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9권 절대암류(絶代暗流)편 : 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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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29권 절대암류(絶代暗流)편 : 7화


제 298장 무용불출(無用不出)

천수관음은 지난 백 년간 강호에 배출된 여고수 중 최고의 고수로 인정받고 있었다. 특히 그녀는 암기 무공뿐 아니라 수공(手功)에도 뛰어나서, 능히 무림구봉의 한자리를 차지할 만하다는 것이 그녀를 알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한결같은 의견이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무림구봉에 속하지 못한 것은 그녀가 여인의 몸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워낙 강호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적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래서인지 그녀에 대해 알려진 것도 단편적인 사실들뿐이었고, 그 때문에 그녀는 더욱 신비스런 존재로 부각되었다.

진산월이 대략 알기로도 그녀의 나이는 육십 대였고, 강호에서의 배분도 무척 높은 편이었다. 그러니 진산월이 아무리 일파의 장문인이라고 해도 그녀를 선배로서 예우해주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까지 어려운 걸음을 해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아닐세. 일전에 자네에게 몇 가지 신세진 것도 있어서 그렇지 않아도 조만간 자네를 보려고 했었네.”

“신세라니 무슨 말씀을…….”

“예전에 넷째 아이의 부탁을 들어주었지 않나? 그리고 며칠 전에는 큰아이가 자네 덕분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고 하더군.”

진산월은 천수관음이 말한 부탁이라는 것이 비매 냉옥환의 일임을 알았다. 구궁보에서 냉옥환은 진산월에게 모용단죽의 안위를 파악하기 위해 그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해달라고 했고, 진산월은 별다른 고민 없이 그녀의 부탁을 수락했다. 그때 모용단죽에게 들은 문구가 ‘서풍취녹상’이었는데, 냉옥환은 그 시구가 자신의 사부인 천수관음을 가리키는 것이며 천수관음은 늘 붉은 치마를 입고 다니기에 지인들 사이에서 ‘서풍취홍상’이라고 불린다고 했다.

지금 보니 확실히 천수관음은 붉은 치마를 입고 있었다. 선연하도록 진한 붉은 색의 치마는 그녀의 하얀 피부를 더욱 두드러지게 보이도록 했다.

“냉 소저의 부탁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능 여협의 일은 다분히 우연적인 일이었고, 그 과정에서 벌어진 자연스런 결과였을 뿐입니다.”

진산월이 겸양의 말을 하자 천수관음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어쨌든 나로서는 자네에게 두 번이나 신세를 진 셈이지. 신세를 졌으면 갚아야 하는 게 강호의 도리일세. 이번의 만남으로 한 번의 신세는 갚은 것으로 해주면 고맙겠네.”

진산월도 더 이상은 고사(固辭)를 하지 않았다. 그것은 자칫 천수관음을 모욕하는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제가 오히려 감사드려야겠군요. 사소한 일로 너무 큰 보답을 받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일의 가치는 그 일을 부탁한 사람이 결정하는 것일세. 그 두 가지 일은 모두 내게는 아주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네. 덕분에 나는 몇 년 동안 가지고 있던 큰 의문을 풀게 되었고, 자식과도 같이 소중한 제자를 잃지 않게 되었지.”

진산월은 냉옥환에게 처음 부탁을 의뢰받았을 때부터 가지고 있던 의문이 다시 들었다.

“오랜 의문을 풀게 되었다는 말씀의 자세한 사정을 알 수 있겠습니까?”

천수관음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것 같더니 이내 마음을 결정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도 연관된 문제이니 자네에게도 알 권리가 있겠지.”

진산월은 조용히 그녀의 말에 신경을 집중했다.

“모용 대협과 나는 오래전부터 잘 알던 사이였네. 같은 고향에서 자랐고, 한때는 마음의 교감을 나눈 적도 있었지. 점차 나이를 먹게 되면서 여러 가지 일들로 멀리 떨어지게 되었지만, 그래도 가끔은 연락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안부를 묻고는 했었네.”

모용단죽과 천수관음이 한때 정혼을 했을 정도로 친밀한 관계였다는 것은 진산월도 냉옥환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그것을 당사자의 입으로 듣게 되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특히 마음의 교감을 나눈 사이라는 말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자신에게도 그와 같은 관계의 여인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몇 년 전부터 그와의 연락이 두절되었네. 그는 분명 구궁보에 있는데, 도무지 그와 연락을 할 수가 없었네. 그래서 나는 넷째 아이를 구궁보로 보냈지. 그간의 사정은 자네도 넷째에게 들어서 알고 있을 걸세.”

“그렇습니다.”

“넷째도 그에게 접근할 수 없자 나는 구궁보에 있는 그의 진위(眞僞) 여부를 진지하게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지. 그밖에는 그가 나와의 연락을 피할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거든. 하지만 모용 대협의 진위를 밝혀내는 일은 무척이나 위험천만하고 어려운 일이었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당대 무림의 제일인자이자 전설과도 같은 존재인 모용 대협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의심한다는 것을 누구에게 말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그 진위를 가려내기 위해 어떤 방법을 써야 할지 너무나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만에 하나 제대로 진위를 가리기도 전에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오히려 천수관음과 냉옥환이 엄청난 역풍을 맞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모용 대협의 진위를 가리는 일은 영원히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을 것이다.

천수관음의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차분한 음성이 어두운 장내를 잔잔하게 울렸다.

“나로서는 여러 가지 방법 중 가장 안전하면서도 확실한 길을 찾을 수밖에 없었네. 그때 자네가 눈에 띄었지. 자네가 천룡궤를 가지고 있는 한 모용 대협은 자네를 만날 수밖에 없었네. 그래서 자네에게 부탁을 한 것일세.”

“제가 천룡궤를 가지고 있는 것과 모용 대협을 만나는 일이 무슨 상관관계가 있습니까?”

“천룡궤는 중요한 물건일세. 모용 대협이 진짜 본인이든 아니면 누군가가 변장한 것이든 천룡궤를 반드시 손에 넣으려고 할 걸세. 그런데 자네가 스스로 그것을 가지고 왔으니 만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겠나?”

진산월은 천룡궤에 대한 많은 말들을 들어왔지만 막상 그에 대한 애착이나 특별한 호기심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더구나 지금은 그 물건을 애초에 목적했던 사람에게 전한 후였기에 별다른 관심도 없었다. 그런데 천수관음의 입에서 이런 말을 듣게 되자 마음 한구석에 껄끄러운 점이 생겨났다.

‘천룡궤가 그처럼 중요한 물건이라면 석 장주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생면부지의 나에게 그런 물건을 맡긴 것일까? 그리고 만약 모용 대협이 가짜라면 결과적으로 나는 석 장주의 부탁을 지키지 못한 셈이 되어 버린 게 아닌가?’

진산월이 다소 떨떠름한 기분에 젖어 있을 때 천수관음의 말이 이어졌다.

“자네 덕분에 나는 간접적으로나마 모용 대협과 접할 수 있게 되었고, 그의 진위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답을 얻을 수 있었지.”

“‘서풍취(西風吹)’에 그처럼 큰 의미가 담겨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대답이 붉은 치마가 아니라는 것만으로 그런 확신을 하신 이유가 궁금하군요.”

천수관음은 묘하게 웃었다.

“중요한 건 서풍에 휘날리는 게 녹색 치마였는지 붉은 치마였는지가 아닐세.”

진산월은 더욱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럼 무엇이 중요한지요?”

“그 질문은 엄밀히 말하면 일종의 함정이었네. 그가 어떤 대답을 하든 나로서는 그가 진짜 모용 대협이 아니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지.”

진산월은 총명한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질문을 한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아니지. 그 질문은 질문 자체가 하나의 시험이었네. 그가 만약 진짜 모용 대협이었다면 그 질문을 들은 순간 대답을 하기보다는 오히려 질문을 던져왔을 것이네.”

순간 진산월은 자신도 모르게 부지불식간에 나직한 탄성을 터뜨렸다. 천수관음의 말 속에 숨은 내용을 비로소 알아차린 것이다.

“아!”

“이제야 자네도 깨달은 모양이군.”

진산월은 경탄하는 눈으로 천수관음을 바라보았다.

“그건 정말 오묘한 방법이로군요.”

서로 친밀한 두 사람이 자신들만 알고 있는 은밀한 비밀을 제삼자(第三者)가 묻는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겠는가? 그 질문에 대답하기보다는 어떻게 제삼자가 그 비밀을 알고 있는지 되묻는 것이 당연한 순리 아니겠는가?

‘서풍에 휘날리는 붉은 치마’는 모용단죽과 천수관음을 비롯한 극소수의 친한 사람들만이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전혀 그 범주에 들지 않은 진산월이 갑자기 이 내용에 대해 묻는다면 모용단죽으로서는 진산월이 어떻게 그 점에 대해 알고 있는지 묻거나 전에 천수관음을 만난 적이 있는지에 대해 알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진산월이 만난 모용단죽은 그 점에 대해 묻기는커녕 단순히 떠오르는 문구로 대답을 했던 것이다.

질문에 질문으로 되묻지 않는 것으로 천수관음은 진산월이 만난 모용단죽이 가짜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대답 자체도 잘못된 것이었기에 진위 여부를 더욱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정말 인간의 심리에 정통하지 않고서는 떠올릴 수 없는 절묘한 수법이었다.

진산월조차도 천수관음의 말을 듣고 거듭 생각해 보고 나서야 그 속에 숨은 의미를 간신히 파악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니 가짜 모용단죽이 아무리 그 질문에 의심을 가지고 나름대로 완벽한 대답을 했더라도 질문 자체가 가지는 교묘한 함정을 피해갈 수 없었던 것이다.

강호 무림의 제일인자로 군림하고 있던 모용단죽이 사실은 가짜였다!

실로 경천동지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무림인들이 알게 된 다면 경악을 금치 못했을 엄청난 비밀을 알게 된 진산월은 수없이 떠오르는 크고 작은 의문에 잠시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

모용단죽은 과연 언제부터 가짜로 바뀐 것일까?

진짜 모용단죽은 과연 어떻게 되었으며, 그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가짜 모용단죽은 대체 무슨 수로 진짜 모용단죽으로 변할 수 있었으며, 그 의도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의 진정한 정체는 과연 누구인가?

모용 대협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아왔던 모용봉은 과연 모용 대협이 가짜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가짜 모용 대협은 어떻게 모용봉의 눈마저 완벽하게 속일 수 있었을까? 그리고 만약 알고 있다면 모용봉은 왜 그 사실을 드러내지 않은 것일까?

모용봉의 생일에 벌어졌던 유중악을 둘러싼 의문의 살인사건은 혹시 그 일과 모종의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많은 의문이 떠올랐으나 어느 것 하나 짐작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천수관음은 복잡한 상념에 잠겨 있는 진산월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도 머릿속이 복잡한 모양이군. 나도 마찬가지일세. 하지만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만에 하나 그가 가짜일지도 모른다는 가정 하에 많은 고민을 해왔지.”

“그래서 해답을 찾으셨습니까?”

천수관음의 눈이 그를 보며 웃고 있었다.

“나를 너무 대단하게 보는군. 만약 그랬다면 자네에게 그런 부탁도 하지 않았을 걸세. 아무튼 자네 덕분에 모용 대협이 가짜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 적어도 몇 가지 일에 관해서는 약간의 진척을 볼 수 있었지.”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모용 대협이 나와 연락이 끊어진 것은 정확히 사 년 이 개월 전이었네. 다시 말해서 사 년 전에 소림사에서 무림대집회가 벌어지기 전에 모용 대협은 이미 가짜였을 확률이 높다는 것이지.”

진산월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눈을 빛냈다.

“이번 일에 서장 무림이 관련이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시기상으로 충분히 의심해 볼 수 있는 일이겠지. 둘째로 모용봉은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라는 점일세.”

그 점도 충분히 수긍이 가는 부분이었다. 사 년이라는 세월 동안 지척에서 모시는 할아버지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분하지 못할 모용봉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대체 모용봉은 왜 그 점에 대해 철저히 함구했던 것일까?

“셋째로 모용봉이 그 사실을 외부에 발설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모용 대협은 아직 생존해 있으며, 적어도 그의 생사(生死)를 확인할 방법을 모용봉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

“가짜가 진짜 모용 대협을 인질로 모용 공자를 위협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는군요.”

“내가 알고 있는 모용봉은 그것 때문이 아니라면 그런 짓을 할 이유가 없는 아이일세.”

천수관음의 음성은 비록 나직하고 차분했으나 굳은 확신이 담겨 있어 드는 사람의 마음에 신뢰감을 심어주는 것이었다.

진산월은 자신이 모용봉을 만났던 순간을 떠올려 보았으나 그에 대한 어떠한 단서도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당시의 그는 임영옥에 대한 일에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기에 모용봉의 행동이나 말에서 특별히 이상한 점을 느낄 수 없었다. 다만 모용단죽을 만나기 직전에 그가 자신에게 모용단죽을 만나고 나면 곧바로 구궁보를 떠나라고 강요한 것이 어떤 실마리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을 뿐이다. 하나 그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넷째도 있습니까?”

진산월이 묻자 천수관음은 그를 가만히 지켜보더니 조용히 미소 지었다. 사람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묘한 의미를 지닌 웃음이었다.

“자네는 욕심이 많군. 한 가지만 더 말해주지. 만약 누군가가 구궁보에 들어가서 모용 대협을 강제할 수 있다면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은 천하에 결코 많지 않을 것이네. 그런 능력의 소유자가 굳이 발각될 위험을 무릅쓰고 모용 대협으로 행세한 이유가 있을 걸세.”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자네가 맞혀보게.”

의미심장한 천수관음의 말에 진산월의 표정이 조금 변했다.

“천룡궤 때문이란 말씀이십니까?”

“역시 눈치도 빠르군. 자네와 이야기하는 건 편하기도 하지만 너무 날카로워서 조심스러워지기도 하는군. 나는 그것조차 재미있게 느껴지지만 말일세.”

천수관음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을 했으나, 진산월은 전혀 다른 의문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제가 천룡궤를 가지고 모용 대협을 찾아갈 것을 어떻게 알고 가짜가 사 년 전부터 모용 대협의 행세를 했겠습니까?”

“중요한 건 누가 가지고 왔느냐가 아닐세. 그저 언젠가는 천룡궤가 모용 대협에게 전해진다는 확신만 있으면 되는 일이네. 모용 대협으로 변해서 기다리고 있으면 언제 누가 가져오든 천룡궤를 받을 수 있을 테니 말일세.”

“천룡궤가 반드시 모용 대협에게 전해져야 할 이유가 있단 말입니까?”

“천룡궤는 천룡객의 물건일세. 그러니 언젠가는 원주인에게 돌아가는 것이 당연한 이치 아니겠나?”

진산월은 깜짝 놀랐다.

“천룡객이 모용 대협이란 말씀이십니까?”

“모용 대협은 천룡객의 하나뿐인 제자일세. 당금 무림에서 천룡객의 행방을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지. 그러니 천룡궤를 천룡객에게 전하고 싶으면 모용 대협에게 주는 수밖에 없지 않겠나?”

진산월은 다시 의문이 들었다.

“천룡궤가 반드시 천룡객에게 돌아가야 할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그거야 물건을 지니고 있던 당사자의 마음이니 내가 알 수야 없지. 다만 짐작은 해볼 수 있네.”

“그게 무엇입니까?”

“천룡궤를 소지하고 있던 사람은 천룡객의 아내였던 철혈홍안이었네. 그녀는 아마도 그런 식으로라도 천룡객의 행방을 알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군. 사람은 나이를 먹으면 헤어졌던 남편이 보고 싶어질 수도 있는 법이니 말일세.”

진산월은 직감적으로 천수관음이 모든 사실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다. 아마 천수관음은 철혈홍안이 천룡객에게 천룡궤를 돌려주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있음이 분명했다.

하나 그녀가 밝히지 않는데 굳이 그 이유를 캐묻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었다. 대신에 그는 다른 것을 물어보았다.

“그렇다면 가짜 모용 대협은 그들 부부의 일에 대해 상세하게 알고 있는 인물이겠군요? 그래서 모용 대협에게 언젠가는 천룡궤가 전해질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게 아닙니까?”

그의 날카로운 질문에 천수관음은 다시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 일에 대해서는 나중에 좀 더 분명해지면 알려주겠네. 그보다 이제 자네 일을 이야기해 보세. 내일 있을 천수나타와의 승부 때문에 나를 보자고 한 게 아닌가?”

천수관음이 교묘하게 화제를 돌리자 진산월은 마음속에 떠오르는 많은 의문들을 잠시 접어둘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수천 리 밖에 있는 모용단죽의 진위 여부보다는 당장 코앞으로 닥친 천수나타와의 비무가 더욱 중요하게 생각되었던 것이다.

천수관음 또한 지금까지와는 달리 표정이 한층 더 진지해졌다.

“사실 자네를 만나러 온 것은 자네의 부탁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네에게 한 가지 사실을 확인받기 위한 목적도 있다네.”

“그것이 무엇입니까?”

“둘째에게 듣기로는 자네는 당각이 던진 암기에서 어떤 소리도 듣지 못했을 뿐 아니라 어떠한 기척이나 흔적도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하더군. 그래서 그 아이는 당각이 무적경에 오른 것이 아닐까 의심하는 것 같았네.”

진산월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적경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지만, 제가 그의 암기에서 어떤 소리나 흔적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자네에게는 다소 화가 나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자네의 말을 반신반의하고 있다네.”

진산월은 화를 내지 않았다. 다만 침착한 눈으로 천수관음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을 뿐이다.

“제가 육 소저에게 거짓말을 했으리라고 보십니까?”

천수관음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어렸다.

“자네가 그렇게 쳐다보니 무섭군. 확실히 대단한 무형지기일세. 내가 자네의 말을 반신반의한다는 건, 자네는 비록 사실을 말했을지라도 그게 꼭 진실이라는 법은 없다는 의미였네.”

진산월은 누구보다 총명한 사람이었으므로 그녀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쉽게 알아차렸다.

“제가 오해하거나 착각했을 수도 있다는 말씀이로군요.”

“자네는 암기 무공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

“거의 알지 못합니다.”

“그럴 것 같았네. 지금 자네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은 강호에서 이름난 암기 무공의 고수일세. 그런데 자네는 나에 대한 대비를 전혀 하지 않고 있더군.”

진산월은 수중에 차고 있는 용영검의 손잡이를 살짝 건드렸다.

“대비라면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천수관음은 고개를 저었다.

“일반적인 고수라면 자네가 검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비가 될 수 있겠지. 하지만 암기 무공의 고수에게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네. 예를 들면 이런 것이지.”

천수관음은 두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그녀의 두 손이 전혀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는데도 진산월은 오른쪽으로 머리를 젖혔다.

무언가 보이지 않는 희미한 기운이 그의 귓전을 스치고 지나갔다.

“잘 피하는군. 확실히 자네의 무공은 도저히 그 나이대의 고수로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놀라운 것일세. 하지만 암기나 빠른 무공에 대한 대비는 부족하네. 조금 전에 나는 두 번의 무형기를 발출했는데, 자네는 하나는 피했지만 다른 하나는 피하지 못했군.”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와 그녀 사이의 공간에 작은 파동이 일어났다. 그 파동은 이내 사라져 버렸지만, 그 여운은 오래도록 방 안을 떠돌았다.

“자네는 무형지기로 내 두 번째 무형기를 막았지만, 그건 내가 단지 일성(一成)의 공력만을 사용했기 때문일세. 내가 전력을 다하거나, 무형기가 아닌 암기를 발출했다면 자네는 상당히 곤궁에 처했을 걸세.”

“제가 암기 무공에 대한 대비가 부족하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암기에 대한 견식도 많이 모자라고, 그에 대한 경험도 거의 없는 편이지요.”

“사실 그런 건 어려서부터 체계적인 훈련이 필요한 법이네. 그런데 종남파에는 그에 대한 훈련이나 교습 방법이 없는 것 같군.”

진산월도 그 점이 아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말대로 종남파에는 암기 무공에 대한 어떠한 대비책도 전해지지 않고 있었다. 다른 문파에서는 제자의 무공이 일정 수준에 오르면 암기와 독공(毒功), 사술(邪術) 등 다양한 방면의 무공에 대한 훈련과 교육을 시킨다. 하나 종남파는 기산취악 이후 그러한 훈련이나 교육과정이 사라져 버렸다.

불과 열 명 남짓한 제자들만으로는 생존하기에 급급한 형편이었다. 자연히 체계적인 교육과정 같은 것이 남아 있을 리 없었다.

“강호의 고수들은 암기 무공을 익힌 자를 만나게 되면 일단 자신의 기를 주위에 퍼뜨려 놓는다네. 그자가 적이든 우호적인 인물이든 반드시 그러한 행동을 하지. 그래야만 갑작스럽게 발출되는 암기에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일세. 그러한 행동은 몸에 익어서 특별히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펼칠 수 있어야 하네. 그것은 아주 오랜 동안의 훈련과 반복된 연습을 필요로 하는 것이지.”

“제가 암기 무공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천수나타의 상태를 잘못 이해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시는 거로군요.”

“그걸 알기 위해서 자네에게 꼭 확인하고 싶었던 걸세.”

“제가 어떻게 해드리면 되겠습니까?”

천수관음은 지금까지의 웃음기 있던 모습과는 달리 진지한 표정으로 진산월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를 만났을 때부터 그가 물러날 때까지의 일을 최대한 자세히 이야기해주게.”

천수관음의 말은 자칫 진산월에게 모욕적인 일로 생각될 수도 있었다. 하나 진산월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담담한 음성으로 그때의 일을 말해주었다. 자신의 생각을 철저히 배제한 채 조금도 가감이 없는 말이어서 무미건조할 정도였으나, 천수관음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그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었다.

그의 말이 모두 끝나자 천수관음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눈앞에서 내가 직접 본 듯한 설명이군. 자네가 얼마나 관찰력이 예민한 사람인지 알겠네.”

“제 말만으로 확인이 되십니까?”

“그렇다네.”

“어떤 결론을 내리셨습니까?”

“천수나타는 완전한 무적경에 이르지 못했네.”

천수관음의 단정적인 말에 진산월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셨습니까?”

“천수나타가 던진 세 번째 암기에 자네는 아무런 흔적이나 소리도 듣지 못했다고 했네. 그런데 자네 사매는 알아차렸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천수나타가 진정한 무적경에 올랐다면 자네의 사매도 알아차릴 수 없었을 걸세.”

“……!”

“자네 사매는 아마 음공을 익히고 있거나 선천적으로 음기가 충만한 여인일 걸세. 음공을 익히면 신체의 감각이 예민해져서 보거나 듣지 못하는 기척도 피부에 닿는 공기의 파동만으로 알아차릴 수 있지. 무적경이란 그러한 파동조차 느낄 수 없는 완벽한 경지일세.”

“인간으로서 그러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습니까?”

“당연히 안 되지. 그건 단지 이론상으로만 존재하는 경지일 세. 암기 무공을 익히는 자들이 순수하게 상상만으로 지어낸 미지의 영역이란 말일세. 그래서 둘째가 자네의 말을 듣고 천수나타가 무적경에 올랐다고 했을 때 나는 반신반의했던 것일세. 그건 아직은 현세(現世)의 누구도 도달할 수 없는 것일세. 아무리 천수나타라고 해도 말이지.”

“후대에는 가능하다는 말씀이십니까?”

천수관음은 모처럼 살며시 미소 지었다.

“후대의 일을 누가 알겠는가? 아마 계속 강호의 무공이 발전한다면 이론상으로는 가능하지 않겠는가? 어차피 무적경 자체도 이론상의 경지이니 말일세.”

“그런데 천수나타의 암기는 정말로 아무런 소리나 기척도 알아차릴 수 없었습니다.”

“그는 무적경에 이르지는 못했네. 하지만 그와 유사한 경지에는 도달한 것 같군.”

“그런 경지도 있습니까?”

“그거야 아무 명칭이나 붙이면 되는 일 아닌가? 무음경이니 무적경이니 하는 것도 마찬가지일세. 석년에 그와 나는 비슷한 시기에 무음경을 이루었네. 그는 내가 소리 없이 암기를 발출하는 경지에 도달했다는 말을 듣고 나를 찾아왔네. 자신도 얼마 전에 무음경을 이루었다며 서로의 실력을 비교해보자는 것이었지.”

천수관음이 한때 천수나타와 의남매를 맺을 정도로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다는 것은 진산월도 정소소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다. 하나 무슨 연유에서인지 두 사람은 급격히 사이가 벌어져 나중에는 완전히 등을 돌리고 말았다고 했다.

천수관음의 얼굴에 한 줄기 씁쓸한 빛이 떠올랐다.

“천수나타는 호승심이 강한 사람이었네. 그는 늘 내가 자신과 비교되는 것에 신경을 쓰고 있었지. 나는 몇 번이나 그에게 당신이 더 뛰어난 고수라고 말했으나, 그는 겉으로는 대범한 척 웃어도 속으로는 나에 대한 경쟁심을 가지고 있었네. 그런데 내가 무음경에 올랐다는 말을 듣자 더 이상 호승심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네.”

“그래서 그와 비무를 하셨습니까?”

“몇 번이나 그를 피했지만 그는 집요했네. 나중에는 내 제자들에게까지 손을 쓰려고 해서 나도 더 이상은 피할 수 없었네.”

그녀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암기 무공의 고수들끼리의 비무란 사실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일세. 암기 무공이란 결국은 사람을 가장 빠르고 효과적으로 죽이는 수법일세. 그런 무공의 고수들이 싸운다면 어찌 되겠나? 둘 중 하나가 죽어야만 승부가 가려질 걸세. 그러니 그건 비무가 아니라 결투라고 해야 옳겠지.”

“그래서 피하신 거로군요.”

“우리 두 사람이 전력을 다해 실력을 내보인다면 둘 중 한 사람은 반드시 죽게 되네. 그건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지. 그러니 내가 어찌 그와 싸울 수 있겠나?”

“하지만 천수나타는…….”

“그의 의중이야 알 수 없지. 아마 그도 비슷한 생각은 했을 거야. 하지만 불타는 호승심이 그런 우려를 눌러버린 것이지. 아무튼 나로서는 어쩔 수 없이 그와 손속을 겨루어야만 했네. 우리는 단 일초만 쓰기로 약조했으나, 결과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네.”

천수관음의 시선이 진산월의 두 눈에 고정되었다.

“그 싸움이 어떻게 되었을 것 같나?”

“제가 어찌 감히 예상할 수 있겠습니까?”

천수관음의 고요한 눈에 짓궂은 장난기가 감돌았다.

“아니야. 자네라면 충분히 결과를 맞힐 수 있을 걸세. 한 번 맞혀보게. 정확하게 맞추면 무음경의 가장 큰 비밀 한 가지를 알려주지.”

진산월의 눈이 번쩍 빛났다.

“무음경의 가장 큰 비밀이라니요?”

“어떻게 소리를 내지 않고 암기를 발출할 수 있는지 알려주겠다는 것일세.”

진산월은 뜻밖의 말에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중요한 걸 제게 알려주셔도 됩니까?”

“비밀은 비밀이지. 하나 경험이 풍부하고 일정 수준 이상에 오른 강호의 절정고수들은 대부분이 알고 있는 내용이라 반드시 숨겨야 할 만큼 특별한 비밀이라고 할 수도 없네. 다들 알음알음 알고 있으면서도 겉으로 내색을 안 할 뿐이지. 모르는 척 자기들만 알고 있다가 정말 아끼는 제자나 후인(後人)에게만 몰래 가르쳐 준단 말이지. 그게 강호에서 말하는 비전(秘傳)이 탄생되는 과정일세.”

진산월로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비밀이 그렇게 반공개적으로 알려져도 되는 건지 모르겠군요.”

천수관음은 입을 가리고 조용히 웃었다.

“호호. 무음경의 비밀이 퍼지면 내가 곤란할 것 같아서 그런가? 자네가 무공은 대단할지 몰라도 아직 강호의 생리에 대해서 잘 모르는군. 진짜 곤란한 게 어떤 건지 아나?”

“어떤 것입니까?”

“무음경에 대한 비밀을 아무도 몰라서 모든 강호인들이 무음경의 고수를 두려워하게 되는 것일세. 그렇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아는가?”

“……!”

“강호인들은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나를 공적(公敵)으로 몰아서 처단하거나 함정에 빠뜨려 살해하려 할 걸세. 미지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은 그처럼 무서운 것일세.”

충격적인 말에 진산월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네도 기억해두게. 강호인들이 자네에게 성원을 보내는 것은 자네가 명문정파인 종남파의 장문인이기 때문일세. 자네의 무공 연원에 대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자네를 대단하게 생각하면서도 자네에게 미지의 공포를 느끼지 않는 것일세. 만약 강호에 정체 모를 신비의 고수가 나타나면 그의 무공 내력이나 정체가 알려지기 전에는 모두들 그를 경계하게 될 걸세. 그의 무공이 높을수록 경계심도 높아지고 공포심도 커지게 되지. 그러다 마침내는 파국이 닥치게 되는 것일세. 아니면 그 전에 그의 무공에 대한 비밀이 밝혀지든지.”

“…….”

“강호란 움직이는 생물 같아서 독불장군은 견딜 수가 없는 곳일세. 그래서 무음경에 대한 비밀도 절정고수들 사이에 알려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일세. 덕분에 무음경의 고수를 대단하게 여기면서도 절대적으로 두려워해야 할 존재로는 생각하지 않게 되었지. 그게 모두를 위해 좋은 방법일세.”

진산월은 혹시 무음경의 비밀을 절정고수들에게 퍼뜨린 사람이 천수관음 본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천수관음이 아니더라도 처음 무음경에 오른 누군가가 그런 비밀을 조심스레 퍼뜨렸을 가능성이 높았다.

“단순히 비밀 하나 알았다고 무음경의 고수가 던지는 암기를 피할 수는 없지. 다만 아무것도 모르는 것과 중요한 비밀 하나를 아는 것은 인식에 현격한 차이가 있네. 만약 천수나타가 진정한 무적경에 올랐다면 그의 주변인들부터 그를 가만두지 않았을 걸세. 하물며 그가 속한 쾌의당에서 내버려 둘 리가 없네. 그들은 비슷한 목적을 가진 인물들이 모인 느슨한 연합체여서 조직에 대한 충성도나 결집력이 상당히 미약하고 개인적인 성향이 강한 편이지.”

진산월은 천수관음의 말에 내심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확실히 강호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그와 유사한 일들이 적지 않게 일어났던 것이다.

“이제 말해보게. 천수나타와 나와의 싸움이 어떻게 되었을 것 같나?”

그녀는 마치 이래도 말하지 않을 테냐고 묻는 것처럼 진산월을 보며 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나이답지 않게 짓궂은 그녀의 모습에 진산월은 고소를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저로서는 손해나는 일이 아니니 말씀드리지요. 제 생각에는 겉으로는 무승부지만, 천수나타는 본인이 졌다고 판단하는 결과가 나왔을 것 같습니다.”

천수관음의 눈이 어느 때보다 영롱하게 반짝거렸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결과가 어느 한쪽으로 기울었다면 선배님 말씀대로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살아 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단순한 무승부라면 그 후 두 사람이 서로 갈라서는 일은 없었을 거라고 생각되는군요.”

“천수나타가 스스로 졌다고 판단한다는 근거는 무엇인가?”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두 분은 지금까지도 친분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겁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지 않겠나?”

“제가 본 선배님이라면 그 정도 일로 친분을 깨실 분 같지 않군요.”

그 말에 천수관음은 나직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호호.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것 같군. 진 장문인은 틀림없이 따르는 여인들이 적지 않을 걸세. 무뚝뚝한 것 같으면서도 의외로 사람의 마음을 잘 헤아리니 말일세.”

“그렇지도 않습니다.”

“어쨌든 정확한 답변일세. 대충 비슷하면 맞는 것으로 하려고 했는데, 너무 정확해서 오히려 당황했네. 내 암기는 천수나타의 옆구리를 가격했지만, 천수나타는 그러지 못했지. 그의 암기는 내 신발코를 맞혔네.”

“그런데 무승부가 되었습니까?”

“그의 암기가 내 암기보다 먼저 도착했네. 하지만 그는 내 몸을 맞히지 못했고, 나는 그의 몸을 정확히 맞혔으니 서로 비긴 것으로 한 것이지.”

그 정도면 천수나타가 스스로 패배했다고 판단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나 천수관음의 생각은 달랐다.

“사실 천수나타의 암기는 치명적인 살상력이 있네. 일단 격중 되면 반드시 상대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위력이 있지. 그래서 천수나타는 막상 나와 겨루게 되자 자신의 전력을 기울일 수 없었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내 신발의 앞부분을 맞히는 것이 전부였네. 조금이라도 암기에 맞았다면 결과에 상관없이 나는 죽고 말았을 테니까.”

“…….”

“그에 비해 나는 싸우기 전에 암기의 날을 뭉툭하게 만들고 치명적인 상처를 주는 부위도 없애 버렸네. 그래서 자신 있게 그의 몸을 향해 암기를 던질 수 있었지. 대신에 암기의 속도가 떨어져 그의 암기보다 늦게 도착하게 된 것일세. 천수나타는 그 점을 참작해 무승부로 하자고 했지만, 내 몸을 향해 암기를 던지지 못한 자신의 무른 마음을 못내 자책했네.”

천수관음은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그 후로 다른 사람처럼 변해서 더욱 무서운 암기술을 익히기 위해 고련을 계속했지. 나와는 저절로 멀어져 버렸고, 나중에는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고 말았네. 그러다 그는 무음경의 상태로는 나를 완벽하게 꺾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전설로만 알려진 무적경을 이루기 위해 무모한 도전을 시작했네. 그때 그를 찾아온 사람이 있었네.”

“그가 누구입니까?”

“쾌의당주일세.”

진산월은 막연하게 그러지 않을까 생각했으나 막상 그녀의 입에서 쾌의당주라는 이름을 듣게 되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종남파와 쾌의당은 그동안 크고 작은 일로 자주 부딪쳐서 지금은 둘 중 하나가 없어지지 않는 한 도저히 한 하늘 아래 같이 살기 어려운 적대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누구도 정확한 이름은커녕 나이와 성별도 모른다는 신비의 쾌의당주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으로 듣게 되자 한편으로는 호기심이 생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 이름이 주는 무거운 중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쾌의당주는 그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네. 자신의 일을 도와주면 그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을 주겠다는 것일세. 쾌의당주가 주겠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겠나?”

이제는 진산월도 짐작할 수 있었다.

“탈혼검이군요.”

“그렇다네. 바로 탈혼검의 구결이지. 천수나타는 그 제안을 듣는 즉시 승낙을 했네. 그는 비록 탈혼검을 익힐 수는 없었지만 탈혼검의 핵심원리를 자신의 암기술에 응용해서 마침내 절대적인 수법을 만들어 냈네. 천수나타는 스스로의 그 수법을 ‘절대암류(絶代暗流)’라고 불렀네. 일단 암기를 발출하면 절대적인 암흑 속에 가려져 누구도 그 암기를 피할 수 없다고 하여 붙인 이름일세. 자네가 보았다는 그 세 번째 수법이 바로 절대암류를 사용한 것일세.”

절대암류!

무척이나 광오하면서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섬뜩함을 느끼게 하는 이름이었다. 무림에서 자신의 무공에 이런 식의 이름을 붙이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자칫 자신의 무공을 과신하여 과대망상에 빠졌다는 비웃음을 받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천수나타가 그만큼 자신의 무공에 절대적인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절대암류는 무적경에 근접하는 놀라운 경지이기는 하지만 완전한 무적경이라고 볼 수는 없네. 혹시나 하여 자네에게 확인한 것이지만, 천수나타는 아직 완벽하게 기척을 숨기지는 못한 것 같군.”

“하지만 제게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렇다. 진산월은 천수나타의 암기에서 아무런 기척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천수나타의 수준이 무적경에 올랐든 그렇지 않든 진산월에게는 어차피 무적경의 고수를 상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상황인 셈이었다.

천수관음은 고개를 저었다.

“차이가 있네. 음공으로 기척을 알 수 있다면 다른 방법도 있을 것이네. 그것이 완전한 무적경과 그렇지 못한 경지의 분명한 차이일세.”

“하지만 제게는 시간이 없군요.”

“그게 가장 큰 문제지. 일반적으로 암기 무공을 상대하는 것에는 세 가지 방법이 있네. 첫째는 청경(聽勁)일세. 청력을 향상시켜 귀로 듣는 것이지. 하나 단순히 청력을 강화하는 것이 청경은 아닐세. 귀로 들리는 모든 소리 중에서 자신이 원하는 소리를 가려내는 것이 바로 청경이지. 청경을 익혀야만 암기가 날아오는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네. 둘째는 음공(陰功)을 익히는 것일세. 음공을 익히면 주위의 변화에 민감해져서 어렵지 않게 암기를 파악할 수 있다네. 극에 이른 음공의 고수는 눈을 감고도 주위의 사정을 훤하게 파악할 수 있을 정도가 된다고 하더군. 암기의 고수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상대가 바로 그런 자들이지. 그리고 셋째는 스스로가 암기 무공을 배우는 것일세. 말로 표현하기 힘든 암기의 속성을 자세히 알 수 있게 되기 때문일세.”

천수관음의 표정이 조금 무거워졌다.

“문제는 이 세 가지 방법이 모두 오랜 시간의 수련을 필요로 한다는 것일세. 상당 기간 동안 체계적인 훈련을 받지 않으면 일정 경지 이상으로 오를 수 없는 방법들이지. 그래서 아쉽게도 자네는 이 중 어떤 방법도 선택할 수가 없네.”

진산월은 별로 표정의 변화가 없이 담담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제가 가지고 있지 못한 걸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아직 가지지 못한 것보다 가진 것이 더 많으니 말입니다.”

천수관음은 한동안 가만히 진산월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더니 나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마음가짐일세. 내가 자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암기 무공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일세. 그것에서 무엇을 얻게 될지는 순전히 자네 자신에게 달려 있네.”

진산월은 그녀를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그 점에 대해 미리 감사드립니다.”

“별로 대단한 건 아닐세. 일반적인 문파라면 제자가 사부에게 쉽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들이네.”

진산월의 차가운 얼굴에 가벼운 미소가 떠올랐다.

“선배님은 제 사부님이 아니지 않습니까?”

천수관음은 웃을 때 한쪽 뺨에 난 칼자국이 꿈틀거리는 진산월의 얼굴을 보더니 자신도 따라서 웃었다.

“자네의 웃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군. 하지만 젊은 여자들 앞에서는 너무 자주 웃지 말게. 늙은 나까지 가슴이 울렁거리니 말일세.”

진산월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미소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천수관음은 더욱 크게 웃었다.

“호호. 그렇다고 금세 그런 표정이 될 건 뭔가? 아무튼 그다지 심각한 이야기는 아니니 부담 없이 들으면 되네. 우선 무음경의 비밀에 대해 말해 주겠네. 내기에서 이겼으니 대가를 받아야지.”

진산월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아무래도 그녀의 제자들은 무공뿐 아니라 기질마저도 천수관음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것 같았다. 천수관음은 능자하의 차분함과 육난음의 활달함, 그리고 냉옥환의 차가움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상황에 따라 수시로 변하는 그녀의 모습은 묘한 매력을 느끼게 했다.

젊은 시절의 그녀는 아마 남자들에게 무척이나 많은 호감을 샀을 것이다.

진산월이 그녀의 기질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그녀는 다시 차분한 모습으로 돌아와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무음경은 암기를 발출하는 소리가 나지 않는 경지일세. 사실 소리를 없애는 것은 암기 무공을 익히는 사람들에게는 오랜 숙원이나 마찬가지였지. 아무리 빠르고 은밀하게 발출한다고 해도 암기가 날아가는 소리 때문에 일정 수준 이상의 고수들은 암기의 위치를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고, 그것은 암기 무공의 고수들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나 마찬가지였네.”

“……!”

“그래서 누군가가 치열한 고민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하게 되었지. 그 단편적인 생각들이 수정 보완되고 실제로 이루어지기까지는 누대(累代)에 걸친 오랜 세월과 많은 사람들의 헌신이 필요했지만, 마침내 암기를 발출하는 소리를 없애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네.”

“어떻게 소리를 없앨 수 있습니까?”

진산월은 솔직히 자신의 상식으로는 소리를 없앤다는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소리는 일단 발생하면 공기를 타고 전해지기 때문에 임의로 없애거나 줄일 수 없다. 암기가 형태를 가진 물체인 이상 움직일 때 소리가 나지 않을 수 없는데, 대체 그 소리를 어떻게 없앨 수 있는 것인지 아무리 궁리해도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엄밀히 말하면 없애는 것이 아니라 숨기는 것일세.”

“숨기다니요?”

“암기가 발출될 때는 당연히 소리가 나네. 아무리 은밀하게 던져도 상황은 변하지 않지. 하지만 그 소리를 듣고도 상대방이 인지(認知)하지 못한다면 결국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진산월은 알 듯 모를 듯하여 다시 물었다.

“소리를 어떻게 숨길 수 있습니까?”

“우리는 많은 소리를 들으며 살고 있네. 완벽한 무음(無音)이란 존재하지 않는 법일세. 지금도 주위가 조용하다고 느끼겠지만 귀를 기울여 보면 바람이 부는 소리, 새가 지저귀는 소리, 멀리서 사람들의 웃고 떠드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네. 다만 그것을 의식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뿐이지. 그래서 누군가가 인간이라면 늘 듣게 되는 소리 속에 암기를 발출하는 소리를 숨길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완벽한 무음의 세계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일세. 그것이 바로 무음경의 진정한 요체(要諦)일세.”

“아!”

진산월의 머릿속에 무언가 거대한 폭발이 터진 듯한 충격이 느껴졌다. 암기를 발출하는 소리를 어떻게 숨길 수 있는지 깨달은 것이다.

늘 듣게 되는 소리.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가지고 있는 소리. 그리고 자기 자신도 무의식중에 내뱉는 소리. 그래서 결국은 아무도 의식하지 못하고 느끼지도 못하는 바로 그 소리!

“호흡이로군요.”

천수관음은 감탄 어린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자네라면 알아차릴 줄 알았네. 바로 인간의 숨소리 속에 숨기는 것일세.”

그것은 실로 기발한 착상이 아닐 수 없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자신도 모르게 내뿜는 숨소리가 있다. 아무리 상대를 경계하는 사람이라도 상대의 숨소리조차 경계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숨소리 속에 암기가 발출되는 소리를 완벽하게 숨길 수만 있다면 상대로서는 그야말로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한 채 암기에 당하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말은 쉽지만 실제로 숨소리 속에 암기가 발출되는 소리를 숨기는 것은 오랜 수련과 각고의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일세. 나조차도 사십 년을 넘게 고생한 끝에 몇 년 전에야 겨우 그 경지에 오를 수 있었네. 눈을 감아보게.”

진산월은 순순히 눈을 감았다. 암기의 고수를 상대로 눈을 감는 것은 자신을 무방비 상태로 방치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나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암기에 대해서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생생하게 절감했기 때문이었다.

“귀를 기울여 보게. 내 숨소리가 들릴 때까지.”

조용한 천수관음의 말에 진산월은 청력에 신경을 집중시켰다. 그녀의 숨소리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무척이나 가늘고 안정된 호흡이었다.

들숨과 날숨의 간격이 일정하게 유지되었고, 조금도 호흡이 거칠어지거나 가빠지지 않았다. 이러한 호흡의 소유자라면 손길 또한 안정되어 있을 것이고, 마음 또한 극도의 냉정함과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람의 손에서 발출되는 암기는 얼마나 무서울 것인가?

진산월은 몇 차례 반복되는 그녀의 숨소리를 듣다가 조용히 눈을 떴다. 그리고는 옆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앉아 있는 의자 모서리에 가느다란 은침(銀針) 하나가 박혀 있었다.

숨소리를 듣고 있었음에도 언제 천수관음이 은침을 발출했는지 진산월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다만 은침이 자신의 근처에 왔을 때 아주 미약한 기척을 느꼈을 뿐이었다.

천수관음은 은침을 응시하는 진산월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다시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한 번 더 해보게. 무음경의 요결은 날숨에 발출하고 들숨에 맞춘다는 것일세. 그 말을 잘 음미해보게.”

진산월은 다시 눈을 감았다.

그녀의 깊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깊고 가는 숨소리였다. 들숨과 날숨의 간격 또한 일정한 것 같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 진산월은 그녀의 날숨이 조금 더 길어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진산월은 눈을 떴다. 그리고 막 하나의 은침이 소리도 없이 날아와 의자에 부드럽게 박히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천수관음은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아차렸군. 그것이 바로 무음경일세.”

진산월은 그녀에게 깊숙이 머리를 조아렸다.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안계(眼界)를 넓힐 수 있었습니다.”

“실전에서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할 걸세.”

당연한 말이었다.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해야 겨우 알아차릴 수 있는 들숨과 날숨의 미묘한 간격 변화를 상대와 마주하면서 알 수는 없었다.

천수관음이 무음경에 대한 비밀을 기꺼이 공개한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였다. 숨소리에 암기가 발출되는 소리를 숨긴다는 걸 알고 있어도 무음경의 고수가 날리는 암기를 피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것이 강호의 모든 고수들이 그녀나 천수나타 같은 암기 무공의 절정고수들을 두려워하는 이유였다.

“나는 소지하기 편해서 은침을 주로 사용하지만, 천수나타가 사용하는 암기는 귀왕령(鬼王靈)이라는 것일세. 귀왕령에 대해 알고 있나?”

“잘 모릅니다. 당문에서 만든 가장 무서운 암기 중 하나라는 것밖에는 아는 게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정도로만 알고 있지. 귀왕령은 작은 유리조각 형태를 지닌 암기일세. 그래서 얼핏 보기에는 아이들 장난감이나 여인의 장신구로 오인할 수도 있지. 하나 귀왕령은 내가 알고 있는 한 천하에서 가장 무서운 살인병기일세.”

천수관음의 음성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귀왕령이 사람의 몸에 닿게 되면 즉시 작은 유리조각으로 분해되어 핏줄을 타고 심장을 침입하게 되네. 다시 말해서 몸의 어느 부분에라도 귀왕령을 맞게 되면 순식간에 심장이 멈추고 목숨을 잃게 된다는 것이지.”

듣기만 해도 모골이 송연해지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반짝이는 유리조각이 혈관을 타고 심장으로 들어가 그곳을 벌집처럼 헤집어 버리는 광경을 상상 해보라.

“그 위력이 너무 잔인해서 나는 탐탁지 않아 했지만, 천수나타는 어려서부터 손에 익은 그 암기를 계속 고집했네. 그래서 아직까지 그와 싸워서 살아남은 사람이 없는 걸세. 누구든 귀왕령에 맞기만 하면 목숨을 잃어버리게 되니 말일세. 석년에 그가 그 암기를 나를 향해 던지지 못하고 신발을 맞히고 만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네. 내 몸에 닿지 않고 옷자락에만 맞힐 자신이 없었던 거지. 스스로 패배했다고 생각하는 것도 그 때문일세.”

무음경을 넘어 무적경에 근접한 고수가 던지는 유리조각 모양의 필살암기! 과연 그것을 막거나 피할 수 있을지 진산월은 솔직히 자신할 수 없었다. 진산월이 아닌 누구라도 그러할 것이다.

“암기 무공을 익히는 사람들 사이에는 몇 가지 불문율(不文律)이 전해진다네. 그것을 ‘삼무용(三無用)’과 ‘삼불출(三不出)’이라고 하는데, ‘삼무용’은 암기 무공의 고수들에게 일종의 계율과도 같은 것이고, ‘삼불출’은 해서는 안 되는 금기와도 같은 것일세. 그걸 들어보겠나?”

진산월은 부지불식간에 고개를 끄덕였다.

“세이경청하겠습니다.”

“‘삼무용’이란 ‘무용지물(無用之物)’, ‘무용지수(無用之手)’, ‘무용지공(無用之功)’을 말하는 것일세. 즉, ‘상대를 맞히지 못한 암기는 쓸모가 없고, 맞히더라도 상대를 쓰러뜨리지 못하면 공연한 헛수작에 불과하며, 쓰러뜨리더라도 상대의 공격을 피하지 못하면 헛수고일 뿐이다’라는 것이 바로 ‘삼무용’일세.”

듣고 보니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그래서 그만큼 중요한 것이기도 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천수관음이 말하는 ‘삼불출’은 더욱 기가 막혔다.

‘삼불출’이란 절대 출수하지 말아야 할 세 가지의 경우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자신이 없으면 출수하지 마라(不信不出).

죽이지 않을 거면 출수하지 마라(不殺不出).

위치를 포착하지 못하면 출수하지 마라(不捉不出).

천수관음은 ‘삼무용’과 ‘삼불출’을 모두 설명한 후 침착한 음성으로 말을 맺었다.

“당시 천수나타는 ‘삼불출’의 두 번째를 어겨 나에게 패했네. 하나 이번에는 결코 같은 실수를 반복하려 하지 않을 걸세.”

진산월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천수관음이 말한 ‘삼무용’과 ‘삼불출’은 얼핏 듣기에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들을 나열한 것 같았으나, 진산월은 이 안에 암기 무공의 고수를 상대하는 핵심이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암기 무공이란 가장 빠르고 효과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무공이었다. 무음경이니 무적경이니 하는 것도 그것을 이루기 위한 방편 중 하나일 뿐이었다.

암기 무공의 본질은 이 어린아이의 장난스런 격언 같은 ‘삼무용’과 ‘삼불출’에 모두 담겨 있으며, 어떠한 암기 고수도 이 테두리 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천수관음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진산월을 한동안 응시하고 있더니 조용히 몸을 일으켜 소리도 없이 장내에서 사라져 버렸다.

진산월은 그녀가 떠난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깊은 상념에 한없이 침잠해 들어갔다. 조금씩 짙어지는 어둠만이 그의 몸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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