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9권 절대암류(絶代暗流)편 : 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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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29권 절대암류(絶代暗流)편 : 4화


제 295 장 당랑규선(螳螂窺蟬)

진산월을 만나고 돌아오는 이정문과 육난음의 발걸음은 그다지 가볍지 않았다. 특히 육난음의 표정이 너무 심각해서 이정문은 그녀의 팔을 가볍게 두드리며 그녀를 달래주었다.

“너무 불안해하지 마. 진 장문인이 어떤 사람인지 잊었어? 별 볼일 없는 무공을 지니고 있을 때에도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두 개의 극독을 맞고도 살아나온 사람이야. 그는 절대로 쉽게 굴복하지 않을 거야.”

육난음은 이정문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평소와 달리 한없이 무거워 보였다.

“그건 당신이 무적경에 올랐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기 때문이에요.”

“어떤 의미인데?”

“그건…… 일단 암기를 발출하면 천하의 누구라도 죽일 수 있다는 뜻이에요.”

이정문의 눈에 한 줄기 기광이 번뜩였다.

“그 상대가 무공의 신(神)이라고 할지라도?”

“그래요. 무림에 신이 있다면 그 신조차 무적경의 고수가 발출하는 암기를 피할 수 없어요. 그런데 당신, 표정이 왜 그래요?”

“내가 뭘?”

“무언가 몰랐던 걸 알았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잖아요. 말해 봐요. 내 말에서 뭘 알아차린 거죠?”

이정문은 대수롭지 않은 듯 입꼬리를 삐죽이며 웃었다. 그 다운 각박하고 딱딱한 웃음이었다.

“별거 아냐. 당각이 왜 진 장문인에게 공개적인 비무첩을 보냈는지 여러 가지로 해석을 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중 하나가 확실한 것 같아서 말이지.”

“그게 뭔데요? 어서 말해줘요.”

육난음이 팔에 매달리자 묵직한 가슴의 감촉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쾌의당의 천살령주가 진 장문인을 죽이기 위해 이쪽으로 왔다는 말을 들었지?”

“그래요. 당신은 혹시 그 천살령주가 당각이 아닐까 하고 의심했잖아요.”

“그래. 그런데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 천살령주에 대해 알려진 것이 하나 있는데, 천살령주는 마음먹기에 따라 신조차 죽일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지.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 같지 않아?”

“그렇군요. 그건 확실히 무적경의 고수를 두고 한 말 같아요. 당각이 정말 무적경에 오른 고수라면 그가 바로 천살령주일 거예요.”

열심히 그의 말에 맞장구를 치던 육난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다면 왜 당각은 은밀히 진 장문인을 공격하지 않고 일부러 공개리에 비무첩까지 보낸 것일까요? 원래 쾌의당의 암살청부는 최대한 은밀하게 진행하는 게 일반적이잖아요.”

“아무래도 혁리공이 무언가 수작을 부리는 것 같아. 종남파의 움직임에 대한 소문이 너무 빨리 퍼져나가서 세인들의 이목이 잔뜩 집중된 상태에서 당각의 비무첩이 공개되었단 말이야. 당연히 사람들로서는 미친 듯이 열광할 수밖에 없지. 너무 냄새가 나지 않아?”

“혁리공은 서장 야율척의 둘째 제자라면서요?”

“서장과 쾌의당은 사안에 따라 협력하기도 하고 반목하기도 하는데, 진 장문인을 상대하는 일이라면 서로 힘을 합치려 할 거야. 지금 같이 온 무림의 이목이 집중된 상황에서 당각이 진 장문인을 공개리에 쓰러뜨리면 어떤 일이 벌어질 거 같아?”

육난음은 잠시 생각해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하군요. 그렇게 되면 적어도 종남파가 이번에 구대문파로 복귀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그 후의 일은 가정으로라도 하고 싶지 않군요.”

“당신이 진 장문인을 좋아한다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

“그래요, 이 심술쟁이. 나는 진 장문인도 좋아하고, 그 잘생긴 옥면신권도 좋아하고, 심지어는 진 장문인의 제자인 애늙은이 같은 꼬마 녀석도 좋아하죠. 내가 또 누굴 좋아하는지 더 말해줄까요?”

“내 말은 당신이 종남파 사람들에게 너무 편향적일 정도로 짙은 호감을 느끼고 있다는 거야. 우리 같은 사람들은 좀 더 냉정하고 공정해져야지.”

“그런 게 내 마음대로 돼요? 당신은 그럼 종남파 사람들이 안쓰럽고 대견하지도 않아요? 그 험난한 가시밭길을 뚫고 여기까지 올라온 사람들인데…….”

이정문의 눈빛이 침착하게 가라앉았다.

“그런 건 혼자서만 생각하고 있어야지. 개인적인 호불호는 대세를 판단하는 데 장해가 될 뿐이야.”

육난음은 도톰한 입술을 삐죽거렸다.

“어련하겠어요, 목석같은 양반.”

“아무튼 이번 공개 비무첩의 배후에는 혁리공의 의도가 숨어 있을 거야. 그 말은 달리 말하면 혁리공은 지금 이 근처에 있다는 뜻이지. 비무가 당각의 승리로 끝나는 순간, 그는 움직이려 할 거야.”

“어떻게요?”

“두 가지 중의 하나겠지. 직접 움직이거나, 다른 사람을 움직이게 하거나.”

“둘 중 어느 거라고 생각해요?”

“혁리공은 늘 싸움을 붙여놓고 그걸 구경하는 걸 자신의 제일락(第一樂)이라고 말해 왔지. 이번에도 반드시 그렇게 하려 할 거야.”

“그럼 그가 누굴 움직이는지를 지켜봐야겠군요?”

이정문은 빙긋 웃으며 육난음을 바라보았다.

“그가 움직이기 아주 좋은 상대가 바로 옆에 있잖아.”

“누굴 말하는 거예요?”

이정문은 턱으로 어느 한쪽을 가리켰다.

“종남파가 머무르고 있는 별실 건너편에 누가 있는지를 생각해봐.”

육난음은 무심코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입을 딱 벌렸다.

“설마 형산파를?”

“형산파는 그동안 진 장문인과 종남파의 비무행 때문에 전전긍긍하고 있었지. 종남파의 약진을 막자니 진 장문인을 상대할 자신이 없고, 두고 보고 있자니 자신들의 입지가 점점 좁아지고 있으니 얼마나 속이 탔겠어? 그런데 진 장문인이 당각의 손에 쓰러진다면 그들이 어떻게 나올 거 같아? 누군가가 살짝 심지를 갖다 대기만 해도 활활 타올라 버릴걸.”

“그렇다면…….”

“그래. 우리는 우선 형산파를 주목해 봐야지. 그곳에서부터 혁리공의 꼬리를 잡아나가기 시작하는 거야. 그나저나 당신, 살이 좀 찐 거 같아. 가슴이 더 커졌잖아.”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 바보가!”

육난음은 이정문의 마른 몸을 확 밀쳐 버렸다.

☆ ☆ ☆

황일기(黃逸麒)는 자신의 허리춤에 매달린 검을 내려다보았다. 푸른 수실에 매인 네 개의 매듭이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사결검객(四結劍客). 형산파는 물론이고 강호 어디에서도 내로라하는 일류검객의 상징이었다.

지난 몇 년간의 고련 끝에 올봄에 황일기는 드디어 사결검객이 될 수 있었으며, 형산파 내에서 나름대로 적지 않은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의 나이가 이제 겨우 스물아홉인 걸을 감안해 본다면 보기 드물게 파격적인 발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혹자는 그의 사부이자 오결검객인 칠지신검 좌군풍의 입김이 들어갔을 거라고 말하기도 했으나, 그것은 형산파의 속사정을 모르고 하는 소리였다. 매듭을 하나 늘리고자 할 때마다 형산파 내에서는 여러 방면에서 치밀하고도 공정한 심사를 거쳤고, 특히 사결검객은 형산파의 대외적인 얼굴에 가까워서 더욱 혹독한 심사과정을 통과해야만 했다.

형산파의 실질적인 수뇌부인 오결검객들은 좀처럼 강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실제로 강호에서 볼 수 있는 형산파의 실력자들은 대부분이 사결검객이었다. 이제 황일기는 적어도 신분 면에서는 형산파를 대표할 수 있는 인물 중 한 사람이 된 것이다.

한동안 자신의 검에 매달린 푸른 수실의 매듭을 어루만지고 있던 황일기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한 사람이 그에게로 다가왔다.

“사부님께서 찾으십니다, 황 사형.”

다가온 사람은 그의 사제인 조뢰명이었다.

그의 검에 매달린 수실의 매듭은 아직도 세 개였다. 그래서인지 황일기를 대하는 그의 태도는 예전보다 훨씬 더 공손해 있었고, 조심스러워하는 기색마저 보이고 있었다. 삼결과 사결의 차이는 그처럼 막대한 것이었다.

황일기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실을 향해 성큼 걸어갔다. 조뢰명은 그의 등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다가 그를 따라 몸을 움직였다.

두 개의 방을 지나 내실로 들어가자 좌군풍이 누군가와 차를 마시고 있었다. 이십 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문사 차림의 젊은 청년이었는데, 유난히 피부가 하얗고 눈썹이 선명해서 마치 여인이 남장(男裝)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들 정도였다. 하나 목젖이 선명한 것을 보면 남자임이 분명했다.

“부르셨습니까?”

황일기가 다가와 머리를 조아리자 좌군풍은 앞에 앉은 의자를 가리켰다.

“너는 이곳에 앉고, 뢰명은 잠시 물러가 있거라.”

“예.”

조뢰명이 내실 밖으로 조용히 사라지자, 좌군풍은 앞에 앉아 있는 문사 차림의 청년을 가리켰다.

“서로 인사를 나누거라. 구양가의 셋째 공자이시다.”

문사 차림의 청년이 단정한 자세로 인사를 했다.

“구양가의 구양현성(歐陽玄星)이라 합니다.”

“구양가의 일월성진 사대공자의 명성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소. 형산파의 사결인 황일기라 하오.”

황일기의 태도는 정중하지도 무례하지도 않은 담백한 것이었다. 그 안에는 형산파의 사결이라는 자존심이 담겨 있었다. 적어도 강호의 어느 누구도 형산파의 사결을 무시할 수는 없다는 강한 자신감의 발로이기도 했다.

구양현성의 하얀 얼굴에 흰 선이 그려졌다. 의미를 알기 힘든 묘한 미소였다.

“저도 황 소협의 명성은 많이 들었습니다. 당대에서는 네 번째로 젊은 나이에 사결에 오르셨다는 말을 듣고 꼭 만나고 싶었습니다.”

형산파의 사결검객은 서른한 명에 불과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삼사십 대의 나이였으며, 이십 대는 극소수뿐이었다. 당대의 사결검객 중 가장 어린 나이에 사결에 오른 사람은 대로검 백대행이었으며, 그때 백대행의 나이는 불과 스무 살이었다.

그 때문에 당시 무림에 상당한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백대행은 일약 형산파의 미래를 상징하는 인물이 되어 버렸다. 하나 모든 사람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백대행이 지금은 검을 꺾고 형산파의 깊은 곳에 칩거하는 신세가 되었으니, 사람의 인생이란 참으로 모를 일이었다.

황일기는 구양현성의 준수하다 못해 아름다워 보이는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구양현성에 대한 소문은 황일기도 몇 번 들은 적이 있었다.

구양가는 호남성 장사(長沙)에 있는지라 형산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자연히 형산파는 대대로 구양가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왔으며, 그 관계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었다.

구양현성은 일월성진의 사대공자 중에서도 가장 특이한 인물이었다. 첫째인 구양표일은 술과 여자를 좋아하여 풍류공자로 이름이 높았고, 둘째인 구양전월은 이재(理財)에 밝아서 황금공자(黃金公子)라고까지 불리고 있었으며, 막내인 구양수진은 무공광으로 유명했다. 그들에 비해 셋째인 구양현성은 조용하고 침착한 성격에 인물이 뛰어나다는 것 외에는 그다지 알려진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후대의 구양가는 그와 구양전월 중 한 사람이 맡게 될 거라고 말하고는 했다.

심지어는 구양전월보다 그를 더 높게 평가하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풍류를 모르고, 이재에도 밝지 않으며, 무공에도 소질이 없는 그가 어떻게 그런 평가를 받게 되었는지 의아해하는 자들도 있었으나,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구양현성이 어떤 일을 하기로 결심하면 그 일은 무조건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구양현성은 실패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일에는 결코 뛰어들지 않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그의 신중함을 칭찬하는 말 같기도 했고, 또 어떻게 보면 그의 소심함을 비웃는 말 같기도 했으나, 아무튼 그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구양현성이 어떤 일을 하든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고 투자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의 기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배반당한 적이 없었다.

그런 구양현성이 형산파의 오결검객인 좌군풍을 만나고 있다는 것은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았다. 구양현성이 움직였다는 것은 어떤 일을 계획하고 있으며, 그 일이 거의 성공 단계에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좌군풍은 기꺼이 그 일에 동참할 생각임이 분명했다. 그러하지 않고서는 황일기에게 구양현성을 소개해 줄 리 없었다.

두 사람이 인사를 나누자 좌군풍은 특유의 굵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사 년 전에 네가 신검무적을 비롯한 종남파 고수들과 가벼운 충돌이 있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나는구나. 그때의 이야기를 해보거라.”

황일기는 이미 오래 전에 지난 일을 좌군풍이 왜 굳이 다시 거론하는지 의아스러웠으나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당시의 일을 말하기 시작했다.

무림대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소림사로 갔다가 우연히 팽파진의 주루에서 종남파 고수들과 시비가 붙어 결국 관제묘 앞에서 공개적인 비무를 벌이게 된 것부터 비무가 점점 흉험해져서 서로 합의하에 비무를 중단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빠짐없이 이야기했다.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좌군풍이 나직하게 혀를 찼다.

“결국 좌동은 옥면신권에게 패하고, 조뢰명은 승부를 가리지 못한 채 물러나고 말았다는 말이로구나.”

“당시의 상황으로는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조금만 더 사태가 진행되었다면 조 사제와 종남파의 제자 중 한 사람은 반드시 불의의 변을 당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무림의 비무에서 그 정도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이지. 그나저나 당시 좌동과 옥면신권의 대결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호각지세라고 했는데, 겨우 사 년 만에 옥면신권은 강호제일의 후기지수가 되었고 좌동은 여전히 이결에 머물러 있다. 너는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황일기는 당시의 기억을 떠올려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저도 이해가 가지 않는 일입니다. 당시의 옥면신권은 정말 성질만 급하고 별다른 재주가 없는 애송이였습니다. 그때 좌 사제가 조금만 냉정했어도 비무에서 결코 패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그가 어떻게 불과 사 년 만에 그런 고수가 될 수 있었는지 도무지 짐작도 가지 않습니다.”

“짐작 가지 않는 일은 그뿐만이 아니지. 종남파의 장문인을 생각해 보면 온통 이해하지 못할 일투성이다. 그의 급격한 성장은 무림 유사 이래 좀처럼 보기 드문 것이다. 평범한 강호의 고수가 불과 사 년 만에 무림의 최정상을 달리는 절세의 검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누가 선뜻 믿을 수 있겠느냐?”

황일기도 그 점이 의아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사 년 전의 진산월은 나름대로 특출 난 점이 있기는 했으나 결코 사람들을 두렵게 할 정도로 무공에 뛰어난 재질을 지닌 인물은 아니었다. 오히려 나이답지 않게 침착하고 유들유들한 성격을 지니고 있어서 무공보다는 두뇌가 비상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었다.

황일기의 뇌리에는 아직도 풍채 좋은 체구에 언제나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그의 모습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 사람 좋아 보이는 덩치 커다란 청년이 불과 사 년 만에 모든 무림인들이 경외해 마지않는 강호제일의 검객이 될 줄이야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좌군풍의 표정은 한층 더 진지해졌고, 음성은 더욱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신검무적도 그렇고 옥면신권이나 다른 고수들을 봐도 그렇고, 확실히 종남파에는 남들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음이 분명하다. 그것이 강호의 적지 않은 사람들을 두렵게 만들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기회가 닿는다면 그런 불안요소를 깔끔하게 제거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지.”

황일기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사부님의 말씀은 곧 그런 기회가 올 거라는 뜻입니까?”

“기회란 찾아오기도 하고 만들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로서는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만반의 준비라 하심은?”

“이틀 후의 결과에 따라 많은 일들이 달라질 것이다. 그에 대한 대비를 해야겠지.”

좌군풍은 분명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늘 딱 부러지게 말하지 않고 에둘러 표현하는 것은 좌군풍의 오랜 습관 중 하나였다. 하나 그런 좌군풍의 어법에 익숙해 있는 황일기는 이내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알겠습니다.”

어떤 일을 어떻게 대비하라는 것인지 좌군풍이 굳이 지적하지 않아도 황일기는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아울러 구양현성과 좌군풍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신검무적과 천수나타의 비무 결과에 따라 종남파를 말살하려 하는 것이다. 만약 신검무적이 천수나타에게 패한다면 종남파는 지금까지의 욱일승천하는 기세가 꺾임과 동시에 가장 무서운 무기를 잃게 되는 것이다. 그때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날카로운 비수가 날아든다면 종남파는 의외로 허무한 종말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문제는 과연 비수가 단숨에 종남파의 숨통을 끊을 정도로 충분히 날카로우냐 하는 것이었다.

이번 무당산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이곳에 온 형산파의 고수는 좌군풍 외에 두 명의 오결검객과 네 명의 사결검객, 그리고 일곱 명의 삼결검객이 전부였다. 이 정도 숫자라면 강호무림의 어느 문파에도 뒤지지 않는 막강한 전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나 과연 이들만으로 신검무적이 빠진 종남파를 능가한다고 할 수 있을지는 솔직히 황일기로서도 자신할 수 없었다.

신검무적이 없다고 해도 종남파에는 강호 제일의 후기지수로 공인된 옥면신권이 있고, 무공의 끝을 알 수 없다는 신비로운 무영검군이 있으며, 강호삼정랑의 일인인 다정군자 남궁선을 꺾은 폭뢰검객도 있다. 뿐만 아니라 장강십팔채의 총채주인 천교자 방산동을 격살한 자는 새롭게 등장한 종남파의 여고수라는 소문까지 은밀히 퍼지고 있어 그야말로 종남파의 가공할 전력에 많은 무림인들이 전율하고 있는 판국이었다.

그런 황일기의 우려를 알아차렸는지 좌군풍은 조용한 한마디를 덧붙였다.

“내일 사공표와 비성흔이 올 것이다.”

그 말에 황일기의 눈이 번쩍 뜨여졌다.

비응검 사공표와 절영검 비성흔.

그들은 모두 오결검객들로, 이십여 년 전의 기산취악 때 종남파와의 비무에 나섰던 당사자들이기도 했다. 그들은 오결검객 중에서도 최고 수위의 실력을 지닌 절정고수들로, 그들보다 뛰어난 고수는 오결검객의 수좌인 조화신검 사견심과 검에 미쳐 검귀(劍鬼)라고까지 불리는 냉홍검 고진뿐이었다.

그중 사견심은 애제자인 백대행의 일로 상심하여 형산파에 칩거하고 있고, 고진은 아직도 축융봉의 동굴 속에 틀어박혀 미친 듯이 검법을 연마하고 있었다.

좌군풍이 이번 무당집회의 책임을 맡게 된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사공표와 비성흔이 온다면 그들의 제자인 네 명의 사결검객 또한 동행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형산파의 전력은 다섯 명의 오결검객에 여덟 명의 사결검객으로 늘어난다. 이 정도라면 신검무적이 빠진 종남파를 충분히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관건은 하나였다. 그리고 또한 가장 중요한 절대조건이기도 했다.

과연 이틀 후의 비무에서 천수나타는 신검무적을 꺾을 수 있을 것인가? 신검무적이 존재하는 한 다른 어떤 시도도 무의미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 지금까지 묵묵히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구양현성이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신검무적은 절대로 천수나타의 암기를 막을 수 없소. 천수나타 본인이 직접 확인까지 한 일이오. 다시 말해서 이틀 후가 바로 신검무적의 기일이 될 것이며, 또한 종남파가 머무르는 별실에 의문의 화재가 발생하는 날이기도 하오.”

그때서야 비로소 황일기는 절대적인 승산이 있을 때만 일에 뛰어든다는 구양현성에 대한 소문이 거짓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종남파를 영원히 재기할 수 없는 깊은 구렁텅이로 몰아넣게 될 것임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 ☆ ☆

혁리공은 손에 들고 있던 편지를 내려놓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옆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던 선약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신답지 않게 웬 한숨이에요? 일이 잘 안 풀려요?”

“오히려 그 반대요. 일이 너무 술술 풀리고 있소.”

“그런데 왜 한숨을 내쉬는 거예요?”

“너무 잘 풀리니 자꾸 이상한 생각이 든단 말이오. 순류(順流)에는 항상 역류(逆流)가 따르기 마련인데, 이번 일에는 역류의 기미가 전혀 없으니 공연히 마음이 불안해지는구려.”

선약연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런 걸 기우(杞憂)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일이 정말 당신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단 말인가요?”

“그렇소. 조건도 완벽하게 갖춰지고, 장기 말도 움직일 채비를 마쳤소.”

“그런데 영 표정이 밝지 않군요.”

혁리공의 얼굴에 한 줄기 쓴웃음이 떠올랐다.

“신검무적의 마지막이 멀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왠지 기분이 묘해진단 말이오.”

“왜 그렇죠?”

“신화의 종말을 보는 건 언제나 슬픈 법이오. 하나의 신화가 전설로 남지 않고 사라지는 건 사람의 마음에 묘한 감상(感傷)을 불러일으킨단 말이오. 특히 강호인들에게는 더욱 그렇지.”

선약연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신검무적의 얼굴을 잠시 그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잘 모르겠군요. 신화니 전설이니 하는 말들이 너무 막연하게 느껴지네요.”

“그건 당신이 여자라서 그럴 거요. 여자란 의외로 냉정한 구석이 있거든.”

“남자는 그렇지 않은가요?”

“남자란 존재는 가끔 엉뚱한 데서 의기소침해지거나 마음이 약해지고는 하오.”

선약연의 눈에 냉랭한 웃음이 떠올랐다.

“당신은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으니 안심해요.”

“나는 남자도 아니란 말이오? 아무튼 아쉬운 일이오. 신검무적은 나름대로 무척 매력 있는 인물이었는데 말이오.”

“당신이 그를 그렇게 생각할 줄은 몰랐군요.”

“원래 무서운 적일수록 더 가깝게 느껴지는 법이오. 그는 정말 대단한 인물이지만, 아쉽게도 시기를 잘못 만났소.”

“그가 정말 당각을 당해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요?”

“생각이 아니라 확신이오. 신검무적은 이번에 외통수에 단단히 걸려 버렸소.”

“아무리 그가 암기 무공에 취약하다고 해도 명색이 강호제일의 검객인데 당신이 그렇게 일방적으로 그의 패배를 기정사실화하는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쾌의당에서는 두 명의 용왕이 그의 손에 쓰러진 후 그에 대한 철저한 연구를 했소. 그의 모든 것을 여러 각도에서 치밀하게 분석한 결과, 그를 쓰러뜨릴 수 있는 방법은 암기와 쾌검이라고 결론 내렸지. 그런데 공교롭게도 당각은 그 두 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는 사람이거든.”

“당각이 쾌검까지 익히고 있단 말인가요?”

“자세한 내용은 워낙 기밀이라 나도 밝힐 수 없소. 아무튼 현재 무림에서 신검무적의 상극(相剋)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 바로 당각이고, 현재 신검무적의 능력으로는 그것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 분명하오.”

“그럼 당각이 천하제일고수라도 된단 말이에요?”

선약연의 물음에 혁리공은 피식 웃었다.

“천하제일이 그렇게 쉽게 되는 것이면, 이미 무림에는 오래전부터 천하제일고수가 나왔을 거요.”

“강호제일 검객도 꼼짝 못하는 암기 무공의 달인이라면 천하제일을 노려볼 만하지 않아요?”

“신검무적이 당각을 이기지 못하는 건 조금 전에도 말했다시피 신검무적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을 당각이 노릴 수 있기 때문이오. 그런 약점이 없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당각이라도 승산을 자신하지 못하지.”

“그런 약점이 없는 사람도 있어요?”

혁리공의 두 눈이 어느 때보다 밝게 빛났다.

“있소. 최소한 세 사람.”

“그들이 누군가요?”

혁리공은 고개를 저었다.

“그들의 이름은 내가 감히 거론할 수 없소.”

“쓸데없는 이야기는 잘도 하면서 정작 내가 궁금해하는 중요한 일들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어 버리는군요.”

“일전에도 말했지만, 당신이 정말 알아야 할 일이라면 기꺼이 알려줬을 거요. 하지만 그렇지 않은데도 굳이 당신에게 말할 필요는 없지 않소?”

선약연은 샐쭉한 표정으로 그를 쏘아보더니 이내 말문을 돌렸다.

“또 그 당신의 이상한 철칙을 떠들 생각이라면 그만 둬요. 그나저나 그때 그들을 그렇게 내버려 둔 건 너무 심하지 않았나요?”

“조화심과 공손도 등 세 사람 말이오?”

“그래요. 그래도 그들은 지난 몇 년간 당신을 도와 여러 가지 일들을 잘 처리해 주었는데…….”

“어쩔 수 없었소. 일이 잘되어 그들이 무사할 수 있었으면 다행이었겠지만, 하필이면 거기서 신검무적을 만났으니 그들의 운이 나빴던 거요.”

선약연은 혁리공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입가에 냉랭한 미소를 머금었다.

“내가 당신 속을 모를 줄 알아요? 당신은 그들이 그렇게 될 줄을 알고 있었죠? 신검무적이 근처에 있는 걸 알고도 그들을 그쪽으로 보냈잖아요.”

“그들은 단지 운이 나빴을 뿐이라니까.”

“정말 그런가요?”

“그렇소. 설사 신검무적을 만나지 않았더라도 그들은 어차피 오래 살 운명이 아니었소.”

“왜 그렇죠?”

“신목령의 오천왕 중 한 사람인 광풍서생 양척기가 그들을 잡기 위해 이쪽으로 오고 있소.”

“양척기가 비록 오천왕 중 두 번째 가는 고수라고 해도 당신이 도와주었다면 그들이 충분히 버틸 수 있었을 텐데…….”

“신목령에서 내가 알게끔 양척기의 행방을 공공연히 드러낸 것은 나에게 일종의 신호를 보낸 것이오.”

“무슨 신호 말인가요?”

“그들을 제거해주면 지금까지의 일을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겠다는 신호 말이오.”

선약연은 흠칫 놀랐다.

“그들이 정말 그런 신호를 보낸 거예요?”

“신목령이 그들 세 사람을 자신들의 손으로 제거하려 했다면 좀 더 비밀리에 움직였을 거요. 하지만 양척기는 일부러 우리의 눈에 뜨이는 노선으로 움직였고, 속도도 그리 빠르지 않았소.”

“그들이 왜 그런 신호를 보낸 거죠?”

“몇 가지 이유가 있겠지. 자신들이 키웠던 제자들을 자신들의 손으로 처단하는 것이 불편했든지, 아니면 이 기회에 천목지약을 완전히 깨뜨리려는 심산이었든지…….”

“그게 무슨 말이죠? 천목지약은 이미 유명무실해진 지 오래잖아요?”

“유명무실해진 것과 완전히 깨어진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소. 천봉궁과 신목령은 그동안 보이지 않는 암투를 벌여왔지만, 공개적으로 상대편 고수를 살해한 적은 없었소. 그런데 이번에 신목령의 십이사자 중 세 사람이 천봉선자들에게 죽은 거요. 비록 그들이 신목령의 배반자들이라고 해도 신목령으로서는 천목지약을 깰 확실한 명분을 얻게 된 것이지.”

선약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살짝 눈을 찌푸렸다.

“결국 신목령은 손도 대지 않고 배반자를 처리하면서 코를 푼 셈이고, 당신도 이용가치가 떨어진 자들을 떨쳐버리고 후환을 없앤 격이 되었군요.”

“아까도 말했다시피 그들은 운이 없었던 거요. 만약 그들이 신검무적이나 정소소를 만나지 않고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다면 그들의 운명도 달라졌을 거요.”

“아니에요. 당신은 틀림없이 다른 수를 써서라도 그들을 같은 꼴로 만들었을 거예요.”

혁리공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를 너무 피도 눈물도 없는 나쁜 놈으로 만드는구려.”

“그들 세 사람은 당신을 너무 믿은 게 실수였어요. 아니, 애초에 당신을 알게 된 것이 그들의 가장 큰 실수인 셈이었을지도 모르죠.”

“그들이 잘못한 것은 나를 만난 게 아니라 능력에 비해 너무 큰 욕심을 가지게 된 것이오. 그들은 신목령이 자신들을 구속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벗어나려 한 것이지만, 사실은 신목령에 속해 있을 때 자신들의 능력을 가장 온전히 발휘할 수 있는 그런 존재들이었소.”

선약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죽은 사람들 이야기는 이제 그만 하죠. 그나저나 당신은 산수재 이정문이 종남파 고수들과 함께 있는 걸 알고 있죠?”

이정문의 이야기가 나오자 혁리공의 얼굴에 야릇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에게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투지 가득한 웃음이었다.

“물론이오. 그는 나의 가장 큰 먹잇감인데 그의 행방에 소홀할 리가 있소?”

“그런데 그에게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군요.”

“그럴 리가? 그를 맞을 준비는 어느 때보다 철저하게 되어 있소.”

혁리공의 자신만만한 말에 선약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듣기로는 이정문이 여우보다 약고 두뇌가 비상해서 천하에서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운 인물 중 하나라고 하는데, 당신은 그에 대해 별로 두려워하는 것 같지 않군요.”

“솔직히 이정문은 두려운 상대요. 몇 년 전에 우리 측에서 그자에게 호되게 당한 적이 있다는 건 당신도 알고 있을 거 아니오?”

“그런 말을 듣기는 했지만 별로 관심이 없어서 자세히 알지는 못해요.”

“당신답군.”

선약연의 눈꼬리가 가늘어졌다.

“나답다는 게 뭐죠?”

“당신은 자기와 직접 관련이 있는 일이 아니면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성격이지. 뭐 특별히 흠잡거나 비꼬려는 건 아니니까 그렇게 노려볼 필요는 없소. 아무튼 이정문은 만만한 인물이 아니니 나로서도 나름대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는 말을 하려고 했던 거요.”

“어떻게 말이죠?”

“이정문은 나 혼자 상대하기에는 벅찬 감이 있소. 더구나 이곳은 그의 안마당이나 마찬가지인 중원 한복판이니 말이오. 그래서 이번에는 특별히 한 사람의 도움을 받기로 했소.”

선약연은 누구보다 자존심 강하고 다른 사람을 우습게 알고 있는 혁리공이 누군가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는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누군데요?”

혁리공은 선약연을 향해 미소 지었다. 무언가 야릇한 빛을 띤 의미심장한 미소였다.

“당신이 아주 반가워할 사람이오.”

그 말에 무언가를 느낀 듯 선약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혹시…….”

그녀가 무어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소리도 없이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가 등장하자 방 안이 갑자기 한층 더 밝아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연매, 오랜만이오.”

보는 사람을 매혹시킬 만큼 멋진 미소를 짓고 있는 그 사람은 그녀가 한때 미친 듯이 사랑했던 연인이었고, 이제는 누구보다도 미워하는 철천지원수이기도 했다. 피 끓던 시절에 그녀의 마음을 뒤흔들어 그녀로 하여금 삼월보를 뛰쳐나오게 만들었던 그 인물은 바로 절세옥안(絶世玉顔)의 사나이, 화면신사 백석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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