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30권 무당집회(武當集會)편 : 8화
310장. 은원무궁(恩怨無窮)
무림집회의 둘째 날은 파란의 연속이었다.
이미 강북녹림맹에서 총표파자를 비롯한 수뇌부들이 대거 참여한다는 것은 어제 알려졌지만, 오늘은 신목령의 고수들이 모습을 드러내 세인들을 놀라게 했다. 특히 오천왕 중의 일인인 광풍서생 양척기와 십이사자 중의 세 명이 한꺼번에 나타나는 바람에 집회장이 온통 술렁이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신목령주의 대제자인 신목일호 백자목에게 많은 무림인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정파의 구성(救星)인 구궁보의 모용봉에 비견되는 인물이 마도의 백자목이었다. 그동안 명성만 자자했을 뿐, 좀처럼 강호에서 보기 힘들었던 백자목의 모습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눈에 불을 켜고 모여들었다.
사 년 전의 소림집회에서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던 사파와 마도의 세력들이 연이어 등장하자 무당산의 분위기는 점차 달아오르기 시작했고, 집회에 대한 기대감도 덩달아 커져 갔다. 많은 무림인들은 이번 무당산의 집회가 사 년 전과는 달리 커다란 성과를 낼 것이라고 믿기 시작했고, 이번에야말로 정과 사가 어우러져 중원의 힘이 제대로 발휘될 거라고 떠들어 댔다.
주위가 온통 주전자 뚜껑처럼 요란스레 들끓고 있을 때, 유난히 조용한 곳을 찾아 발길을 서성이는 한 사람이 있었다. 푸른 신록이 끝없이 펼쳐진 무당산의 유월 하늘은 더없이 청명하기만 한데, 인적 없는 산길을 걷고 있는 청년의 얼굴에는 무언지 모를 수심이 담겨 있었다.
청년의 이름은 전흠. 당금 무림을 위진시키고 있는 종남파의 일대제자이며, 해남검파 장문인의 둘째 아들이기도 했다. 폭뢰검객이라는 별호로 혁혁한 명성을 쌓고 있으며, 누구보다도 전도양양한 젊은이였다. 거칠 것 없는 성격에 앞날이 창창해서 아무 걱정도 없을 것 같은 그가 홀로 사람 없는 산길을 거닐며 고민에 잠겨 있는 모습은 상당히 특이한 광경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흐음…….”
전흠의 입을 뚫고 가슴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무거운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평소의 그에게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어두운 표정이었다.
오늘 아침에 전흠은 장문인인 진산월에게서 이틀 앞으로 다가온 형산파와의 비무에 자신이 출전하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당연히 출전하리라고 믿고 있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불안감에 은근히 가슴을 졸이고 있던 전흠으로서는 한시름 놓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막상 형산파와의 비무에 출전이 확정되고 나자 그때부터 가슴이 두근거리며 좀처럼 진정되지가 않는 것이다. 한동안 방 안에서 흔들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던 전흠은 결국 실패하고 숙소를 빠져나와 무당산의 후미진 산길을 서성이게 되었던 것이다.
전흠 자신도 왜 이렇게 가슴이 떨리고 마음이 가라앉지 않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토록 바라 왔던 순간이 드디어 코앞으로 닥쳐왔는데, 마치 지옥 굴에 들어가는 사람처럼 불안함과 초조함에 사로잡혀 흔들리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으니 정말 한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이렇게 나약한 놈이었나?’
전흠은 씁쓸하게 웃으며 허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어젯밤만 해도 혹시라도 진산월이 자신을 출전시키지 않는 것은 아닐까 하고 노심초사했던 자신이 지금은 오히려 묘한 두려움으로 떨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그것은 두려움이었다.
전흠은 솔직히 인정을 했다.
‘지금 나는 두렵다.’
비무에 나올 형산파의 오결검객들이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패배할 것이 두려운 것도 아니었다. 다만 만에 하나라도 자신 때문에 종남파가 형산파와의 비무에서 승리하지 못하게 될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전흠은 누구보다 용맹하고 거칠 것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문파의 운명이 걸린 일전(一戰)을 앞에 두니 무거운 중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두려움을 몰랐던 그에게 두려움을 알게 해 주었고, 자기 자신을 보다 냉철하게 돌아보게 해 주었다.
책임을 진다는 것이 이토록 무겁고 두려운 일이라는 것을 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었다. 그러고 보니 문득 평생을 이러한 책임감 속에서 살아왔을 한 사람이 뇌리에 떠올랐다.
‘장문 사형은 항상 이런 중압감을 견뎌 내며 지내왔을 게 아닌가?’
문파의 재건이라는 거대한 짐을 양어깨에 짊어진 채 실낱같은 희망 하나를 가슴에 안고 험한 가시밭길을 걸어왔던 장문인을 생각하자 어쩐지 지금 자신의 고민이 사치스럽게만 느껴졌다.
전흠이 흔들리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스스로 심기일전을 다짐하고 있을 때였다.
우웅!
어디선가 괴이한 음향이 들려왔다. 마치 벌 떼가 우는 듯한 그 음향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듣는 사람의 모골을 송연하게 하는 기이한 힘이 담겨 있었다.
전흠은 오싹하는 기분에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마셨다. 문득 소매를 걷어 보니 팔에 소름이 잔뜩 돋아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전흠은 눈을 번뜩이며 주위를 둘러보다 멀지 않은 곳의 숲 속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미지의 음향이 그쪽에서 들려오고 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우우웅……!
그가 보고 있는 동안에도 울림이 계속 이어졌다. 그러다 갑자기 씻은 듯이 소리가 사라져 버렸다. 고요한 적막이 사위를 짓누르고 있었으나, 전흠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아직도 나직한 음향이 전신을 짓누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그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숲 속을 향해 걸음을 옮기려 할 때, 숲 속에서 한 사람이 불쑥 나타났다. 그는 훤칠한 키의 남삼 중년인이었다.
대충 빗어 넘긴 머리에 거칠고 투박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두 팔이 유난히 길어서인지 한층 더 크고 사나워 보이는 인물이었다.
남삼 중년인은 숲 속을 헤치고 나오다가 한쪽에 서 있는 전흠을 발견하고는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칼날같이 차갑고 예리한 시선이 전흠의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제법 기세가 괜찮은 젊은이로군.”
남삼 중년인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는 이내 긴 팔을 휘적거리며 그의 앞을 지나 산길을 내려갔다. 전흠은 그의 몸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도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뇌전을 맞은 듯한 전율이 그의 몸을 지배하고 있었다. 조금 전에 눈이 잠깐 마주쳤을 때, 전흠은 하마터면 검을 뽑아 들 뻔했었다. 그만큼 중년인의 눈빛에서 강렬한 압박감을 느꼈고, 전신을 바늘로 찌르는 듯한 무시무시한 살기가 피부로 전해졌던 것이다. 단순히 시선이 마주친 것만으로도 이럴진대, 검을 마주 들고 그와 마주 선다면 과연 어떤 기분이 될지 전흠으로서는 상상도 가지 않았다.
이와 같이 강렬한 기운을 흘려 낼 수 있는 자는 틀림없이 평생을 검과 함께 살아온 절세의 검객일 것이다.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사람으로서 전흠은 남삼 중년인의 가공할 기세에 감탄하는 한편으로 그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남삼 중년인은 숲 속에서 무엇을 한 것일까?
그리고 조금 전에 들려왔던 기이한 음향은 과연 무엇 때문에 생긴 것일까?
전흠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남삼 중년인이 나온 숲 속을 걸어 들어갔다. 십여 장을 가니 암벽으로 둘러싸인 작은 공터가 나왔다. 높다란 절벽에 가로막힌 반경 오 장쯤 되는 공간이었다. 아마 남삼 중년인이 나오지 않았다면 산길 근처에 이런 공간이 있다는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무심코 주위를 둘러보던 전흠의 시선이 한 군데에 고정되었다.
이십여 장쯤 되는 가파른 암벽의 한쪽에 작은 자국 몇 개가 나 있었다. 전흠은 천천히 그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오랜 풍상을 겪은 듯 매끄러워진 암벽의 한 부분에 손톱으로 후벼 판 듯한 자국이 나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세월의 모진 풍상을 이기지 못하고 자연스레 갈라진 것 같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원숭이가 손장난을 해 놓은 듯한 흔적 같기도 했다.
손을 내밀어 그 자국을 만져 보던 전흠의 눈빛이 가늘게 떨렸다.
‘이건 검기의 자국이다. 그런데 검기의 흔적이 이토록 예리하고 매끄러울 수 있을까?’
전흠의 손가락을 타고 차갑고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흔적 안에 아직도 이와 같은 기운이 담겨 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전흠은 그 흔적 중 하나가 조금 특별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다른 것은 암벽을 살짝 깎고 지나간 것에 불과했는데, 그 자국은 암벽 안으로 깊게 파여 있었다. 깎여 나간 흔적 한쪽에 마치 실금이 그어진 듯 새겨져 있기에 지금처럼 손으로 만져 보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쳤을지도 몰랐다.
그 자국을 만져 보던 전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것은 바로 검이 뚫고 들어간 흔적이었다. 실금처럼 보였던 것은 검이 워낙 얇고 검폭이 좁은 협봉검(狹鋒劍)의 일종을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이토록 얇고 검폭이 좁은 검으로 암벽에 이와 같이 깊은 구멍을 낸다는 것은 지금의 전흠으로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대체 검기가 얼마나 강력하기에 암벽을 두부처럼 뚫고 들어가 이런 자국을 남길 수 있단 말인가?
엄청난 내공의 소유자가 오랫동안 갈고닦은 검기를 극도로 압축시켜야만 이러한 일이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조금 전의 그 소리는 검기를 압축할 때 발생한 것이란 말인가?’
충분히 가능한 추정이었다. 자신이 그 음향을 듣고 순간적으로 소름이 돋았던 것도 그 음향 안에 필설로 형용키 어려운 가공할 기운이 서려 있음을 본능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흔적들은 모두 조금 전의 남삼 중년인이 남겨 놓은 것이 분명했다. 대체 그의 정체가 무엇이기에 이런 놀라운 흔적을 남길 수 있었는지 전흠은 다시 한 번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그때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건 원영만기(猿影滿炁)의 흔적이군.”
느닷없이 들려온 음성에 전흠은 황급히 고개를 돌려보았다.
언제 나타났는지 그에게서 멀지 않은 곳에 한 명의 회의인이 우뚝 서서 그처럼 암벽에 새겨진 흔적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난히 넓은 회의인의 소맷자락이 제일 먼저 시선을 끌었다.
회의인의 나이는 대략 이십 대 후반쯤 되어 보였는데, 특이하게도 머리를 하나로 묶어 허리 아래까지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전흠이 아무리 암벽의 흔적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고 해도 상대가 이토록 가까이에 나타날 때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은 회의인의 신법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방증일 수도 있고, 전흠이 남삼 중년인에게서 받은 충격이 정신을 놓을 정도로 컸다는 의미일 수도 있었다.
어느 경우이든 전흠으로서는 입맛이 씁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연히 전흠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은 퉁명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귀하는 누구요?”
회의인은 여전히 암벽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무심한 음성으로 말했다.
“지나가다 특이한 검향(劍響)이 들려서 와 본 것이니 신경 쓸 필요 없소.”
전흠은 한 가지를 알게 되었다.
‘조금 전과 같은 소리를 검향이라고 하는구나.’
그러고 보니 아주 어렸을 때 조부인 전풍개에게서 절정의 검객이 검을 펼칠 때는 검이 움직이는 소리만으로도 능히 상대를 제압할 수 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났다. 그때는 별다른 관심이 없어 자세히 듣지 못했는데, 확실히 그런 괴이한 음향을 지척에서 듣는다면 심신이 흔들려서 제대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전흠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다시 회의인에게 시선을 주었다. 어쩌면 회의인에게서 남삼 중년인의 정체에 대한 단서를 얻을지도 몰랐다.
“원영만기란 게 대체 뭐요?”
회의인은 여전히 암벽의 자국을 살펴보고 있었는데, 전흠의 질문을 받자 그를 힐끔 쳐다보았다. 차갑고 예리한 눈빛이었다.
“원영만기는 원공검법이 절정의 경지에 도달한 자만이 발출할 수 있는 특출한 검기요.”
뜻밖의 말에 전흠의 입에서 놀란 음성이 흘러나왔다.
“원공검법? 형산파의 원공검법 말이오?”
회의인은 딱딱하게 굳어진 전흠의 얼굴을 묵묵히 바라보더니 무심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럼 원공검법이 형산파 말고 달리 있다는 말이오?”
전흠의 얼굴 표정이 몇 차례 변했다.
회의인의 말이 사실이라면 조금 전의 남삼 중년인은 바로 형산파의 인물이라는 말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자는 형산파의 오결검객 중 하나로구나.’
전흠은 가슴이 철퇴에라도 맞은 듯 쿵 내려앉았다. 막연하게 상대할 만하다고 생각했던 형산파의 오결검객이란 존재가 갑자기 거대한 벽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회의인은 심각하게 굳어진 전흠의 표정을 보고는 무언가를 짐작한 듯 눈을 빛냈다.
“형산파의 검법이라는 말에 놀라는 걸 보니 혹시 종남파의 제자인가?”
그의 말투가 미묘하게 변했으나, 당혹감에 차 있던 전흠은 미처 느끼지 못했다.
전흠은 흔들리는 마음을 억지로 추스르며 어깨를 펴고 그에게 자신의 신분을 분명하게 밝혔다.
“나는 종남파의 이십일대 제자인 전흠이라 하오.”
당당한 종남파의 제자가 형산파의 검법을 보고 놀라서야 말이 되겠는가?
회의인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가며 냉랭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단 말이지? 마침 잘됐군.”
그제야 전흠은 상대의 말투가 어느새 평대로 바뀌었음을 알아차렸다. 자연히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투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당신은 누군가?”
회의인은 그의 말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품속에서 하나의 편지를 꺼냈다.
“그렇지 않아도 종남파의 장문인에게 전할 게 있어서 종남파의 숙소를 찾아가야 하나 고민 중이었네. 장문인에게 전해 주게.”
전흠은 회의인이 내민 편지를 받을 생각도 하지 않고 오히려 매서운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누군지도 모르는 자의 편지를 장문인께 전할 수는 없지. 정 전하고 싶으면 직접 가서 전하든지 하라구.”
전흠의 퉁명스러운 말에 회의인은 한동안 의미를 알기 힘든 눈으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이내 희미하게 웃었다. 차가운 웃음이었으나, 어딘지 모르게 약간은 흥에 겨운 듯한 웃음처럼 보이기도 했다.
“폭뢰검객이라고 했던가? 소문으로 듣던 대로 종남파 제자답지 않게 성정이 거친 친구로군.”
전흠의 짙은 눈꼬리가 세차게 꿈틀거렸다.
“감히 본 파를 능멸하는 건가?”
“능멸이 아니라 사실을 말하는 걸세. 종남파는 장문인부터 제자들까지 다들 너무 얌전하고 고분고분한 게 아쉬웠는데, 자네는 조금 다른 것 같아서 하는 말일세.”
“대체 본 파의 제자 누구를 보고 그따위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장문인은 물론이고 본 파의 누구도 얌전하다거나 고분고분하다는 말 같은 건 들어 본 적이 없는데 말이지.”
회의인의 입가에 떠올라 있는 웃음이 조금 더 짙어졌다.
“다들 예전과는 달라졌다는 건가? 요즘 들리는 소문대로라면 그럴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그렇다고 본성이 어디로 가는 것은 아니지.”
이제는 거리낌 없이 하대를 하는 회의인의 말투에 전흠은 한편으로는 화가 치밀어 오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정체에 대한 궁금증이 더욱 커졌다. 그의 말 속에서 그가 종남파의 인물들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대체 언제 적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군. 본 파에 대해서 그렇게 잘 알고 있는 척 제멋대로 떠들면서 자기가 누구인지 밝힐 용기는 없는 건가?”
전흠은 그를 자극하여 제대로 된 대답을 들으려 했으나, 회의인은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격장지계가 서툴군. 그저 한때 종남파의 몇 사람을 알고 있었을 뿐이니 나에 대해 너무 신경 쓸 필요는 없네. 그보다 자네 장문인에게 전하는 편지를 받지 않을 셈인가?”
회의인이 다시 편지를 내밀자 이번에는 전흠도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회의인은 어떤 식으로든 장문인과 안면이 있는 사이임이 분명해 보였다. 그렇다고 정체도 모르는 자가 주는 편지를 넙죽 받을 수도 없어서 순간적으로 머뭇거리고 있자 회의인은 다시 차갑게 웃었다.
“전해 주든지 말든지 자네가 알아서 하게.”
그는 슬쩍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그의 손에 들린 편지가 빠른 속도로 전흠의 코앞으로 날아들었다. 전흠은 무심결에 편지를 받아 들다가 눈을 살짝 찌푸렸다.
편지에 담긴 경력이 의외로 강력해서 손바닥이 얼얼했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회의인의 신형이 한 차례 흔들렸다.
“감히……!”
전흠이 버럭 노성을 지르려는 순간, 눈앞에 있던 회의인의 모습이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전흠은 움찔하여 검을 뽑아 들려다 손을 멈추었다. 암습이라도 하려는 줄 알았는데, 회의인의 신형은 어느새 숲 속의 한편으로 날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순식간에 시야에서 멀어지는 회의인의 신법은 가히 놀랍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전흠은 갑자기 봉투만을 날려 보낸 채 사라져 버린 회의인의 행동에 어이가 없어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문득 수중에 들고 있는 편지를 내려다보았다. 겉에 아무런 글자도 쓰여 있지 않은 편지는 단단히 밀봉되어 뜯어보기 전에는 무슨 내용이 쓰여 있는지 알아볼 수 없었다.
“이것 참…….”
전흠은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못마땅한지 눈살을 찌푸리고 있다가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에 암벽 한쪽에 새겨진 흔적들이 다시 들어왔다. 한참 동안이나 그 흔적을 바라보던 전흠은 한 차례 짤막한 한숨을 내쉬고는 이내 몸을 돌려 공터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전흠이 숙소로 돌아왔을 때, 마침 몇 명의 인물들이 종남파의 고수들이 머무르고 있는 건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천봉궁의 선자들인 백봉 정소소와 옥봉 누산산이었다.
“전 소협. 마침 장문인을 뵈러 왔는데, 장문인은 안에 계신가요?”
누산산이 살짝 눈웃음을 치며 묻자 전흠은 무뚝뚝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도 나갔다가 막 들어온 길이라 장문인이 계신지 알지 못하오. 잠시만 기다리면 곧 사람을 보내겠소.”
전흠이 자기 할 말만 하고 안으로 휑하니 사라지자 누산산의 아미가 살짝 찌푸려졌다.
‘아니 저자가 무슨 일이지?’
며칠 전만 해도 자신을 볼 때마다 환하게 웃으며 말 한 마디라도 더 건네 보려고 애를 썼던 전흠이 평상시와는 달리 퉁명스럽기 그지없는 말을 내뱉고 등을 돌렸으니 누산산으로서는 마치 뺨이라도 맞은 듯 얼떨떨할 수밖에 없었다.
정소소 또한 다소 의아하기는 마찬가지였으나, 차분한 성격답게 이내 마음을 가라앉혔다.
“아마 형산파와의 대결이 코앞으로 닥쳐오자 긴장감이 고양된 모양이다. 종남파의 고수들이 모두 비슷한 심정일 테니, 오늘은 쓸데없는 말로 그들을 자극하지 말거라.”
누산산은 입을 삐죽거렸다.
“쳇, 그렇다고 자기들을 응원해 주러 온 우리를 저렇게 문전박대하듯이 대한단 말이에요? 틀림없이 밖에 나갔다가 무언가 마음에 차지 않는 일을 당하고 심통이 잔뜩 난 상태였을 거예요.”
“대적을 앞둔 무림인들이 어떤 마음가짐인 줄 모르는 게냐? 오늘은 아무 소리 말고 조용히 있도록 해라.”
정소소가 평소와는 달리 엄격한 음성으로 말하자 누산산도 더는 무어라고 투덜거리지 못하고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조심하도록 할게요.”
잠시 후에 전흠 대신 낙일방의 준수한 모습이 나타났다.
“두 분 소저께서 오셨군요. 장문인께서 만나겠다고 하시니 안으로 드시지요.”
그녀들을 대하는 낙일방의 태도는 평상시와 다름이 없어서 그녀들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겉으로 표현은 안 해도 종남파 전체의 분위기가 살벌하게 굳어져서 자신들의 방문을 거절하면 어쩌나 하여 은근히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종남파와 형산파 사이의 비무가 결정되었다는 소식이 알려진 후 무당산 전체에는 금시라도 터질 듯한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외부인인 그녀들 또한 그 소식을 듣고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릴 정도였으니 당사자인 종남파 고수들의 심정이 어떠할지는 충분히 짐작이 가는 일이었다. 특히 낙일방과 사귀고 있는 남봉 엄쌍쌍은 마치 자신이 싸우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새파랗게 질린 채 몸을 덜덜 떨어서 다른 선자들이 그녀를 다독거려야 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지금 낙일방의 얼굴에는 별다른 긴장이나 초조한 빛이 보이지 않았다.
누산산은 엄쌍쌍에 비해 너무도 멀쩡한 그의 모습이 왠지 얄밉게 느껴져서 방금 전에 정소소의 주의를 받았으면서 은근슬쩍 그에게 말을 걸었다.
“낙 소협은 떨리거나 두렵지 않으세요?”
낙일방은 침착한 눈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내가 왜 그래야 한단 말이오?”
너무도 담담한 물음에 누산산은 찰나지간 마땅히 대꾸할 말이 없어 머뭇거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상대는 형산파의 오결검객들일 텐데, 낙 소협은 그들에게 이길 자신이 있단 말인……?”
정소소가 급히 그녀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전음으로 그녀를 꾸짖었다.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라지 않았느냐?”
하나 이미 누산산의 말은 낙일방의 귀에 생생하게 들어온 뒤였다.
낙일방은 그녀를 슬쩍 쳐다보다가 이내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입술을 뚫고 나직하면서도 단호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미 오래전부터 각오했던 일이오. 형산파의 오결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상대라도 우리는 능히 감당할 수 있소.”
그 음성에 실린 결연함 때문인지 누산산도 더 이상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작은 뜨락을 지나자 종남파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객청이 나타났다. 진산월은 객청의 중앙에 있는 의자에 앉은 채 그녀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시오.”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와서 미안해요.”
“별말씀을. 두 분 소저의 방문은 언제라도 환영하고 있소.”
정소소와 누산산이 자리에 앉고 낙일방은 조용히 물러나자 진산월은 그녀들에게 차를 권했다.
차를 거의 다 마실 때까지 그녀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심지어 늘 천방지축 같았던 누산산마저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얌전하게 앉아서 차만 마시고 있었다.
진산월은 담담한 눈으로 그녀들을 바라보았다.
“두 분께서 차나 마시자고 나를 찾아온 것은 아닐 텐데, 그 이유가 궁금하구려.”
진산월이 먼저 말을 꺼내자 정소소는 잠시 영롱한 눈으로 그를 응시하다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사실은 진 장문인께 몇 가지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어요.”
“말씀하시오. 경청하겠소.”
“오늘 저녁에 공주님께서 조촐한 연회를 여실 거예요.”
“무슨 연회 말이오?”
“구궁보의 모용 공자께서 조금 전에 무당산에 도착하셨어요. 일전에 구궁보에서 초대를 받은 보답으로 공주님께서 모용 공자를 초대하셨는데, 공주님께서는 그 연회에 진 장문인께서도 참석해 주실 것을 바라고 계세요.”
진산월은 잠시 아무 말 없이 정소소의 얼굴을 응시했다. 티 없이 맑고 깨끗한 정소소의 얼굴에는 부드럽고 차분한 표정만이 떠올라 있을 뿐이었다.
진산월은 솔직히 그 초대가 그다지 반갑지는 않았다. 모용봉을 상대하는 일은 늘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으며, 더구나 형산파와의 비무를 앞에 두고 그를 만나는 일은 더더욱 달갑지 않았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단봉공주가 일부러 천봉선자들까지 보내어 초대를 했는데, 특별한 이유도 없이 거절하기도 껄끄러웠다. 단봉공주가 모용봉을 만나는 자리에 그를 초대하는 것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텐데, 아쉽게도 정소소의 표정에서는 그에 대한 어떠한 점도 알아차릴 수 없었다.
“알겠소. 장소와 시간을 알려 주시면 시간에 맞춰 가도록 하겠소.”
정소소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초대에 응해 줘서 고마워요. 두 번째 일은 제 개인적인 일이에요.”
“어떤 일이오?”
정소소의 시선이 진산월의 얼굴을 향했다. 투명할 정도로 담백한 눈빛이었는데도 무언지 모를 따사로움이 담겨 있었다. 진산월은 그녀의 그런 눈빛이 왠지 모르게 부담스러워서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언뜻 그녀의 붉은 입술 사이로 희미한 한숨이 새어 나오는 것 같았다. 하나 그녀는 이내 마음을 가다듬었는지 침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임 소저를 만나고 싶군요. 그녀를 만날 수 있을까요?”
진산월은 순간적으로 약간의 당혹감을 느꼈다.
정소소가 임영옥과 어느 정도의 친분이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하나 요즘 임영옥은 체내의 음기를 다스리느라 외부 출입을 삼가고 있었다. 자연히 외부인과의 접촉도 차단된 상태였다.
정소소가 이것을 알고 진산월에게 부탁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진산월로서는 임영옥의 몸이 정상이 아닌 상황에서 다른 사람을 그녀와 만나게 하는 것이 그리 탐탁지 않았다. 아무리 그 상대가 정소소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진산월의 그런 심정을 알아차렸는지 정소소는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임 소저의 의향을 물어봐 주셨으면 해요. 그녀가 저를 만나지 않겠다면 그냥 돌아가겠어요.”
당당한 천봉선자의 우두머리인 그녀가 자존심을 죽이고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진산월도 무작정 그녀의 청을 거절할 수만은 없었다.
“알겠소. 잠시만 기다리시오.”
진산월은 그녀들을 대청에 두고 임영옥의 방으로 찾아갔다.
임영옥의 안색은 여전히 창백했고 몸 또한 차가웠지만, 며칠 전에 비해서는 확연히 나아진 모습이었다. 진산월이 정소소의 일을 알려 주자 임영옥은 의외로 순순히 그녀를 만나겠다고 했다.
“정말 괜찮겠어?”
진산월의 물음에 임영옥은 조용히 웃었다.
“사형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녀를 만나는 일 정도는 충분히 견딜 수 있어요.”
“너무 무리하지는 마.”
“알았어요.”
임영옥과 정소소의 만남은 그리 길지 않았다. 정소소는 누산산을 대청에 남겨 둔 채 혼자 그녀의 방으로 갔다가 일각도 되지 않아 다시 돌아왔다.
“사매는 잘 만났소?”
“덕분에 모처럼 그녀를 다시 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 그녀와의 만남을 승낙해 주셔서 고마워요.”
“그녀의 결정이었소.”
정소소는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것 같더니 이내 마음을 결심한 듯 특유의 차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임 소저는 여전히 아름답더군요. 다만 그 전에 봤을 때보다는 안색이 조금 좋지 않은 것 같았어요.”
“…….”
“그래도 그녀의 표정은 한결 밝아져 있더군요. 구궁보에서의 그녀는 최고의 대접을 받고 있었지만 마치 새장 속에 갇힌 한 마리 새처럼 늘 표정이 어두웠는데, 오늘 만나 본 그녀는 창백한 안색을 하고도 더할 수 없이 밝고 환해 보였어요. 마치 보석처럼 빛나고 있는 것 같더군요.”
진산월은 묵묵히 그녀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그 보석의 빛이 꺼지지 않기를 저는 정말 바라고 있어요.”
정소소의 음성에는 무언지 모를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진산월도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그렇게 될 거요.”
정소소는 그 말에 아무런 대답 없이 한동안 가만히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뜻을 알기 어려운 묘한 시선이었다. 진산월 또한 입을 굳게 다문 채 말없이 앉아 있었다.
잠시 장내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분위기가 부담스러웠는지 누산산이 몇 차례나 앉은 자세를 바꾸며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한참 후에야 정소소는 혼잣말처럼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너무 나직해서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면 제대로 알아듣기 힘든 음성이었다.
“강호는 무정하다고 하지만, 그 속에는 잔잔한 정이 흐르고 있지요. 그 정이 언제까지고 끊어지지 않고 이어질 수만 있다면 강호의 삶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 같군요. 그녀의 강호는 과연 어떤 모습일지…….”
진산월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정소소는 우두커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텅 빈 듯한 시선 속에 필설로 형용키 어려운 복잡한 빛이 담겨 있었다.
몇 차례 긴 속눈썹을 깜박거리고 있던 그녀는 이윽고 진산월의 두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조용하면서도 분명한 음성으로 말했다.
“진 장문인을 믿겠어요.”
정소소와 누산산이 떠난 후 진산월은 여전히 대청에 앉아 있었다. 무언가 깊은 상념에 빠져 있던 진산월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전흠이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한쪽에 서 있었다.
“내가 장문인의 사색을 방해한 것 같군요.”
“아니다. 그보다 무슨 일이냐?”
전흠은 품에서 한 장의 서신을 내밀었다. 그리고는 조금 전에 자신이 겪은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진산월은 말없이 서신을 받아서 펼쳐 보았다. 이내 서신을 접은 진산월은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더니 다시 전흠을 돌아보았다.
“수고했다.”
“그자가 누구인지 아시오? 본 파의 제자들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은 기색이던데.”
진산월은 굳이 숨길 것도 없어서 사실대로 말해 주었다.
“악자화라는 인물이다. 한때 종남산에서 동고동락했던 사이로, 힘든 시절을 함께 보냈지.”
전흠의 눈꼬리가 꿈틀거렸다.
“본 파의 제자였단 말이오? 그렇다면 그자는 본 파가 어려울 때 본 파를 저버린 것이군.”
“우리와는 생각이 달랐을 뿐이다. 그는 좀 더 자신에게 맞는 길을 걷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도 그자가 본 파를 떠난 배반자라는 사실은 분명하지 않소?”
진산월의 얼굴에 좀처럼 보기 힘든 씁쓸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배반자라…….
과연 악자화를 배반자라고 할 수 있을까?
종남파의 부흥을 자신이 주도하고 싶었지만 결국은 좌절하여 떠난 그를 진산월은 미워하거나 욕할 수 없었다. 그가 아직도 마음 한구석에 종남파 부흥의 꿈을 간직하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전흠은 분노의 감정을 숨기지 않은 채 사나운 음성으로 말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그자를 그냥 보내 버렸군. 다음에 만나게 되면 본 파를 등진 것이 얼마나 큰 잘못이었는지 뼈저리게 느끼도록 해 주겠소.”
진산월은 얼굴이 상기된 채 이를 갈고 있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심사가 복잡한 모양이구나. 형산파와의 일이 부담스러운 것이냐?”
전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게…….”
“쓸데없는 일에 심력을 소모하는 일은 바보 같은 짓이다. 그자에 대한 것은 나에게 맡기고 너는 네가 해야 할 일에만 집중하도록 해라.”
전흠은 몇 차례나 표정이 변하더니 이윽고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장문인의 말대로인 것 같구나.’
전흠은 자기가 형산파의 오결검객으로 추정되는 자의 흔적을 본 후로 신경이 잔뜩 곤두서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회의인의 말대로 그 흔적을 남긴 자가 형산파의 오결검객이라면 그건 실로 두려운 일이었다. 그런 마음속의 부담감이 자신도 모르게 엉뚱한 방향으로 표출되어 버린 것이다.
진산월도 그 부담감을 없앨 수는 없었다. 다만 그런 부담감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은 알고 있었다.
“나가자. 모처럼 네 검을 보고 싶구나.”
진산월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전흠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래 주겠소?”
머리가 복잡할 때는 몸을 움직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진산월은 오늘 전흠의 머릿속에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도록 단단히 손을 볼 결심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