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30권 무당집회(武當集會)편 : 10화
312장. 사인사색(四人四色)
차복승은 중인들의 관심이 자신에게 몰리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석 대공자도 그렇게 느꼈다니 확실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건 모두 비슷한 것 같소.”
“헤헤. 대공자라니 너무 과분한 칭호입니다. 그리고 제게 말씀 놓으십시오.”
“허허. 그래도 석가장의 대공자를 어찌 함부로 대할 수 있겠소?”
“아닙니다. 저는 그게 더 편합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차 대협.”
석성이 오히려 사정하는 투로 말하자 차복승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노부도 편하게 말하겠네. 그래서 자네의 생각은 어떤가?”
석성의 쥐눈이 유난히 반짝거렸다.
“원래 연회의 백미는 뭐니 뭐니 해도 참석하신 분들이 자신의 솜씨를 선보이는 장기 자랑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긴 하지.”
“그렇지만 오늘 이 자리에 오신 분들은 거대 문파의 수장이거나 당금 무림의 최정상에 있는 절정고수들이십니다. 이런 분들에게 솜씨를 보이라고 하는 건 너무 무리한 욕심이고 주제넘은 부탁일 겁니다.”
“그래서 노부도 아쉬워하고만 있었던 걸세.”
석성은 흐르는 땀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한층 낮은 음성으로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그래 보았자 장내의 인물들은 모두 뛰어난 고수들이라 그의 음성을 듣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는 상황이었다. 오히려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귀를 기울이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석성과 차복승은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을 거리낌 없이 토해 냈다.
“하지만 그분들 또한 마음 한구석으로는 다른 사람의 솜씨를 볼 수 있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을 겁니다. 이런 분들이 한자리에 모일 기회란 좀처럼 없다는 것을 스스로 너무도 잘 알고 있을 테니 말입니다.”
“흠. 그럴듯한 생각이군.”
“그러니 우리는 살짝 무대만 만들어 주면 되는 일입니다.”
“어떤 무대 말인가?”
“자신의 실력은 보이지 않으면서도 다른 사람의 솜씨는 구경할 수 있는 무대 말입니다.”
언뜻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차복승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말인가? 좀 더 자세히 말해 보게.”
“각자 자신이 솜씨를 보기를 원하는 사람을 지목하여 가장 많은 지목을 당한 분의 솜씨를 구경하는 겁니다.”
“재미있는 방식이긴 한데, 이렇게 많은 고수들 중 딱 한 사람의 솜씨만 본다는 건 조금 아쉽군.”
“그러면 그분이 다시 몇 사람을 지목하게 하면 됩니다. 세 사람 정도면 어떨까요?”
“그럼 도합 네 사람의 솜씨를 볼 수 있다는 말이로군.”
“그 정도면 괜찮지 않겠습니까?”
차복승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재미있는 생각이긴 한데, 지목당한 한 사람에게 세 사람을 다시 지목하라고 하는 건 조금 과한 일 같군. 그리고 처음 지목당한 사람의 심정도 그리 좋을 것 같지 않고. 이렇게 하면 어떤가?”
“말씀하십시오, 초 대협.”
“처음에 가장 많은 지목을 당한 순서로 두 사람을 뽑고, 그 두 사람이 각자 한 사람씩 지목을 한다면 훨씬 더 자연스러워지지 않겠나?”
석성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열심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정말 현명한 생각이십니다. 같은 네 사람이라도 제 의견보다는 훨씬 나은 방식이로군요.”
주위 사람들의 의사는 물어보지도 않고 두 사람이 주거니 받거니 일방적으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실소를 금할 수 없게 했다. 하나 장내의 누구도 그들의 대화에 간여하거나 반대 의견을 표시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속에 누군가의 솜씨를 보고 싶다는 욕망이 은연중에 잠재해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연회장에 있는 고수들의 수는 십여 명이나 되기에 자신이 네 사람 중에 속하지 않을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는 계산도 없지 않았다. 그렇게 본다면 석성의 제안은 그들의 그런 심리를 아주 교묘하게 파고든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언뜻 차복승의 미소 띤 얼굴이 모용봉을 향했다.
“모용 공자께서는 우리의 의견이 어떻다고 보시오?”
모용봉은 담담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저야 안계를 넓힐 수 있는 일이라면 기꺼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이 자리를 마련하신 공주께서 불편해하지 않을까 걱정되는군요.”
단봉공주는 즉시 그의 말을 받았다.
“아니에요. 연회의 분위기가 너무 가라앉아 있어서 속으로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어요. 당대 최고 고수들의 솜씨를 볼 수 있다면 일부러라도 찾아가 볼 참인데, 나로서는 오히려 바라 마지않는 일이에요.”
연회의 주최자와 주빈인 두 사람이 모두 찬성을 하자 다른 사람들도 반대 의사를 표하지 않았다. 오히려 흥미롭다는 표정을 한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승패를 가르는 비무도 아니고 단순히 솜씨를 보여 주는 것뿐이며, 자신이 선정될 확률 또한 지극히 낮은 편이니 크게 마음의 부담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런 분위기에 일조를 했다.
차복승은 차분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 들으셨겠지만, 연화의 여흥을 돋우기 위해 노부가 잘 굴러가지도 않는 머리를 굴려 작은 무대를 마련하려 하오. 특별히 반대하는 분이 안 계시다면 일을 진행해 볼까 하오.”
강호의 누구보다도 나이가 많은 차복승이 앞장서서 나서자 일이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덩달아 장내의 분위기도 조금씩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곧 지필묵이 준비되고 사람 수에 맞춰진 백지가 주어지자, 연회장에 있던 모든 고수들은 각자 주어진 종이에 가장 솜씨를 보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적었다. 개중에는 노골적으로 자신이 적은 사람의 이름을 겉으로 드러내 보이는 자도 있었고, 아무도 보지 못하게 꽁꽁 숨기는 자도 있었다.
진산월은 특별히 숨길 일도 아니어서 이름을 적은 다음 묵이 마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맞은편에 앉아 있던 석성이 궁금한지 고개를 기웃거리다가 힐끗 진산월이 종이에 적은 이름을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필생의 호적수라고 판단되는 모용봉이나 등장할 때부터 그에게 경각심을 보였던 백자목 중 한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전혀 엉뚱한 이름이 적혀 있었던 것이다.
<분광검객.>
석성이 가뜩이나 작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자 진산월은 담담한 얼굴로 그 종이를 접어 시비에게 건네주었다.
석성은 무심코 무어라고 입을 열려다 진산월의 엄격한 눈빛을 받고는 급히 입을 다물더니 자신도 이름을 적은 종이를 몇 번이나 꼭꼭 접어서 시비에게 주었다.
시비들이 걷은 종이가 모두 모이자 차복승이 하나씩 종이를 펼치기 시작했다. 그의 손에서 종이가 펼쳐질 때마다 중인들의 표정이 조금씩 변하며 주위가 점차로 술렁거렸다.
장내의 인물들이 하나같이 당금 무림을 뒤흔드는 절세의 고수들이라고 해도 대부분은 이삼십 대의 젊은 나이였다. 그래서 이런 식의 유흥은 누구도 즐겨 본 적도 없었고, 들어 본 적도 없었다.
그러니 한 표 한 표가 나올 때마다 절로 흥분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 대부분의 심정은 자기 이름이 적혀 있기를 바라는 마음과 자신의 이름이 적히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서로 뒤엉켜 자신들도 모를 만큼 혼란스러웠다. 그래서인지 침묵을 지키던 인물들 중 상당수가 이름이 밝혀질 때마다 짤막한 탄성을 터뜨리거나 무거운 신음을 발하기도 했다.
이번 연회에 참석한 사람의 수는 모두 열다섯 명이었다.
그들 중 가장 많은 이름이 적힌 사람은 대부분의 예상대로 진산월이었다. 그는 무려 과반수에 가까운 일곱 표를 받았는데, 그중에는 유난히 꾸깃꾸깃 접힌 종이도 있었다.
두 번째로 많은 수가 나온 사람은 의외에도 신목일호 백자목이었다. 처음 등장해서부터 연이어 파란을 일으킨 것에 대한 호기심과 질책이 혼합된 모양이었다. 백자목의 이름은 모두 네 장의 종이에 적혀 있었다.
그 외에 낙일방이 세 표, 분광검객 고심홍이 한 표를 받았다.
그리고 진산월과 함께 가장 많은 표를 받으리라고 예상했던 모용봉의 이름은 의외로 한 장의 종이에도 적혀 있지 않았다.
결과가 모두 밝혀지자 사람들의 표정은 제각각으로 변해 있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는지 당혹스러워하는 자도 있었고, 예상대로 되었다는 듯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는 자도 있었다. 그리고 표에 담긴 의미를 해석하느라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자도 있었다.
어찌 되었건 차분함을 넘어 지루하기까지 했던 연회의 분위기가 일신되어 주위의 공기가 뜨거워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차복승이 열다섯 장의 종이를 다시 한 번 중인들에게 펼쳐 보인 후 너털웃음을 지었다.
“허헛! 노부도 예상 못 한 결과가 나오기는 했지만, 덕분에 크게 안계를 넓힐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어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소. 이름이 적히지 않은 분들 중에는 솜씨를 자랑할 기회를 놓쳐 아쉬워하는 분도 계시겠지만, 아직 그 기회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니 너무 실망하지 마셨으면 하오.”
이어 그는 주름진 눈으로 한 사람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모두 확인한 대로 진 장문인의 이름이 가장 많이 적혀 있었소. 이제 드디어 강호제일 검객의 솜씨를 본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떨려 오는구려.”
모두의 시선이 모인 가운데 진산월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자리에 있는 자들 중 고수 아닌 사람이 없지만, 지금 이 순간 가슴이 설레지 않는 사람도 없었다. 진산월을 좋아하든 그렇지 않든 모든 사람들은 그가 선보일 장면에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
당대제일의 검객이라 칭송받는 진산월은 과연 어떤 놀라운 솜씨를 보여 줄 것인가?
중인들의 따가운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채로 연회장의 중앙에 우뚝 서서 주위를 둘러보던 진산월은 천천히 용영검을 뽑아 들었다. 소리도 없이 뽑혀 나온 용영검에서 흘러나오는 우윳빛 검광이 불빛을 받아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는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진산월은 용영검을 든 채로 잠시 허공의 한 점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다 느릿느릿 오른손을 앞으로 내뻗었다. 그에 따라 용영검이 조금씩 공간을 미끄러져 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모두 눈에 불을 켜고 진산월의 동작 하나하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단 한 순간도 놓치면 일생일대의 광경을 못 보게 된다는 절박감이라도 있는 것처럼 눈도 깜박이지 않은 채 그를 주시하는 자들도 있었다.
하나 이내 그들의 얼굴에는 어리둥절한 빛이 떠올랐다. 진산월의 움직임이 너무도 느렸던 것이다. 신검무적다운 눈부시고 찬란한 검법이 펼쳐지기를 기대했건만, 지금 그들의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지렁이가 기어가듯 한없이 느리고 굼뜬 것이었다. 어찌나 느린지 제법 시간이 흘렀음에도 아직도 직선으로 내뻗은 팔이 완전하게 펼쳐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용영검의 검 끝은 미묘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빠르거나 정교한 변화는 아니었다. 팔의 움직임만큼이나 느리고 단조로운 변화였다. 하나 일직선으로 곧장 앞으로 내뻗는 팔과는 달리 검 끝은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우두커니 진산월의 동작을 보고 있던 모용봉의 입에서 나직한 한숨이 흘러나오는 것도 바로 그때였다.
“흐음.”
그의 바로 옆에 앉아 있던 분광검객 고심홍이 그를 힐끔 쳐다보았다.
“왜 그러나?”
모용봉은 나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가 펼치는 게 무슨 초식인지 알 것 같아서.”
고심홍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 제대로 된 동작 하나도 보이지 않았는데 알아보았단 말인가?”
“다행히 내가 알고 있는 초식이라서 말이지.”
모용봉은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으나, 고심홍은 여전히 의문이 가시지 않는 듯한 표정이었다.
“단순히 앞으로 팔만 내뻗었는데 그걸 어떻게 알아본단 말인가?”
“검 끝을 보게. 위로 살짝 올라가면서 우측 상단을 비스듬히 향하고 있네.”
고심홍은 검도의 고수답게 누구보다 예리한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만큼 모용봉이 지적하지 않아도 용영검의 검 끝이 어떠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지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게 뭐 어때서? 그렇게 시작하는 초식이 못해도 수백 개는 될 걸세.”
“그중에서 그가 익히고 있는 초식은 오직 하나뿐이지.”
“그게 뭔가?”
“유운출곡. 유운검법의 기수식(起手式)일세.”
유운검법이라면 고심홍도 익히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종남파의 비전검법 중 하나이며, 신검무적의 성명절기(聲名絶技)와도 같아서 적어도 이름 자체는 강호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무공이었다.
고심홍은 묘한 눈으로 모용봉을 쳐다보았다.
종남파의 장문인이 뭇 군웅들 앞에서 종남파의 유명한 검법의 기수식을 선보인다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문제는 모용봉이 첫 동작만으로도 신검무적이 펼치는 초식을 알아보았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신검무적이 익힌 대부분의 무공에 대해 모용봉이 훤히 파악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적어도 유운검법의 모든 초식과 동작에 대해 세세하게 알고 있음은 너무도 분명해 보였다.
신검무적이 강호에 혜성같이 등장하여 뭇 고수들을 연파하기 전에는 거의 이름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유운검법을 모용봉은 대체 어떻게 그리도 소상하게 알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신검무적은 유운검법의 기수식을 왜 이토록 답답할 정도로 느리게 펼치고 있는 것일까?
무공을 펼치기 시작한 지 제법 시간이 흘렀음에도 진산월은 이제 겨우 세 번째 동작을 선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즈음에는 장내에 있는 거의 모든 고수들이 지금 진산월이 펼치고 있는 것이 유운검법의 초식 중 하나임을 알아차렸다.
진산월이 어떤 솜씨를 보여 줄지 잔뜩 기대했던 사람들 중에는 실망에 찬 눈빛을 보내는 자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흥미를 잃지 않은 채 진산월의 일거수일투족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진산월은 진중한 표정으로 느릿느릿 유운출곡의 초식을 전개하고 있었다.
원래 유운출곡은 유운검법의 기수식답게 유운검법 특유의 빠르고 변화무쌍한 맛을 담고 있으면서도 유운검법 내의 다른 초식들과 연계하기 수월하도록 자유분방한 면이 많았다. 펼치는 사람의 취향이나 의도에 따라 얼마든지 색다른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초식이었다.
진산월이 움직이는 속도가 워낙 느려서인지 허공을 가르는 용영검에서는 어떠한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하나 가끔씩 불빛을 받아 번쩍이는 용영검의 검광을 보는 중인들은 날카로운 검명(劍鳴)이 귓전을 파고드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던 한 순간, 일부의 사람들이 지루함과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몸을 꼼지락거리고, 또 다른 사람들은 유운출곡의 초식이 다음에 어떻게 변할지 차후의 움직임을 예상하고 있는 바로 그 찰나에 갑자기 용영검이 사라져 버렸다. 장내의 누구도, 심지어는 모용봉조차도 진산월의 손에서 용영검이 언제 어떻게 사라졌는지 미처 알아보지 못했다.
“헛?”
“이게 어떻게 된…….”
몇몇 사람의 입에서 경호성이 터져 나온 다음에야 그들은 용영검이 어느새 진산월의 허리춤에 매어져 있는 검집 속으로 들어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모용봉의 눈에서 번갯불 같은 신광이 흘러나왔다. 다른 사람은 몰랐지만, 그의 바로 옆에 있던 고심홍은 일순간에 모용봉의 몸이 생사대적(生死大敵)을 만난 것처럼 바짝 긴장되었다가 다시 풀어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팽팽한 기운이 장내를 한바탕 휩쓸고 지나가 버렸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이 자신의 무공에 적지 않은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뛰어난 고수들이었지만, 지금 자신들의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보고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원래 검은 발검(拔劍)만큼이나 납검(納劍) 또한 중요하게 여겨졌다. 매끄럽고 부드러운 납검 동작은 보는 이를 찬탄하게 하고, 검을 다루는 검객의 솜씨를 나타내는 중요한 증표이기도 했다.
하나 어느 누구도 발검보다 빠르게 납검을 완료하는 사람은 없었다. 검집에서 검을 뽑는 것과 다시 좁은 검집 안으로 검을 집어넣는 동작이 같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진산월은 장내의 누구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놀라운 납검 솜씨를 보여 주었다. 마치 조금 전의 느리게 펼친 연무는 바로 이것을 보여 주기 위함이라는 듯 너무도 빠르고 눈부신 동작으로 검을 거두어들인 것이다.
진산월이 다시 자기의 자리로 돌아가 앉을 때까지도 연회장은 죽음 같은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사람은 차복승이었다.
짝짝짝!
차복승은 박수를 치며 진산월을 향해 거듭 찬탄의 시선을 보냈다.
“정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솜씨였소. 평범해 보였던 유운출곡이 마지막의 마무리로 인해 놀라운 절초로 바뀐 듯하구려.”
그 말에 정신을 차린 듯 많은 고수들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를 쳤다.
차복승의 말대로 진산월은 이번 연무로 자신의 검법이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느리고 빨리 펼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해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 검을 거두어들인 동작이 그 정도였는데, 만약 그가 전력을 다해 검을 뽑는다면 얼마나 가공할 일이 벌어지겠는가?
그런 생각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강호제일쾌검으로 알려진 고심홍을 힐끔거렸다. 과연 고심홍은 신검무적이 보여 준 솜씨보다 빨리 검을 뽑을 수 있을 것인가?
고심홍의 얼굴은 여전히 냉막했으나, 굳게 다문 입술이 지금 그의 심정을 나타내고 있는 것 같았다.
하나 모용봉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진산월의 납검은 비록 놀랄 만했으나, 모용봉은 그가 갑자기 검을 거두어들인 것에 더욱 주목을 했다. 단순히 납검 동작을 보여 주기 위해 진산월이 일부러 그렇게 느린 연무를 했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모용봉은 진산월이 검을 거두어들이기 직전에 취한 동작이 유운출곡의 후반부임을 알고 있었다. 자신의 마음 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응용이 가능한 구간이었다.
그리고 그 구간에서 진산월은 스스로 검을 거두어들임으로써 더 이상의 변화를 생략해 버렸다. 그것은 단순한 우연인가? 아니면…….
만약 진산월이 검을 거두어들이지 않고 계속 초식을 이어 나갔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모용봉이 알고 있는 유운출곡의 변화가 그대로 끝까지 이어졌을까? 아니면 전혀 다른 무언가가 펼쳐졌을까?
혹시 진산월은 그 무언가를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마지막 순간에 검을 거두어들인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 무언가는…….
모용봉의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때 백자목이 벌떡 일어나 중앙의 자리로 성큼 걸어 나갔기 때문이다.
백자목은 진산월 다음으로 많은 표를 얻었으니 당연히 솜씨를 보일 자격이 있었다. 하나 차복승이 자신을 소개할 시간도 주지 않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다소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모용봉은 백자목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한눈에 그의 심리 상태를 꿰뚫어 보았다.
‘호승심이 끓어올랐군.’
겉으로 드러난 백자목의 얼굴 표정은 평상시와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하나 자세히 살펴보면 입술 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고, 눈에서 묘한 광채가 이글거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백자목이 어떤 일에 맹렬한 흥미를 느꼈거나 불같은 투쟁심에 사로잡혔을 때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징후였다. 백자목과 친한 사이도 아닌 모용봉이 단번에 그것을 알아본 것은 백자목이 처음 자신을 만났을 때도 그런 표정을 지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백자목은 연회장의 중앙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이내 몸을 우뚝 세우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우연인지 그의 시선은 연무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가 점잖게 앉아 있는 진산월을 향해 있었다.
진산월은 숨결조차 흐트러지지 않은 채 담담한 얼굴로 앉아 있었는데, 백자목의 시선이 자신에게 고정되어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백자목은 횃불 같은 신광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진산월을 응시하다가 천천히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의 허리 부분에 걸려 있던 검집에서 소리도 없이 검이 뽑혀 나왔다.
모용봉의 입가에 한 줄기 고졸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 광경은 조금 전에 진산월이 보여 준 모습과 너무도 흡사하여 지금 백자목이 일부러 진산월을 흉내 내고 있다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단단히 불이 붙었군. 신검무적을 놀라게 하겠다는 의도가 너무 드러나 보이는데, 그가 익힌 무공 중 그 정도의 수준에 오른 것이라면 혹시……?’
백자목의 검이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답답할 정도로 느린 그 움직임은 영락없이 진산월의 연무와 닮아 있었다.
다만 검로(劍路)만은 전혀 달랐다.
완만한 몸동작만큼이나 단조롭고 평이하게 움직였던 진산월의 연무와는 달리, 백자목의 검은 사선(斜線)에서 사선으로 움직였다. 그것은 무척이나 파격적이고 거칠어서 백자목이 지금처럼 느리게 펼치지 않았다면 검로의 움직임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변화가 무쌍하고 막측했다.
어찌 보면 자기 흥에 겨워 제멋대로 검을 움직이는 것 같기도 했다.
하나 장내에 있는 대부분의 고수들은 백자목의 검이 말로 표현하기 힘든 기이한 현기(玄機)를 담고 있음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단 한 번도 통상적인 검의 움직임을 따르지 않았지만, 그 속에는 아주 교묘하고 정교한 노림수가 다양한 방식으로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 노림수를 모두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백자목의 검은 진산월과 마찬가지로 어느 순간에 갑자기 멈춰져서 그대로 검집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와 함께 그의 검이 보여 주었던 괴이한 검로 또한 사라져 버렸다.
그 순간, 중인들은 무언지 모를 진한 아쉬움을 느껴야 했다. 조금만 더 그 검로의 움직임이 계속되었다면 틀림없이 경천동지할 검초를 볼 수 있었을 것이라는 강렬한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한동안 연회장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중인들은 각기 다른 상념에 사로잡혀 그에게 박수를 보내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장내에 있는 인물들 중 고수 아닌 사람이 없었지만, 그 누구도 백자목이 방금 펼쳤던 검로가 무슨 검법의 어떠한 초식인지 알지 못했다. 심지어는 그 검 끝이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지 예측한 사람조차 없었다.
그만큼 신기막측하며 괴이무쌍한 검초였다.
아니, 그것을 완성된 검초라고 할 수 있을까?
백자목은 단지 검초의 짧은 부분만을 잠깐 선보였을 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장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뇌리에 적지 않은 충격을 남겼으니, 그의 의도가 어찌 되었건 그의 연무는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휴우. 대단하군.”
누군가의 무거운 한숨 소리가 들려오자 그제야 비로소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미 자리로 돌아가 있던 백자목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내자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향해 가볍게 포권을 해 보였는데, 그의 얼굴에는 처음 등장할 때 보였던 여유만만하고 자신에 찬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차복승이 주름진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감탄성을 토해 냈다.
“허허. 정말 대단한 구경을 했소. 오늘은 정말 복 터진 날이구려. 원래는 진 장문인이 한 분을 지목한 후에야 백 공자의 솜씨를 보려 했는데, 순서가 바뀐 것이 오히려 다행인 것 같소. 이왕 이렇게 된 이상 백 공자께서 다음에 솜씨를 보일 한 분을 먼저 지목해 주시면 되겠구려.”
차복승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백자목은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는 듯 이내 한 사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디 그동안 얼마나 실력이 늘었는지 유 형의 솜씨 한번 봅시다.”
그의 시선을 받은 사람은 가뜩이나 차가운 얼굴이 냉기가 흐를 정도로 냉막해졌다. 그는 다름 아닌 유장령이었다.
유장령은 사람이라도 베어 버릴 듯한 살벌한 눈으로 백자목을 노려보았으나, 백자목은 느긋한 미소를 지은 채 자리에 앉아서 술잔을 기울였다.
돌연 유장령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몇몇 사람들은 그가 당장이라도 백자목을 향해 달려들지나 않을까 우려했으나, 그의 신형은 중앙으로 향해 있었다.
일체의 말이나 예고도 없이 검광이 어른거리며 그의 연무가 시작되었다.
그는 진산월이나 백자목과는 달리 지독할 정도로 빠르고 날카롭게 검을 휘둘렀다. 그 바람에 살벌한 검광이 사방으로 번뜩여서 금시라도 연무장 안이 검기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버릴 것만 같았다.
하나 장내의 고수들 중 누구도 위기감을 느낀 사람은 없었다.
겉보기만 매서울 뿐, 유장령의 검이 철저하게 통제되어 일체의 검기도 밖으로 흘러나오고 있지 않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검광이 화려하게 번뜩이면서도 검기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은 검기의 수발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다는 의미였으며, 그것만으로도 유장령의 검법이 어떠한 경지에 올라와 있는지를 여실히 나타내는 것이었다.
유장령이 펼친 검초는 그의 성격만큼이나 날카롭고 매서웠다. 사방으로 빗발치는 날아가는 검광은 일견 무질서해 보였으나, 그만큼 빠르고 예리해서 한눈에 보아도 절세의 검학임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검기가 철저히 배제된 상태에서도 이렇거늘, 유장령이 본격적으로 검기를 끌어 올린다면 얼마나 가공할 위력을 발휘할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자 중인들은 새삼 유장령이 펼치고 있는 검초에 대해 관심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
유장령이 속한 화산파의 검법은 유려하면서도 화사한 것으로 유명했다. 이십사수 매화검법을 기본 바탕으로 하는 화산파의 검법은 하나같이 일맥상통하는 독특한 흐름을 가지고 있어서 누가 보아도 화산파의 검법임을 알 수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 지금 유장령이 펼치고 있는 것은 난삽할 정도로 어지럽고 날카로운 변화를 보이고 있었다. 중인들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 보았으나, 화산파에 이토록 살벌함이 겉으로 드러난 검법이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순식간에 장내를 난폭하게 뒤집어 놓던 유장령의 검이 갑자기 멈춰 버렸다. 중인들이 눈을 크게 뜨고 보니 어느새 유장령은 검을 멈춘 채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무엇이 그리도 불만스러운지 그의 눈썹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는데, 검을 거둔 동작 그대로 무언가 깊은 상념에 잠긴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나 이내 그는 검을 검집에 집어넣은 후 다시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중인들은 그를 향해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다만 안목이 예리한 몇몇 고수들만은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유장령 또한 진산월이나 백자목과 마찬가지로 검초를 끝까지 펼치지 않고 중반쯤에서 멈췄다는 것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워낙 살벌하고 매서운 기세로 검법을 펼쳤기에 대부분의 인물들은 그것이 하나의 완성된 검초가 아니라는 걸 미처 알지 못했지만, 진산월을 비롯한 최고 수준의 경지에 오른 검객들은 유장령이 펼친 것이 완성된 검초가 아님을 알아보았다.
세 사람의 절정고수가 차례로 연무를 펼쳤는데, 그중 누구도 완성된 검초를 보이지 않았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일까?
하나 진산월은 전혀 다른 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백자목이 펼친 검초와 유장령이 펼친 검초는 분명 전혀 다른 초식이었고, 그 검로 또한 판이하게 달랐다. 그럼에도 그의 눈에는 그들이 펼친 검초가 어딘지 모르게 비슷해 보였던 것이다.
그것은 그와 같은 경지에 오른 검객이 아니라면 알아차리기 힘든 아주 미묘하고 섬세한 차이였다. 사선에서 사선으로 움직이는 백자목의 검초와 난폭할 정도로 빠르고 날카롭게 이동하는 유장령의 검초는 비록 겉모습은 달랐지만 한 핏줄에서 태어난 쌍둥이처럼 유사한 무언가를 지니고 있었다.
진산월은 이런 일이 어떤 경우를 가리키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같은 검법에 속한 검초라면 각기 다른 변화를 지니고 있어도 서로 아주 근접한 유사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한 유사성이야말로 그 검법을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그렇다면 백자목과 유장령은 같은 검법을 나누어 익히고 있는 것일까?
출신 성분부터 모든 것이 판이한 두 사람이 하나의 검법을 공유한다는 것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오만하고 독선적인 그들의 성격으로 보아도 실현성이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진산월은 그 생각을 쉽게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그리고 그때 문득 한 가지 생각을 뇌리에 떠올릴 수 있었다.
모용 대협이 익혔다는 취와미인상의 절학!
일전에 구궁보에서 모용봉은 자신과 견줄 수 있는 네 사람의 기재를 선택하여 그들로 하여금 취와미인상에 숨겨진 절학을 익히게 하겠다고 했으며, 진산월에게 그중 한 자리를 제시했다. 그리고 진산월은 일언지하에 그 제의를 거절해 버렸다.
하나 진산월이 거절했다고 해서 다른 세 사람도 거절했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오히려 쌍수를 들고 모용봉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더욱 높았다. 절세의 무공을 익히고 보다 높은 무학(武學)의 경지를 갈구하는 자들이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신목령의 대제자이며 마도제일의 후기지수라는 백자목과 화산파 최고의 인재인 유장령이라면 충분히 모용봉이 인정한 세 사람에 속할 만했다. 그렇다면 혹시 그들이 조금 전에 펼쳐 보였던 것은 자신들이 취와미인상에서 얻은 절학의 일부분이 아니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그들의 검초가 서로 다른 듯하면서도 일맥상통하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백자목이 진산월의 연무를 보고 호승심이 생겨 자신이 얻은 취와미인상의 절초를 펼쳤고, 그걸 본 유장령 또한 자신이 얻은 걸 선보였다면 세 번째 사람도 자신이 얻은 절학을 펼치는 걸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기회가 주어진다면 말이다.
그의 검초 또한 백자목과 유장령이 펼친 것과 유사하다면 진산월의 추론은 보다 확실하게 증명될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모용봉이 인정한 세 번째 기재는 누구일까?
그리고 그 기재는 이곳 연회장에 있는 것일까?
진산월은 모용봉과 그의 주위를 슬쩍 둘러보았다. 그리고 이내 한 사람의 모습을 시야에 담아 두었다.
구궁보에서 있었던 모용봉의 생일연에 처음으로 등장했던 인물. 생일연 내내 모용봉의 지척에서 떠나지 않았던 사람. 그리고 모용봉이 구궁보를 떠나 무당파에 올 때까지도 그의 곁을 지키고 있는 자.
그런 사람은 오직 한 명뿐이었다.
그래서 차복승이 자신에게 마지막 솜씨를 보일 사람을 지목해 달라고 했을 때, 진산월은 당초 염두에 두었던 분광검객 고심홍이 아닌 전혀 다른 사람을 지목했다.
“오래전부터 구양가에 무공에 미친 희대의 기재가 있다는 말을 듣고 늘 궁금했었소. 구양 공자, 귀하의 솜씨를 보고 싶소.”
중인들 중 대다수는 어리둥절한 빛을 숨기지 않았다. 진산월이 누구를 지목할지 설레는 마음으로 기대하고 있던 사람들은 그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인물을 가리키자 당혹감을 느끼는 모습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당연히 진산월이 자신의 유일한 호적수라고 평가받는 모용봉을 가리키거나, 아니면 당대 제일의 쾌검을 자랑하는 고심홍을 지목할 거라고 확신에 가깝게 믿고 있는 자들도 있었다. 그런데 무림에 잘 알려지지도 않은 상인 가문의 공자를 지목했으니 그들이 놀라고 당혹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중인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구양수진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진산월을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해 보였는데, 그것이 자신을 지목해 준 진산월에 대한 감사의 표시인지 아니면 뭇 고수들 앞에서 실력을 뽐낼 기회를 얻게 된 것에 대한 기쁨의 표현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구양수진의 출검(出劍)은 평범했다.
진산월이나 백자목처럼 느리지도 않았고, 유장령처럼 눈부실 정도로 빠르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의 눈에서는 감탄의 빛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검을 뽑아 드는 구양수진의 동작이 너무도 매끄럽고 부드러웠기 때문이다. 흡사 평생을 검과 함께 살아온 노검객(老劍客)처럼 유연하고 능숙하게 검을 들고 서 있는 구양수진의 모습은 그를 상인 가문의 풋내기 공자라고 은근히 얕잡아 보던 사람들의 인식을 단번에 바꾸어 놓았다.
그의 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중인들의 눈빛도 더할 수 없이 반짝거렸다.
구양수진의 검은 그의 자세만큼이나 깔끔하고 단정했다. 한 점의 흐트러짐도 없는 안정된 동작을 바탕으로 한 검로는 구양수진의 성격을 나타내듯 절제되어 있었고,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 때문인지 자로 잰 듯 규칙적이었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는 백자목과 유장령이 펼쳤던 검초와 전혀 유사점이 없는 듯했다.
하나 진산월은 구양수진이 처음 검을 움직였을 때부터 그가 펼치는 것이 백자목과 유장령의 검과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임을 알아보았다.
그것은 거의 본능과도 같은 것이었다. 자신이 넘어뜨려야 할 커다란 나무를 눈앞에 마주한 나무꾼의 심정이 이러할까? 각기 다른 외양을 지니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차이가 없는 그 검초들은 수많은 가지들을 사방으로 내뻗고 있는 거대한 고목을 연상케 했다.
그 고목의 무성한 가지와 굵은 허리를 과연 자신의 검으로 베어 넘길 수 있을까?
진산월의 눈빛은 더욱더 깊어졌다. 그리고 구양수진의 검 또한 절정으로 치닫듯 더욱 유려하게 움직였다. 그러다 백자목과 유장령이 했던 것처럼 절정의 바로 직전에 그의 검은 거짓말처럼 멈춰졌다.
사람들의 입에서 아쉬운 탄성이 터져 나왔다. 조금 더 이 부드럽고 깔끔한 연무를 보고 싶었던 것이다.
구양수진은 천천히 검을 거두고는 장내를 향해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세찬 박수 소리가 장내를 뒤흔드는 가운데 구양수진은 나올 때처럼 조용히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네 사람의 연무가 모두 끝이 났다.
공교롭게도 그들 네 사람은 하나의 초식을 모두 펼쳐 보이지 않고 중간에서 멈췄으며, 그래서 솜씨를 보인 시간도 그리 길지 않았다. 하나 장내의 누구도 기대에 못 미치거나 그들이 건성으로 연무를 했다고 탓하지 않았다. 오히려 진정한 고수들의 실력을 보았다는 뿌듯함과 묘한 만족감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들이 본 검초들이 아직까지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어떤 안도감이었는지도 몰랐다.
무림인들이란 본래 그런 족속들이었다. 그들의 심리 바탕에는 투쟁심이 깔려 있고, 그것은 자신을 능가하는 타인에 대한 배척감과 두려움을 포함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자신보다 뛰어난 고수들에게 찬사를 보낼지 몰라도, 그들의 마음속에는 상대에 대한 질시와 어떤 식으로든 그를 꺾고 싶다는 경쟁 의식이 도사리고 있었다.
<마음이 꺾이는 순간, 검도 꺾인다.>
이것은 검법을 익히는 검객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전해 내려오는 경구(警句)였다. 그리고 장내의 누구도 아직 자신의 검이 꺾이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인지 연무가 끝났음에도 연회장의 분위기는 여전히 들떠 있었고, 흥분이 식지 않은 뜨거운 시선들이 사방으로 교차되었다.
진산월은 좌중의 그런 분위기를 조용한 눈으로 지켜보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 모용봉을 쳐다보았다. 마침 모용봉도 그를 보고 있었는지 두 사람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허공에서 마주쳤다.
진산월의 눈빛은 더할 수 없이 담담했다. 반면에 모용봉은 유난히 반짝이는 눈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모용봉의 눈은 마치 그에게 자신의 제의를 거절한 것을 후회하지 않느냐고 묻는 것 같았다.
백자목과 유장령, 구양수진이 보여 준 놀라운 검초들이 모두 취와미인상을 보고 얻은 결과물이라면 모용봉의 제의를 거절한 진산월의 선택은 어쩌면 잘못된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하나 진산월은 지금도 당시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았다.
비록 그들 세 사람의 검이 더할 수 없이 괴이하고, 신랄하며, 정교하다고 해도 진산월은 충분히 감당할 자신이 있었다.
더구나 자신에게는 검정중원이 있지 않은가? 검정중원을 완성하는 일조차 아직 마무리 짓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또 다른 절학을 익힌다는 건 과욕에 불과할 뿐이었다. 적어도 진산월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밤이 점점 깊어지자 사람들은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났고, 연회는 자연스레 종막을 맞이했다. 가장 먼저 자리를 뜬 사람은 유장령이었다. 유장령은 연무를 마친 후에도 입을 굳게 다문 채 심기가 불편한 표정이었고, 자연히 그에게 말을 걸거나 다가오는 사람은 없었다.
유장령은 반 시진 동안 혼자 외롭게 앉아 있다가 간다는 말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그의 퇴장이 워낙 조용했기에 중인들 중 몇 사람은 그가 언제 연회장을 떠났는지도 알지 못할 정도였다.
그다음에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은 백자목이었다. 백자목은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입가에 자신에 찬 미소를 지은 채 진산월과 모용봉을 차례로 바라보고는 가볍게 인사를 한 후 당당한 걸음으로 연회장을 벗어났다.
묵묵히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진산월의 뇌리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른 것은 그의 신형이 막 시야에서 사라진 바로 그 직후였다.
‘그러고 보니 그는 오늘 단봉공주에게는 인사는커녕 시선조차 주지 않았구나.’
단봉공주는 오늘 연회의 주최자일 뿐 아니라 누구나가 인정하는 당대 제일의 미녀였다. 남자라면, 더구나 백자목 같은 젊은 나이의 청년이라면 당연히 그녀에게 호기심이 일지 않을 수 없었을 텐데, 백자목은 등장할 때부터 연회장을 떠날 때까지 그녀 쪽으로는 눈길 한 번 던지지 않았다. 심지어 주최자에게 의당 해야 하는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은 것 같았다.
백자목이 비록 마도에 몸을 담고 있는 고수라고는 하나 예의를 모르는 인물은 아닐 텐데, 오늘의 이와 같은 모습은 뜻밖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백자목이 단봉공주에게 일별(一瞥)도 하지 않은 것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의 관심이 온통 진산월에게 집중되어 있어 미처 그녀에게는 신경도 쓰지 못한 것일까?
어느 쪽이 되었건 당대 무림의 제일미녀를 앞에 두고도 시선조차 주지 않은 그의 모습은 진산월의 뇌리에 깊은 인상을 남기는 것이었다.
유장령과 백자목이 떠난 후, 진산월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낙일방이 눈치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그와 나란히 보조를 맞추는 사람이 있었다. 진산월이 쳐다보니 그 사람은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떠올렸다.
“예전에 진 장문인과 함께 밤길을 걷던 기억이 너무 좋아서 이번에도 폐가 되지 않는다면 진 장문인과 함께 하고 싶군요.”
진산월은 석성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석가장의 대공자가 어딜 가든 누가 말릴 수 있겠소?”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그의 말을 용케도 알아들었는지 석성이 쥐눈을 반짝이며 그의 뒤를 따랐다.
“승낙의 뜻으로 알겠습니다. 헤헤.”
진산월은 넉살좋게 웃으며 자신을 따라붙는 석성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고 모용봉과 단봉공주에게 차례로 인사를 했다.
“오늘 좋은 대접을 받고 가오. 나중에 기회가 닿는다면 오늘에 대한 보답으로 두 분을 정중히 모시고 싶소.”
모용봉은 빙긋 웃으며 답례를 했다.
“진 장문인께서 불러 주신다면 기쁜 마음으로 응하겠소.”
단봉공주의 면사 사이로 내비치는 영롱한 눈빛이 잠시 진산월의 담담한 얼굴에 고정되었다.
“연회가 즐거웠는지 모르겠군요. 모쪼록 진 장문인의 무운(武運)을 빌어요.”
무운을 빈다는 그녀의 말은 조만간 벌어질 형산파와의 대결을 염두에 둔 발언이었다.
진산월은 간단히 그녀에게 사례하고는 이내 몸을 돌려 연회장을 벗어났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묵묵히 보고 있던 모용봉이 문득 고개를 돌려 단봉공주를 응시했다.
“오늘 어떠셨소?”
“무얼 말인가요?”
“운이 좋게도 당신이 보고 싶어 했던 네 사람의 연무를 모두 보았는데, 그에 대한 소감이 어떤지 궁금하구려.”
단봉공주는 여전히 진산월이 사라진 방향으로 시선을 고정시킨 채 짤막하게 대답했다.
“인상적이었어요.”
“누구의 연무가 가장 기억에 남았소?”
단봉공주는 그 말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모용봉은 잠시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는 듯했으나, 그녀가 좀처럼 입을 열지 않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을 들은 것 같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살짝 포권을 했다. 구양수진, 고심홍과 함께 모용봉이 연회장을 나갈 때까지도 단봉공주는 여전히 처음의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손님이 모두 빠져나간 연회장은 조금 전의 화려한 모습과는 달리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 보였다.
휘잉!
미처 닫히지 못한 문틈 사이로 때마침 한 줄기 바람이 불어오자 연회장의 곳곳에 내걸린 연등에 비친 그녀의 그림자가 이리저리 흔들거렸다. 그녀는 불빛을 따라 일렁이는 자신의 그림자를 언제까지고 가만히 내려 보고 있었다.
<31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