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30권 무당집회(武當集會)편 : 3화
305장. 선자내자(善者來者)
진산월이 숙소로 들어서자 숙소 앞을 서성이고 있던 동중산이 알아차리고 재빨리 다가왔다.
“오셨습니까?”
“내가 언제 올 줄 알고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게냐?”
“그냥 밤바람을 쐬려고 잠시 나와 있는 것뿐입니다.”
동중산이 멋쩍게 웃으며 눈에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자 진산월은 그의 어깨를 살짝 두드리고는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들어가자.”
동중산은 진산월의 표정이 그다지 밝지 않음을 알아차리고 무당파 장문인을 만나러 간 일이 순탄치 않은 게 아닐까 걱정스러웠으나,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그의 뒤를 따라 몸을 움직였다.
“손님이 몇 사람 찾아왔습니다.”
“누가 왔느냐?”
“담 소저를 찾아온 것으로 보아 담씨세가의 사람들인 듯한데, 떠나기 전에 장문인을 뵙고 인사를 드리겠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장강에서 만난 담중호는 담옥교를 부탁하면서 무당에 도착하면 그녀를 찾아올 사람이 있을 거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진산월은 내실로 가려던 발걸음을 돌려 객청으로 향했다.
무당파에서 종남파의 고수들에게 내준 숙소는 용호전(龍虎殿)이었는데, 모두 여덟 개의 방과 두 개의 크고 작은 대청이 있는 상당히 커다란 건물이었다. 종남파의 인원이 스무 명에 달하기도 했지만, 용호전이 자소궁에 있는 이십여 채의 건물들 중에서도 상당히 큰 편에 속한 것을 보면 무당파에서 종남파에 대한 예우에 적지 않은 신경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었다.
종남파에서는 두 개의 대청 중 작은 대청은 문파 제자들의 휴식 공간으로 쓰고, 그보다 큰 대청은 찾아오는 손님들을 맞이하는 객청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진산월이 객청으로 들어가니 몇 명의 사람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담옥교와 세 명의 남자들이었다. 그들 중 두 명은 비슷한 연배의 중년인들이었고, 다른 한 명은 머리가 하얗게 센 백발의 노인이었다.
진산월이 자리에 앉자 담옥교는 붉은 입술을 살짝 열었다.
“진 장문인 덕분에 여기까지 무사히 올 수 있게 되었어요. 다행히 이제 지인들을 만나게 되었으니, 이쯤에서 이분들과 행동을 같이할 생각이에요.”
“본 파의 일 때문에 담 소저께 몇 번의 어려움을 겪게 한 것에 대해 사과드리겠소.”
“아니에요. 덕분에 강호무림의 맛을 보다 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으니 나로서는 오히려 더욱 반가운 일이었어요.”
“그렇게 생각해 준다니 고마운 일이오.”
“떠나기 전에 진 장문인에게 답례를 하는 게 도리일 것 같아 뵙고 가려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담옥교는 백발의 노인을 진산월에게 소개했다.
“이분은 오라버니가 속한 사문의 존장(尊長)이세요.”
담옥교의 오라버니는 담씨세가의 젊은 가주인 강남절품도 담중호였다. 그는 담씨세가의 무공만을 이어받은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따로 사문이 있는 모양이었다. 명문세가의 적통이 가문의 무공 외에 따로 사사(師事)를 하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아주 드문 일도 아니었기에 진산월은 별생각 없이 백발노인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백발노인은 얼마나 나이를 먹었는지 얼굴의 여기저기에 검버섯이 피어 있고, 눈가에는 진물이라도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하나 진산월을 놀라게 한 것은 고목을 연상케 하는 백발노인의 외모가 아니었다.
백발노인은 깊은 수렁을 보는 듯한 심유(深幽)한 눈빛과 담담하면서도 끝을 알 수 없는 기이한 기운을 지니고 있었다. 탁하거나 거친 기운이 아니라 극도로 농축되고 정제되어 담백해 보이는 기운이었다. 이런 기운일수록 일단 폭발하게 되면 다른 어떤 기운보다 더욱 강력하고 무서운 위력을 발휘한다는 것을 진산월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살아 있는 것이 용하게 느껴질 정도로 늙고 추레한 모습이었으나, 전신에서 흐르는 기운은 진산월로서도 드물게 보는 놀라운 것이었다. 그 기운의 일단이 슬며시 다가오고 있었다.
진산월이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자 백발노인의 주름진 얼굴에 언뜻 미소 비슷한 것이 스치고 지나갔다.
“강호제일검객의 그런 눈빛은 조금 부담스럽군.”
세월의 연륜(年輪)을 여실히 느낄 수 있는 깊은 울림을 담은 음성이었다.
진산월은 그를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기도가 범상치 않은 분이라 잠시 실례를 했습니다. 종남의 진산월입니다.”
“보잘것없는 늙은이를 그렇게 봐 주니 고맙네. 노부는 해우(解憂)라고 하네.”
성명 같기도 하고 법호 같기도 한 묘한 이름이었다. 전신에서 풍기는 기도도 그렇고, 노인의 이름에서도 어딘지 모르게 불가(佛家)의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그렇다고 상대가 밝히지도 않았는데 사문이 어디냐고 물을 수는 없었다.
때마침 한쪽에 말없이 앉아 있던 중년인 중 한 사람이 포권을 하며 자기소개를 하는 덕분에 자칫 어색해질 수도 있는 분위기가 자연스러워졌다.
“대명이 자자한 신검무적을 뵙게 되어 영광이오. 나는 서일훈(徐日勳)이라 하며, 이쪽은 내 동생인 서일광(徐日光)이오.”
진산월은 그들의 이름을 듣자 자신도 답례를 했다.
“이제 보니 강남의 유명한 협사들이신 금릉쌍협(金陵雙俠)이셨군요. 높으신 명성은 익히 들었소.”
금릉쌍협 서씨 형제는 금릉은 물론이고 강소성 전체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명성이 자자한 인물들이었다. 무공이 고강하고 두 사람 사이의 우애가 좋을 뿐 아니라 의협심이 대단해서 협골인심(俠骨仁心)의 협객들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들이 주로 활동하는 곳이 금릉이었고, 담씨세가도 금릉에 있어서 그들은 오래전부터 서로 친밀하게 왕래하는 사이였다.
진산월이 서일훈 형제와 간단히 인사를 주고받은 후에야 비로소 장내의 분위기가 차분히 가라앉았다.
서일훈은 진산월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진 장문인의 명성이 워낙 대단해서 무시무시한 인물인 줄 알고 바짝 긴장했었는데, 예상과 다른 모습에 조금 당황했소.”
“기대에 못 미쳐서 죄송하오.”
“하하. 그게 아니라 진 장문인이 워낙 차갑고 냉정해서 가까이에 가면 말도 꺼내기 힘들다고 들었는데, 막상 뵙고 보니 그렇지 않은 것 같아 반가운 마음에 주절거린 거요. 솔직히 진 장문인이 우리 형제를 무시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소.”
“그럴 리가 있겠소? 나에 대해 무슨 말을 들으셨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사람을 만나는 걸 꺼려하거나 피하는 성격이 아니오.”
“지금 진 장문인을 만나고 보니 확실히 그런 것 같소. 어제 현악문의 결투는 정말 모처럼 보는 가슴 두근거리는 장면이었소. 그때의 진 장문인의 모습이 너무 강렬해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오.”
서일훈은 말을 하면서도 당시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르는지 약간은 흥분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운이 좋아 간신히 승리했을 뿐, 그리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을 거요.”
“그렇지 않소. 당금 무림에서 천수나타의 암기를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소? 그런 천수나타로 하여금 선뜻 손을 쓰지 못하게 제어하여 단 일 초만에 승부를 낸 진 장문인의 모습은 그야말로 검신(劍神)을 보는 것 같았소. 우리끼리 숙소로 돌아가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결론은 진 장문인에 대한 찬사로 이어졌소. 정말 대단한 보법에 놀라운 기세, 그리고 완벽한 발검이었소.”
“과찬의 말씀이오.”
서일훈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초롱초롱한 눈으로 진산월을 응시했다.
“사실은 어제 담 소저를 찾아왔어야 했는데, 결투를 보고 너무 흥분하여 우리끼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시간을 지체하고 말았소. 그래서 오늘 부랴부랴 무당산을 올라서 여기로 온 것이오.”
“근처에서 머무르고 계셨소?”
“석화가 쪽에 있었소. 삼일 전에 도착했는데, 그때는 이미 진 장문인과 천수나타의 대결 때문에 일대가 온통 술렁여서 감히 진 장문인의 평정을 깰까 두려워 찾아올 수가 없었소. 덕분에 눈요기는 실컷 했지만 말이오.”
“눈요기라니?”
서일훈은 나직한 소리를 내어 웃었다.
“하하……. 마침 같은 객잔에 천봉궁의 여인들이 머무르고 있었소. 그래서 아침저녁으로 그녀들을 볼 수 있어서 눈이 정말 즐거웠소. 그녀들은 하나같이 소문만큼이나 대단한 미인들이더구려.”
“용케도 그곳을 숙소로 잡으셨구려.”
“다행히 아는 사람이 미리 손을 써 놔서 어렵지 않게 방을 구할 수 있었소. 아무튼 어제의 대결은 정말 굉장했소. 그 일은 머지않아 강호에 전설로 전해지게 될 거요. 전설의 한 장면을 현장에서 두 눈으로 목격했다고 생각하니 지금까지도 가슴이 뛰는구려.”
서일훈은 손으로 가슴을 짚으며 설레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동생인 서일광은 지금까지 말 한 마디 없을 정도로 조용한 성격인 데 비해 서일훈은 약간은 수다스러우면서도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유쾌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진산월도 그와의 대화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와 몇 마디의 담소를 나누고 있을 때, 동중산이 들어왔다.
동중산은 진산월에게 다가와 낮은 음성으로 속삭이듯 말했다.
“유 대협께서 오셨습니다.”
진산월은 동중산이 말한 유 대협이 유중악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유중악이 늦은 시각에 종남파를 찾아온 것은 무언가 중히 할 이야기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서일훈은 말재주만큼이나 눈치도 빨랐는지 이내 너털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헛! 바쁘신 진 장문인을 우리가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구려. 밤이 늦은 것 같으니 우리는 이만 일어나야겠소.”
“오늘 말씀 즐거웠소.”
“다음에는 진 장문인이 한가할 때 느긋하게 뵈었으면 좋겠소. 그때는 그동안 갈고닦은 나의 설검(舌劍) 솜씨를 유감없이 보여 드리겠소.”
“기대하겠소.”
서일훈은 마지막까지 농 섞인 말을 내뱉었다.
하직 인사를 하고 대청을 벗어난 그들 네 사람은 신선한 밤공기를 맡으며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종남파 고수들이 머물러 있는 용호전을 벗어날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던 서일광이 용호전을 나오자마자 해우 노인을 향해 물었다.
“어떠셨습니까?”
해우 노인은 심유한 눈으로 용호전을 돌아보더니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와 보기를 잘했다. 확실히 강호의 물은 넓고도 깊구나.”
“그 정도였습니까?”
“노납(老衲)은 그에게 두 번의 기운을 쏘아 보냈다. 처음에 미약한 기운을 보냈을 때는 약간의 경계를 하는 것 같더니, 두 번째로 보낸 강력한 기운은 오히려 너무 쉽게 흘려보냈다.”
서일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 번의 기운은 저도 살짝 느꼈는데, 두 번이나 보내셨습니까?”
“그렇다. 육 성의 기운으로 그의 전신을 압박했지. 그는 양손을 맞잡는 것만으로 노납의 기운을 흘려보냈을 뿐 아니라, 그 기운의 여파마저 완벽하게 잠재워 버렸다.”
그제야 서일광은 진산월이 해우 노인을 향해 포권을 했던 것을 기억해 냈다. 단순히 인사를 하는 것으로만 알았는데, 사실은 그때 그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암투(暗鬪)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무형의 기운을 흘려보낸 것도 대단했지만, 그런 기척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소멸시키는 것은 더욱 놀라운 것이었다. 적어도 그 기운의 성질에 대해 파악하고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서일광이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닫고 경악에 찬 표정을 짓고 있을 때, 해우 노인은 조용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그가 처음에 노부의 기운을 맞았을 때 이미 그 특성을 파악했다는 의미지. 내가(內家) 공력에 대해 정통하지 않고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그는 검법뿐 아니라 내가 공력 또한 절정의 경지에 이르렀음이 분명하다. 더욱 두려운 게 무언지 아느냐?”
서일광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노납이 두 번이나 자신을 시험했음에도 그 사실을 전혀 내색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파의 장문인의 신분으로 정체도 모르는 늙은이의 도발을 담담하게 넘겨 버린다는 것은 내면의 수련 또한 잘 되어 있다는 뜻이다. 검(劍)과 공(功), 심(心)의 삼위일체가 모두 완벽에 가까우니 무인(武人)으로서는 최고의 경지에 가깝다고 봐야겠지.”
“그렇다면…….”
“둘째에게 조심하라고 이르거라. 아예 손을 털고 물러나면 좋겠지만, 그 자존심 강하고 자기 멋에 취해 사는 놈이 그럴 리는 없으니 따끔하게 경고라도 해 줘야지. 그래 봤자 경각심을 깨워 주는 정도에 불과하겠지만, 그래도 아예 손을 놓고 있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느냐?”
서일광은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알겠습니다.”
해우 노인은 문득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검은 하늘에 보석처럼 박혀 있는 수많은 별들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해우 노인은 한동안 그 별들을 바라보고 있다가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강호의 별들이 무수히 많다지만 저런 자를 또 보게 될 줄은 몰랐군. 신구(新舊)의 별들 중 마지막까지 빛나는 것은 과연 어느 별이 될까?”
☆ ☆ ☆
유중악은 혼자 오지 않았다. 흑삼객 임지홍과 건장한 체구의 중년인, 그리고 백발의 도인이 그와 동행하고 있었다.
임지홍과는 몇 번의 안면이 있었으나, 중년인과 도인은 모두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중년인은 날카롭고 냉정하게 생긴 사십 대 후반의 인물이었고, 도인은 복장으로 보아 무당파의 인물인 듯했다.
두 사람 모두 전신에서 흐르는 기도가 범상치 않았는데, 특히 도인의 외모가 진산월의 눈길을 끌었다.
도인의 머리는 눈이 내린 듯 허연 백발이었는데, 의외로 얼굴은 젊은 청년처럼 이목구비가 뚜렷했고 눈빛은 유난히 청명했다. 은은한 윤기가 흐르는 피부는 갓난아기의 피부처럼 부드러웠을 뿐 아니라 붉은빛마저 살짝 감돌았는데, 진산월은 그것이 선도(仙道)의 선술(仙術)을 극성에 이르도록 연마하면 나타나는 주안(朱顔)의 효과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보았다.
흔히 무당파는 도가무공의 발원지라고만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보다 더욱 오래되고 전통이 있는 것은 도가의 선술이었다. 원래 선술은 도학(道學)의 한 갈래였으나, 익히기가 힘들고 오랫동안 수련하지 않으면 효과를 볼 수 없기에 지금은 그다지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다. 하나 무당산의 깊숙한 동굴 속에는 아직도 외부와의 접촉도 차단한 채 불철주야 선술을 연마하는 도인들의 수가 적지 않았다.
유중악은 진산월을 보자 먼저 사과부터 했다.
“늦은 시간에 불쑥 찾아오게 되어 미안하오. 원래 진즉 진 장문인을 찾아오려 했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늦어져서, 오늘이라도 진 장문인을 뵙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염치 불고하고 실례를 범하게 되었소.”
“별말씀을 다 하시오. 유 대협의 방문은 언제라도 환영이니 앞으로도 시간이나 장소에 구애받지 말고 언제든지 편할 때 찾아오도록 하시오. 그나저나 혈색이 괜찮아 보이는데, 몸 상태는 많이 나아진 거요?”
“진 장문인 덕분에 완치될 수 있었소. 다시 한 번 진 장문인의 도움에 감사드리오.”
“나보다는 노 신의께서 고생이 많으셨을 것이오. 유 대협의 건강한 모습을 다시 보게 되니 반갑기 그지없소.”
유중악은 자신과 동행한 사람들을 진산월에게 소개했다.
“지홍은 진 장문인도 아실 것이고, 이쪽은 내 친구인 오조추혼(五爪追魂) 신불이(申不易)라 하고, 이분 도인은 무당파의 현수도장(玄修道長)이시오.”
진산월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중년인과 백발 도인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오조추혼 신불이는 조법(爪法)으로 한때 강남 일대를 뒤흔들었던 절세의 고수였다. 그가 안탕산(雁蕩山) 일대를 배경으로 악행을 일삼던 안탕칠자(雁蕩七子)를 단신으로 격살한 이야기는 절강성과 강서성에서 상당히 오랫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전설적인 사건이었다.
그 일을 계기로 안탕산에서 활동하던 팔비신살 곽자령과 친분이 생겼고, 곽자령의 소개로 유중악을 알게 되어 그의 가장 절친한 벗 중 한 사람이 되었으니 사람의 인연이란 참으로 모를 일이었다.
현수도장 또한 만만한 신분의 인물은 아니었다.
현자배(玄字輩)라면 당금 무당파의 장문인인 현령도장과 같은 서열이었다. 현수도장은 무당파에서 무공과 선술을 모두 익힌 몇 안 되는 인물 중 한 사람이었으며, 특히 선술에 관한 한은 무당 내에서도 손꼽히는 경지에 올라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일전에 구궁보에 왔었던 무당십이검의 일인인 청현이 그의 제자임을 생각해 보면 무공 또한 그에 못지않은 실력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서로 간에 인사가 모두 끝나고 좌정하자 진산월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유 대협 덕분에 강호의 고인들을 뵙게 되어 기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설레기도 하오. 특히 현수도장께서는 무당산의 심처(深處)에 기거하시어 좀처럼 만나기 힘든 분으로 알고 있는데, 오늘 이렇게 본 파의 숙소를 찾아 주시니 고맙기 그지없소.”
현수도장은 나직하게 도호를 외웠다.
“무량수불. 아무리 외진 곳에 있어도 당금 무림을 위진(威震)시키는 진 장문인의 명성은 그곳까지 들려오더이다. 유 대협의 부탁이 아니었더라도 진 장문인을 만나는 일이었으면 기꺼이 달려왔을 거요.”
“과찬의 말씀이오.”
진산월의 시선이 자연스레 유중악에게로 향했다.
“유 대협께서 이분들과 함께 나를 찾아오신 것은 단순히 이분들을 내게 소개시켜 주기 위해서만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너무 과민한 거요?”
유중악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그렇지 않소. 오히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진 장문인이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마음이 한결 편하구려. 내가 야밤에 진 장문인을 찾아온 것은 긴히 말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오.”
“말씀하시오. 기꺼이 경청하겠소.”
유중악의 얼굴에는 평상시의 그답지 않게 진중하고 무거운 표정이 감돌고 있었다. 얼핏 보면 비장하기까지 한 그 모습은 강호제일의 풍류한이라는 그의 명성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유중악은 자신의 생각을 가다듬으려는 듯 한동안 허공을 응시하고 있더니 이윽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진 장문인께서는 얼마 전 구궁보에서 있던 모용 공자의 생일연에서 벌어졌던 일련의 사건에 대해 기억하고 계실 거요.”
“물론이오. 당시에 나도 현장에 있었소.”
“내가 구궁보를 찾은 것은 단순히 모용 공자의 생일을 축하해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중차대한 일이 있기 때문이었소. 하지만 뜻밖의 변고로 인해 일을 제대로 진행해 보지도 못하고 전혀 엉뚱한 결과를 빚고 말았소.”
구궁보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진산월도 나름대로 몇 가지 추측을 하고 있었으나,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묵묵히 유중악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다.
“당시 나는 구궁보의 행사에 대해 몇 가지 의문점을 가지고 있었고, 특히 모용 공자에 대해서는 어떤 의구심을 품고 있었소. 그 의구심을 풀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모용 대협을 만나야 할 필요성이 있었소. 하지만 모용 대협은 행적이 워낙 신비로운 분인지라 그분을 만나는 일은 쉽지가 않았소. 그래서 부득이 모용 공자의 생일연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소. 적어도 그날만큼은 반드시 그 분이 구궁보에 계실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오.”
장내에는 모두 다섯 사람이나 있었지만, 유중악의 음성만이 들릴 뿐 누구도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주위가 워낙 조용해서인지 그리 크지 않은 음성임에도 모두의 귀에 아주 선명하게 들렸다.
“사안이 워낙 중대하여 나로서는 최대한 많은 분들의 지원을 받지 않을 수 없었소. 그래서 몇 분께 은밀히 사실을 밝힌 후 도움을 청했고, 그분들은 기꺼이 동참해 주기로 약조하셨소. 그분들이 바로 무당파의 호법진인이신 현우도장과 점창파의 비류단홍검 초일재 대협이셨소. 그분들이 구궁보에서 어떠한 일을 당했는지는 진 장문인도 잘 알고 계실 거요.”
진산월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구궁보에서 벌어진 의문의 살인 사건에 대해서는 나중에 동중산과도 심도 깊은 상의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때 진산월은 그 살인 사건이 겉으로 드러난 정황과는 전혀 다른 내막을 지니고 있으며, 그 배후에 모용봉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유중악의 말이 사실이라면, 모용봉은 유중악의 의도를 사전에 완벽하게 파악하고 치밀한 함정을 파서 오히려 그를 나락으로 떨어뜨린 것이 분명했다.
모용봉은 어떻게 유중악의 의도를 미리 알게 되었을까? 그리고 유중악 같은 절세의 고수도 강호 명숙들의 도움을 청해야 할 정도로 중차대한 일이란 과연 무엇일까?
“당시 두 분의 변고는 나로서는 참으로 참기 힘든 일이었으나, 또한 그만큼 짙은 의혹을 느낀 일이기도 했소. 나는 나름대로 모든 일을 은밀하게 준비했다고 생각했는데, 모용 공자는 나의 모든 행적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소상하게 파악하고 완벽한 함정을 파 놓은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요. 결국 변변치 못한 나 때문에 두 분이 그런 횡액을 당하셨으니, 이 빚을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소.”
유중악의 음성에는 짙은 회한과 자책의 빛이 가득 담겨 있었다.
모용봉 같은 인물을 상대하는 데 별다른 대비를 하지 않은 것은 확실히 유중악의 실수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그만큼 유중악이 음모를 꾸미거나 협잡(挾雜)에 능하지 않다는 말이기도 했다. 언제나 정정당당하고 사람을 대하는 데 진심을 다했던 유중악으로서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강호 명숙들의 목숨 따위는 초개처럼 버릴 수 있는 상대방의 독심(毒心)을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초 대협이야 소정병의 배신으로 참변을 당한 것을 눈으로 직접 보았지만, 현우도장께서 비명에 가신 일은 지금까지도 정확한 내용을 모르고 있소. 한때 조카처럼 아꼈던 소정병의 변절도 뜻밖이었지만, 나를 도와주러 오셨던 현우도장께서 비명에 가셨는데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니 낯부끄러워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정도요.”
유중악의 시선이 진산월에게 향했다.
“진 장문인은 당시 현장에 있었고, 누구보다도 사태를 객관적인 눈으로 지켜볼 수 있는 분이시오. 그래서 당시 사건에 대한 진 장문인의 고견을 듣고 싶소. 말해 주실 수 있겠소?”
진산월은 잠시 침음하다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내 의견을 말씀드리는 것이야 어려울 게 없지만, 그건 지극히 내 개인적인 생각일 뿐인데 유 대협께 도움이 되겠소?”
“진 장문인이 어떤 사람인지는 며칠 동안 지켜본 것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소. 진 장문인은 미혹(迷惑)에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을 지니고 있고, 누구보다 날카롭고 예리한 눈을 가지고 계시오. 진 장문인이라면 내가 미처 보지 못한 것을 보았거나 장막 속에 숨겨진 진실한 내막을 파악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오.”
“나를 너무 치켜세우니 부담스럽소. 나는 그런 대단한 존재가 아니오.”
“내가 아닌 다른 제삼자의 눈으로 당시의 일을 다시 한 번 되짚어 보고 싶소. 그렇게 해서라도 현우도장의 죽음에 대한 비밀을 조금이라도 파헤치고 싶소. 그리고 그 일에 진 장문인보다 적합한 사람은 없다는 것이 나의 솔직한 심정이오.”
마음속을 그대로 드러내는 듯한 유중악의 허심탄회한 말에 이어 지금까지 말없이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현수도장도 입을 열었다.
“무량수불. 현우 사형의 일에 대해서는 빈도의 책임도 크오. 본 파에 잘 계시는 사형께 유 대협의 일을 말씀드려 구궁보로 가시게 했을 뿐 아니라, 제자까지 딸려 보내 그분을 지원했소. 사형의 죽음에 대해 작은 단서라도 얻을 수 있다면 빈도는 무슨 일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소. 모쪼록 빈도의 작은 희망을 꺼지지 않게 해 주셨으면 하오.”
현수도장까지 이렇게 나서자 진산월은 더 이상 거절할 수가 없었다.
“두 분이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그럼 조잡한 의견이나마 밝히도록 하겠소. 이건 순전히 나 혼자만의 의견일 뿐, 그에 대한 어떠한 근거나 증명도 없으니 그 점을 이해해 주시오.”
“당연한 말씀이오.”
진산월은 사건이 벌어진 날 저녁에 동중산과 대화를 나눈 내용을 담담한 음성으로 이야기했다.
모용봉이 굳이 은형신침을 꺼내 현우도장의 시신을 확인한 일, 초일재의 시신은 일이 끝나도록 방치해 두었으면서 현우도장의 시신은 급히 치운 일, 그리고 현우도장의 시신을 치운 다음에야 비로소 초일재를 흉수로 지목한 일 등을 하나씩 거론하고, 현우도장이 과연 독침에 의해 살해당했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시했다.
진산월의 말을 듣고 있던 유중악의 안색은 여러 차례 변했다.
특히 현우도장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 독침이 아닌 술에 의한 음독(飮毒)으로 인한 것일 가능성이 있으며, 그 독침의 흔적이 가짜라면 그것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제일 먼저 현우도장에게 다가간 위해동밖에 없다는 진산월의 추론에는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지며 두 눈에서 무서운 신광이 이글거렸다.
모용봉이 현우도장의 시신을 급히 치운 이유는 초일재를 흉수로 몰기 위한 것이었으며, 소정병으로 하여금 초일재를 살해하게 한 것은 초일재에게 완벽하게 죄를 뒤집어씌우기 위함일 거라는 의견을 마지막으로 진산월의 이야기는 끝이 났다.
말이 모두 끝났음에도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한동안 장내에는 죽음처럼 무거운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침묵을 깬 사람은 유중악이었다. 유중악은 돌연 땅이 꺼질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진 장문인의 말씀을 듣고 보니 내가 얼마나 어리석고 한 치 앞도 제대로 보지 못했는지 알 수 있겠구려.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일을 보고 겪었음에도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했으니, 눈뜬장님이란 나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소.”
유중악의 음성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허탈함과 자책감이 짙게 배어 있었다.
“이건 단순히 나의 개인적인 생각일 뿐, 확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소. 더구나 원래 이런 일일수록 당사자보다는 제삼자가 좀 더 객관적으로 사태를 파악할 수 있는 법이오.”
“나를 위로할 필요는 없소. 이미 그날 이후 환상제일창 유중악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말이오.”
씁쓸하게 중얼거리던 유중악은 돌연 벌떡 일어나 진산월을 향해 깊숙하게 머리를 숙이며 포권을 했다.
“진 장문인 덕분에 미몽(迷夢)에서 깨어나 현우도장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알게 되었소. 진심으로 감사드리오.”
유중악에 이어 현수도장과 임지홍, 심지어는 신불이까지 차례로 일어나 인사를 했다.
진산월은 황급히 몸을 일으켜 그들의 인사에 답례했다.
“아직 진상이 확실히 밝혀진 것도 아닌데, 너무 과한 사례를 받는 것 같소.”
“현우도장과 초 대협의 죽음에 대한 진상은 진 장문인의 말씀이 맞을 거요. 전후의 모든 일이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소. 더욱 중요한 것은 그것으로 인해 지금까지 의문으로만 간직했던 한 가지 일을 확실히 알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오.”
평상시와는 전혀 다른 유중악의 단호한 말에 진산월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무엇이오?”
유중악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모용 공자가 어떻게 내가 하려는 일을 그토록 속속들이 알고 있었느냐는 것이오.”
그 의문은 진산월도 품고 있던 것이었다.
모용봉이 유중악의 일거수일투족을 세세하게 알고 있지 않았다면 구궁보의 살인 사건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 사건들은 철저히 유중악을 옭아매기 위한 것이었으며, 결국 유중악은 그 수렁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렇다면 대체 모용봉은 어떻게 유중악의 행적을 샅샅이 파악하고 있었을까?
떠오르는 생각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유중악 주변의 누군가가 모용봉에게 유중악의 행적을 알려 준 것이다.
유중악도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그런 점을 깨닫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다만 그의 성격상, 자신의 친우를 의심하는 일은 도저히 할 수 없었기에 그 점에 대해서는 마음 깊숙한 곳에 묻어 두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오늘 진산월의 말을 듣게 되자, 유중악은 비로소 그간 심중에 묻어 두었던 의문을 풀게 되었던 것이다.
“현우도장께서는 살아생전에 비룡신군 위해동과 막역한 사이셨소. 그래서 내가 계획을 밝혔을 때, 그분은 친우인 위해동을 동참시키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하셨소. 나는 현우도장과 초 대협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기에, 비밀 유지를 위해서도 더 이상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다고 넌지시 거부 의사를 밝혔소. 모용 공자의 생일연이 있기 전날 저녁에 위해동이 현우도장을 찾아와 두 사람은 모처럼 밤늦도록 대화를 나누며 회포를 풀었는데, 다음 날 현우도장이 나를 대할 때 약간 어색해하시며 몇 번이나 무슨 말씀인가를 하시려다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곤 하셨소. 그때는 영문을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그때 현우도장께서 위해동에게 사실을 밝히고 도움을 청하셨던 모양이오.”
“유 대협께서는 위해동이 현우도장께 그 사실을 전해 듣고 모용 공자에게 발설한 게 아닌가 의심하시는 것이오?”
“그 외에는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없소. 그날 위해동의 행동에서 어딘지 모르게 모용 공자를 편들고 나를 배척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이제 비로소 당시의 모든 상황들이 명확하게 이해가 되는구려.”
유중악의 음성에는 씁쓸함과 분노의 기색이 짙게 배어 있었다.
“현우도장께서는 위해동을 둘도 없는 절친한 벗으로 생각하셨는데, 위해동은 그분의 우정을 배신했을 뿐 아니라 그분의 시신을 훼손하기까지 했으니 인간으로서 어찌 그런 짓을 할 수 있는지…….”
유중악 못지않게 표정이 어두워진 사람은 현수도장이었다.
“무량수불. ‘성인(聖人)은 공호천(工乎天)이나 이졸호인(而拙乎人)이라(성인은 하늘에 관한 일은 잘하나, 사람에 관한 일은 서투르다)’. 현우 사형께서는 누구보다 성품이 충직하시고 인의를 아는 분이셨으나, 사람을 보는 안목은 그에 미치지 못하셨소. 위해동의 관상이 그다지 좋지 못하고 눈빛이 탁해서 사형께 신중히 사귈 것을 말씀드렸으나, 그의 호탕함과 대범함을 칭찬하시고 만남을 이어 가시기에 늘 마음 한구석에 불안함이 있었는데 결국 이런 일이 벌어지고 말았구려.”
현우도장과 초일재의 비참한 죽음을 직접 목격했던 유중악과 임지홍은 당시의 기억이 떠오르는지 표정이 한층 더 침울해졌다.
때마침 진산월이 입을 열지 않았다면 장내의 공기는 한없이 무겁게 가라앉았을 것이다.
“두 분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유 대협께서 계획했던 일은 어떤 식으로든 마무리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오. 유 대협의 의향은 어떠시오?”
아직도 그 일을 계속할 생각이 있느냐는 의미의 물음이었다.
유중악의 눈빛이 어느 때보다 삼엄해지고, 얼굴에는 한 줄기 비장한 표정이 감돌았다.
“당연한 말씀이오. 나는 이미 그 일을 위해서 나의 모든 것을 걸기로 결심한 지 오래요.”
결연한 각오가 여실히 느껴지는 단호한 음성이었다. 진산월은 남자다운 기개와 비장함이 엿보이는 유중악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유 대협께서 그런 희생을 치르면서까지 하려고 하는 그 일이 어떤 것인지 보다 구체적으로 알고 싶소.”
유중악은 진산월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진중하게 물었다.
“진 장문인께서는 그 말씀이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인지 알고 계시오?”
유중악의 계획을 알고 싶다는 것은 판단 여부에 따라 그 일에 동참할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알고 있소.”
“일단 그 일에 대해 듣게 되면 두 번 다시 돌이킬 수 없게 되오.”
“유 대협도 그걸 바라고 나를 찾아오신 게 아니오?”
진산월의 직설적인 물음에 유중악은 잠시 입을 다물고 진산월의 두 눈을 뚫어지게 주시하더니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옳은 말씀이오. 그런 기대가 없었다면 굳이 야밤에 진 장문인을 찾아오는 무례를 저지르지 않았을 거요.”
“그럼 말씀해 주시오. 유 대협께서 모용 공자에 대해 품고 있는 의구심이란 무엇이며, 구궁보에서 모용 대협을 만나 하려 했던 말은 어떤 것이었소?”
평상시의 진산월이었다면 복잡미묘하고 위태로울 게 뻔한 일에 공연히 먼저 끼어들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구파 복귀를 위한 일에 온 심력을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마당에 굳이 다른 사람의 일에 뛰어들어 번잡함을 초래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하나 그 대상이 모용봉이라면 사정이 달랐다. 크게는 당금 무림의 정세와 연관이 있을 수 있는 일이고, 작게는 임영옥으로 인해 빚어진 감정의 빚이 얽혀 있는 일이었다. 두 가지 중 어느 것이 그에게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는 그 자신조차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유중악이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걸 만큼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용봉의 비밀에 대해서 반드시 알아야겠다는 마음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한동안 침음하던 유중악은 이윽고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내가 구궁보의 행사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한 것은 사오 년 전부터였소. 언제부터인가 모용 대협이 외부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더니, 구궁보에서도 무림의 일에 대해 수수방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소. 그 생각이 더욱 짙어진 것은 사 년 전의 무림대집회 때였소. 무림대집회는 당시 무림의 총력을 기울인 중대한 모임이었으니 당연히 구궁보에서도 전력을 기울여야 하건만, 모용 대협은 나타나지도 않고 생색을 내듯 모용 공자와 두 명의 호위만이 참여했을 뿐이었소. 그리고 진 장문인도 알다시피 당시의 일은 별다른 성과 없이 흐지부지 종료되고 말았소.”
별다른 성과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철저히 실패로 끝났다는 것을 진산월은 알고 있었으나 굳이 그 점을 밝히지 않았다. 유중악도 아마 대략의 사정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때만 해도 나는 약간의 아쉬움은 있을지언정 구궁보나 모용 공자에 대해 어떠한 의구심도 가지고 있지 않았소. 그런데 그때 우연히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소. 그리고 그로부터 내 일생을 걸 만한 중대한 일을 전해 듣게 되었소. 그가 바로 여기 있는 지홍이오.”
진산월의 시선이 임지홍에게로 향했다.
흑삼객 임지홍.
솔직히 진산월은 구궁보의 일 이전에는 그의 이름조차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가 강서와 복건 일대에서 나름대로 명성을 날린 고수라고 해도, 서안에서 문파의 사활을 걸고 투쟁을 벌이던 진산월이 강남의 한쪽 귀퉁이에서 활동하던 그를 알 리가 없었다.
구궁보를 떠난 후 진산월이 그를 다시 본 것은 청연각에서였다. 그는 곽자령과 제갈도를 비롯한 몇 명의 제갈 세가 고수들과 함께 종남파의 거처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진산월은 임지홍과 짤막한 인사를 나누었다. 임지홍은 곧 곽자령과 함께 유중악이 있는 곳으로 떠났고, 어제의 연회에서 다시 잠깐 얼굴을 비쳤다.
그리고 오늘이 세 번째로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임지홍은 말이 별로 없고 조용한 인물이었다. 항상 얼굴 한쪽에 어두운 그림자를 띠고 있어서 쉽게 말을 붙이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진산월도 아직 그와 사적으로는 말 한 마디 주고받은 적이 없었다.
임지홍은 진산월의 시선을 받자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그를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하는 것이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소. 악양(岳陽)의 후홍지(侯弘志)라 하오.”
“후홍지? 임씨 성이 아니란 말씀이오?”
진산월이 의아한 듯 묻자 임지홍은 숙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후홍지, 이것이 나의 본명이오.”
유중악이 그의 말을 받았다.
“그는 과거 강호십대고수(江湖十代高手)로 꼽히던 벽력진군(霹靂眞君) 후관일(侯冠日) 대협의 후손이오.”
강호십대고수!
너무도 오래되어 지금은 기억조차 제대로 하는 사람이 없지만, 한때는 모든 무림인들의 우상과도 같은 존재들이었다. 하나 태양과도 같이 찬란했던 그들의 명성은 어느 순간에 땅바닥에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바로 혈마 좌무기 때문이었다.
오십여 년 전, 혈마 좌무기는 단신으로 강호십대고수들을 차례로 연파하여 강호무림을 공포에 떨게 했다. 그때 그의 손에 패한 고수들 중 절반 이상이 그의 손에 숨을 거두었고, 살아남은 사람들도 심각한 부상에 시달려야 했다. 강호무림이 온통 좌무기에 의해 피에 젖을 때, 혜성같이 나타나 그를 물리친 사람이 바로 검성 모용단죽이었다.
후관일은 당시 좌무기의 손에 패하고도 목숨을 부지한 몇 안 되는 고수들 중 한 사람이었다. 후관일은 좌무기를 꺾은 모용단죽을 평생의 은인으로 생각하고, 매년 모용단죽이 좌무기를 이긴 날이면 모용단죽을 찾아가 인사를 하곤 했다.
그런데 오 년 전에 노구를 이끌고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모용단죽에게 인사를 하겠다며 길을 떠난 후관일은 영영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후관일의 아들은 천풍신객(天風神客) 후천송(侯天松)인데, 그는 인물됨이 정명하고 성격이 호탕하여 따르는 친우들이 많았다. 두 달이 넘도록 후관일이 돌아오지 않자 후천송은 부친을 찾아 구궁보로 떠났다. 그것이 후천송의 마지막이었다.
후천송의 아들인 후홍지는 당시 무공 수련을 위해 멀리 복건성의 오지에 가 있었다. 조부와 부친의 실종 소식을 뒤늦게 접한 후홍지는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왔으나, 누구도 두 부자(父子)의 행방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후관일은 물론이고 후천송 또한 무공이 고강하고 성격이 충후해서 결코 사고를 저지르거나 남에게 봉변을 당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더구나 한 사람도 아니고 그들 두 사람이 모두 차례로 종적이 끊긴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후홍지는 두 사람의 실종에 무언가 중대한 비밀이 있음을 직감하고 어머니의 성을 따서 이름을 임지홍으로 바꾸고는 조심스레 조부와 부친의 행방을 찾기 시작했다. 다행인지 어려서부터 집을 떠나 있던 그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신분을 감추는 일은 어렵지 않게 이루어졌다.
몇 달의 수소문 끝에 그는 후관일이 구궁보가 있는 구화산 근처까지 갔었다는 것을 어렵사리 알아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후관일은 구궁보로 가지 않고 구화산 입구에서 발을 돌려 막부산(幕阜山)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실종된 것이다.
부친인 후천송의 행적은 더욱 이상했다.
후천송이 구궁보에 들른 것은 확실했다. 하나 그는 바로 그날 오후에 구궁보를 떠났으며, 구화산 입구에서 한동안 머물렀다. 그러다 갑자기 막부산 방향으로 이동했고, 그것이 그의 모습이 마지막으로 목격된 순간이었다.
후홍지는 처음에는 막부산에 의심을 품고 그 일대를 뒤졌으나, 이내 자신이 무언가 큰 착각을 했음을 깨달았다. 두 사람이 비록 막부산 방향으로 이동했으나, 그렇다고 그들의 목적지가 막부산이라는 보장은 없었다. 확실한 것은 두 사람이 모두 구궁보에서 서쪽 방향으로 이동했다는 것뿐이었다.
후천송은 후관일의 행적을 추적하느라 그쪽으로 움직였을 테니, 결국 관건은 후관일이 왜 구궁보로 가지 않고 구궁보의 지척에서 서쪽으로 이동했느냐하는 것이었다. 모용 대협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길을 떠난 후관일이 구궁보 앞에서 방향을 돌린 것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것에는 반드시 곡절이 있을 것이며, 그것을 알게 되면 조부와 부친이 실종된 이유도 알 수 있을 것이다.
후홍지는 그 원인을 구궁보에서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후관일의 목적지는 구궁보였으며, 그가 구궁보 앞에서 방향을 바꾼 이유도 결국은 구궁보에 있을 것이라는 것이 그의 추론이었다.
그 추론을 증명하기 위해 후홍지는 상당 기간 동안 구궁보의 근처에서 구궁보를 면밀히 지켜보았다. 그러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모용 대협이 단 한 번도 구궁보로 출입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모용 대협이 구궁보에 머물러 있는 것을 좋아한다고 해도 몇 번은 외부 출입을 할 텐데, 구궁보 바깥으로 고정적으로 출입을 하는 사람은 모용 공자뿐이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강호무림에는 모용 대협에 대한 이런저런 소문이 들렸다. 그 소문의 출처는 당연히 모용 공자였다.
차츰 모용 공자에 대한 의심이 들기 시작할 무렵, 후홍지는 한 가지 결정적인 단서를 찾아냈다.
조부인 후관일과 함께 강호십대고수의 일인이었으며, 모용 대협의 열렬한 추종자 중 한 사람인 창룡검객(蒼龍劍客) 우지민(宇持敏)이 모용 대협을 찾아왔다. 그는 모용 대협이 자리에 없다는 말에 모용 공자와 면담을 나누고는 구궁보를 떠났다.
후홍지는 무언지 모를 이상한 예감에 우지민의 뒤를 조심스레 밟았다. 구궁보를 나온 우지민은 좌측으로 방향을 틀어 막부산 쪽으로 향했다. 그가 막 막부산의 초입에 다다랐을 때, 복면을 한 누군가가 나타나 그를 암습했다. 복면인의 무공은 실로 놀라워서 검법이 화경에 이른 우지민도 그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복면인의 손에 쓰러지기 직전에 우지민은 복면인의 신분을 알아차린 듯 경악 어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네가 감히……!”
우지민이 숨을 거둔 후, 복면인은 화골산(化骨散)을 뿌려 시신을 없앴다.
“흐음.”
한동안 시신이 녹은 자리를 바라보던 복면인은 한숨인지 탄식인지 모를 소리를 내뱉고는 이내 장내를 떠났다. 그가 사라진 후에야 비로소 후홍지는 숨어 있던 곳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의 눈에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일을 본 사람처럼 경악과 불신 그리고 두려움의 빛이 가득 담겨 있었다. 마지막 순간에 복면을 벗고 신형을 날릴 때 드러난 복면인의 얼굴은 다름 아닌 모용 공자였던 것이다.
“그때의 놀라움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것이었소. 나는 내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의심했지만, 몇 번을 되새겨 보아도 그 복면인은 모용 공자가 분명했소.”
후홍지의 음성에는 당시에 느꼈던 당혹과 경악의 감정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장내에는 침 삼키는 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한 적막감이 감돌고 있었다. 그간의 사정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그 말을 처음 듣는 진산월 또한 입을 굳게 다문 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후홍지는 잠시 허공을 응시하더니 다시 말을 잇기 시작했다.
“막상 모용 공자가 우 대협을 살해한 현장을 목격했어도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한 심정이었소. 내가 목격한 것을 말해 보았자 사람들이 믿어 주지도 않을 것이며, 그에 대한 증거도 전혀 없기 때문이오. 그때 모용 대협이 떠올랐소. 그분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공정하게 사건을 처리할 것이며, 모용 공자를 징치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오.”
후홍지의 생각은 타당한 것이었다.
설사 모용 공자가 남들의 눈을 피해 강호의 명숙을 살해한 사실이 알려진다 할지라도 그를 제압하여 잘못을 추궁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강호의 누가 모용 공자의 뒤를 조사하여 그의 죄를 찾아내고 벌할 수 있단 말인가?
있다면 오직 한 사람, 모용 대협뿐이었다.
“나는 모용 대협을 만나기 위해 구궁보로 잠입할 필요성을 느꼈소. 때마침 구궁보의 주방에서 하인을 모집하기에 지원하여 구궁보로 들어갈 수 있었소. 어떻게든 모용 공자의 눈을 피해 모용 대협에게 내가 목격한 일을 고하고, 그 일에 얽힌 진상을 밝히는 것이 나의 목표였소.”
하나 어렵사리 구궁보에 들어간 후홍지는 이내 커다란 좌절감을 느껴야 했다. 구궁보에서 하인의 신분으로는 모용 대협을 만나기는커녕 그의 처소 근처에도 접근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언뜻 보기에는 별다른 경비도 없이 아름다운 화원들로 이루어진 아담한 별장 같았는데, 구궁보의 내부는 온갖 기이한 절진들과 기관장치로 도배되어 있어 허락을 받지 않은 자는 단 한 걸음도 내부로 들어갈 수 없는 용담호혈과 같았다.
후홍지는 거의 반년이 다 되도록 주방과 하인들이 머무는 거처 외에는 어느 곳에도 가 보지 못했다. 심지어 모용 공자의 얼굴조차 먼발치에서 몇 번 본 것이 전부였다.
후홍지는 포기하지 않고 모용 대협의 행방이라도 알기 위해 은밀히 주위 사람들에게 귀동냥을 했으나, 그들 중 누구도 모용 대협이 구궁보에 있는지를 확인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구궁보의 모든 일은 모용 공자를 거치게 되었으며, 구궁보 전체가 완벽하게 모용 공자의 지휘하에 있음을 재차 확인했을 뿐이었다.
그런 세월이 몇 달이나 계속되자 후홍지도 지칠 수밖에 없었다. 모용 대협은 흡사 존재 자체가 사라진 사람처럼 구궁보 내의 누구도 그가 정확히 어디 있는지 알지 못했다. 별로 크지도 않은 구궁보에서 반년이 넘도록 모습조차 보이지 않은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구궁보 전체가 술렁이는 일이 일어났다. 모용 공자가 소림사의 대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측근들과 함께 구궁보를 떠난 것이다.
후홍지는 직감적으로 이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임을 알아차렸다. 구궁보를 이끌어 왔던 모용 공자가 자리에 없자 구궁보 전체의 분위기가 느슨하게 풀어지고 내부의 경계 또한 허술해졌던 것이다.
모용 공자가 외부로 나간 지 한 달쯤 지나자 이제는 몇몇 중지(重地)를 제외하고는 특별히 지키는 사람들이 없었다. 달이 뜨지 않는 그믐밤에 후홍지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 모용 대협의 거처로 알려진 망천정 너머의 후원으로 잠입했다. 몇 번 발각당할 위험에 처하기도 했으나, 하인으로 일하면서 파악해 둔 지리와 그간 쌓은 무공으로 위기를 넘기고 간신히 후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그가 본 것은 하나의 작은 초막이었다. 초막 안은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기는 했으나, 오랫동안 사람이 기거하지 않은 듯 냉기가 감돌고 있었다. 몇 번이나 초막 안을 살펴본 후홍지가 알 수 있는 것은 모용 대협이 상당한 기간 동안 이 초막에 오지 않았다는 사실뿐이었다.
대체 모용 대협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그리고 모용 공자는 모용 대협의 부재(不在)를 왜 철저한 비밀에 부친 것일까?
숱한 의문이 머리를 어지럽혔으나,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후홍지는 허탈한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쓸쓸히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며칠 뒤, 후홍지는 구궁보의 하인 생활을 그만두고 강호로 나왔다. 더 이상은 구궁보에서 어떠한 것도 알아낼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구궁보에서의 반 년 남짓 되는 세월 동안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구궁보가 철저히 모용 공자에게 장악되어 있고, 어디에도 모용 대협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뿐이었소. 심지어는 모용 대협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몇 가지 일들도 사실은 모용 공자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소. 그래서 나는 혹시 모용 대협이 뜻밖의 변(變)을 당한 게 아닌가 하고 의심하게 되었소.”
후홍지는 강호로 나와 자신을 도와줄 사람을 간절히 찾아다녔다. 후관일의 친구들은 거의 대부분이 세상을 떠났으나, 부친인 후천송의 지인들 중에는 강호에서 활약하고 있는 명숙들이 적지 않았다.
하나 그들 중 모용 공자라는 이름에 눌리지 않고 자신을 도와줄 사람을 찾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말을 아예 믿지 않았고, 이야기를 반도 듣지 않고 오히려 화를 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그때마다 후홍지는 다시 모습을 감추고 한동안 쥐 죽은 듯 숨어 지내야 했다. 그런 세월이 계속되자 후홍지는 점차 암담한 절망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과 심한 좌절감에 젖어 있던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사람이 바로 유중악이었다.
“유 대협은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 주었을 뿐 아니라 내 말의 진정성을 믿어 주고 지원을 약속했소. 그때부터 우리는 모용 공자와 구궁보를 조심스레 관찰하며 우리의 의견에 동조해 줄 사람들을 물색해 왔소.”
유중악은 믿을 만한 친우들에게 사정을 설명해서 동의를 구했고, 그들의 도움으로 몇 명의 유력한 인사들을 포섭할 수 있었다. 그들이 바로 무당파의 현수도장과 점창의 초일재 대협이었다.
유중악은 비밀리에 숨어서 일을 진행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하고 정식으로 그 일을 공개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 시기를 모용 공자의 생일연으로 잡았다.
만약 모용 대협이 멀쩡하다면 모용 공자의 생일연에 참석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날에도 모용 대협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그것은 모용 대협의 신상에 치명적인 문제가 있는 것이므로 충분히 그에 대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것이다.
모용 공자의 생일연에는 그를 축하하기 위해 많은 군웅들이 운집할 것이므로 그 군웅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그 일을 거론한다면 아무리 모용 공자라 해도 그들을 막을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 유중악의 생각이었다.
현수도장은 자신보다는 강호에 명성이 더욱 높은 자신의 사형 현우도장을 추천했고, 현우도장은 현수도장의 부탁을 쾌히 승낙했다. 무엇보다 현우도장은 후천송과 상당한 친분이 있는 사이였기에 후천송의 실종에 나름대로 적지 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초일재 또한 후천송과 친분이 두터웠던지라 평소 안면이 있는 신불이의 제의에 기꺼이 동참을 약속했다.
하나 그들의 계획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미처 모용 공자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도 전에 뜻밖의 참변이 일어나 현우도장과 초일재가 모두 비명에 쓰러져 버린 것이다. 그와 함께 후홍지의 오랜 염원도 산산이 깨어져 버렸다.
“현우도장과 초 대협께서 연거푸 변을 당하시고 유 대협이 흉수로 지목되었을 때, 나는 군웅들 앞에서 모든 사실을 밝히고자 했소. 하나 유 대협께서는 시기상조라 생각하시고 스스로 멍에를 뒤집어쓰는 일을 선택하셨소.”
후홍지의 얼굴은 비통에 찬 표정이 가득 떠올라 있었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자신을 돕기 위해 홀연히 나섰던 당대 제일의 기남아가 살인범이라는 누명을 쓰고 오욕의 구렁텅이에 빠지고 말았으니 옆에서 그것을 지켜봐야만 했던 후홍지의 심정은 그야말로 죽음보다 더욱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나 때문에 유 대협께서 그런 치욕을 당하고 영명(榮名)을 더럽혔으니, 나는…… 나는…….”
후홍지는 차마 말을 맺지 못했다.
그동안 아무런 표정 없이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만 있던 유중악이 담담한 음성을 내뱉었다.
“나 때문에 미안해할 것 없네. 이런 정도의 고난은 자네를 돕기로 결심한 그날부터 이미 각오했던 일이었네.”
“유 대협…….”
“이것은 단순히 자네 집안의 일이 아니라 강호무림의 안위를 위협하는 중대한 일이네. 모용 공자와 모용 대협에 대한 의문을 풀지 않고서는 서장 무림과의 싸움에 어떠한 승산도 바라볼 수 없을 걸세.”
유중악의 시선이 진산월에게로 향했다.
“진 장문인은 그날 구궁보에서 모용 대협을 직접 만났다고 들었소. 그게 사실이오?”
“모용 공자가 모용 대협의 처소까지 나를 안내해 주었고, 그 안에서 한 사람을 만난 건 사실이오.”
진산월의 말 속에는 묘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 유중악은 단번에 숨은 의미를 알아냈다.
“진 장문인은 그때 만난 사람이 진짜 모용 대협인지 확신할 수 있겠소?”
“나는 단지 모용 대협의 처소에 있는 사람을 만났을 뿐이오. 그 전에는 단 한 번도 모용 대협을 뵌 적이 없으니 나로서는 섣불리 어느 것도 확신할 수 없소.”
유중악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 진지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사실 우리는 처음에는 모용 공자가 모용 대협을 강제로 감금한 것이 아닐까 의심했었소. 당시의 모든 정황이 그렇게 보였으니 말이오.”
그것은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일이었다. 모용 대협이 오랫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모용 공자가 모용 대협을 대신하여 모든 일들을 주관했다면 누구나가 한 번쯤은 그런 의심을 가질 법도 했다.
“하지만 진 장문인이 모용 대협을 만났다는 말을 듣고는 머리가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소. 모용 대협이 진짜 영어(囹圄)의 몸이 되어 있다면 모용 공자가 외인을 모용 대협과 만나게 할 리가 없기 때문이오.”
“……!”
“그러다 며칠 전에 만난 신수옥녀에게서 뜻밖의 말을 들었소. 바로 진 장문인이 만난 모용 대협이 가짜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소.”
진산월이 음양신마와 싸워 그를 격살시킨 후, 유중악은 잠깐 신수옥녀 능자하와 대화를 한 적이 있었다. 아마 그때 능자하는 유중악에게 모용단죽에 대한 일부 비밀을 토설한 모양이었다.
유중악이 구궁보에서 어떤 일을 당했는지 잘 알고 있는 그녀로서는 과거의 연인에게 그 일의 내막에 대한 작은 단서라도 알려주고 싶었을 것이다.
유중악은 진산월의 얼굴을 정면으로 주시했다.
“진 장문인이 조금도 놀라지 않는 것을 보니 진 장문인도 그에 대해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던 모양이구려.”
진산월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자세한 사정은 밝히지 않았다.
그것은 천수관음의 개인적인 문제가 얽혀 있는지라 그녀의 허락을 받지 않고 남에게 발설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내가 만난 사람이 진짜 모용 대협이 아닐 거라는 정황증거가 있기는 하오. 유 대협께서 궁금하시면 다음에 능 여협을 만났을 때 물어보시면 될 거요.”
진산월은 넌지시 그 일이 천수관음 사제들과 연관이 있음을 암시했고, 유중악은 그에 대해 충분한 수긍을 했다.
중요한 건 진산월이 만난 모용 대협이 가짜인 이상 모용 공자에 대한 의심은 짙어질 수밖에 없고, 이제는 더욱더 공개적으로 그 일을 밝혀야 할 시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무당산으로 온 것은 무림집회에서 그 일을 공개적인 안건으로 만들기 위해서였소. 중간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으나 진 장문인 덕분에 무사히 무당산에 도착한 이상, 그 일은 반드시 이루어지고야 말 거요.”
“앞으로 어떻게 할 계획이시오?”
유중악의 안광이 어느 때보다 예리하게 빛났다.
“모용 공자는 집회의 마지막 날에 참석한다고 하오. 그날 모용 공자에 얽힌 일들을 정식으로 거론할 생각이오.”
“쉽지 않은 일이 될 거요.”
모용봉의 현재 지위나 강호상에서의 비중으로 보아 그의 죄를 밝히는 일은 결코 수월하게 진행되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무림인들은 그에 대해 절대적인 성원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유중악은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알고 있소. 하나 한 분의 도움을 받을 수만 있다면 아무리 모용 공자라도 어쩔 수 없을 거요.”
“그분이 누구요?”
유중악은 현수도장을 돌아보았다.
현수도장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유중악은 천천히 한 사람의 이름을 밝혔다.
“환우삼성의 한 분이신 대엽진인이시오.내일 현수도장과 함께 그분을 찾아뵙기로 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