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30권 무당집회(武當集會)편 : 9화
311장. 무림기남(武林奇男)
연회는 그다지 화려하지 않았다. 단봉공주가 주최하고 모용 공자가 주빈으로 참석한 연회치고는 평범한 편이었다. 더구나 그 연회의 하객이 종남파의 장문인이라면 오히려 소탈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참석한 인원의 숫자도 십여 명에 불과했다. 하나 그 면면을 보면 화려하기 이를 데 없었다.
천봉궁에서는 단봉공주 외에 총관인 차복승이 천봉선자들과 함께 참석했고, 구궁보에서는 모용봉이 두 명의 친우들을 대동했다. 그들 중 한 사람은 진산월이 구궁보에서 잠깐 보았던 구양가의 넷째 공자인 구양수진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해천사우의 일인 분광검객 고심홍이었다. 구양수진은 일월성진 사대공자 중에서도 무공광으로 유명했고, 고심홍은 자타가 공인하는 강호제일 쾌검으로 천하에 그 명성을 떨치는 인물이었다. 진산월 또한 당금 무림의 제일가는 후기지수로 칭송받는 낙일방을 대동했기에 자리를 빛내기에는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진산월이 오늘 연회에 경험이 풍부한 동중산이 아닌 낙일방을 데리고 온 것은 남봉 엄쌍쌍이 형산파와의 비무 소식에 많이 놀라고 걱정한다는 누산산의 언질 때문이었다. 연회가 열리기 전에 낙일방은 미리 엄쌍쌍을 만나고 돌아왔는데, 그래서인지 한쪽에 얌전히 앉아 있는 엄쌍쌍의 표정은 생각보다 훨씬 더 밝아 보였다.
개개인이 모두 당금 무림의 정상을 달리는 고수들이어서 장내의 분위기는 차분한 가운데 은은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특히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닌 척하면서 은근히 진산월과 모용봉을 번갈아 가며 주시하고 있어서인지 그들 사이에 무언가 팽팽한 기운이 점차로 고조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분위기를 깨려는지 차복승이 너털웃음을 지어 보였다.
“허허. 오늘은 모처럼 이 늙은이의 안계가 넓어지는 것 같소. 젊고 헌앙한 무림의 인재들을 이렇듯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니, 때아닌 홍복에 가슴이 두근거리는구려.”
그러고 보니 이곳에 모인 사람들 중 차복승을 제외하고는 모두 한창 나이의 젊은이들이었다. 개중 가장 나이가 많은 고심홍조차도 이제 갓 서른이 넘었을 뿐이었다.
고심홍은 비쩍 마른 체구에 유난히 붉은 입술을 지닌 미남자였는데, 피부가 핏기를 찾기 힘들 정도로 창백해서 강호를 진동시키는 쾌검의 최고수라는 명성과는 그다지 어울려 보이지 않았다. 그의 허리춤에 매어진 고색창연한 보검이 아니었다면 오히려 골방에서 글공부만 하는 낙척문사(落拓文士)나 풍류재사로 생각했을 것이다. 고심홍은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백지장처럼 창백한 얼굴에 전혀 표정이 없어서 마치 목석으로 만들어진 인형을 보는 것 같았다.
그에 비해 구양수진은 얼굴 전체에 훈훈한 미소를 지은 채 연신 진산월에게 시선을 주고 있었다. 조금 전에 가벼운 인사를 하기는 했지만, 자리가 자리인지라 진산월과 좀 더 대화를 나누지 못한 것이 아쉬운 듯한 표정이었다.
진산월은 단봉공주의 초대를 받고 참석하기는 했으나 이 자리가 그다지 편치 않았다. 특히 장내에 대부분의 시선이 자신과 모용봉에게 집중되어 있는 것이 느껴져서 마음속의 불편함이 더욱 커졌다.
내일이면 유중악이 무림의 군웅들이 모여 있는 공개석상에서 모용봉에 대한 의혹을 정식으로 제기할 것이다. 그 일에는 무당파의 제일 어른이자 환우삼성의 한 사람인 대엽진인도 가세할 것이기에 그 여파는 실로 적지 않을 게 분명했다. 이런 사정을 뻔히 알고 있는 상황에서 당사자인 모용봉과 한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아무래도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의 기색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차복승의 주름진 눈이 그에게로 향했다.
“오늘 진 장문인의 표정이 예전보다 무거워 보이는데, 특별히 마음에 거슬리는 점이라도 있소?”
진산월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있겠습니까? 연회는 아주 마음에 듭니다. 다만 이틀 후의 일 때문에 마음 편히 연회를 즐길 입장이 아닌 게 아쉬울 뿐입니다.”
“오, 그 생각을 미처 못 했구려. 중요한 대전을 앞에 두고 안정을 취해야 하는데, 공연히 번거롭게 해서 진 장문인의 심기를 어지럽힌 게 아닌지 모르겠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잠시 마음의 여유를 찾을 수 있어서 연회에 참석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소. 모쪼록 이번 일에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라겠소.”
“감사합니다.”
차복승은 화제가 종남파와 형산파와의 대결로 넘어가는 걸 피하는 것 같았고, 진산월도 이런 자리에서 그 문제를 거론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그저 간단히 사례만을 표했을 뿐이었다.
사실 그 일은 이런 자리에서 꺼내기에는 지나치게 민감한 사안이었다.
그 대결은 단순히 양 문파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무림 전체의 판도를 뒤흔드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두 문파 모두 당금 무림에서 가장 거대한 세력들 중 하나였고, 그 결과에 따라 구대문파의 자리에 변동이 생길 뿐 아니라 무림에서의 위상도 크게 변화할 게 분명했다. 이긴 쪽은 중천에 떠오른 태양처럼 찬란한 명성을 구가할 테지만, 패한 쪽은 자칫 치명적인 손상을 입고 군소 문파 중 하나로 전락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무림인들 중에는 서장 무림과의 결전을 앞에 두고 주축이 되어야 할 두 문파가 이런 건곤일척의 대결을 벌이는 것을 우려하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무림의 힘을 하나로 모아도 부족할 판에 자칫 두 패로 갈라져 내홍(內訌)에 휩싸이게 되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조용히 앉아 있던 모용봉이 문득 고개를 들어 진산월에게로 시선을 돌린 것은 바로 그즈음이었다.
“진 장문인께서 이번에 무림맹의 중책을 맡기로 하셨다고 들었소.”
진산월은 처음에는 약간 어리둥절하다가 이내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차렸다.
“중책이랄 것까지는 없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한 것뿐이오.”
“선봉이란 어렵고도 위험한 자리요. 진 장문인께서 선뜻 그 자리를 맡아 주기로 한 덕분에 위지 맹주는 큰 짐을 덜었다며 안도하는 것 같았소.”
진산월은 난데없이 위지립을 거론하는 모용봉의 속셈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잠시 그를 주시했다. 하나 모용봉의 눈빛은 여전히 청명했고, 태도는 담담해서 그의 속마음이 어떠한지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위지립이 자신을 선봉에 삼은 것에 마냥 순수한 의도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건 진산월도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진산월이 순순히 그의 제의를 승낙한 것은 어차피 서장 무림과의 대결을 피할 수 없는 이상 앞장서서 싸우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번 일에 대한 주위의 시선이나 남들의 반응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모용봉의 말을 듣고 나자 자신이 선봉에 서게 된 것에는 무언가 자신이 모르는 또 다른 내막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위지 맹주를 만났소?”
진산월의 물음에 모용봉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오기 전에 잠깐 만나서 이번 집회가 끝난 후의 상황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소.”
위지립과 모용봉은 누가 뭐라 해도 현재 강호에서 가장 중추적인 위치에 서 있는 인물들이었다. 그들이 만나서 대체 무슨 말을 주고받았는지 누구라도 궁금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나 진산월은 그 점에 대해 묻지 않았다. 대신 전혀 다른 질문을 던졌다.
“무림맹의 첫 번째 목표가 정해졌소?”
언뜻 모용봉의 입가에 한 줄기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역시 진 장문인은 대단하시오. 확실히 우리는 서장 무림이 어떤 반응을 보이든 먼저 움직이는 것만이 정답이라고 판단했소. 그래서 집회가 끝난 후 바로 한 곳을 공격하기로 의견의 일치를 보았소.”
“그곳이 어디요?”
모용봉의 입에서 조용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흑갈방이오.”
흑갈방은 섬서성의 중부에서 활약하는 흑도방파였다. 처음에는 작은 도적들의 집단에서 출발했으나 최근 몇 년간 무섭게 세력을 확장하여 지금은 강북 무림 전체를 영역으로 두고 있는 거대한 방파가 되었다.
그들의 수뇌부에 서장 무림의 고수들이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진산월도 이미 알고 있었고, 실제로 그들과 크고 작은 몇 번의 충돌을 벌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막상 모용봉의 입에서 그들을 선제공격하겠다는 말을 듣게 되자 다소 의외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세력이 비록 방대하지만, 아직 수뇌부의 정확한 정체와 규모는 물론이고 그들의 총단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려져 있지 않소. 그런데도 그들에 대한 공격이 가능하겠소?”
“이번에는 가능할 거요.”
모용봉의 말은 무림맹에서 이미 흑갈방에 대해 상세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진산월은 몇 가지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으나 더 이상 자세한 것은 묻지 않았다. 어차피 집회가 끝난 후에 위지립을 통해서 그에 대한 내막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진산월이 잠시 상념에 잠겨 있을 때, 단봉공주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렇게 두 분을 나란히 보고 있으니 문득 몇 년 전의 어느 날이 떠오르는군요.”
낮게 속삭이는 듯하면서도 듣는 이의 마음을 묘하게 뒤흔드는 야릇함이 담겨 있는 음성이었다.
“그때의 두 분은 굉장히 다른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다른 듯하면서도 무언가 비슷한 면이 있는 것 같이 느껴지는군요.”
모용봉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공주께선 사 년 전의 일을 말씀하시는 모양이구려. 소림사의 후원에서 내가 처음으로 진 장문인을 처음 만났던 바로 그날 말이오.”
“기억하고 있군요.”
“물론이오. 언제나 그날의 일을 잊지 않고 있지.”
모용봉의 말 속에는 의미를 알기 힘든 묘한 뜻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단봉공주의 한없이 영롱하면서도 차분한 눈이 모용봉의 두 눈에 고정되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교차되었다.
잠시 시간이 멈춘 듯한 순간이 지나간 후 단봉공주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당시의 일을 되새기는 의미에서 따로 몇 분의 손님을 모셨어요.”
두 사람의 대화를 묵묵히 듣고 있던 진산월은 다소 의외라고 생각했다. 오늘 연회의 주최자는 단봉공주였지만, 주빈은 누가 무어라 해도 모용봉이었다. 아무리 연회의 주최자라고 해도 주빈의 승낙도 받지 않고 다른 사람을 초대한다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의 마음을 짐작이라도 한 듯 모용봉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떠올랐다.
“사실은 내가 단봉공주께 부탁하여 오늘 이 자리에 몇 사람을 더 불렀소. 미리 진 장문인의 양해를 구하지 못한 점을 사과드리겠소.”
“괜찮소. 오히려 두 분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어느 고인들이 오실지 절로 호기심이 동하는구려.”
“결코 실망하지 않으실 거요.”
모용봉의 웃음기 서린 음성과 함께 문이 열리며 두 사람이 나란히 모습을 드러냈다.
백의를 입은 이십 대 후반의 청년과 비단옷을 걸친 뚱뚱한 체구의 중년인이었다. 그들을 본 진산월의 눈빛이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번뜩였다.
“이제 보니 화산독응 유 소협과 석가장의 대공자이셨군.”
백의 청년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것에 비해, 비단옷의 중년인은 안면 가득 환한 미소를 지으며 진산월의 앞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헤헤, 진 장문인. 그동안 강녕하셨습니까? 몇 달 안 뵌 사이에 온 천하에 대명(大名)을 울리시더니 더욱 기개가 헌앙해지신 것 같습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얼굴이 터지도록 웃고 있는 중년인은 다름 아닌 석가장의 십이지공자 중 첫째인 천서 석성이었다.
“나야 물론 잘 있었소. 그런데 내가 알기로는 호광(湖廣) 일대는 구양가의 세력이라 당신은 좀처럼 이쪽으로는 출행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이제는 이쪽까지 손을 뻗기로 결심한 거요?”
진산월의 말에 석성은 질색을 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무슨 그런 말씀을. 구양가의 사람들이 그 말을 들었다면 저를 찢어 죽이려 할 겁니다. 저는 그저 합비 쪽에 이번에 새롭게 얻은 다관에 들렀다가 무당산에서 중요한 집회가 열린다는 말을 듣고 호기심에서 찾아온 것뿐입니다.”
진산월은 석성의 실눈처럼 가느다란 눈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당신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석성은 짐짓 울상을 지어 보였다.
“진 장문인께서 왜 저를 그런 눈으로 보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이제껏 진 장문인에게 거짓을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믿어 주십시오.”
“믿소. 천하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장사꾼의 입에서 나온 말인데 믿지 않을 리 있겠소?”
석성은 늘 입 밖으로 자신은 천상 장사꾼이라는 말을 내뱉고 다녔는데, 진산월이 이를 넌지시 빗대어 말하자 쓴웃음을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품에서 커다란 손수건 하나를 꺼내어 땀범벅이 되어 있는 얼굴을 닦으며 다시 활짝 웃었다.
“진 장문인의 말솜씨도 검술만큼이나 날카로워서 저로서는 점점 감당하기 벅찬 것 같군요. 하하! 그보다 오늘 좋은 자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석성은 모용봉과 단봉공주를 향해 거푸 머리를 조아렸다.
그 모습은 경박하기 이를 데 없어서 강북에서 가장 거대한 거상(巨商)의 후예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하나 장내의 누구도 그를 무시하거나 경멸의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은 없었다.
우스꽝스러운 외모와는 달리 석성이 얼마나 예리하고 날카로운 두뇌의 소유자인지 모두들 익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사업에 관한 그의 감각은 아버지인 석곤을 능가한다는 평가마저 있을 정도여서 석가장의 다음 대 장주로 가장 유력시되고 있었다.
석성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모용봉을 바라보았다.
“일전의 일로 모용 공자께서 저를 못마땅해하시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불러 주셔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모용봉은 담담한 음성으로 반문했다.
“당시의 일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피차간에 서로 빚진 게 없는데, 내가 왜 그 일로 당신을 못마땅해한단 말이오?”
석성의 유난히 작은 눈이 모용봉의 준수한 얼굴에 잠시 고정되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렇소.”
모용봉이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석성은 다시 한 차례 이마의 땀을 닦았다. 그리고는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공자께서 그렇게 생각하신다니 다행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저는 그때 당시의 거래가 잘못된 것인 줄로만 알고 그동안 알게 모르게 공자님을 피해 다녔지 뭡니까?”
이번에는 모용봉의 투명한 시선이 석성의 얼굴에 못 박히듯 날아와 꽂혔다.
“거래가 잘못되었다니? 중독된 것이 완벽하게 해독되지 않았단 말이오?”
“아닙니다. 그때 제 몸은 공자님의 도움으로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다만…….”
“다만 뭐요?”
“제가 공자님께 준 선물이 잘못된 게 아닌가 하는 노파심에 쓸데없는 걱정을 한 모양입니다. 헤헤.”
석성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얼버무렸으나, 모용봉은 무심한 눈으로 한동안 가만히 석성의 뚱뚱한 얼굴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때 진산월의 뇌리에 문득 과거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사 년 전의 모임에서 석성은 우연히 입수한 책의 번역을 맡긴 괴승의 암습으로 중독되었다가 모용봉이 준 술을 마시고 해독하여 그에게 목숨의 빚을 졌으며, 문제의 발단이 된 그 책의 번역본을 돌려받지 않음으로써 그 빚을 갚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가 돌려받지 않은 책은 ‘환우지이록’이라는 것으로, 고대의 법문으로 쓰여 있기에 중원에서는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고 했다.
석성은 그때 모용봉에게 돌려받지 못한 ‘환우지이록’의 번역본이 제대로 된 것인지 아니면 잘못된 것인지를 확신할 수 없어 모용봉을 만나는 것을 기피해 왔다고 고백한 것이다.
진산월의 머릿속으로 몇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석성은 정말 단순히 번역본이 잘못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모용봉을 피한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그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는 그 문제를 왜 이런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꺼낸 것일까?
만약 석성이 정말 번역본이 잘못 전해졌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다면 진즉에 모용봉을 찾아가 사실 여부를 파악했거나, 나중에 개인적으로 조용히 만나 말하는 것이 상식적이었다. 그런데 석성은 모용봉을 보자마자 그 이야기부터 꺼내 들었다. 석성이 경솔한 인물이라면 단순히 말실수라고 할 수 있겠지만, 진산월이 아는 석성은 이런 자리에서 절대로 실수를 하거나 생각 없이 함부로 입을 놀릴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대체 무슨 의도에서 그런 말을 한 것일까? 그리고 그 말을 들은 모용봉의 표정은 왜 저토록 삼엄한 빛을 띠고 있는 것일까?
환우지이록의 번역본에는 대체 무슨 비밀이 담겨 있는 것일까?
진산월의 생각이 여기까지 이어졌을 때, 석성이 호들갑을 떨며 자리에 털썩 앉았다.
“아이고. 오늘 밤은 제법 무더워서 갈증이 났는데, 우선 목부터 축여야겠구나. 유 소협, 혼자 마시지 말고 나도 한 잔 주시구려.”
석성은 이미 자리에 앉아서 혼자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유장령에게 빈 술잔 하나를 내밀었다.
유장령의 짙은 검미가 한 차례 꿈틀거리며 얼굴 전체에 냉막한 기운이 퍼져 나갔다. 금시라도 들고 있던 술잔을 석성에게 집어 던질 기세였으나, 어찌 된 영문인지 그는 순순히 옆에 있는 술병을 들어 석성이 내민 술잔에 술을 따랐다.
석성은 얄밉도록 맛있게 술을 마시고는 호들갑을 떨었다.
“크으. 화산제일 기남자(奇男子)가 따라 주는 술을 마시니 더욱 꿀맛이로군. 이번에는 내가 한 잔 따라 드리겠소.”
석성은 비어 있는 유장령의 술잔에 술을 따르려 했으나, 유장령은 말없이 들고 있는 술병으로 자신의 잔을 채웠다. 석성은 입맛을 다시더니 다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확실히 유 소협은 혼자 술을 따라 마시는 게 더 어울리는 것 같소. 역시 화산독응이랄까. 그나저나 아직 한 사람이 안 온 것 같군요. 늦는 사람은 항상 늦는다니까.”
그의 투덜거림을 들었는지 다시 한 차례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하하. 미안하게 됐소. 갑자기 골치 아픈 일이 생겨서 그걸 해결하느라 늦고 말았소.”
들어온 사람은 자색 유삼을 입은 훤칠한 키의 청년이었다.
말과는 달리 그의 얼굴에는 위풍 어린 미소가 어려 있어 조금도 미안해하거나 쑥스러워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그의 얼굴 표정과 허리를 꼿꼿이 세운 자세는 당당함을 넘어 오만해 보이기까지 했다.
자삼 청년은 한쪽에 앉아서 열심히 술을 홀짝거리고 있는 석성을 타박했다.
“당신은 자기 할 일도 제대로 못 하면서 내가 조금 늦었다고 내 흉을 보고 있는 거요?”
석성은 입안 가득 음식을 집어넣고 있다가 쭉 찢어진 눈으로 그를 힐끔 거렸다.
“내가 무슨… 할 일도 못 했다고?”
“당신이 할 일을 제대로 했으면 내가 왜 늦었겠소?”
“그게 무슨 말이오?”
“지저분하니 입에 있는 음식이나 모두 삼키시오. 그 일은 잠시 후에 계산하기로 합시다.”
이어 자삼 청년은 주위를 한 차례 둘러보더니 이내 진산월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진산월은 좀처럼 보기 힘든 강력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절정의 검객에게서나 볼 수 있는 무형지기였다.
자삼 청년은 빙글거리며 진산월을 향해 웃고 있다가 성큼 한 걸음 내디뎠다. 그러자 그들 사이에 있던 탁자들이 옆으로 주르르 밀려났다.
진산월은 여전히 미동도 않고 자리에 앉은 채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삼 청년은 정확히 세 걸음 다가왔다.
그리고는 한동안 진산월을 가만히 쳐다보더니 돌연 가볍게 포권을 했다.
“드디어 만나게 되었군. 반갑소. 나는 백자목이라는 사람이오.”
백자목.
그 이름을 듣자 진산월의 눈빛이 한층 더 깊어졌다.
백자목은 신목령주의 열두 제자들 중 대제자로 알려져 있었다. 진산월은 그동안 신목령의 고수들과 여러 번의 마찰을 일으켰고, 그중에는 그의 손에 목숨을 잃은 자들도 있었다. 이런 곳에서 뜻하지 않게 소문으로만 듣던 신목일호를 만나게 될 줄은 미처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종남의 진산월이오.”
진산월이 덤덤한 표정으로 그의 인사를 받자 백자목은 빙긋 미소 지었다. 어딘지 모르게 흥겨움이 담겨 있는 듯한 웃음이었다.
“내가 얼마나 진 장문인을 만나고 싶어 했는지 진 장문인은 짐작도 하지 못할 거요.”
“나를 말이오?”
“그렇소.”
“그러고 보니 신목령의 사자들 몇 사람과 묵은 은원 몇 가지가 쌓여 있는 것이 기억나는구려. 그 일 때문이오?”
약간은 도발적인 진산월의 대꾸에 백자목은 살짝 고개를 내저었다.
“본 령의 고수들 몇이 진 장문인과 약간의 문제를 일으킨 것은 나도 알고 있소. 그거야 그들 사정이고, 나는 다른 일로 진 장문인을 꼭 만나고 싶었소.”
진산월은 신목사자들이나 오천왕 사이의 일은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는 백자목의 말에 내심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나를 그토록 만나고 싶어 했던 거요?”
“많은 사람들이 진 장문인이 당대 제일의 검객이며 진 장문인의 검정중원이 당금 무림 최고의 검학(劍學)이라고 믿고 있소.”
여기까지 듣고 나자 진산월은 백자목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대충 짐작이 갔다. 그리고 다음에 이어진 백자목의 말은 그의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나도 검을 익힌 사람이니,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관심이 동하지 않을 수 없었소. 그래서 언제고 천하제일의 검초라는 진 장문인의 검정중원을 직접 눈으로 보고야 말겠다고 굳게 다짐했소.”
진산월을 바라보는 백자목의 두 눈에 기이한 열기가 감돌았다.
“내게 검정중원을 견식할 기회를 주시지 않겠소?”
진산월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내 검은 구경거리가 아니오.”
백자목의 입가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구경거리라니, 당치 않은 말이오. 천하의 누가 감히 신검무적을 구경거리로 생각한단 말이오?”
진산월은 백자목을 빤히 쳐다보았다. 당신이 지금 나를 그렇게 보고 있지 않느냐는 의미의 눈빛이었다.
백자목은 돌연 진산월의 맞은편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거칠고 무례한 행동이었으나 진산월은 눈썹 하나 찡그리지 않았고, 백자목도 그의 반응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원래 이곳에 올 때는 진 장문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아서라도 검정중원을 꼭 보고 싶었소. 지금도 기분 같아서는 진 장문인에게 비무라도 청하고 싶지만 진 장문인이 응할 것 같지도 않고, 거절당하면 괜히 자존심만 상할 것 같아 포기해 버렸소.”
그는 자신의 앞에 놓인 술잔을 집어 들었다.
“대신 술 한 잔 따라 드리고 싶은데, 진 장문인의 의향은 어떠시오?”
진산월은 거칠 것 없어 보이는 그의 언행에 내심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듣기로는 신목일호가 누구보다 냉정하고 치밀한 성정의 소유자라고 했는데, 강호의 소문이 와전된 것일까? 아니면…….’
비록 처음 만난 사이지만 강호의 이름난 고수가 술 한 잔 따라 준다는데 거절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라 진산월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진산월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백자목은 앞에 놓인 술잔에 술을 가득 부었다. 그런 다음 술잔을 진산월에게 내밀었다.
진산월은 무심코 손을 내밀어 술잔을 잡으려 했다. 그러다 살짝 눈을 빛냈다. 백자목이 내민 술잔이 미묘하게 흔들리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 흔들림은 아주 작아서 대수롭지 않아 보였지만, 진산월은 그것이 상당히 교묘한 변화를 담고 있음을 한눈에 알아차렸다.
어느 쪽으로 잡든 그 흔들림을 다스리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전후좌우로 흔들리고 있을 뿐 아니라 상하로도 묘한 변화가 숨어 있었다. 그럼에도 술잔에 가득 담긴 술은 전혀 흘러내리지 않았다. 심지어는 조금의 움직임조차 없었다. 그것은 술잔에 담긴 술이 술잔을 잡고 있는 백자목에 의해 완벽하게 통제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 술잔과 술 속에는 틀림없이 상당한 기운이 담겨 있을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그 술잔을 잡았다가는 가득 담긴 술이 밖으로 넘쳐흘러 손등을 적실 것이 뻔했다. 상대가 정중하게 따라 준 술잔을 제대로 잡지도 못하고 흘려 버린다면 망신도 그런 망신이 없을 것이다.
술잔을 내밀고 있는 백자목의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진산월은 그 미소 띤 얼굴을 바라보며 천천히 손을 내밀어 술잔을 잡았다.
막 그의 손이 술잔에 닿기 직전에 술잔이 한 차례 크게 흔들렸다.
그럼에도 술은 전혀 넘치거나 흘러내리지 않았다. 진산월은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술잔을 잡았고, 백자목은 그를 빤히 응시하고 있다가 느릿느릿 술잔을 놓았다.
방금 전의 짧은 순간에 백자목이 들고 있는 술잔이 무려 서른여섯 번의 변화를 일으켰다는 것을 제대로 알아본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리고 진산월이 열두 번이나 잔을 잡는 손의 위치를 바꾸어서야 그 모든 변화를 파해하고 술잔을 완벽하게 제어했다는 것은 극소수의 인물들만이 간신히 알아보았을 뿐이었다.
진산월의 손이 잔을 잡는 순간에 술잔이 크게 흔들린 것은 두 사람의 경력이 술잔 안에서 정면으로 격돌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술잔 속의 술이 넘치지 않은 것은 진산월의 기운이 순식간에 술잔 전체를 감싸 버렸기 때문이었다.
백자목은 자신이 술잔 속에 남겨 놓은 경력이 진산월에 의해 완전히 흩어진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술잔에서 손을 떼어 놓았는데, 그때의 표정이 참으로 오묘했다.
진산월은 술잔을 들어 술을 마시고는 술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잘 마셨소. 이번에는 내가 한 잔 따라 드리지.”
쪼르르…….
진산월이 술잔에 술을 따르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장내의 인물들은 모두 당금 무림의 최정상을 달리는 고수들이었기에 이미 진작부터 두 사람 사이의 심상치 않은 공기를 느끼고 있었다. 백자목이 진산월에게 술잔을 내밀 때부터 흥미 있게 바라보던 중인들은 진산월이 빈 술잔에 술을 따라 백자목에게 내밀자 눈을 크게 떴다.
그들은 이미 그 술잔이 조금 전 두 사람이 내뿜는 경력에 의해 산산이 박살 난 상태였음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그런데도 진산월은 그 부서진 술잔에 술을 가득 따랐고, 술은 전혀 흘러내리지 않은 채 찰랑거리고 있었다.
진산월이 잔을 내밀자 이번에는 백자목이 천천히 잔을 받기 위해 손을 앞으로 내뻗었다.
진산월이 내민 술잔은 전혀 아무런 변화가 없었고, 술잔에 담긴 술도 자연스러운 흔들림만이 있을 뿐이어서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는 듯했다.
그럼에도 백자목의 손이 술잔에 닿자 조금 전처럼 술잔이 한 차례 크게 흔들렸다.
하나 이번에도 술잔 속의 술은 흘러내리지 않았다. 백자목은 술잔을 들어 단숨에 술을 마시고는 이내 술잔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잘 마셨소. 다음에는 꼭 제대로 된 술자리를 가져 보고 싶구려.”
“기회가 된다면.”
“그렇군. 기회가 필요하겠군.”
백자목은 다시 피식 웃었다.
두 사람이 술잔을 주고받는 광경은 인상적이었으나, 겉으로 드러난 결과는 똑같아 보였다. 하나 안목이 예리한 사람이라면 백자목의 손끝에 약간의 물기가 묻어 있음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백자목 또한 자신의 손에 묻는 물기를 잠시 내려 보고 있다가 소맷자락에 물기를 닦으며 대수롭지 않게 웃어 보였다.
“칠칠치 못하게 술을 흘리고 말았군. 진 장문인이 정말 상대하기 까다로운 사람이라서 조심해야 한다는 주위 사람들의 말을 그다지 믿지 않았는데,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알게 되었소.”
백자목은 진산월의 두 눈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진정으로 무서운 것은 진 장문인의 검뿐만 아니라 심계라는 것을 말이오.”
조금 전에 진산월이 내민 술잔에는 전혀 아무런 경력도 담겨 있지 않았고, 일체의 변화도 없었다.
그럼에도 백자목은 진산월의 반격을 경계하여 경력을 잔뜩 끌어 올렸고, 그 바람에 하마터면 간신히 형체만을 유지하고 있던 술잔을 박살 낼 뻔했다.
세차게 흔들린 술잔이 부서지지 않은 것은 순전히 그가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리고 재빨리 경력으로 술잔을 보호했기 때문이었다.
그 경력의 수발이 거의 알아차리기도 힘들 만큼 순식간에 이루어진 것만으로도 백자목의 내공이 얼마나 심후하고 정심한지 여실히 증명된 셈이었으나, 백자목으로서는 오히려 상대의 심계에 놀아난 자신을 자책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백자목의 심정이 어떠하든 진산월의 얼굴은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그저 단순히 술 한 잔을 주고받았을 뿐,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한 모습이어서 백자목으로서는 허탈함을 넘어 얄밉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나 백자목 또한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에는 정통한 인물이어서 이내 빙긋 웃으며 다시 술병을 집어 들었다. 조금 전에 백자목이 내려놓았던 술잔은 이미 잘게 부서진 채 수북한 먼지가 되어 탁자 위에 쌓여 있었다.
백자목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그 먼지들을 소맷자락으로 쓸어버린 후 다른 술잔에 술을 따랐다. 그런 다음 그 술잔을 한쪽에 말없이 앉아 있는 유장령에게 내밀었다.
유장령은 날카로운 눈으로 백자목을 쏘아보았다. 사람의 폐부를 칼로 찌르는 듯한 섬뜩한 눈빛이었으나, 백자목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한 잔 받게. 생각해 보니 자네하고는 제대로 술 한 잔 제대로 나눈 적이 없는 것 같아서 말이지.”
유장령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술잔은 쳐다보지도 않고 여전히 백자목을 노려보고 있었다.
백자목은 여전히 웃은 얼굴로 그에게 술잔을 내민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술잔을 받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그런 자세를 취하고 있을 기세였다.
유장령은 천천히 고개를 움직여 백자목의 손에 들린 술잔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몇 년 전에 신목오호란 자를 만난 적이 있었지. 그때 그자도 내게 술을 따라 주지 못해 안달을 했었는데, 신목령의 졸자들은 모두 술 안 따라 주고 죽은 귀신이라도 붙은 건가?”
퉁명스럽게 내뱉은 그의 말에 팽팽함이 감돌았던 장내의 공기가 풀어지며 사람들의 표정이 이상야릇하게 변했다. 그들 중에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느라 잠시 숨을 몰아쉬는 자들도 있었다.
확실히 사 년 전의 연회에서도 유장령은 신목오호 악자화와 한바탕 신경전을 벌였으며, 결국 모용봉이 중간에 술잔을 던지며 나선 후에야 소동이 가라앉은 일이 있었다. 냉막한 얼굴에 좀처럼 말 한 마디 꺼내지 않던 과묵한 유장령이 당시의 일을 빗대어 백자목은 물론이고 신목령 전체를 조롱하는 말을 던졌으니 조금이라도 유장령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어안이 벙벙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백자목의 얼굴에도 어이없어하는 빛이 떠올랐다. 하나 그는 화를 내기는커녕 피식 웃으며 들고 있던 술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술 한 잔 주고받자는데 너무 딱딱하게 구는군. 졸자라는 말이 귀에 거슬리기는 하지만, 일전의 일도 있고 하니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도록 하지. 그나저나 이 잔은 누구에게 줘야 하나?”
주위를 둘러보던 백자목의 시선이 문득 모용봉의 옆에 앉아 있는 구양수진에게로 향했다. 언뜻 구양수진을 응시하는 백자목의 눈에 기이한 빛이 일렁거렸다.
“구양가의 막내 공자께서는 어떤가? 내 잔을 받아 볼 의향이 있는가?”
구양수진은 지금까지 술도 마시지 않은 채 한쪽에서 조용히 사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백자목이 돌연 자신을 지목해서 말을 걸어오자 짐짓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나 말이오?”
“그래. 그동안 얼굴은 몇 번 보았지만 제대로 이야기를 나눌 기회도 별로 없었는데, 이번에 술이라도 함께 마시며 서로를 알아보는 것도 좋지 않겠나?”
구양수진은 주저하지 않고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오. 이왕이면 좀 더 큰 잔에 한 잔 가득 부어 주시오.”
구양수진은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자신의 옆에 놓인 제법 큰 술잔을 들어 백자목을 향해 슬쩍 던졌다. 은으로 만든 주먹만 한 크기의 술잔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자 백자목의 얼굴에 재미있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백자목은 한눈에 그 술잔이 기묘한 방식으로 날아오고 있음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느릿느릿 도는 모양을 보니 회선궁(回旋穹)도 아니고 그렇다고 선전륜(旋轉輪) 수법이라고 하기에는 움직임이 너무 적군. 위아래로 가늘게 떨리는 건 조핵표(照核飄) 방식 같은데? 가만 있자. 조핵표와 어울릴 만한 암기수법이 어떤 게 있더라?’
자신의 눈앞으로 날아드는 술잔이 지척에 가까워졌는데도 백자목은 술잔을 잡을 생각은 하지 않고 여전히 상념에 골몰해 있었다.
‘그래. 이제 알겠군. 포천십이삼(抱天十二衫) 중의 일식인 담천윤회(曇天輪迴)의 변화를 섞었군. 손으로 던지는 척하면서 슬쩍 소맷자락을 이용하다니, 역시 방심할 수 없는 놈이로군.’
조금 전에 구양수진이 술잔을 던질 때 그의 소맷자락 끝부분이 살짝 술잔에 닿았는데, 그때 우연인지 구부러진 구양수진의 손등이 시선을 가리는 바람에 눈이 예리한 백자목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었다. 백자목은 한동안 술잔이 날아오는 변화를 유심히 보고 난 후에야 비로소 구양수진이 술잔을 던질 때 소맷자락을 이용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던 것이다.
그때는 이미 술잔이 그의 코앞에 거의 도달해 있는 상황이었다.
막 술잔이 얼굴에 닿으려는 순간, 백자목은 마치 파리를 잡듯 너무도 수월하게 술잔을 잡아채었다. 그런 다음 술병을 들어 술잔에 술을 가득 부었다. 잔이 제법 커서 거의 반 병 가까운 술이 들어간 다음에야 잔이 채워졌다.
거의 잔이 넘치기 직전까지 술을 부은 백자목이 가볍게 손을 내젓자 술잔이 둥둥 떠서 구양수진을 향해 날아갔다.
백자목이 조금 전에 술잔을 잡은 동작은 얼핏 보기에는 단순한 동작 같았으나 사실은 춘방태허(春放太虛)와 악산진해(握山鎭海), 이산감악(移山憾岳)의 세 가지 절학이 교묘하게 혼합된 상승의 수법이었다.
상하로 흔들리는 조핵표의 움직임을 춘방태허로 제어하고, 느린 듯하면서도 강력한 회전력을 지닌 차천윤회를 악산진해로 다스린 다음, 술잔에 담겨진 막강한 경력을 이산감악의 수법으로 와해시킨 것이다. 그 모든 동작을 단 일순간에 해치웠으니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더욱 감탄스러운 것은 지금 허공을 둥둥 떠서 날아가는 술잔이었다. 어른 주먹 크기의 술잔에 술이 가득 담겨 있음에도 술잔은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잡고 있는 것처럼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천천히 허공을 날아가고 있었다. 빠르게 던지는 것은 웬만한 강호의 고수라면 누구라도 가능하지만, 지금처럼 느리게 날려 보내는 것은 절정의 암기고수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더구나 술이 가득 담긴 술잔이 조금도 흐르거나 넘치지 않도록 조정한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구양수진 또한 그 술잔에 담긴 가공할 기운과 절묘한 변화를 한눈에 알아보았는지 눈도 깜박이지 않고 자신을 향해 날아오고 있는 술잔을 주시하고 있었다.
느릿느릿 허공을 날아오던 술잔은 구양수진에게 다가갈수록 점차로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처음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구양수진의 얼굴을 향해 날아들었다.
“엇?”
장내에 있던 누군가가 짤막한 경호성을 토해 냈다. 그만큼 술잔의 움직임이 갑작스러웠고, 구양수진을 향해 날아드는 기세가 매서웠다.
막 술잔이 구양수진의 얼굴을 가격하려는 순간, 구양수진이 오른팔을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유난히 넓은 소맷자락이 술잔을 비롯한 그의 상반신을 온통 가려 버렸다.
소맷자락은 이내 거두어졌고, 이어서 술잔을 들고 있는 구양수진의 모습이 중인들의 시야에 들어왔다. 놀랍게도 그의 손에 들린 술잔은 단 한 방울의 술도 흐르거나 넘치지 않은 채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구양수진은 술잔을 단숨에 들이마신 후 백자목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좋은 술을 잘 마셨소. 아울러 귀하의 성사제탄(星射齊彈) 수법도 잘 견학했소.”
백자목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그치지 않고 있었다.
“나야말로 좋은 구경을 했네. 포천삼의 최후초식인 포천차일(抱天遮日)을 볼 수 있다니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이로군.”
두 사람은 서로 웃고 있었지만, 그들 사이에 흐르는 공기는 더할 수 없이 팽팽해졌다.
짝!
그때 묵묵히 앉아 있던 모용봉이 돌연 가볍게 손뼉을 쳤다.
“자, 이제 올 사람은 모두 온 것 같으니 제대로 된 연회를 즐겨 보도록 합시다.”
단순히 손뼉을 마주친 것에 불과했으나, 그 바람에 주위에 팽배해 있던 긴장감이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후우.”
누군가의 가느다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그만큼 조금 전의 분위기는 금시라도 터질 듯 살벌했던 것이다.
백자목은 피식 웃으며 유장령에게 주려고 따라 놓았던 술잔을 집어 들었고, 구양수진 또한 들고 있는 빈 술잔에 술을 채웠다.
유장령은 여전히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앉아 있었고, 진산월은 조용히 낙일방이 따라 주는 술잔을 받고 있었다.
그 네 사람을 차례로 훑고 지나가던 모용봉의 시선이 자연스레 단봉공주에게로 향했다.
붉은 망사 사이로 내비치는 단봉공주의 눈빛은 영롱하기 그지없었으나, 누구도 그 속에 숨은 뜻을 알기 어려웠다. 모용봉은 복잡한 색으로 반짝이는 그녀의 눈을 잠시 들여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때 그의 미간은 자신도 모르게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그리고는 무언가 깊은 상념에 잠긴 듯 입을 굳게 다문 채 허공의 한 점을 응시하고 있었다.
장내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으나, 누구도 큰 소리로 떠들거나 시끄럽게 하지 않아서인지 아주 조용했다. 간혹 몇 사람이 나직하게 소곤거리기는 했으나 분위기 자체는 연회에 어울리지 않는 무거운 것이었다.
하나 그것도 잠시, 몇 차례의 술잔이 돌자 점차로 주위가 소란스러워지면서 제법 연회다운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화려한 무대가 펼쳐졌다.
그 발단은 장내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차복승의 탄식에서 비롯되었다.
“아쉽구나. 정말 아쉬워.”
그렇지 않아도 너무 조용하고 차분한 연회의 분위기에 슬슬 지루함을 느끼던 석성이 작은 눈을 반짝이며 재빨리 그의 말을 받았다.
“차 대협께선 대체 무엇이 그리도 아쉬운 건지요?”
차복승은 주름진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허허. 오늘 이렇게 강호의 젊은 영웅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도 좀처럼 드문 일일 것이오. 이런 귀한 날을 그냥 술만 마시다 보내는 것은 너무 아쉽다고 생각하지 않소?”
석성은 반색을 하며 자신도 모르게 탁자를 두드렸다.
“정말 옳으신 말씀입니다. 저도 오늘 연회가 참석하신 분들의 화려한 면면과는 다르게 무언가 미진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차 대협의 말씀을 듣고 보니 왜 그렇게 느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석성이 호들갑을 떠는 바람에 주위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들에게로 향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