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9권 절대암류(絶代暗流)편 : 9화

랜덤 이미지

군림천하 29권 절대암류(絶代暗流)편 : 9화


제 300 장 수유일섬(須臾一閃)

날이 밝았다.

오늘은 역사적인 날이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들은 아침 일찍부터 현악문으로 몰려들었다.

현악문은 무당산의 초입에 위치해 있으며, 멀지 않은 곳에 무당산 깊은 계곡에서 발원한 동하(東河)라는 제법 큰 강을 끼고 있어서 예로부터 풍광이 뛰어나기로 유명했다. 현악문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우진궁(遇眞宮)이 나오는데, 그곳에서부터 비로소 무당산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고 할 수 있었다.

제법 넓은 현악문 앞의 공터는 이른 아침부터 모여든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손풍은 인파로 북적거리는 넓은 공터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못 말릴 사람들이군. 아직 정오가 되려면 한참이나 남았는데 벌써부터 이렇게 몰려들다니. 쯧.”

혀를 차는 자기 자신도 그런 사람들 행렬에 끼어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손풍이 아침부터 현악문 주위를 서성거리는 것은 숙소에 계속 머물러 있기가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주위가 소란스럽다 했더니 유중악 일행이 찾아왔고, 그 뒤를 이어 꼴 보기 싫은 천봉궁의 선자들이 줄줄이 따라 들어왔다. 개중에는 당연히 그가 상종하기도 싫어하는 누산산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녀와 얼굴 마주치는 것조차 질색인 손풍은 주위의 신경이 그녀들에게 쏠린 틈을 타서 살짝 밖으로 빠져나왔다. 막상 나오고 보니 특별히 갈 곳도 없어서 어슬렁거리다가, 사람들의 움직임을 따라 무심코 걷다보니 현악문 앞이었던 것이다.

다시 돌아가기도 뭐해서 공터를 서성거리던 손풍의 눈에 다소 특이한 광경에 들어왔다.

두 명의 남자들이 핏대를 올리며 고함을 지르고 있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한쪽은 성이 나서 씩씩거리고 있고, 다른 한쪽은 비실비실 웃으며 약을 올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성을 내는 남자는 유난히 짙은 눈썹에 제법 괜찮게 생긴 용모의 젊은이였고, 웃고 있는 남자는 다소 마른 체구에 눈빛이 야비한 삼십 대 초반의 장한이었다. 그들 옆에는 순한 인상의 여인이 발을 동동 구르며 서 있었는데, 아마도 젊은 청년의 일행인 것 같았다.

“그럼 내가 있지도 않은 거짓말을 지껄였다는 거요?”

젊은 청년은 무엇이 그리도 원통한지 얼굴을 온통 시뻘겋게 물들이며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에 비해 장한은 얼굴에 유들유들한 미소를 지으며 느물거렸다.

“글쎄 자네가 아무리 떠들어봤자 내가 직접 본 것도 아니고, 자네 스스로 거짓말 운운하니 나도 참 답답하군.”

“아니 그러니까 지금 나를 거짓말쟁이로 몰고 가는 거 아니오?”

“거짓말 이야기는 자네가 자네 입으로 한 것이지, 내가 뭐라고 했나? 도둑이 제 발 저린다더니…….”

장한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으나 그 음성이 제법 커서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청년이 그 말에 더욱 화가 나서 어쩔 줄을 몰라 하자 옆에 있던 젊은 여인이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가가, 그만 해요. 남들이 다 쳐다봐요.”

청년은 그녀의 팔을 확 뿌리쳤다.

“쳐다보면? 내가 중인환시리에 천하의 거짓말쟁이가 되게 생겼는데 지금 그게 문제야?”

여인은 사람들 앞에서 그런 꼴을 당해서 무척이나 창피하고 속상할 텐데도 청년의 팔을 다시 움켜잡았다.

“너무 화만 내지 말고 마음 좀 가라앉혀요. 그러기에 내가 남들 앞에서 그런 소리는 그만하라고 했잖아요.”

“내가 틀린 말을 했어? 당신도 그날 분명히 봤잖아.”

“나야 그 자리에 있었으니 그랬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니잖아요.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그런 말을 하면 선뜻 믿어줄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어제는…….”

“어제의 그 사람들이야 당신이 술을 산다고 하니까 들어주었던 거지, 저 사람은 생면부지잖아요.”

여인이 계속 다독거리자 청년은 그제야 조금씩 마음이 안정되는지 얼굴의 붉은 빛이 가시기 시작했다. 그걸 본 장한이 다시 이죽거렸다.

“여자 말을 듣는 게 좋을 걸세. 자네 같은 사람에게는 과분한 여자 아닌가?”

청년이 그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장한은 여전히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짓고 있는데, 누가 보아도 일부러 시비를 거는 것임을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청년도 그제야 그걸 알아차렸는지 눈빛에 험악한 빛이 떠올랐다.

그의 손이 자신도 모르게 옆구리에 차고 있는 검의 손잡이 쪽으로 움직이려 할 때, 누군가가 그들 사이에 불쑥 끼어들었다.

“이 친구, 여기 있었군. 한참 찾았잖나.”

돌연 나타난 사람은 검은 옷을 입은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인이었다. 그는 청년에게 시비를 걸고 있던 야비한 눈빛의 장한 어깨에 손을 얹더니 그를 끌어당겼다.

“어서 가세. 다른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네.”

장한은 엉겁결에 흑의인이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어찌 된 영문인지 흑의인을 본 순간부터 장한은 꼼짝도 못하고 그의 손에 힘없이 끌려가고 있었다. 곧 두 사람의 신형은 사람들 속으로 사라져갔다.

젊은이는 맥이 풀렸는지 검을 잡으려던 손을 멈추고 큰 한숨을 내쉬었다. 여인이 어느새 다가와 그의 팔짱을 끼더니 다른 한 손으로 그의 등을 두드렸다.

“이제 주루에서 신검무적을 만난 이야기는 그만해요. 다들 겉으로는 놀랍다고 손뼉을 쳐 주면서도 뒤에서 쑤군대고 있잖아요. 그건 그냥 우리만의 추억으로 가지고 있자고요.”

젊은이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소. 난 그저 신검무적 같은 절세의 인물과 같은 탁자에 앉아 대화를 나눈 것이 너무 꿈만 같아서 말했던 것인데, 사람들 생각은 다른 모양이구려.”

두 남녀는 서로를 의지한 채 그 자리를 떠나갔다.

손풍도 어느새 그 자리를 떠나 있었다. 그는 조금 전에 두 남녀에게 시비를 걸었던 장한과 그의 동료인 듯한 흑의인의 뒤를 멀찌감치 따르고 있었다.

손풍이 그들의 뒤를 조심스레 밟는 것은 그 흑의인을 본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흑의인은 얼마 전의 한수에서 벌어진 습격 사건 때 배를 공격했던 장강십팔채의 고수들 중 한 사람이 분명했다. 손풍이 그의 얼굴을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자신의 상대로 채석대와 그 흑의인 중 누구를 고를지 잠시 고민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아무래도 날카롭고 매서운 인상의 흑의인보다는 채석대가 더 만만해 보여서 그를 선택했다가 결국은 호되게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한수에서 장강십팔채는 처참한 패배를 당하고 물러났지만, 그들 중 상당수는 목숨을 부지한 채 도망갈 수 있었다. 그 수적의 무리들이 중요한 비무가 벌어지는 자리에 나타났으니 손풍으로서는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단순히 구경하려고 온 놈들 같지는 않은데……. 저놈들이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하는 걸까?’

손풍의 짐작대로 흑의인은 장한에게 무어라고 나직하게 꾸짖고 있었다. 얼핏 들으니 중대한 일을 앞두고서 여자에게 흑심을 품고 젊은이에게 시비를 건 것을 나무라는 것 같았다.

그들의 대화 중 자신의 숙소인 청연각을 언급하는 내용이 나오자 손풍은 바짝 긴장하여 그들의 뒤로 다가서며 귀를 기울였다.

“일 자체는 간단하지만 청연각의 별실이 여러 개니까 다른 곳으로 번지지 않게 하는 게 중요해. 그놈들 있는 곳만 자연스레 화재가 난 것처럼 보여야 되는 거야.”

“알겠소, 아무튼 단주께는 아무 말씀 말아주시오.”

흑의인은 못마땅한 눈으로 연신 굽실거리는 장한을 쏘아보았다.

“단주 무서운 줄 아는 놈이 사람들 많은 곳에서 그런 짓을 벌이고 있었단 말이냐?”

“그 젊은 놈이 갑자기 그렇게 큰 소리로 마구 떠들어댈 줄 누가 알았소? 한 판 붙자고 하면 으슥한 곳으로 유인해서 해치우려고 했지.”

“미친놈. 오늘같이 모든 무림인들의 이목이 집중된 곳에서 사람을 죽이고 여자를 덮친다고? 그게 안 들킬 것 같으냐?”

“나도 꼭 그렇게 될 거라는 기대는 없었소. 다만 그동안 숨어 지내다 보니 너무 답답해서 그런 식으로라도 해소하지 않으면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아서 그랬소.”

“답답한 건 너만이 아니다. 아무튼 오늘이 지나면 모두 해결될 일이니 오늘만 참도록 해라.”

“알겠소.”

두 사람이 소곤대는 음성을 유심히 듣고 있던 손풍이 이를 갈았다.

‘이 망할 놈들이 수적질로 안 되니 이제는 불까지 지르려 하는군. 불 좀 낸다고 제깟 놈들이 감히 본파를 당해낼 수 있을 것 같은가?’

손풍은 기분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눈앞의 두 놈을 붙잡아 요절을 내고 싶었지만, 아무리 봐도 자기 혼자서는 둘 중 하나도 당해낼 수 없을 것 같아 고민을 했다.

‘이대로 돌아가서 동 사형이라도 부르면 좋은데, 그동안 이놈들이 어디로 갈지 모르니 그건 힘들 것 같고……. 그렇다고 이렇게 하염없이 따라다닐 수만도 없고…….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인상을 찡그리고 있던 손풍이 무엇을 보았는지 얼굴을 활짝 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이정문과 육난음이 팔짱을 낀 채로 걷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손풍은 그들을 부르려다 앞에 있는 두 장한이 알아차릴까 봐 이정문에게 살짝 손짓을 했다. 하나 이정문과 육난음은 서로 이야기하는 데 정신이 팔려 그를 보지 못했다.

‘저런 사랑 놀음은 남들 안 보는 방구석에서나 할 것이지 백주 대낮에 점잖지 못하게 무슨 짓들이야?’

손풍은 그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오만가지 인상을 쓰며 몇 차례나 동작을 바꿔가며 손짓을 했으나 두 남녀의 시선을 끌지는 못했다.

그러는 동안에 두 사람과의 거리가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놈! 강호에서 손꼽히는 천재라고 떠들어대더니 막상 필요할 때는 사람도 못 알아보냐? 이래서 난 머리 좋은 놈들이 제일 싫어!’

손풍이 속으로 마구 욕설을 퍼붓고 있는 사이에 두 남녀는 저만치 멀리로 사라져 버렸다. 별수 없이 손풍은 지금처럼 두 장한의 뒤를 조심스레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손풍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제야 이정문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슴 떨리는군. 어째 상관욱의 뒤를 쫓을 때보다 더 힘든 것 같아.”

육난음이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킥킥거렸다.

“정말 가관이었어요. 우리가 자기를 알아보게 하려고 별짓을 다 하는 꼴을 몰래 보고 있자니 너무 웃겨서 하마터면 배를 잡고 쓰러질 뻔했어요. 그 대단한 진 장문인 밑에 어떻게 저런 자가 제자로 들어왔는지. 호호.”

“비웃지 마. 그래도 제 딴에는 문파를 위해서 무언가 해보려고 애를 쓰는 거였잖아.”

“저건 애를 쓰는 게 아니라 바보짓을 하는 거지요. 그 때문에 하마터면 그자들이 알아차릴 뻔했잖아요. 기껏 그들의 꼬리를 잡아서 두더지 소굴로 몰아가고 있는데.”

“하필이면 그자들이 손풍에게 발각당한 게 잘못이지. 일을 벌일 때까지 꽁꽁 숨어 있을 줄 알았더니 백주 대로에서 쓸데없는 시비를 벌이다가 종남파 제자의 눈에 뜨일 줄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어?”

“그나저나 형산파는 어쩌려고 장강십팔채까지 이번 일에 끌어들이는 거죠? 이건 너무 막 나가는 거잖아요.”

“그들을 끌어들인 건 형산파가 아니라 구양현성이야. 구양현성이 장강십팔채의 잔당을 이끌고 있는 흑수단주 염오를 구워삶아서 이번 일을 기획한 거지. 불 지르고 주위를 소란스럽게 하는 건 수적들이 가장 잘하는 짓이잖아.”

“하긴, 오만하고 도도한 형산파 고수들이 얼굴에 숯검정을 묻히고 불을 지르는 광경은 상상이 되지 않아요. 그럼 형산파에서는 장강십팔채의 잔당들이 이번 일에 동원된 걸 모르고 있겠군요?”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게 더 정확한 말이겠지. 그들로서는 그런 지저분한 일은 아예 전혀 내막을 모르고 있는 것이 더 나을 테니 말이야.”

“비겁하군요.”

육난음이 투덜거리자 이정문은 비쩍 메마른 미소를 지었다.

“그게 명문정파가 일을 하는 방법이야. 그들의 모든 행사가 겉으로 드러난 것처럼 공명정대하고 정당하지는 않아. 하지만 사안에 따라서는 지저분한 일을 해야 할 때도 있는 법이지. 그래서 거간꾼들이 필요한 거야. 그런 일을 얼마나 깔끔하게 해주느냐에 따라 그들에 대한 대우가 달라지기도 해.”

“구양현성이 그런 거간꾼이군요.”

“거간꾼치고는 신분이나 지위가 높긴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렇지. 설마 상인들이 단순히 물건만 사고파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해?”

“그래서 난 상인들이 싫어요.”

“그들도 우리 같은 사람들을 싫어하지. 자신들의 내면에 대해서 속속들이 알고 있으니까.”

“추악한 내면이겠죠.”

“아무튼 종남파의 그 친구가 너무 성급하게 일을 벌이지 않았으면 좋겠군. 그냥 조용히 그들의 뒤를 따라가서 숨어 있는 위치만 알아내고 돌아오면 좋겠는데.”

“그자들이 숨어 있는 곳은 파악했잖아요?”

“그래도 가급적이면 종남파 제자가 발견하는 게 나중을 위해서 좋겠지. 굳이 우리가 사전에 그들을 주목하고 있다는 걸 알릴 필요는 없잖아?”

육난음은 밉지 않게 그를 흘겨보았다.

“이럴 때 당신은 정말 얄미워요.”

“내가 왜?”

“이용할 건 다 이용하면서 남에게 욕은 안 먹으려고 하잖아요?”

“내가 내 이익을 위해서 그러는 것도 아니고, 대의(大義)를 위하는 건데 그것 때문에 일부러 욕먹을 필요는 없잖아.”

“당신만의 대의겠죠.”

“원래 대의란 그런 거야.”

이정문의 표정은 평상시와 다름없었으나, 육난음은 그 음성에 실린 감정을 알아차리고 입을 다물었다.

한동안 입을 다물고 묵묵히 걸음을 옮기던 두 사람은 이내 엄청나게 몰려 있는 인파를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주위가 온통 사람들로 뒤덮여서 어떻게 그들 사이를 헤집고 들어갈지 엄두도 나지 않았다.

육난음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나직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정말 대단하구나.”

이정문 또한 연신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면서도 한 마디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지. 강호 제일의 암기 고수와 강호 제일의 검객이 서로의 모든 걸 걸고 겨루는 날이야. 적어도 오늘의 일은 강호의 역사가 사라지지 않는 한 오랫동안 기억에 남게 될 거야.”

“정말 그렇게 될까요?”

“틀림없이. 그러니 우리는 지금부터 벌어지는 모든 일을 단 한 가지도 놓치지 않고 똑똑히 지켜봐야 돼. 역사의 산 증인이 될 수 있는 기회이니 말이야.”

육난음은 평상시와는 달리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죠.”

몰려드는 사람들의 수는 점점 불어나서 나중에는 현악문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사람들로 가득 들어찼다. 서로 다른 신분과 성별을 가진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광경은 실로 강호에서 좀처럼 보기 드문 기이한 장면이었다.

그리고 모두가 초조히 기다리는 가운데, 정오가 되었다.

진산월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리도록 푸른 하늘이 눈을 찔렀다.

흐린 날이라면 더욱 좋았겠지만, 화창한 날이라도 상관은 없다.

태양은 하늘의 한가운데 떠 있다.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지지 않을 것이다.

바람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선선하게 불고 있다. 그것도 좋다고 생각했다. 바람이 조금 더 세게 불었다면 움직임에 약간의 제약이 있을지 몰랐다. 그리고 바람이 아예 없다면 옷자락 날리는 소리가 신경 쓰였을 것이다.

공기는 따뜻했고, 기온도 적당했다. 새벽에 한 시진 정도 잠깐 눈을 붙인 것이 전부였지만 정신은 이상할 정도로 맑았고, 몸 상태도 나쁘지 않았다.

그를 본 사람들이 미친 듯이 질러대는 함성 때문에 차라리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진산월은 그 함성을 귓전으로 흘려들으며 천천히 시선을 내려 앞을 바라보았다.

당각은 벌써 현악문 앞에 펼쳐진 공터의 우측 편에 선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진산월의 위치는 자연스레 좌측이 되었다.

돌로 세워진 현악문 앞뜰의 양쪽 끝자락에 두 사람이 마주서자 이내 사람들의 함성이 잦아들며 고요한 적막이 흐르기 시작했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정확히 십이 장. 멀다면 멀고 짧다면 짧은 거리였으나 그들에게는 상대의 얼굴에 나 있는 모공까지 생생하게 볼 수 있을 정도로 지척이나 마찬가지였다.

진산월은 거리도 딱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더 멀었다면 접근하는 데 보법을 쓰기 애매했을 것이고, 더 가까웠다면 당각의 권역에 너무 근접해서 위험했을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 대화는 없었다. 할 필요도 없었고, 해야 할 말도 없었다. 단지 서로를 응시한 채 호흡을 가다듬고 있을 뿐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입추의 여지도 없이 들어차 있는 넓은 공간이 숨 막힐 듯한 정적에 휩싸여 있는 광경은 왠지 현실의 일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본 채 미동도 않고 있자 장내의 긴장감은 점차로 고조되어 작은 불씨만으로도 공간 전체가 그대로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 순간, 석상처럼 고정되어 있던 두 사람 사이에 처음으로 움직임이 일어났다.

먼저 몸을 움직인 사람은 진산월이었다. 진산월은 성큼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당각은 무심한 눈으로 그를 응시한 채 여전히 아무런 미동도 않고 서 있었다.

일반적으로 암기 고수의 암기가 위력을 발휘하는 공간은 삼 장 남짓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절정고수라면 오 장 이상을 암기의 영역권으로 둘 수 있을 것이다.

하나 암기가 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하려면 적어도 그보다 훨씬 더 가까워야 한다. 다시 말해서 일반적인 암기의 고수라면 일장 반 정도가 살상 영역이었고, 절정고수라면 삼 장 이내가 확실한 거리였다.

하나 당각의 암기가 정확히 몇 장의 거리까지 위력을 미치는지는 당각 본인 외에는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다.

진산월은 천천히 한 걸음씩 걸어왔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곧장 당각의 앞을 향해 다가오는 그의 모습은 마치 나들이라도 나온 것처럼 방만하면서도 한없이 자유로워 보였다.

당각은 자연스레 양손을 늘어뜨렸다. 그의 손에는 당문의 고수라면 결투 시에는 누구나가 끼고 있는 사슴가죽 장갑이 보이지 않았다. 하나 유심히 관찰하면 손가락 부분에 특수한 기름이 살짝 발려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그 기름은 당문에서도 최고의 비전으로 알려진 칠교액(七巧液)이었다. 칠교액은 일곱 가지의 동식물 기름을 합성하여 만든 특수기름으로, 독기의 침입을 완벽히 막고 손끝의 감각을 최고조로 끌어올리는 데 탁월한 효능이 있었다.

진산월과 그의 거리는 이내 십 장으로 가까워졌다. 당각의 주름진 눈이 거의 알아차리기 힘들 만큼 살짝 찌푸려졌다.

진산월이 다가온 거리는 이 장에 불과했지만, 당각은 마치 그의 신형이 한순간에 공간을 압축해 들어온 듯한 착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형환위(移形換位)인가?’

당각은 숨을 고르며 늘어뜨린 오른손의 손가락을 한 차례 꼼지락거렸다. 소매 안쪽의 옷자락을 타고 흘러내린 유리구슬 하나가 엄지와 검지 사이로 미끄러지듯 안착되었다.

백이십팔 개의 면으로 이루어진 작은 유리구슬, 이것이 바로 공포의 살인병기인 귀왕령이었다. 인체에 격중되는 순간, 귀왕령은 백이십팔 조각의 유리파편이 되어 혈관을 타고 심장으로 침투하게 된다. 그 가공할 위력은 귀왕령을 당문 사상 최강의 암기로 인정받게 했다.

당문의 암기 수법 중 무림에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만천화우(滿天花雨)였지만, 탈혼검의 구결을 입수한 후로 당각은 더 이상 만천화우를 쓰지 않았다. 굳이 수십 개의 암기를 힘들게 가지고 다닐 필요 없이 귀왕령만으로 어떠한 적이든 쓰러뜨릴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만천화우는 몇 번 깨어진 적이 있지만, 아직 귀왕령으로 펼치는 절대암류를 벗어난 사람은 없었다.

귀왕령 한 알에 목숨 하나.

그것이 지금까지의 공식이었다.

오늘 당각은 특별히 진산월을 위해서 세 알의 귀왕령을 준비해 왔다.

절대암류의 세 가지 초식을 차례로 시전해 볼 셈이었다. 그중 두 가지는 그도 만들어놓고 아직 정식으로 펼쳐본 적이 없었다. 아직까지 무림의 어느 누구도 첫 번째 초식인 흑암전시(黑暗電矢)조차도 피하지 못했던 것이다. 흑암전시는 바로 탈혼검의 측탈혼을 응용한 수법이었다.

두 번째 초식인 암혼몰영(暗魂沒影)은 탈혼검의 교탈혼을 토대로 만든 것이었고, 세 번째 초식인 천지차암(天地遮暗)은 탈혼검의 가장 무서운 초식인 색탈혼의 정수를 담은 절대암류 최고의 수법이었다.

애써 만들어 놓고도 아직 펼쳐보지 못한 암혼몰영과 천지차암을 처음 선보이는 것에 신검무적은 너무도 적절한 상대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 비로소 수많은 무림인들의 앞에서 절대암류의 진정한 모습을 보일 생각을 하니 당각은 절로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렇다고 흥분하거나 냉정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마음 한구석에서 투지가 솟구치면서 젊은 날의 패기와 자신감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당각은 습관적으로 엄지와 검지 사이에 있는 귀왕령을 만지작거리며 손끝의 감촉에 신경을 집중시켰다. 손에 익은 두 개의 면이 손끝에서 느껴지자 당각은 다시 한 차례 숨을 골랐다.

귀왕령을 발출한 준비를 끝낸 것이다. 귀왕령은 그 위력만큼이나 조절하기도 까다로워서 조금이라도 소홀히 했다가는 자신이 의도한 방향으로 날아가지 않는 아주 세심한 암기였다.

그가 숨을 고르는 사이 진산월은 다시 이 장을 더 전진했다.

팔 장의 거리. 지금부터는 당각의 영역이었다. 다시 말해서 팔 장 안에 들어오는 순간 누구든 당각의 암기의 목표가 될 수 있다는 뜻이었다.

하나 당각은 귀왕령을 발출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눈이 조금 전보다 더욱 심하게 찌푸려져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걷고 있는 듯한 진산월의 동작에서 묘한 점을 발견한 것이다.

그의 몸은 그리 빠르지 않은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동선이 한 번도 겹치거나 멈춰지지 않고 계속 바뀌고 있는 것이다. 그 바람에 당각은 그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는 데 애를 먹고 있었다.

분명 시각적으로는 눈에 훤히 들어옴에도 불구하고 공간적인 위치가 포착되지 않았다.

‘단순한 이형환위는 아닌 것 같군.’

이형환위의 고수라면 당각도 몇 번 상대해 본 적이 있었다. 이형환위는 확실히 놀라운 무공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절정의 고수가 펼치는 이형환위는 언뜻 보기에는 순간이동에 가까워서 처음 상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나 몇 번 보게 되면 비슷한 방식의 움직임이라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어디로 이동할지 예측할 수 있는 것이다.

당각의 손에 쓰러진 자들 중에는 강호의 십대신법대가에 속한 고수도 있었다. 그는 바로 천산(天山)의 전설적인 존재인 천산비마(天山飛魔) 하일손(夏一孫)이었는데, 그의 이형환위는 당각이 본 것 중 가장 뛰어난 수준이었다. 하나 하일손은 불과 세 번의 이형환위만에 종적이 포착되어 귀왕령의 제물이 되어 사라졌다.

그때 그와 당각의 거리는 오 장이었다. 그것은 하일손이 자신의 장기인 도법을 펼치기에는 조금 먼 거리였다. 결국 하일손은 칼 한 번 휘둘러보지 못하고 차가운 시신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런데 지금 진산월의 움직임은 하일손과는 분명히 달랐다.

무엇보다 눈으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빨리 움직였던 하일손과는 달리 진산월의 몸은 훤히 시야에 들어왔다. 그런데도 정확한 위치를 알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움직임이 많거나 특이한 동작을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산책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유유자적하게 걷고 있는 것 같은데, 막상 암기를 발출하려고 하면 어디로 던져야 할지 막막한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형환위는 아니다. 보법에 특이한 묘용(妙用)이 있는 것인가?’

당각은 진산월의 발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평범한 걸음 같았다. 단순하게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내딛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다음 걸음이 어디로 내디뎌질지 전혀 예측이 되지 않았다.

당각의 눈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보법이구나! 그것도 아주 특이한 보법이다. 전후좌우의 어디로도 이동할 수 있고, 어디로도 움직이지 않을 수 있는 팔방(八方) 계열의 보법을 쓰는구나.’

팔방 계열은 속도가 빠른 일자(一字) 계열과 변화가 심한 환선(還旋) 계열, 가볍고 경쾌한 점수(點水) 계열, 그리고 오묘한 조화를 가진 구궁(九宮) 계열과는 달리 형태가 자유롭고 방향을 예측하기 힘든 보법의 일종이었다.

팔방 계열의 보법은 익히기가 무척 힘들고, 일정 수준 이상에 도달하지 않으면 보법의 효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기 때문에 강호에서도 사용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대신에 절정에 도달하면 다른 어떤 보법보다도 뛰어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팔방 계열의 보법 중 강호에 유명한 것은 소림의 금강부동신법(金剛不動身法)과 곤륜의 운룡대팔식(雲龍大八式), 그리고 개방의 취리건곤보(醉裡乾坤步) 등이 있는데, 하나같이 무림에서 누구나가 인정하는 절세의 보법들이었다. 하나 당각은 진산월이 지금 펼치는 보법이 그 보법들 중 어느 것과도 닮지 않았음을 알아차렸다.

‘금강부동신법보다 더욱 움직임이 적고, 운룡대팔식보다 더욱 자유로우면서도 취리건곤보보다 종잡을 수 없다니……. 강호에 이런 보법이 있었던가?’

당각의 안색이 처음으로 무겁게 굳어졌다.

진산월의 몸은 어느새 그의 육 장 거리까지 도달해 있었다.

진산월의 검법 수준으로 보아 오 장 안으로 들어오면 검기를 발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삼 장 안에 들어서면 당각도 위태로워질 수 있으며, 그 이상의 거리를 허용하게 되면 오히려 필패(必敗)나 동사(同死)가 될 확률이 높았다.

그 말은 진산월이 이 장을 더 걷기 전에 승부를 내야 하며, 아무리 늦어도 삼 장 안에는 그를 쓰러뜨려야 한다는 뜻이었다.

거리가 가까워진 만큼 진산월의 움직임도 선명하게 보였다.

보면 볼수록 평범하고 단조로운 걸음걸이였다. 언뜻 보면 그냥 산천을 유람하는 듯한 가벼운 걸음이었는데, 당각은 아직까지도 진산월의 정확한 위치를 포착할 수가 없었다.

‘직선인 듯하면서도 직선이 아니고, 곡선인 듯하면서도 곡선이 아니다. 공간과 공간, 걸음과 걸음 사이의 움직임이 직선도 아니고 곡선도 아닌 제삼의 선(線)을 그리고 있다. 그래서 동선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갑자기 당각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음을 느꼈다.

‘공간과 공간을 선이 아닌 점(點)으로 연결한 건가? 그렇다면…… 이건 마치 탈혼검의 구결을 보법으로 펼쳐놓은 것 같지 않은가?’

탈혼검은 진공검 중에서도 가장 익히기 어렵다는 점형 진공검의 일종이었다. 점형 진공검이란 상대의 몸을 점으로 보고 그 점을 향해 진공검을 펼치는 상승의 수법이었다. 공간의 한 점을 압축해서 들어오는 그 수법은 일단 펼치면 피하기가 어려워 최고의 살인검법으로 불리고 있었다.

당각은 쾌의당주에게 탈혼검의 구결과 기본 원리를 들은 후 자신의 암기수법에 그 원리를 적용시켰다. 그래서 그가 일단 암기를 발출하면 그 암기는 공간을 가로질러 도저히 피할 사이도 없이 상대의 몸에 격중되는 것이다.

탈혼검은 검으로 펼치기에 거리의 제약이 있지만 당각의 수법은 훨씬 더 긴 거리를 범위로 둘 수 있을 뿐 아니라 손목과 손가락을 사용해 암기를 날리기 때문에 이용하기에 따라서는 탈혼검보다 뛰어난 면이 있었다.

반면에 인체의 치명적인 부분을 꿰뚫어버리는 탈혼검의 위력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당각은 귀왕령의 가공할 살상력으로 위력의 부족함을 보완한 것이다.

절대암류를 완성한 후 당각은 자신의 무공에 절대적인 자신을 가지게 되었다.

더구나 상대는 뛰어난 검법의 소유자이기는 하지만 암기 무공에 대한 대비가 거의 되어 있지 않은 애송이였다. 그런데 그 애송이의 걸음걸이에 점형 진공검의 원리가 담겨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으니, 그로서는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당각이 주춤거리는 사이 진산월은 다시 일 장을 전진했다.

이제는 진산월이 언제든 출수할 수 있는 거리였다. 과연 무심한 듯 걷고 있는 진산월의 오른손이 천천히 허리춤의 용영검을 잡아가는 광경이 당각의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아직은 괜찮다. 한 순간, 단 한 순간이면 된다. 점과 점이 움직이는 동안에 단 한 번의 틀어짐만 있으면 된다.’

당각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진산월의 몸을 뚫어지게 주시했다.

진산월과 그의 거리는 불과 오 장, 당각이 한계선으로 정한 삼 장까지는 이제 겨우 이 장이 남았을 뿐이었다.

다시 진산월은 한 걸음을 성큼 내디뎠다. 옷자락 펄럭이는 소리라도 들릴 법하건만 당각의 귀에는 가는 바람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움직임 자체에 옷자락의 펄럭임을 바람 소리에 섞이게 하는 효능이 있음이 분명했다.

진산월의 오른손은 용영검의 손잡이에 거의 닿아 있었다.

당각의 눈이 어느 때보다 매섭게 번뜩거렸다.

‘저거다.’

당각은 풍부한 대적경험으로 어떤 검객이든 검을 출수할 때는 호흡이 달라지거나 근육의 꿈틀거림이 미묘하게 바뀐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느 경우에라도 지금의 완벽한 평정이 깨어질 수밖에 없었다.

진산월은 다시 한 걸음 다가왔다. 이제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사 장 남짓에 불과했고, 진산월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무형지기가 피부를 따갑게 할 만큼 가깝게 느껴졌다.

이렇게 상대의 모습이 눈앞에 선명하게 보이는데도 정확한 위치를 파악할 수 없다니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마침내 진산월은 세 번째 걸음을 내디디며 용영검의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그리고 손에 힘들어감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전신의 근육이 살짝 수축되었다. 그 순간, 당각은 진산월의 위치를 포착할 수 있었다.

팟!

진산월의 허리춤에서 한 줄기 섬광이 번뜩였다. 그 속도는 당각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빨랐다.

당각은 오른손의 엄지에 닿아 있는 검지를 살짝 움직였다. 그러자 엄지와 검지 사이에 놓여 있던 귀왕령이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다.

마침내 당각이 귀왕령을 발출한 것이다.

……

주위는 조용했다.

깊은 적막 속에서 들리는 것은 오직 무당산 높은 봉우리에서 불어오는 잔잔한 바람 소리뿐이었다.

두 사람은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그들 사이의 간격은 당각이 한계선으로 생각했던 삼 장이었다.

한 차례 섬광이 번뜩이고 두 사람이 미동도 않고 있자 주위의 군웅들이 조금씩 동요하기 시작했다.

“뭐야?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글쎄. 신검무적이 출검한 것 같긴 한데, 자세히는 모르겠군.”

“검이 여전히 검집에 꽂혀 있는데? 반쯤 뽑힌 걸 보니 채 출검하지 못한 모양일세.”

“어? 그러고 보니 그렇군. 그럼 그 섬광은 뭐였지?”

“천수나타가 암기를 발출한 것인가?”

중인들은 서로를 마주보며 영문을 몰라 했다. 공터 안이 점차 시끄러워지더니 이내 끓는 찻주전자처럼 시끌벅적해졌다.

하나 누구도 그들 두 사람에게 접근하려는 자는 없었다.

무언지 모를 무거운 분위기가 그들 사이에 감돌고 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러자 사람들은 다시 하나둘씩 입을 다물고 장내를 주시했다.

진산월은 오른손을 용영검의 손잡이에 댄 자세 그대로였다. 용영검은 삼분지 일쯤 검집 밖으로 나와 있었는데, 살짝 검신을 드러낸 용영검에서 흘러나오는 우윳빛 검광이 유난히 시선을 끌었다.

당각 또한 양손을 자연스레 늘어뜨리고 오른손의 엄지와 검지를 맞잡고 있는 모습은 변함이 없었다. 다만 눈이 예리한 사람이라면 검지의 위치가 조금 바뀌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하나 그의 손에 있던 귀왕령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설마 진산월의 몸속으로 벌써 파고든 것이 아닐까? 하나 진산월의 몸 어디에도 귀왕령의 파편이 파고든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주위의 바닥에 무언가 깨알 같은 작은 가루들이 양광을 받아 반짝거리고 있었다.

“아!”

그것을 보자 눈치가 빠른 중인들이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렸다. 완전히 바스러져 가루로 변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린 것이다.

그건 바로 귀왕령의 잔해였다. 놀랍게도 그동안 단 한 번도 목표를 벗어난 적이 없던 귀왕령이 한 줌의 가루로 변해 바닥에 흩뿌려져 있는 것이다.

귀왕령이 사람의 몸에 박혀 있지 않고 가루가 되어 있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그때 비로소 진산월은 삼분지 일쯤 뽑혀 있던 용영검의 검신을 검집 안으로 완전히 밀어 넣었다.

소리도 없이 우윳빛 검광이 사라지자 그것을 신호로 삼기라도 한 듯 당각의 몸이 한 차례 흔들렸다. 당각은 눈을 부릅뜬 채 진산월을 응시하고 있다가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허물어지듯 그 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그와 동시에 그의 목에서 한 줄기 핏물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아앗!”

사방에서 비명과 외침 소리가 거푸 터져 나왔다.

자타가 공인하는 당금 무림 최고의 암기 고수가 자신이 흘린 피바다 속에 누워 있는 광경은 모든 이를 충격에 빠뜨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다는 암기 무공의 최고수가 이토록 허무하게 쓰러질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한동안 주위는 거대한 충격의 여운에 빠져 숨 막힐 듯한 정적에 쌓여 있었다. 하나 다음 순간, 정적은 깨어지고 엄청난 환호와 함성 소리가 장내를 뒤흔들었다.

“와아!”

“신검무적이 천수나타를 꺾었다!”

“신검무적은 천하제일검(天下第一劍)이다!”

“종남파 만세!”

사람들은 마치 자신이 승리한 양 마구 소리치며 고함을 질러댔다. 개중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박수를 치며 눈물을 글썽이는 자들도 있었다.

그들 중 대다수는 어떻게 신검무적의 검이 천수나타의 목을 잘랐는지 제대로 보지도 못했으나,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만으로도 충분히 흥분하고 감격하고 있는 것이다.

현악문 일대를 뒤흔드는 거대한 함성 소리는 진산월이 검을 거두고 장내를 떠난 후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중인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자신이 목격한 장면들을 떠들어 댔으며, 미처 보지 못한 것들을 서로의 상상 속에 이리저리 집어넣으며 그 안의 내용을 짜맞추기에 여념이 없었다.

“틀림없이 신검무적은 검으로 먼저 천수나타의 암기를 박살 낸 후 그 여세를 몰아 그의 목을 가른 것이 분명해.”

“그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그렇다면 암기를 부수고 목을 가른 다음 다시 검을 검집 안에 집어넣었다는 건데, 장내의 아무도 제대로 본 사람이 없단 말인가? 천하제일의 쾌검이라는 분광검객 고심홍도 그렇게는 못 하네.”

“분광검객을 감히 어디서 신검무적에 비교한단 말인가?”

“실력이야 비교가 안 될지 몰라도 쾌검에 관한 한은 분광검객이 당대 제일임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일세.”

“그것도 어제까지의 일이야. 오늘 보지 않았나? 신검무적은 쾌검으로도 천하제일이야.”

“그건 아직 확인되지 않은 일일세.”

“그럼 자네 의견을 말해 보라고.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그거야…….”

“보게. 자네도 달리 할 말이 없잖아. 내가 말한 게 정답이라니까.”

“그건 너무 성급한 판단이라니까.”

두 명의 장한이 정신없이 말다툼을 하고 있는 광경을 지켜보던 귀호가 교리를 돌아보았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교리는 그때까지도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고개를 쳐들고 그를 보더니 퉁명스런 음성을 내뱉었다.

“똑같이 봐 놓고 왜 내게 묻는 건가?”

“솔직히 나는 제대로 못 보았네. 너무 순식간에 여러 가지 일들이 벌어져서 말이지. 자네는 모두 봤지?”

거짓말할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말라는 듯 귀호는 교리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교리는 피식 웃고 말았다.

“궁금한 게 뭔가?”

귀호는 눈을 반짝인 채 교리를 잡아먹을 듯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역시 모두 봤군. 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자네만이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지 정확히 알고 있는 거야.”

교리는 귀호의 그런 모습이 부담스러운지 손사래를 쳤다.

“소리 좀 죽이게. 아무렴 나밖에 없겠나? 몇 사람 더 있을 걸세.”

“아니야. 내가 바보인 줄 아나? 나도 보지 못한 걸 볼 사람이 이곳에 자네 말고 또 있다고는 믿을 수 없네.”

“몇 사람 있다니까.”

귀호는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었다.

“그게 정말인가?”

교리는 분명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최소한 두 명은 있네.”

“그게 누구인가? 그 대단한 자들이?”

“공교롭게도 둘 다 여자로군.”

귀호의 눈이 어느 때보다 예리하게 번뜩였다.

“한 사람은 짐작이 가는군. 천수관음이라면 암기에 관한 한 누구보다 정통한 분이니 눈 또한 예리하겠지. 그분이라면 당각의 모습만 보고도 전후 사정을 알아차릴 수 있을 걸세.”

“잘 아는군.”

“또 한 사람은? 그분 말고 그 정도 실력을 가진 여자가 있다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네.”

“믿기 싫으면 말게. 아무튼 최소한 그 두 여자는 분명하고, 또 다른 실력자가 있는지는 나도 모르겠네. 워낙 사람들이 많아서 어떤 자들이 지켜보고 있었는지 알 수 없으니 말일세.”

“그러니까 그 또 한 여자가 누구냐니까?”

귀호가 다그치자 교리는 빙글거리며 웃었다.

“말해주면 내게 뭘 해줄 텐가?”

“그게 무슨 말인가? 우리 사이에?”

“우리 사이가 어떤 사이인데?”

“그야…….”

말해 놓고도 귀호는 쉽게 뒷말을 잇지 못했다.

교리는 계속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사소한 일은 넘어가지만, 중요한 일은 반드시 대가를 주고받아야 거래가 성립되는 사이 아닌가?”

“그렇지. 그런 사이지.”

“그래서 말할 수 없다는 걸세.”

귀호는 정신이 번쩍 든 모습이었다.

“그 여자가 누구인지 밝히는 게 그렇게 중요한 일인가?”

“사안의 중요도는 그 일을 알고 있는 자가 결정하는 게 우리 사이의 규칙이었지?”

귀호의 얼굴이 구겨졌다.

“제길. 망할 놈의 규칙.”

교리의 눈이 조금 날카로워졌다.

“그래서 규칙을 깰 셈인가?”

귀호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리가 있나?”

“아직도 그 여자가 누구인지 알고 싶나?”

귀호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정도로 궁금하지는 않네. 솔직히 자네가 어떤 대가를 요구할지 너무 부담스러워서 그녀에 대해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아졌네.”

교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다시 빙글 웃었다.

“하지만 나중에는 그 결정을 후회하게 될지도 모를걸.”

“일어나지도 않는 일에 미리 후회하는 성격은 아니라네. 그녀의 정체 말고 다른 일은 물어도 괜찮은가?”

“내가 말했지 않나? 무엇이 궁금하냐고?”

귀호는 그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재빨리 물었다.

“조금 전에 신검무적이 어떻게 천수나타를 쓰러뜨린 건가?”

“자네는 어디까지 봤나?”

“신검무적이 출검하는 것과 동시에 천수나타가 암기를 발출하는 것 같았네. 그런데 그 뒤로는 전혀 모르겠더군.”

“동시는 아닐세. 신검무적의 출검이 조금 더 빨랐지.”

귀호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런가? 만약 그렇더라도 거의 알아차리기 힘든 미세한 차이였을 걸세. 나조차도 거의 동시라고 느꼈으니까.”

“그래도 분명한 차이이지. 그게 승부를 갈랐네.”

“뭐라고? 좀 더 자세히 말해보게.”

“애초부터 두 사람 사이의 승부는 누가 먼저 출수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사항이었네. 천수나타가 신검무적의 위치를 포착해서 먼저 암기를 날리면 천수나타가 이기는 것이고, 신검무적이 출수할 때까지 천수나타가 신검무적의 위치를 알아내지 못하면 신검무적이 이기는 싸움이었네.”

“그렇게 말하니까 너무 간단해 보이는군.”

“처음부터 간단한 승부였네. 두 사람 모두 일단 출수하게 되면 반드시 상대를 쓰러뜨리는 실력을 지니고 있으니, 결국은 누가 먼저 출수를 하느냐로 승부가 갈릴 수밖에 없었네. 자네도 보다시피 결과도 그렇게 나왔고.”

“하지만…….”

“절세고수들의 싸움치고는 너무 단순하다고?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았네. 두 사람 사이의 싸움은 정말 치열했지. 보고 있는 나조차도 손에 땀이 날 정도였으니.”

“나도 그 기분을 느껴보고 싶네. 제발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주게.”

“엄살 부리지 말게. 자네도 대부분은 파악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아마 신검무적이 검도 완전히 뽑지 않고서 귀왕령을 부수고 천수나타의 목을 가른 것이 궁금한 모양인데, 솔직히 그건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닐세.”

“그럼 무엇이 중요한가?”

“신검무적이 자신의 검세를 온전히 발휘할 수 있는 거리까지 천수나타에게 포착당하지 않고 접근했다는 게 정말 중요하고 주목해야 할 일이었네. 나머지는 그에 비하면 부수적인 것이지.”

“나도 신검무적이 사용한 특이한 보법이 궁금하긴 했네. 멀리서 보기에는 그냥 나들이라도 나온 사람처럼 걷는 것 같았는데, 천수나타가 출수하지 못하고 쩔쩔매는 광경이 너무 낯설었네.”

“정말 대단한 보법이었지. 움직임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미묘한 현기(玄機)를 담고 있고, 느린 것 같으면서도 한없이 표홀한 그 움직임은 실로 가공스러운 것이었네. 아마 그걸 직접 눈앞에서 보게 된 천수나타는 정말 미칠 듯한 심정이었을 걸세.”

“……!”

“처음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십여 장이었을 때부터 천수나타의 삼 장 거리까지 도달했을 때까지 신검무적이 걸은 걸음은 정확히 열여덟 걸음이었네. 두 걸음에 한 장씩 걸은 셈이지. 일반적인 보폭보다는 훨씬 넓지만, 강호의 고수가 전력을 다한 보법이라고 생각하면 그리 넓은 걸음은 아니었네. 그가 열여덟 걸음을 걷는 동안 천수나타는 전혀 그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했네. 그것이 결국 승부를 결정지었지.”

귀호는 교리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다가 신중한 음성으로 물었다.

“자네, 혹시 그 보법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는 게 아닌가?”

교리는 그를 힐끔 쳐다보았다. 칼날같이 예리한 시선이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하나?”

“자네가 말하는 모양새가 꼭 그 보법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람 같아서 말이지. 그런가?”

교리는 한동안 귀호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다시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자네는 확실히 같이 다닐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일세. 옆에 있으면 긴장을 늦추지 않게 만드는 재주가 있단 말이지.”

귀호는 어색하게 웃었다.

“몇 안 되는 보잘것없는 재주지.”

“자네 말대로, 예전에 그와 같은 보법에 대해 들은 적이 있네.”

이번에는 귀호가 눈을 반짝이며 그를 쳐다보았다.

“어떤 보법인가?”

“이미 오래전에 실전된 보법일세. 한때 천하를 오시했던 전설적인 보법.”

“그걸 신검무적이 복원해 냈단 말이지?”

“복원한 게 아니라 되돌아갔다고 봐야겠지.”

귀호는 흠칫 놀랐다.

“그럼 그 보법이 종남파의 보법이었단 말인가? 그러면 혹시…….”

귀호는 무언가를 느낀 듯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이백 년 전에 비선을 천하제일의 신법대가로 만들었다는 바로 그 무염십팔보?”

“잘 아는군.”

교리는 태연하게 수긍을 했으나 귀호는 쉽게 믿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신검무적이 펼친 게 정말 무염십팔보라는 말인가? 그건 이미 까마득히 오래전에 실전되어 아무도 익힌 사람이 없다고 했는데…….”

“그런 말을 너무 믿지 말게. 무림에 등장을 하지 않았다고 익힌 사람이 없는 건 아닐세. 그렇지 않았다면 신검무적이 어떻게 오늘 무염십팔보를 펼칠 수 있었겠나?”

“자네는 신검무적에게 무염십팔보가 전해진 내막도 알고 있는 것 같군.”

“눈치 하나는 정말 비상하다니까. 나도 그냥 어렴풋이 짐작 가는 일이 있을 뿐, 정확히는 모르니 더는 묻지 말게.”

교리가 묻지 말라고 하자 귀호는 정말 그 점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의 규칙에 상대가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은 하지 않는다는 것도 있는 모양이었다.

대신 다른 질문을 던졌다.

“이제 신검무적이 어떻게 천수나타에게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는지는 알았네. 그렇다면 신검무적은 어떻게 귀왕령을 부수고 천수나타의 목을 벤 것인가?”

“신검무적이 출검하는 순간에야 비로소 천수나타는 그의 위치를 파악했지. 하나 그때는 이미 신검무적의 검광이 그의 목덜미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네. 천수나타는 다급하게 귀왕령을 발출했으나, 귀왕령이 채 신검무적에게 닿기도 전에 검광이 그의 목을 자르고 지나가 버렸네.”

“신검무적이 쾌검에 능통하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는데, 어떻게 그렇게 빠른 검을 펼칠 수가 있는 거지?”

“그건 말 그대로 검광을 날린 걸세. 검을 뽑아 휘두른 게 아니란 말일세.”

교리의 말에 귀호는 짧은 탄성을 토해냈다.

“아! 이제 알겠네. 신검무적은 단지 검신을 살짝 드러낸 것만으로도 검기를 발출할 수준에 올라가 있는 거였군?”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건 검기가 아니었네. 검기는 검봉(劍鋒)에서 나오기 때문에 검신을 완전히 드러내지 않으면 발출할 수가 없지.”

“그럼 그건 뭔가?”

교리의 눈이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빛났다.

“검강(劍罡).”

그 말에 귀호는 눈을 크게 치켜떴다.

“검기성형(劍氣成形)이 되어야만 이루어진다는 그 검강 말인가?”

“그래. 검을 굳이 검집에서 다 뽑을 필요도 없으니 천수나타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검광이 날아든 걸세. 천수나타로서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지.”

귀호는 교리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지 넋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검강은 젊은 시절의 모용 대협조차 이루지 못한 경지였는데. 그의 나이가 몇인데 벌써 검강을 만들어 낸단 말인가?”

혼잣말을 뇌까리던 귀호가 정신을 차리고 다시 물었다.

“그럼 귀왕령은 어떻게 된 건가? 아무리 신검무적이라도 검강을 동시에 두 개나 발출할 수는 없었을 텐데.”

교리의 입가에 의미를 알기 힘든 미소가 떠올랐다.

“그게 정말 재미있단 말이야. 일전에 경요궁의 여자가 이상한 수법을 사용한 걸 보았지 않았나?”

“천절뢰 말인가?”

“그래. 신검무적은 바로 그 천절뢰로 자신의 미간을 향해 날아드는 귀왕령을 부순 걸세. 검강을 발출함과 동시에 입김을 내뿜더군.”

“그가 천절뢰 수법을 어떻게 알고……. 아, 어제 경요궁이 종남파의 속문이 되었다고 하더니, 그래서였나?”

“아마 그 천절뢰 수법 또한 종남파의 실전된 절학에서 파생된 무공일 거야. 그걸 신검무적이 알고 경요궁에 연락해서 경요궁이 그 사실을 인정하고 속문으로 들어간 것이겠지. 그렇지 않았다면 신검무적을 적으로 삼아야 했을 테니까.”

귀호는 아직도 의문이 완전히 풀리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이제 전후사정을 대략 알겠군. 한 가지만 제외하고는 말이지. 대체 신검무적은 어떻게 귀왕령이 자신의 미간으로 날아든다는 걸 안 것일까?”

“그게 바로 내가 신검무적을 대단하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일세. 암기 무공의 고수들에게 전해지는 삼무용과 삼불출에 대해서는 자네도 알겠지?”

“물론이지. 바로 그 삼불출 중의 불착불출 때문에 천수나타가 저런 꼴이 된 게 아닌가?”

“신검무적은 또 한 가지를 더 이용했네. 바로 삼무용중의 무용지공이지.”

그 말에 귀호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렸다.

“아!”

“이제야 자네도 깨달은 모양이군. 신검무적이 지척까지 접근하여 결정적인 검광을 날리자 천수나타로서는 설사 귀왕령을 발출해도 자신 또한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네. 무용지공이 되고 말 상황이었던 것이지. 그러니 그로서는 단숨에 신검무적의 숨통을 끊어야 할 필요가 있었네. 인체에서 가장 빨리 상대를 쓰러뜨릴 수 있는 부위는…….”

“미간이군.”

“바로 그러하네. 신검무적은 천수나타가 어떻게 반응할지 이미 훤히 꿰뚫어보고 있었던 거야.”

귀호는 교리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탄식을 토해냈다.

“그건 정말 무서운 심기로군.”

“그래. 그러니 어찌 경탄하지 않을 수 있겠나?”

귀호는 그렇게 말하면서 웃고 있는 교리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때의 교리는 정말 더없이 행복한 얼굴로 활짝 웃고 있었다.

그 미소를 보고 있던 귀호의 얼굴이 갑자기 살짝 일그러졌다. 그때 왜인지 여자의 정체를 묻지 않은 걸 후회하게 될 거라는 교리의 말이 문득 떠올랐던 것이다.


랜덤 이미지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