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31권 악산대전(嶽山大戰)편 : 1화
제 313 장 언중유골(言中有骨)
깊어가는 초여름 밤에 어두운 밤길을 걷는 것은 나름대로 운치 있는 일이다. 하나 그 옆에 시끄럽고 수다스러운 중년 남자가 있다면 운치는커녕 오히려 짜증만 날 것이다.
진산월의 심정이 지금 그러했다.
“진 장문인께서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검을 거두는 순간, 제 앞에 앉아 있는 분광검객의 얼굴이 정말 볼만하게 변하더군요. 캬아! 진 장문인도 그 표정을 보셨어야 했는데…….”
석성은 침까지 튀어가며 열심히 떠들어댔다.
“분광검객은 평소에도 쾌검으로 겨루면 모용 공자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할 만큼 절대적인 자신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번에 진 장문인의 솜씨를 보고는 하늘 밖에 하늘이 있음을 알았을 겁니다. 그 오만한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는 모습은 정말 통쾌하기 이를 데 없더군요. 흐흐…….”
그의 수다에 질린 낙일방은 아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조금 떨어져 걷고 있었다. 석성이 다시 무어라고 떠들려 할 때, 진산월의 조용한 음성이 들려왔다.
“대단하군.”
“예, 정말 대단한 솜씨였습니다.”
“내 말은 당신의 눈썰미가 대단하다는 뜻이오.”
“예?”
석성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묻자 진산월은 담담한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내가 검을 거두는 그 짧은 순간에 주위 사람들의 표정이 어떻게 변하는지 살펴볼 수 있었다니 당신의 그 예리한 안목과 빠른 눈썰미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구려.”
“아니 그건…….”
“그게 아니라면, 설마 많은 사람들 중에서 분광검객만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단 말이오?”
가뜩이나 땀을 많이 흘리는 석성의 얼굴이 온통 땀으로 흠뻑 젖어 들었다. 석성은 조그만 손수건으로 열심히 흐르는 땀을 닦으면서도 연신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다만 제가 앉아 있는 자리에서 고개만 쳐들면 분광검객의 얼굴이 보이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헤헤. 솔직히 말씀드리면 분광검객이 저 같은 상인들을 홀대해 왔기에 밉살스러운 마음에 좀 더 유심히 지켜본 것뿐입니다.”
무림의 고수들 중에 상인이나 장사꾼을 혐오하는 자들은 적지 않았다. 분광검객이 그런 성격의 소유자라고 해도 이상할 것은 하나도 없었다. 다만 진산월은 단지 그런 이유만으로 자신이 연무하는 동안 계속 분광검객을 주시하고 있다는 석성의 말이 그다지 믿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겠지.’
굳이 그 이유를 알고 싶지는 않았기에 진산월은 더 이상 석성을 추궁하지 않고 슬쩍 화제를 돌렸다.
“모용 공자가 무서워 피해 다녔다면서 그의 초대에 응한 것은 무엇 때문이오?”
석성은 물이 줄줄 흐르는 손수건을 쥐어짠 다음 다시 목덜미에 흥건히 고여 있는 땀을 닦기 시작했다. 무심코 주위를 둘러보다 그 모습을 목격한 낙일방이 준수한 얼굴을 찌푸린 채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으나, 석성은 전혀 부끄러워하거나 거리끼는 기색이 없이 이를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언제까지 도망만 다닐 수는 없고 기회를 봐서 납작 엎드려야지 하고 있었는데, 모용 공자께서 불러주시니 이를 두고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이라고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진 장문인까지 뵐 기회이니 저로서는 그야말로 황금줄을 잡은 셈이지요. 하하.”
석성이 얼굴이 일그러지도록 미소를 짓자 가뜩이나 작은 그의 눈이 실처럼 겹쳐져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당신이 나를 그토록 보고 싶어 했다니 의외구려.”
“진 장문인을 뵙고 싶은 것도 있었지만, 진 장문인이 옆에 계시면 모용 공자가 저를 못마땅해 해도 함부로 대하지 않을 게 아닙니까?”
“모용 공자가 왜 당신을 못마땅해 한단 말이오? 예전에 듣기로는 모든 빚을 깨끗이 정리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때 내가 잘못 들었던 거요?”
진산월이 당시의 일을 거론한 것은 그 일에 대한 내막을 보다 자세히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 진산월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 지 석성은 재빨리 그의 말을 받았다.
“아닙니다. 분명히 저는 그때 말씀 드린 대로 나름대로 깔끔하게 정리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의 상황이 요상하게 변해서, 혹시나 모용 공자께서 아직 제게 받을 빚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지레 짐작으로 걱정했던 거지요.”
“상황이 요상하게 변하다니?”
석성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한 차례 주위를 둘러보고는 한층 더 목소리를 낮추었다.
“사실은…… 제가 예전에 천축의 고문(古文)으로 쓰인 아주 오래된 서적 하나를 입수하였는데 그 번역 문제로 시비가 붙는 바람에 모용 공자께 빚을 지게 되었지 않습니까? 기억하시는지요?”
진산월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들은 기억이 나는군.”
“그때 저는 모용 공자께 빚을 갚는 방법으로 그 서적의 번역본을 모용 공자께 드렸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모용봉에게 맡긴 고서의 번역본을 목숨 빚의 대가로 돌려받지 않은 것이었다. 하나 진산월은 굳이 그 점을 지적하지 않고 묵묵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석성의 음성이 한층 더 낮게 가라앉았다.
“그 서적은 ‘환우지이록’이라는 것인데, 저는 우연히 그 서적에 한 가지 비밀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책자가 고대(古代)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몇십 년 전에 서장의 어느 고인(古人)이 작성한 것으로, 그 고인은 책자 안에 한 가지 무공에 대한 이론을 자기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숨겨 놓았다는 겁니다.”
목소리가 낮아짐에 따라 석성의 두 눈이 그 어느 때보다 영활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 무공은 가히 하늘도 놀라고 땅도 꺼질만한 엄청난 절학이어서, 만약 그 책자 안에 담겨진 무공을 익힐 수만 있다면 능히 천하를 오시할 수 있는 절세의 고수가 될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 고인이 누구요?”
“그것까지는 모르겠습니다. 불가(佛家)의 고승(高僧)이라는 말도 있고, 정체를 숨긴 일대기인(一代奇人)이라는 말도 있고……. 아무튼 그 말을 듣자 저는 그 번역본은 제가 가지지 않는 게 좋다고 판단했습니다. 예부터 보물은 죄가 없지만 사람은 죄가 있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무림인도 아닌 제가 굳이 그런 절학이 담긴 보물을 가지고 있어 봤자 하등 도움도 안 될 뿐더러 자칫 피를 부르기 십상이니 제게는 무용지물인 셈이지요.”
“그래서 모용 공자에게 빚을 갚는다는 핑계로 그 번역본을 돌려받지 않았던 거요?”
“헤헤. 지금 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사실 그렇습니다. 제게 필요 없는 물건을 주고 무거운 빚을 정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모용 공자 같은 분과 연을 맺을 수 있으니 저로서는 일거삼득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생각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았던 거로군.”
갑자기 석성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때는 모용 공자가 서장 야율척과의 일전을 앞둔 시기라 저로서는 그 비급이 있으면 야율척과의 일전에 큰 도움이 되리라고 판단했었습니다. 그런데 모용 공자가 그 대결에서 오히려 손해를 보았으니, 혹시라도 그 비급 때문에 그런 결과를 초래한 건 아닌지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지요.”
“그렇게 궁금했으면 모용 공자에게 직접 물어보면 되었을 게 아니오?”
석성은 펄쩍 뛰며 손사레를 쳤다.
“제가 어찌 모용 공자에게 그런 걸 대놓고 물을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모용 공자는 그 뒤로 구궁보에 칩거하여 좀처럼 강호에 나타나지 않는 바람에 저 혼자만 전전긍긍 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진산월은 잠깐 생각해 보았으나 석성의 말이 어디까지 사실인지, 그리고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모용봉이 과연 그 환우지이록의 번역본에 숨어 있는 그 무공을 익혔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다만 석성이 아주 없는 말을 지어내지는 않았으리라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또한 모용봉이 그 번역본을 석성에게 돌려주지 않은 것으로 볼 때, 그 안에 중요한 비밀이 숨어 있음을 모용봉도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과연 그 환우지이록을 작성한 괴인은 누구일까? 그리고 그는 왜 천축의 고문으로 환우지이록 내에 무공구결을 숨겨놓은 것일까? 그가 숨겨 놓은 그 무공구결은 석성의 말대로 천하를 놀라게 할 만한 광세절학이 분명한 것일까?
짧은 순간에 여러 가지 의문이 머리를 스치고 갔지만, 지금 당장 진산월이 궁금한 것은 한 가지 뿐이었다.
왜 하필이면 석성은 이 이야기를 자신에게 한 것일까?
우연히 과거사를 거론하다가 튀어나온 것처럼 보였지만, 석성은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이 분명했다. 뚱뚱한 체구에 항상 땀을 흘리고 있어 우습게 보이지만, 진산월은 석성이 누구보다 날카롭고 예리한 인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모든 행동과 말 속에는 치밀한 의도와 복잡한 계산이 숨어 있었다. 그것을 무시했다가는 자칫 그가 의도한 대로 끌려가거나 의외의 낭패를 당할 지도 몰랐다.
지금 진산월은 조용한 눈으로 석성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 속에는 보통 사람은 감당 못할 기운이 담겨 있었다.
석성은 그 시선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연신 땀을 흘리면서도 여전히 입가에는 미소를 매달고 있었다.
“진 장문인께서 그런 눈으로 저를 보시니 갑자기 마음이 불안해 지는군요. 제 이야기가 마음에 들지 않으셨나 봅니다.”
“아니, 재미있는 이야기였소. 모용 공자가 당신에게 한 말을 보니 그 번역본이 확실히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오.”
“그것까지는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진산월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당신은 정확히 알고 있었을 거요. 그러니 모용 공자의 초대에 응해서 오늘 연회에 당당하게 참석한 것이고.”
석성은 어이없다는 듯 입을 반쯤 벌렸다.
“아니, 그 책자가 모용 공자에게 도움이 되었는지 아닌지를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내가 아는 당신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모용 공자가 그 번역본의 무공을 익혔다는 걸 알아냈을 거요. 그런 확신이 없었다면 당신은 오늘 이곳에 오지 않았겠지.”
석성은 아니라는 듯 계속 도리질을 했으나, 진산월은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는 얼굴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당신은 겉으로는 아닌 척해도 사실은 누구보다 신중하고 치밀한 사람이오. 그러지 않았다면 지금의 위치에 있지도 못했겠지. 그러니 내 앞에서 굳이 그런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일 필요가 없소.”
석성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다가 이내 땅이 꺼질 듯 무거운 한숨을 토해냈다.
“휴우. 제가 이렇게까지 진 장문인에게 신용 없는 놈으로 보일 줄은 몰랐습니다. 이제껏 신용 하나만 믿고 여기까지 버티고 왔는데……. 그래도 한 가지는 믿어 주십시오. 전 진 장문인을 좋아합니다. 제가 지금까지 드린 말씀은 모두 진 장문인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기에 했던 겁니다.”
남자의 입에서 나오기에는 낯 뜨거운 말이었으나 말하는 석성도, 듣는 진산월도 별로 거북해하는 것 같지 않았다.
“정말입니다. 믿어주십시오, 진 장문인.”
석성이 무릎이라도 꿇을 것처럼 애타는 음성으로 말하자 진산월은 짤막하게 대꾸했다.
“당신이 믿는 만큼 믿고 있소. 그러니 그 점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시오.”
석성의 얼굴에 한 줄기 쓴웃음이 떠올랐다. 하나 이내 마음의 부담을 털어버린 듯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하하. 그렇게 말씀하시니 안심입니다. 저는 진 장문인을 절대적으로 믿고 있으니 말입니다.”
“당신은 도선출재로 화산파를 선택하여 지금까지 그들과 줄곧 거래를 해온 것으로 알고 있소. 그런데 종남파의 장문인인 나를 그렇게 믿고 있다니 만에 하나라도 화산파에서 이 일을 알면 그들이 무어라고 하겠소?”
진산월의 정곡을 찌르는 말에도 석성은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았다.
“제가 비록 화산파와 오랜 거래관계이기는 하나 거래는 거래일 뿐, 제가 누구를 좋아하고 싫어하고는 철저한 저의 소관이니 그들이 왈가왈부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마음을 놓으십시오, 진 장문인.”
옆에서 조용히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낙일방은 마치 절세의 미녀에게 구애를 하는 것처럼 진산월에게 달라붙어 있는 석성의 모습이 한심스럽기도 하고 어이가 없기도 해서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
‘왜 장문 사형은 저런 자를 딱 부러지게 내치지 않고 계속 상대해 주고 있는 것일까?’
낙일방은 석성같이 말 많고 믿을 수 없는 자를 진산월이 계속 상대해주는 것이 탐탁지 않았다. 다만 진산월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을 거라는 믿음 때문에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고 있을 뿐이었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석성은 잠시도 쉬지 않고 열심히 입을 놀리고 있었다.
“솔직히 화산파와는 제법 오랫동안 이런 저런 일로 자주 왕래를 해왔습니다만, 신기하게도 특별히 지내거나 친분을 쌓아둔 사람이 없습니다. 제가 사람 사귀는 게 서투르지도 않은데 정말 이상한 일이지요.”
그렇게 말하며 웃고 있는 석성의 얼굴에는 한 줄기 묘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유 소협과 동행한 것을 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소.”
진산월이 슬쩍 유장령과 나란히 연회에 참석한 것을 찔러 보았으나, 석성은 오히려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유 소협 말입니까? 모용 공자가 부른 다는 말에 허겁지겁 달려오다 마주치는 바람에 자리를 함께 하긴 했지만, 제대로 된 말 한 마디 나눠보지 못했습니다. 유 소협과는 이번이 세 번째 만남인데, 그동안 서로 주고받은 말이 열 마디도 안 될 겁니다.”
“신목령의 신목일호와도 안면이 있는 것 같은데, 그는 어떻게 알게 되었던 거요?”
다소 예민할 수 있는 질문에도 석성은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백 공자와는 신목령의 다른 고수들을 통해 소개를 받았습니다. 남들은 사파(邪派)라고 흉볼지 몰라도 사실 장사를 하는 입장에서 신목령의 고수들은 의외로 좋은 거래상대입니다. 맺고 끊음이 분명할 뿐 아니라 쓸데없이 잔머리를 굴리지 않아 골치를 썩일 일이 거의 없거든요. 가끔 무리한 요구를 하기는 하지만, 그건 그거대로 이용가치가 있습니다.”
“어떻게 말이오?”
“그런 요구의 저면에는 아직 무림에 알려지지 않은 은밀한 비밀들이 숨어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요구를 수행하다 보면…….”
진산월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남들이 모르는 비밀을 먼저 알 수 있게 된다는 말이로군.”
“그렇습니다. 그걸로 인해 큰 이득을 본 경우도 몇 번 있어서, 오히려 그런 무리한 요구가 들어오면 가슴이 설레기도 합니다. 헤헤.”
“최근에도 그런 요구가 있었소?”
진산월의 물음에 석성의 눈이 슬그머니 진산월을 향했다. 진산월은 피하지 않고 그 시선을 마주 보았다.
“말하기 곤란하오?”
석성의 얼굴에 다시 의미를 알기 어려운 미소가 떠올랐다.
“민감한 질문이긴 하지만, 진 장문인께서 물으시니 솔직히 말씀드리지요. 사실 최근에 조금 특이한 주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주문인지 알 수 있겠소?”
“몇 가지 기물들을 급히 찾아달라더군요. 그런데 하나같이 구하기 힘든 것들이어서 무척 애를 먹었습니다.”
“어떤 기물들이오?”
“취수정(翠水精)과 녹옥룡(綠玉龍), 그리고 칠채보원신주(七彩寶元神珠)입니다.”
“흐음.”
진산월은 그런 기물들의 이름만 얼핏 들어보았을 뿐, 정확히 어떤 효능이 있는 것들인지는 알지 못했다. 진산월이 자신의 말을 듣고도 관심을 기울이거나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자 석성이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세 가지 기물 모두 사람의 정신을 맑게 하고 심신을 안정시키는데 효과가 뛰어난 보물들입니다. 이 세 가지와 혈옥수(血玉樹)의 진액을 합쳐 대정사보(大靜四寶)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지요.”
“혈옥수라면? 남해 청조각의 그 혈옥수 말이오?”
“정확히 말하자면 보타산 불영곡에서만 자라는 나무입니다. 불영곡이 청조각 영내에 있어서 청조각의 고수들이 아니면 혈옥수의 수액을 구하기가 불가능하다고 알려져 있기도 하지요.”
석성이 이렇게까지 말하니 진산월도 장단을 맞춰줄 수밖에 없었다.
“혈옥수와 비견되는 물건들이라니 그 효능이 어떠한지 짐작이 가는구려.”
“진 장문인께서는 혈옥수를 잘 알고 계신 모양입니다.”
“일전에 잠시 어려움에 처한 적이 있었는데, 다행히 혈옥수를 지니고 있던 청조각 전인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겼소.”
“오, 청조각의 당대 전인이라면 소검후 이동심 소저를 말씀하시는 거로군요.”
“그렇소.”
진산월은 무심히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머릿속 한편으로는 석성이 대체 무슨 의도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지 알고자 했다. 석성이 은근히 자기의 호기심을 유도하여 이 일을 거론한 것은 달리 목적하는 바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 지금으로서는 그의 목적이 무엇인지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기물들을 모두 구했소?”
“아랫사람들을 달달 들볶아서 고생한 끝에 취수정과 녹옥룡은 간신히 입수할 수 있었습니다만, 아직 칠채보원신주는 구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의 솜씨라면 그 신주도 머지않아 구할 수 있을 거요.”
진산월의 칭찬에 석성은 히죽 웃었다.
“다른 사람의 말이라면 그저 입에 발린 소리라고 생각했겠지만, 진 장문인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꼭 실현될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헤헤.”
“신목령에서는 그런 기물들을 무엇 때문에 찾고 있는 거요?”
“엄밀히 말하면 신목령이 아니라 백 공자입니다. 이번 일의 의뢰부터 기물을 받는 사람까지 모두 백 공자이니 말입니다.”
“흠. 그럼 백 공자는 왜 그 기물들을 구하려는 거요?”
“그야 당연히 쓸 일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게 무엇이오?”
진산월의 거듭된 물음에 석성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자약하게 대답했다.
“그것까지는 제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 기물들이 정신을 보호하고 신지(神智)를 되찾는데 탁월한 효과가 있는 것으로 보아 백 공자의 가까운 지인 중에 정신을 잃은 사람이 있는 게 아닌가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진산월은 아직 석성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기에 재차 질문을 던졌다.
“그 기물들을 찾아주기로 한 대가는 만만치 않은 것이었겠구려?”
진산월이 은근한 눈으로 쳐다보자 석성의 얼굴에 모처럼 씁쓸한 빛이 떠올랐다.
“분명히 어려운 일인 만큼 만족스런 대가이긴 했습니다만, 오늘 보니 보수를 전부 받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왜 그렇소?”
“아무래도 칠채보원신주는 저보다도 백 공자가 먼저 찾아낸 것 같습니다. 그러니 처음 약정했던 보수를 제대로 받기는 물 건너간 셈이지요.”
그 말에 진산월은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그렇다면 연회장에서 백 공자가 당신에게 했던 말이?”
석성은 쓴웃음을 지으며 무거운 목살이 출렁거리도록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제게 제대로 일을 하지 않았다고 추궁하는 건 아직 칠채보원신주를 찾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질책이고, 그 일을 대신하느라 늦었다는 건 결국 자기가 해결했다는 의미 아니겠습니까? 처음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으니 저도 제대로 된 보수를 요구할 수 없어서 손해가 막심하게 생겼습니다.”
석성은 울상을 해 보였으나, 진산월의 눈에는 그것이 먹이를 앞둔 돼지의 탐욕스런 웃음처럼 보였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당신이 별로 억울해 하는 것 같지 않구려. 혹시 손해를 벌충할 방법이 있는 게 아니오?”
석성은 다시 한 차례 땀을 닦았다. 그때 그의 눈은 여느 때보다 영활하게 빛나고 있었다.
“역시 진 장문인의 눈은 속일 수가 없군요. 확실히 저는 이번 일에 입은 피해를 최소화할 방법을 알아냈습니다.”
“그게 무엇이오?”
“백 공자에게 도움이 될 이야기 하나를 알려주는 겁니다.”
“그 이야기가 칠채보원신주와 비교할만한 가치가 있다는 말이오?”
석성은 자신 있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겁니다. 어쩌면 백 공자는 더욱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지도 모르지요.”
“그게 무엇인지는 말할 수 없겠구려.”
“하하. 제가 아무리 진 장문인을 좋아한다고 해도 그걸 밝힐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백 공자 본인에게 승낙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는 말입니다. 진 장문인도 아시다시피 비밀이란 아무도 몰라야만 비로소 그 가치가 온전한 법이 아니겠습니까?”
“옳은 말이오.”
“다만 진 장문인과 아주 관련이 없다고는 할 수 없으니 한 가지만 살짝 말씀드리도록 하지요.”
진산월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나와 관련이 있는 일이라?”
“신목령의 고수 한 사람에 관한 일입니다.”
“신목령의 고수?”
진산월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자신과 관련이 있는 신목령의 고수는 오직 한 사람 뿐이다. 그리고 그때 석성은 눈도 깜박이지 않은 채 진산월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낮고 정확한 음성으로 말했다.
“진 장문인도 사 년 전에 만난 적이 있을 겁니다. 기억나시지요? 신목오호. 그 자에 관한 일입니다. 백 공자는 틀림없이 그 이야기를 칠채보원신주보다 높게 평가해줄 겁니다.”
석성과 헤어진 후 진산월은 낙일방을 숙소로 보내고 혼자 악자화와 만나기로 한 장소를 찾아갔다. 낮에 전흠을 통해 전해진 서신에는 자정 무렵에 만나자는 악자화의 글이 적혀 있었다.
자정이 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진산월은 내내 초조한 심정이 되었다. 그 서신을 받았을 때는 단순히 악자화가 모처럼 자신을 보고 싶어 한 줄로만 알았는데, 석성의 말을 듣고 보니 악자화의 신상에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던 것이다.
자정이 되어도 악자화는 나타나지 않았다. 진산월은 석성과 헤어질 때 그를 좀 더 추궁하지 못한 자신을 책망하며 계속 악자화를 기다렸다.
새벽 동이 조금씩 틀 무렵이 되어서야 비로소 진산월은 그 장소를 벗어났다. 여명에 비친 그의 얼굴은 여느 때보다 무겁게 굳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