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31권 악산대전(嶽山大戰)편 : 2화
제 314 장 심야혈전(深夜血戰)
짙은 어둠이 사방을 무겁게 짓누르는 밤이었다.
마안거(馬安居) 또한 밤의 정적에 깊게 잠겨 있었다.
마안거는 장안성에서 북쪽으로 이십 리밖에 있는 오래된 마장(馬場)으로, 세워진 지는 백 년이 훨씬 넘었다. 한때는 서안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번창했으나, 지금은 쇠락하여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상주하는 식솔들도 그다지 많지 않았고, 거래를 위해 찾아오는 상인들도 별로 없어서 장안성 사람들의 뇌리에서 점차로 잊혀져가는 곳이었다. 다만 어둠 속에 우뚝 서 있는 십여 채의 크고 작은 건물들이 한때 마안거의 성세가 제법 대단했음을 조용히 말해주고 있을 뿐이었다.
주위가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마안거를 바라보는 일단의 무리들이 있었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은 마안거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얕은 언덕 위였다.
갑자기 마안거의 한쪽 건물에서 작은 불길이 일어났다. 그 불길은 이내 때마침 불어오는 밤바람을 타고 무섭게 번지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마안거의 여기저기에서 크고 작은 불이 피어올랐다.
“불이야!”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마안거의 건물에서 사람들이 뛰어나와 불길을 잡으려 했다. 하나 그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게다가 밤바람이 생각보다 거세어서인지 불길은 좀처럼 쉽게 잡히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거세게 타올라서 이대로 가다가는 마안거 전체가 화염에 휩싸여 한 줌의 재로 변할 것이 분명해 보였다.
마침내 불길이 마안거의 중앙에 있는 세 채의 커다란 건물 주변까지 번질 때였다. 갑자기 세 건물 중 한 곳에서 십여 개의 인영이 빠른 속도로 튀어나왔다. 그들의 몸놀림이 어찌나 빠르고 민첩한지 주위를 환히 비추는 불길 속에서도 제대로 모습을 확인할 수 없을 정도였다.
눈부신 동작만큼이나 그들의 행동도 신속해서 그 십여 개의 신형이 이리저리 움직이자 그토록 세차게 타오르던 불길이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 순간, 언덕 위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무리들 중 가장 키가 작고 체구가 왜소한 인물이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어둠 속에 내비치는 그의 두 눈에서는 보기만 해도 섬뜩한 안광이 살벌하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드디어 꽁꽁 숨어있던 쥐새끼들이 꼬리를 드러냈구나. 시작하게.”
“예, 대형.”
그의 뒤에 서 있던 비쩍 마른 체구에 얼굴이 유난히 길쭉한 사내가 한쪽으로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수십 개의 검은 그림자가 불쑥불쑥 일어났다. 그들은 순식간에 마안거의 주위를 철통같이 에워싸고는 마안거의 중앙에서 튀어나온 십여 개의 인영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마안거 주위는 타오르는 불길과 거친 고함소리,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뒤엉켜 난장판으로 변해 버렸다. 처절한 비명과 피분수가 사방을 수놓는 가운데, 순식간에 시신이 되어 쓰러지는 자들이 속출했다.
전쟁터처럼 변한 장내를 유심히 바라보던 왜소한 체구의 인물은 이내 그들 중 한 사람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유난히 우람한 체구를 지닌 흑의인 하나가 무시무시한 솜씨로 마안거를 공격하는 장한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그의 주먹이 휘둘러질 때마다 한두 명의 장한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나가 떨어졌다.
그들이 모두 자신의 수족과도 같은 수하들임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왜소한 체구의 인물은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얼굴 가득 진득한 미소를 머금었다.
“흐흐. 최동, 결국 네가 숨은 곳이 여기였구나. 명년 오늘이 네 제삿날이 될 것이다.”
그의 음성에는 숨길 수 없는 득의만면함이 담겨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바로 적류문의 문주인 혈음도 마강이었고, 무서운 주먹을 휘두르고 있는 흑의인은 흑선방의 방주인 최동이었다.
최동과 함께 나타난 인물들 또한 흑선방의 수뇌들임이 분명했다. 종적을 몰라 그토록 애를 태우던 최동을 마침내 발견했으니 마강으로서는 하늘을 나는 것처럼 기분이 붕 뜰 수밖에 없었다.
하나 마강은 흥분되려는 마음을 억지로 가라앉히며 냉정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흑선방의 우두머리들이 이곳에 있음을 안 이상, 오늘 모든 일을 완벽하게 마무리 지어야 하네. 무슨 희생이 따르더라도 저들 중 단 한 놈도 놓쳐서는 안되네. 모두 각오는 되어 있겠지?”
마강을 둘러싸고 있는 장한들은 마강의 의형제들이었다. 외부에 나가 있는 한 명을 제외한 일곱 명의 형제들은 모두 결연한 표정으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검단현이 그들에게 준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오늘 흑선방을 없애지 못한다면 자칫 그 시간을 넘길지 몰랐다. 그렇게 되면 검단현은 결코 그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이 지겨운 싸움을 끝내러 가세.”
마강은 먼저 몸을 돌렸고, 이내 형제들도 그를 따라 신형을 움직였다. 막 장내를 떠나기 직전, 마강은 슬쩍 한 곳을 바라보았는데, 그들에게서 멀지 않은 짙은 어둠 속에 한 사람이 유령처럼 서 있는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그 사람과 시선이 마주친 마강은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내 형제들과 함께 마안거를 향해 몸을 날렸다.
빠른 속도로 언덕을 내려간 마강은 막 자신의 수하 하나를 격살하고 있던 최동을 향해 정면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언제 뽑아들었는지 그의 손에는 작은 체구에 어울리지 않은 커다란 도가 쥐어져 있었다.
파파파팍!
도에서 뿜어지는 빗발 같은 도기들이 순식간에 최동의 몸을 그대로 갈라버릴 듯 했다. 하나 최동은 커다란 덩치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유연한 동작으로 슬쩍 옆으로 몸을 움직여 너무도 수월하게 도기의 공세에서 벗어나 버렸다.
마강은 숨 쉴 사이도 없이 재차 최동을 향해 달려들며 연거푸 수중의 칼을 무시무시하게 휘둘렀다. 그가 펼치는 도법은 혈음십이도(血飮十二刀)라는 것으로, 그가 험한 뒷골목 생활을 거치며 여기저기서 짜깁기한 초식들로 만든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웅장하거나 정교한 맛은 부족하지만, 그만큼 살기등등하고 잔혹하며 상식을 초월하는 기괴한 수법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마 여타의 무림인들이었다면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반드시 상대의 숨통을 끊어놓고야 말겠다는 마강의 살벌한 수법에 크게 당황하거나 기가 질렸을 것이다. 하나 아쉽게도 그의 상대는 다름 아닌 최동이었다.
최동은 평생을 아수라장 같은 거친 흑도의 칼바람 속에서 살아온 사람이었다. 제아무리 무섭고 악랄한 무공이라도 그의 마음에 두려움을 주지는 못했다.
최동은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마강의 도법을 응시하고 있다가 솥뚜껑만한 주먹을 불끈 쥐고는 세차게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의 주먹은 다른 사람의 주먹보다 두 배는 더 큰데다 온갖 흉터로 뒤덮여 있어서 보기만 해도 모골이 송연할 지경이었다. 그 큰 주먹이 일단 움직이자 마치 거대한 철퇴가 휘둘러지는 듯한 엄청난 위력이 느껴졌다.
도기에 스친 최동의 팔뚝에서 핏물이 뿜어져 나왔으나, 최동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강의 콧등을 향해 주먹을 내뻗었다.
마강 또한 싸움이라면 질리도록 경험한 인물답게 최동의 무시무시한 주먹에도 전혀 물러서지 않고 계속 혈음십이도의 초식들을 펼치며 정면으로 맞서갔다. 덕분에 그의 콧등이 최동의 권경(拳勁)에 스치며 시뻘건 코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럼에도 마강은 오히려 얼굴 가득 징그러운 미소를 지은 채 계속 혈음도를 휘둘렀다. 최동 또한 두 팔이 피로 물들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두 주먹을 풍차처럼 휘두르고 있었다.
격돌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두 사람의 몸은 그야말로 유혈이 낭자했다. 수비는 거의 도외시한 채 오직 상대의 숨통을 끊어놓기 위해 벌이는 두 사람의 싸움이 어찌나 살벌했던지 그들의 주위에는 누구도 제대로 접근하지 못했다.
그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도 치열한 격전이 벌어지고 있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싸우는 와중에도 연신 최동과 마강의 무시무시한 혈전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처음 마주쳤을 때부터 지금까지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서로를 죽이기 위해 맹렬한 공격을 가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그야말로 처절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나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우열이 판가름 나기 시작했다.
최동의 주먹은 여전히 위력적으로 마강을 위협하고 있었으나, 마강의 칼은 속도가 확연히 떨어져 당초의 매서움을 조금씩 잃어버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공과 체력 면에서 모두 최동이 마강을 앞서고 있는 게 분명했다.
마강의 동생들 중 가장 무공이 고강한 셋째 은일엽(殷一燁)은 흑선방의 조일당 당주인 흑서 추풍과 싸우고 있었는데, 추풍의 무공 또한 그에 못지 않아서 승패를 전혀 짐작할 수 없는 팽팽한 흐름을 유지하고 있었다.
추풍과 서로 정신없이 공방(攻防)을 주고받으면서도 틈나는 대로 최동과 마강의 싸움을 주시하던 온일엽은 시간이 흐를수록 마강이 열세를 보이자 절로 초조한 심정이 되었다.
‘제길. 마 대형의 실력으로도 최동을 당해내지 못하는 건가? 그나저나 그 작자는 왜 아직까지 콧빼기도 안보이는 거야? 우리가 몽땅 죽어야 나설 참인가?’
그의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누군가가 장내로 뛰어들었다. 그 인영의 움직이는 속도는 그야말로 섬전과도 같아서, 장내의 누구도 그의 움직임이 어떠한지 정확히 알아본 사람이 없었다.
파파파팍!
그와 동시에 시퍼런 섬광이 피어올라 곧장 최동의 몸을 덮어갔다.
최동은 갑자기 전신이 빙굴(氷窟)속에 빠져든 듯 싸늘해지며 사방이 온통 섬광에 휩싸이자 안색이 굳어지며 전력을 다해 두 주먹을 풍차처럼 휘둘렀다.
“크압!”
기합인지, 비명인지 모를 거센 음성이 그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꽝!
주먹과 섬광이 마주친 소리라고는 믿기지 않는 엄청난 굉음이 장내를 뒤흔들었다. 그와 함께 최동의 커다란 몸이 술 취한 사람처럼 휘청거리며 뒤로 정신없이 물러났다.
중인들이 놀라 보니 최동의 상반신 옷자락이 수십 군데나 갈라져 웃통을 벗은 것과 차이가 없을 정도로 변해 있었다. 그 찢긴 틈 사이로 수십 가닥의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어 그야말로 혈인(血人)을 방불케 했다.
그런 상태에서도 최동은 인상 하나 찡그리지 않고 오히려 날카로운 눈으로 자신 앞의 인영을 쏘아보고 있었다.
언제 나타났는지 그의 앞에는 얼굴이 유난히 새하얀 백의인 한 사람이 우뚝 서 있었다. 백의인은 제법 준수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으나, 입술이 얄팍하고 눈빛이 차가워서 한 마리 독사를 보는 듯 섬뜩한 느낌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최동은 갈가리 찢겨 넝마처럼 변한 웃옷을 벗어 버리고 자신의 몸에 나 있는 크고 작은 상처들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상처들은 검도 아니고 도나 륜(輪)에 베인 것도 아닌, 다소 기이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최동은 평생을 수라장 속에서 살아온 인물답게 단번에 자신의 몸을 누더기처럼 만들어버린 상처가 무엇으로 인한 것인지를 알아보았다.
‘조(爪)인가? 당대에 내 흑살진기(黑煞眞氣)를 뚫고 이런 상처를 남길 수 있는 무공이라면……?’
그는 문득 고개를 들어 눈앞의 백의인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을 받자 백의인은 천천히 자신의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그의 오른손 손톱은 유난히 길었는데, 자세히 보면 그 끝에 핏물이 아롱거리고 있었다. 백의인은 무심히 그 손을 자신의 입가로 가져가더니 손톱 끝에 묻은 핏물을 혀로 햝기 시작했다.
뱀의 그것처럼 기다란 혓바닥으로 피를 핥고 있는 그의 모습은 괴이하면서도 사람들의 마음에 은은한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손톱 끝의 피를 모두 햝은 백의인이 입맛을 다셨다.
“장안의 흑도를 석권한 자라고 해서 무언가 특별한 맛을 기대했는데, 별로 다를 게 없군.”
그의 음성은 새하얀 얼굴만큼이나 가늘고 뾰쪽해서 흡사 여인의 고성처럼 들렸다. 그래서 사람들을 더욱 두렵게 만들기도 했다.
최동은 묵묵히 백의인을 응시하고 있다가 돌연 무거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게 탈명조(奪命爪)인가?”
백의인은 무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살짝 맛만 보여줬는데, 어떻던가?”
“소문보다는 못하군. 듣기로는 한 번 움직이면 살을 가르고 뼈를 부순다고 하던데, 내 뼈는 아직 멀쩡한 것 같으니 말이야.”
백의인의 하얀 얼굴에 희미한 실선이 그려졌다. 얼음장처럼 차갑고 서늘한 미소였다.
“듣던 대로 배짱도 좋고 뼈마디도 제법 단단한 것 같군. 장안 흑도의 우두머리다워. 하지만 내 앞에서는 그런 건 통하지 않는다는 건 너도 알거다.”
최동은 물론 알고 있었다.
아무리 최동이 흑선방의 방주로 장안의 흑도를 지배해 왔다고 해도 눈앞의 백의인에 비하면 달빛에 비친 촛불과도 같은 신세일 뿐이었다.
최동이 아닌 누구라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악살 장병기 앞에 서면 고양이를 만난 쥐처럼 한없이 나약하고 비루한 존재가 되고 말 것이다.
악살 장병기.
소문삼살의 막내로, 나이는 이제 갓 서른을 넘었을 뿐이었다. 하나 그가 강호에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 것은 십여 년 전인 그의 나이 열아홉 살 때부터였다.
약관도 되지 않은 어린 나이에 강호에 출도한 장병기는 불과 삼 년 만에 강호인들이라면 이름만 들어도 치를 떠는 무시무시한 살명(殺名)을 떨치게 되었다. 심성이 잔인하고 냉정할 뿐 아니라 일단 손을 쓰면 상대를 거의 갈가리 찢어놓다시피 하는 악독한 무공 때문에 더욱 유명해졌다. 더구나 그는 천하제일살성이라 불리며 무림인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우내사마 중의 소마 신지림이 아끼는 제자여서 명성이 자자한 강호의 명숙들도 직접 상대하기를 꺼려했다.
흑도 무리들간의 싸움에 장병기 같은 거물이 끼어드는 경우는 결코 흔치 않았다. 더구나 장병기는 오만하고 잔혹한 성품 때문에 마도(魔道)는 물론 흑도에도 친분이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알려져 있었다.
최동은 장병기가 어떻게 적류문의 편을 들게 되었는지 궁금했으나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일단 장병기가 자신을 공격한 이상, 그가 무슨 연유로 적류문에 가세했는지는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당한 만큼 갚아주는 것이 흑도의 법칙이었다. 설사 그 대상이 강호인들이 두려워하는 희대의 살성이라고 해도 말이다.
장병기 또한 최동에게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어 보였다. 그는 분을 바른 것처럼 새하얀 얼굴에 진득한 살기를 머금은 미소를 지으며 느릿느릿 최동을 향해 다가왔다.
“귀찮은 건 딱 질색이니 이제 그만 끝내도록 하자.”
양손을 늘어뜨린 채 방만한 자세로 다가오는 장병기의 모습은 거들먹거리며 뒷골목을 어슬렁거리는 무뢰배를 연상케 했다.
최동은 얼음장처럼 차갑고 냉정한 눈으로 그를 보고 있더니 짤막한 한 마디를 툭 던지듯 입밖으로 내뱉었다.
“네 상대는 내가 아니다.”
장병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막 최동을 향해 무어라고 입을 열려던 장병기가 갑자기 어느 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화광(火光)이 일렁이는 건물의 짙은 그늘 속에서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훤칠한 체구에 칙칙한 흑의를 입은 삼십대 초반의 인물이었다. 그의 손에 들린 고색창연한 검의 손잡이에 매달린 붉은 수실이 불빛에 비쳐 유난히 시선을 끌었다.
장내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뒤엉켜 있었지만, 누구도 그 흑의인이 언제부터 그곳에 서 있었는지를 알지 못했다.
장병기는 우두커니 그 흑의인을 바라보더니 이내 입꼬리를 말며 웃었다. 독사의 그것처럼 보는 이를 섬뜩하게 만드는 냉혹한 웃음이었다.
“이거 재미있군. 이런 한 수를 준비해두고 있었다니 말이야. 과연 장안을 주름잡던 흑도라 이건가?”
흑의인은 묵묵히 그의 앞으로 걸어오더니 이 장의 거리를 두고 우뚝 섰다. 그 모습을 본 장병기의 눈빛이 어느 때보다 차가워졌다.
이 장은 장병기 같이 맨손의 박투(搏鬪)를 즐기는 사람이 직접 공격하기에는 약간 먼 거리였다. 반면에 흑의인처럼 검을 쓰는 자라면 발을 움직이지 않고도 상대를 검세 속에 가둘 수 있는 아주 예민한 거리였다.
간격을 잡는 것만 보아도 흑의인이 상당한 실력을 지닌 검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명소졸은 아닌 것 같고. 누구냐, 넌?”
흑의인은 말없이 수중의 검을 뽑아 들었다.
스릉!
미약한 음향과 함께 그의 손에는 차가운 한광을 뿌리는 검이 쥐어졌다. 타오르는 화광이 검에 비치니 기이한 광망이 흘러나왔다.
장병기의 눈이 화광만큼이나 강하게 번뜩거렸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아는 방법이 있지.”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꺼져 버렸다. 최소한 중인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 순간, 눈부신 검광이 주위를 어지럽혔다.
검광은 이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중인들은 영문을 몰라 눈을 크게 뜨고 앞을 바라보았다.
흑의인은 여전히 장검을 든 채로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고, 장병기 또한 원래의 자리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찌 보면 두 사람 모두 전혀 움직이지 않고 중인들만 엉뚱한 상상을 한 듯한 착각이 들었다.
하나 가만히 살펴보면, 흑의인의 왼쪽 옆구리 옷자락이 찢어져 속살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장병기의 손가락에 찢어진 흑의가 쥐어져 있는 것을 보고 나서야 중인들은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 있었다.
휘잉!
한 차례 바람이 불자 이번에는 장병기의 우측 소맷자락이 너풀거리더니 장병기의 팔뚝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 팔뚝에는 붉은 색 실선이 종횡으로 그려져 있었는데, 그 실선 사이로 한 두 방울씩 선혈이 맺히고 있었다.
장병기는 붉게 물들어가는 자신의 팔뚝을 슬쩍 내려다보더니 이내 괴이한 웃음을 흘렸다.
“흐흐. 갑자기 ‘검이 일단 움직이면 눈앞에 염왕(閻王)이 나타난다’라는 강호의 오래된 속담이 떠오르는군. 네가 펼친 게 혹시 그 염왕검법(閻王劍法)이 아니냐?”
흑의인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염왕검법이라는 말에 그들을 지켜보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크게 놀라 안색이 굳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염왕검법은 마도의 최고 검객이라 불리는 우내사마 중의 검마 금옥기의 성명절학(聲名絶學)이었던 것이다.
얼마나 많은 강호의 검객들이 금옥기의 염왕검법에 전신이 난자당한 채 피를 뿌리며 쓰러졌는지 모른다. 한 번 펼쳐지면 도저히 피할 여지도 주지 않고 상대를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뜨리는 가공할 위력 때문에 마치 염왕의 현신(現身)을 보는 것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 염왕검법이었다.
흑의인의 나이로 보아 검마 본인은 아님이 분명했다.
장병기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흑의인을 응시하며 물었다.
“검마 금 선배에게 두 명의 아들이 있다는 말은 들었지. 너는 둘 중 누구냐?”
굳게 다물어져 있던 흑의인의 입술이 처음으로 살짝 열리며 표정만큼이나 무심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둘이 아니라 셋이다. 그리고 나는 둘째인 금조명이라 하지.”
장병기는 피식 웃었다.
“셋이라? 그새 또 하나가 늘었군. 대체 금 선배는 무슨 생각으로 허접한 놈들을 자꾸 거두어 들이는 지 모르겠단 말이야.”
“나도 소마 선배에게 세 명의 망나니 같은 제자들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셋째가 가장 졸렬하다는 말을 들은 것 같군.”
“흐흐. 입담이 제법 대단하군. 부디 칼솜씨도 그 입담만큼 날카롭기를 기대하겠다.”
장병기가 슬쩍 어깨를 흔들며 앞으로 움직이려 할 때, 금조명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저들에게서 무얼 받기로 했나?”
장병기의 몸이 아주 자연스럽게 멈추었다. 기운의 수발이 너무 매끄러워서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그냥 장병기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것으로 착각했을 것이다.
하나 무공을 보는 안력이 뛰어난 인물들은 장병기의 내공이 이미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몸을 움직이는 의형수형(意形隨形)의 경지에 올라있음을 깨닫고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강호를 주름잡는 절정의 고수들에게서나 가끔 볼 수 있는 상승(上乘)의 경지였던 것이다.
장병기가 강호 전역에 악명을 자자하게 떨치고 있다고 해도 내공이 높은 경지에 올라있다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잔인한 손속과 악랄한 무공의 소유자로만 알려져 있던 장병기가 절정의 경지에 오른 내공의 고수라는 건 누구도 쉽게 예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장병기는 기광이 일렁이는 눈으로 금조명을 응시하다가 차가운 음성을 내뱉었다.
“마침 내가 필요한 게 있어서 말이지. 그런 너는?”
금조명의 대답은 짤막했다.
“형제의 부탁이라고 해두지.”
얼핏 장병기의 얼굴에 냉소가 떠올랐다.
“그놈의 형제. 검마가 따로 고아원이라도 차렸나? 저런 흑도의 조무래기들도 검마의 자식이 되는 건가?”
장병기에 비아냥거림에도 금조명의 무심한 표정은 전혀 변화가 없었다.
“최소한 돈 받고 움직이는 누구보다는 낫지.”
장병기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한층 더 짙어지며 말로 형용키 어려운 지독한 살기가 꿈틀거렸다.
“돈 따위로 내가 움직일 거라고 생각했단 말이지? 나를 너무 우습게 봤군.”
“아니면 기물(奇物)인가? 그러고 보니 소마 선배가 오랫동안 찾고 있던 물건이 하나 있다고 들었는데…….”
금조명의 말은 채 이어지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장병기의 손이 빛살 같은 속도로 그를 향해 날아왔기 때문이다.
“함부로 나불거리는 입을 찢어주지.”
장병기의 손은 정말 빨랐다. 장내의 누구도 그의 손이 정확히 금조명의 어디를 노리고 날아드는지 알지 못했다. 심지어는 아직도 두 사람이 마주보고 선 채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자들도 있었다. 그만큼 장병기의 공격은 갑작스러웠고, 상상도 못할 만큼 빠르고 매서웠다.
금조명의 오른손이 까닥거렸다. 그와 함께 한 줄기 날카로운 검광이 밑에서 위로 솟구치듯 피어올랐다. 막 갈고리처럼 오므린 손으로 금조명의 목덜미를 움켜잡으려던 장병기가 재빨리 손을 거두어 들였다.
팟!
검광이 아슬아슬하게 그의 손등을 스치며 핏물이 뿜어져 나왔다. 하나 장병기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거두었던 손을 재차 내뻗었다. 그 동작이 어찌나 빨랐던지 처음부터 손을 움직인 것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였다.
금조명은 목을 옆으로 이동시키며 수중의 장검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파파팍!
눈부신 검광이 폭죽처럼 피어오르며 장병기의 전신을 위협했으나, 장병기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워낙 가까워서 검법 본연의 위력이 충분히 발휘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선공(先攻)의 이점이 충분히 살아있는 상황이었다.
삽시간에 두 사람은 벼락같은 몇 초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금조명의 몸이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단순한 두 걸음에 불과했으나, 그것이 상징하는 바는 적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과 같은 가까운 거리에서의 접근전에서는 아무리 검마의 후예인 금조명이라도 장병기의 박투를 감당하지 못한다는 걸 증명하는 것이었다.
장병기는 틈을 주지 않고 더욱 가까이 다가가며 금조명의 목덜미를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그가 사용하는 탈명조는 일단 걸리기만 하면 사람의 몸을 종잇장처럼 찢고 근육과 뼈를 절단내 버리는 무시무시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더구나 장병기는 탈명조를 사용하는 와중에도 틈틈이 팔꿈치를 휘둘러 금조명의 턱을 공격했는데, 그때마다 금조명은 간신히 그 공격을 피해내고 있었다.
그 팔꿈치 공격은 전륜겁백(轉輪劫魄)이라는 것으로, 팔꿈치를 사용하는 공격 중에서 가장 잔인하고 무서운 위력을 지닌 무공중 하나로 알려져 있었다.
금조명은 몇 차례의 살인적인 공격을 피했으나, 그 바람에 자세가 흐트러지고 옷의 여기저기가 찢겨져 낭패한 모습이었다. 찢어진 옷자락 사이로 드러난 그의 피부는 시커먼 멍이 들어 있어서, 스치듯 지나간 장병기의 공세가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를 여실히 나타내주고 있었다.
휘잉!
다시 한 차례 장병기의 팔꿈치가 아슬아슬하게 금조명의 콧등을 스치듯 지나가자 금조명의 코에서 시뻘건 핏물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금조명은 코피를 지혈하려는 듯 오른손을 옆으로 움직였는데, 장병기는 조금도 방심하지 않고 왼쪽으로 몸을 이동시켰다.
아니나 다를까? 소리도 없는 검광 한줄기가 조금 전만해도 장병기가 서 있던 공간을 휩쓸고 지나갔다.
장병기는 검광이 지나감과 동시에 다시 앞으로 다가서려 했다. 그때, 무언가 시뻘건 것이 그의 눈앞으로 다가들었다.
천하의 장병기도 그때는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게 뭐야?’
장병기는 황급히 보법을 밟으며 뒤로 한 걸음 이동했다. 자신의 눈앞을 지나치는 그 시뻘건 물체의 정체를 알아본 장병기의 눈살이 자신도 모르게 찡그려졌다.
그 물체는 다름 아닌 핏물이었다. 금조명은 검초를 발출하면서 자신의 코에서 흘러나오는 핏물 쪽으로 검기를 움직여 적절한 순간에 장병기를 향해 날려 보냈던 것이다. 장병기조차 상상도 못했던 절묘한 수법이 아닐 수 없었다.
장병기가 한낮 핏물에 놀라 후퇴한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 안면을 굳히며 앞으로 달려들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은 후였다.
그 찰나의 순간에 금조명은 어느 새 적절한 거리로 물러난 채 완벽한 자세를 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제대로 해보자.”
냉랭한 음성과 함께 금조명의 검이 가공할 기세를 품고 장병기의 목덜미를 찔러왔다. 단순한 앞 찌르기 같았는데, 그 순간 장병기는 전신이 빙굴에 빠진 듯한 싸늘함을 느끼고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듯 짧은 한 마디를 외쳤다. 사부에게서 오랫동안 지겹도록 들어온 검마의 무서운 초식 중 하나가 뇌리에 떠올랐던 것이다.
“염왕초혼(閻王招魂)?”
드디어 금조명이 염왕검법의 절초를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