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30권 무당집회(武當集會)편 : 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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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30권 무당집회(武當集會)편 : 4화


306장. 계도우도(鷄刀牛刀)

한 사내가 서안의 저자거리를 활개 치듯 걷고 있었다.

두 팔을 휘저으며 팔자걸음으로 걷는 그의 모습은 방만해 보이기도 했고, 다소 우스꽝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어린아이와 어른의 중간쯤 되는 작은 키에 여인처럼 왜소한 어깨, 호리호리한 몸매에 유난히 길쭉한 턱을 가진 그 사내는 얼굴마저 곰보 자국이 가득 나 있어 볼품없고 초라해 보였다.

하나 저자거리의 누구도 그를 흉보거나 멸시의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휘적거리며 걷는 그를 피해 모두들 거리 양쪽으로 바짝 붙어서 조심스레 지나가고 있었다. 심지어는 그와 눈을 마주치는 사람도 없었고, 간혹 우연히 눈이라도 마주치게 되면 하나같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황급히 몸을 돌리는 것이었다.

왜소한 체구의 사내는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이를 드러내고 웃었는데, 주위 사람들에게는 그 웃음이 마치 거대한 호랑이가 먹잇감을 앞에 두고 으르렁거리는 것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

사내의 허리춤에는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칼이 매어져 있었다. 칼이 조금만 더 길었다면 바닥에 질질 끌릴 것 같아서, 과연 저걸 뽑을 수나 있을지 의아스러울 정도였다.

사내의 뒤에는 두 명의 인물들이 조용히 뒤따르고 있었다. 한 사람은 고리눈에 수염이 가득 난 우락부락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매에 얼굴 전체에 크고 작은 칼자국이 나 있어 살벌한 인상이었다.

두 사람은 모두 서른 전후쯤 되었는데, 하나같이 체구가 건장하고 키가 훤칠했다. 그래서인지 그들 앞에서 양 팔을 내저으며 걷고 있는 사내의 체구가 한층 더 왜소해 보였다.

그를 아는지 모르는지 사내는 대로의 한복판을 거침없이 걸어갔다. 저자거리를 지나 대로 뒤편의 골목에 접어들 때까지도 사내의 모습은 변함이 없었다.

그와 그를 따르는 두 사람이 골목 뒤편으로 사라지자 그제야 저자의 상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휴우. 흑선방이 모습을 보이지 않으니 저 악귀(惡鬼)들이 더 설치는군.”

“쉬이, 들리네. 목소리 좀 낮추게.”

“그래도 흑선방이 있을 때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말이지.”

“그나저나 북대가(北大街) 쪽에서 횡행하던 자들이 이곳에는 무슨 일이지?”

“아마 또 다른 돈 냄새라도 맡은 모양이지. 돈 버는 일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니 말일세.”

“그나저나 정말 흑선방은 이대로 사라진 건가? 이렇게 호락호락하게 물러날 자들이 아닌데.”

“그야 모르지. 아무튼 빨리 사태가 진정되었으면 좋겠네. 요새 같아서는 언제 피바람이 불지 몰라 하루하루가 가시방석이니 말일세.”

상인들의 소곤거리는 소리를 뒤로하고 골목으로 들어선 세 사람의 움직이는 속도가 점차 빨라지기 시작했다. 왜소한 사내의 활개 치듯 걷는 모습은 여전했으나, 움직임은 조금 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빠르고 민첩했다. 두 사람 또한 그와 보조를 맞췄다.

복잡한 골목을 이리저리 돌아가던 세 사람의 걸음이 멈춘 곳은 하얀색으로 칠해진 대문 앞이었다.

똑똑.

사내가 문을 가볍게 두드리자 문이 열리며 백의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백의인은 날카로운 눈으로 세 사람을 훑어보더니 이내 턱짓을 해서 그들을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백의인을 따라 대문으로 들어온 세 사람은 작은 뜨락을 지나 한 채의 아담한 건물 앞에 도착했다. 그동안에 그들은 누구 한 사람 만나지 않았고, 백의인에게서 단 한 마디도 들을 수 없었다.

백의인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세 사람도 따라서 들어가려 했다. 백의인은 고개를 젓고는 손가락으로 왜소한 사내만을 가리켰다. 결국 두 사람은 건물 밖에 머물렀고, 왜소한 사내만이 백의인을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건물 안에는 커다란 대청이 있었는데, 수십 명이 앉아도 될 만큼 넓은 대청 안에는 오직 한 사람이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는 준수한 용모의 중년인이었다. 중년인은 대청의 중앙에 있는 의자에 느긋한 자세로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었는데, 자유스러운 것 같으면서도 절제 있는 모습이었다.

백의인은 이내 머리를 조아리고 대청 밖으로 물러났고, 왜소한 사내는 중년인의 앞에 조용히 서 있었다.

중년인은 그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조용히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는 한 모금을 마시고 한동안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가 다시 한 모금을 들이켰다. 그 동작이 너무도 완만해서 그가 차를 모두 마시기까지는 일각이 넘는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동안에도 왜소한 사내는 의자에 앉지도 않고 그 자리에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마침내 차를 모두 마신 중년인은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강호란 곳은 정말 묘하단 말이야. 힘만 있으면 모든 걸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아. 만사불의(萬事不意)랄까? 뜻대로 되는 일을 찾기가 점점 힘들어진단 말이지.”

왜소한 사내는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손톱 하나로 간단히 짓눌러 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던 놈들에게 한 방 맞았는데, 그게 상당히 아프단 말이야. 그래서 무엇이 잘못되어 일이 이렇게 되었을까 하고 한참을 고민했지. 그래서 마침내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지.”

왜소한 사내는 여전히 입을 굳게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중년인 또한 그가 아예 눈앞에 없는 것처럼 허공을 올려 보고 있었다.

“모든 도구에는 나름대로의 용도가 있는데, 내가 도구를 잘못 골랐던 거야. 쥐새끼를 잡는 데 소를 잡는 칼을 썼으니 그 쥐를 제대로 잡을 리가 있나? 결국 주위만 어지럽히고 공연히 힘만 뺀 셈이지.”

“…….”

“흑도의 무뢰배들에게는 흑도의 수법으로 상대해야 하는 거였어. 쥐새끼를 상대하는 데는 쥐새끼가 제격이란 말이지. 그래서 너를 불렀다.”

중년인은 천천히 시선을 내려 왜소한 사내를 쳐다보았다. 차갑고 냉정한 시선이었다. 그의 시선을 받자 왜소한 사내는 머리를 조아렸다.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중년인은 고개 숙인 사내의 머리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불쑥 물었다.

“며칠이면 되겠느냐?”

사내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칠일을 주십시오.”

중년인은 과연 칠일 안에 가능한지, 그 방법은 무엇인지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사내도 밝히지 않았다. 흑도의 추잡한 일을 백도의 인물이 세세하게 알 필요는 없었다.

“삼일을 더 주지. 열흘 안으로 최동의 목을 가져오면 장안의 뒷골목은 온전히 네 것이다.”

중년인의 눈에서 한 줄기 서늘한 빛이 감돌았다.

“만약 그때까지 최동의 목을 가져오지 못하면…….”

“제 목을 가져오겠습니다.”

중년인은 고개를 저었다.

“네 목은 필요 없다. 다만 적류문이라는 글자는 강호에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숙였던 사내의 고개가 더욱 깊게 숙여졌다.

중년인은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사내는 고개를 숙이고 있음에도 그 모습을 본 사람처럼 조용히 일어나 대청을 빠져나갔다.

중년인, 철혈의 매화라 불리고 있는 철심혈수 검단현은 멀어지는 사내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아무도 들을 수 없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네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든 상관없다. 어차피 승부는 다른 곳에서 판가름 날 테니 말이지.”

탁!

매정하게 닫히는 하얀 대문을 뒤로하고 왜소한 사내와 두 명의 남자는 올 때와 마찬가지로 다시 골목을 걷기 시작했다. 한동안 묵묵히 사내의 뒤를 따르던 텁수룩한 수염의 장한이 불쑥 입을 열었다.

“저자들은 우리를 벌레 보듯 하는군요. 말 한 마디 안 하고 손가락만 까닥거리다니, 저들 눈에는 우리가 사람으로 보이지도 않는 모양입니다.”

왜소한 사내는 히죽 웃었다.

“그래서 기분 나쁜가?”

“솔직히 기분이 더럽습니다.”

“그래도 어쩌겠나? 참아야지.”

텁석부리 장한은 마음속의 울분을 토해 내듯 거친 음성을 내뱉었다.

“대형. 이런 대접을 받으려고 우리가 그들 일을 받아 준 게 아니지 않습니까?”

왜소한 체구의 사내는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텁석부리 장한은 무어라고 말을 하려다 왜소한 사내의 얼굴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왜소한 사내는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고 있었다. 하나 그의 쭉 찢어진 눈에 어른거리는 눈빛은 모골이 송연할 정도로 싸늘했다.

“그들에게 대접을 받고 싶었으면 백도의 인물이 되었어야지.”

텁석부리 장한은 고개를 찡그리더니 한숨을 내쉬며 사과를 했다.

“죄송합니다, 대형. 나는 괜찮지만, 철혈매화도 아니고 화산파의 일개제자마저 대형을 손가락으로 부리는 모습에 울컥하고 말았습니다.”

“손가락이 아니라 발가락으로 부려도 우리는 할 일만 제대로 하면 돼. 흑도에게는 흑도의 법칙이 있지. 우리가 적류문을 만들 때 어떤 결심을 했는지 잊지 말게.”

“알겠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우리를 하찮게 여겨도 우리가 없으면 이번 싸움에서 승산을 장담할 수 없네. 우리는 그저 흑선방을 없애고 장안의 흑도를 장악하기만 하면 돼. 그때쯤에는 우리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도 조금은 달라져 있을 거야.”

텁석부리 장한은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었다.

“정말 그럴까요?”

“물론이지. 우리의 도움이 없으면 장안을 자기들 뜻대로 경영할 수 없게 될 텐데, 그걸 알면 자연히 우리에 대한 대접도 바뀌게 될 거야.”

“겉으로는 더없이 고상한 척해도 참으로 치졸하고 더러운 놈들입니다.”

“그게 백도의 생리지.”

한쪽에서 묵묵히 그들의 말을 듣고 있던 파면(破面)의 사내가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어떻게 하기로 했습니까?”

“열흘 안에 최동의 목을 갖다 주기로 했네.”

“흑선방이 타격을 입었다고 해도 아직은 우리보다 전력이 강합니다. 더구나 최가 놈이 숨어 있는 곳도 파악하지 못했는데, 그때까지 가능하겠습니까?”

“가능한지 불가능한지는 중요한 게 아닐세.”

“그럼 무엇이 중요합니까?”

“우리는 무조건 그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지. 그러지 못하면 우리에겐 파멸뿐이네.”

파면의 사내는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그에 따라 그의 얼굴에 나 있는 많은 칼자국들이 보기 흉하게 꿈틀거렸다.

“정녕 그 길뿐입니까?”

왜소한 사내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다네. 이번 일이 실패하면 흑선방에 당하든, 철혈매화의 손에 죽든 결과는 정해져 있네.”

파면의 사내와 텁석부리 장한은 한동안 무거운 얼굴로 허공을 노려보고 있더니 이내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흑도에 뛰어들었을 때부터 각오한 일입니다. 흑선방이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모르지만, 이미 자금원이 무너지고 삼분지 일 이상이 타격을 받은 이상 우리에게도 충분한 승산이 있습니다. 다만 열흘이라는 시간이 문제로군요.”

“그래서 이번에는 특별히 방수(幇手)를 구할 생각일세.”

“누굽니까? 어지간한 솜씨로는 별 도움이 안 될 텐데.”

왜소한 사내는 자신 있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번의 방수는 우리에게 절대적인 도움이 될 걸세. 그건 분명히 장담할 수 있지.”

“그가 누구입니까?”

왜소한 사내는 한 사람의 이름을 꺼냈다.

“장병기(張秉起).”

그 이름을 듣자 파면의 사내와 텁석부리 장한의 얼굴이 일제히 굳어졌다.

“악살(惡煞) 장병기? 소문삼살(笑門三煞)의 바로 그 장병기 말입니까?”

왜소한 사내는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렇다네.”

굳어 있던 파면의 사내와 텁석부리 장한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더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정말 큰 도움이 될 테지만…… 그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왜소한 사내, 적류문의 문주인 혈음도 마강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되도록 해야지. 우리에게는 더 이상 물러설 길이 없으니 말일세.”

악살 장병기는 소문삼살의 막내였다.

소문삼살은 단지 세 사람뿐이지만 하나같이 정말 무서운 인물들이었다. 하나 무림인들을 진정으로 두렵게 만드는 것은 그들이 바로 우내사마의 일인이자 천하제일살성(天下第一煞星)인 소마(笑魔) 신지림(申至林)의 제자들이라는 점이었다.

일개 흑도 무리가 초빙하기에는 너무도 큰 거물이 아닐 수 없었다.

장병기가 서안에 오는 순간, 흑선방의 미래는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마강과 그의 두 의제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흑선방의 몰락은 확실하다. 남은 문제는 얼마나 큰 손실 없이 장병기를 떠나보낼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적류문의 미래 또한 결정될 것이다.

☆ ☆ ☆

마강은 산서성 통화(通化)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체구가 왜소하고 몸이 허약했던 마강은 외모마저 볼품없어서 많은 괄시를 받으며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심한 기근으로 부모를 잃고 거리를 전전하던 그가 고향을 떠난 것은 그의 나이 불과 열두 살 때로, 그때부터 그는 산서성 일대를 떠돌며 구걸로 연명을 했다. 그러다 떠돌이 낭인(浪人)의 뒷수발을 하며 눈치로 어설픈 도법 몇 개를 훔쳐 배워 본격적으로 뒷골목의 거친 세계에 뛰어든 것은 열일곱 살 때의 일이었다.

십 년이 지났을 때, 그는 산서성과 섬서성의 경계에 있는 풍릉도(風陵渡)의 무뢰배들 사이에서 나름대로 상당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그러다 무림의 고수 한 사람과 시비가 붙어 밤중에 몰래 그를 살해하고는 몇몇 부하들과 함께 풍릉도를 떠나 섬서성으로 도망을 치는 신세가 되었다. 섬서성 일대를 정처 없이 떠돌던 그가 서안으로 들어온 것은 그로부터 십삼 년이 지난 후였다. 그때 그의 뒤에는 아홉 명의 형제와도 같은 부하들이 따르고 있었다.

당시 서안의 뒷골목은 흑선방이 가장 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고, 그 외에 다섯 개의 크고 작은 무리들이 나름대로의 구역을 세력권으로 두고 있었다.

마강과 그의 아홉 형제들은 그들의 세력권이 서로 겹치는 지역을 교묘하게 파고들어 조금씩 힘을 키워 나갔다. 그러다 장안대호 이세적의 죽음으로 서안 일대의 혼란이 가중되는 틈을 노려 적류문을 만들고, 본격적으로 세를 확장시키기 시작했다.

하나 그들은 이내 한계에 부딪혀야 했다. 어느 정도 세력이 커지자 흑선방이라는 거대한 벽이 그들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그때의 흑선방은 서안의 흑도를 거의 장악하고 있어서 어느 쪽으로 나아가든 그들과의 충돌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마강으로서는 흑선방의 밑으로 들어가든지 그들과 사생결단을 내든지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기로에 서게 되었다. 어느 선택을 하든 그로서는 탐탁지 않은 것이었다.

어려서부터 외모에 심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던 마강은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해서 남에게 머리 숙이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했다. 그가 밖으로 나갈 때마다 아홉 명의 형제들 중 가장 체구가 좋은 두 명을 거느리고 나가는 것도 외모 때문에 수모를 받던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을 보상받기 위함이었다.

그의 성격상 흑선방의 밑으로 들어갈 바에는 차라리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는 것을 택했을 것이다. 문제는 흑선방이 워낙 강해서 정면으로는 도저히 승리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었다.

고민하고 있던 마강에게 화산파의 손길이 닿은 것은 그즈음이었다. 화산파의 접촉과 은밀한 지원은 막다른 골목에 몰려 있던 마강에게는 죽음의 순간에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이나 마찬가지였다.

화산파를 등에 업은 적류문은 무서운 기세로 세력을 확장해 나아갔고, 불과 몇 달 만에 흑선방과 자웅을 겨뤄 볼 만한 문파로 성장했다. 바야흐로 서안의 흑도가 흑선방과 적류문이라는 두 세력의 각축장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제 마강은 또 다른 선택을 앞에 두게 되었다.

흑선방을 무너뜨리고 흑선방주 최동을 제거하게 되면 마강은 서안의 흑도를 완벽히 장악하고 명실상부한 서안의 거물 중 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흑선방과의 싸움에서 패하거나 최동을 제거하는 데 실패하면 적류문은 물론이고 그 자신의 목숨 또한 부지할 수 없을 것이다.

승리해서 영화를 누리느냐, 아니면 싸늘한 시신으로 서안의 뒷골목에 쓰러지느냐 하는 실로 일생일대의 중대한 기로에 서게 된 것이다.

이 싸움은 결코 질 수 없는 것이고, 퇴로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 마강은 그 싸움을 이기기 위해 자신의 아홉 형제들을 모두 불러들였다. 외부에 나가 있는 한 명을 제외한 여덟 명의 형제들을 보자 마강은 한편으로는 든든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아쉬운 생각도 들었다.

‘믿을 만한 녀석들이긴 하지만, 셋째와 넷째 외에는 무공 실력이 보잘것없다는 게 정말 안타깝구나. 하다못해 한 놈만이라도 화산파 일대제자 정도의 실력을 지니고 있으면 좋으련만.’

그런 무공을 지니고 있으면 굳이 뒷골목을 전전하지 않을 테니 자신의 기대가 무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입맛이 씁쓸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에 비해 흑선방에는 일류의 무공을 지닌 자들이 제법 있었다. 방주인 최동은 말할 것도 없고 살수 조직인 잠혼당(潛魂堂)의 고수 몇몇은 마강도 자신할 수 없는 실력의 소유자들이었다.

‘잠혼당의 제일가는 살수가 강표라고 했던가? 최동에 버금가는 고수라고 하던데, 어느 정도의 실력을 지녔는지 궁금하군.’

흑선방 최고의 살수라는 십절수 강표에 대해서는 소문만 무성할 뿐, 누구도 그의 진실한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혹자는 새파랗게 젊은 청년이라고도 하고, 혹자는 중년의 노련한 인물이라고도 했다. 살수답게 변장술이 뛰어나고 행동이 은밀할 뿐 아니라 암습에 능해서 그의 표적이 되면 무림의 일류 고수라도 당해 내기 힘들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흑선방의 수뇌들이 완벽하게 잠적하여 행방이 묘연해진 지금, 외부에서 활동하고 있는 흑선방의 유일한 조직이 잠혼당이었다. 엊그제 벌어진 세칭 ‘지옥의 하루’에서 대부분의 화산파 제자들을 살해한 자들도 바로 잠혼당의 살수들이었다.

물론 그들 중 적지 않은 수가 그 와중에 정체가 드러나 목숨을 잃었지만, 하루 동안에 화산파의 제자를 열여덟 명이나 살해한 일은 서안은 물론이고 섬서성 일대를 송두리째 뒤흔들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희생자들 중 일대제자가 네 명이나 되었기에 세인들의 놀라움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최근 십 년 동안 화산파가 이토록 커다란 피해를 본 적은 없었다. 더구나 그 상대가 무림의 거대 문파도 아니고 서안의 일개 흑도 무리들이었으니, 화산파로서는 그야말로 체면이 형편없이 구겨진 셈이었다.

오죽했으면 그 자존심 강하고 흑도 세력을 발가락 사이의 때처럼 하찮게 여기던 검단현이 마강을 직접 불러 흑선방을 궤멸하라고 강압적인 지시를 내릴 정도였으니, 화산파가 느끼는 충격과 당혹감이 얼마나 컸는지 여실히 알 수 있었다.

마강은 믿음직한 눈으로 자신의 형제들을 둘러보았다.

첫째인 사열(史烈)은 일이 있어 자리를 비웠지만, 그 외의 다른 형제들은 모두 참석하여 묵묵히 마강을 주시하고 있었다.

주위는 쥐 죽은 듯 조용했지만, 그들 사이에 흐르는 팽팽한 긴장감과 기이한 열기는 전장(戰場)의 그것처럼 뜨거웠다. 모두들 자신들이 일생일대의 위기와 기회를 동시에 맞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마강의 시선이 둘째인 하일엽(夏一燁)에게 고정되었다.

“조사한 일은 어찌 되었나?”

하일엽은 하관이 길쭉하고 비쩍 마른 체구의 장한이었다. 신경질적이고 날카로운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그만큼 섬세하고 치밀해서 정보나 염탐에 소질이 있었다.

마강은 며칠 전부터 하일엽에게 잠적한 흑선방 수뇌들의 행방을 찾도록 지시했는데, 하일엽은 세 명의 형제들과 함께 서안의 구석구석을 뒤지고 다녔으나 아직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하일엽은 특유의 무뚝뚝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쌍하보나 철기보 등 철면호의 세력에 편입한 문파들도 조사해 보았나?”

“빠짐없이 했습니다만, 그들 중 어느 곳도 흑선방의 잠적과 관련된 곳은 없어 보입니다.”

“그들이 하늘로 솟거나 땅으로 꺼지지 않은 이상 어딘가에 반드시 흔적이 남아 있을 걸세. 한두 명도 아니고 이십 명이 넘는 인원들이 이렇게 감쪽같이 사라질 수는 없는 법일세.”

“적어도 장안에 있는 문파들 중에는 흑선방을 숨겨 준 곳이 없을 겁니다. 공식적으로든 비공식적으로든 말입니다.”

마강도 그 점은 수긍을 했다.

흑선방이 비록 철면호 노해광의 수족과 같은 존재들이라고 해도 근본은 흑도의 무리들이며, 더구나 이번에는 화산파의 제자들을 상당수 살해한 판국이었다. 화산파에서 복수를 위해 눈에 불을 켜고 그들을 찾고 있는 것이 뻔한 상황에서 어떤 문파라도 흑선방과 조그만 관련이라도 되는 것을 극도로 꺼려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서안이 아무리 넓고 거주하는 사람이 많다고 해도 문파의 비호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스무 명이 넘는 우락부락한 사내들이 몸을 숨기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강의 시선이 형제들 중 가장 끝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로 향했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그 사람은 마강의 형제들 중 막내로, 설영(薛榮)이라는 인물이었다. 올해 서른으로 가장 나이가 어린 축에 속했으나, 두뇌가 비상하고 잔꾀가 많아서 마강의 신임을 적지 않게 받고 있었다.

설영은 생각해 놓은 것이 있는 듯 망설이지 않고 즉시 대답했다.

“제가 볼 때는 다른 문파의 비호가 전혀 없다면 그들이 숨을 수 있는 곳은 몇 군데로 국한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일엽은 귀가 번쩍 뜨이는지 황급히 물었다.

“그곳이 어디인가?”

“첫째는 하수창(下水廠)입니다.”

하수창이란 말에 마강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하수창은 서안의 뒷골목에서도 가장 후미지고 지저분한 곳으로, 서안에서 버려지는 각종 오물들이 몰려드는 커다란 하수구 일대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악취는 물론이고 각종 질병을 일으키는 온갖 요소들이 모두 모여 있어서 빈민들도 다가가려 하지 않았다. 그 일대에 살고 있는 자들은 죽을병에 걸려 신음하는 병자들과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최하층의 부류들뿐이었다. 그리고 그들 중 누구도 하수창에서 한 달 이상을 버티지 못하고 떠나거나 차가운 시신이 되어 오물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

마강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리 종적을 숨기는 게 급하다고 해도 흑선방의 수뇌들이 하수창의 오물 더미 속에 숨어 있는 모습은 상상이 가지 않는군. 다른 곳은 어디인가?”

설영도 하수창은 별로 가능성이 없는 곳이라고 생각했는지 마강의 말을 부인하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두 번째 생각해 볼 수 있는 곳은 마안거(馬安居)입니다.”

“마안거?”

“장안 북쪽의 마장 중 하나인데, 세워진 지는 오래되었지만 지금은 거의 유명무실해져서 이름만 겨우 남아 있는 곳입니다.”

“그곳을 생각한 이유는 뭔가?”

“최동이 처음 장안에 왔을 때 제일 처음 머물렀던 곳입니다. 최동은 마안거에서 삼 년 정도 일을 하다가 본격적으로 흑도에 뛰어들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거의 망했다고 하지 않았나?”

“그것이 더욱 의심되는 이유입니다. 최동이 흑선방을 세우고 장안의 흑도를 장악할 때부터 마안거가 쇠퇴하면서 사람들의 관심에서 점차 멀어졌습니다.”

마강은 알겠다는 듯 눈을 반짝 빛냈다.

“최동이 마안거를 비상시에 안가(安家)로 쓰기 위해 작업을 했단 말이로군.”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마안거의 쇠퇴가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당시만 해도 마안거는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제법 잘나가는 마장이었는데, 불과 몇 년 사이에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을 정도로 몰락했습니다. 최동의 입김이 닿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마강은 그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마강도 마안거란 이름을 오늘 처음 들어 보았던 것이다.

마강은 혹시나 하여 물었다.

“셋째도 있나?”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철면호가 수작을 부렸을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말인가?”

“철면호는 원래부터 이곳 장안 태생이고, 수십 년 전부터 장안 일대를 구석구석 누비고 다녔던 자입니다. 그라면 남들이 모르는 비밀 장소 몇 군데쯤은 가지고 있을 겁니다.”

마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철면호라도 그건 좀 무리인 것 같은데?”

“저도 화산파가 이를 갈고 있는 상황에서 그가 흑선방 무리들을 숨겨 주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봅니다. 만에 하나 그 사실이 발각되면 정파의 비난을 한 몸에 받을 게 뻔하니 말입니다. 다만 그럴 가능성이 아주 없다고 무시할 수는 없으니 염두에 둘 필요는 있다는 의미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역시 마안거부터 시작해야겠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마강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더니 중앙에 앉아 있는 사람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은 자네가 해 줘야겠군. 자네가 알고 지내는 강호인들이 몇 사람 있다고 했지?”

중앙에 앉아 있는 얼굴이 네모진 중년인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명성은 그리 대단하지 않지만 나름대로 솜씨가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과 함께 마안거로 가게.”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마강은 씨익 웃었다. 먹이를 앞에 둔 굶주린 늑대를 연상케 하는 살벌한 웃음이었다.

“우리의 방식이 있지 않나? 다 때려 부수고 한 놈도 살려 두지 말게. 흑선방의 무리들이 숨어 있다면 나오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도록 말일세.”

네모진 얼굴의 중년인은 순간적으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만약 그곳에도 흑선방이 없다면 어쩌시렵니까?”

마강은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어느 때보다 무서운 빛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때는 철면호를 쑤셔 봐야지. 어차피 우리에게는 더 물러설 곳도 없으니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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