이정문이 재빨리 그녀의 팔을 잡아끌고 월동문 안으로 들어갔다.
“고맙소.”
이정문이 인사까지 하고 안으로 들어가자 어쩔 수 없이 끌려들어가던 육난음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왜요? 먼저 시비를 걸어온 건 그자인데…….”
“진 장문인이 와 있어.”
이정문의 짧은 말에 육난음은 그제야 표정을 풀었다.
손풍은 놀리는 재미가 있는 인물이지만, 장문인 앞에서 그 문파의 제자를 놀려먹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그 상대가 신검무적이라면 아무리 그녀라도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후원에는 과연 진산월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정문과 육난음은 그의 앞으로 가서 인사를 했다.
“동 대협의 연락을 받고 바로 달려왔는데도 시간이 조금 지체되었소. 오래 기다리셨소?”
“나도 방금 왔소.”
이정문은 후원을 한 차례 둘러보았다.
“이곳은 제법 아담하고 조용한 곳이구려. 진 장문인께서 우리를 굳이 이런 곳에서 뵙자고 하니 의아한 생각이 드는구려.”
진산월은 조용히 웃었다.
“내가 두 사람에게 손이라도 쓸까 봐 걱정되는 거요?”
이정문도 따라 웃었으나, 약간은 딱딱한 웃음이었다.
“그럴 리 있소? 다만 진 장문인이 우리와 단순히 이야기만 나눌 의향이었으면 실내에서 보자고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오.”
“바로 보았소.”
진산월이 의외로 선뜻 시인을 하자 이정문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진 장문인의 말씀은…….”
진산월의 시선은 그의 옆에 찰싹 붙어 있는 육난음에게로 향했다.
“육 소저의 암기가 강호일절이라는 말을 들었소. 육 소저의 솜씨를 한번 보고 싶소.”
그 말에 이정문은 물론이고 육난음의 표정마저 모두 변했다. 특히 육난음은 무척이나 놀랐는지 입을 살짝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누구라도 강호제일 검객의 입에서 솜씨를 보자는 말을 듣게 되면 놀라고 당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육난음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진산월의 허리춤으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평상시에 자신들을 만날 때와는 달리 오늘따라 진산월은 허리에 용영검을 차고 있었다.
다행히 이정문은 누구보다 두뇌가 영민하고 냉정한 인물이었기에 즉시 진산월의 말 속에 숨은 뜻을 알아차렸다.
“진 장문인께서는 그녀의 암기술을 견식하고 싶은 모양이구려?”
“그렇소.”
이정문은 여유를 되찾았는지 입가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아까 보다는 한결 부드러워진 웃음이었다.
“이틀 후에 있을 비무에 대한 대비 때문이라면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오.”
그 말에 육난음도 겨우 들끓는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진산월이 자신과 싸우기 위해 부른 게 아님을 뒤늦게 알아차린 것이다.
그녀는 살짝 진산월을 흘겨보았다.
“깜짝 놀랐어요. 오늘 소문이 자자한 신검무적의 검을 직접 보게 되는 줄 알고 가슴이 두근거렸지 뭐예요.”
진산월은 담담하게 그녀의 말에 대꾸했다.
“육 소저께서 보고 싶다면 기꺼이 보여드릴 의향이 있소.”
“그런 두근거림은 이틀 후로 미뤄두겠어요.”
“하지만 오늘은 내가 육 소저께 도움을 부탁드려야겠소.”
“기꺼이 도와 드리죠.”
육난음은 갑자기 활기찬 표정으로 앞으로 한 발 나섰다.
“제가 어떻게 해드리면 진 장문인에게 도움이 될까요?”
진산월은 손으로 후원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 나뭇등걸을 향해 암기를 발출해 주셨으면 좋겠소.”
“이렇게 말인가요?”
그녀가 장난처럼 말하며 슬쩍 손을 휘두르자 어느새 한 줄기 섬광과 함께 진산월이 가리킨 나무 한복판에 비침 하나가 틀어박혀 있었다. 언제 비침이 그녀의 손에 쥐여 있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발출되었는지는 누구도 정확히 본 사람이 없었다.
진산월은 진지한 얼굴로 나무에 깊숙이 박혀 있는 비침을 바라보고 있더니 육난음을 향해 물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방금 육 소저께서 몇 성의 공력을 사용했는지 알 수 있겠소?”
육난음은 살짝 미소 지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절대로 밝히지 않겠지만 진 장문인이니 말씀드리죠. 나는 육성(六成)을 썼어요.”
진산월은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어려운 질문에 답해 주신 것에 감사드리오.”
무공의 시범을 보여 달라는 것도 모자라 그 무공에 몇 성의 공력을 사용했는지까지 알려달라는 것은 보기에 따라서는 상당히 무례하고 위험한 부탁이 될 수 있었다. 그걸 잘 알고 있음에도 진산월이 그런 질문을 던진 것은 그만큼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육난음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선뜻 알려주었기에 진산월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의 인사를 한 것이다.
“한 가지만 더 부탁드리겠소.”
“말씀하세요.”
진산월은 육난음의 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진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육 소저께서 전력을 다한 솜씨를 보고 싶소.”
육난음은 여전히 생글생글 웃었다.
“저 나무에 말인가요?”
진산월은 고개를 저었다.
“나를 향해 펼쳐 주시오.”
육난음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육난음은 진산월의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가 그가 진심임을 알아차렸는지 표정에 차가운 빛이 떠올랐다.
“진 장문인께서는 내가 전력을 다한다 해도 진 장문인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한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이지요?”
“그게 아니오.”
“그게 아니라면……?”
“한 가지 확인해 볼 것이 있기 때문이오.”
“내 암기술이 진 장문인에게 통할지 안 통할지 몸으로 직접 확인해 보겠다는 뜻인가요?”
진산월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자세한 건 잠시 후에 말씀드리겠소.”
이어 그는 가볍게 신형을 움직여 그녀에게서 삼 장 떨어진 공간에 우뚝 멈춰 섰다. 그런 다음 양손을 늘어뜨린 채로 담담한 음성을 발했다.
“내 왼쪽 어깨 위의 견정혈(肩井穴)을 노려주시면 고맙겠소.”
진산월이 자신의 의사를 무시한 채 일방적으로 공격 부위까지 정해주자 육난음의 눈에 분노의 빛이 일렁거렸다. 사실 그녀는 진산월이 과거 사천에서 당한 일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처지를 동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에 대해 약간의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진산월의 다소 무리한 부탁에도 그녀가 선뜻 응했던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하나 지금 진산월의 요구는 아무리 그를 좋게 보고 있는 그녀라도 참기 힘들 정도로 무례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정문 또한 진산월의 그런 모습에 의아한 빛을 감추지 못했다.
‘이상하구나. 진 장문인은 속마음이야 어떻든 결코 남에게 예의를 잃지 않는 사람인데 왜 저렇게 무리한 부탁을 하는지 정말 모르겠구나.’
육난음은 붉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더니 이윽고 냉랭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좋아요. 나는 전력을 다하겠으니 진 장문인도 피를 보고 싶지 않으면 최선을 다하는 게 좋을 거예요.”
“명심하겠소.”
진산월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어깨가 살짝 흔들렸다. 그 흔들림은 너무도 미약해서 유심히 보지 않았다면 누구도 알아차리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 한 줄기 검광이 번뜩거렸다.
땅!
동시에 터져 나오는 날카로운 음향 하나!
이정문은 흠칫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앞을 바라보았다. 언제 뽑아들었는지 진산월의 손에는 우윳빛을 뿌리는 검 하나가 쥐여 있었다.
육난음의 시선은 이정문과는 전혀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
진산월의 발밑에 무언가 유리조각 같은 것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것이 자신이 발출한 절명침(絶命針)의 잔해임을 그녀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놀랍게도 그녀가 전력을 다해 발출한 절명침을 진산월은 정확히 용영검으로 가격해 한 줌의 가루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비록 절명침이 날아오는 부위를 알고 있다고 해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자신의 비침에 적지 않은 자신감을 가지고 있던 육난음으로서는 마치 가슴이 검광에 쪼개지는 듯한 강한 충격을 맛보아야만 했다.
다시 한 차례 검광이 번뜩이더니 용영검이 소리도 없이 진산월의 검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검이 저절로 살아서 움직이는 듯한 그 모습에 이정문이 입을 딱 벌렸다. 그와 같은 납검(納劍)의 경지는 일찍이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던 것이다.
진산월은 다시 육난음을 향해 포권을 했다.
“육 소저의 도움에 감사드리오. 정말 좋은 경험을 했소.”
육난음은 그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복잡한 빛이 담긴 눈으로 진산월을 바라보았다.
“진 장문인의 검술이 신화경(神化境)에 달해 있다는 것은 주위에서 하도 떠들기에 들어서 알았지만 정말 소문 이상이군요. 실로 놀라운 솜씨였어요.”
“육 소저의 솜씨가 더욱 놀라웠소. 왼쪽 견정혈이 아닌 다른 곳으로 날아왔다면 사정이 달라졌을 거요.”
육난음의 얼굴에 갑자기 쌀쌀맞은 표정이 떠올랐다.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요. 지금 다시 한 번 시험해 볼까요?”
진산월은 고개를 저었다.
“사양하겠소. 아무래도 다음에는 정말 피를 보게 될지 모르니 말이오.”
“이제 말씀해 보세요. 대체 무엇을 확인하려고 했던 것이죠?”
진산월은 잠시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윽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소리를 듣고 싶었소.”
“소리라니요?”
“육 소저가 암기를 발출하는 소리 말이오.”
육난음의 몸이 한 차례 움찔거렸다.
“그 소리를 들었단 말이에요?”
“그렇소.”
육난음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그건 정말 미약한 소리여서 인간의 청력으로는 듣기 힘들 텐데…….”
“처음 소저가 육성을 사용했을 때 암기가 발출되는 소리를 들었소. 하지만 그 소리가 너무 미약하고 희미해서 그것이 진짜 육 소저가 암기를 발출할 때 나는 소리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소. 그리고 육 소저가 전력을 다한 상태에서도 소리가 나는지 또한 알고 싶었소.”
그제야 알겠다는 듯 육난음이 짧은 탄성을 토해냈다.
“아! 그래서 두 번째는 몸으로 직접 확인하려 했던 거로군요.”
“그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소.”
“그래서 두 번째에도 소리를 들었단 말이죠?”
“그러지 못했다면 육 소저의 암기를 쳐낼 수 없었을 거요.”
“정말 대단하군요.”
육난음은 거듭 감탄성을 발했으나, 의외로 진산월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하지만 피하지는 못했소.”
“그래요. 그건 조금 아쉬운 일이군요.”
옆에서 듣고 있던 이정문이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피하지 못한 게 아쉬운 일이라니? 막는 게 더 대단한 거 아니야?”
육난음은 그를 흘겨보며 피식 웃었다.
“다른 건 똑똑한 사람이 무공 방면은 정말 숙맥이라니까. 암기란 원래 피할 수 있으면 무조건 피하는 게 더 좋은 법이에요.”
“왜?”
“목표를 맞히지 못한 암기는 무용지물이니까.”
“그럼 막는 게 안 좋은 거야?”
“그건 도저히 피할 수 없을 때 선택하는 방법이에요. 하지만 완전한 방법은 아니지요.”
“그건 또 왜?”
“암기를 막다가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에요. 만약 그 암기가 폭발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면? 아니면 몇 개로 갈라지거나 너무 강력한 위력을 담고 있어서 검을 자르고 들어온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르잖아요.”
이정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래서 막기보다는 피하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라는 거로군.”
“그래요. 물론 진 장문인처럼 막으면서 암기 자체를 완전히 파쇄해 버릴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암기의 종류에 따라서 어떤 것은 도저히 그럴 수 없는 것도 있으니까요. 상대가 어떤 암기를 쓸지 모르는 이상 피할 수 있으면 무조건 피하는 게 상책이에요.”
이정문은 새삼스런 눈으로 그녀의 하얀 손을 내려다보았다.
신검무적조차 피하지 못하고 막아야만 할 정도로 가공할 암기술을 지닌 손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보드랍고 고운 손이었다. 그리고 그 손의 주인은 자신의 여자였다.
그 눈길에 담긴 의미를 알아차렸는지 육난음은 밉지 않게 그를 흘겨보더니 이내 진산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진 장문인께서 단순히 소리를 듣고 내 암기를 피할 수 있을지 확인하기 위해서 그런 모험을 한 것 같지는 않군요.”
진산월의 표정은 여전히 무거웠다.
“그렇소. 솔직히 나는 육 소저의 암기를 피하기보다는 소리를 듣는 것 자체에 더 신경을 쓰고 있었소.”
“그건 왜 그렇죠?”
진산월의 음성은 어느 때보다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소리도 없이 발출되는 암기를 본 적이 있으니까.”
그 말에 육난음은 물론이고 좀처럼 놀라는 법이 없는 이정문조차 깜짝 놀라고 말았다.
특히 육난음은 충격이 컸던지 표정이 굳어지고 입술마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정말 그런 암기를 사용하는 사람을 보았단 말이에요?”
“그렇소.”
“그가 누구인가요?”
“내일모레 싸우기로 한 사람이오.”
육난음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역시 그로군요. 그럼 진 장문인은 이미 그와 한 번 만난 적이 있었군요.”
이정문이 그녀의 말에 놀라 황급히 되물었다.
“그럼 정말로 소리도 없이 암기를 발출할 수가 있단 말이야?”
“방금 듣지 못했어요? 그건 암기술의 최고 경지인 무음경(無音境)이에요. 내가 알기로는 당금 무림에서 그 경지에 올랐거나 올랐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단지 세 명뿐이에요.”
“그들이 누구야?”
“첫째는 사부님이세요. 사부님이 암기를 발출하면 정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요. 그리고 또 한 사람은 사부님의 숙적인 소수마후예요. 그건 사부님께서 말씀해 주셨어요.”
두 절대고수의 이름을 듣자 이정문은 이내 단정적으로 말했다.
“마지막 인물은 나도 알겠군. 천수나타 당각이지?”
“그래요. 그동안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당각이라면 그 경지에 올랐을 수도 있을 거라고 예상했었지요. 그런데 진 장문인의 말씀을 들어보니 확실히 그는 이미 무음의 경지에 도달해 있는 게 분명해요.”
진산월은 고개를 저었다.
“한 가지가 더 있소.”
“그게 무어예요?”
“그자의 암기는 소리뿐 아니라 어떠한 흔적도 없었소.”
육난음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뾰쪽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뭐라고요? 그건 불가능해요.”
이정문이 황급히 그녀를 다독거렸다.
“진정해. 진 장문인이 없는 말을 지어낼 리가 없잖아.”
“하지만……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에요.”
“뭐가?”
육난음은 넋이라도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리듯 말했다.
“무적경(無跡境)은 단지 전설로만 전해지는 경지예요. 암기술을 익히는 모든 사람들이 꿈에서도 이루기를 원하지만 누구도 이루지 못해서 그저 마음속의 상상으로만 만들어낸 경지란 말이에요.”
그녀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생각해 보세요. 아무런 소리도 없고 흔적도 없이 암기가 날아든다면 천하의 누가 그걸 막을 수 있겠어요? 그래서 암기 무공을 익히는 자들 사이에서는 오래전부터 ‘무적(無跡)은 곧 무적(無敵)이다’라는 말이 은밀하게 전해져 오고 있었죠. 마치 이룰 수 없는 환상 속의 신화나 전설처럼 말이에요.”
그녀의 말을 듣자 이정문은 갑자기 소름이 쭈욱 끼쳐왔다.
그녀의 말마따나 소리도 없고 어떠한 흔적도 없이 날아드는 암기를 무슨 수로 피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진산월은 이제 이틀 후에 그런 암기의 고수와 정면승부를 해야 하는 것이다.
“천수나타가 정말 그런 경지에 올라 있단 말인가?”
그의 중얼거림에 육난음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비록 당각이 암기의 최고수라고 해도 아직 그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을 텐데……. 진 장문인께서는 정말 그의 암기가 날아드는 어떠한 흔적도 알아차리지 못하셨나요?”
듣기에 따라서는 굉장히 무례한 질문이었으나 질문을 하는 그녀도, 대답을 하는 진산월도 전혀 그 점을 의식하지 않았다.
“그렇소. 그때 그는 세 번 암기를 발출했는데, 처음에는 암기가 발출되는 소리와 흔적을 알 수 있었으나 두 번째에는 어떠한 소리도 들을 수 없었소. 단지 미약한 기척을 느꼈기에 겨우 피할 수 있었을 뿐이오.”
육난음은 침을 꼴깍 삼켰다.
“세 번째는요?”
진산월의 음성은 어느 때보다 진중하고 묵직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어떠한 기척도 느낄 수 없었소.”
이정문과 육난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신검무적이 듣지도 못하고 느끼지도 못했다면 누구도 듣거나 흔적을 알아차릴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각은 정말 꿈의 경지라는 무적경에 도달해 있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이틀 후의 싸움이 어떠한 결과를 맺게 될지는 너무도 뻔한 일이 아니겠는가?
진산월은 할 말도 잊은 채 굳어 있는 두 남녀를 차례로 보더니 이윽고 조용한 음성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두 분께 한 가지 부탁할 것이 있소. 대신 이 공자가 야율척의 둘째 제자를 잡는 것을 도와주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