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31권 악산대전(嶽山大戰)편 : 10화
제 322 장 장구원망(長久願望)
육천기가 패했다!
육천기의 패배는 단순한 일패(一敗)가 아니었다. 그것은 종남파가 일승이패로 막판에 몰렸으며, 자칫하면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성을 허물어뜨리고 구대문파로 복귀하지 못할 수도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목이 갈라진 처참한 모습으로 돌아온 육천기를 바라보는 종남파 고수들의 얼굴은 한결같이 어두웠으며, 경요궁 출신 고수들의 표정은 더욱 침통했다.
육천기의 부상은 심각했으나 다행히 응급처치를 한 후로는 당장 목숨이 위협받을만한 치명적인 상황은 벗어나 있었다. 비록 육천기의 패배로 벼랑 끝에 몰리게 되었지만, 종남파의 누구도 그를 탓하거나 원망하는 사람은 없었다.
육천기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것이다. 다만 좌군풍의 검이 조금 더 날카로웠을 뿐이었다. 아니면 그의 마음이 조금 더 단단했던지.
어쨌든 승부는 결정되었고, 종남파는 다음 출전자를 내보내야만 했다.
마침 형산파에서 네 번째 비무자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키가 큰 남삼 중년인이었다. 건장한 체구에 유난히 어깨가 넓었는데, 그래서인지 두 팔도 유독 길어 보였다. 헝클어진 머리에 거칠고 투박한 용모였는데, 내딛는 걸음 또한 외모만큼이나 패기무쌍함이 물씬 느껴졌다.
그를 보자 중인들 틈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아! 절영검 비성흔이다!”
“원공검법의 최고수가 나왔구나. 형산파에서 이번에 승부를 결정지으려고 단단히 작정을 한 모양이구나.”
절영검 비성흔!
그도 또한 기산취악 당시에 출전했던 인물이었다. 그때 그는 사결에 위치에 있었는데, 당시 종남파의 장문인이었던 천치검 하원지를 불과 십여 초 만에 격파하여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 공으로 그는 오결에 올랐으며, 그 후로 각고의 노력을 거듭 하여 원공검법에 관한 한은 누구나가 인정하는 형산파 최고의 실력자가 되었다.
오결 내에서 그는 가장 나이가 어린 축에 속했으나, 무공 실력만큼은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고 있었다. 더구나 그는 지금도 적지 않은 고수들과 실전에 가까운 비무를 벌이곤 해서, 실제로 싸운다면 조화신검 사견심과도 맞설 수 있을 거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래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를 훗날 오결검객 중의 일인자가 될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형산파에서 비성흔이 나오자, 종남파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한 사람에게 쏠렸다.
그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사람은 다름 아닌 전흠이었다.
전흠은 사차전의 비무자로 이미 내정(內定)되어 있었으며, 진산월은 오랜 숙고 끝에 그런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전흠의 실력이 아직 형산파의 오결 검객을 감당할 수준이 아님을 알고 있는 진산월로서는 어떤 식으로든 그에게 무거운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고민했으며, 사차전이라면 승부의 추가 종남파 쪽으로 기울어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낙일방과 성락중, 그리고 육천기의 세 사람 중 적어도 두 사람은 승리할 거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그는 사전에 성락중에게 그 점에 대한 양해를 구하기도 했다. 사숙인 그가 사질인 전흠보다 먼저 비무에 나서게 된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진산월의 의도대로 이승일패로 종남파가 앞서는 상황이었다면 전흠이 지고이기는 것은 전체적인 승부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 것이고, 전흠 또한 커다란 중압감을 느끼지 않고 비무에 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오히려 자신의 뒤에 진산월이 버티고 있다는 것에 용기를 얻어 아무런 부담 없이 자신의 실력을 십분 발휘하여 의외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상황은 진산월의 기대와는 달리 오히려 종남파가 일승이패로 막다른 골목에 몰리고 말았다. 전흠의 부담감을 덜어주려고 일부러 네 번째 비무자로 선정했는데, 그에게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무거운 중책이 맡겨지게 된 것이다.
만약 전흠이 패하게 된다면 종남파는 가장 강력한 패인 진산월을 써보지도 못하고 일승삼패로 형산파와의 비무에서 패배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진산월이 전흠 대신 사차전에 나서게 된다면 마지막 승부가 벌어질 오차전의 승패를 전혀 장담할 수가 없게 된다.
전흠의 얼굴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핼쓱하게 굳어 있었고, 눈빛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조금 전 육천기의 패배가 결정되었을 때만해도 전흠은 흔들리는 마음을 억지로나마 굳게 다지고 있었다. 오결검객의 누가 나오든 반드시 승리하여 승부를 장문인인 진산월에게 넘기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몇 번이고 되새기고 있었다.
그런데 형산파에서 출전하는 남삼 중년인을 보는 순간, 그런 그의 결심은 너무도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그 남삼 중년인은 어제 보았던 원영만기의 주인이었던 것이다. 자신이 상대해야 할 자가 지금의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넘볼 수 없는 가공할 검기의 흔적을 남긴 인물임을 알게 되자 전흠은 눈앞이 캄캄해지며 전신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단순히 그 자의 검이 무섭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패배가 겁이 나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자신이 패하게 되면 그 오랫동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종남파는 형산파에게 무릎을 꿇게 된다는 것이 두려웠을 뿐이었다.
종남파가 이 자리에 오기 까지 얼마나 험한 길을 겪어왔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전흠으로서는 자신의 패배로 종남파의 그 모든 여정이 무위로 돌아가고 패배가 확정되는 상황을 감히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장문인을 비롯한 종남파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는 이때, 전흠은 믿어 달라는 말과 함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야 마땅했다. 하나 무릎은 돌이 된 듯 전혀 움직이지 않았고, 입에서는 쇳물을 부은 듯 어떠한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전흠의 뇌리에 종남파의 본산에서 형산파에 승리했다는 소식만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을 늙은 조부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신과 함께 무서운 혈전을 치루며 사선을 넘나들었던 여러 사형제들의 모습도 하나 둘씩 떠오르고 있었다.
그들 모두는 간절한 염원의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염원이 무엇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그로서는 도저히 그들의 눈빛을 뿌리칠 수 없었다.
차라리 전혀 모르는 자가 상대로 나왔다면 최후의 역전을 꿈꾸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질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 운명의 장난인지 형산파의 네 번째 비무자는 하필이면 지금의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바로 어제만 해도 그가 남긴 무공의 흔적을 보고 전율에 몸을 떨었는데, 과연 그와 검을 겨루고 문파의 미래를 건 승부를 할 수 있겠는가? 자신의 검으로 그 가공할 원영만기를 꺾을 수 있겠는가?
만약 자신이 패한다면……, 패한다면…….
마침내 전흠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씹어뱉는 듯한 음성을 토해냈다.
“빌어먹을……. 나는 저 자를 이길 자신이 없단 말입니다.”
아마 전흠으로서는 죽기보다도 하기 힘든 말이었을 것이다.
진산월은 참담한 얼굴로 고개를 떨구는 전흠을 굳이 탓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한 가닥 탄식이 흘러나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역시 내가 나서야 하는가?’
당장 눈앞에 다가온 네 번째 비무를 이기지 않고서는 다음을 기약조차 할 수 없었다. 하나 그렇게 된다면 마지막의 비무는 누가 감당한단 말인가?
진산월은 문득 종남파의 본산을 지키고 있을 소지산이 그리워졌다.
부질없는 짓 인줄 알면서도 이곳에 없는 한 사람의 얼굴을 잠시 떠올렸던 진산월은 패자처럼 고개를 숙인 채 떨고 있는 전흠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됐다. 이번에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의 속삭이는 듯한 조용한 음성이 귓전에 들려왔다.
“걱정 말고 이번에는 나에게 맡기세요, 전 사제.”
그와 함께 한 줄기 바람이 일렁이며 한 사람이 장내로 날아올랐다.
중인들이 놀라 보니 종남파의 뒤쪽에 앉아 있던 누군가가 허공을 날아 비성흔의 앞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순식간에 십여 장의 거리를 훌훌 날아가는 그 모습에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 대단하다!”
“정말 놀라운 신법이다. 저게 대체 무슨 신법이지?”
그것이 월녀보의 최고 경지인 월녀유람산영(越女遊覽散影)임을 알아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종남파 고수들의 놀라움은 더욱 더 큰 것이었다. 단숨에 비성흔 앞에 내려선 사람은 다름 아닌 임영옥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출현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한수의 강변에서 잠깐 신위를 발휘하고는 내내 몸이 성치 않아서 바깥출입조차 거의 하지 않았던 임영옥이었지만, 이번 형산파와의 비무 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의 두 눈으로 꼭 지켜봐야겠다는 그녀의 의사를 진산월조차도 꺾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비무 내내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종남파 고수들의 뒤편에 그린 듯 조용하게 앉아 있었다.
낙일방이 예상치 못했던 용선생에게 분패를 했을 때도, 성락중이 악전고투 끝에 어려운 승리를 거두었을 때도, 그리고 육천기가 처참한 모습으로 피를 뿌리며 쓰러졌을 때도 그녀는 그저 말없이 장내의 광경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그녀가 결정적인 순간에 홀연히 몸을 일으켜 비무에 나선 것이다.
동중산은 자신도 모르게 진산월을 돌아보았다.
임영옥의 상태가 어떠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진산월이 그녀의 출전을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녀의 상세가 중인들의 예상보다 훨씬 더 심각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진산월의 허락을 얻지도 않고 출전을 강행했다.
동중산은 혹시나 그녀가 사전에 진산월과 어떤 식으로든 교감을 나누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감에 진산월의 표정을 살폈으나, 이내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평상시와는 달리 딱딱하게 굳어 있는 진산월의 얼굴만 보아도 그녀가 진산월과는 전혀 사전 상의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대체 사고께서는 무슨 생각으로…… 아니, 그 전에 장문인께서 과연 사고의 출전을 허락하실지…….’
동중산은 진산월의 굳은 표정으로 보아 그가 임영옥을 다시 불러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나 진산월은 그 자리에 석상처럼 우뚝 선 채 그녀를 바라볼 뿐 어떠한 말도,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때 진산월의 두 눈에 스쳐가는 복잡한 감정의 빛은 눈치 빠른 동중산조차도 미처 알아보지 못했다.
지금 진산월의 심정을 무어라고 표현해야 할까?
진산월도 처음부터 그녀의 출전을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사 년 전에도 이미 종남파의 제일고수였으며, 지금에 와서는 장강십팔채의 총채주를 단숨에 쓰러뜨릴 만큼 절정의 실력을 지닌 고수가 되었다. 그녀라면 아마도 형산파의 오결검객 한 사람은 감당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 그녀의 체내에 도사린 음기는 여전히 강력했고, 언제든 활화산처럼 솟구쳐 오를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녀가 무공을 쓸수록 그 음기는 더욱 매섭게 그녀의 몸을 갉아먹을 것이 뻔했고, 자칫 심각한 내상이라도 입게 되면 아무리 뛰어난 명의가 와도 폭발하듯 솟구치는 음기를 다스리지 못할 게 너무도 분명했다.
그래서 그는 이번 비무에 대한 임영옥의 갈망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녀의 출전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지금 종남파의 운명을 건 너무도 중대한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그녀의 키는 여인답지 않게 훤칠했고 뒷모습은 늘씬했으나, 그에게는 한없이 여리고 가냘프게만 느껴졌다.
그는 당장이라도 뛰어나가 그녀를 제지하고 싶었다. 그녀에게 더 이상 걱정하지 말라고, 나를 믿고 자리로 돌아가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나 그럴 수가 없었다. 뒷자리를 뛰쳐나가기 직전, 기척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돌렸다가 마주친 그를 향한 그녀의 눈빛에 담긴 감정을 가슴 절절이 느꼈기 때문이다.
그녀의 염원. 선사의 염원. 이십 년 전의 그날부터 그들 모두가 너무도 간절하게 바라왔던 그 염원…….
그녀의 눈에 담긴 그 애틋하고 결연한 염원의 빛을 그가 어찌 모른 척 외면할 수 있겠는가? 그 아닌 누가 그녀의 그 오랜 염원을 이해해 줄 수 있겠는가?
진산월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유난히 시리도록 파란 하늘이 눈을 찔렀다. 진산월은 그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하늘 너머의 누군가를 향해 소리 없는 외침을 토해냈다.
‘사부님! 제자는 어찌해야 합니까?’
진산월은 묻고 또 물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늘은 그저 한없이 창연(蒼然)할 뿐이었다.
비성흔은 칼날같이 예리한 시선으로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막판에 몰린 종남파의 처지를 고려해 볼 때 신검무적이 나올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상대로 출전한 사람은 뜻밖에도 여인이었다. 자신의 상대로 종남파에서 여자를 내보냈다는 것에 대해 비성흔은 별다른 감정의 동요를 나타내지 않았다.
비무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신검무적 대신 출전한 여인이 평범한 사람일리는 없었다.
그래서 비성흔은 좀 더 안력을 돋우어 눈앞의 여인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좀처럼 보기 힘든 뛰어난 미모의 여인이었다. 약간은 창백한 피부로도 그녀의 고아한 아름다움을 감출 수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 때문에 그녀의 아름다움이 더욱 돋보이는 것인지도 몰랐다.
십여 장의 거리를 단숨에 날아왔음에도 그녀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차분한 표정에 깊게 가라앉은 눈빛은 그녀의 성정이 얼마나 침착하고 냉정한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 비성흔은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또한 그녀가 결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은연중에 발출한 무형검기를 정면으로 받고도 표정 하나 흔들리지 않고 그것을 감당해 낸다는 것은 그녀가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검도 고수임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대체 종남파에서 어떻게 이런 고수들이 계속 나올 수 있는 거지? 그동안 종남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비성흔은 형산파의 오결에 대한 확고한 자신감이 있었다. 그들 모두가 당대 무림의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절정의 검객들임을 장담할 수 있었다.
그런 오결들 중에서도 최고 수준의 검객들이 출전했음에도 종남파는 그들에 필적하는 고수들을 줄지어 내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비성흔은 종남파의 저력에 대해 새삼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초가보의 공격으로 본산마저 잃고 멸문에 가까운 참변을 당했다는 소문을 들은 것이 불과 일 년도 되지 않았는데, 종남파는 어느 새 강호의 그 어떤 세력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힘을 가진 문파가 되어 있었다.
형산파의 늙은 장로들이 왜 그렇게 변변치 않은 종남파에 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는지 알 것 같은 심정이었다. 또한 이번에 종남파를 꺾지 않으면 어쩌면 형산파는 영원히 종남파의 그늘에 가려 뒤쳐질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마음 한 구석에 피어올랐다.
비성흔은 한동안 뚫어지게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가 거칠고 험상궂은 외모답지 않게 그녀를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형산파의 십이대 제자인 비성흔이오. 비원검객(飛猿劍客) 오자명(吳紫明)을 사사했소.”
비원검객 오자명은 전대의 형산파 오결검객 중 한 사람으로, 원공검법의 대가로 알려져 있는 인물이었다.
비성흔이 자신의 사승(師承)을 밝힌 이유는 너무도 분명했다. 그녀의 신분을 통해 무공내력을 조금이라도 더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그녀는 담담한 표정으로 그에게 답례했다.
“종남파 이십일대 제자 임영옥이에요. 선부께서는 태평검객 임장홍이십니다.”
비성흔의 눈에서 번쩍하는 신광이 흘러나왔다.
“이제 보니 전대의 장문인이셨던 임 대협의 따님이셨구려. 몰라 뵈어 죄송하오.”
말을 하면서도 비성흔의 머릿속에는 어지러운 생각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태평검객 임장홍은 자신이 꺾은 천치검 하원지의 제자로, 하원지의 뒤를 이어 종남파의 장문인이 된 인물이었다. 사람 좋은 하원지 만큼이나 성품은 좋은 편이었으나, 무공 실력은 대단치 않아서 종남파의 몰락을 제대로 막지 못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런 임장홍의 딸이 비무의 상대로 자신 앞에 나선 것은 단순한 우연일까, 아니면……?
변변치 않은 무공을 지닌 임장홍에게서 그녀와 같은 뛰어난 고수가 배출되었다는 것도 의문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스릉!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장검이 유연한 검광을 뿌리며 뽑혀 나왔다.
검을 쥔 그녀의 모습만 보아도 비성흔은 자신의 짐작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뼈골이 시릴 듯한 차가운 기운이 코끝을 지나 온 몸의 피부를 따갑게 했다. 정말 대단한 무형검기가 아닐 수 없었다.
비성흔은 그녀에게서 흘러나오는 무형검기를 맞으면서도 인상을 찌푸리기는커녕 오히려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를 머금었다.
우연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그녀가 하원지의 복수를 위해 나섰든 그러지 않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건 그녀가 자신에 필적할만한 검도의 고수라는 것이며, 비슷한 수준의 검객과의 싸움에서 자신은 단 한 번도 뒤로 물러서거나 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싸움은 내가 이긴다. 종남파가 본 파를 넘어서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비성흔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출검을 했다.
차앙!
그녀와는 다른 날카롭고 예리한 검명이 주위에 울려 퍼졌다.
☆ ☆ ☆
임영옥은 차분한 눈으로 비성흔을 주시했다.
비성흔의 외모는 거칠고 투박해 보였으며, 풍기는 기세는 더할 수 없이 날카롭고 예리했다. 큰 키와 유난히 긴 두 팔을 보고 있자면 그 팔에서 휘둘러지는 검격의 위력이 어떠할지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었다.
얼마나 그의 검이 빠르고 매서웠으면 ‘그림자를 자르는 검’이라는 별호가 붙었겠는가?
그는 사부인 오자명도 완성하지 못한 원공검법을 대성한 청출어람(靑出於藍)의 인물이며, 피를 마다하지 않는 연무로 실전에서도 최고의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절정의 검객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와 마주서고 보니 절정 검객을 상대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이제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전신의 모공이 모두 일어서고 혈관 속에 흐르는 피가 싸늘히 식어가는 듯 했다. 호흡조차 멈춰 버릴 것 같은 압박감이 전신을 무겁게 짓누르고 신경 세포 하나하나가 곤두서는 듯한 그 느낌은 좀처럼 경험하지 못한 것이었다.
마치 수백, 수천 개의 날카로운 칼날 위에 서 있는 것 같다고나 할까?
‘사형은 항상 이런 상대들과 싸워온 것이구나.’
임영옥은 이런 고수들과 수없는 싸움을 펼쳐왔을 진산월을 떠올리자 마음 한 편이 무거워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어깨에 지워진 무거운 책임을 조금이라도 나누어 갖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한 세월이 너무도 아쉬웠다.
이제 비로소 그녀는 작게나마 진산월을 위해, 그리고 종남파를 위해 헌신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자리를 박차고 나왔을 때 자신을 돌아보던 진산월의 표정이 잊히지 않았다. 스치듯 지나친 일별(一瞥)이었으나, 그녀는 그의 마음과 머릿속 생각을 훤히 알 수 있었다. 그도 또한 그러했을 것이다.
‘사형은 이해해 줄 것이다.’
자신이 이런 날이 오기를 얼마나 기다려 왔는지…… 몰락했던 종남파가 다시 일어서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아야만 했던 자신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자신이 왜 이런 선택을 해야만 했는지…….
사형이라면 이해해 줄 것이다.
스릉!
그래서 그녀는 자신 있게 검을 뽑을 수 있었다.
손에 검이 쥐어지고 차가운 검광이 피어오르자, 문득 그녀의 뇌리에 오래전의 어느 날이 떠올랐다.
종남산에 모처럼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던 그 날, 고사리 같은 자신의 손에 처음으로 날카로운 빛을 뿌리는 검이 쥐어졌다.
그리고 그 손을 꼬옥 잡아 준 한 사람이 있었다.
“검을 무섭다고 여기지 마라. 네가 검에 마음을 여는 순간, 검은 더 이상 날카로운 흉기가 아니게 된다.”
그때 그녀는 조그만 음성으로 물었다.
“그러면요?”
남루한 행색의 그 사람은 그녀를 향해 빙긋 미소 지었다.
“검은 네 평생의 동반자가 되어줄 것이다.”
그때 그 사람의 미소가 어쩌면 그리도 밝게 빛났던지.
임영옥은 한참이나 그를 올려다보고 있다가 수중의 검을 힘껏 움켜잡았다.
그리고는 마음속으로 소리 높여 외쳤다.
‘검을 동반자 삼아 본 파를 꼭 일으켜 세우고 말거야.’
그때의 외침이 아직도 귓전에 메아리치는 듯 했다.
그리고 그때 그 사람의 미소가 지금도 눈앞에 선연히 떠오르는 것 같았다.
임영옥은 그 사람의 미소 띤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아버님. 보고 계시나요?’
그 사람은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늘 지켜보고 있단다.’
‘저는 두려워요.’
‘누구나 검을 앞에 두면 두려울 수밖에 없단다.’
‘…….’
‘그럴 때는 네 동반자를 믿거라. 그동안 그 동반자와 함께 어려운 길을 걸어오지 않았느냐?’
‘내 동반자…….’
‘그래. 그 녀석은 거짓을 모르거든. 네가 그와 함께 흘린 땀만큼 그는 너를 지켜줄 것이다.’
차앙!
모골이 송연해지도록 날카로운 검명과 함께 비성흔의 허리춤에서 검이 뽑혀 나왔다.
단순히 검을 쥔 것만으로 비성흔은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가 발출하는 무형검기 또한 훨씬 더 강력하고 살벌한 기세를 뿌리고 있었다.
임영옥은 피부가 따갑도록 맹렬한 기세를 뿜어내며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비성흔을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전혀 흔들리거나 격동되지 않았다. 그저 한없이 평온하고 담담한 심정이었다.
멀리서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너를 믿고, 네 동반자를 믿어라. 그리고 네 뒤에는 산월이 있지 않느냐?’
임영옥은 빙긋 미소 지었다.
그녀를 향해 다가오던 비성흔이 뜻밖의 미소에 몸을 움찔하는 순간, 그녀는 그를 향해 먼저 달려들며 수중의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악산대전 중 가장 치열하면서도 놀라운 싸움이 시작되었다.
<3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