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30권 무당집회(武當集會)편 : 5화
307장. 강호인물(江湖人物)
무당산의 아침은 언제나 청명하다.
오늘의 무당산은 평상시와 다른 활력이 넘쳐 났다. 아직 여명이 밝아 오기 전부터 제법 많은 사람들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남해일(南海日)은 한 차례 기지개를 켠 후 주위를 둘러보고는 혀를 내둘렀다.
“아직 해도 뜨지 않았는데 다들 부지런하구나.”
그렇게 말을 하는 그 자신도 남들과 마찬가지로 새벽부터 나와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숙소를 벗어나 조금 걸으니 넓은 자소전 앞의 공터가 시야에 들어왔다.
이른 예배를 드리기 위해 걸음을 재촉하는 도인들의 모습도 보였지만, 그보다는 몸을 풀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무림인들이 훨씬 더 많았다. 다양한 복장을 한 각양각색의 무림인들을 보자 남해일의 가슴은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비로소 한 가지 사실이 피부에 절실히 와 닿았던 것이다.
‘바로 오늘이로구나.’
유월 일일.
드디어 무림집회의 날이 밝은 것이다.
이번 집회는 사 년 전에 소림사에서 벌어졌던 집회와는 여러 가지 면에서 차이가 있었다.
사 년 전에는 참여를 원하는 모든 무림인들이 자유롭게 모여들었는데, 이번에는 초청을 받은 사람들만이 참여할 수 있었다. 사파와 마도의 무림인들이 철저히 배제되었던 사 년 전과는 달리, 이번의 집회에는 그들도 상당수가 참석한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무엇보다도 흥분되고 들떠 있었던 당시의 분위기와는 판이하게 오늘은 차분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서장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확신했던 당시와는 달리 이번에는 누구도 승리를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데 일조를 한 것 같았다.
남해일은 설레는 와중에도 사람들의 얼굴에 서려 있는 긴장감을 알아차리고 새삼 이번 무림집회가 얼마나 중요한 자리인지 깨달았다.
그때 멀지 않은 곳에 서성이고 있던 청년 한 사람이 그를 보더니 빠르게 다가왔다.
“혹시 청성파의 신성(新星)이신 창천신룡(蒼天神龍) 남해일 소협이 아니시오?”
남해일은 그의 얼굴이 눈에 익은 것을 보고는 반색을 했다.
“오, 점창파의 사인기 형이셨구려. 이곳에서 사 형을 다시 보게 되다니 정말 반갑소.”
사인기는 엷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만난 지 일 년이 넘었는데도 용케도 나를 기억하고 있었구려.”
“사 형이야말로 멀리서도 한눈에 나를 알아보았으니 눈썰미가 대단하시오.”
“하하. 남 소협은 어디에 있어도 인중용같이 두드러져 보이는 사람이니 내가 모를 리 있겠소? 그에 비해 나는 몇 번을 만나도 기억해 주는 이가 별로 없는 평범한 인간일 뿐이오.”
“그럴 리가 있겠소? 사 형의 실력은 내가 잘 아는데, 머지않아 강호무림에 혁혁한 명성을 날릴 게 분명하오.”
“우리 서로 얼굴에 금칠은 그만 하기로 합시다. 진짜 고수들이 비웃겠소.”
두 사람은 나이도 비슷하고 같은 구대문파의 일대제자 신분이어서 이내 쉽게 어울릴 수 있었다. 점창파와 청성파는 거리도 그리 멀지 않고 문파 간의 관계도 나쁜 편이 아니어서 강호에서 만나게 되면 동행하는 경우도 곧잘 있었다.
남해일 또한 작년에 우연히 사인기와 며칠 여정을 함께한 적이 있었는데, 평범한 외모와 달리 침착한 성격에 높은 무공을 지닌 그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었다.
남해일은 청성파의 최고고수인 청성칠자(靑城七子) 중의 한 사람인 벽영자(碧英子)의 제자로, 강호에 출도한 지 삼 년 만에 누구나가 인정하는 청성 제일의 후기지수(後起之秀)가 되었다. 인물됨이 관옥(冠玉) 같고 행동거지가 비범할 뿐 아니라 검법 또한 탁월해서 청성파 모든 문인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인재였다.
청성파에서는 이번 집회에 장문인인 벽성자(碧聖子)를 위시해서 모두 여덟 명의 고수들이 왔는데, 남해일은 그들 중 가장 젊은 축에 속했다.
일행의 대부분이 손위 어른이거나 사형들이어서 항상 긴장해야 했던 남해일은 동년배에 비슷한 처지의 사인기를 만나자 흥이 날 수밖에 없었다. 사인기 또한 주변에 특별히 아는 사람이 없어서 다소 의기소침해 있다가 남해일과 어울리게 되니 무척이나 반가워하는 모습이었다.
어느덧 해가 모두 떠올라서 주위가 환하게 밝아지자 자소전 앞의 공터에 모여드는 사람들의 수가 부쩍 늘어났다. 그때까지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남해일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이내 한쪽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사인기는 그가 보고 있는 사람이 날카롭게 생긴 비쩍 마른 체구의 청년임을 알아차리고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매서운 기세를 지닌 사람이구려. 아는 분이시오?”
남해일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사 형도 공동산에 사나운 매 한 마리가 살고 있다는 말은 들었을 거요.”
사인기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럼 저 사람이 바로 독표응(毒豹鷹) 양수(梁秀)란 말이오?”
“그렇소.”
그들의 대화를 듣기라도 한 듯 청년이 남해일과 사인기 쪽을 바라보았다. 특히 남해일을 노려보는 청년의 눈빛이 어찌나 날카롭고 매서웠는지 금시라도 칼을 뽑아 들고 달려들 듯했다.
원래 공동파와 청성파는 같은 도문(道門)이긴 해도 대대로 사이가 그다지 좋지 못했다. 특히 독표응 양수는 공동삼도의 한 사람인 불치도인(不恥道人)의 수제자여서 오래전부터 남해일과 비교되고는 했었다. 무공 실력은 엇비슷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훤칠한 키에 준수한 용모를 지닌 남해일에 비해 왜소하고 강퍅한 인상의 양수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나 호응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인지 양수는 늘 남해일에게 불꽃같은 경쟁심과 호승심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도 양수는 남해일을 보자마자 눈에 불을 켜고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하나 웬일인지 다가오지는 않았다. 자세히 보니 그의 사형인 듯한 삼십 대 초반의 장한이 그의 소매를 살짝 잡고 있었다.
남해일은 이내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려 버렸으나, 양수는 한참 동안이나 남해일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 자소전 앞의 드넓은 공터가 사람들로 메워지기 시작했다.
남해일은 주위를 둘러보고는 혀를 내둘렀다.
“오늘은 분명 구대문파를 비롯한 정파의 무림인들만 모인다고 들었는데, 벌써 모여든 사람들의 수가 적지 않구려.”
“내가 듣기로는 구파일방 외에 열두 개의 문파가 더 참석하고, 서른두 분의 명숙들도 오신다고 하오. 그러니 오늘 집회에 오는 사람들은 얼핏 계산해도 이삼백 명은 족히 될 거요.”
“그럼 사 년 전에 소림사에서 있었던 무림대집회와 별반 차이가 없겠구려?”
무공을 수련하느라 사 년 전의 무림대집회에 참석하지 못했던 남해일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묻자, 사인기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소. 그때 모인 무림인들의 수는 수천 명에 달했고, 참석한 문파는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였소. 오죽했으면 서른두 개 문파만 따로 선정하여 자리를 배정했었겠소?”
“정말 그랬단 말이오?”
“그렇소. 당시에는 심지어 종남파조차도 자리를 배정받지 못하고 일반인 석에 머물렀었다고 들었소.”
남해일은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럴 리가. 종남파가 아무리 구대문파에 속해 있지 않다고 해도 설마 서른두 개의 문파에도 선정되지 않았을 리가 있겠소?”
사인기는 씁쓸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모두들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었소. 아마 당시 모였던 무림인들 중에는 종남파가 참석했는지조차 몰랐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을 거요.”
“……!”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그때의 종남파는 무림에서 그 정도 위치였소. 종남파가 지금과 같은 위세를 보이게 되리라고는 일 년 전까지만 해도 누구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거요.”
남해일은 멍하니 그의 말을 듣고 있다가 무언가가 떠오른 듯 손뼉을 탁 쳤다.
“그러고 보니 작년 이맘때쯤 종남파가 멸문했다는 소문을 들었던 것 같소. 그때는 지나가는 말처럼 흘려들어서 뜬소문인 줄 알았는데, 아주 거짓은 아니었던 모양이구려?”
사인기는 당시 종남파의 사정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지 그에 대해 짤막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렇소. 그때 그들은 강북삼보의 하나였던 초가보의 습격에 본산마저 빼앗기는 어려운 싸움을 했으나, 결국 종남혈사라 불릴 정도로 무서운 격투 끝에 그들을 물리쳤다고 하오.”
“그럼 그들은 그 짧은 시간 동안에 무너졌던 문파를 부흥시키고 지금의 자리에 올라서게 되었단 말이구려.”
“그렇소. 정말 대단하지 않소?”
“그건 대단한 정도가 아니라 기적과도 같은 일이오.”
남해일의 준수한 얼굴이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약간 붉게 상기되었다.
“내가 견문이 짧아서인지는 모르지만, 망해 가는 문파가 일 년도 되지 않아 화려하게 재기함은 물론이고 강호를 송두리째 뒤흔드는 거대 문파가 되었다는 말은 아직 들어 보지 못했소. 더구나 그들의 장문인인 신검무적은 젊은 나이에 강호제일검객으로 불리고 있으니, 이건 그야말로 하나의 신화(神話)로 사람들 뇌리에 영원히 기억될 거요.”
남해일이 열띤 음성으로 말하자 사인기가 조용히 웃었다.
“남 소협은 신검무적을 흠모하는 모양이구려.”
“흠모하다 뿐이오? 그는 기꺼이 경배를 받아 마땅한 인물이오. 일전에 사숙을 모시고 주루에 들렀다가 신검무적을 눈앞에 두고도 미처 알아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친 적이 있었는데, 얼마나 원통했던지 그날 밤에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을 정도였소.”
“하하. 그런 일이 있었구려. 안심하시오. 이번에는 반드시 신검무적을 지척에서 볼 수 있을 거요.”
남해일의 얼굴에 한 줄기 기대와 걱정 어린 빛이 동시에 떠올랐다.
“그렇지 않아도 그 점을 간절히 갈망하고 있었소. 하지만 참석 인원이 이렇게 많다면 인사라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구려.”
청성파의 제일가는 기재이며 사천 땅에서 누구보다 혁혁한 명성을 날리고 있는 창천신룡이 마치 강호의 고수를 동경하는 어린 소년처럼 가슴 설레어 하는 모습은 다소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인상적인 것이었다. 사인기도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으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신검무적에 대한 강호인들의 호감이 얼마나 큰지를 새삼 깨닫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특히 검을 배운 무림인들의 신검무적에 대한 지지는 가히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때 사인기가 무엇을 보았는지 눈을 빛내며 남해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걱정 마시오.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남 소협이 신검무적을 만나는 일이 꼭 이루어지고야 말 거요.”
사인기의 자신 있는 말에 남해일은 약간 어리둥절하면서도 반색을 했다.
“그렇소? 혹시 사 형도 신검무적을…….”
그때 사인기 앞으로 한 사람이 성큼 다가왔다.
“사 소협이 아니시오?”
다가온 사람은 보는 이의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준수한 미남자였다. 사인기는 조금 전에 이미 그 사람을 발견했는지 평소에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환한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낙 소협. 다시 만나게 되었구려.”
두 사람은 서로 손을 맞잡은 채 반가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남해일은 사인기가 대인 관계가 그다지 넓지 못하고 상당히 무뚝뚝한 구석이 있다는 걸 알고 있기에, 그가 이토록 반갑게 맞이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함을 참기 어려웠다.
사인기와 손을 잡고 있는 사람은 외모에 자신을 가지고 있는 남해일도 한 발 물러설 정도로 뛰어난 외모에 당당한 체구를 지닌 청년이었다. 별빛같이 빛나는 얼굴이 환하게 웃자 주위의 여인들의 시선이 온통 그에게 쏠리는 것 같았다.
절세의 옥안(玉顔)이라고 표현해도 될 만큼 준수한 그를 보자 남해일은 문득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다.
그리고 그의 그런 짐작을 증명이라도 하듯 사인기가 활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소개해 줄 사람이 있소. 남 소협, 인사하시오. 신검무적의 사제이며 강북의 제일권사(第一拳士)로 떠오르고 있는 옥면신권 낙일방 소협이시오.”
절세 옥안의 미남자는 남해일을 향해 너무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절제된 동작으로 인사를 했다.
“종남의 낙일방이오.”
남해일은 정색을 하며 황급히 답례를 했다.
“청성의 남해일이라 하오.”
준수한 용모의 두 남자가 서로 인사를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는지 주위의 시선이 온통 그들에게 쏠렸다. 특히 여인들의 시선은 따가울 정도였다.
남해일은 낙일방의 준수한 외모와 건장한 체구, 그리고 소년처럼 반짝이는 눈빛과 솔직함이 그대로 묻어나는 얼굴 표정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절로 그에 대한 호감이 일어났다.
“사 형이 낙 소협과 친분이 있을 줄은 몰랐소. 그동안 낙 소협에 대한 신화 같은 이야기를 듣고 늘 만나기를 갈망해 왔는데, 오늘 이렇게 보게 되니 얼마나 기쁜 줄 모르겠소.”
낙일방 또한 남해일의 명문정파 제자다운 단정하고 예의 바른 자세와 맑고 총명한 눈빛, 그리고 선한 인상이 마음에 드는 모습이었다.
“과찬의 말씀이오. 나야말로 사천의 용이라는 창천신룡의 명성을 듣고 꼭 한 번은 만나고 싶었소.”
사인기가 두 사람을 보고 웃었다.
“잘난 두 분이이 서로 잘났다고 치켜세우니 나 같은 사람은 옆에서 듣기 민망하구려, 하하.”
“사 소협이야말로 숨은 기인 같은 분인데, 그런 말씀을 하면 어쩌시오? 일전에 내가 자리에 없을 때 찾아오셨다고 들었소. 공연히 헛걸음을 하게 해서 미안하오.”
낙일방이 정색을 하며 대꾸하자 사인기가 손사래를 쳤다.
“아니오.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간 나의 잘못이오. 그나저나 이렇게 다시 낙 소협을 보게 되니 그동안 신수가 더 훤해진 것 같구려.”
“사 소협이야말로 두 눈에 정광(精光)이 잘 갈무리되어 있는 걸 보니 그동안 무공에 상당한 진전이 있는 것 같소.”
“솔직히 약간의 진전이 있어서 이제는 낙 소협과 제대로 맞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는데, 막상 낙 소협을 직접 눈앞에 두고 보니 도저히 상대할 자신이 안 생기는구려. 사별삼일이면 괄목상대라더니 낙 소협을 두고 하는 말인 듯하오.”
“그럼 잠시 후에 가볍게 손이라도 한 번 풀어 보는 게 어떻겠소?”
낙일방이 눈을 반짝이며 말하자 사인기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싶긴 하지만 이번에는 힘들 것 같소. 자리가 자리인지라 자칫하다가는 엉뚱한 오해를 사게 될지도 모르니 말이오.”
낙일방도 막상 말을 내뱉고는 아차 싶었던지 멋쩍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반가운 마음에 그 생각을 미처 못 했구려. 무당산의 집회가 끝나면 자리를 마련해 봅시다.”
사인기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오.”
낙일방이 사인기를 처음 만난 곳은 낙양의 석가장이었다. 그곳에서 뜻하지 않게 그와 비무를 벌여야 했으나, 당시 그가 보여 준 품성과 행동거지가 마음에 들었던 낙일방은 언제고 그를 다시 만나기를 고대해 왔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도 일찍 일어나자마자 혹시나 하는 생각에 자소전 앞을 서성거리다 그와 재회하게 되었던 것이다.
강호에 그다지 아는 사람도 없고 교제 범위도 극히 좁아서 대인 관계에 소극적이었던 낙일방에게서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적극적인 모습이었다.
사인기 또한 회남에 있을 때 낙일방을 보기 위해 일부러 종남파가 머무르는 곳을 찾아왔을 정도로 그에 대한 호감이 컸던지라 평상시와는 달리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그를 만난 즐거움에 젖어 있었다.
남해일은 두 사람의 그런 모습을 보고 한편으로는 부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재미있게 생각되었다. 준수하기 그지없는 낙일방과 평범한 외모에 별로 표정이 없는 사인기가 서로를 보며 웃고 있는 모습이 마치 오랫동안 헤어졌다 다시 만난 연인들을 연상케 했던 것이다.
‘듣기로는 점창파와 종남파가 몇 차례나 비무를 벌였다고 해서 두 파의 사이가 나쁜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구나.’
그때 갑자기 커다란 북소리가 들려왔다.
둥!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했다.
자소전 앞의 돌계단 위에 한 명의 청년 도인이 큰 북을 든 채 우뚝 서 있었다.
“일각 후 집회가 시작될 예정이니 강호의 동도(同道)들께서는 자소전으로 들어오시기 바라오.”
그의 낭랑한 외침이 드넓은 자소전 앞의 광장 구석구석까지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남해일은 짐짓 탄성을 터뜨렸다.
“이렇게 떨어진 거리에서도 목소리가 이토록 선명하게 들리는 걸 보니 얼마나 정순한 내공을 지녔는지 알겠소. 사 형은 혹시 저 도인이 누구인지 아시오?”
사인기는 그 도인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무당십이검 중의 한 분인 청평도장(靑平道長)이 아닌가 싶소.”
남해일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오, 청평도장이라면 서열은 비록 무당십이검의 막내이지만 무공 실력만큼은 세 손가락 안에 든다는 불령검(不靈劍) 아니오?”
불령검 청평도장은 무당십이검 중에서도 상당히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이 과인하고 무공에 대한 재질이 탁월하여 주위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무림에 출도 할 때가 되자 그의 스승인 현성진인(玄聖眞人)이 ‘신령(神靈)’이라는 호를 하사하려 했으나, ‘아직 어리석어 깨치지 못했다(大愚不靈)’며 ‘불령(不靈)’이라는 이름을 자처하여 불령검으로 불리게 되었다.
많은 무림인들은 그의 나이가 불과 이십 대 중반임을 감안하여 그가 지금처럼 겸손한 모습으로 무공에 정진한다면 머지않아 무당십이검의 일인자가 될 거라고 믿고 있었다.
사인기는 주위의 무림인들이 자소전으로 올라가는 광경을 보고 낙일방을 돌아보았다.
“우리도 이제 슬슬 가 봐야 할 것 같구려.”
세 사람은 무림인들을 따라 자소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 점창파에서는 어느 고인들이 오셨소?”
낙일방이 문득 생각난 듯 묻자 사인기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장문인께서 두 분의 장로와 함께 오셨소.”
점창파의 장문인은 인망이 두텁고 현명하기로 유명한 장거릉이었다. 그는 좀처럼 점창파를 떠난 적이 없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이번의 집회에는 모처럼 모습을 드러낼 모양이었다.
“두 분의 장로라면?”
“둘째 장로와 넷째 장로이시오.”
점창파의 둘째 장로는 강호의 유명한 검객인 추혼신풍검(追魂神風劍) 도군홍이었다. 그는 장문인인 장거릉의 사형으로, 무공 실력이 장거릉보다 뛰어나 실질적인 점창제일검으로 불리는 절세의 검객이었다.
그리고 넷째 장로는 소림사에서 보았던 독검취응 백리장손이었다.
그들 세 사람은 점창파의 가장 핵심 되는 인물들이어서 그들이 모두 점창파를 비운 적은 거의 없었다. 아무리 이번 집회가 중요하다고 해도 다소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사인기는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었다.
“원래 장문인께서는 외부의 출행을 그다지 즐기지 않으시는지라 이번에도 둘째 장로를 수장으로 보내려고 하셨소. 그런데 한 가지 일 때문에 직접 나오기로 결심하신 거요.”
“한 가지 일이라면?”
사인기의 표정이 한층 더 무거워졌다.
“낙 소협도 알고 있을 거요. 구궁보에서 본 파의 장로 한 분이 참변을 당하신 일 말이오.”
낙일방은 그제야 사정을 알아차리고 짤막한 신음성을 토해 냈다.
“음. 비류단홍검 초일재 대협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물론 알고 있소. 사실 그분이 참변을 당한 현장에 나도 있었소.”
“그랬구려. 아무튼 본 파의 초 장로께서 변을 당하시고 본 파의 제자들이 피해를 입었으니 장문인으로서는 자세한 연유를 파악하고자 직접 나설 수밖에 없게 된 거요.”
사인기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무당파에서도 호법진인이 변을 당한 일 때문에 본 파에 다소간의 의혹을 가지고 있다고 알고 있소. 그런 의혹을 해소하고 초 장로님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장문인께서는 이번에 반드시 당시의 일에 대한 내막을 샅샅이 캐내려 하실 것이오.”
낙일방은 사인기의 말을 듣자 내심 걱정되는 마음이 있었다. 당시의 일에 연관된 자들 중에는 종남파와 뗄 수 없는 관계인 곽자령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낙일방은 흉수로 몰렸던 유중악에 대해 얼마쯤 동정하는 마음도 있었기에 자칫 일이 크게 번지지 않을까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거릉 대협은 인품이 뛰어나고 누구보다 현명한 분이라고 하니 섣불리 사태를 판단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나저나 이번 집회는 여러모로 복잡한 일들이 많이 벌어지겠구나.’
당장 종남파만 해도 이번 기회에 형산파와의 묵은 원한을 반드시 풀려고 하지 않는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그들은 자소전 앞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잠시 헤어져야 했다. 각 문파마다 이미 자리가 배정되어 있어서 각자의 소속문파가 있는 곳으로 가야 했기 때문이다.
자소전은 상당히 커다란 건물이었으나, 그렇다고 수백 명이 한꺼번에 모여 있기에는 다소 비좁았다. 그래서 중앙에 각파의 수뇌인물들과 무림 명숙들을 위한 의자를 배치하고, 그 외의 인물들은 뒤쪽에 서 있어야만 했다.
자소전 안으로 들어선 낙일방이 종남파의 자리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어느 사이에 동중산이 그에게 다가왔다.
“한참 찾았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동중산의 안내를 받고 가 보니 <종남파>라고 적힌 작은 팻말 앞에 진산월을 비롯한 일행들이 있었다.
낙일방은 진산월을 향해 계면쩍은 웃음을 흘렸다.
“제가 조금 늦은 모양입니다.”
“집회가 아직 시작되지 않았으니 상관없다. 그나저나 어디에 있었던 게냐?”
“점창파의 사인기 소협을 만나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진산월은 사인기를 말할 때 낙일방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는 것을 보고 내심 흐뭇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보아하니 일방이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벗을 만난 모양이구나. 사 소협이라면 일방의 좋은 친구가 될 수 있겠지. 모쪼록 험한 강호에서 두 사람의 관계가 타의에 의해 멀어지는 일은 없어야 할 텐데…….’
진산월은 무심코 점창파가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이내 섬뜩한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한 사람을 발견했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이내 고개를 돌렸으나, 진산월은 그가 누구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냉막한 눈으로 그를 쏘아보고 있던 그 인물은 다름 아닌 독검취응 백리장손이었다.
진산월은 한동안 가만히 백리장손을 응시하고 있다가 자연스레 그의 옆에 앉은 인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체구가 건장하고 검은 수염을 탐스럽게 기른 준수한 용모의 중년인이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진산월은 하나의 잘 벼린 보검을 보는 것 같은 느낌에 그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자신의 뒤에 서 있는 동중산에게 물었다.
“백리장손의 옆에 앉은 자가 누구인지 아느냐?”
동중산은 이내 나직하게 대답했다.
“저 사람이 바로 점창파의 제일검객이라는 추혼신풍검 도군홍입니다.”
도군홍의 명성은 진산월도 몇 번 들은 적이 있었다. 하나 직접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알려지기로 도군홍의 나이는 백리장손보다 몇 살 많다고 하는데, 실제로 본 도군홍은 백리장손보다 오히려 훨씬 더 젊은 것 같았다.
도군홍의 옆에는 살집이 넉넉한 푸근한 인상의 중년인이 느긋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인상 좋은 주방장같이 생긴 그 중년인은 진산월과 시선이 마주치자 이내 빙긋 웃으며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진산월도 무심결에 그와 눈인사를 나누고는 속으로 실소를 금치 못했다.
가볍게 눈만 마주쳤음에도 자연스레 상대의 반응을 이끌어 내는 것은 그만큼 중년인의 친화력이 대단하다는 뜻이었다. 첫눈에 상대의 호감을 사게 만드는 중년인의 기질은 쉽게 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저자가 바로 점창파의 장문인인 장거릉인 모양이군. 별호가 무등거사(無等居士)라고 했던가?’
혹자는 무골거사(無骨居士)라고 놀리기도 했다. 성격 좋고 좀처럼 화를 내는 법이 없어 명문정파의 장문인으로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평을 받기도 했으나, 점창파 내에서 그의 입지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점창파의 제자들은 그의 명령이라면 섶을 지고 불길에 뛰어드는 일도 주저하지 않을 정도로 그를 신임하고 있으며, 그는 그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점창파를 잘 이끌어 왔다.
진산월이 직접 본 장거릉은 소문대로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이었다. 부드럽게 휘어진 눈매에 늘 미소가 매달린 입가는 사람들의 호감을 사기에 족했고, 혈색 좋은 얼굴에 살집이 있는 넉넉한 몸매는 여유로움을 느끼게 했다.
하나 단순히 성격이 좋은 것만으로 점창파 같은 거대한 문파를 이끌어 나갈 수는 없었다. 장거릉은 상당히 두뇌가 비상하고 일 처리가 분명해서 신상필벌(信賞必罰)이 엄격한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장거릉은 백리장손과 몇 마디 말을 주고받고 있었는데, 가끔 그들의 시선이 진산월을 향하는 것으로 보아 진산월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백리장손이 진산월에 대해 호의적으로 평할 리는 없었는데, 그래도 진산월을 바라보는 장거릉의 표정은 변함이 없이 부드러웠고 입가에는 여전히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점창파의 옆에는 청성파 고수들이 앉아 있었다. 청성파의 고수들 중에는 진산월이 일전에 청연각에서 보았던 검은 수염의 중년인도 있었다. 진산월은 나중에야 그 중년인이 청성칠자의 한 사람인 벽공자(碧空子) 순우태(淳于泰)임을 알게 되었다.
순우태의 옆에는 수려한 용모를 지닌 중년의 도인이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었는데, 그가 바로 당대의 청성파 장문인인 벽성자였다. 벽성자는 특이하게도 도가명보다는 일품군자(一品君子)라는 속가의 별호로 더욱 유명한 인물이었다. 신법이 빠르고 검법이 뛰어날 뿐 아니라 인물 자체가 비범하여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고 있는 뛰어난 고수였다.
청성파 옆은 곤륜파의 자리였다. 곤륜파의 고수들은 대부분이 하얀색 옷을 입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소맷자락이 유난히 넓은 것이 특이해 보였다.
곤륜파의 유명한 절학인 운룡대팔식(雲龍大八式)은 허공에서의 움직임이 유독 많은 무공이었다. 그래서 곤륜파의 고수들은 소맷자락을 이용해 공중에서 몸의 움직임을 조정하는 방법을 자주 이용하고는 했다. 알려지기로는 운룡대팔식이 절정에 달하면 땅에 내려서지 않고도 끊임없이 상대를 공격할 수 있다고 하는데, 지난 백 년간 그 경지의 인물이 강호에 나타난 적은 없었다.
이번에 무당파에 온 곤륜파의 숫자는 불과 여섯 명으로, 구대문파 중 가장 적은 인원이 참여했다. 그것은 거리상의 문제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곤륜파가 중원 내부의 일에 개입하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곤륜파는 문파의 번영보다는 개인적인 수양(修養)에 더 중점을 두는 기풍이 있어서 평상시에도 강호에서 좀처럼 그들의 모습을 보기 힘들었다. 이번에 온 곤륜파 고수들의 수장은 장문인인 태허진인(太虛眞人)이었다. 사 년 전의 소림사 집회 때에는 장로 중 한 사람인 태성진인(太聖眞人)이 왔던 것을 생각해 보면 곤륜파에서 이번 집회에 나름대로 상당한 신경을 쓴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공동파 고수들은 곤륜파의 옆에 자리를 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사이가 나쁜 청성파와 붙어 있지 않게 하려는 무당파의 배려 때문인 듯했다. 공동파의 고수들 중에는 유난히 깡마르고 눈빛이 예리한 도인이 시선을 끌었다. 도인의 나이는 육십쯤 되어 보였는데, 공동파 특유의 검은색 도복 때문인지 날카롭고 매서워 보이는 인상이었다.
진산월이 그 노도인을 잠시 바라보고 있자 동중산이 눈치 빠르게 그 노도인의 신분을 알려 주었다.
“저 노도인은 공동삼도의 한 사람인 불치도인입니다. 공동파 장문인인 흑우신도(黑牛神道) 명량자(明亮子) 대신 이번에 공동파 문인들을 이끌고 왔다고 하더군요.”
구대문파 중 이번 집회에 장문인이 참가하지 않은 문파는 공동파가 유일했다. 하나 무림인들은 그 사실을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공동파를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는 자들이 바로 공동삼도이며, 그중에서도 불치도인의 영향력이 가장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공동삼도는 명량자의 사형들로, 허울 좋은 장문인 자리에 마음 약한 사제를 앉히고 자신들이 공동파를 마음대로 쥐고 흔들고 있다는 악평을 받기도 했다. 하나 그들 개개인의 무공이 워낙 뛰어나고 강호에서의 명성도 대단해서 누구도 감히 그들 앞에서 그런 말을 입에 담는 사람이 없었다.
불치도인은 공동삼도의 첫째로, 많은 사람들이 아마 공동파의 제일고수일 거라고 생각하는 인물이었다.
우연히 불치도인의 시선이 진산월과 동중산을 잠시 머물렀다가 지나갔다. 불치도인의 눈에는 아무런 감정의 빛도 담겨 있지 않았다. 장거릉 같은 호의가 담긴 것도, 백리장손처럼 차갑고 냉랭한 것도 아닌 아주 무감각하고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빛이었다.
진산월이 그들을 찬찬히 훑어보고 있을 때, 사시(巳時)가 되었음을 알리는 북소리와 함께 집회가 시작되었다.
예전의 소림사에서 있었던 무림대집회와는 달리 이번 집회는 성대한 개회사도 없었고, 무림인들의 환성이나 박수 소리도 들리지 않은 차분한 분위기였다.
무당에서 유일하게 남은 호법진인인 현성도장이 진행을 맡은 것도 다소 특이한 일이었다. 현성도장은 장문인인 현령도장의 사제이며, 인망 또한 두터워서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원래 이런 집회의 진행은 일대제자들 중 뛰어난 인물이 맡거나 좀 더 젊은 사람이 하는 게 일반적이었는데, 무당파에서도 최고의 수뇌 중 한 사람인 현성도장이 직접 나선 것만 보아도 무당파에서 이번 집회에 얼마나 신경을 기울이고 있는지 여실히 알 수 있었다.
현성도장은 차분한 음성으로 이번 집회가 열리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무림맹주인 위지립을 소개하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를 모두 마쳤다.
위지립은 중앙의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을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무림맹을 맡고 있는 위지립이오. 우선 어려운 자리를 마련해 주신 무당파의 현령 장문인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리겠소.”
현령도장이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받자 위지립은 이내 형형한 눈빛으로 주위의 군웅들을 훑어보았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서장 무림의 세력들이 이미 상당수 중원으로 들어와 있어, 강호무림에 크고 작은 분란이 끊이지 않고 있소. 이러다가는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될 중추절이 되기도 전에 중원의 정기가 큰 손상을 입게 될 것이 분명하오.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 그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소.”
장내에는 적지 않은 수의 무림인들이 있었지만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한 정적에 잠겨 있었다. 위지립의 묵직한 음성만이 넓은 자소전 안을 울리고 있을 뿐이었다.
“우선은 다소 느슨하게 운영되었던 무림맹의 조직을 보강하고 확실한 역할 분담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오. 사실 무림맹은 사 년 전에 만들어진 후 그 이름과는 달리 별다른 활동을 못 하고 유명무실해진 지 오래요. 그 안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맹을 이끌어 가는 이 사람의 부족함을 먼저 꼽지 않을 수 없소. 그 점에 대해 이 자리를 빌려 강호의 동도들에게 진심으로 사과의 말씀을 드리겠소.”
자존심 강하기로 유명한 위지립이 선뜻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며 사방을 향해 고개를 숙이자 무림인들은 다소 뜻밖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흔쾌히 그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사실 적지 않은 무림인들이 그동안 무림맹의 지지부진한 활동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기에 위지립이 사과하지 않았다면 자칫 그에 대한 성토가 줄을 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확실히 위지립은 시세를 파악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자신에 대한 시선이 다소 부드러워진 것을 확인한 위지립이 다시 말을 이었다.
“사 년 전에는 강호무림을 열 개의 지단으로 나누어 조직을 구성했으나, 그것은 한시적인 성격이 강했소. 더구나 당시 지단을 맡았던 단주들 중 신상에 문제가 생겨 활동을 할 수 없게 된 분들도 적지 않게 계시오. 그래서 이름뿐인 십대지단을 폐하고, 비대하고 방만하게 운영되었던 무림맹의 조직을 보다 효율적으로 정비하려 하오.”
위지립의 말은 듣기에 따라서는 상당히 위험한 발언이었다.
십대지단은 당시 무림인들의 중지를 모아서 만든 조직체계였다. 그런데 위지립은 독단적으로 그 체계를 허물고 새로운 조직을 편성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주위의 아무도 그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거나 의문을 표하는 사람이 없었다. 특히 십대지단의 단주를 맡고 있는 자들이라면 자신들의 지위가 없어지는 것에 대한 불만을 가질 법도 한데, 누구도 그런 의사를 나타내지 않았다.
그것은 사전에 위지립이 어떤 식으로든 그들의 불만을 잠재울 당근을 제시하며 설득했기 때문일 것이다. 앞으로 조직될 무림맹의 체계 또한 이미 위지립을 위시한 몇몇 인물들에 의해 완벽하게 짜인 상태임이 분명했다.
진산월은 새삼 무림의 집회라는 것이 허울 좋은 이름일 뿐, 정작 중요한 사항은 이미 시작도 하기 전에 물밑으로 모두 결정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기 자신도 선봉의 자리를 맡기로 사전에 약조되지 않았던가?
그것을 알고 나니 집회에 대한 흥미도가 급격히 떨어져 버렸다.
위지립은 열심히 새로운 조직 체계에 대한 당위성을 설명하고 있지만, 진산월의 귀에는 더 이상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대신 그는 머릿속으로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곳에 모인 군웅들은 당금 무림에서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거대 문파의 수뇌들이었다. 그들 중 몇몇은 진산월도 만난 적이 있었지만, 그 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이번에 종남파는 어떤 식으로든 최대한 자신들에 우호적인 문파의 수를 늘려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다행히 오늘 아침에 아미파에서 임영옥과 친분이 두터운 흑미륵 원정을 통해 이번에도 종남파를 지지하겠다는 의사를 은밀히 보내왔다. 소림과 아미의 변함없는 지지를 확인한 것은 반가운 일이었으나, 그들 외에 뚜렷하게 종남파를 지지할 만한 문파가 없다는 것은 명백한 불안 요소라고 할 수 있었다.
진산월은 다시 한 번 점창파부터 청성파, 곤륜파, 공동파의 고수들을 차례로 살펴보았다.
그들 중 적어도 두 개 문파가 찬성을 해야만 종남파의 구파 복귀가 가능해질 수 있었다. 곤륜파가 비록 이십 년 전에 종남파의 손을 들어 주었다고 해도 이번에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전혀 없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무림의 일에 개입하는 것을 극도로 꺼려하기 때문에 구대문파의 자리에 변동이 일어나거나 무림이 풍파에 휩쓸리는 것을 그다지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십 년 전과 마찬가지 이유로 이번에도 형산파를 탈락시키고 종남파를 복귀시키는 일에 반대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무림집회의 일정은 단 사흘뿐이다. 짧은 시간 동안 그들 네 문파를 모두 신경 쓸 수는 없었다. 이제는 집중과 선택을 해야 할 시간이었다.
그들 중 어느 문파를 골라서 접근을 해야 할지 진산월은 고민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나서 한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침 드넓은 자소전의 가장 반대편 위치에 앉아 있던 그 사람도 진산월을 쳐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교차되었다.
수정처럼 차고 맑은 시선이었다. 잡티 하나 없는 깨끗한 얼굴에 단정한 용모의 그 사람은 차갑고 냉정한 눈빛만큼이나 앉아 있는 자세도 바르고 곧았다.
그 사람은 묵묵히 진산월을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진산월도 무심한 얼굴로 시선을 거두었다.
비록 아무 대화도 없는 짧은 시간 동안의 시선 교환이었지만, 진산월은 그것으로 다시 한 번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적어도 화산파는 이번에도 절대로 종남파의 손을 들어 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수정처럼 차가운 눈빛의 그 사람은 다름 아닌 화산파의 장문인이자 무림구봉의 검봉으로 불리는 육합신검 용진산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