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9권 절대암류(絶代暗流)편 : 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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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29권 절대암류(絶代暗流)편 : 5화


제 296장 취선지호(醉仙之呼)

손풍은 오늘 기분이 아주 좋았다. 무공을 연마하면서 자신의 실력이 부쩍 늘어나는 것을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고, 그래서인지 자신을 쳐다보는 주위의 시선도 많이 바뀐 것 같았다. 더구나 조금 전에는 전혀 기대도 하지 않았던 장문인의 칭찬까지 들어서인지 전신에서 끝도 모를 힘이 솟구치는 것 같았다.

물론 종남파의 분위기는 평시와는 달리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이틀 후에 있을 비무 때문에 그런 것 같았다. 하나 손풍은 사람들의 그런 분위기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장문인이 어떤 사람인가?

일단 검을 손에 쥐면 단숨에 구름을 만들어 내는 강호제일의 검객이 아닌가?

그런 장문인에게 누군가가 도전해 왔다는 것도 우스웠지만, 그 상대가 보기 드문 강적이라며 걱정하는 사람들의 반응도 어처구니없었던 것이다.

‘천수나타인지 뭔지 하는 자가 제아무리 암기의 최고수라고 해도 장문인에게는 어림도 없지. 암, 그 작자는 암기 한 번 던져보지 못하고 장문인의 일검에 목이 달아날 것이다.’

손풍은 남들이 걱정하건 말건 신경도 쓰지 않고 혹시 수련할 공간이 있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한 번 수련에 맛을 들이니 도저히 몸이 근질거려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늘상 사용했던 후원은 지금 장문인이 머무르고 있어 갈 수 없었다. 대신 별실 입구의 앞뜰에 제법 쓸 만한 공간을 발견한 손풍은 그곳에서 슬슬 몸을 풀기 시작했다.

한동안 열심히 장괘장권구식을 연마하던 손풍은 문득 누군가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려 보았다. 별실의 대문 앞에서 황의와 남의를 입은 두 명의 여인이 나란히 선 채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눈이 번쩍 뜨이는 미인들이어서 반색을 했던 손풍은 그중 한 여인의 얼굴이 어딘지 눈에 익은 것을 느끼고 그녀를 자세히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얼굴이 시커멓게 변해 버렸다.

결코 이곳에서 만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뜻밖의 얼굴이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그 얼굴의 주인은 손풍과 시선이 마주치자 요염할 정도로 진한 미소를 머금었다.

“어머, 이곳에서 또 만났네.”

꾀꼬리같이 맑고 고운 음성이었으나 손풍에게는 지옥의 야차(夜叉)가 울부짖는 소리로 들렸다.

그 음성의 주인은 생글생글 웃으며 손풍을 향해 다가왔다.

“확실히 종남파의 제자가 되더니 신수가 훤해졌네. 제법 무림인 냄새도 나는 것 같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파락호인 줄 알았더니 그래도 제법 무공에 소질이 있나 봐. 자세가 괜찮던걸.”

손풍은 얼굴을 구기며 고개를 돌렸으나, 눈앞에 노란 색이 번뜩였다 싶더니 그녀의 얼굴이 다시 코앞에 불쑥 나타나는 것이었다.

“내가 반갑지도 않은가? 영 꼴 보기 싫은 걸 보는 표정이네.”

손풍은 속으로 욕지거리가 치밀어 올랐다.

‘그걸 몰라서 묻는 거냐, 이 망할 계집년아!’

손풍은 정말 눈앞의 이 천방지축 같은 여자를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에게 두들겨 맞아 며칠간을 꼼짝도 못하고 누워서 끙끙거린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거늘 어찌 그녀와 말 한 마디라도 섞고 싶겠는가?

손풍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속 고개를 돌리자 그녀의 눈꼬리가 조금씩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아직도 그 못된 망아지 같은 버릇을 못 버렸나? 사람이 말을 했으면 가타부타 대꾸를 해야 할 거 아냐?”

그녀의 음성이 거칠어지자 손풍은 순간적으로 몸이 움찔거렸다. 남에게 맞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던 손풍이었지만 그녀처럼 무자비하게 사람을 두들겨 패는 경우는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그녀의 언성이 높아지자 절로 마음이 움츠러들지 않을 수 없었다.

때마침 그녀와 함께 와 있던 남의 미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산매, 쓸데없이 분란을 일으키지 마. 우리가 이곳에 왜 왔는지 잊었어?”

손풍을 향해 눈을 부라리는 여인은 다름 아닌 누산산이었고, 그녀를 제지하는 남의 미녀는 엄쌍쌍이었다. 누산산은 손풍을 날카로운 눈으로 쏘아보더니 냉랭한 코웃음을 날렸다.

“흥. 언니는 저 자식이 예전에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몰라서 그래요? 아무튼 오늘은 언니 얼굴을 봐서 내가 참도록 하지요. 괜히 언니의 그이에게 눈총 받기는 싫으니까.”

그 말에 엄쌍쌍의 얼굴이 빨개졌다. 가뜩이나 수줍음이 많고 내성적인 그녀로서는 ‘그이’라는 말에 부끄러움을 참기 힘들었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말이 씨가 되려는지 주위의 소란스러움에 무슨 일인가 싶던 낙일방이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손풍, 무슨 일인가?”

낙일방은 무심결에 고개를 돌렸다가 엄쌍쌍과 누산산을 발견하고는 준수한 얼굴에 한 줄기 홍조가 어렸다. 뜻밖의 만남에 기쁘기도 하고 설레기도 한 모습이었다.

“엄 소저, 언제 오셨소?”

엄쌍쌍은 낙일방을 보자 얼굴이 온통 홍시처럼 붉어지며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방금 도착했습니다. 낙 공자님께서는 그동안 잘 계셨는지…….”

“나야 잘 있었소만, 엄 소저께서는…….”

낙일방은 무어라고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녀 때문에 벌어진 파란만장한 일을 어찌 말로 형용할 수 있겠는가? 그동안 그녀에 대한 여러 가지 감정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낙일방으로서는 막상 그녀를 다시 보게 되니 참으로 복잡한 심정이 솟구쳐 올라 제대로 말을 잇기 힘들었다.

엄쌍쌍 또한 정소소에게서 그간의 일을 대충이나마 들었기에 낙일방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애틋함이 겹쳐 고개만 떨구고 있었다.

두 남녀가 서로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어색한 표정으로 얼굴만 붉히고 서 있자 누산산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낙 공자를 보니 반갑군요. 우리는 진 장문인을 뵈러 왔는데, 지금 계신가요?”

낙일방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안광이 형형한 눈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장문인께서는 안에 계시오. 그런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무슨 일인지 여쭤 봐도 되겠소?”

그녀를 대하는 낙일방의 태도는 명문정파의 제자다운 절도와 당당한 기개가 서려 있는 것이었다. 누산산은 그 모습에 압도되어 자신도 모르게 고분고분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본 궁의 공주님께서 진 장문인께 전하는 서신을 가져왔어요.”

“장문인께 아뢸 테니 접견실에서 잠시만 기다리시오. 손풍, 두 분을 접견실로 모시도록 해라.”

손풍으로서는 그저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예, 사숙.”

낙일방은 엄쌍쌍을 한 번 더 각별한 눈으로 쳐다보더니 두 여인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훤칠한 신형이 사라지자 그제야 두 여인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각기 의미가 다른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휴! 이제 살겠네.”

누산산은 무엇이 그리도 못마땅한지 연신 입술을 삐쭉거리며 투덜댔다.

“종남파 사람들은 어째 갈수록 상대하기 힘들어지는지 모르겠네. 언니, 언니는 그 사람이 보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더니 왜 바보같이 한 마디도 못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저자가 더 기세등등한 거 아니에요?”

“그게 무슨 말이니?”

엄쌍쌍이 도리질을 했으나 누산산은 단단히 심통이 난 표정이었다. 그러다 그녀의 시선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는 손풍에게로 향했다.

그녀의 따가운 시선을 받자 손풍은 황급히 몸을 돌렸다.

“따라오시오. 접견실로 안내해 드리겠소.”

손풍은 그녀가 당장이라도 덤벼들 것처럼 생각되었는지 재빨리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행동이 어찌나 재빨랐는지 누산산은 미처 트집을 잡을 기회를 놓치고 아쉬운 입맛을 다셔야만 했다.

그녀는 아직도 얼굴을 붉히고 서 있는 엄쌍쌍의 손을 잡아끌었다.

“어서 가요. 안에 들어가서 요즘 강호를 뒤흔들고 있는 그 대단한 종남파의 다른 사람들 얼굴도 좀 보자고요.”

두 여인은 손풍의 뒤를 따라 별실 안으로 들어갔다.

진산월은 손에 들린 서신을 무심한 시선으로 읽었다.

서신의 내용은 특별한 것이 없었다. 간단한 안부 외에 무당파에 들어가기 전에 잠깐의 만남을 청하는 용건이 짤막하게 적혀 있었다.

일전에도 느낀 것이지만, 그녀의 서신은 여인답지 않게 지극히 직선적이고 꼭 말하고자 하는 핵심만 담겨 있었다. 어찌 보면 너무 무미건조하고 냉정하다고 할 수 있었고, 또 어찌 보면 불필요한 허례를 배제한 지극히 실용적인 것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아름다운 필체만 아니었다면 앞뒤가 꽉 막힌 남자가 보낸 것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진산월은 서신을 접은 후 담담한 눈으로 누산산을 쳐다보았다.

“공주께서는 언제쯤 만났으면 하시는 것 같소?”

누산산은 눈을 반짝인 채 진산월의 얼굴을 빤히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공주님께서는 어제 먼 길을 오셨는지라 이틀 정도는 쉬고 싶어 하십니다. 마침 삼 일 후면 무당파의 집회가 열리는 날이니 모레 저녁이 괜찮을 것 같군요.”

옆에서 듣고 있던 동중산이 속으로 혀를 찼다.

‘너무 속이 보이는군. 비무의 결과를 보고 만날지 말지를 결정하겠다는 게 아닌가?’

천수나타와의 비무는 모레 정오에 벌어지니 비무에 승리하면 그날 저녁에 단봉공주를 만나는 일은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진산월이 비무에서 패하게 되면 자연히 그날 저녁의 만남도 없던 일이 되어버릴 것이다.

어차피 진산월이 패하면 단봉공주와 만나는 일 같은 건 무의미하게 되기 때문에 이해 못 할 것도 없으나, 동중산은 새삼 강호의 인심이란 것이 얼마나 믿을 수 없고 위태로운 것인지를 다시 한 번 절감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처음에는 사방에서 진산월을 보고 싶어 하는 고수들의 방문 요청이 쇄도했으나, 천수나타와의 비무가 알려진 다음에는 그런 요청이 딱 끊겨 버렸다. 중요한 비무를 앞두고 방해하지 않겠다는 의미인 줄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입맛이 씁쓸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진산월은 그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이 차분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럼 모레 유시(酉時)경에 찾아뵙겠다고 전해 주시오.”

“알겠어요.”

“유 대협의 상세는 어떠시오?”

“노 신의께서 돌보신 덕분에 빠르게 회복단계에 접어들고 있어요.”

“다행이군. 곽 대협은 유 대협과 잘 만나셨소?”

팔비신살 곽자령은 유중악이 이곳에서 멀지 않은 객잔에서 노방의 간호를 받으며 머무르고 있다는 걸 알자 곧바로 그곳으로 이동했다. 제갈도를 비롯한 그의 일행들이 모두 동행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분들은 회포를 푼 후 모두 노 신의께 치료를 받고 계셔요. 유 대협의 상세가 낫는 대로 이곳으로 진 장문인을 뵈러 온다고 하시더군요.”

제갈세가의 가주인 제갈도가 있기는 하지만, 내상에 관한 한은 노방이 당대제일의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강호에서는 ‘외상(外傷)은 신수무정, 내상은 철면군자가 최고’라는 말이 정설처럼 퍼져 있는 상태였다.

노방이라면 유중악과 곽자령이 당한 부상은 어렵지 않게 완치시킬 수 있을 것이다.

“굳이 이곳으로 오실 필요 없이 모레 저녁에 내가 그쪽으로 갈 때 그분들도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소. 그렇게 전해 주시오.”

누산산은 진산월이 혹시 언짢은 게 아닐까 하여 그의 표정을 살피다가 그의 기색이 평온한 것을 보고는 겨우 안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전해 드리겠어요. 사실 오늘도 그분들이 같이 오겠다고 하는 걸 노 신의께서 말려서 간신히 떼어놓고 오느라 고생했거든요.”

진산월의 시선이 한쪽에 다소곳하게 앉아 있는 엄쌍쌍에게로 향했다.

“엄 소저의 안색을 보니 중독은 모두 치료가 된 모양이구려.”

엄쌍쌍은 고개를 숙이고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진 장문인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별말씀을. 모처럼 여기까지 어려운 걸음을 하셨으니 찬찬히 둘러보고 가도록 하시오.”

이어 진산월은 한쪽에 조용히 앉아 있는 낙일방을 불렀다.

“일방, 네가 엄 소저를 안내해 드리도록 해라.”

낙일방은 다소 겸연쩍은 얼굴로 엄쌍쌍을 힐끗 돌아보더니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따라오시지요, 엄 소저.”

엄쌍쌍은 얼굴이 도홧빛으로 물들었으나 거절하지 않고 못 이기는 척 그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그럼.”

두 남녀가 밖으로 사라지는 광경을 부러운 듯 보고 있던 누산산이 갑자기 눈을 반짝이며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저도 종남파 분들이 머무르는 곳을 구경하고 싶군요. 저는 어느 분이 안내해 줄 거죠?”

기대에 찬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누산산의 표정이 부담스러웠는지 진산월은 이내 동중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동중산은 조용히 웃으며 누산산을 향해 말했다.

“괜찮다면 내가 안내해 드리겠소.”

누산산의 눈꼬리가 슬쩍 치켜 올라갔다.

‘아니 누구는 젊고 잘생긴 남자와 다니고 누구는 쭈글쭈글하고 인상도 사나운 애꾸와 다녀야 한단 말인가?’

그녀의 심정을 알아차렸는지 동중산이 다시 한마디를 덧붙였다.

“나이 먹은 내가 싫다면 젊고 싱싱한 손 사제를 붙여드리겠소.”

그 말에 누산산이 질색을 했다.

얼굴만 보아도 주먹부터 날리고 싶어지는 손풍이 자신의 안내를 맡았다가는 종남파의 숙소인 이곳에서 한바탕 피바람이 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니에요. 친절하고 자상한 동 대협과 다니면 적어도 입이 심심하지는 않겠지요.”

그런데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문이 열리더니 손풍이 안으로 들어왔다.

동중산은 그가 또 무슨 실수라도 저지를까 싶어 황급히 물었다.

“무슨 일인가, 사제?”

손풍은 손에 든 한 장의 배첩을 내밀었다.

“누가 장문인을 뵙겠다고 찾아왔습니다.”

배첩에 적힌 이름을 본 동중산이 약간 놀라더니 이내 배첩을 받아 진산월에게 공손히 전해 주었다.

배첩을 받아든 진산월의 눈에 한 줄기 기광이 번뜩였다.

배첩 위에는 뜻밖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경요궁주 육천기 배상.>

☆ ☆ ☆

육천기의 첫인상은 무척이나 거칠고 투박한 것이었다.

화의신수라는 별호답지 않게 육천기는 우람한 체구에 수염이 가득 나 있는 다소 험상궂은 외모의 소유자였다. 게다가 두 눈에서는 연신 이글거리는 신광이 번뜩이고 있어 간담이 약한 사람은 보기만 해도 심장이 오므라드는 듯한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안내를 받고 들어온 육천기는 진산월을 보자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한동안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다소 무례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모습이었으나, 진산월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를 향해 먼저 인사를 했다.

“종남을 맡고 있는 진산월이라 하오. 강호에 명망이 높은 육 궁주를 뵙게 되어 반갑소.”

육천기는 비록 거대문파나 명문정파의 우두머리는 아니었으나, 그의 경요궁은 백 년 남짓 되는 세월 동안 적어도 사천과 귀주, 호광 일대에서는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명성을 날리고 있었고 육천기 본인 또한 강호 무림을 위진시키는 절정의 고수였다.

그의 나이는 오십 대로 알려져 있었는데, 막상 만나본 육천기는 그보다는 훨씬 젊게 느껴졌다. 그것은 아마도 육천기의 다소 거친 외모와 호방한 인상 때문이었을 것이다.

육천기는 이내 진산월을 살펴보는 것을 멈추고 정중하게 답례를 했다.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와서 미안하오. 대파산의 육천기라 하오.”

외모만큼이나 굵직하면서도 남성적인 힘을 느낄 수 있는 음성이었다.

육천기는 진산월과의 단독 만남을 청했고 진산월도 이를 받아들였기에, 장내에는 그들 두 사람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서로를 마주본 채 자리에 앉은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차를 기울였다.

차를 거의 마실 즈음 육천기는 불쑥 진산월을 향해 입을 열었다.

“소문에 듣던 대로 진 장문인은 무척이나 침착하고 평정심이 대단한 분이시구려. 생면부지의 내가 불쑥 찾아온 연유가 궁금했을 텐데도 한 마디도 묻지 않는 걸 보니 오히려 내가 조바심이 날 정도라오.”

진산월은 차를 모두 마신 다음에야 비로소 잔을 내려놓으며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누구에게나 나름대로의 사정은 있는 법이오. 육 궁주께서도 그러리라고 생각했소.”

육천기의 눈꼬리가 한 차례 꿈틀거렸다.

“진 장문인께서는 내가 무슨 일로 진 장문인을 찾아온 것인지 이미 알고 계신 것 같구려.”

“짐작 가는 일이 있기는 하지만, 솔직히 육 궁주께서 직접 찾아오실 줄은 미처 몰랐소.”

“흐음.”

육천기의 이마에 내 천(川)자가 그려졌다. 그의 솔직한 반응에 진산월은 내심 그에 대한 평가를 조금 바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호에 퍼진 육천기에 대한 소문은 썩 호의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외부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많지는 않았지만, 한 번 나타날 때마다 적지 않은 풍파를 일으키곤 해서 그를 꺼려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런데 직접 만나본 육천기는 의외로 속마음이 겉으로 그대로 드러나는 직선적이고 꾸밈없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육천기는 한 차례 무거운 한숨을 내쉬더니 이윽고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찾아온 이상 무엇을 더 숨기겠소? 진 장문인도 짐작하고 있다니 오히려 말하기가 더 수월하겠구려. 진 장문인의 생각대로 본 궁의 무공은 그 연원이 종남파에 있소.”

진산월은 그가 너무도 순순히 자신들의 비밀을 밝히자 오히려 조금은 당혹스러운 심정이었다. 일전에 만났던 경요궁의 인물들이 사용하는 무공에서 종남파 무공과 유사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는 했으나, 경요궁주 본인이 이토록 솔직하게 그 사실을 인정할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오히려 그들이 그 점을 부인할 경우 희미한 의심만으로 그들을 추궁할 수가 없을 것 같아 사실을 밝히는 데 상당히 애를 먹을 거라고 우려하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그때 현장에 있던 삼궁주 희인몽에게 전음으로 그 점을 넌지시 물어보기도 했으나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육천기 본인이 제 발로 찾아와서 묻지도 않았는데 먼저 그 사실을 인정해 버렸으니 진산월로서는 약간은 어리둥절하고 약간은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육 궁주의 말씀은…….”

“본 궁을 세우신 마일보(馬一寶) 조사께서는 종남파의 십육대 제자이셨소. 비록 그 뒤로 본 파의 역대 궁주님들의 노력으로 독자적인 길을 걷기는 했지만, 본 파의 무공의 근간이 되는 몇 가지 절학들은 당시 마 조사께서 종남파에서 가져온 것임을 부인할 수 없소.”

진산월은 뜻밖의 말에 잠시 입을 다물고 묵묵히 육천기를 응시하고 있었다.

과거에 여러 가지 원인으로 유실되었던 종남파의 무공 중 몇 개가 경요궁 쪽으로 흘러들어간 것이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육천기의 말대로라면 그보다 더욱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개파조사가 종남파의 제자이고, 그가 일부러 종남파의 무공을 종남파에서 직접 가져온 것이라면 그것은 기사멸조(欺師蔑祖)의 죄를 물을 수 있는 아주 중대한 사안인 것이다.

육천기는 무거운 표정으로 그 안의 사정을 말하기 시작했다.

“진 장문인도 아시겠지만, 마 조사께서 종남파에 계시던 당시의 장문인은 풍운신룡 담명이란 분이셨소. 마 조사께서는 그분의 일곱 명의 제자 중 하나였고, 나름대로 무재(武才)를 인정받는 후기지수였다고 하오. 아마 그 일이 없었다면 마 조사께서는 종남파의 떳떳한 제자로 남았을 테고, 사정에 따라 다음 대 장문인 자리도 넘볼 수 있었을지 모르오. 하지만 그 일 때문에 모든 것은 엉망으로 헝클어지고, 많은 사람들에게 파국이 닥치고 만 것이오.”

진산월은 육천기가 말한 그 일이란 바로 풍운신룡 담명의 자살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담명은 종남오선이 실종된 후 종남파에서 모처럼 배출된 일대기재였다. 뛰어난 실력으로 장문인이 된 그에게 많은 종남파의 문하들은 문파 재건의 중책을 맡겼으며, 그라면 능히 그 일을 해낼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나 주위의 크나큰 기대가 부담이 되었는지 담명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밖으로 나갈 길을 찾게 되었고, 결국 지하에 외부로 나가는 암도를 만들다가 발각되어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그의 자살에 실망한 종남파의 문하들 중 상당수가 종남산을 떠났고, 혼란의 와중에 장경각마저 불타버려 종남파는 대부분의 절학들을 잃어버리고 쇠락의 길로 빠져들게 된 것이다.

어찌 보면 종남오선의 실종보다도 종남파 몰락에 더욱 큰 단초를 제공한 사건이었으며, 또한 종남파 문하들이 가장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일이기도 했다. 문파의 장문인이 제자들 몰래 밖으로 도망치려다 발각당해 자결해 버렸으니 남에게 말하기도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경요궁을 세운 마일보도 당시에 담명의 일에 실망하여 종남파를 등진 것이 분명했다.

하나 육천기의 말은 전혀 다른 내용을 담고 있었다.

“당시 풍운신룡께서는 육합귀진신공의 복원에 전력을 기울이고 계셨었소. 육합귀진신공이야말로 종남파 무공의 정수(精髓)이며 최고의 절학이기에 그걸 복원하지 않고서는 종남파의 재건은 불가능한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소. 하나 그때 이미 종남파에는 칠음진기를 비롯한 몇 가지의 신공구결이 절전(絶傳)되었기에 육합귀진신공을 되살리는 일은 지난(至難)하기만 했소. 풍운신룡께서는 실전된 신공에 대한 약간의 단서라도 찾기 위해 시간이 날 때마다 장경각의 오래된 고서(古書)들을 뒤지고는 했는데, 그러던 어느 날 책장 틈에서 낡은 책자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소.”

그 책자가 담명의 눈에 띈 것은 그야말로 천운(天運)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책장 중 하나의 다리가 부실한 것을 본 담명이 다리를 수리하기 위해 책장을 들었다가 그 밑에 깔려 있는 얇은 책자를 발견한 것이다.

겉장에 제목도 적혀 있지 않은 책자는 너무 낡아서 세게 쥐면 그대로 바스러져 버릴 것만 같았기에, 담명은 조심스레 책자를 쥐고 겉장을 넘겨보았다.

그 책자는 칠십 년 전의 선배 고수가 기록한 일기였다. 선배 고수의 이름은 아쉽게도 알 수가 없었다. 어디에도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을 뿐 아니라 기록 자체에도 ‘나’라고만 표현되어 있을 뿐 신원을 유추할 수 있는 어떠한 부분도 명시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다만 담명은 일기의 내용으로 보아 그가 종남오선의 일인이며 십삼대 장문인이었던 취선 하정의의 사형제 중 한 사람이 아닐까 하고 막연하게 추측하고 있었다. 그가 그렇게 판단한 것은 일기의 내용 중 군데군데 ‘그’라고 적힌 사람이 취선 하정의였으며, 하정의를 공경하기는 해도 존장으로는 취급하지 않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정의와 동배(同輩)라면 종남오선과도 같은 항렬이라는 의미였다. 담명이 장문인이 되었을 때에는 이미 그 항렬의 고수는 아무도 생존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담명은 뜻밖의 발견에 몹시 흥분하여 단숨에 그 일기장을 모두 읽어 버렸다.

일기는 소선 우일기가 장기간 실종되어 하정의가 어쩔 수 없이 종남파의 장문인이 된 지 육칠 년 후부터 대략 오 년 정도의 일을 단편적으로 기술한 것이었다. 갈수록 약해지는 종남파의 문세에 대한 걱정과 그래도 종남파를 제대로 이끌어 가려고 애쓰는 하정의에 대한 안쓰러움이 곳곳에 배어 있었다.

신변잡기와 문파의 미래에 대한 우려가 대부분이었던 일기의 끝부분에 놀라운 말이 적혀 있었다.

하정의가 종남오선의 실종 같은 불의의 일로 문파의 절기들이 절전되는 것을 방비하기 위해서 남아 있는 종남파의 비전들을 따로 한 곳에 모으려는 시도를 하고 있으며, 그 일은 하정의 본인만이 알 뿐 문파의 누구도 모르게 은밀히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일기의 주인도 우연히 하정의의 거처를 방문했다가 하정의의 의복에 흙이 묻어 있음을 알고 그에게 거듭 물어 간신히 알게 된 것으로, 하정의는 그 비밀을 누구에게도 밝히지 말 것을 맹세하도록 장문인의 명으로 강요했다.

비전들을 한 곳에 모으는 일은 하정의가 직접 했으며, 그 정확한 위치는 오직 다음 대 장문인만이 알 수 있도록 장문인만이 읽을 수 있게 비망록에 특수한 방법으로 기록해 놓았다고 했다.

다만 일기의 주인은 당시 하정의의 의복 상태로 보아 그 위치가 하정의의 거처 지하가 아닐까 유추하고 있었다.

짧은 문구였으나, 담명에게는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순간에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정의의 거처라면 지금 자신이 사용하고 있는 풍운각이 분명했다. 대대로 풍운각은 역대 장문인들이 거처로 쓰고 있는 곳이었다.

이런 중대한 사실을 장문인인 자신이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더할 수 없이 허탈하고 한편으로는 원통하게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하정의의 죽음 이후 전대의 장문인에게서 후대의 장문인에게 내려와야 했던 비망록이 어딘가로 사라져 전해지지 않았던 것이다.

담명은 즉시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 절학을 숨겨놓은 밀실을 찾기 시작했다. 그 일은 공개적으로 밝힐 수 없는 것이기에 담명은 매일 오시부터 미시까지 오수(午睡)를 즐겨야 하니 누구도 방해하지 말라는 명을 내리고는 그 기간 동안 자신의 거처를 샅샅이 뒤져 보았다.

하나 밀실은 쉽게 발견되지 않았다. 일기의 주인이 하정의의 옷에 묻은 흙을 보았다는 것을 기억해낸 담명은 지하의 구석구석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암도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하나 그가 암도를 향해 들어가려 했을 때, 굳게 닫아 놓았던 풍운각의 문이 열리며 일단의 문도들이 뛰어 들어왔다. 그들은 온몸에 흙투성이인 담명을 보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담명은 그들 중 자신의 제자가 있음을 알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무슨 일이냐? 이 시간에는 나를 방해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 제자는 다급한 표정으로 담명에게 바짝 다가왔다.

“장경각에 불이 나서 급히 알려드리려고 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장경각에 불이 났다니?”

대경실색하여 제자의 어깨를 붙잡고 묻던 담명의 얼굴에 갑자기 이상한 표정이 떠올랐다.

“너…….”

다음 순간, 담명은 그대로 앞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엉겁결에 담명의 몸을 안아든 제자가 그의 몸을 몇 차례 흔들더니 갑자기 놀란 외침을 내질렀다.

“장문인께서 자진(自盡)하셨다!”

그의 외침은 거대한 폭풍처럼 종남파 전체를 강타해 버렸다.

그 제자와 함께 풍운각에 들어왔던 다른 사람들은 그저 어안이 벙벙하여 서로 얼굴을 마주 쳐다볼 뿐이었다.

그것이 바로 종남파의 운명을 바꾸고 마일보의 운명까지 바꾼 문제의 그 일이었다.

육천기의 말이 끝날 때까지 묵묵히 듣고 있던 진산월이 불쑥 물었다.

“육 궁주께선 당시의 일을 어떻게 그리도 자세히 알고 계시오?”

“마 조사께서 남기신 유품에 당시의 일을 세세하게 기록한 문서가 있었소.”

“그럼 그분께서도 그때 풍운각에 계셨던 것이오?”

“그건 아니오.”

“그렇다면 그분께서는 풍운각에서 벌어진 일을 어떻게 아시게 된 것이오?”

“그때 풍운각에 들어간 사람은 모두 세 명이었는데, 그들 중 한 사람에게서 직접 들었다고 하셨소.”

“그들은 누구요?”

“풍운각을 지키고 있던 황조익(黃照翊), 장경각을 담당하는 서문명(徐文明), 그리고 풍운신룡의 제자인 조화(趙華)라는 분들이오. 그중 황조익이란 분에게서 직접 들었다고 기술되어 있소. 황조익은 풍운신룡의 사후에 그분의 거처를 조사하다가 문제의 일기장에 대한 풍운신룡의 기록을 발견했다고 하셨소.”

“그러면 그들 중 풍운신룡 담 조사의 몸을 처음 접한 사람은 조화라는 분이겠구려?”

“그렇소. 마 조사의 말씀으로는 풍운신룡께서 가장 아끼던 제자 중 한 사람이라고 하셨소.”

“그 후의 일은 어찌 되었소?”

“풍운신룡이 자진했다는 말에 모든 종남파의 문하들이 크게 흔들렸다고 하오. 그 와중에 장경각은 모두 불타서 대부분의 절학들이 소실되었고, 그에 충격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종남파를 떠났다고 하오. 마 조사께서는 원래 종남파를 떠날 생각은 없었는데, 그때 황조익이 죽은 것을 알고 떠날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고 하셨소.”

“황조익은 왜 죽은 것이오?”

“풍운신룡의 자진을 막지 못한 책임을 지고 자결한다는 유서가 발견되었다고 했소. 하나 마 조사께서는 황조익은 결코 자결할 사람이 아니라며 그의 죽음과 풍운신룡의 자결에 흑막이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셨소. 그런데 뒤이어 서문명 또한 자살한 시신으로 발견되고 조화는 아예 실종되어 버려 불안함을 느꼈다고 하셨소. 그 후로 이틀 동안에 풍운신룡의 죽음을 조사하던 그분의 제자들이 하나둘씩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되자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종남파를 떠나셨다고 하셨소.”

풍운신룡 담명의 죽음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전해들은 진산월은 한동안 복잡한 상념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문파의 부흥이라는 무거운 중압감을 벗어나 자유를 찾기 위해 암도를 뚫다가 자결한 것으로만 알고 있던 담명, 그의 죽음에 담긴 뜻밖의 비사(秘史)를 듣게 되니 숱한 의문이 떠올랐던 것이다.

담명은 과연 자진한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의 암습을 받은 것일까?

담명이 발견한 선배 고수의 일기장은 과연 진실일까? 아니면 그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누군가의 술책일까?

하정의가 만들었다는 종남파의 절학을 모은 밀실은 과연 실제로 존재하는 것일까?

그리고 육천기가 말한 이 모든 일이 사실이라면 대체 그 당시에는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이고, 그 일은 누가 주도한 것일까?

너무나 많은 의혹이 얽히고설킨 실타래처럼 늘어져 있었지만 어느 것 하나 속 시원하게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무엇보다 백 년이 훨씬 넘는 장구한 세월은 당시의 일에 대한 모든 단서를 스스로 깨끗하게 지워버린 것이다.

진산월은 하나씩 해결하자고 생각했다. 까마득한 오래전 일의 진상을 캐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자신은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만 하면 되는 것이다.

“마 조사께서 본 파를 떠나신 후 경요궁을 세우기까지의 과정을 알고 싶소.”

“마 조사께서는 원래 취선의 외가 쪽 인물이시오. 정확하게 말하면 취선께서 마 조사의 외증조부가 되시오. 그래서 대대로 취선의 절학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정통하게 되었소. 종남파를 떠날 때 그분은 취선의 절학 세 개를 들고 나오셨는데, 그것이 바로 취선호(醉仙呼), 용수각(龍鬚脚), 취공대산수(醉公大散手)의 삼대절학이었소.”

그 세 가지 절학에 대해서는 진산월도 이름으로만 알고 있었다.

취선 하정의는 종남오선 중 가장 무공이 떨어지는 인물로 알려져 있었으나, 그것은 다른 종남오선들이 워낙 뛰어난 절세의 고수들이기 때문이었다. 그의 무공 자체는 당시 무림의 최절정 고수들의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특히 그는 기행이 많은 만큼 무공에서도 남들이 사용하지 않는 특이한 기공들을 많이 익히고 그 자신이 창안하기도 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취선삼학(醉仙三學)이라 불리는 세 가지 무공이었다.

취선호는 술을 좋아하는 취선 하정의가 자신의 주기(酒氣)를 이용해 외부로 강기를 뿜어내는 특이한 기공으로, 그 기발한 상상력과 경이할 위력에 많은 무림인들을 경악케 했던 놀라운 무공이었다.

용수각 또한 술 취해 흐느적거리는 듯한 동작으로 칼날보다 예리한 발길질을 해대는 각법이었고, 취공대산수는 주정뱅이가 술김에 드잡이질을 할 때 사용하는 것처럼 투박하면서도 박투(搏鬪)의 오의를 담은 뛰어난 절학이었다.

그 무공들은 취선 하정의가 종남파의 무공들을 변형 발전시킨 것들로, 당시에는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켰었으나 하정의의 죽음이후 사라져 버려 그 후로는 아무도 익힌 사람이 없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지금은 종남파에서조차 이름으로만 간신히 기억하고 있을 뿐이었다.

“마 조사께서는 비록 취선의 삼대절학을 가지고 계셨으나, 풍운신룡의 죽음에 도사린 흑막의 배후자들이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생각에 함부로 그 무공을 남에게 선보일 수는 없었소. 그분까지 자칫 흉수에게 당하게 되면 취선의 절학은 영원히 사라지게 되는 것이니 말이오. 그분은 늘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면서 천하를 떠돌다가 결국 종남파에서 멀리 떨어진 사천까지 오게 되셨소. 그러다 우연히 대파산의 깊숙한 산자락에 경치가 좋고 인적을 찾기 힘든 곳을 발견하고 그곳을 거처로 삼으셨고, 그게 바로 경요궁의 시작인 셈이오.”

육천기는 품속에서 세 개의 얇은 책자들을 꺼내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이게 바로 취선의 삼대절학이오. 백 년 만에 다시 본래의 주인을 되찾게 되니 지하에 계신 마 조사께서도 진심으로 기뻐하실 것이오.”

진산월은 묵묵히 눈앞에 놓인 책자들을 내려다보았다.

<취선호.>

<용수각.>

<취공대산수.>

이름으로만 전해졌던 절전된 무공들이 실로 오랜만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 누렇게 변색된 책의 구석구석에 배어 있을 마일보의 근심과 시름이 눈앞에 선하게 보이는 듯했다.

“진 장문인께서 보셨던 천절뢰는 취선호의 변형이오. 원래 취선호는 몸속의 주기를 이용하는 것이라 술기운이 가득한 상태에서만 펼칠 수 있는 무공이었소. 이것을 본 궁의 역대 궁주들께서 정상적인 몸으로도 펼칠 수 있게 오랫동안 개량을 거듭하여 마침내 선사이셨던 천절신사께서 하나의 완성된 무공으로 만들어 낸 것이오. 본 궁의 다른 절학들인 창룡선풍각(蒼龍旋風脚)과 천룡십팔산수(天龍十八散手) 또한 그와 유사한 과정을 거쳐 본래의 모습을 많이 탈피한 상태요.”

진산월은 아마도 그것이 흑막의 배후자의 추적을 피하기 위한 마일보의 고육지책 때문이라고 생각했으나 굳이 그 점을 거론하지는 않았다.

“대파산으로 가던 도중 마 조사께서는 같은 종남파에 머물렀던 우정산(禹丁山)이란 분을 만나게 되셨소. 두 분은 의기투합하여 서로 멀지 않은 곳에 거처를 정하게 되었는데, 그 우정산이란 분이 바로 비류문의 창시자이시오. 그분은 종남파의 장경각이 불탈 때 장경각에 뛰어들어 불을 끄다가 청명십이식(靑明十二式)과 용음비(龍吟匕)라는 무공비급을 얻게 되었다고 하셨소.”

“어쩐지 그럴 것 같았소. 그때 단후명이란 분의 무공인 청류장과 명류권에는 본 파 무공의 흔적이 너무 짙게 보여서 혹시 오래전에 실전된 청명십이식의 변형이 아닐까 생각했었소.”

“맞게 보셨소. 비류문의 창시자께서는 청명십이식과 용음비를 분해하고 몇 가지 초식을 덧붙여 각기 청류장과 표류보, 명류권을 만드신 것이오. 이미 비류문은 단 총관 외에는 후인이 없어 거의 멸문된 상태이지만, 단 총관도 곧 진 장문인을 찾아와 사실을 고하고 사죄할 것이오.”

진산월로서는 묻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이 있었다.

“그 일이 있은 후 백 년이 훨씬 넘는 세월이 흘렀소. 그런데 지금까지 그에 대한 아무런 내색도 없다가 이제 와서 그 일을 밝히는 이유가 무언지 알 수 있겠소?”

육천기의 얼굴에 한 줄기 씁쓸한 빛이 떠올랐다.

“그건 모두 조사의 유지 때문이었소. 조사께서는 풍운신룡의 죽음과 연이은 제자들의 변사가 누군가의 음모 때문이라면 종남파가 재기할 길은 거의 없다고 판단하셨소. 그분이 머나먼 대파산까지 와서 경요궁을 창건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소. 그래서 만일 종남파가 계속 유지되더라도 그들이 먼저 찾아오지 않는 한 굳이 나설 필요는 없다고 하셨소. 하나 종남파가 완벽하게 부흥하여 다시 예전의 모습을 되찾는다면, 반드시 찾아가서 당시의 일을 자세히 고하고 그들의 심판을 받으라고 하셨소.”

진산월은 그런 유지를 내린 마일보의 심정을 일견 이해할 것도 같았으나, 한편으로는 입맛이 쓸 수밖에 없었다.

마일보의 말대로라면 종남파가 영락하여 본래의 모습을 되찾지 못하면 영원히 이번 일을 미궁에 빠뜨리고 모른 척했을 거라는 뜻이 아닌가? 물론 사부의 갑작스런 죽음과 사형제들의 변사에 놀라고 당황한 마일보가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는 사정은 알고 있었으나, 다시 한 번 인심의 혹독함을 절감하게 된 진산월이었다.

그나마 그 덕분에 풍운신룡 담명의 죽음에 대한 의혹을 가지게 되고 취선의 삼대절학을 되찾게 된 것이 소득이라면 소득이었다.

육천기 또한 그 점을 알고 있었는지 표정이 그다지 밝지 않았다. 그로서는 진산월이 어떠한 판단을 내리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육천기는 한 차례 무거운 한숨을 내쉬더니 돌연 그 자리에서 일어나 진산월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종남파 십육대 제자 마일보의 사대손이며 경요궁의 오대 궁주인 육천기가 종남파의 장문인에게 삼가 죄를 청합니다. 선대(先代)의 일에 대한 어떠한 죄과라도 기꺼이 달게 받겠으니 장문인께서는 하명하십시오.”

진산월은 한동안 무릎을 꿇은 채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육천기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오래전에 벌어진 일이었으나 지금까지도 그 인연은 이어지고 있었다. 비록 비비 꼬인 인연이라고는 하나 그 인연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있음을 기뻐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토록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자신들의 본류를 잊지 않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자신들의 할 도리를 다한 셈이었다.

진산월은 마침내 묵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종남파 십육대 제자 마일보의 사대손인 육천기에게 종남파의 장문인이 명한다. 육천기를 종남파의 이십 대 제자로 인정하며, 경요궁을 종남파의 속문(俗門)으로 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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