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30권 무당집회(武當集會)편 : 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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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30권 무당집회(武當集會)편 : 6화


308장. 일다지약(一茶之約)

첫날의 집회는 불과 한 시진 만에 끝이 났다.

위지립이 무림맹의 새로운 조직 체계를 설명하고, 각파의 수뇌들이 그 의견을 검토하여 약간의 수정을 거친 후에 이틀 후의 총회에서 최종 결정하기로 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오늘의 집회는 본회에 앞선 사전 모임의 성격이 강했다.

집회가 끝난 후 자소전을 벗어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서던 진산월은 많은 시선이 자신에게 향해 있음을 알아차렸다. 직접 말을 걸어오는 사람은 없었으나 대부분의 무림인들이 은밀히 혹은 유심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가 무어라 해도 진산월은 당금 무림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었으며,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무림인들의 관심의 대상이었다. 주위의 따가운 시선에서 새삼 진산월은 그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는 행동거지 하나와 내뱉는 말 한 마디에도 신중을 기해야 할 판이었다.

자소전을 나오니 유난히 파란 하늘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집회가 워낙 빨리 끝나서 이제 겨우 정오가 되었을 뿐이었다. 한낮의 햇살은 제법 따가웠으나 공기가 워낙 맑아서인지 덥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진산월이 막 자소전의 계단을 내려왔을 때, 누군가가 그에게로 다가왔다. 동중산이 부지불식간에 다가온 인물의 앞을 막아섰다.

그는 청삼에 청건을 한 각진 얼굴의 사나이였다. 그의 허리춤에 매달린 장검에 네 개의 매듭이 묶여진 푸른 수실이 유난히 눈길을 끌었다.

동중산은 한눈에 그를 알아보았다.

“형산의 황일기 소협이구려. 이제 보니 사결검객이 된 모양인데, 진심으로 축하를 보내겠소.”

“감사합니다. 동 대협도 그동안 무탈하신 것 같군요.”

사나이는 다름 아닌 황일기였다. 동중산은 사 년 전에 소림사에서 그를 보았었는데, 그때에 비해 한결 침착하고 차분해진 그의 모습에 내심 고개가 끄덕여졌다. 아마도 사결검객에 올랐다는 자부심과 긍지가 그의 태도와 행동거지를 변모시킨 것 같았다. 그만큼 형산파 제자들에게 사결검객이 상징하는 의미는 남다른 것이었다.

주위를 지나던 많은 무림인들이 걸음을 멈춘 채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가뜩이나 신검무적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상황에서 형산파의 고수가 종남파를 찾아온 광경을 보았으니 그들의 이목이 집중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본 파에는 무슨 일이시오?”

동중산의 물음에 황일기는 한 장의 배첩을 내밀었다.

“본 파의 수석장로께서 진 장문인께 만남을 청하셨습니다.”

뜻밖의 말에 동중산은 그가 내민 배첩을 슬쩍 쳐다보았다.

<종남파 장문인 친전.

형산 용성음(龍晟音) 배상.>

대충 써 갈긴 듯한 글씨였음에도 은은한 품격이 느껴졌다.

형산파의 수석장로라면 무림구봉 중의 일인으로 유명한 용선생이었다.

용성음은 아마도 용선생의 본명일 것이다.

용선생이 복잡한 자소전에서 이 배첩을 썼을 리는 없으니 아마도 미리 써 온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동중산은 자소전에서 용선생을 본 기억이 없었다. 용선생은 오늘의 집회가 예비 모임의 성격이 강한 것을 알고 참석하지 않은 게 분명해 보였다.

“잠시만 기다리시오.”

동중산이 배첩을 가져오자 진산월은 배첩을 펼쳐 보았다. 배첩의 내용은 짤막했다. 두 파의 현안을 논의하기 위해서 만남을 요청하는 글귀였다.

진산월은 황일기의 앞으로 다가왔다.

황일기는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진 장문인을 뵙니다.”

예전과는 다른 예의 바른 모습이었다.

“오랜만일세. 그간 자네의 진경이 남달라 보이는군. 사결에 오른 걸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진산월은 거두절미하고 물었다.

“용선생께선 어디에 계시나?”

“수석장로께서는 우적지(禹迹池) 옆의 정자에서 장문인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혼자 계시나?”

“그렇습니다.”

“알겠네. 찾아뵙도록 하지.”

진산월은 이내 종남파의 고수들에게 먼저 숙소로 가 있으라고 지시했다. 낙일방이 따라올 기색을 비쳤으나 동중산이 한발 앞서 재빨리 나섰다.

“제가 장문인을 모시겠습니다.”

진산월은 황일기의 안내를 받으며 우적지로 향했다.

주변에서 이를 지켜보던 무림인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어느 때보다 크게 들렸다. 아마 조만간 무당산 전체가 지금의 일로 술렁거릴 게 불을 보듯 뻔했다.

우적지는 자소궁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무당산 깊은 곳에서 흐르는 계곡물이 지나는 곳으로, 주위의 풍광이 뛰어나서 예로부터 명승지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우적지 옆에는 제법 오래된 정자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정자 위에 푸른 학창의를 입은 초로의 중년인 한 사람이 단정한 자세로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정갈하게 뒤로 묶은 머리에 한 마리 학을 연상케 하는 고고한 인상의 중년인이었다.

황일기와 동중산이 아래에 머물고 진산월이 혼자 정자 위로 오르자 중년인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담백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야 만나게 되었군.”

맑고 차분한 음성이었다.

진산월은 사 년 전에 멀리서 용선생을 본 적이 있었으나 가까이에서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사 년 전이나 지금이나 용선생은 달라진 것이 없어 보였다. 젊은이의 그것처럼 탄력 있고 혈색 좋은 피부도 그대로였고, 고고한 기상을 느낄 수 있는 현오한 눈빛과 차분한 음성도 마찬가지였다.

진산월이 알기로 용선생의 나이는 거의 구십에 가깝다고 했는데, 겉으로 보이는 그의 모습은 아무리 보아도 오십 대의 중년인이었다.

용선생은 진산월의 사조인 천치검 하원지보다도 배분이 높았고, 환우삼성과 동시대의 인물이었다. 형산파에서 그의 위치는 절대적이었고, 신망 또한 높았다.

아무리 진산월이 일파의 장문인이라고 해도 무림의 대선배격인 그를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종남의 진산월입니다.”

진산월이 정중하게 포권을 하자 용선생은 조용히 웃었다.

“반갑네. 내가 형산의 용성음(龍晟音)일세.”

짐작대로 용선생의 본명은 용성음이었다.

“자리에 앉게.”

진산월이 용선생의 앞에 마주 앉자 용선생은 예의 차분한 눈길로 그를 응시했다.

“자네에 대한 소문을 많이 듣고 언제고 꼭 만나고 싶었네. 이제 이렇게 자네를 대하고 보니 마음이 무척이나 설레는군.”

“좀 더 조용한 자리였으면 더 좋았을 것입니다.”

“아무려면 어떠나? 오늘같이 화창한 날에 이런 풍광 아래에서 만나는 것도 운치 있는 일이 아니겠나?”

진산월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변의 경치는 확실히 좋았다. 멀리 떨어진 숲과 우적지를 가로지르는 우적교의 다리 곳곳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으나, 풍광 자체는 나무랄 데가 없었다.

용선생도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서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느꼈는지 가볍게 혀를 찼다.

“쯧. 어차피 나중에 시간이 흐르면 알려질 일인데 어지간히도 성가시게 몰려드는군. 자네가 불편하면 사람들의 시선을 피할 수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겨도 좋네.”

“저는 상관없습니다.”

“그러면 좀 더 머물러 있도록 하지. 이 정자는 제법 노리는 사람들이 많아서 오늘같이 비어 있는 자리를 차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거든.”

진산월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면 오늘 집회에 나오지 않으신 것이…….”

용선생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들이 다 집회에 참석할 때 이곳의 빈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였지. 쓸데없이 번잡스럽기만 한 모임에 억지로 나가는 것보다는 훨씬 더 유익한 일이었다고 생각하네.”

“확실히 나쁘지 않은 선택이군요.”

“자네도 그렇게 생각할 줄 알았네.”

용선생은 찻주전자를 들어 보였다.

“용정차일세. 한 잔 마실 텐가?”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용선생은 진산월의 앞에 놓인 찻잔에 차를 따랐다. 그윽한 다향이 우러나오자 진산월은 서슴없이 찻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갔다.

“좋은 차로군요.”

“이 근처에 괜찮은 약수터가 있다고 해서 그곳에서 찻물을 가져왔네. 그래서인지 오늘따라 차 맛이 일품일세. 나도 벌써 다섯 잔이나 들이켰네.”

용선생은 비어 있는 그의 잔에 차를 따르고 자신도 한 잔 따라서 천천히 마셨다.

“흠. 이런 날 이런 곳에서 이런 차를 마실 수 있다는 것도 행복이지. 더구나 그 상대가 자네라니 모든 조건이 너무도 완벽하군.”

진산월도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용선생은 강호에 알려진 놀라운 위명과는 달리 소탈하고 쾌활한 사람이었다. 공연히 사람을 부담스럽게 하지도 않았고, 음침한 구석도 없었으며, 나이만큼 늙고 고루해 보이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의 말마따나 오늘의 날씨는 너무도 좋았고, 우적지의 경치는 감탄이 나올 정도로 뛰어났으며, 차 맛은 더할 수 없이 훌륭했다.

두 사람은 몇 잔의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었다. 모르는 사람들이 그들을 보았다면 친한 벗 두 사람이 뛰어난 경승을 배경으로 한적한 오후의 한때를 보내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지도 몰랐다.

제법 큰 주전자의 물이 모두 떨어질 때가 되자 용선생은 가벼운 한숨을 불어 내쉬었다.

“후우. 이처럼 느긋하게 차를 마신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군. 요새는 영 이런저런 일로 심사가 복잡해서 말일세.”

“무슨 심사가 그리도 복잡하셨습니까?”

용선생은 짐짓 진산월을 흘겨보며 가볍게 투덜거렸다.

“그게 모두 자네 때문이 아닌가? 목구멍 바로 밑에 칼날이 다가오는 것 같아서 늘 신경이 곤두서 있을 수밖에 없었네.”

“어떻게 하면 그 칼날이 치워지겠습니까?”

“그거야 자네가 더 잘 알 게 아닌가?”

진산월은 담담한 시선으로 그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제가 치워 드린다고 해서 신경이 가라앉으시겠습니까?”

용선생은 피하지 않고 그의 시선을 받고 있더니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말대로 칼날이 있든 없든 내 신경은 늘 곤두서 있겠지. 하지만 칼날이 눈앞에서 어른거리지만 않는다면 적어도 차 한 잔을 즐길 여유는 가질 수 있을 걸세.”

“조만간 칼날은 치워지게 될 겁니다.”

“언제 말인가?”

“선배님께서 정하시지요.”

용선생은 희미하게 웃었다.

“배려해 주는 건가?”

“저야말로 그쪽의 배려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렇게까지 말하니 무작정 기간을 늘릴 수는 없겠군. 삼일 후가 어떤가? 시간도 이 시간으로 말일세.”

“적당하다고 봅니다.”

“방식은?”

“예전의 방식이 어떻습니까?”

용선생은 고개를 살짝 저었다.

“셋은 너무 적지 않은가? 다섯으로 하세.”

“그렇게 하겠습니다.”

“장소는 자네가 정해 보게.”

진산월은 한 차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의 풍광이 마음에 드는군요.”

“역시 그렇지? 자네는 확실히 나와 통하는 데가 있군.”

용선생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더니 다시 한 차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막상 정해지고 나면 마음이 가벼울 줄 알았는데 별로 그렇지도 않군.”

“하지만 그 후에는 적어도 눈앞의 칼날은 보이지 않을 겁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어느 쪽이든 마음속의 칼날은 더욱 날카롭게 벼려지고 있을 걸세.”

“강호에 몸을 담고 있는 한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요.”

용선생은 물끄러미 진산월을 쳐다보고 있더니 이윽고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자네는 나이답지 않군. 마치 오래된 옛 벗을 만난 것 같은 느낌이야.”

“칭찬의 말씀으로 듣겠습니다.”

“그렇다네. 다음에도 자네와 차 한 잔을 마실 수 있는 기회가 있길 바라겠네.”

“저는 아무 때고 상관없습니다.”

“내가 문제란 말이겠군. 정말 그런가?”

용선생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피식 웃었다.

“삼일 후를 기대해 보겠네.”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날 뵙도록 하지요.”

진산월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향해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용선생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그의 인사를 받았다.

진산월이 정자를 내려오자 딱딱하게 굳은 얼굴의 동중산이 그를 맞이했다.

“장문인.”

진산월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오래 기다리느라 수고가 많았구나. 숙소로 돌아가자.”

동중산은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표정이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진산월을 따라 몸을 움직였다. 우적지의 곳곳에 숨어서 정자를 지켜보고 있던 많은 시선들이 그들에게 집중되었으나, 동중산의 신경은 온통 다른 것에 집중되어 있었다.

형산파와의 비무가 드디어 정해진 것이다.

날짜는 삼일 후 정오.

장소는 이곳 우적지.

양 파에서 다섯 사람씩 나와서 승부를 가르는 방식이었다.

두 문파의 미래가 걸린 중요한 싸움이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너무도 갑작스레 결정되어 버린 것이다. 후일 많은 사람들이 ‘차 한 잔의 약속(一茶之約)’이라고 부르는 악산대전의 서막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은 조용한 가운데 무거운 분위기였다. 항상 침착하고 차분했던 동중산은 연신 진산월의 기색을 살피고 있었고, 진산월은 무언가 깊은 상념에 잠긴 모습이었다.

“휴우.”

몇 번이나 진산월에게 무어라고 말을 꺼내려다 입을 다문 동중산이 자신도 모르게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자 진산월이 슬쩍 그를 쳐다보았다.

“할 말이 있으면 해 보거라. 비천호리답지 않게 무얼 그리 혼자 끙끙거리고 있는 게냐?”

동중산의 얼굴에 멋쩍은 미소가 떠올랐다.

“장문인의 표정이 너무 엄숙해 보여서 말씀을 건네기가 어려웠습니다.”

“몇 가지 생각할 것이 있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게냐?”

동중산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이 너무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 같아 오히려 마음이 불안합니다. 형산파와 싸우게 될 때까지 험난한 과정을 무수히 겪어야 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쉽게 비무가 결정되리라고는 정말 상상도 못 했습니다.”

진산월은 다소 어두워진 동중산의 표정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형산파가 순순히 본 파와의 비무에 응하려고 나선 것이 이상하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그들로서는 굳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데 수석장로인 용선생이 직접 나서서 먼저 본 파와의 비무를 거론했으니, 그 속에 그들의 다른 의도가 숨어 있는 게 아닌지 불안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산월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재인(才人)은 다사(多思)가 병(病)이라고 하더니, 너는 정말 생각이 너무 많은 게 문제로구나.”

동중산도 따라서 웃었으나 여전히 얼굴 한쪽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제가 재인은 아니지만 걱정이 많은 건 확실합니다. 그래서인지 이번 일에 대한 여러 가지 의심이 계속 생기는군요.”

“어떤 점이 그리도 의심스러운 것이냐?”

“황일기는 중인환시리에 장문인을 찾아왔습니다. 용선생이 장문인을 기다리고 있던 우적지의 정자도 사람들의 시선이 쉽게 집중되는 장소였습니다. 제자는 그들이 너무 노골적으로 무림인들의 이목을 끌어모으고 있다는 것에 의구심이 듭니다.”

“그리고 또?”

“아직 본 파에서 정식으로 안건을 제기하지도 않았는데 용선생이 먼저 본 파와의 비무로 이번 일을 결정짓자는 제안을 해 왔습니다. 구대문파에서 어떠한 의사도 내비치지 않은 상태에서 형산파에서 독단적으로 이번 일에 대한 결정을 내린 셈입니다. 그간 그들이 본 파에 행한 여러 가지 일들을 생각해 보면, 그러한 그들의 의도가 마냥 순수한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습니다.”

진산월은 여전히 엷은 미소를 지은 채 동중산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럴듯하구나. 또 있느냐?”

“용선생은 삼 일 후로 비무 날짜를 잡았는데, 그날은 곧 무림집회의 총회가 끝난 직후입니다. 따라서 무림집회에 참석했던 모든 무림인들의 이목이 자연스레 본 파와 형산파와의 비무에 집중될 것입니다. 그것은 자칫 비무의 분위기를 과열시킬 수 있으며, 어느 쪽이든 패한 문파에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이 일부러 이렇게 백척간두(百尺竿頭)의 상황을 만든 것은 본 파와의 비무에서 승산을 장담하지 않고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

“게다가 비무에 출전할 고수들의 수가 다섯 명으로 늘어난 것도 형산파에 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본 파에서 비무에 참가할 인물은 대부분 정해져 있는 상황이니, 그들로서는 얼마든지 자신들에 유리한 상대를 골라 출전시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동중산은 마음속에 담은 말을 모두 토해 내듯 단숨에 말을 꺼낸 후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여러 가지 점들을 생각해 보니 제자로서는 우려하는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산월은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본 파가 그들에게 패할 것이 두려운 게냐?”

“본 파의 역량을 의심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제자는 자칫 그들의 술수에 빠져 본 파가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이 오게 되지 않을지 걱정스러울 뿐입니다.”

진산월은 한동안 묵묵히 동중산을 바라보더니 이윽고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네가 걱정하는 바는 잘 알겠다. 사실 나도 그들의 의도가 마냥 순수하거나 올바르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겉으로는 단순한 제안인 것 같아도 여러 가지의 은밀한 노림수를 내포하고 있겠지. 하지만 어차피 결과는 양 파의 대결로 결정될 것이다. 가장 순수하고 절대적인 무림의 법칙으로 판가름 난다는 말이지. 형산파도 그것을 알고 있기에 더 이상의 불필요한 시비를 벌이지 않고 선뜻 비무를 제안해 온 것일 게다.”

진산월의 음성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동중산의 귀에는 다른 어떤 울림보다도 묵직하고 진중하게 들려왔다.

“변칙은 한순간의 이로움을 줄지 몰라도 결국은 정도(正道)를 당해 내지 못한다. 우리가 정도를 꿋꿋이 걷는다면 그들이 어떠한 수를 부린다 할지라도 반드시 승리를 쟁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번 일에는 다른 무엇보다도 정도가 필요한 법이다.”

구대문파를 위시한 모든 무림인들이 형산파와 종남파의 일거수일투족에 온통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섣부른 수작을 부리거나 술수를 쓰려 한다면 오히려 주위의 비난을 받거나 낭패스러운 처지에 빠지게 될지도 몰랐다. 형산파가 바보가 아니라면 세간의 이목이 몰려 있는 이런 상황에서 허튼수작을 부리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동중산도 그 점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마음속에 한 가닥 불안감은 가시지 않았다.

그것은 그만큼 이번 일에 너무도 많은 것이 걸려 있기 때문이었다.

종남파가 비무에서 승리한다면 형산파에 빼앗겼던 구대문파의 자리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오랫동안 모든 종남파의 문인들이 너무도 간절히 갈구해 왔던 염원이었으며, 그것을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도 치를 각오가 되어 있었다.

형산파 또한 마찬가지였다. 만일 형산파가 비무에서 승리한다면 턱 밑의 칼날 같았던 종남파를 따돌리고, 구대문파 내의 지위를 확고히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어느 누구도 비무의 승패를 예측하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신검무적이라는 절대적인 패(牌)를 가지고 있는 종남파와의 대결에 형산파가 선뜻 나섰다는 것은 그들이 무언가 그에 맞설 수 있는 비장의 한 수를 지니고 있다는 의미였다.

동중산은 용선생이 오대오(五對五)의 비무를 제안한 것이 그 수의 일환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다.

신검무적을 제외하고 종남파에서 확실하게 내세울 수 있는 고수는 성락중과 낙일방뿐이다. 그들은 형산파의 오결검객에 뒤지지 않는 무공을 지니고 있으나, 그렇다고 우세를 장담할 수 있는 수준도 아니었다.

만에 하나 그들 중 한 사람이라도 패하게 된다면 아무리 신검무적이 있는 종남파라고 할지라도 치명적인 열세에 놓이게 될 것이다.

반면에 그들 두 사람이 모두 승리를 하게 된다면 종남파가 절대적인 우세를 점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혹시 형산파는 성락중과 낙일방에게 승리할 확고한 자신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동중산이 우려하는 것도 바로 이 점이었다. 동중산은 형산파가 이미 비무에 대한 절대적인 승산을 염두에 두고 이번 일을 진행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 때문에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 어찌 되었건 비무는 결정되었다.

이제는 정말 진검승부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출전자들이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건 혼신을 다한 대결일 것이다.

동중산으로서는 그저 그 대결에서 종남파가 승리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랄 수밖에 없었다.

동중산이 가슴 한구석에 도사리고 있는 불안감을 씻지 못하고 근심 어린 표정을 짓고 있을 때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일단의 무리들이 자소전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주위에 있던 무림인들이 그들을 보고 웅성거리는 소리에 문득 정신을 차린 동중산은 그들이 하나같이 거친 인상에 날카로운 눈빛을 지닌 고수들임을 알아차리고 내심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처음 보는 자들이로군. 기세가 거친 걸 보니 정파의 인물들은 아닌 것 같은데, 대체 어느 파의 고수들이지?’

그들은 모두 다섯 명의 남자들이었는데, 의복도 제각각으로 달랐고 나이나 기풍도 판이해서 외관만으로는 도저히 어느 문파의 고수들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들 중 가장 뒤쪽에 짙은 청삼을 입은 중년인 한 사람이 유유자적한 걸음으로 걷고 있는 모습이 유난히 시선을 끌었다.

청삼 중년인은 다른 네 사람과는 달리 이목구비가 수려하고 기풍이 부드러워서 전혀 그들과 어울려 보이지 않았다. 그때 청삼 중년인의 시선이 동중산 쪽으로 향했다.

청삼 중년인의 눈빛이 유난히 날카롭게 번뜩인다고 싶은 순간, 그의 입가에 한 줄기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은 무어라고 표현하기 힘든 야릇한 미소였다.

생면부지의 인물이 자신을 향해 기이한 미소를 지어 보이자 동중산은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자신의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뒤에는 진산월이 서 있었다. 그제야 동중산은 청삼 중년인이 웃어 보이는 상대가 자신이 아니라 진산월임을 알아차렸다. 진산월의 얼굴은 여전히 무심했으나, 동중산은 그의 눈빛이 어느 때보다 차갑게 굳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동중산이 그 눈빛에 서린 기운에 순간적으로 멈칫거릴 때, 귓전으로 진산월의 전음이 들려왔다.

“저들이 누구인지 알아보도록 해라.”

동중산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내 한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까지도 진산월은 청삼 중년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청삼 중년인은 그를 향해 다시 한 차례 의미를 알기 힘든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자소전 쪽으로 사라져 갔다.

진산월은 누구보다 침착하고 냉정한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순간적으로 마음속의 격동을 억누르기 힘들었다.

청삼 중년인은 바로 당각과의 대결 전야에 그를 찾아와 여섯 개의 발자국을 남기고 사라진 신비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진산월은 그 여섯 걸음이 무염보의 후반부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이백 년 동안이나 강호에서 사라졌던 무염보의 비밀을 알고 있으리라 짐작되는 그의 정체는 물론이고 정확한 이름도 알지 못해서 그동안 진산월은 마음속의 답답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한데 뜻밖에도 무당파의 본거지 한복판에서 그를 다시 보게 되었으니 진산월로서는 대체 그의 진실한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청삼 중년인이 남긴 여섯 개의 발자국은 무염보의 흔적이 맞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청삼 중년인은 어떻게 이백 년간이나 실전되었던 무염보를 알고 있는 것일까?

그가 그날 밤에 진산월을 찾아온 이유는 무엇이며, 그가 밝히지 않은 종남파에 관한 옛 이야기와 보법에 얽힌 사연은 무엇일까?

그때 그는 진산월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으면 살아남으라고 말했다.

진산월은 당각과의 대결에서 살아남았고, 전혀 뜻하지 않은 곳에서 그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이것은 모두 그의 의도인가? 아니면 순전한 우연인가?

숱한 의문이 머리를 어지럽히고 있을 때, 때마침 동중산이 돌아왔다.

진산월은 나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들이 누구인지 알아보았느냐?”

“예. 다행히 그들의 등장이 워낙 소란스러워서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누구냐?”

동중산의 대답은 진산월의 예상을 벗어난 것이었다.

“그들은 강북녹림맹의 고수들입니다. 내일의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왔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청삼인은 강북녹림맹의 총표파자라고 합니다.”

“강북녹림맹의 총표파자?”

“예. 그가 바로 십절산군 사여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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